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농민 문제에 관한 당의 세 가지 기본 구호―얀-쓰끼에게 보내는 답장

 

이오씨프 쓰딸린(Иосиф Сталин)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귀하의 편지는 물론 잘 받았습니다. 답장이 조금 늦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1. 레닌은 “모든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가 권력에 관한 문제이다”(≪레닌 전집≫ 제21권, 142페이지를 보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계급 또는 계급들의 수중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가, 어느 계급 또는 계급들이 타도되어야 하는가, 어느 계급 또는 계급들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가 ― 이것이 “모든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당의 기본적인 전략적 구호는 혁명의 특정 단계 전 기간에 걸쳐 타당한 것으로서, 레닌의 이러한 기본적인 테제에 전적으로 의거하지 않는다면 기본 구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본 구호가 올바르기 위해서는 그 구호가 계급 역량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에 기초하고, 계급투쟁 전선에서 혁명 역량의 올바른 배치 계획을 보여 줘야 하며, 대중을 혁명 승리의 투쟁 전선으로 그리고 새로운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투쟁 전선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또한 당이 이러한 광범위한 인민 대중 속에서 혁명 과업 완수에 필수적인 강력한 정치적 군대를 편성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혁명의 일정한 단계에서 패배와 후퇴, 실패와 전술적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전략적 기본 구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 혁명의 단계 기본 구호―“모든 농민과 연합하여, 부르주아지를 중립화하고, 짜르와 지주를 반대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해 투쟁하자”―는 1905년 혁명이 실패하였지만,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따라서 당의 기본 구호 문제와 혁명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혁명의 성공이나 실패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혁명 과정에서 당의 기본 구호가 낡은 계급의 권력을 타도하도록 이끌었으나, 그 구호로부터 나온 혁명적인 여러 요구가 실현되지 않았거나, 그 실현을 위해 기간이 오래 걸리거나, 새로운 혁명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본 구호가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컨대 1917년 2월 혁명은 짜르와 지주를 타도했지만,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등의 일은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혁명의 첫 단계에서 우리의 기본 구호가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0월 혁명으로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ㄱ) 일반적으로는 부르주아 혁명의 완수와 ㄴ) 특히 농촌에서 부농을 고립시키는 사업으로 즉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를 완료하는 데 상당한 기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혁명의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의 기본 구호인 “빈농과 연합하고, 중농을 중립화하며, 도시와 농촌에서 자본주의에 반대하여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위해 투쟁하자”라는 구호가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따라서 당의 기본 구호 문제와 그 구호로부터 나오는 특정한 요구를 실현하는 형태와 기간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당의 전략적 구호는 일정한 시기에 나타나는 혁명 운동의 단편적 성공이나 실패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구호에서 나오는 특정 요구를 실현하는 형태와 기간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는 더욱더 없습니다. 당의 전략 구호를 평가할 때, 혁명의 승리와 새로운 계급에 권력을 집중하기 위한 투쟁 전선에서 계급들의 세력 분석과 혁명 세력의 올바른 배치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에서만 평가해야 합니다.

 

귀하의 오류는 이 가장 중요한 방법론적 문제를 간과했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2. 귀하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단지 10월 혁명 이전까지만 전체 농민과 동맹을 맺었다는 주장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맞지 않습니다. ‘전체 농민과의 동맹’이라는 구호는 10월 혁명 이전이나 10월 혁명 당시에나 10월 혁명 이후의 첫 시기에도 정당합니다. 모든 농민이 부르주아 혁명의 완수를 염원했기 때문입니다.

 

귀하의 말에 따르면 혁명의 단계(1905년-1917년 2월)에 있어서 당의 전략적 구호, 즉 짜르와 지주의 권력을 타도하고 노동계급과 농민의 독재 수립이 과업일 때의 구호가 혁명의 둘째 단계(1917년 2월-1917년 10월)에 있어서 당의 전략적 구호, 즉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이 과업일 때의 구호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귀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의 근본적 차이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하가 범한 오류는 아마도 귀하가 전략적 구호의 기본 내용에 대한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략적 구호의 기본 내용은 혁명의 특정 단계에서의 권력에 관한 문제, 즉 어느 계급이 타도되고 어느 계급으로 권력이 넘어가는가 하는 권력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귀하가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귀하는 10월 혁명과 10월 혁명 이후 첫 시기 동안 모든 농민이 부르주아 혁명을 끝까지 완수할 염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농민과의 동맹”이라는 구호를 적용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 10월 거사와 10월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는 것에 제한되거나 부르주아 혁명의 완성이 주요 과업이라고 말했습니까? 귀하는 이런 말을 어디서 들었습니까? 귀하는 부르주아지 권력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는 것이 부르주아 혁명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쟁취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부농(이들도 물론 농민입니다)이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을 지지하리라고 귀하는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토지 국유화, 토지 사유제 폐지, 토지 매매 금지 등등에 관한 법령을 사회주의 법령으로 인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부농과의 투쟁 속에서 실시된 것이지 부농과의 동맹하에서 실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귀하는 어떻게 부정할 수 있습니까?

 

부농(이들도 또한 농민입니다)이 공장, 제분소, 철도, 은행 등등의 수탈에 관한 쏘비에트 정권의 법령이나 제국주의 전쟁을 국내 전쟁으로 전환하라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구호를 지지하리라고 귀하는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10월 혁명의 기본 내용이 위와 같은 조치도 아니고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는 것도 아닌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귀하는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10월 혁명의 주요 과업 중 하나가 부르주아 혁명의 완수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10월 혁명 없이는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10월 혁명 자체도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지 않고는 공고화될 수 없었습니다. 또 10월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했기 때문에 모든 농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근거로 부르주아 혁명의 완수가 10월 혁명 과정의 파생적 현상이 아니라 본질적 목적이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10월 혁명의 주요 목적, 즉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며 제국주의 전쟁을 국내 전쟁으로 전환하고 자본가를 수탈하는 것 등등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전략적 구호의 주된 내용이 모든 혁명의 기본 문제, 즉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문제라면, 이로부터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는 문제와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쟁취하는 문제, 즉 혁명의 둘째 단계 전략 구호의 주요 내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한 것이고, 중세의 모든 쓰레기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입니다. 농촌 지역에서는 이것이 최고로, 정말 결정적으로 중요하였습니다. 이것이 실패했다면 지난 세기 후반기에 맑스가 말한 농민 전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결합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했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 자체를 공고히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부르주아 혁명의 완수는 단번에 성취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부르주아 혁명은 귀하가 편지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1918년의 일부분일 뿐만 아니라 1919년(볼가강 유역과 우랄산맥 지역)과 1919-1920년(우끄라이나)의 일부분을 포괄하는 긴 기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꼴차크와 제니낀의 공세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때 모든 농민은 지주 권력이 회복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 농민은, 정확히 모든 농민은 부르주아 혁명을 확실히 하고 혁명의 과실을 지키기 위해 쏘비에트 권력 중심으로 단결해야만 했습니다. 살아 있는 현실의 이 복잡하고 다양한 진행 과정,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직접적인 사회주의 임무와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는 임무의 이 “기묘한” 뒤얽힘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레닌의 저작에서 인용한 내용과 당의 구호가 구현되는 메커니즘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뒤얽힘이 혁명의 2 단계에서 당의 구호가 틀렸다거나 이 구호가 혁명의 1 단계에서의 구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러한 뒤얽힘은 혁명의 2 단계에서 당의 구호, 즉 빈농과 연합하여 도시와 농촌에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를 반대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옹호하자는 구호가 옳다는 것을 확증할 뿐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우선 10월 혁명에서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수립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러한 권력만이 부르주아 혁명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0월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정치적 군대를 준비하고 조직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군대는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수립할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군대는 오직 노동계급과 빈농이 동맹하여 부르주아지를 반대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하자는 구호 아래에서만 준비되고 조직될 수 있었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1917년 4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실시된 이러한 전략적 구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러한 정치적 군대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10월 혁명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명백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의 완수와 프롤레타리아 권력 장악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인 혁명의 제2 단계 전략적 구호를 대립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모순”을 피할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혁명 제1 단계(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전략적 구호와 혁명 제2 단계(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략적 구호의 기본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혁명 제1 단계에서는 우리가 모든 농민과 함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나아갔다면 혁명 제2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빈농과 함께 자본 권력을 반대하여 나아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혁명 제1 단계와 제2 단계의 계급 역량 분석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1917년 2월까지는 노동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구호 아래에서 사업하다가 1917년 2월 이후에는 노동계급과 빈농사회주의 독재라는 구호로 바꾼 사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귀하의 도식을 받아들인다면 1917년 3월과 4월 사이에 하나의 구호가 다른 구호로 바뀐 사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귀하는 이에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당의 두 가지 전략적 구호의 이 기본적 차이를 레닌은 이미 소책자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서 사회민주당의 두 가지 전술≫에서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준비하면서 당의 구호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였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제 군주의 반항을 힘으로 제압하고 부르주아지의 변덕을 무력화하기 위해 농민 대중을 자기편에 끌어들여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 (≪레닌 전집≫ 제8권 96쪽을 보시오.)

 

다시 말해 모든 농민과 동맹하여 전제 군주를 반대하고 부르주아지를 중립화하여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하라는 것입니다.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 준비기에서 당의 구호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의 반항을 힘으로 제압하고 농민과 소부르주아지의 변덕을 무력화하기 위해 주민 중 반(半)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사회주의 혁명을 해내야 한다. (같은 책.)

 

다시 말해, 빈농 및 일반 주민의 반(半)프롤레타리아층과 동맹하고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지를 중립화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1905년의 일이었습니다.

 

1917년 4월에 레닌은 당시의 정치 정세를 노동계급 및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와 부르주아지의 현실 권력의 뒤얽힘으로 묘사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러시아에 있어서 현 정세의 특징은 혁명이 1 단계에서 2 단계로 넘어가는 데 있다. 혁명의 제1 단계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조직이 충분하지 않아 권력이 부르주아지의 손에 놓여 있다. 혁명의 제2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층[1]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의 손에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 (레닌의 4월 테제 ― ≪레닌 전집≫ 제20권, 88쪽을 보시오.)

 

1917년 8월 말 10월 혁명 준비가 본격화되었을 때, 레닌은 “농민과 노동자”라는 특별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2]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만이 군주제를 타도할 수 있다. ― 이것이 그 당시(즉, 1905년 ― 이. 쓰딸린) 우리가 취하는 계급 정책의 기본 정의였다. 그리고 이 정의는 옳았다. 1917년 2월과 3월에 이를 다시 한번 확증했다. 오직 빈농[3]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우리 강령은 반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른다)을 이끌고 앞장서 가는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전쟁을 민주적 평화로 종식하며, 전쟁에 의한 상처를 치유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긴급한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수 있다. ―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취하는 계급 정책의 정의이다. (≪레닌 전집≫ 제21권, 111쪽을 보시오.)

 

이것을 마치 오늘날 우리가 노동계급 빈농의 독재를 하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입니다. 우리는 노동계급과 빈농의 독재라는 구호 아래 10월 혁명으로 나아갔고 형식적으로 실현하였습니다. 형식적이라 한 것은 좌익 사회혁명당과 동맹을 맺고 지도부를 나누어 가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이미 프롤레타리아 독재였습니다. 우리 볼쉐비끼가 다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좌익 사회혁명당의 “반란” 이후, 좌익 사회혁명당과의 동맹이 무너진 후 지도권이 하나의 정당 즉 국가의 지도권을 다른 정당과 나누지 않으며 또 나눌 수도 없는 우리 당의 수중에 전적으로 완전히 넘어온 때에 노동계급과 빈농의 독재는 형식적으로도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부릅니다.

 

끝으로 1918년 11월 레닌은 혁명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모든 농민과 함께 나아가는 부르주아 혁명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1905년부터 수백, 수천 번 말해 왔다. 또 우리는 이 역사적 과정의 필연적 단계를 뛰어넘거나 법령으로 없애 버리려고 절대 시도하지 않았다. … 그러나 10월 혁명 훨씬 이전 19174월부터, 즉 우리가 권력을 잡기 훨씬 이전부터[4] 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 우리는 인민에게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설명했다. 혁명은 이제 이 단계에서 멈출 수 없다. 나라는 앞으로 나아갔고, 자본주의는 발전했으며, 파산은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좋든 싫든)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구하고 노동자와 피착취자의 고통을 덜어 줄 다른 길이란 없기 때문이다. 결과는 우리가 말한 대로 되었다. 혁명의 진행 경로는 우리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처음에는 ‘모든’ 농민과 함께 군주제, 지주, 중세 체제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 정도에서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런 다음 빈농과 함께, 반(半)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착취당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지방의 부호, 부농, 투기꾼[5]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을 포괄하는 자본주의에 반대할 때 그때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되었다. (≪레닌 전집≫ 제23권, 390-391쪽을 보시오.)

 

보다시피 레닌은 첫 번째 전략적 구호(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준비기의 구호)와 두 번째 전략적 구호(10월 혁명 준비기의 구호)의 근본적인 차이를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첫 번째 구호는 모든 농민과 함께 군주 체제를 반대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구호는 빈농과 함께 부르주아지를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는 일이 10월 혁명 이후에도 상당 기간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우리가 부르주아 혁명을 끝까지 수행했기 때문에 “모든” 농민이 우리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 이 사실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10월 혁명을 향해 나아갔고 빈농과 함께 10월 혁명에서 승리했으며, 부농의 저항과 중농의 동요에 대항하여 빈농과 함께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독재의 임무 중 하나가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를 수립하였다는 기본 명제를 조금도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명확한 것 같습니다.

 

 

3. 나아가 귀하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우리가 농촌의 빈농과 동맹하고 중농을 중립화시킨다는 구호 아래 10월 혁명에 나섰다’는 주장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맞지 않습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이유와 레닌의 인용문에 따르면, 이 구호는 오직 ‘농민 내부의 계급 분화가 성숙한’(레닌) 시기, 즉 ‘1918년 여름이나 가을’에나 생겨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발췌문에 의하면 당이 중농의 중립화 정책을 채택한 것은 10월 혁명의 준비기나 10월 혁명 기간이 아니라 10월 혁명 이후 특히 1918년 빈농위원회가 조직된 이후가 됩니다. 이는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중농의 중립화 정책은 빈농위원회가 조직된 1918년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끝난 것입니다. 중농의 중립화 정책은 1918년 이후에 그만두었습니다(시행한 게 아니라). 1918년 이후, 1919년 3월에 레닌은 우리 당 제8차 대회를 개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과거 사회주의의 훌륭한 대표자들은 ―그들이 아직 혁명을 확신하고 이론적으로 사상적으로 혁명을 위해 일하고 있을 때― 농민의 중립화, 즉 중농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방해하지 않고 적의 편을 들지 않는 중립적 사회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도 이러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문제 제기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6]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 우리는 사회주의 건설 단계[7]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에 들어섰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농촌 사업의 경험에서 검증된 구체적이고 세심한 기본 규정과 지침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규정과 지침에 따라 우리는 중농과 튼튼한 동맹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레닌 전집≫ 제24권, 114쪽을 보시오.)

 

보다시피 이것은 귀하의 편지에서 말한 것과는 정확히 반대입니다. 귀하는 현실에 실제 하는 우리 당의 실천을 뒤집어 놓음으로써 중립화의 시작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중농은 우리가 부르주아지를 완전히 타도하지 않는 한 그리고 쏘비에트 권력이 공고화되지 않는 한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우는소리를 하며 동요합니다. 그래서 중립화가 필요합니다. 중농은 부르주아지가 “영원히” 타도되고 쏘비에트 권력이 강고해져 부농을 압도하고 붉은 군대가 내전에서 승리하기 시작하자 우리 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흐름의 전환으로 말미암아 레닌이 제8차 당 대회에서 세 번째 전략적 구호, 즉 빈농에 의지하고 중농과 튼튼한 동맹을 맺어 사회주의 건설을 향해 나아가자는 구호를 제출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귀하는 이 잘 알려진 사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또한 귀하의 편지에 따르면 중농의 중립화 정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넘어가는 전환기나 혁명 승리 후 초기에는 잘못이고 적합하지 않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입니다.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부르주아 권력이 타도되었으나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아직 공고화되기 이전까지 중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동요하고 저항합니다. 바로 이 시기야말로 빈농과의 동맹과 중농의 중립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귀하는 오류를 고집하면서 농민 문제가 다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10월 혁명 이전의 러시아 경제 체제와 유사한” 다른 나라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 마지막 말은 정확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레닌이 코민테른 제2차 대회의 토지 문제에 관한 테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은 시기에 중농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당들의 정책을 말한 것이 있습니다. 레닌은 빈농 또는 더욱 정확히 “농촌 지역 피착취 노동 대중”을 농업 노동자, 반(半)프롤레타리아 또는 영세농과 소농으로 구성된 하나의 독자적 집단으로 규정하고 다음으로 넘어가 농촌 지역의 다른 독자적 집단인 중농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경제적 의미에서의 ‘중농’이란 소유주이거나 임차인으로서 토지를 조금 보유한 소농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토지는 첫째, 자본주의하에서 보통 가족과 가계를 유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약간의 잉여가 있을 수 있고, 이는 적어도 풍년에는 자본이 될 수 있다. 둘째, 상당히 빈번하게(예컨대 2-3개 농가 중 1개) 타인 노동력 고용에 의존한다. …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적어도 가까운 장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초기에는― 이 계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과업으로 삼을 수 없다. 반드시 이 계층을 중립화하는 과업, 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간의 투쟁에서 이 계층이 중립을 지키도록 하는 과업에 국한되어야 한다.[8]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 (≪레닌 전집≫ 제25권, 271-272쪽을 보시오.)

 

이런데도 어떻게 중농의 중립화 정책이 우리나라에서 “1918년 여름과 가을”에 와서야, 즉 쏘비에트 권력,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성취를 이룬 “이후에야 비로소” “발생”할 수 있었겠습니까?

 

보다시피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기와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의 강화기에 있어 프롤레타리아 당의 전략적 구호는 중농의 중립화 문제에서 보는 것처럼 귀하의 생각같이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4. 위에서 말한 모든 것으로 보아 귀하가 레닌의 저작에서 인용한 글들은 혁명의 제2 단계 당의 기본 구호에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용문들은 ㄱ) 10월 혁명 이전 당의 기본 구호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10월 혁명 이후 부르주아 혁명의 완수를 다루기 때문이며 ㄴ) 그 구호의 정당성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위에서 말했지만 다시 한번 반복해야만 하겠습니다. 혁명의 제2 단계,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기 이전 시기의 권력 문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당의 전략적 구호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시기에 있어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는 과업을 대립시켜서는 안 됩니다.

 

 

5. 귀하는 ≪쁘라브다≫에 발표된 몰로또프 동지의 유명한 논문 “우리나라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에 대하여”(1927년 3월 12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이 귀하로 하여금 나에게 해명을 요구한 “동기”로 보입니다. 귀하가 이 논문을 어떻게 읽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몰로또프 동지의 논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논문과 제14차 당 대회에서 한 농민에 관한 우리 당 구호에 대한 나의 보고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몰로또프 동지는 자신의 논문에서 10월 혁명 시기 당의 기본 구호를 다루지 않고, 당이 10월 혁명 이후 부르주아 혁명을 끝까지 수행하였기 때문에 모든 농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내가 위에서 말했듯이 기본 명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증하는 것입니다. 기본 명제는 우리가 도시와 농촌의 부르주아지를 반대하고 중농을 중립화하며 빈농과 동맹하여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였다는 것입니다.

 

≪볼쉐비끼≫ 제7-8호,

1927년 4월 15일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2, 3, 5 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
4 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
6, 8 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
7 강조는 나의 것. ― 이. 쓰딸린.

신재길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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