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여성해방론과 페미니즘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천연옥│ 부산지회장

 

 

1. 글을 시작하며

 

7월 5일 sbs에 따르면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중지를 헌법적 권리로 본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면서 10살 성폭행 피해자가 임신 중지 수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현지시간 3일 가디언 등 현지 언론은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으로, 임신 중지 수술을 준비하던 10세 성폭행 피해자가 연방대법원의 임신중지권 폐기 판결 이후 급히 인디애나 주로 이동해 수술을 받아야 했다.”1)라는 내용의 보도를 했다.

2022년 6월 24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낙태의 권리(=임신 중지권)를 박탈했다. 대법원이 임신 중지권 보호를 명기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1973년부터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임신 24주까지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해 왔다.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미국 정치의 보수 양당 체제의 한 축에 불과한 민주당과 유착하면서 진보성도 대중성도 잃어버리고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품 안으로 들어가게 된 조건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결국 6월 24일 지난 50년 동안 존재해왔던 임신중지권 마저 폐기하는 참혹한 상황을 만들었다. 물론 미국에서 이에 대한 항의행동이 진행되고 새로운 더 진보적인 페미니즘 흐름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중으로 보인다.

한국의 여성들은 2014년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해시태그 운동, 2015년 메갈리아 커뮤니티의 등장, 2016년 강남 역 여성 살해 사건에 대한 추모와 집회, 2018년 미투 운동과 낙태죄 폐지운동, 혜화 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2019년 N번방 사건 추적단 활동과 디지털 성범죄법 제정 등 최근 십 년도 안 되는 시기 동안 엄청난 행동을 했고, 그 이론적 배경은 미국의 6,70년대의 급진주의 페니미즘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의 전파였다. 그러나 2022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경과하면서 한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 세력은 보수 양당 체제의 한 축에 불과한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면서 외국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걸어온 길을 따라가고 있다2).

한국의 대표적 페미니스트인 정희진은 정말 많은 책을 출판하고 있으며, 경향신문에도 <정희진의 낯선 사이>라는 고정 칼럼을 쓰고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2005년 11월에 초판 1쇄, 2012년에 초판 14쇄, 2013년에 개정증보판 1쇄, 2019년에 개정증보판 15쇄, 2020년에 15주년 기념 판을 발행했고, 내가 얼마 전에 구입한 것은 2022년 4월에 4판 2쇄로 발행된 걸로 보아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의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2020년 민주노총 부산본부 여성위원회가 주최하는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강연회에서 <노동운동과 페미니즘>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을 때, 민주노총 부산본부 여성위원 한 분이 정희진과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 언급에 매우 불쾌해 하면서, ‘성인지 감수성’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사람이 정희진과 페미니즘이라고 했다. 이후 민주노총 부산본부 여성위원회는 너무나 편파적인 입장의 강연을 배치한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았다고 들었다. 최근에 정희진의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 동지가 생각났고, 그래서 더욱 더 이 책에 대한 분명한 이론적 입장이 필요하며,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이 글을 써야한다는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또한 7월 10일에 출범 총회를 한 ‘노동해방’을 위한 좌파활동가 전국결집’이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을 채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힘들다. 노동자계급의 해방 사상으로서의 맑스주의 여성해방론과 페미니즘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론 체계이다. 페미니즘의 다양한 이론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고 화려한 언사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결론은 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개량에 머물 수밖에 없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아래에서 한국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정희진의 대표적 저술인 ≪페미니즘의 도전≫의 분석을 통해 맑스주의 여성해방론과 페미니즘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이며, 페미니즘이 맑스주의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페미니즘의 도전≫이 도전하는 것들

 

1) 15주년 기념 판 머리말 그리고 <여성주의,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

 

15주년 기념 판 머리말에서 정희진은 맑스주의를 왜곡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앞으로 철학은 세계를 변혁할 것이다.” 한 때 우리를 열광시켰던 이 말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바로 반박되었다. 지금 세상은 다르게 해석하는 자체가 변혁이라는 사실, 담론의 힘을 모르는 이는 없다. 여성주의는 이론과 실천, 물질과 언어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새로운 언어가 곧 사회변화임을 보여줌으로써 인류의 앎과 삶에 혁명을 가져왔다.”3)

 

그리고 본문 1부에서 <여성주의,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이란 제목의 글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언어와 물질의 분리는 남성 중심적 사유이다. 많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여성주의자들도 가정하고 있는 여성운동과 여성주의 지식을 대립시키는 사고방식은 서구 근대성의 산물이다. 운동과 언어 사이의 이원론, 위계적 사고는 “이제까지의 모든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앞으로 철학은 세계를 변혁할 것이다.”라는 마르크스의 테제를 비판 없이 수용한 결과다. 이 테제는 마르크스주의 남성 젠더, 즉 변혁이론으로서의 한계를 어김없이 고백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저항하고자 하는 세계관은 어떤 차원에서는 일종의 쌍생아인데, 이들은 모두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는 하나(‘과학’)이며 그 외의 생각은 ‘이데올로기’라는 관점을 공유한다. 즉 지배 세력이든 피지배 세력이든 정치적 주체는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의 입장에서 구성된 참·거짓만이 존재할 뿐, ‘다른’ 입장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4)

 

“이제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앞으로 철학은 세계를 변혁할 것이다.”라는 말은 맑스가 1845년에 쓴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들>의 11번째 테제이며, 1888년 엥엘스가 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부록으로 출판된 것이다. 박종철 출판사에서 나온 맑스-엥엘스 저작선집 1권에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유물론을 주장하였으나 헤겔의 변증법까지 부정하고, 자연에 대해서는 유물론의 입장을 견지했으나 사회와 역사에서는 여전히 관념론의 입장을 가진 철학자였다. 맑스와 엥엘스는 헤겔의 관념론적으로 거꾸로 선 변증법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개작했고, 자연만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에도 변증법적 유물론이 적용된다는 것을 사적 유물론을 정립하여 밝힘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를 정초했다. 노동자계급의 해방 사상으로서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포이에르바하를 지양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고, 그것의 이론적 표현이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들에 축약되어 있다. 즉 해석과 변혁(혹은 변화)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통일된 개념이다. 정희진은 이것이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바로 반박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반박하는 사람은 존재할 수 있으나, “반박되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 반박에 정희진이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주장하는 말인데, 이어지는 “지금 세상은 다르게 해석하는 자체가 변혁이라는 사실, 담론의 힘을 모르는 이는 없다.”말을 통하여 정희진은 이론과 실천을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일시한다. 해석하는 것은 하나의 변혁일 수 있으나, 해석과 담론은 대중을 사로잡아 물질적인 힘으로 전화되었을 때, 실천으로 발전하였을 때, 변혁을 완수할 수 있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라고 했고,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혁명적 이론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라고 했다.

이어서 정희진은 “여성주의는 이론과 실천, 물질과 언어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새로운 언어가 곧 사회변화임을 보여줌으로써 인류의 앎과 삶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주장함으로써 마치 맑스주의가 이론과 실천, 물질과 언어의 이분법에 기반한 사상인 것처럼 왜곡한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의 올바름을 강조하는 방법이 다른 주장을 왜곡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맑스주의가 남성 중심의 세계관이라는 것은 역사 왜곡이다. 맑스주의는 클라라 체트킨,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같은 위대한 여성혁명가들에 의해서 발전해 왔으며, 부르주아 여성운동인 자유주의 페미니즘(모든 여성이여 단결하라!)에 대항해서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조직하고 프롤레타리아 남성과 단결하여 자본에 저항하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혁명의 주체로 세우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조직과 행동 없이는 사회주의가 불가능함을 역설하면서 20세기 사회주의를 건설했다.5)

 

2) 머리말에 인용된 도나 해러웨이

 

정희진은 다양한 페미니즘 조류의 이론가들을 구분하지 않고 자신이 인용하고 싶은 부분만 인용한다.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 지식은 목격에 관한 것입니다. 특정한 것을 안다는 사실은, 설명 가능성의 의미를 변화시킵니다. 목격은 언제나 해석적인, 우발적인, 예약된, 속기 쉬운 참여입니다. 목격이란 증언하는 것이고,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 것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입니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6)

위의 인용문만으로는 도나 해러웨이가 어떤 페미니스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이보그 선언”으로 유명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그녀는 여성이 임신, 출산과 같은 생물학적 특징 때문에 남성에 종속되었으며 과학기술의 발달은 출산을 조절할 수 있으며, 남성에 종속되는 가족과 이성애를 부정하고 반려동물과 가족을 구성하는 전략으로 이성애를 넘어설 것을 제안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기존의 맑스주의가 여성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계급문제는 사회주의로, 여성문제는 페미니즘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데,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사용한 가부장제와 상호교차성 개념을 차용하고, 맑스주의에서 재생산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재생산은 기존의 맑스주의의 개념이 아니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개념으로서, 생산은 공장과 사회에서, 재생산은 가족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재화와 서비스의 재생산이 아니라 노동력의 재생산을 의미한다. ‘여신보다 사이보그!’를 선언한 도나 해러웨이의 사상은 정희진의 책에서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단지 ‘페미니스트이자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로서만 인용된다. 그러나 정희진은 그녀의 사상을 알고, 동의 혹은 이해하고 있으므로 인용하지 않았을까?

 

 

3) 단결을 부정하는 여성주의

 

“어떤 것이 더 중요한, 더 본질적인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 사유는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부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운동은 부분 운동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연대이지, (남성중심의) 단결이나 통합이 아니다. 어떻게 전체 운동이 따로 있고, 부분 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전체와 부분을 나누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7)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사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여성억압의 기원과 여성해방의 물질적 조건을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구성체의 기본모순이 계급모순이고, 이 계급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전체 운동과 부분 운동을 상정한다. 계급적 단결과 민중 연대에 의거하여 부분 운동들은 전체 운동으로 통합된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맑스주의는 남성 중심적 사유이다. 그런데 연대와 단결이 대립되는 개념인가? 개인들이 가지는 모든 차이와 타자성에 의존해서 파편화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개인들이 가지는 모든 차이와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민중 연대에 복무하여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4) 지배계급으로서의 남성,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지배계급으로서의 남성은 5천 년 동안 피지배계급인 여성을 때리고, 죽이고, 교환하고, 사고 팔고, 해고하고, 착취해 왔다. 그렇다면 ‘적’이 아닌가? 왜 여성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는 것을 두려워할까?”8)

위 인용문의 내용은 ≪성의 변증법≫(1970)이란 책의 저자로 유명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술라미스 파이어스톤(1945-2012)이 1969년 ‘레드스타킹 선언’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파이어스톤은 여성은 억압받는 하나의 계급이라는 ‘성 계급론’을 주장했고,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통해 여성계급 의식화를 통한 집단행동을 주장했다. ‘레드스타킹 선언’은 이후 ‘드센년’ 선언, ‘강간 반대 선언’, ‘미스 아메리카를 멈춰라 선언’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여성이 남성에 종속되는 가부장제의 기원과 토대에 대해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비판받았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하는 생물학적 특성이 있는 한 인류사회 전체에 걸쳐서 남성에 대한 종속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여성문제의 해결은 남성이 사라져야만 해결되는 것이란 결론이 나온다. 파이어스톤의 뒤를 이은 밸러리 솔레너스는 ‘남성 거세 결사단 선언’을 통해 생물학적 성(임신, 출산)이 여성을 억압하는 주요 기제이므로 생물학적 가족은 해체되어야 하고, 과학기술에 의해 여성이 출산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남성의 도움 없이 아이를 낳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므로 남성은 필요 없고 남성은 없어져야 하는 생물학적 재앙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등장한 한국의 페미니즘 그룹이 2015년 메갈리아인데, 이들은 일베들의 여성혐오 발언에 ‘미러링 전략’으로 남성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았는데, 한국 남성을 ‘한남충’, 일베들의 ‘여성을 삼일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남성은 숨쉴 때마다 때려야 한다’며 ‘숨쉴한’이라고 불렀다. 메갈리아에서 분화된 워마드는 비정규직 남성을 ‘번식 탈락충’으로 부른다. 또 이들은 트랜스젠더 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므로 여대에 입학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어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배계급으로서의 남성,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파이어스톤의 말을 인용하는 정희진은 파이어스톤의 주장에 대해서 동의하는 것일까?

 이에 반해서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인류가 원시공산제 사회에서는 남녀가 평등했으나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한 잉여생산물의 발생, 군혼에서 단혼으로 가족제도의 변화, 가족 내에서의 성별 분업의 성격의 변화, 사유재산과 상속, 계급, 국가의 발생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이 발생했고, 그 구체적 형태가 모계씨족에서 부계씨족으로의 변화라고 설명한다. 여성문제의 해결도 인류가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라는 계급사회를 거쳐서 공산주의라는 무계급사회로 전진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가족 내에서 남성 지배가 확립된 이후 인류는 간통과 매음으로 보충된 일부일처제로 이행하였는데, 정조는 여성에게만 강요되고 남성은 여전히 군혼생활을 하고 있다. 여성해방의 물질적 기초는 여성이 사회적 노동으로 복귀하고 가사노동이 사회화되어야 가능한데,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적 노동(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이라는 이중의 부담을 여성에게 강요하는 억압적 체제이지만, 한편으로는 저임금으로 이윤을 확대하려는 자본의 욕망에 의해 여성이 사회적 노동으로 복귀하고, 또한 가사노동이 이윤의 대상이 되는 영역으로서 사회화되고 있어 여성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9)

“완전히 자유로운 결혼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이에 기인하는 소유관계가 지양됨으로써, 오늘날 아직도 배우자의 선택에 아주 큰 영향을 주는 그 모든 부차적인 경제적 고려가 제거됨으로써 비로소 일반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때에는 이미 상호 간의 애정 이외에 아무런 동기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앞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양한 후에 자리 잡을 양성 관계의 형태에 대해 우리가 지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주로 부정적인 측면들로, 대부분 소멸하게 될 것들이다. 그러나 새로 나타나게 될 것은 어떤 것들인가? 그것은 남녀의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서, 남자는 일생을 두고 금전이나 기타 사회적 권력수단으로 여자를 사는 일이 없고, 여자는 진정한 사랑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동기로도 결코 남자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며, 경제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을 거부하지 않을 때 확정될 것이다.”10)라고 엥엘스는 이미 1884년에 쓰고 있다.

 

5) 노동현장에 대한 무지 혹은 무관심

 

“비슷한 학력과 연령대의 남녀가 담당하는 남성 경비원과 여성 청소부(사실 청소의 노동강도가 더 세다)의 급여가 다섯 배 격차가 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일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경아, <여성주의적 직무평가를 위한 연구>, 이화여자대학 여성학과 석사논문, 1999)”11)

 

이 책의 초판이 2005년이고, 1999년 논문을 인용할 수도 있고, 1999년의 논문은 그 이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개정증보도 하고 15주년 기념판도 찍었으면, 이 부분을 수정을 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2002년에 부산대 청소, 경비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할 때 이미 남성 경비원과 여성 청소노동자의 임금격차는 거의 없었다. 몇 년 만에 그렇게 변화했을 지도 모르지만, 현재에도 남성 경비원은 정규직, 여성청소부는 비정규직이라면 두 배(많으면 세 배) 정도 차이는 날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용역 비정규직 노동자인 현재의 노동현장에는 그 둘의 임금격차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정희진은 상호교차성, 즉 여성이면서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교차하는 억압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상 노동현장의 현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져서 지적하고 넘어간다.

 

6) <‘제국’적 상황, 성폭력과 ‘성노동’을 넘어서>

 

정희진은 성 판매 여성을 ‘성노동자’로 규정하고 활동하는 그룹에 대해서 그다지 명확한 입장을 나타내지는 않는데, 비판적이라기보다는 호의적인 편에 가깝게 보인다. 위의 제목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희진이 말하는 ‘제국’적 상황은 1990년대 이후 쏘련의 해체 이후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성립된 것으로 보고, 심화된 빈부격차는 노동자와 자본가보다 노동자와 노동자 간에, 여성과 남성보다는 여성과 여성 간의 차이를 더욱 극심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동자와 노동자의 차이가 크다고 해도 자본가와 노동자의 차이보다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 간의 차이가 여성과 여성과의 차이보다 큰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남성도 자본가계급 남성이거나 노동자계급 남성이고, 여성도 자본가계급 여성이거나 노동자계급 여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이 두 계급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정희진은 이런 상황에서 성 판매는 성별뿐만 아니라 빈곤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 성 판매가 빈곤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서구 유럽 남성들의 동남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지로의 섹스 관광에서 성 판매자는 현지 여성뿐만 아니라 소년으로까지 확대된다. 빈부 격차로 인한 성매매는 점차 젠더뿐만 아니라 계급, 인종 모순의 성격을 띠게 된다. 섹스 관광에 나선 서구 백인 남성들은 남반구의 가난한 여성들과 소년들을 정복해야 할 ‘자연’으로 간주한다. 성매매를 젠더·계급·인종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보는 페미니스트들은, 성폭력과 성노동의 이분법을 넘어 탈식민 여성주의, 에코 페미니즘(생태 여성주의)의 시각으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한다. 마리아 미즈는 유럽 백인 남성의 섹스관광을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결과라고 본다.”12)

 

“여성주의자와 성 판매 여성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현실에 의해 정해진다. 여성주의는 공통된 본질과 정체성을 지닌 경험적 집단의 투쟁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범주가 종속적으로 구성되는 복합적 형식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성매매 역시 다른 방식의 접근을 모색해 볼 수 있다. 여성주의자의 입장이나 성 판매 여성의 입장이나 모두 ‘부분적 진실’이고, ‘상황적 진실’이다. 반다나 시바나 마리아 미즈 같은 여성주의자들은 근본적인 인간의 욕구 충족을 바탕으로 한 절대주의와 보편주의는 근대적 서구 남성 중심적 보편적 인권 개념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만일 여성주의자가 ‘성매매 근절’이라는 입장보다 ‘근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을 정치적 목표로 상정한다면, 성 판매 여성과 대화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이러한 대화는 성매매를 반대하는 여성운동이 다양화, 다원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성운동의 다원화는 성별 의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성숙을 요구한다.”13)

 

여기서 정희진이 인용하고 있는 마리아 미즈는 대표적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서 1986년에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이라는 저서로도 유명하다. 마리아 미즈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가부장제는 약탈이며, 남성의 폭력과 약탈이 여성에 대한 억압의 기원이라고 한다. 노동자계급 남성이 여성을 ‘가정주부화’함으로써 첫째로 일자리를 독점할 수 있고, 둘째로 가족 내 모든 현금 소득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으므로 물질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착취가 아니라 약탈이라고 규정하여, 남성이 여성과 식민지를 약탈한다는 데 모든 남성이 물질적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정치적 결론은 서구 여성은 소비자 운동이고, 제3세계 여성은 토지와 자급적 생산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에코 페미니즘은 기후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탈 성장을 주장하는 흐름이기도 한데,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의 대안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급자족 경제이다. 마리아 미즈는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분류되지만, 그냥 에코 페미니스트라고 분류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마리아 미즈와 함께 ≪에코 페미니즘≫을 공동 저작한 반다나 시바는 환경운동가로도 유명하다. 에코 페미니즘은 생태학(ecology)과 여성주의(feminism)의 합성어이다. 페미니즘의 목표와 생태학 운동의 목표가 같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을 주창하며, 자연에 가해지는 폭력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이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인간이 자연을 타자화하고 착취하는 방식과 기득권층인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하고 착취하는 방식은 공통점이 있으며, 이러한 공통점에서 두 측면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고, 한쪽의 억압이 동시에 다른 쪽의 억압을 낳기 때문에, 두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정희진은 판매되어서는 안 되는 성이 판매되는 현실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를 말하지 않는다. 빈곤한 여성이 성 판매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 이 현실은 모든 것을 상품화해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의미한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판매되지 말아야 할 많은 것들이 버젓이 판매되고, 그것들을 만드는 노동을 하는 노동자가 노동자로 인정되는 것들이 많은데, 성 판매만 금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무기를 만들고 판매하는 것, 불량식품 등등. 그러나 여성해방의 관점에서 성매매는 여성에게 치명적인 것이다. 특히 생계를 위해서 성 판매를 하는 여성을 성노동자로 규정하고 성 판매를 합법화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다. 이 여성들이 다른 생계수단을 찾도록 도와주고 사회가 그 비용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은 지금처럼 성매매 금지법을 피해서 음성적으로 판매되는 성 산업을 모두 근절할 것이다.

마리아 미즈는 자본주의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에게서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것에 의존해서 유지되는 사회라는 기본적 사실을 부정한다. 단 한 순간도 단 한 명의 자본가도 노동자의 잉여노동의 착취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맑스가 1867년에 출판한 ≪자본론≫을 보라. 이것을 부정하고 비판해 보라. 제국주의의 식민지 약탈의 본질에 대해서, 레닌은 1916년에 쓴 ≪제국주의론≫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고도의 단계에 달해,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독점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은행자본이 산업자본과 융합하여 금융자본을 이루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금융과두제가 형성되고, 상품수출과는 구별되는 자본수출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게 되고, 국제적 독점자본가 단체가 형성되어 세계를 분할하고, 자본주의 거대 열강들에 의해 전 세계의 영토적 분할이 완료된다고 분석하였다. 100년 전의 분석이나 21세기 지금도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 영토적 분할의 방식이 식민지에서 신식민지로 변화된 것에 불과하다. 제국주의 시대의 제국주의 자본과 (신)식민지 인민 간의 모순은 반제 민족해방투쟁과 반자본주의 투쟁을 하나로 만들고 있다. 여기에서 제국주의 노동자계급과 (신)식민지 민중과의 단결과 연대를 호소해야 하는데, 마리아 미즈처럼 남성이 약탈하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좋을까?

맑스주의 여성해방론과 페미니즘(정희진의 책에서는 주로 여성주의로 표현되고 있다)이 함께 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7) <글로벌 자본주의와 남성성, 폭력의 시장화>

 

“사실 최근 빈발(재현)하는 이른바 ‘묻지마 폭력’은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간 행동 중 하나다. ‘평화 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이나 무력 갈등이 벌어질 때 상대방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정부/반정부. 좌/우, 혁명/반혁명 등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남성들의 중요한 투쟁 전략의 일부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의 전쟁터다. 남성들 간의 갈등이 여성의 몸에 실현된다는 이야기다. 즉 기존의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은 남성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논의처럼 여성주의자들은 이 이분법 논쟁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해 왔다.”14)

 

위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정희진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주요 논리를 채택하고 있다. 위에서 술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 계급론에 의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의 구호를 설명했고,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 이론을 설명했으니 반복하지 않겠다.

정희진의 위 글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정부/반정부. 좌/우, 혁명/반혁명 등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남성들의 중요한 투쟁 전략의 일부”라는 표현에 의하면 현실 운동에서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혁명을 준비하는 좌파/반정부/혁명운동은 우파/정부/반혁명과 동급이 된다. 이것은 역사 왜곡이고, 반동적 사상이다. 역사 속에서 예를 들면 파리 꼬뮌에서 여성 전사들이,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 베트남 혁명의 과정에서 혁명군 속에서 남녀 차별이 있었고, 이 혁명군들이 반혁명 진영의 여성에게 성폭력을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정말 개인적으로 그런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으로 남녀 노동자를 단결시키고 자본가권력에 저항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페미니즘은 애초에 그런 세상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도 여전히 남성 중심적 사회일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노동(계급), 남성성, 폭력 문제는 하나의 세트였다. 폴 윌리스의 고전적인 지적대로, 혁명이 안 일어나는 이유는 남성의 계급적 타자성이 폭력과 같은 남성성(젠더)으로 상쇄되기 때문이다. 남성성은 민중연대와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완충’역할을 한다. 이것이 진보적 역사주의자들의 바람과 달리, 민중이 반동적인 이유이고 역사가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다.”15)

 

이쯤 되면 남성이 존재하는 한 민중 연대나 혁명은 불가능하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은 민중은 반동적이고 역사는 반복적으로 실패한다는 청산주의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국가 자체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 형식이 아니다. 진보는 국가 건설 과정에 인권과 절차적 민주주의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보수는 강한 국가 건설을 위해 이를 잠시(?) 유보하자는 것이 담론의 차이이다, 이미 국가는 글로벌 대도시들의 연합, 그들만의 클럽으로 변화한 지 오래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본을 중심으로 한 국가 범주의 유동성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쇠퇴라는 지구화나 이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하는 민족주의의 부활은 모두 수시로 변화하는 단면의 일부분이다. 지금은 그저 다른 형태의 국민국가 시대인 것이다.”16)

 

맞다. 국가 자체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 형식이 아니다. 국가란 역사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사회가 화해할 수 없는 계급모순으로 인하여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도구로서 등장했다. 정희진이 말하는 진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표현이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인류가 계급사회(노예제, 봉건제, 자본제)를 극복하고 무계급사회(공산주의)로 전진하기 위해 과도기 국가(프롤레타리아트 독재=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를 거쳐서 계급도, 국가도, 여성에 대한 억압도 존재하지 않는 무계급 사회로 발전한다고 본다. 현재 지구화, 세계화 등의 개념은 현대 국가가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독점자본들의 국제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3. 글을 마치며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한국 사회 일상의 성 정치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일상 속에 오랜 계급사회의 남성 중심적인 성차별 제도와 의식, 봉건제 잔재의 남존여비 사상이 얼마나 강고하게 구석구석 남아 있는지를 잘 고발하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래 맞아, 정말 그래!”라고 무릎을 탁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분석하는 도구가 페미니즘이어서 이 문제를 극복하는 올바른 대안을 찾지 못하면서, 위에서 확인했듯이 남성이 문제고, 남성성이 문제고, 남성이 존재하는 한 민중은 반동적이고 역사는 반복적으로 패배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이와는 달리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맑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 엥엘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거쳐, 클라라 제트킨,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의 여성혁명가에 의해서 실천적으로 발전해왔다.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왜곡된 평가는 사회주의도 여성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맑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설명했듯이,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서 자본주의의 흔적과 때가 묻어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인류는 사회주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공산주의로 전진할 수 없다. 사회주의이면서도 제국주의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던 20세기 사회주의의 경험은 얼마나 그 과정이 지난하고 험난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페미니즘은 현재 한국 여성이 처해 있는 각종 모순에 대한 즉자적 요구, 그리고 여성운동의 현실적 과제들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이론 체계로는 그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여성문제를 가장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있으며, 페미니즘이 가진 이론적 한계에 대한 극복 방안을 제시한다.

 

 <참고 자료>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22

엥엘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김대웅 옮김, 두레, 2012

김민재, 이지완, 황정규,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 해방, 2019

천연옥, <노동운동과 페미니즘>, ≪현장과 광장≫ 2호, 2020.5.

천연옥, <사회주의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 ≪현장과 광장≫ 3호, 2020.11.

천연옥, <여성해방론의 쟁점들>, ≪노동사회과학≫ 15호, 노사과연, 2021.5.

노사과연


1)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811303&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2)N번방 추적활동을 했던 박지현이 이재명을 지지하면서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고, 정희진도 경향신문의 칼럼에서 이재명 지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고, 대선 이후에도, 심지어 ‘이재명의 개딸들’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3)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22, p. 10.

 

4) 같은 책, pp. 100-101.

 

5) 천연옥, <사회주의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 ≪현장과 광장≫ 3호, 2020.11.

 

6)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22, p. 31.

 

7) 같은 책, pp. 42-43.

 

8) 같은 책, pp. 56-57.

 

9) 프리드리히 엥엘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 김대웅 옮김, 두레.

 

10) 프리드리히 엥엘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김대웅 옮김, 두레, pp. 130-141.

 

11)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22, p. 80.

 

12) 같은 책, p. 255.

 

13) 같은 책, p. 259.

 

14) 같은 책, p. 294.

 

15) 같은 책, pp. 298-299.

 

16) 같은 책, pp. 306-307.

 

천연옥 부산지회장

8개의 댓글

  • 글쎄… 비판할 문구만 액기스로 찾아서 채운 느낌의 글입니다. 그리고 여성주의와 정희진 씨의 주장을 너무 같은 걸로 놓고 썼습니다. 다루는 대상 측의 주장을 너무 단순화한 문제도 있군요.

  • 혹시 본문에서 언급된 페미니즘 선언문들의 발표 순서 등에 오류가 있는건가요?
    아니면, 아래의 자료가 잘못된 걸까요?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 (1967)
    미스 아메리카 대회를 멈춰라! (1968)
    레드 스타킹 선언문 (1969)
    드센 년 선언문 (1969)
    강간 반대 선언문 (1971)

    • 언급한 목록이 맞아요… 위 글 내용이 틀린겁니다. 그것만 틀린게 아니라 현재 국내 여성운동의 추이도 완전히 잘못 파악하고 있는 글이에요. 과학적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지경입니디

  • 를 파이어스톤이 썼나? 정확히 확인도 안하고 쓴 글이다.

    난 글쓴이가 이 글을 민주노총의 소위 ‘페미니스트 여성활동가들'(글쓴이가 생각하는?)에게 일종의 복수심(?)을 가지고 썼다고 본다. 그러니 이런 사실확인도 안 된 글이 나오지. 임금격차나 특정 인터넷 사이트 언급한 것은 참 기가찬다.

    이런 글을 교정 없이 실어주는 이 단체도 어떻게 굴러갈지 알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