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자본론≫: 생생한 진리ㆍ자본가계급의 공포

 

채만수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소장

 

* 이 글은 현대사상연구소 간, ≪현대사상 27: 자본≫(2022. 06.)에 게재된 글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절대금서 ≪자본론≫

 

≪자본론≫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둡고 쓰라리다. 그것도 무척 무척 어둡고 쓰라리다. ≪자본론≫에 대한 이러한 아픈 기억은 비단 나 개인의 것만은 필시 아닐 터이다.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 정권의 시대,1) 그러니까 저들이 무척이나 요란하게 내세우던 “민주주의”ㆍ“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칠흑같이 어두웠던 퐈쑈ㆍ야만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사회는 도대체 어떻게 구성되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그리고 어떻게 해서 어떤 과정을 밟아 오늘날의 사회에 이르렀으며, 그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어떤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를 진정으로 탐구하고자 했던, 사실상 모든 사람의 기억도 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유”가 어떻고, “민주주의”가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하는 저들의 목소리가 높았던 만큼이나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이 금서(禁書)로 되어 있었지만, 특히 ≪자본론≫은, 말하자면, 절대금서(絶對禁書)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본론≫은, 그 부피ㆍ분량이 엄청 커서, 사실상 어디에서 구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설사 어떻게 어떻게 그 일부라도 구하더라도 어디 숨겨놓고 읽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자본론≫을 가지고 있다가 저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절대금서’를, 저들의 표현으로 하자면, 소지한 대가를 혹독히 치르기 십상이었다. 즉, 그 유통 내력을 추적하여 그에 직접ㆍ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은 물론이요 그 주변의 ‘찍힌’ 사람들도 함께 ‘반국가단체’로 엮여 고문ㆍ징역, 그리고 정말 운수가 사나우면, 사형이라는 대가까지도 치르기 십상이었다.

 

곁가지이겠지만 그래도, 검찰총장을 하시던 분께서 “공정과 상식”, “자유”ㆍ“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나아가서는 “반지성주의 배격”까지 내세우시며 대통령(大統領)의 직에 사실상 직진해 계실 뿐 아니라, 충성스러운 검찰 간부 출신들이 권력의 심장부에 속속 진출, ‘검찰 정부’니, ‘검찰 공화국’이니 하는 세칭까지 나도는 마당이니 아니할 수 없는 말인데, 수십 년 동안 이러한 정치적 이유의 고문ㆍ징역ㆍ사형이 낭자한 ‘자유민주주의’ 상태가 독하게 유지돼온 데에는, 그리고 사실은 엄청난 학살이 낭자할 수 있었던 데에는, 누구보다도, 검찰(!), 그리고 법원(!)이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저들이, 다른 건 다 그만두고, ‘상식’을 조금이라도 지켰던들, 정치적 이유의 고문ㆍ징역ㆍ사형이 그토록 낭자할 수 있었겠는가? 엄청난 학살이 그토록 낭자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필시 코메디 혹은 지나친 과장으로 들리겠지만, 당시는 ‘계급’이라는 말은 일등병ㆍ이등병 … 대장ㆍ중장ㆍ소장 … 어쩌구 하는 군대의 그것에나 사용하는 단어였지, “자본가계급”이 어쩌구 “노동자계급”이 어쩌구 했다가는 자칫 오라를 지고 검찰, 법원으로 끌려가는 사단이 나기 일쑤이기도 했다. 당연히 검찰과 법원이 “공정과 상식”에 충실했고, “공정과 상식”, “자유”ㆍ“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나아가서는 “지성주의”의 성실한 수호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저들은 “공정과 상식”, “자유”ㆍ“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나아가 “반지성주의 배격”까지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가히 賊反荷杖!

 

 이 사회에서의 ≪자본론≫의 해금

 

이 사회에서 ≪자본론≫은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겨우 이러한 절대금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직접적으로는 1980년 광주민주항쟁ㆍ광주학살이 계기가 되어 80년대 중엽부터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노동자ㆍ민중항쟁, 그리고 그와 궤도를 같이하며 벌어졌던, 역사ㆍ사회과학 ‘부활ㆍ쟁취’ 운동으로서의 ‘한국 사회 성격 논쟁’ 즉 ‘사회구성체 논쟁’의 성과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자본론≫을 읽고, 연구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패배주의’적으로 말하자면, 국내ㆍ외 독점자본의 입장, 정치적으로는 그들의 지배 도구의 입장에서는 보면, 다음 두 가지가 주요하게 고려되었을 것이다.

 

첫째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면화ㆍ고도화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거대화. ― 4월 혁명을 압살한 1961년의 군사쿠데타는 당연히 민중의 저항을 불러왔지만, 그 민중의 저항이 부마항쟁이라는, 저들의 입장에서 볼 때, 파국적인 저항으로 발전하기까지는, 그리하여 모처의 결정으로2) 쿠데타의 수괴를 즉결처분하여 정권이 붕괴되기까지는 18년여가 걸렸다. 다름 아니라, 1950년 전쟁을 전후한 엄청난 학살로 뿌리 채 뽑히다시피 한 민중적 역량이, ≪자본론≫이 절대금서가 될 정도의 퐈쇼적 억압으로 부활ㆍ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인구의 태반을 차지하던 농민 즉 소농층이 급격히 분해ㆍ몰락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급격히 발전ㆍ전면화하기 시작했고, 이는 주요 도시로의 인구 집중, 특히 노동자 및 실업ㆍ빈민층 인구의 대대적인 집중과 그에 따른 노동자ㆍ민중 역량의 급성장으로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1979년의 전두환ㆍ노태우 등등에 의한 12ㆍ12 쿠데타는 계엄령 하(下)였음에도 사실상 곧바로 강력하고도 끈질긴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불과 수개월 후인 1980년 5월에는 대대적인 전국적 저항에 부딪혀, 마침내 광주의 학살극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학살극ㆍ계엄의 강화는 사실은 저항을 더욱 심화시켜 80년대 중반이 되면 다시 대대적인 투쟁이 벌어지게 되고, 마침내 6월 항쟁에서 그 절정에 달했고, 다시 7-9월에는 이 사회의 노동운동 역사상 최대의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1980년대 중반 이후의 대투쟁이, 부르주아 정치라고 하는 측면에서, 87년 6월 항쟁에서 그 정점에 달하자, 당시 시중에는 ‘전두환이 언제 계엄을 선포할 것인가’를 설왕설래하는 상황이었는데, 역시 그 ‘모처’의 판단ㆍ결정에 따라서였겠지만, 계엄을 선포하는 대신에, 혹은 계엄은 선포되지 ‘못하고’, 민중의 민주화 요구에 대한 예의 기만적인 ‘항복’이었던 노태우의 ‘6ㆍ29 선언’으로 지배ㆍ정권의 위기를 수습해갔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7-9월의 노동자 대투쟁도 ‘관리’하였다.

 

1980년 광주항쟁ㆍ학살 이전이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군사독재정권의 대처였다. 과연 왜 그랬을까?

계엄을 선포하여 과거와 같은 강압책으로 나왔다가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면화ㆍ고도화와 그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거대화, 노동자ㆍ민중 역량의 급성장으로,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 정도가 아니라, 자칫 자본의 지배체제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를 거대한, 노동자ㆍ민중의 항쟁을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판단ㆍ고려가 필시, 역시 그 ‘모처’에,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는, 저들의 이데올로기 지배력. ― 하지만, 위와 같은 판단ㆍ고려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대중에 대한 이데올로기 지배력에 자신감이 없었다면, 저들은 어떤 무리를 해서라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특히 절대금서 ≪자본론≫을 위시한 역사ㆍ사회과학 서적들을 슬그머니 해금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 서적을 금지하는 데에 따른 저항과 투쟁은 직접적으로는 주로 일부 인텔리겐차들에 한정되어 있는 반면에, 저들의 이데올로기 지배력이 취약할 경우 그 해금의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들이 역시 80년대 말에 그들 서적을 슬그머니 해금했던 것은, 수십 년간에 걸친 사상ㆍ학문의 통제와 일방적인 교육ㆍ선전 등을 통해서 이제 대중을 충분히 우민화했다고 판단했기3) 때문이었을 것이고, 특히 무엇보다도, 교육기관은 물론, 신문ㆍ방송이라는 거대하고 고도로 발달한 대중조작 수단을 틀어쥐고 있어서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지배하는4) 데에 자신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이데올로기 상황을 보자면, 누가 보더라도, 저들의 그러한 자신감은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물론 우리에게 이데올로기 투쟁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상이, 퐈쇼의 극악한 사상ㆍ학문ㆍ이데올로기 통제ㆍ억압과의 투쟁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그야말로 맘만 먹으면 ≪자본론≫을 읽고 연구할 수 있게 된 간략한 정황인데, 애초에 이 사회, 이 국가에서 ≪자본론≫이 절대금서가 된 계기를 상기하는 것도 자못 흥미롭다.

 

특히 박정희 정권 시대에, 정작 미 ‘본국’에서는 반미를 외치든, 숭배ㆍ친미를 외치든, 정치적ㆍ법률적 억압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나 여기 이 나라에서는 반미를 외쳤다간 반공법상 ‘동조’죄로 처벌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일제 시대’에도 정작 일 ‘본국’에서는 ≪자본론≫이 합법적으로 출판ㆍ판매되고, ‘자유롭게’ 연구ㆍ토론되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자본론≫이 출판되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다. 분명 총독부 당국과 그에 충성하는 자들, 식민 지배 앞잡이들의 사상ㆍ학문에 대한 식민지적 탄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자본론≫이 절대금서였다는 기록도 보지 못했고, 그런 이야기도 들은 바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식민지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고 옹색하게였겠지만, 아무튼 ≪자본론≫을 읽고, 연구하고, 토론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쌓인 성과도 있고, 또 무엇보다도 ≪자본론≫에 대한 선진노동자ㆍ지식인들의 갈증도 있고 하여, 일제로부터의 ‘해방 정국’에서는 ≪자본론≫이 번역ㆍ출판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4권의 분책으로 출판된 제1권의 제1분책이 출판된 것이 1947년 6월 30일, 그 제4분책이 출판된 것은 1948년 4월 20일이었다. 그리고 분명 2권의 분책으로 기획되었을 제2권의 제1분책(제2편의 끝인 제17장까지)이 출판된 것이 1948년 7월 15일인데, 그 제2분책은, 그리고 물론 제3권은 번역ㆍ출판되지 못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미국, 아니 대한미스라엘5)이 건국되어 그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겠는가?

 

 

 ≪자본론≫은 왜 절대금서가 되어야 했는가

 

그럼 이 사회에서 ≪자본론≫은 왜 절대금서가 되어야 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다음 두 가지 사정 때문이었다.

첫째로는, 건국 당시 이 사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자본주의적 생산은 아직 그다지 거대하지도, 그 수가 많지도 않은 몇몇 도시와 광산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을 뿐, 인민의 절대다수는 지주-소작 관계라는 봉건적 관계6)에 편재되어 있던 봉건사회였지만,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포위되었을 뿐 아니라 장기간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은 반봉건사회여서 인민의 생활이 그야말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던 점.7)

 

그리고 둘째로는, 그러한 사회ㆍ경제적 조건 속에서,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반영하여,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을 둘러싼 ‘좌-우익’ 간의 투쟁, 즉 노동자ㆍ농민을 중심으로 한 인민적ㆍ민족적 세력과 자본가ㆍ지주와 그 하수인들로 구성된, 제국주의 추종 지배세력 간의 투쟁이 가히 극한적으로, 극한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점.

그러한 정세, 그러한 조건 속에서,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역사ㆍ사회비(非)과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역사ㆍ사회과학을 허용한다는 것, 더구나 그 정점에 있는 ≪자본론≫의 연구ㆍ학습ㆍ토론을 허용한다는 것, ― 그것은 분명 타오르는 불에 부채질하는 꼴, 아니, 기름을 붓는 격이 될 터였다.8)

≪자본론≫을 연구ㆍ학습ㆍ토론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우선 그것을 연구ㆍ학습ㆍ토론하는 사람들이 역사 발전과 이 사회의 구성 및 그 운동의 깊이 감추어진 비밀을 간취(看取)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비밀이 점차 인민대중 속에 폭로되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인민대중이 과학적 의식으로 무장하고, 과학적으로 투쟁해나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회에서 ≪자본론≫이 절대금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본론≫ 그것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는 진실ㆍ진리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본론≫ 그것이 대중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독점자본가계급을 포함한 자본가계급 일반에게는 물론이요, 지주계급을 포함하여 노동자들에게서 착취하는 잉여노동ㆍ잉여가치로 살아가며 부를 쌓고 있는 계급들 일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공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간략하게 말한 사정들 때문에, 저들이 지금은 ≪자본론≫의 출판과 판매, 그리고 그 연구ㆍ학습ㆍ토론을 금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연구ㆍ학습ㆍ토론 등을 최소한의 사람들로 한정하고, 대중에 대한 그들의 전파력을 최대한 차단하려는 작업은 당연히 음으로 양으로 집요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대표자들은, 자신들은 부르주아지라는 특정한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일반 혹은 국민 일반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자처하고 강변하는 것처럼, 부르주아 사회의 공인(公認)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진리 일반의 담지자, 그 대변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공인 ‘사회과학’ 지식인들은, 예컨대, 교수 혹은 지배적 언론의 논객으로서의 공인의 권위를 후광으로 삼아, 그리고 공인의 교육기관과 지배적 언론을 통해서, 자신들은 ≪자본론≫ 등 맑스주의 역사ㆍ사회과학을 두루 숙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러저러한 면에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며 따라서 오류로 판명이 나 있는 지 오래다는 식으로,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점잖게 넌지시 주장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자본론≫ 등 맑스주의 역사ㆍ사회과학의 영향을 차단한다.

 

물론 자신들이 ≪자본론≫ 등 맑스주의 역사ㆍ사회과학을 두루 숙지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들은, 그것이 직설적인 것이든, 넌지시 풍기는 것이든, 철저한 거짓, 철저한 사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주장은 대개 성실한 학자적 고민, 학자적 논구의 결과인 것 같은 외관을 보여주는데, 그 수법은 이렇다. ― 즉, 어느 누군가가 사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예컨대, ≪자본론≫ 등을 거론하면서 어떤 거짓을 발명해 놓으면, 이제 다른 논자ㆍ논객들은 ≪자본론≫ 상의 어떤 내용을 반박한답시고, ≪자본론≫ 자체의 내용ㆍ서술을 논박의 대상이나 전거(典據)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발명품을 논박의 전거로 제시한다. 그리고 당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문서고에는 그러한 발명품들이 쌓이게 되고, 그들의 저작ㆍ발언들은 갈수록 더 화려한 전거로 포장되면서 권위를 자랑하게 된다. 갈수록 더 대중과 성장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자본론≫ 등 맑스주의 역사ㆍ사회과학의 영향을 차단하면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력을 강화한다.

이는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어디에서나 유서 깊은 관행이요 지적 전통이다.

 

 

‘진보’ ≪한겨레≫ 속의 한 세계적인 ‘진보적’ 지식인

― 친노동자적 감성으로 포장된 그의 무지 범벅

 

이제 부르주아 사회의 유서 깊은 저러한 지적 전통ㆍ관행이 어떤 놀라운 ‘진보적’ 지식인을 양성해 내놓는지를, 하나의 예를 통해서 구경해보자. 이는 동시에 ≪자본론≫에 무지하면, 그리하여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사회비과학의 전문가 즉 그 희생자가 되어 역사ㆍ사회과학에 무지하면, 설령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려는 ‘선의’를 가졌더라도, 그 선의는 그저 선의일 뿐, 즉 무지일 뿐, 어떤 어이없는 말씀을 하시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기도 하다.

 

지난 5월 18일에 ≪한겨레≫는 “인플레이션 시대의 노동과 노동의 가치”9)라는, 일견 진보적이고 친노동자적인 글을 싣고 있는데, 필자는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이라는 사람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어떤 기관인가? 한국의 노동자들에게도 친노동자적인 것으로 각인되어 있는, UN(국제연합)의 전문기구다. 그런데 필자가 그 고용정책국장이라니, 가히 한국이 낳은 고용정책 문제의 국제적인 권위자, 어쩌면 필시 경제학의, 혹은 경제학이 아니더라도 아무튼 사회과학의 권위자이고, 우리가 검토하는 글은 그러한 권위자의 글이다.

그리고 이 글10)은, 그 제목 “인플레이션 시대의 노동과 노동의 가치”가 말해주듯이, 요즘 한창 우리 사회뿐 아니라 세계적인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라 있는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물가-임금의 문제, 즉 자본 측과 노동자 측의 대립ㆍ갈등을 다루고 있는 것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한 가지를 미리 말해두자면, 방금 위에서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사회과학, 아니 그 사회비과학의 지적 전통ㆍ관행과 그 수법을 소개했는데, 이 글은 그 내용에서는 철저히 그러한 지적 전통ㆍ관행과 그 수법의 산물이면서도, 그 형식은 그 수법을 담고 있지 않다. 즉, 그러한 전거 아닌 전거들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다. 일간지에 게재하는 짧은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글 “인플레이션 시대의 노동과 노동의 가치”는, 방금 말했듯이,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물가-임금의 문제, 즉 자본 측과 노동자 측의 대립ㆍ갈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임금 문제와 관련하여 ‘친노동자적’ 관점ㆍ여론을 배양하려는 게 대표적인 ‘친노동자적’ 국제노동기구의 고용정책국장이신 필자와 ‘진보’ ≪한겨레≫의 핵심적 집필ㆍ게재의 의도, 선의의 의도일 터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필시 ‘친노동자적으로’ 임금 문제를 다루겠다는 이 글의 제목이 “… 노동과 노동의 가치”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글 속에서 무엇이 문제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부분, 혹은 필자 스스로 “다소 근본적인 문제”라고 간주하고 있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보자면, 이렇다.

 

“우선, 다소 근본적인 문제다. 생산 단가가 전체적으로 증가하면 기업들은 비용 증가분을 가격에 반영한다. 석유값이 오르면 주유소에서는 일제히 기름값을 올린다. 소비자로서 개인적 불만이 없지 않겠지만, 대부분 ‘자연스러운 경제행위’로 받아들인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물가 인상으로 생활비가 늘어나면 이에 따라 임금을 올리려고 한다. 임금이란 생산성 향상에 따른 보상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가 육체적ㆍ정신적 생산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요구도 ‘자연스러운 경제행위’다. 그런데11) 기업의 ‘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는 높지만,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행위’는 ‘부자연스럽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자신이 파는 것의 가격을 올리는 똑같은 일을 두고, 사회적 반응은 이렇게 대조적이다.” (밑줄에 의한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이 짧은 인용문 속에는 국제적 권위의 필자의 경제학의 성격과 수준을 보여주는 몇 가지 전형적 사고가 들어 있는데, 우선 그 하나는, “생산 단가가 전체적으로 증가하면 기업들은 비용 증가분을 가격에 반영”하며, “소비자로서 개인적 불만이 없지 않겠지만, 대부분 ‘자연스러운 경제행위’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생산 단가가 전체적으로 증가하면 기업들은 비용 증가분을 가격에 반영한다”? 사실상 동어반복이고, 또한 조금 뒤에서 필자 스스로 “물가 상승의 50% 이상이 기업 이윤 증가 때문이었다” 운운하는 것과 명백히 충돌하지만, 그냥 웃어버리고 말자.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물가 인상으로 생활비가 늘어나면 이에 따라 임금을 올리려고” 하는데, 이는 “임금이란 … 기본적으로 노동자가 육체적ㆍ정신적 생산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요구도 ‘자연스러운 경제행위’”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것만이라면,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런데, 국제적 권위의 전문가스럽게 “임금이란 생산성 향상에 따른 보상이기도 하지만” 하고 ‘유식한’ 한 구절을 집어넣고 있다. 그리고 이 삽입구야말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자.

 

또 다른 하나는, “생산 단가”의 증가에 따른 기업의 제품 가격 인상도,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요구도” 모두 다 같이 “‘자연스러운 경제행위’”인데, “기업의 ‘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는 높지만,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행위’는 ‘부자연스럽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필자가, 그리고 이 부분을 글줄기로 뽑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시 ‘진보’ ≪한겨레≫가 세상을 향해 외치고자 하는 핵심적 발언, ‘친노동자적인’ 핵심적 문제의식일 것이다. 뭐 그런 대로 ‘친노동자적’이라고 치자. 엄밀히 말하면,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행위’는 ‘부자연스럽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 아니라, 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지배적 언론이 그렇게 치부ㆍ선전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필자의 감성은 나무랄 데 없이 친노동자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친노동자적 감성은, 앞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자신이 파는 것의 가격을 올리는 똑같은 일을 두고, 사회적 반응은 이렇게 대조적이다”로 이어지며 끝맺고 있다.

글의 제목에서 말하는, “… 노동과 노동의 가치”, 그리고 “다소 근본적인 문제”라는 발언의 결구(結句), “자신이 파는 것의 가격”! ― 결국,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는 노동자 “자신이 파는 것의 가격을 올리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노동자 “자신이 파는 것”은 “노동”이라는 뜻이다.12) 안 그런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것은 과연 정말 노동인가?

만일 그렇다면, 노동일이 8시간인 경우 노동자는 하루 8시간 노동하고, 그 8시간 노동의 값을 받는 것이 된다. 따라서 착취 따위는 없다! ― 이것은 바로 자본가들과 자본가들의 이론적 대변자들, 즉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떠벌리는 말씀 그대로다. 그리고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이신 이상헌님과 ‘진보’ ≪한겨레≫가 암묵 중에 하시는 말씀이다. 얼마나 진보적이고, 얼마나 친노동자적인 말씀인가!

 

그런데, 그렇다면 자본의, 즉 자본가의 이윤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기는가?

답은 이것일 수밖에 없다. ― 즉, 생산수단에서 생긴다고! 이윤을 생산하는 것이 바로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는 기계, 원료 등등 생산수단의 주요 기능의 하나라고! 따라서 이윤은 결코 노동자들로부터 착취하는 노동이 아니라고! 그리고 이것 역시 바로 자본가들과 자본가들의 이론적 대변자들, 즉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떠벌리는 말씀 그대로다. 그리고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이신 이상헌님과 ‘진보’ ≪한겨레≫가 암묵 중에 하시는 말씀이다. 이 또한 얼마나 진보적이고, 얼마나 친노동자적인 말씀인가!13)

 

그런데, ≪자본론≫을 위시한 맑스주의 사회과학, 맑스주의 경제과학은 유감스럽게도 전혀 다른 소리를 한다.

간단히만 요약하자면, 인간의 노동은 그 자신 자연의 일부인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物質代謝)를 매개하는 인간의 행위, 그 노동력의 발휘이며, 인간이 그 노동능력을 발휘하여 자연과 물질대사를 하기 위해서는, 즉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물질적 생활수단, 생활자료를 자연으로부터 획득하기 위해서는 본원적인 노동대상인 토지를 비롯, 그 노동을 매개하는 노동수단 등 생산수단이 필요한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그 생산수단들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사회적 생산수단을, 여러 사람이 함께 노동하는 생산수단을 사유(私有), 즉 독점적ㆍ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야만 생산수단을 점유, 자연과 물질대사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14) 그리고 고용이라는 형태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력이어서, 임금은, (국제노동기구 이상헌 고용정책국장님의 “임금이란 … 노동자가 육체적ㆍ정신적 생산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에서도 사실 엿볼 수 있는 것이지만) 결코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그 노동력을 유지ㆍ재생산하는 비용이라고. 그리고 다시, 노동생산물로서의 상품의 가치, 그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그 가격은, 따라서 노동자가 시장에서 구매하는 생활자료들의 가격도,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사회적으로, 즉 그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 그런데 자본에 고용되는 노동자는, 즉 자본에 그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는 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을 유지ㆍ재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생활자료들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노동시간(=필요노동시간)보다 훨씬 더 장시간 노동을 하고, 필요노동시간을 넘는 이 노동시간, 즉 잉여노동시간이 자본가의 이윤,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가의 이윤과 지주 등등을 포함하여 기타 이 잉여가치를 분배받아 사는 사람들의 수입을 형성한다는 것 등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자본론≫의 경우, 굳이 어디랄 것도 없이, 제1권의 “제2편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이후 ≪자본론≫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자본론≫을 위시한 맑스주의 경제과학에 따르면, 자본가의 이윤, 토지소유자의 지대 등등은 모두 노동자로부터 착취한 잉여노동이다. 그런데 맑스가 (앞의 각주 8에서도 인용한) ≪자본론≫ 제1권 제2판 후기(1873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 발전하고, 특히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더욱 더 뚜렷하고 위협적인 형태를 띠[자]” 부르주아 경제학은 더 이상 과학이기를 포기하고, 그러한 사실, 즉 자본의 이윤 등이, 그리고 나아가 사실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는 자본 그 자체가 노동자로부터 착취한 잉여노동이라는 것15)을 은폐하는 데에 급급해한다. 그리고 우리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고용정책국장님의 ‘친노동자적’ 감성으로 포장된 이 글 역시 본의든 아니든 바로 그러한 은폐에 봉사하고 있다.

 

다시 그건 그렇고, 지금 우리가, ‘친노동자적’ 감성으로 포장된 부르주아적 경제비과학의 하나의 예로서 고찰하고 있는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고용정책국장님의 이 글은, 현재에는 다만 노동자들의 조직률 하락과 그에 따른 협상력의 하락으로 그렇지 못하지만, ‘임금과 물가는 악순환적으로 상승’할 수 있다고 전제하며, 역사적으로 1970-80년대에는 실제로도 그랬다고 주장, 사실은 강변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인용하자면, 우선,

 

“물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통화정책도 걱정이다. 물가를 잡겠다고 이자율을 올리면 실물경제가 냉각돼 고용의 빙하기가 올 수 있다.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적 상승’을 걱정하는 논리의 일부다. 게다가 지금 통화정책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이런 악순환적 상황의 교과서적인 현실인 1970-80년대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복잡하고 현란한 숫자의 세계에서 결정을 내린다고 하겠지만, 기억의 힘을 무시하기 힘들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스무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스무살에 프랑스 혁명을 경험했던 나폴레옹이 한 말이다.”

 

그런데 역시 ‘친노동자적’ 감성의 소유자스럽게,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적 상승’이 실현되려면, 물가만큼 임금이 빨리 올라야 한다. 그런데 물가는 시장의 신속한 반응에 따라 올라가지만, 임금은 올리려면 노동자의 수고스러운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노동자의 협상력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과 유럽이 1970년대 인플레이션으로 애먹고 있을 때 노조 조직률은 역사상 최정점에 달했다. 대부분 40%를 훌쩍 넘었다. 하지만 현재 노조 조직률은 반 토막 난 상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체 평균이 15% 남짓이다. ‘악순환적’ 상황을 만들기에는 노동자의 조직적 힘이 전체적으로 너무 허약하다.”

 

“‘악순환적’ 상황을 만들기에는 노동자의 조직적 힘이 전체적으로 너무 허약하다.”! ― 역시 친노동자적 감성, 안타까운 감성을 감동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러면서, 글 전체를 말하자면 결산하는 마지막 단락에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투명한 것들 투성이라서 앞을 내다보는 일은 어렵지만, 임금 인상이 물가 대란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작다.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왔지만, 이는 임금 탓이 아니다. 오히려 인플레이션 때문에 힘들게 번 돈의 구매력이 떨어질 위험이 더 크다. 그러니 낮은 가능성을 옛 기억에 기대어 높이 평가한 뒤,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유독 가혹한 정책을 펼치는 일은 없기 바란다. 삶의 개선이 힘들다면, 지금만큼이라도 살 수 있게 해주는 게 전세계적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좋다고 하는 ‘포용경제’의 첫걸음 아닌가.”

 

임금 인상이 물가 대란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작다”! ― ‘임금 인상이 물가 대란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물가 대란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작다는 뜻이다. “포용경제”(!)를 발휘하여,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유독 가혹한 정책을 펼치는 일은 없기 바란다”고 누군가에게 박애주의적 혹은 ‘친노동자적’ 호소를 하시면서!

아무튼 이렇게 이들 모든 귀중한 말씀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한 틈 의문의 여지 없는 명문으로 표명되어 있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조직률이 높고, 그리하여 임금 협상력이 높으면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적 상승”이 일어나며, “1970-80년대”는 “이런 악순환적 상황의 교과서적인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만, 지금은 당시에 비해서 “노조 조직률은 반 토막 난 상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체 평균이 15% 남짓”이라서, “‘악순환적’ 상황을 만들기에는 노동자의 조직적 힘이 전체적으로 너무 허약하다.”(!)는 귀한 말씀이다.

 

나는 특히 이 부분들을 읽으면서 욕지기를 참기가 어렵다.

역사ㆍ사회과학에서, 대표적으로 ≪자본론≫에서 생생히 입증ㆍ설명하고 있는 경제과학에 전혀 무지한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경제비과학을, 그 비과학의 반동적ㆍ사기적 탐욕의 주장을 친노동자적 감성으로 포장하여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지의 보수적 학자ㆍ논객들의 글, 하물며 이 사회 언론의 태반인 극우적 신문ㆍ잡지의 글들은 극우적 인물ㆍ대중들이나 순진한 하층 노동자ㆍ민중에게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겠지만, 전진하고자 하는 선진노동자들에게는 사실상 전혀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음에 반해서, 문제의 이 글처럼 친노동자적 감성으로 포장된 무지 범벅은, 그것이 진보적인 것처럼, 친노동적인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그만큼 더 선진노동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악영향을 끼치며, 노동자계급의 전진을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론≫의, 다른 곳도 아닌, 제1권, 제1장에서 이미 과학적으로 명확히 설명하고 있는, 상품의 가치, 그리고 따라서 그 가치의 화폐적 현상형태, 즉 화폐로 표현된 가치인 가격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이 따위 얼빠진 반노동자적 헛소리는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잠시 미루어 놓았던 문제, 즉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고용정책국장님께서 “임금이란 생산성 향상에 따른 보상이기도 하지만” 운운하신 문제를 짚어보자.

노동생산성 혹은, 같은 말이지만, 노동생산력의 상승 즉 증대란, 동일한 량의 노동을 투입했는데도, 즉 동일한 시간 노동했는데도, 이전보다 더 많은 생산물, 즉 더 많은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경우 이전과 동일한 량의 노동을 투입했기 때문에, 즉 동일한 시간 노동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생산되는 더 많은 량의 상품, 더 많은 량의 사용가치의 가치는 같다.16) 그리하여, 화폐 가치에 변화가 없다면, 그것들의 총가격 역시 당연히 전과 동일하다. 그리고 따라서 상품 하나하나의 가격은 그 생산에서의 생산성의 증대에 비례하여 하락한다.

 

이러한 성격의 노동생산성과 임금의 관계를 얘기하자면, 생산성이 상승하고 화폐 가치에 변함이 없다면 이렇게 상품의 하나하나의 가격이 하락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생활자료의 가격이 하락하기 때문에, 화폐로 지불되는 명목임금에 아무런 변화가 없더라도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그만큼, 즉 생산성이 증대한 만큼 증대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자본론≫의, 다른 곳도 아닌, 제1권의 제1장에서부터 명확히 설명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생산성 상승에 따른 실질임금의 이러한 증대는, 굳이 말하자면, ‘생산성 상승에 따른 보상’이라면 보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님께서, “임금이란 생산성 향상에 따른 보상이기도 하지만” 하고 운운하실 때, 그 의미는 분명 이러한 뜻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소위 ‘생산성 임금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생산성 향상에 따라 임금, 즉 명목임금도 그만큼 인상해도 좋은’ ‘보상’이라는 말씀, 그러한 구역질 나는 말씀이다. 그가 노동생산성과 임금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지금 그의 말대로 “인플레이션 시대”에 임금 인상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대립ㆍ갈등을 논할 때, 무엇보다도 인플레이션, 그리고 그의 말대로 “인플레이션 시대”란 무엇인가, 그 원인과 시대적 의의가 무엇인가를 먼저 명확히 하였을 것이고, 하였어야 할 텐데, 그렇기는커녕 구역질 나는 헛소리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자본론≫의, 다른 곳도 아닌, 제1권, 제1장에서부터 이미 과학적으로 명확히 설명하고 있는 노동생산성, 같은 말이지만, 노동생산력의 증감과 가치 및 사용가치와의 관계를 안다면, 이 따위 구역질 나는 쓰레기 같은 얘기는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위 ‘생산성 임금제’ㆍ‘생산성 임금론’이라는 쓰레기는 과거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목소리가 높았던 나머지 그만큼 상세한 비판, 그만큼 인품 높은 어조의 비판이 있었던 탓도 있고 해서, 근자에는 여간해서는 듣기 어렵던 주장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보’ ≪한겨레≫, 그리고 권위도 드높은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님’을 통해서 새삼 다시 듣게 되었노라는 말씀도 안 드릴 수가 없다.

아무튼 이 글은, 그 제목을 “인플레이션 시대의 …” 운운하고 달고 있으면서도, 인플레이션이 무엇인지, 즉 그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시대적 역사적 의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고 있지 않다. 아니, 하고 있지 못하다. 물가의 전반적 상승을 인플레이션이라고 하는, 참으로 몰과학적인 부르주아 경제비과학의 인플레이션 개념을 전제하고, 헛소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앞에서 맑스의 ≪자본론≫ 제1권, 제2판 후기를 인용하여 말했던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이 발전함에 따라 이미 오래 전에 과학이기를 포기하고 자본의 변호론으로 전락해 버렸고, 그리하여 현대 부르주아 경제비과학, 나아가 부르주아 사회비과학 일반은 상품의 가치가 무엇인지, 화폐가 무엇인지, 상품의 가격이 무엇인지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능력을 이미 오래 전에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방대한 분량의 ≪자본론≫ 어디에도 ‘인플레이션(inflation; Inflation)’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인플레이션’이라는 말은 저 악명 높은 1930년대의 대공황,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위기를 맞아 지불 불능으로, 즉 어음을 막지 못해 쓰러져가는 대자본들의 어음을 국가가 불환의 중앙은행권, 즉 은행권이라는 가면을 쓴 국가지폐로 막아줌으로써 자본주의를 연명시키면서, 상품의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을 가리켜, 그 원인,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현상을 기술(記述)하는 데에는 재주가 있는 부르주아 경제비과학자들이 붙인 명칭이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것이 마치, 예컨대,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팽창하는(inflate) 형상과 같다고 해서 말이다.

 

아무튼 이런 역사적인 이유로 ≪자본론≫에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조차 나오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오직 ≪자본론≫과 이 ≪자본론≫에 기초하여 자본주의 경제 현상을 분석ㆍ해설하는 경제학 서적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거기 ≪자본론≫ 제1권, 제1편에는,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경제비과학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도 할 수 없고, 이해하려고도 절대로 하지 않는 것들, 즉 상품의 가치는 무엇이며 어떻게 결정되는가, 화폐는 무엇이며 상품경제에서는 어떻게 해서 그리고 왜 화폐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가, 그 화폐는 왜 금ㆍ은이라는 귀금속인가, 화폐유통의 법칙은 무엇이며, 지폐유통의 특수법칙은 무엇인가 등이 완벽하게 과학적으로 해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됨에 따라 노동자계급을 기만하기 위한 부르주아 사회의 유서 깊은 반과학적ㆍ기만적 지적 전통ㆍ관행이 어떤 놀라운 ‘진보적’ 지식인을 양성해 내놓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를 어쩔 수 없이 꽤나 장황하게 얘기했는데, 그렇더라도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더 지적하면서 이 얘기를 정리하자.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님의 문제의 글에는, 몇 %, 몇 % 하는 식의 ‘통계’가 여럿 인용되어 있고, 심지어는 “경제가 크게 호전됐다는 선진국의 경우 지난해 월급봉투는 5% 정도 두꺼워졌지만, 물가 상승폭도 커 실질임금은 겨우 1.6% 늘었다”는 식으로 소수점 이하의 ‘통계’까지 인용되어 있다. 아무런 유보 없이 저들 ‘통계’가 사실을 반영한다는 듯이! ― 과연 그래도 좋은 것인가? 저들 ‘통계’가 과연 사실을 반영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부르주아 국가들, 부르주아 기구들이 작성ㆍ발표하는 저들 ‘통계’는 결코 객관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다만, 저 불치의 무지 때문에 자신들 스스로와 대중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저 필자가 그러한 ‘통계’를 아무런 유보 없이 사실인 것처럼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주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무비판적ㆍ비과학적 사고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가를 드러낼 뿐이다.

 

이 지적에 대해서는 분명 특히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거든, 그들 ‘통계’가 왜 과학적이지 않고, 혹은 과학적일 수 없고, 왜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를 여기에서 설명할 여유는 없고, 비근하게 저들의 대표적인 ‘통계’인 이른바 GDP ‘통계’를 보라. 분명 내로라하는, 아니 날고 뛰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님들ㆍ전문가님들께서 ‘통계’와 그 추세에 기초해서 작업ㆍ작성하여 매번 소수점 이하까지 발표되는 ‘통계’요 그 예상치들일 터인데, 한 나라, 한 해의 그것마저 몇 번이나 역시 ‘과학적 통계’답게 소수점 이하까지 수정을 거듭하는가를 보라! 이 ‘믿거나 말거나’가 저들의 ‘과학적 통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로라하는 학자님들ㆍ전문가님들은 그러한 ‘통계’를 그것들이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믿어 버린다.17)

 

아무튼 다시 문제의 글을 보자면, 예컨대, 이렇게 말한다.

 

“지난달 발표된 어느 연구에 따르면, 보통 미국 물가 상승 요인의 60% 정도가 노동비용이었다면, 코로나 기간에는 그 비율이 10%도 되지 않았다. 물가 상승의 50% 이상이 기업 이윤 증가 때문이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10%를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노동자의 협상력은 약화되고, 기업의 가격 지배력은 강화됐다.”

 

“노동자의 협상력은 약화되고, 기업의 가격 지배력은 강화됐다”! ― 이 얼마나 감동적인 친노동자적 감성의 표명인가!

그런데, 그런데 “보통 미국 물가 상승 요인의 60% 정도가 노동비용이었다면, 코로나 기간에는 그 비율이 10%도 되지 않았”단다!

“다소 근본적인 문제”라며, “생산 단가가 전체적으로 증가하면 기업들은 비용 증가분을 가격에 반영한다”고 전제하시며 하시는 말씀이니, 결국, 미국의 경우 평소에는 물가 상승분의 60%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때문이었는데, 다만 코로나 기간에는 그 비율이 10%도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통계, 이 연구가 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60%든, 10% 미만이든, 몹쓸 노동자들!

 

거듭거듭 하는 얘기지만, ≪자본론≫의, 다른 곳도 아닌, 제1권, 제1장에서 이미 과학적으로 명확히 설명하고 있는, 상품의 가치, 그리고 따라서 그 가치의 화폐적 현상형태, 즉 화폐로 표현된 가치인 가격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이 따위 얼빠진 반노동자적 헛소리는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이제,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님이라는 국제적 권위자가 쓰고, ‘진보’ ≪한겨레≫가 꽤나 넓은 지면을 할애하여 게재하고 있는 이 글이, ≪자본론≫으로 대표되는 경제과학, 역사ㆍ사회과학에 대한 그들의 무지 때문에, 그들이 필시 가졌을 선의와는 정반대로 얼마나 반동적이고, 반노동자적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가 왜 ≪자본론≫을 학습ㆍ연구ㆍ토론하지 않으면 안 되며, 왜 거기에서 밝혀 폭로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구조와 운동법칙을 최대한 많은 대중이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무지 범벅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상에서 꽤나 장황하게 논의ㆍ비판한 것은 물론 단지 “하나의 예”일 뿐, 실제로는 특히 경제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신문ㆍ방송에서 보고 듣는 얘기들, 그리하여 순진한 대중뿐 아니라 소위 전문가들ㆍ경제학자들 등의 심금을 울리는 얘기들의 사실상 거의 전부가 다 온통 그러한 비과학, 그러한 무지의 범벅들이다.

 

근자의 정세와 관련된 비근한 예를 들자면, 지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특히나 시끄럽게 떠들어댔고, 결국은 ‘정권 교체’의 사실상 주요 원인이 되었음에 분명한 이른바 ‘부동산’ 문제, 즉 서울을 위시한 주요 대도시의 집값ㆍ아파트값의 폭등 문제를 둘러싼 이런저런 말씀들도 바로 그렇다.

즉, 최근의 그 폭등을 둘러싸고, 그 폭등은 비단 한국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 특히 세계 주요 도시들에서의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제는 이미 세계적인 현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한편에서는 그 폭등이 세계적인 현상임을 보도하면서도, 앞다투어 그것이 문재인 정권의 정책 실패 탓이라고 몰아세운 것이 그렇다. 게다가 특히 (문재인 대통령님 각하께서 퇴임하시면서야 뒤늦게 그 폭등은 세계적인 현상이었지 자신의 정책 실패 탓이 아니라고 지나가는 말씀처럼 항변하셨지만,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작 그러한 항변이 필요했던 때에는) 문재인 정권이 거듭거듭 자신들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사과한 것이 그러하다.

 

또한 특히, 문제의 그 고견으로 오늘날 천하의 ‘경제학자님’이시라는 칭송을 듣고 계신 윤희숙 당시 의원님께서, ‘국회의사당을 세종시로 옮기고 그 부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여 서울의 집값ㆍ아파트값 폭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밝히신 ‘경제학적’ 고견이나, 이재명 대통령 후보님께서 유사하게 ‘김포공항을 옮기고, 서울대 관악 컴퍼스를 옮기고, 서울 지역과 그 주변의 경부ㆍ경인 고속도로 등을 지하화하고, 그 자리들에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거나, 소위 신도시들 건설, 서울의 집값ㆍ아파트값 폭등 문제를 해결하시겠다’고 하신 천하의 경세 방략 등등이 모두 그러하다.

 

다름 아니라, ≪자본론≫에서 명명백백히 밝히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 동학에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뽐내며 폭로한 것들이었다. 저들 천하의 ‘경제학자’님, 천하의 ‘경세가’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시겠다며 내놓으신 고견과 방략들이라는 게 기실은,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그 사태의 주기적 필연성 때문에, 차후에 닥치곤 할 사태를 더욱 증폭시키고 악화시킬 뿐인 ‘고견’과 ‘방략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필시 그 폭등이 아니라 그 폭락이 문제로 되면서 곳곳에서 곡소리가 날 것이며, 어쩌면 2008년에 미국에서 터졌던 이른바 ‘써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버금가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사태가 조만간 벌어질 가능성조차 배제할 수 없을 터인데, 그 잘난 천하의 ‘경제학자’님, 그 잘난 천하의 ‘경세가’님 등께서 무슨 말씀들을 어떻게 하실지 자못 궁금하다.

저들의 저런 얼빠진 고견과 방략들, 그리고 그들에게 쏟아지는 ‘천하의 경제학자’, 천하의 경세가라는 찬사들이야말로, 생생한 진리 ≪자본론≫은 지금도 여전히 자본가계급의 공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현직 경제학 교수님의 말씀도 좀 들어보자면, 최근에 발생한 이른바 ‘가상 화폐’ 혹은 ‘가상 자산’ “루나의 몰락”과 관련,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안동현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설파하신다.

 

“호주 배우 가이 피어스가 주인공으로 나온 2002년 영화 ‘타임머신’에 보면 2030년 달을 개척한다고 핵을 터뜨렸다가 달이 산산조각 나 문명이 파괴되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 이 기억을 소환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루나 사태다. 개발 2년 만에 글로벌 코인 시장에서 시가총액 8위에 오를 정도로 김치 코인의 대명사로 부상했던 루나는 단 며칠만에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김현철의 가요 제목 그대로 ‘달의 몰락’이었다.”

“가상 자산의 가치 유무는 아무리 논쟁해 봤자 결론이 나지 않는 주제다. 아마 기원전 물물교환 시절 우리 조상들은 반짝반짝하고 녹이 슬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별 용도가 없는 금이 왜 가치를 가지는가 하고 다퉜을 것이다. 케인스가 ‘뷰티 컨테스트’ 논쟁에서 말했듯 가치란 각 개인의 주관적 가치 판단에 기초하기보다는 그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가상 자산은 한때의 해프닝으로 도태될 수도 있고 우여곡절을 겪은 후 기존의 금융시장을 대체할 수도 있다. 이러한 향방을 가르는 것은 기술보다는 사람들의 기대나 신뢰가 절대적인 만큼 아무리 논쟁해 봤자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과거 당대 최고의 드라마 ‘청실홍실’에서 주인공 김세윤이 정윤희와 장미희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느냐를 놓고 엽서로 투표를 했던 적이 있는데 가상 자산의 가치 유무에 대한 논쟁이 이와 같다.”

“가상 자산의 가격 변동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로또’성 주식과 유사하다. 즉 엄청난 폭등과 폭락이 교차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 행동재무학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론인 ‘프로스펙스 이론’에서 말하듯 사람들은 일어날 확률이 작은 이벤트를 과대 평가하는 경향 때문에 이러한 자산들을 선호하게 된다.”18)

케인스가 ‘뷰티 컨테스트’ 논쟁에서 말했듯 가치란 각 개인의 주관적 가치 판단에 기초하기보다는 그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한다”? ― 저 앞의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님의 언설에서는 그래도 아직 “생산 단가” 어쩌구 하는, 경제과학의 찌꺼기 내지 그림자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안 교수님께서는, 고맙게도 현대 부르주아 경제비과학의 ‘거성(巨星)’이라고나 할 케인스가 얼마나 ‘위대한 경제비과학자’인가도 보여줄 겸, 아예 “가치란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한”단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지는, 명시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계시지만. 혹시 ‘로또’성 무언가로?)

 

이 얼마나 경제비과학의 정수(精髓)인가!

교수님께서는, “가상 자산의 가치 유무는 아무리 논쟁해 봤자 결론이 나지 않는 주제”라고 말씀하시지만, 교수님께서 보시는 한, 기실 가치란 그 자체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따라서 아무런 실체도 없는 것이다. 이를 교수님은 자신들의 우상이랄 수 있는 케인스를 담보로 삼아, “가치란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한다”고 확인하시는 것이다.19)

그리고 멋대로 상상하시는 것이다. ― “아마 기원전 물물교환 시절 우리 조상들은 반짝반짝하고 녹이 슬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별 용도가 없는 금이 왜 가치를 가지는가 하고 다퉜을 것이다”라고!

 

그에 반해서, 맑스는 ≪자본론≫에서, 예컨대, “어떤 사용가치 즉 재화가 어떤 가치를 갖는 것은 단지 그 속에 추상적 인간노동이 대상화 즉 물질화 되어 있기 때문일 뿐”이며, “그 가치의 크기는 …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가치를 형성하는 실체’, 즉 노동의 량에 의해서 측정”하며, “노동의 량 그것은 그 지속시간으로 측정되고, 노동시간은 다시 시간, 날[日] 등등과 같은 일정한 시간부분들을 그 도량표준(度量標準)으로서 삼고 있다”20)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상품이란 무엇이고, 그 사용가치ㆍ가치ㆍ화폐란 무엇인가를, 나아가서 상품경제에서는 어떻게 해서 그리고 왜 화폐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그 화폐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자본론≫ 제1편에서 완벽하게, 즉 어떤 논쟁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논증하고 있다.

 

한편 교수님께서는, “가상 자산의 가격 변동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로또’성 주식과 유사하다. 즉 엄청난 폭등과 폭락이 교차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운운하신다. 시쳇말로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부후(腐朽)한 현대 자본주의의 엄청난 투기에 따른, 아무런 실체가 없는 그야말로 ‘가상 화폐’, ‘가상 자산’ 가격의 “엄청난 폭등과 폭락”은, 구태여 ‘분석’하지 않더라도, 누구의 눈에나 확연하다. 그런데 그것이 경제학 교수님에게는 “분석해” 보셔야만 보이나 보다. 역시 교수님스럽다. 그리고 “‘로또’성 주식”이란 또 뭐람? 로또는 그 발행 주체가 발행 가격을 변경하지 않는 한, 그 가격이 일정한데 말이다.

그건 그렇고, 문제의 글에 여실히 나타나 있는, 그러나 필시 별로 주목받지 못했을, 우리 안 교수님의 탁월한 지식과 재능을 여기에 적시하는 것으로 예의를 갖춰보자. ― 안 교수님의 이 짧은 글에는, 모두가 보다시피, 2편의 영화, 1곡의 노래, 그리고 5명의 연예인이 등장한다. 이 정도면 그 부문, 즉 통칭 연예 부문에 대한 교수님의 관심과 시간 배정, 그리고 지식ㆍ재능이 얼마나 큰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그에 대한 지식들을 동원하면서 ‘경제 평론’을 쓰시는 것처럼, 탁월한 경제비과학의 지식들을 동원하여 ‘연예 평론’을 쓰신다면, 당신의 ‘경제 평론’ 못지 않은 주목을 받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 강단에서 자칭 타칭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통하는 분들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 할 것 같다. “분들”이라고 얘기는 했지만, 그 분들을, 요즘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으로, 모두 소환해서 언급하자면 끝도 한도 없을 터이므로, 딱 한 분만 소환해 보자.

 

2018년 5월 11일에 ≪중앙일보≫는, “지난 5월 5일은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생일이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윤소영(64)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를 9일 서울 사당동 과천연구실에서 만났다”로 시작하는, 일간지로서는 이례적이랄 만한 지면을 할애한 인터뷰 기사21)를 싣고 있다. 거기에서 몇 구절만 간단히 보자면,

≪중앙일보≫가 글줄기로 뽑고 있는 발언이기도 하지만, 기자가 이렇게 묻는다. ― “지난해 출간한 ≪위기와 비판≫에서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주의 때문에 타락했다’고 썼다. 대기업과 공공부문 중심의 양대 노총에 대한 비판으로 들린다.”

 

그에 대해서 우리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님이신 윤소영 교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신다. ― “노동자주의는 노동자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다. 여성주의가 여성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주의가 아닌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주의가 아니다. 노동자주의나 여성주의는 지대추구적 집단 이기주의일 따름이다. 얼마 전까지는 한국노총이든 민주노총이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조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책도 쓰고 공적 발언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노동자들도 자기 행복이나 안위가 1차적인 관심이지 사회변화나 미래세대의 복지에는 관심 없다.”

 

우리의 관심사에 대해서만 얘기하자면, 결국 한국노총도 민주노총도, “사회변화나 미래세대의 복지에는 관심 없”는 “이기주의”적인 “지대추구적 집단”이란 말씀이렸다! ― 재벌의 신문 ≪중앙일보≫의 논설위원님께서 친히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운운하며 윤 교수님의 개인 연구소까지 방문, 인터뷰하고, 넓은 지면을 할애하여 보도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맑스는, 그리고 말 그대로의 맑스주의자들은, ≪자본론≫을 비롯하여 그 어떤 곳에서도 ‘지대(地代)’라는 개념을 토지와 무관하게, 보다 정확하게는, 토지소유와 무관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다. ‘지대’는 본래 ‘Grundrente’ = ‘Bodenrente’(즉, 토지 임대료)의 번역어로서, 토지소유자의 입장에서는 ‘토지소유의 실현’, 즉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취득하는 소득이고,22) 그리하여, 자본가적 차지농이든, 자신이 노동하는 소작농이든, 지대를 지불하는 측의 입장에서는 타인 소유의 토지를 사용하는 데에 대한 대가로서 지불해야 하는 화폐 혹은 현물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님이시라니까 묻거니와, 한국노총도 민주노총도 “이기주의”적인 “지대추구적 집단”이라시니, 그들은 타인의 잉여노동으로서의 지대를 수취하는 토지소유자가 되려는 욕망에서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해도 차마 “그렇다”고는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님이신 그가 저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그의 ‘지대’ 개념은, ≪자본론≫ 등에서 명확히 하고 있는 그것이 아니라, 현대 부르주아 경제비과학의 쓰레기 같은 그것, 즉, 대략 짐작하자면, ‘노동하지 않는 자의 부당한 소득’ 정도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현대 부르주아 경제비과학이 ‘지대’를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 역시 물론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그 비과학이 대변하는 자본가들의 소득, 즉 이윤은 자본가들의 자본가로서의 노동의 정당한 대가(!)라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서다. 즉, 자본가들의 이윤은 노동자들로부터 착취하는 잉여노동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의 정당한 대가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이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님의 ‘지대’ 개념이기도 하다!

 

서경호 논설위원은 이 기사에서, “윤 교수는 이날 ‘처참하다’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윤 교수님의 그런 “처참하다”는 발언 중의 하나는 ― “시진핑 사상이 21세기판 마르크스주의라는 건 처참한 농담이다”이다. (그러면서 역시 “처참한 얘기다”라며 뜬금없이 내뱉은 그의 반북(反北) 발언은, 사실상 오로지 국가보안법에 의해서만 뒷받침되는, 여기 옮길 수도 없을 만큼 처참한 그것이다.)

하지만, “노동자주의나 여성주의는 지대추구적 집단 이기주의일 따름이다”라고 일갈하시는 윤 교수님께서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님이시라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강단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자임을 자임하는 교수님들 일반― 물론 극소수의 예외야 있지만 ―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끔찍한 농담이 아닌가?!

 

게다가 윤 교수님의 다음과 같은, 인터뷰 마지막 발언이야말로 이날 발언의 백미다. ― “≪시장과 전장≫에서 박경리 선생이 갈파했듯이, 얼치기 지식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바보가 되든지 사기꾼이 되든지. 지식인은 바보 노릇 할 수는 없으니 사기꾼이 되는 거다.”

자신의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하고 계시니 그야말로 백미가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아니 부르주아지가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자본론≫을 위시한 노동자계급의 역사ㆍ사회과학이 어떻게 침묵ㆍ왜곡 당하고 있으며, 부르주아 비과학이 어떻게 심지어 맑스주의로서 거짓행세까지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노사과연

 


1) 1960년 4월 혁명 후 잠시 존재했던 윤보선ㆍ장면 등의 민주당 정권도 물론 그 기본성격과 지향에서 이들 정권과 사실상 다르지 않았으나, 다만 거세게 분출하는 민중의 반미자주ㆍ통일, 반퐈쑈 투쟁을 유효하게 억누를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 무능력이 이 나라 군대의 정보장교(!) 출신들인 박정희ㆍ김종필 등이 ‘주도’한,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의 핵심 원인이다.

 

2) 1979년 10월 26일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ㆍ차지철 등을 쏴 죽이고 나서, 자기 뒤에 무엇이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던가를 상기해보자. 하수인으로서의 솜씨ㆍ능력은 어쩐지 몰라도 정치적 감각은 모자라서, 필시, 굳게 입 다물고 있어야 했을 기밀을 그렇게 떠들어댔기 때문에, 그는 불귀의 객이 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3) 실제로 이러한 우민화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가의 일단을 조금 뒤에서, 이 나라가 낳은 사실상 국제적인 지식인, 그것도 친노동자적 감성의 소유자가 어떤 어이없는 말씀을 ‘진보’ ≪한겨레≫의 지면에서 펼치고 계신가를 통해서 보기로 하자.

 

4) “어느 시대에나 지배 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로써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대개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 있다.” 맑스ㆍ엥엘스, ≪독일 이데올로기≫, MEW, Bd. 3, S. 46.

 

5) 혹시 이러한 호칭들이 눈에 거슬린다면, 무엇보다도, 예컨대, 통칭 ‘태극기 부대’가 어떤 깃발들을 휘날리면서 광란을 벌이는지를 보라.

 

6) 1980년대 이 사회에도 통칭 ‘재생소작제’가 상당히 광범하게 존재하여, 당시 치열하게 전개되던 예의 ‘사회성격 논쟁’ 혹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도 모모(某某)한 목적의식 때문에 이 ‘재생 지주-소작관계’의 성격에 관한 논쟁이 어지럽게 벌어졌는데,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인식ㆍ판단하기 위해서는 ≪자본론≫ 제3권, “제6편 잉여가치의 지대로의 전화”를, 그리고 특히 그 “제47장 자본제적 지대의 발생”을 성실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7) 맑스는 ≪자본론≫ 제1권, 제1판의 “서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 독일과 관련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 “우리[독일: 역자]의 경우 자본주의적 생산이 완전히 시민권을 획득한 곳, 예컨대 본래의 공장들에서는 상황이 영국에서보다도 훨씬 더 나쁜데, 이는 공장법이라는 평형추(平衡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모든 분야에서는, 나머지 서유럽 대륙 전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뿐 아니라 그 발전의 결여도 역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근대적 궁핍과 나란히, 시대를 역행하는 사회적ㆍ정치적 관계들을 수반한, 시대에 뒤떨어진 고풍(古風)의 생산양식들이 계속 발육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수많은 전래의 궁핍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죽은 것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움켜쥔다! (Le mort saisit le vif!)” (채만수 역, ≪자본론≫ 제1권, 제1분책, pp. 15-16.) 아직 봉건적 사회이면서도,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철저히 포위되어 있었고, 특히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은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 이 사회의 상황은 당연히 더욱 심각하였다.

 

8) 맑스는 ≪자본론≫ 제1권, 제2판 후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경제학이 부르주아적인 한, 즉 자본주의적 질서를 사회적 생산의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발전단계로서 파악하는 대신에, 거꾸로 사회적 생산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모습으로 파악하는 한, 경제학이 과학일 수 있는 것은 다만, 계급투쟁이 아직 잠재적이든가, 혹은 단지 개별적인 현상으로서만 나타나고 있는 동안뿐이다. / 영국을 예로 들어보자.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은 계급투쟁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의 것이다. 고전파 경제학의 최후의 위대한 대표자인 리카도(Ricardo)는 계급적 이해의 대립을, 즉 임금과 이윤의 대립, 이윤과 지대의 대립을 마지막으로 의식적으로 자신의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그가 순진하게도 이 대립을 사회적인 자연법칙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그와 더불어 부르주아 경제과학은 넘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 대공업 그 자체가, 1825년의 공황과 더불어 비로소 그 근대적 생활의 주기적 순환을 개시함으로써 이미 입증되어 있는 것처럼, 겨우 막 그 유년기를 벗어났다. … 1830년이 되자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위기가 발생했다. / 부르주아지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이미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이후 계급투쟁은,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더욱 더 뚜렷하고도 위협적인 형태들을 띠었다. 그것은 과학적 부르주아 경제학의 조종(弔鐘)을 울렸다. 이제는 더 이상 이 명제(命題, Theorem)가 옳은가 저 명제가 옳은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자본에 유익한가 유해한가, 편리한가 불편한가, 경찰령(警察令) 위반인가 아닌가가 문제였다. 사심 없는 연구 대신에 매수된 논쟁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연구 대신에 비양심적이고 사악한 의도를 가진 변호론이 등장했다. … 롸버트 필 경(Sir Robert Peel) 이후의 자유무역입법은 속류경제학에서 이 최후의 자극조차 없애버렸다. / 1848년 대륙의 혁명은 영국에도 반작용을 미쳤다. 아직 과학적 의의를 요구하며 지배계급의 단순한 궤변가나 아첨꾼으로 머물려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본의 경제학을,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들과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죤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에 의해서 가장 잘 대표되고 있는 것과 같은, 얼빠진 절충주의가 나타났다. 그것은, 러시아의 위대한 학자이자 비평가인 N. 체르니쉐프스키(N. Tschernyschewski)가 이미 그의 저서 ≪밀의 경제학 개요(Umrisse der politischen Ökonomie nach Mill)≫ 속에서 탁월하게 밝힌 바 있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파산선고이다.” (채만수 역, ≪자본론≫ 제1권, 제1분책, pp. 23, 24-25.)

 

9) 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43250.html.

 

10) “이 글”은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님의 글을 가리킨다. 혹시 내가 지금 작성하고 있는 글을 지칭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그것은 “나의 이 글”로 표현할 것이다.

 

11) 이 이하의 두 문장을, 분명 핵심적인 혹은 “다소 근본적인 문제”라고 판단해서겠지만, ‘진보’ ≪한겨레≫가 이 글의 글줄기로 뽑고 있다.

 

12) 그런데, 사실은 필자가 “임금이란 … 노동자가 육체적ㆍ정신적 생산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말과 ‘노동자가 파는 것은 노동’이라는 말은 그 자체 형식 논리적으로도 모순인데도, 천연덕스럽게 저렇게 얘기하실 때, 그것은 모름지기 저 필자의 논리력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보여주고 있다.

 

13)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부르주아 사회, 부르주아 국가의 저 잘난 정치지도자들님이나 부르주아 언론, 나아가서 소부르주아 진보 언론 ≪한겨레≫가 시도 때도 없이 ‘국민화합’을 외칠 수 있는 경제학적 근거다. 이윤은 기계 등 생산수단으로부터 생기는 것이어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란 없고, 따라서 억압 따윈 ‘화합의 정신’만 있으면 없어질 테니까!

 

14) 참고로 말하자면, 내로라하는 수많은 생태주의자들은, 대개가, 역시 맑스주의에 두루 통달하여(!) ‘맑스주의는 생산력주의여서 반생태주의적’이라고 주장, 아니 비판(!)ㆍ비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감히 묻고 싶다. ― 인간의 삶을 “그 자신 자연의 일부인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物質代謝)”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생태주의가 있을 수 있는가?

 

15) 채만수 역, ≪자본론≫ 제1권, 제4분책, “제7편 자본의 축적과정” 참조.

 

16) 참고로, 우리 사회에서 무척이나 목소리가 높은 천하의 맑스경제학자님이신, 경상대학교의 정성진 교수님께서는 노동생산성을 “부가가치/종업원수”(정성진, ≪마르크스와 한국경제≫, 책갈피, 2005, p. 130)로 규정하고 계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자본론≫ 제1권, 제1장에서부터 명확히 설명되어 있는 규정ㆍ내용에 반하여, 노동생산성이 증대하면, 동일한 량의 노동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즉 더 많은 가치생산물을, 즉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하신다는 것을 여기에 밝혀드리지 않는다면, 천하의 맑스경제학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닐 터이다.

 

17) 참고 혹은 곁가지로 하는 얘기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무척 목소리 높은 맑스주의자님이시고, 무척 목소리 높은 천하의 맑스경제학자님이신, 경상대학교의 정성진 교수님만큼 온갖 ‘과학적’인 통계들로 장식하면서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려 드는 학자님도 아마 드물 것이다.

 

18)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朝鮮칼럼 The Column] 루나의 몰락, 가상자산 규제 더 미룰 수 없다”, ≪조선일보≫, 2022. 6. 7. (<www.chosun.com/opinion/chosun_column/2022/06/07/BM6ZEZE6PFHPXKYOEVAW4OHYS4/>)

 

19) 지금은 ‘사월혁명회’ 공동의장님 중의 한 분으로 계신 전덕용 선생님께서 1970년에, 당시 학생운동권 일각에서 등사판으로 밀어내던 신문 아닌 신문 ≪자유의 종≫에 후배들을 위해서 “대학 敎授, 대학 絞首”라는 짧은 글을 써 주신 적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치란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한다”고 광고하시는 분께서 대학의 ‘경제학 교수’님질을 하시니, 과연 대학을 교수(絞首)하시는 것 아니겠는가! (― 이 주는 ≪정세와 노동≫에 전재(轉載)하면서 붙인 것이다.)

 

20) 채만수 역, ≪자본론≫ 제1권, 제1분책, p. 70.

 

21) 서경호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의 직격 인터뷰.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주의 때문에 타락했다”, ≪중앙일보≫, 2018. 5. 11. (<www.joongang.co.kr/article/22613573#home>)

 

22) 맑스는 지대를, 예컨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 “다양한 개인이 지구의 일정 부분을 배타적으로 점유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의제(擬制)인 토지소유의 경제적 실현인 – 지대 …(…Rente – ökonomische Realisierung des Grundeigentums zu sein, der juristischen Fiktion, kraft deren verschiedne Individuen bestimmte Teile des Erdballs ausschließlich besitzen – …”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647.)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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