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12)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12장 중국 혁명의 승리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

 

 

1. 5ㆍ4운동과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

 

1949년 중국 혁명의 성공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19세기 중반 아편 전쟁 이후 약 100여 년에 걸친 중국 인민의 투쟁의 승리였다.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고 또 반(半)봉건적인 사회 상태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중국 인민이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견지한 이러한 관점은 중국 인민의 투쟁을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성립한 이후의 투쟁의 역사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민족과 인민 전체의 역사적 투쟁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아편 전쟁 이후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에게 굴복한 청나라는 서서히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 갔다. 이에 대해 태평천국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전국적인 농민 반란이 일어나 나라의 절반 가까이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결여되어 있어서 청나라 정부와 제국주의 세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이후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 일본과의 전쟁을 거치며 제국주의 세력에게 점점 더 많은 이권과 조차지를 내주게 되었다. 청나라 정부, 귀족과 관료는 이러한 상태에서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하여 혹은 연합하여 밑으로부터의 민중들의 도전을 억압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20세기에 들어섰을 때, 이러한 상태를 타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1911년 손문에 의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타도되었다. 그러나 이후 청나라 고위 대신이었던 원세개에 의해 손문은 밀려나고 중국은 반봉건적 경제 제도가 유지되는 가운데, 각지에서 군벌이 할거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것이 1919년 5ㆍ4운동이 발발하기 전의 중국의 상태이다.

1919년의 5ㆍ4운동은 중국 현대사의 기점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5ㆍ4운동을 기점으로 기존의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 상태를 변혁하려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고 또 그러한 운동에 있어서 그 이전과 다른 새로운 계급 세력, 즉, 노동자계급과 농민이 새로운 운동 세력으로 출현하여 새로운 주체들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5ㆍ4운동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처리를 결정한 파리평화회의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는데, 파리평화회의의 결과는 중국이 패전국이 아님에도 중국을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침탈당하는 피동적인 위치로 전락시킨 것이었다. 이 회의의 결과가 중국에 알려졌을 때, 1919년 5월 4일 북경대학 학생 3000여 명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시위를 하였고 이는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는 단지 학생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도 광범하게 참여했는데,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군벌과 외국 열강들에게 동시에 맞서서 전개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노동자들의 참여로 인해 중국에서 최초로 반(反)제국주의 운동과 반(反)봉건 운동이 결합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사실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투쟁, 신해혁명이 실패한 것은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의 투쟁을 결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5ㆍ4운동에서 최초로 두 과제를 결합시키는 양상이 나타났던 것이다.[1]중국사연구회 편저, ≪중국혁명의 전개과정≫, 거름, 1985, pp. 130-131.

신해혁명의 실패 이후 손문은 국민당이라는 조직을 꾸리고 있었지만 군벌들의 할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손문은 1921년 결성된 공산당과 연합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4년 공산당과 국민당의 연합 전선이 꾸려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다. 제1차 국공합작은 공산당의 당원들이 공산당원 신분을 유지한 상태로 국민당에 가입하여 국민당을 중심으로 민족 혁명 전선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국민당은 쏘련과 연합하고 공산당과 연합하는 연쏘연공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당시 광동성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세력은 크게 성장할 수 있었고, 이는 각지에 할거하고 있던 군벌들을 타도하고 전국의 통일을 도모하는 북벌로 이어지게 되었다.

당시 군벌들은 ‘무장한 지주’의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그 사회 성격은 반(半)봉건적인 것이었다. 군벌들은 자신들의 통치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정치적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제국주의 세력들과 결탁하는 길을 걸었는데, 그리하여 친일적인 군벌, 친영적인 군벌 등이 각양각색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군벌의 이러한 성격, 즉, 반(半)봉건적 성격과 제국주의와 결탁하는 성격으로 인해, 중국 혁명의 성격은 반제반봉건의 민주주의적 혁명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국민당의 북벌은 손문이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완성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서 공산당 세력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장개석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세력을 전면 탄압하게 됨에 따라 제1차 국공합작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북벌의 좌절 그리고 장개석의 쿠데타는, 북벌의 전개 과정에서 농민 운동이 활발하게 성장하면서, 이에 위협을 느낀 지주 세력과 매판자본가 그리고 보수화된 국민당의 우파에 의한 반동이었다. 장개석의 쿠데타 이후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연합한 무한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3개월여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이는 공산당과 함께했던 민족 부르주아지의 유약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는데, 1차 국공합작 당시 민족 부르주아지는 국민당에 참여하여 혁명의 과정을 함께했으나 장개석의 쿠데타 이후로는 혁명성을 상실하고 혁명에서 이탈했던 것이다.

당시 코민테른은 중국 혁명에 대해 농민 문제야말로 모든 정책의 중심 문제이며 노농 동맹의 필요성, 농업 혁명의 슬로건을 내걸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1923년 5월,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시).[2]같은 책, p. 275. 그러나 당시 중국 공산당은 정세의 변화에 정확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코민테른의 지시 여하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개석의 쿠데타 이전에 자본가계급에 유화적인 정책을 이끌어 왔던 진독수의 노선은 1927년 8월 7일의 긴급회의에서 우경기회주의로 비판을 받았고 이후 구추백이 당의 총서기가 되었다. 진독수는 중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지도적 역할을 승인하고 중국 혁명에서 농민 문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권을 제기하지 못했다.[3]같은 곳. 그런데 이후 구추백과 함께 당의 지도를 담당했던 이립삼은 좌경모험주의적인 노선을 내걸었는데, 도시에서의 무장봉기를 통한 쏘비에트의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1927년 8월 1일의 주덕, 하룡 등이 3만의 봉기군을 이끌고 일으킨 남창 봉기는 실패하였다. 또 광동성의 해륙풍에 쏘비에트가 건설되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또한 그해 가을에 추수 폭동이 광범하게 전개되었으나 실패하였고 모택동은 추수 폭동에 실패한 이후 잔여 군대를 이끌고 정강산에 들어가 근거지를 마련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주덕의 군대가 정강산에 합류하였고 모택동과 주덕의 이러한 근거지를 마련하는 노선은 곧 전국적인 공산당 세력에게 파급되어 1930년까지 11개 성에서 근거지들이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립삼의 좌익맹동주의 노선은 끈질기게 남아 있었는데, 이립삼은 혁명의 단계가 노농 독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행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단계라고 파악하였다.[4]같은 책, p. 301. 그리하여 이러한 이립삼 노선에 따라 1930년 대도시인 장사와 우한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9월에 노산에서 중국 공산당 정치국회의가 열려 이립삼 노선은 주관주의이며 모험주의라고 비판되었다.

이러한 노선의 교정에 힘입어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꾸준히 증가하여 1931년 초 30여만 명에 달하게 되었고, 1931년 11월 7일 강서성 서금에서 중화 쏘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어 모택동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중국 대륙의 곳곳에서 장개석 군대의 위협 속에서도 근거지에 기초한 이러한 홍색 지구와 홍색 정권이 가능했던 것에 대해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파악했다. 즉, 모택동은 근거지의 홍색 정권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첫째, 객관적 조건으로 후진적인 반봉건적인 경제의 자족성, 그리고 제국주의와 결탁한 군벌이 할거하여 상호 대립하고 군벌 간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어서 그 틈에서 홍색 정권이 발생하고 생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둘째, 주체적 조건으로는 1926년, 27년의 정치적 경험이 있고 또 혁명 세력이 무장하고 있으며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지도가 있다는 것이었다.[5]같은 책, p. 298. 그리고 공산당의 홍색 정권은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토지 개혁을 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이들로부터 일정한 세금을 걷고 군대를 보충할 수 있었다.

 

 

2. 제1차 국공내전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제2차 국공합작)

 

이렇게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가 전국 곳곳에서 발전해 가자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의 기치를 들고 만주 사변이 발발하기까지 무려 4차에 걸친 포위토벌전을 전개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이에 대해 국민당군을 깊숙이 끌어들여 역으로 토벌하는 전술을 폈고 유격전과 운동전을 적절히 결합함에 의해 4차에 걸친 반(反)포위토벌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과 홍군이 절대적인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공산당이 토지 혁명을 통해 농민들의 공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홍군은 과거의 군벌들과 달리 과학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또 중국의 무산계급인 노동자계급의 당, 즉 공산당이 군대를 지도하고 있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국민당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일본군에 의해 만주 지역이 점령당한 상태를 용인하면서, 항일민족통일전선에 대한 공산당의 요구를 거부하고 공산당의 홍군에 대한 제5차 포위토벌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번의 5차 포위토벌전에 맞서는 전술에 있어서, 홍군은 과거와 달리 유격전이 아니라 정면 공격 작전을 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홍군은 커다란 타격을 받고 패배하였고 근거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당시 당의 지도부였던 왕명이 유격전을 거부하고 정면 승부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실패로 인해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근거지를 버리고 서쪽으로, 그리고 이어서 북쪽으로 약 1만 리의 대장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대장정의 과정에서 1935년 1월 준의에서 회의가 열려 왕명 노선을 비판하고, 도시 공격이 아니라 농촌을 근거지로 하여 도시를 포위하는 모택동 노선을 당의 노선으로 확립할 수 있었다.

대장정은 서북의 연안에 이르러서 끝났는데, 연안을 근거지로 하여 중국 공산당은 항일의 전선을 꾸리면서 전국 각지에서 근거지와 공산당 조직을 재건할 수 있었다. 장개석군은 연안마저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만주 지역을 넘어서서 북경 등 화북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당시 장개석 등 4대 가문이 주요 금융기업, 대규모 산업, 상업, 운수 등을 틀어쥐고 지배하고 있던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었고, 장개석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 또한 직접적으로 위협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은 반장항일(反蔣抗日), 즉 장개석을 반대하는 것을 통한 항일 노선에서, 핍장항일(逼蔣抗日), 즉, 장개석을 압박하는 것을 통한 항일 노선으로, 그리고 이후에는 연장항일(聯蔣抗日), 즉, 장개석과 연합하여 항일하는 노선으로 점차적으로 발전해 갔다.[6]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1권, 거름, 1990, p. 267. 이 과정에서 1936년 12월 12일 장개석의 부하 군벌이었던 장학량이 장개석을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합작을 강요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대해 중국 공산당은 장개석과 담판하여 제2차 국공합작,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1937년 8월 말 “항일구국 10대 강령”을 발표하였고 국민당도 중국 공산당을 인정하여 합작한다는 선언을 하여 정식으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중국 전역에 대해 전면적인 침략을 감행하여 중-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중국 전 지역을 점령하기에는 병사와 물자가 부족하여 주로 대도시와 교통상의 주요 축을 점령하는 양상이었다. 그리하여 일본군 점령지의 배후에는 광대한 빈 공간이 있었고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바로 이러한 점령지 배후에서 근거지를 구축해 가며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1938년 10월 일본군이 무한과 광주를 점령하고 나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는데, 이 단계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의 80%는 홍군이 개편된 팔로군과 신사군에 의해 수행된 것이었다.[7]중국사연구회 편저, 앞의 책, p. 338. 즉 장개석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 소극적이고 사실상 수수방관하는 상태였고, 심지어 중-일 전쟁 상황하에서 공산당의 신사군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이른바 환난 사건이다. 이는 중-일 전쟁의 과정에서 일본군과 맞서는 공산당 세력이 성장해 가는 것에 위협을 느낀 장개석군이 반동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통일전선 노선을 견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반파쑈 분위기가 강화되고 있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었다.[8]같은 책, p. 341. 일본군 점령지의 배후에 있었던 중국 공산당의 점령지, 즉 해방구의 존재는 일본군의 점령을 단지 점과 선으로 만들고 있었다. 또한 해방구에서는 과거 토지 혁명과 달리 지주 토지를 몰수하지 않고 단지 소작료를 인하하고 고리대 이자율을 낮추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항일을 초점으로 하여 단결시킬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단결시킨다는 통일전선의 방침 때문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이러한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은 정확한 것이었는데,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4월에 팔로군과 신사군의 숫자는 91만에 달했고, 전국 각지의 해방구에서는 민병이 210만 명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945년 2월 4일의 얄타회담에서 쏘련군의 대일 참전이 결정되었고, 1945년 4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한 쏘련군은 약 3개월의 준비를 거쳐 1945년 8월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진격을 시작하여 일본 관동군 대부분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중-일 전쟁은 중국 인민의 승리로 끝나고 중국은 100여 년에 걸친 반식민지 상태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3. 제2차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1945년 8월 중-일 전쟁이 종식되고 일본이 패전했을 때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전쟁 과정에서 일본군과 거의 싸우지 않았고 실제로 싸운 사람들은 공산당의 팔로군과 신사군이었음에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국민당군이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 대륙에서는 전후 질서를 주도하기 위한 국민당군과 팔로군, 신사군의 점령지 확대 경쟁이 발생하였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주요 대도시를 주로 점령하려 하였고, 특히 중국의 동북 지방의 대도시 점령을 무리하게 추진하였다. 이에 맞서 공산당의 팔로군과 신사군은 해방구를 확대하면서 점령지를 늘려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의 군대는 주로 중국 북부, 화북 지방에 중심을 두고 있었고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중국 남부와 동북 지방에 중심을 두고 있었으나, 상당수 지역에서는 서로 얽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쏘련은 전후 중국의 미래에 대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수립될 것을 예상하면서, 중국 공산당으로 하여금 국민당 정부와의 연합정부 구성에 나설 것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국민당군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정세의 전개 속에서 공산당은 국민당과 연합정부 구성을 위한 담판에 나서게 되었다. 장개석은 공산당에 대해 해방구의 포기, 군대의 포기를 조건으로 인정하겠다는 제안을 했는데, 이는 사실상 공산당 세력을 무력화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담판은 1946년에 이르러 결렬되었고 국민당은 공산당의 홍군과 해방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내전을 도발하였다. 이러한 국민당의 도발에 대해 중국 공산당은, 한편으로 군사적 대응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대응을 했는데, 장개석 반동파를 제외한 모든 혁명적 세력의 결집을 호소하는 혁명적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이 그것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중-일 전쟁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에 참여했던 민족 부르주아지의 세력이 국민당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이 제기한 혁명적 민족통일전선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손문의 부인이었던 송경령을 비롯한 민족 부르주아지의 대표적 명망가와 조직, 단체들이 혁명적 민족통일전선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결과는 항일 전쟁에 있어서 일본군과 실제로 맞서 싸워 중국 민족을 구원한 주역이 누구인가가 이미 전쟁 과정을 통해 전 중국 인민에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중국 공산당은 당시 쏘련군이 점령하고 있던 동북 지역에서 국민당군을 격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북 지역에서 국민당군을 점차 몰아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대도시들이 공산당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내전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졌는데, 애초에 모택동은 내전이 5년 이상 가는 장기전이 될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미국이 국민당군에 대해 막대한 무기와 군수물자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의 수백만 군대는 불과 2-3년 사이에 공산당군에 의해 궤멸되었고, 미국이 지원한 무기와 군수물자는 그대로 공산당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를 일컬어 모택동은 미국이 홍군의 보급 부대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대륙에서는 3대 전투가 있었는데, 화북에서 1차례, 중부와 남부에서 각각 1차례 있었던 대규모 전투는 국민당군의 참패로 끝났고 각각의 전투에서 국민당군 수십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1949년 초가 되자 내전을 도발했던 장개석은 공산당에 대해 평화회담을 제안했으나, 공산당은 이를 일축하고 양자강을 넘어 중국 남부 지역을 석권하였고 장개석은 국민당군의 95%를 잃은 상태에서 남은 병력을 이끌고 대만 섬으로 도주하였다. 미국은 이 상황에서 공산당군이 대만 섬으로 바다를 넘어 진격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해군을 파견하여 군사적 개입을 하였다. 즉, 미국이 무력으로 대만을 자신의 점령지로 한 것이었고 이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미국과 수교할 때 대만을 독립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부속 섬으로 인정할 것, 하나의 중국 원칙을 미국이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미국이 이를 승인했을 때 중-미 수교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리하여 내전이 일단락되게 되었을 때,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대회가 열렸다. 이 건국 집회에서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면서, “중국 인민이 일어섰습니다!(中国人民 站起来了!)”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이러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과정에서 건국을 결의하여 선포한 주체는 중국 공산당이 아니라 1946년-1949년의 과정에서 혁명적 민족통일전선에 참여했던 전선체 세력이었다. 이 세력이 정치협상회의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이 조직의 이름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이는 전술적 운용의 주체인 통일전선체가 권력의 수임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전술의 성공으로 인해 전술적 주체가 전략적 주체로 성장ㆍ전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4. 신(新)민주주의 혁명의 완성과 사회주의적 개조로의 이행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중국에서 신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반제반봉건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를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농민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주도하여 완수하는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당시 전체 상공업에서 민족 부르주아들은 약 20% 정도를 차지하여 비중이 적었고 80%의 상공업은 제국주의 자본과 매판관료 부르주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제국주의 자본과 매판관료 부르주아들의 자본은 무상 몰수하여 국유화를 하였지만 민족 부르주아들에 대해서는 무상 몰수, 수탈이 아니라 민족 부르주아들과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연합하여 공사합영(公私合營)의 형태로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적 개조로 이행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건국 초기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의 잔당들을 숙청하여 중국 대륙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내부적으로는 3반(三反), 5반(五反)의 정책을 취하였다. 3반은 국기 기관과 국영 기업에 있어서 부정부패, 낭비, 관료주의라는 3가지 해악을 반대하는 운동이었고, 5반은 사영(私營) 상공업에서 뇌물수수, 탈세, 국가재산 횡령, 날림공사, 국가경제정보 누설을 반대하는 운동이었다.[9]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 20. 그리고 대부분 착취계급의 출신이었던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숙청이 아니라 사상적 개조 운동을 벌여서 이들이 인민을 위해 복무할 수 있는 길을 가도록 했다. 또한 공산당 내부적으로는 정풍(整風)과 정당(整黨) 운동을 벌여 당 대오를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모택동은 혁명 승리 전에 중국이 가야 하는 신(新)민주주의 경제에 대해 “현 단계에서 중국 경제는 국가 경영과 개인(사적) 경영, 그리고 합작사(협동조합) 경영의 3자 결합이 아니면 안 된다”[10]브루노 쇼 편, ≪中國革命과 毛澤東思想≫ 제2권, 석탑, 1986, p. 196.고 파악했었다. 그리고 건국 이후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방침에 따라 경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건국 후에 경제 건설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건국 후 3년이 지난 1952년 농업과 공업 생산은 1949년 건국 당시에 비해 77.5%가 증가하였다. 공업은 145% 증가, 농업은 48.5%가 증가하였다. 공업에서 국영의 비중은 1949년 당시 34%에서 1952년 56%로 증가하였다. 노동자의 수도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1952년 노동자와 직원의 수는 1580만 명으로 1950년에 비해 100%가 증가한 수치였다.

농업에 있어서는 토지 국유화를 실시하지 않고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 분배하여 농민적 토지 소유를 실현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점차적으로 협동조합적 경영을 추구하여 농민들에게 사회주의적 적극성을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이 당시 농업에서 협동조합화는 낮은 수준에서 실시되었는데, 토지 등 생산수단을 집단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농민들에게 상호 간의 품앗이 혹은 공동 노동을 늘리는 방식이었다.

1953년 중국에서 최초로 1차 5개년 계획이 실시되었는데,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실시되어 1957년 총생산은 167.7% 증가하였는데, 공업은 228.4%, 농업은 124.7%가 증가하였다. 1957년 강철 생산은 53만 톤으로 1952년에 비해 396.6%가 증가하였고, 선철은 593만 톤으로 1952년의 307.7%였다. 최초의 5개년 계획의 이러한 성공적 실시는 중국이 오랜 반식민지 상태를 탈각하고 반봉건성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진보의 길로 사회 전체가 상승 운동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경제의 건설을 기초로 하면서 중국 사회는 점차 사회주의적 개조의 길로 들어섰다. 대략 1956년경부터 상공업과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개조가 시작되었는데, 중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독특한 점은 항일민족통일전선, 그리고 1945년 이후에 내전기의 혁명적 민족통일전선에 참가했던 민족 부르주아지에 대해 몰수와 수탈의 방식이 아니라 공사합영(公私合營)을 통한 국가자본주의 건설의 형태를 취하는 평화적 개조의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레닌은 10월 혁명 이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을 전제로 하여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연합하는 국가자본주의를, 당시 러시아에 광범했던 소생산의 압력을 극복하고 소부르주아들을 견인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앞당길 수 있는 유력한 방안으로 제기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쏘비에트 러시아에서는 제국주의의 간섭과 자본가들의 보이코트로 인해 이러한 국가자본주의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레닌의 구상이 중국 혁명의 승리 이후 사회주의 건설에서 하나의 유력한 방안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이는 중국이 당시 러시아보다 더 후진적인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러시아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사합영은 초급형식의 국가자본주의와 고급형식의 국가자본주의로 나뉜다. 초급형식의 국가자본주의는 가공과 주문에 대해 공사(公私) 계약을 통하는 것으로서, 국가는 기업 외부에서 감독하고, 노동자는 기업 내부에서 감독하는 형태였다. 초급형태의 국가자본주의에서 이윤은 4가지 영역으로 분할되었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4마분비(四馬分肥)라 하였다. 즉, 기업의 이윤은 소득세로 34.5%, 노동자 복지로 15%, 기업의 공적 적립금으로 30%, 자본가에 대한 주식 배당금으로 20.5%가 분할되었다.[11]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 57. 이러한 초급형식의 국가자본주의는 이윤 추구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이 국가와 인민의 수요에 봉사하는 성질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초급형식의 국가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은 자본가가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급형식의 국가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가가 공유하는 형식이었다. 고급형식의 국가자본주의는 개별 공사합영 기업과 전 업종의 공사합영 기업으로 나뉘었다. 개별 공사합영 기업은 1955년 3,193개로 전체 공업 생산의 16.1%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공사합영의 형태를 취하자 노동자와 직원의 적극성이 고양되어 노동생산성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낙후된 중소기업들의 자본가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자신들 또한 공사합영되기를 요구하는 상황이 될 정도였다. 전 업종의 공사합영 기업은 국가자본주의의 최고 형태인데, 각 업체가 소유한 사영 기업 전체에서 공사합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주요 계열사 전체를 공사합영하여 하나의 기업 집단으로 묶는 개념이었다. 이들 전 업종 공사합영 기업에서는 고정이자율에 근거하여 자본가에게 매년 이윤을 배분했다. 공사합영 기업의 자본가에 대한 고정이자 지급 기한은 7년간으로 규정되었는데, 나중에 3년 더 연장하였다. 이러한 공사합영 기업은 사적 자본가의 경영 능력을 국가가 활용한다는 측면이 있었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국가는 한편으로 생산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나아가 나라 전체의 생산력 발전을 자극할 수 있었다.[12]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p. 56-59.

중국 혁명 이후의 사회주의 건설에서 이러한 공사합영은 21세기 지금의 현실에 있어서도 한국 등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고 사회주의 건설이 이루어질 경우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재벌 기업 등에 대해서는 무상 몰수와 국유화를 하더라도 재벌에 계열화되지 않은 상당수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공사합영의 방식을 통해 신속히 생산을 안정화시키고 사회주의 건설 전체를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사합영에 대해 모택동은 “이만큼의 돈을 써서 이만큼의 계급을 샀다”[13]같은 책, p. 64.라고 표현했었다. 이러한 공사합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민족 자본가들에게 지급한 액수는 모두 합쳐서 당시 화폐 가치로 32억 5천만 위안이었다. 그러나 공사합영은 일종의 계급화해 혹은 계급협조가 아니었다. 주은래는 이에 대해 “민족 자본가계급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평화적 개조는 … 강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거하여 자본가계급에 대해 수행했던 일종의 계급투쟁의 특수한 형태일 뿐이다”[14]같은 책, p. 65.라고 파악한 바가 있었다.

중국에서 농업의 사회주의적 개조, 농업 집단화는 쏘련과 달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는 쏘비에트 러시아에서 볼쉐비끼 당이 당시 농촌과의 끈이 약했던 데 비하여, 중국의 경우 혁명 자체를 농촌에서 시작하였고 농촌의 근거지에서는 혁명 전부터 토지 혁명이 진행되어 농민들의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던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볼쉐비끼는 10월 혁명 직후에 토지 국유화를 선포하였지만, 중국 공산당은 혁명 후에 토지 국유화를 선포하지 않고 지주 토지의 무상 몰수, 농민에 대한 무상 분배를 통하여 농민적 토지 소유를 실현하였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협동조합의 방식을 통해 집단화의 수준을 높여 가는 방식으로 사회주의적 개조를 실현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농업의 기계화를 먼저 실현하고 집단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집단화를 이루고 농업의 기계화를 달성한다는 방침을 취했다. 그리하여 최초에는 호조조(互助組)로부터 시작하여 초급단계의 합작사(협동조합), 고급단계의 합작사로 점차적으로 이행하였다.

호조합작(互助合作)의 형태는 ①임시계절적인 간단한 노동호조(품앗이와 유사한 형태) ②연간에 걸친 노동호조 ③토지를 출자하는 생산합작사로 나뉘었다.[15]우노 시게아끼, ≪中國共産黨史≫, 일월서각, 1984, p. 203. 그리고 생산에서의 합작, 협동조합적 형태, 농업 집단화는 우선 모범적 사례를 만들어 이를 점차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1951년 중국의 동북 지방과 화북에서 40개의 합작사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개별 농가보다 39%를 초과하였다. 그러나 합작화 운동은 1953년 봄 일시적으로 제동이 걸리기도 했는데, 당 중앙은 합작화에서 맹동주의를 교정하여 조건이 구비되지 않은 합작사는 호조조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16]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 45.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농업 집단화, 합작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1954년 이래 65만 개의 합작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중 80% 이상이 개별 호조조보다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이는 생산에서의 협동조합화라는 생산관계에서의 변화가, 농업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농민들에게 자극을 주어 생산력을 일정하게 증가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55년 가을부터 1956년까지 합작사로 조직된 농가의 수가 14%에서 96%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또 반(半)사회주의적인 초급형태의 합작사가 사회주의적인 고급형태의 합작사로 전환되었고 그 규모에서도 20-30호의 규모에서 100-200호의 규모로 증가하였다.[17]같은 책, p. 50. 이렇게 중국에서 농업의 집단화는 농민들의 저항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집단화 자체는 평화롭게 이루어졌지만 당시 트랙터의 보급 등 농업 기계화가 전제되지 않은 생산관계에서의 변화는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단화의 과정에서 농업 생산량이 일정하게 증가하였지만 1958년 이후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생산의 감소가 나타나기도 했고 또 생산량에 대한 허위 보고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물론 중국 공산당은 “합작화 운동은 생산관계가 생산력 수준에 조응하는 법칙을 준수”[18]같은 책, p. 52.하여야 한다는 것을 방침으로 갖고 있었지만, 농업에 대해 기계의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관계의 변화 자체만으로는 농업 발전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중국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던 수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 즉, 협동조합화, 합작화 또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1950년대 초반 중국에서 수공업자는 730여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1953년 수공업은 총생산 중 3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협동조합화는 1956년에 91.7%가 이루어져서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되었다. 쏘련의 경우 수공업의 협동조합화가 거의 10년이 걸린 것에 비한다면 중국에서 수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는 매우 빠르게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상승하던 정세와 중국 내에서 중국 공산당의 인민에 대한 위신이 그만큼 높았던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5.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과 공산당 내 노선의 분화

 

중국에서 이렇게 사회주의 건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던 시기에, 1956년 쏘련 공산당 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쓰딸린을 전면 탄핵하여 수정주의 노선을 제기한 사태는 중국에 있어서도 심각한 충격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흐루쇼프의 이른바 쓰딸린 개인숭배 비판에 대해 당시 유소기는 쏘련 공산당 20차 당 대회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개인숭배 비판에 적극 찬성하였다.[19]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이에 대해 모택동은 쓰딸린의 공적은 7이고 과오는 3이라는 입장을 취하여 쓰딸린을 매도하고 매장하려는 흐루쇼프의 시도에 대해 반대했다.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은 모택동의 입장을 채택한 것이었지만, 쏘련 공산당의 압력하에서 중국 공산당 내에서 점차적으로 유소기의 입장이 강화되어 갔고, 이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 유소기파와 모택동파의 노선의 분화를 야기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모택동은 쏘련 공산당 20차 당 대회 직후 일정하게 충격을 받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1956년 헝가리 사태를 목도하고 나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20]毛泽东, ≪毛泽东文集≫ 第七券, 人民出版社, 1999, p. 204.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의 올바른 방향을 수립해 갔다. 모택동은 헝가리 사태가 보여 준 것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인민 내부의 모순이 있으며 적아 간의 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구분해야 하며, 인민 내부의 모순에 대하여는 타도의 방식이 아니라 설득과 교육의 방식을 취하여 해결해 가야 함을 지적했다.

모택동은 쏘련에서 수정주의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즉, 중국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적 정세, 객관적 조건의 일대 변화에 대하여 중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다그치는 방식으로 해결해 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1958년부터 인민공사화 운동과 대약진 운동이 불붙게 되었다. 이러한 모택동의 방침은 대중을 동원하고 대중에 의거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올바른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일정한 좌편향이 나타나서 유소기파에 의해 공격당하기도 했고, 중국 공산당 내에서 유소기파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인민공사(人民公社) 운동은 농업 집단화가 고조되고 일단락되었을 때 모택동이 한 선진적인 집단 농장을 방문하고 나서 제창한 것이었다. 모택동이 시찰한 집단 농장의 이름이 인민공사였는데 그 집단 농장은 생산을 집단화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 식당을 운영했고 나아가 농(農)ㆍ공(工)ㆍ상(商)ㆍ학(學)ㆍ병(兵)이 일체화된 일종의 꼬뮨형 집단 농장이었다. 이러한 꼬뮨형 집단 농장, 인민공사에 대해 당시 중국 공산당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최적의 조직 형태”, “미래 공산주의의 기초 조직”[21]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p. 237.이라고 파악했었다. 이러한 인민공사화 운동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비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인민공사라 할 때의 공사(公社)는 영어의 꼬뮨(commune)을 중국어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인민공사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적 성질을 지니는 꼬뮨이라는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쏘련에서는 농업 집단화 초기에 꼬뮨형 집단 농장이 30% 정도를 점하고 아르쩰형 집단 농장이 50% 정도를 점유했었다. 이에 대해 쓰딸린 등 볼쉐비끼 당은 농민 다수가 원하는 것은 아르쩰형이라는 점을 들어 대중적 집단화 운동에서 아르쩰형 집단화를 채택하여 이후 쏘련의 농업에서 전형이 된 바가 있었다. 아르쩰형은 꼬뮨형과 달리 공동 식당을 두지 않았고 주택, 약간의 가축과 가금, 간단한 농기구를 개인 소유로 유지하고 집단 농장에서 공동노동 외에 개인 텃밭에서의 부업을 용인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농업 생산력이 열악한 상태에서 생산관계에서 꼬뮨형을 취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볼쉐비끼 당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모택동은 중국의 농업 집단화에서 꼬뮨형 집단 농장을 전범으로 채택했던 것이다. 이것은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건설 초기 단계에서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일정한 좌편향을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꼬뮨형 집단 농장은 중국의 사회 현실, 생산력 수준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공사화 운동은 많은 문제를 불러왔다. 이른바 공산풍(共産風)이 불었던 것이다. 공동 식당을 무료로 운영하고 개인 소유의 상당 부분도 공동 소유로 돌렸던 것은 실제로는 공동 소유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모택동은 즉각적으로 교정에 착수했다. 모택동은 1958년 가을 인민공사화 운동 이후 공산풍이 불었는데, 이것은 첫째, 빈부의 평균화를 낳고, 둘째 집단 농장의 축적이 과다하고 집단 농장에서 농민들의 의무노동이 과다하며, 셋째, 각종 재산, 산품을 공유로 하여 실제로는 무상으로 타인의 노동의 성과를 점유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22]毛泽东, ≪毛泽东文集≫ 第八券, 人民出版社, 1999, p. 12. 또한 모택동은 이러한 공산풍은 공산주의의 이상을 통속화한 것이며 소부르주아적 평균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인민공사의 소유는 전 인민 소유가 아니며 인민공사 자체 내의 집단적 소유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고, 또 상품 생산은 사회주의에서 폐지되는 것이 아니며 노동에 따른 분배를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23]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 98. 그리하여 인민공사의 사원들은 소비재, 주택, 은행예금 등을 개인 소유하고, 주택에 더해 수목, 소농구, 소공구, 작은 가축들, 가금을 사적으로 보유하고 개인 부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모택동의 교정은 실제로 쏘련의 아르쩰형과 같은 내용을 갖는 것으로서, 형식은 꼬뮨이라는 이름을 취했지만 내용적으로는 꼬뮨이 아니라 쏘련과 같은 형태의 집단 농장을 취한 것이었다. 이러한 교정 작업을 거치며 사회주의에서도 가치 법칙을 위배해서는 안 되고 등가 교환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인민공사 내부에 있어서는 인민공사를 생산대대로 나누고 생산대대는 다시 생산대로 나누어 3단계의 구조를 취하였다. 그런데 초기에는 생산대대를 채산 단위로 하였으나 평균주의가 심각하게 나타나자 생산대를 채산 단위로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대약진 운동은 1958년에 제창되었는데 대중이 중심이 되어 대중 운동으로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을 관철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면홍기(三面紅旗)가 제창되었는데,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인민공사, 대약진이 그 삼면의 붉은 깃발이었다. 삼면홍기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모택동 노선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고, 반대로 유소기의 노선은 삼면홍기가 아니라 관료적인 조정, 위로부터의 감사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대약진 운동은 대중 운동을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이루어 간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올바른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일정한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철의 생산량 증대를 과도하게 강조하여 농업, 운수, 경공업, 기타 공업에 쓰여야 할 노동력과 물자가 철 생산에 집중되어 다른 생산 부문과의 불균형이 발생하여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유소기파는 이러한 불균형을 비판하면서 이른바 ‘조정’ 단계를 설정하여 건설의 속도를 늦추고 통화 팽창을 저지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도 했다. 심지어 유소기는 경제의 불균형이 일정하게 극복된 1962년에 있어서도 경제의 곤란이 극복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조정기가 장기간이 되어야 하며 하나의 단계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존의 지도사상을 반드시 후퇴시켜야 한다고도 했다.[24]같은 책, p. 115. 이는 사실상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과 모택동 노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유소기는 모택동이 국가 주석에서 물러나 당 주석에만 전념하게 됨에 따라 모택동을 이어서 국가 주석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당의 총서기로는 등소평이 등장했다. 모택동이 국가 주석직에서 물러난 것은 인민공사화와 대약진 운동 때문이라기보다는 흐루쇼프의 쓰딸린 탄핵으로 인해, 즉, 개인숭배가 쟁점이 됨에 따라 스스로를 낮춘 것이었다. 그런데 유소기는 국가 주석에 취임한 이후 사회주의 건설에서 모택동과는 상반된 길을 걸었다. 대약진 운동과 거리를 두며 사회주의 건설에서 대중의 동원보다 관료적인 조정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농업에서는 개인 텃밭을 과도하게 확대하여 농업에서 집단화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당시 국방부장이었던 팽덕회는 동구권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후 모택동에게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는 사실상 모택동과 당의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중국 공산당은 팽덕회를 반당적 견해라고 규정하고 당적을 보유한 상태에서 직을 해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팽덕회 사건은 문화대혁명까지 이어지는 중국 공산당 내 노선의 분화와 노선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1961년 중국 공산당은 간부 7,000명이 모이는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는데, 모택동이 참가한 상태에서 유소기가 주관한 대회였다. 이 7,000인 대회는 유소기가 당 간부의 다수파를 장악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유소기는 삼자일포(三自一包. 자류지, 자유시장, 손익개인부담, 승포제), 단간풍(單干風. 개인영농의 확대), 조정 정책 등 자신의 노선을 드러내었고 유소기와 등소평은 개인의 독재를 비판했다. 이후 1962년에 열린 중앙의 확대 공작회의에서 모택동은 연설을 통해 당과 구분되는 “비밀집단을 조직하지 말 것”[25]毛泽东, ≪毛泽东文集≫ 第八券, 人民出版社, 1999, p. 307.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유소기파가 이미 공고한 분파조직을 꾸리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모택동이 경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후 모택동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는데, 이는 첫째, 3년간의 조정 정책으로 인해 경제가 회복되었고, 둘째, 꾸바 위기,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 중-쏘 대립으로 인해 국제 정세가 악화되었고, 셋째, 임표 등 군부가 모택동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했기 때문이었다.[26]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p. 258. 그리하여 이 시기에 모택동은 사회주의 시기의 계급투쟁 문제를 제기하였다. 모택동은 3가지의 풍조를 비판했는데, ①흑암풍(중국의 정세가 암담하다고 보는 풍조) ②단간풍(농업에서 개인책임제의 확대) ③번안풍(팽덕회 문제 등 이미 결정된 것을 뒤집으려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27]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 121. 모택동의 이러한 비판은 유소기 노선에 대한 견제와 비판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1961년의 7,000인 대회 이후 유소기의 수정주의 노선이 노골화하자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모택동은 중국에서 우경기회주의는 중국판 수정주의로 보는 것이 적절하며, 국외 제국주의의 압력과 국내 자본가계급의 영향의 존재가 당내에 수정주의 사상을 낳는 사회적 근원이라고 파악했다.[28]같은 책, p. 122.

모택동은 1963년 5월 반혁명의 부활을 경고했고, 그해 2월에는 인민해방군의 사상공작을 강화하며 “뇌봉을 따라 배우자”는 슬로건을 제기하여 인민해방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뇌봉은 젊은 인민해방군으로서 군 생활에서 공산주의적 기풍을 몸소 실천하며 중국 공산주의자의 전범을 보이다가 일찍 사망한 사람으로서, 모택동의 발언 이후 뇌봉은 중국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한국의 경우 1980년대에 뇌봉 관련 서적이 발간되기도 했다.

유소기 노선과 모택동 노선의 대립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농촌의 사회주의 교육 운동에 대한 문제에서였다. 모택동은 농촌의 사회주의 교육에 대해 전(前)10조를 발표하여 대중의 발동을 기본으로 하여 인민공사와 생산대대의 ‘장부, 재고, 재산, 노동점수’ 등에서 사청(四淸)의 대중 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기했다. 그런데 유소기의 측근이었던 팽진은 모택동의 전10조를 대체하는 것으로서 후(後)10조를 제기하여 대중적인 사청(四淸) 운동을 상부에 의한 간부의 오직 적발 운동으로 위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이 제기한 10조는 전(前)10조라 불리게 되었고 팽진이 제기한 10조는 후(後)10조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팽진은 중국 공산당 북경시당 위원장이었는데, 이는 북경의 당 조직이 유소기파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이후 문화대혁명을 발동할 때 모택동은 북경을 떠나 상해에서 문화대혁명을 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1964년 말 당 정치국 확대회의는 모택동이 참가한 가운데 농촌의 사회주의 교육 운동에서의 23개조를 토론했는데, 이 23개조에는 당내의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를 타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29]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p. 263. 그리하여 유소기파와 모택동파와의 대립은 당내에서 공공연히 드러나고 있었고, 더욱이 모택동이 유소기파에 대해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당내 실권파’라고 규정하고 있음이 당내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중국 공산당 내의 노선 대립은 국제 정세의 격렬한 변동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중국은 쏘련과 1960년대 초반에 격렬한 이데올로기 논쟁을 하고 있었고 1964년 10월 16일 중국의 핵실험이 성공하여 중국은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쏘련의 흐루쇼프는 그의 수정주의 노선이 중국과의 논쟁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폭로되었을 때, 자신의 측근이었던 브레쥐네프의 궁정쿠데타로 인하여 실각하였다. 그리고 1964년 8월 2일 미국은 북베트남에서 통킹만 사건을 도발하였고, 1965년 2월 1일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 공산당은 내부적으로 유소기 노선과 모택동 노선의 대립이 심화되어 가는 가운데 국제 정세의 긴장이 격화되어 가고 있었고, 중국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이러한 국내외적 정세를 조건으로 하여 준비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국방부장을 맡고 있던 임표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임표는 군부에서 유소기파를 대리하고 있던 나서경과 논쟁했는데, 나서경은 미국의 다군사적 우위를 평가하고 쏘련과의 관계 개선으로 인민해방군의 무장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는 사실상 군사 문제에 있어서 유소기의 견해를 나서경이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임표는 “인민전쟁의 승리 만세!”라는 글을 발표하여 미 제국주의와 쏘련 수정주의의 위협에 대해 인민전쟁 노선으로써 맞설 것을 주장하였다.[30]같은 책, p. 267. 또한 임표는 1965년 5월의 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팽진을 비판하여 유소기파와 모택동파의 대결은 격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1965년 9월에 열린 당 중앙 공작회의에서 모택동은 당 중앙에 수정주의가 발생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팽덕회의 복권을 암시하는 내용의 역사극의 작자인 오함을 비판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에 대해 북경시당 위원장이었던 팽진은 모택동의 지시를 묵살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모택동은 북경을 떠나(탈출하여) 상해에 가서 문화대혁명의 발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6.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발생과 전개 그리고 종결

 

모택동 사후 등소평의 등장 이후 현대 중국의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이 10년간의 무정부주의적인 동란이었다는 역사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역사에 대한 왜곡이다. 1966년부터 모택동이 사망한 1976년까지 10년간의 문화대혁명 기간에 중국은 매년 10%의 공업 생산의 증가를 보였다.[31]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제2권, 이산, 2004, p. 586. 모택동의 시기에 중국은 거대한 사회적 진보를 했는데 1949년 중국인의 평균 수명은 단지 35세였지만 모택동 사망 당시인 1970년대 중반 중국인의 평균 수명은 65세로 늘어났다. 그리고 모택동의 시기에 중국은 이미 세계 6대 공업국이 되었으며, 1952년에서 1978년까지의 시기에 중국의 GDP는 600억 위안에서 3000억 위안으로 5배의 증가를 하였다.

등소평 등 수정주의 세력 혹은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내의 실권파)는 문화대혁명의 폭력성, 무질서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집중적으로 폭발했던 1966년부터 1968년간의 시기에 있어서 주자파와 조반파(造反派. 반대를 일으키는 당파) 간에 일부 무력 충돌이 있었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생산은 거의 지장을 받지 않았고 주자파를 타도하는 거대한 대중 운동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건설은 착실히 진전되고 있었고, 1968년 새로운 권력 체계가 성립한 후로는, 중국은 수정주의가 타도된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길을 걷고 있었다. 다만 등소평 등 수정주의 세력이 재등장하고 결국 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른 것은, 당시 중국이 처해 있던 거대한 객관적 어려움, 즉, 쏘련 수정주의와 미 제국주의 양측으로부터 군사적,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객관적 조건, 그리고 주체적으로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좌편향을 일정하게 보인 중국의 노동자계급의 역량의 한계와 오류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 중국은 전체 인민에서 노동자계급의 비율이 농민의 비율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았는데, 문화대혁명의 전개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의 주도성이 각인되기보다는 소부르주아적 급진성이 일정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10여년에 걸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의의가 있다. 첫째 국내외적인 수정주의의 출현과 대두에 맞서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계속 혁명 노선을 개척해 간 점, 둘째, 당 자체가 수정주의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밑으로부터의 대중 운동으로 혁명적 당을 재건했다는 점, 셋째, 문화대혁명과 생산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지속을 통한 생산의 혁신과 발전, 증가라는 새로운 방식을 세웠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비록 문화대혁명은 주자파의 권력 장악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실패를 했지만, 21세기 지금 다시 혁명을 꿈꾸고 혁명 운동을 재건하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러면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그 발생, 전개, 종결까지 고찰해 보자.

1965년 말에 모택동은 북경을 ‘탈출’하여 상해에 도착하여 문화대혁명의 발동을 준비하였다. 먼저 상해의 ≪문회보≫에 요문원이 “신편 역사극 ‘해서의 면관’을 평한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팽덕회의 복권을 암시하던 위 역사극을 폭로하고 그 작자인 오함을 비판하였다. 이 글의 게재는 오함에 대한 모택동의 비판 지시를 묵살했던 북경시당 위원장 팽진에 대한 공격의 개시를 의미했다. 요문원의 위 글은 1965년 11월 30일 ≪인민일보≫에 게재되었고 이로써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이후 당내에서 팽진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었고 모택동은 1966년 5월 7일 ‘인민해방군은 거대한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려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 생산, 교육 운동에 군대가 참여할 것을 제기했다. 1966년 5월 25일 북경대에 대자보가 붙어 대학총장인 육평을 비판하였다. 대자보는 대학총장 육평이 당내의 실권파를 옹호하는 점을 비판하고 있었는데, 모택동은 이 대자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같은 해 5월 29일 북경의 청화대 부속 중학에서 최초로 홍위병 조직이 탄생하였다. 이들은 구(舊)진학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당시 대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상급학교의 학생들은 주로 당 간부와 민족 부르주아들의 자제들이었고, 노동자계급과 농민들의 자제들은 상급학교에 거의 다니지 못하는 상태였다. 민족 부르주아들에 대한 평화적 개조 정책이 교육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모든 요괴변화를 일소’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소기는 팽진과 육평을 해임하고 북경대학에 공작조를 파견하여 조반파와 논쟁하였다. 이는 대학생들이 모택동이 발동하고 있던 문화대혁명에 참여하는 것을 저지하고 불붙고 있던 대중 운동을 진압하려 한 것이었다.

이 시점에 모택동은 비로소 북경으로 귀환했고 대학에 파견되었던 공작조의 철수를 지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6년 8월 1일 중국 공산당 8기 중앙위원회 11차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8기 11중전회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대한 결정’(16개조)을 통과시켰는데, 16개조는 자본주의 길을 걷고 있는 실권파를 분쇄할 것과 부르주아적 반동적 학술권위에 대한 비판을 요구했다. 이로써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 8기 11중전회가 열리고 있던 시점인 8월 5일 모택동은 직접 “사령부를 포격하라”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이는 유소기 등 당 중앙의 실권파를 타도하기 위해 대중이 일어설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학교 등 많은 부문에서 문화혁명반, 문화혁명위원회, 문화혁명대표대회 같은 조직이 자연 발생적으로 출현했는데, 위 16개조는 이를 대중이 공산당의 지도하에 자기 자신을 교육하는 새로운 조직 형태이며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의 권력 기구”라고 규정하고 있었다.[32]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p. 275. 이러한 상황에서 1966년 8월 18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는 100만 명의 혁명적 대중이 결집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축하 대회가 열렸는데, 이 집회에서 홍위병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대회 이후 홍위병들은 가두로 진출하여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의 사구(四舊)를 타파하는 행동에 나섰다. 이러한 대중의 행동에 대해 중국 공산당 8기 11중전회는 대중의 행동에 있어서 폭력을 금지한다는 것, 그리고 우파 또한 사정을 고려하여 처리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이렇게 대중 운동이 고양되어 가자 팽진, 나서경, 육정일 등의 영향력이 일소되었고 비판의 화살은 점차 유소기와 등소평을 향하였다.

문화대혁명이 고조되면서 북경을 넘어 전국으로 그 영향이 확산되었는데, 전국 각지의 홍위병들이 북경으로 행진하여 결집하여 문화대혁명의 경험을 교류하고 토론하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방의 주자파, 실권파를 타도하는 행동으로 나아갔다. 1967년 1월 4일 상해에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혁명위원회가 성립했다. 1월 9일에는 상해의 조반파의 32개 혁명 조직이 상해시를 인민관리 하에 두고 2월 5일 상해 인민공사를 성립시켰다. 즉, 상해 꼬뮨이 성립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상해의 주자파들이 노동자들을 내세워 양측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자파는 더 이상의 저항을 할 수 없었고 1월 4일에는 산서성에서, 1월 25일에는 귀주성에서, 1월 31일 흑룡강성에서 조반파가 당ㆍ정ㆍ재ㆍ문의 각 부문에서 탈권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파, 실권파가 저항했으나 1월 23일 당 중앙,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중앙문혁소조가 성명을 발표하여 “인민해방군은 혁명 좌파 대중을 절대 지지한다”는 것을 밝혔다.[33]같은 책, pp. 280-281.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문화대혁명의 대오가 정비되어 갔는데, 문화대혁명의 혁명적 대중, 인민해방군, 당의 혁명적 간부의 3자가 결합하여 혁명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로써 문화대혁명은 수정주의적 주자파를 타도하고 각 영역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탈권 과정을 마치고 새로운 권력 기구를 수립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화대혁명 대중이 상호 간에 충돌하거나 심지어 인민해방군과 맞서려 하였으나 이러한 현상은 차츰 정돈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택동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위대한 정당(整黨) 운동이다”[34]같은 책, p. 286.라고 규정하여 문화대혁명의 전개를 긍정하였다. 1968년 10월 13일 중국 공산당 8기 12차 중앙위 확대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유소기가 공식 비판되었고 등소평은 자기비판하였다. 이 회의에서 유소기의 당에서의 제명이 결정되었다. 이후 유소기와 등소평은 시골의 노동 현장으로 하방하여 노동을 하며 자기 개조의 과정을 걸었다.

이렇게 유소기, 등소평 등 수정주의적 실권파가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하고 몰락하게 된 것은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지도가 치밀했다는 점 이외에, 결정적 요인으로는 임표로 대표되는 인민해방군이 모택동과 문화대혁명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인민해방군이 모택동의 노선을 떠받치면서 혁명의 과정에서 무력 충돌을 최소화하고 문화대혁명이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도록 역할 했던 것이다.

이후 당 조직은 서서히 재건의 길을 걸어서 1970년 12월에는 호남성 위원회(화국봉이 제1 서기)가, 1971년 1월에는 상해시 위원회(장춘교가 제1 서기)가 재건되었다. 여기까지는 모택동이 의도한 대로 문화대혁명이 매우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후 문화대혁명의 한 축이었던 임표가 무너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1968년 3월 2일 중-쏘 국경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는 중-쏘 분쟁이 단지 이념과 정치적 영역만이 아니라 군사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쏘련은 중국의 핵시설에 대한 폭격 계획을 세우고 이에 대한 미국의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북쪽에서는 쏘련 수정주의의 군사적 위협, 그리고 남쪽에서는 미 제국주의가 베트남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베트남 전쟁의 전선을 언제 중국 쪽으로 확대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중국은 쏘련과 미국 양쪽에서 공격받을 수 있는 정치적, 군사적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중국 공산당 내에서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났다. 그 한 흐름으로서 임표는 인민전쟁 노선으로써 쏘련 수정주의와 미 제국주의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흐름으로서 주은래의 경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했고 모택동 또한 주은래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이후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가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하였고, 이는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과 중국의 UN 가입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임표는 고립되었는데, 주은래는 10차 당 대회에서 보고하기를, 임표가 모택동을 살해하려는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가 실패하고 비행기를 타고 쏘련 쪽으로 도주하다가 몽고의 사막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였다는 것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이지만, 고립된 임표가 모택동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은, 문화대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임표가 역사적으로 보인 행동으로 볼 때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향후 역사학자들의 조사,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임표가 사망한 것, 그것도 모택동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도주하다 사망했다는 주은래의 발표는 중국의 정세, 나아가 문화대혁명의 구도를 뒤흔드는 것이었고, 등소평이 재등장한 것도 임표 사망 이후 문화대혁명의 대오가 흔들리면서부터였다. 이후 문화대혁명은 강청 등 4인방에 의해 매우 좌편향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이에 대해 주은래는 극좌를 제어하지 못하면 우익이 대두한다고 경고했는데, 이러한 주은래의 경고는 현실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우익을 재등용한 당사자, 타도된 주자파 세력 상당수를 복권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주은래 자신이었다.

강청 등 4인방이 전개한 비림비공(批林批孔)은 임표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하자는 것이었지만 매우 좌편향적인 것이었다. 임표를 비판하는 것은 당시 정세에서 수긍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공자를 비판한다는 것은 과녁을 빗나간 것이었다. 공자를 비판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봉건적 사상을 반대한다는 것이지만, 당시 정세에서 공자 비판을 통해 대중을 혁명적으로 각성시키고 대중의 혁명적 결집을 도모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등소평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주자파들의 발언을 보면, 공자 비판이 주은래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과녁을 빗나간 것이다. 주은래에게 일정한 우편향이 있었다 할지라도 주은래는 문화대혁명을 지지하고 모택동과 충실히 협력하는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비림비공 운동은 혁명적 정력을 낭비하고 좌편향을 보임으로써, 이후 주자파 세력이, 우익 세력이 재기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열어 준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청, 장춘교, 요문원 등 4인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의 학습 운동을 제창하여 부르주아적 경향이 나타날 물질적 요소를 제거한다고 했지만, 실은 “화폐에 의한 교환 제도, 노동에 따른 분배, 8등급의 차별적 임금제 등을 공격 목표로 하는 것”[35]같은 책, p. 313.으로서 극좌적인 이데올로기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임표가 무너진 후 문화대혁명은 표류를 거듭하고 있었고, 주자파는 이러한 정세를 활용하여 서서히 재기를 준비해 갔다. 등소평은 재차 실각되었지만 주은래에 의해 재등용되어 부총리를 맡았다. 그러나 1976년 1월 8일 주은래가 사망한 이후 등소평 등의 주자파 세력은 천안문 광장에 대중을 동원하여 반체제적인 시위를 조직하였다. 이에 대해 모택동 등은 등소평과의 모순은 적대적 모순으로 전화되었다고 보고 등소평을 다시 실각시켰다. 그러나 모택동은 노쇠하여 1976년 9월 9일 사망하였고 권력은 화국봉에게 넘어갔고 화국봉은 모택동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모택동 사망 후 한 달이 지난 1976년 10월 6일 밤에 강청 등 4인방은 쿠데타적 방식으로 체포되었다. 4인방의 체포는 화국봉과 당의 정치국 원로들이 결정한 것인데 4인방의 빈 공간을 메운 것은 주자파 세력이었다. 화국봉은 모택동의 기존의 방침을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을 내세웠지만, 화국봉의 이러한 노선은 등소평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유명한 진리 표준 논쟁으로 이어졌다. 등소평은 화국봉이 무릇 모 주석의 방침을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을 비판하며 화국봉이 주장한 2개의 ‘무릇’은 교조주의이며,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라고 주장하여 화국봉을 사상적으로 무력화하고 주자파 세력을 자신의 주위에 결집시켰다. 이후 등소평은 다시 복권되었고 4인방이 제거된 상황에서 주자파 세력은 화국봉을 허수아비로 만들면서, 1978년 11기 3중전회를 통해 문화대혁명의 종식과 4개 현대화 노선 등을 선언하였다. 이 회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이론적 근거였던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계속 혁명 이론이 폐기되었고, 이후 등소평은 계급투쟁의 시대가 종식되었다고 선언하며 사상해방의 구호를 내세워 맑스-레닌주의 원칙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이후 수정주의 노선을 거리낌 없이 밀고 나갔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중국사연구회 편저, ≪중국혁명의 전개과정≫, 거름, 1985, pp. 130-131.
2 같은 책, p. 275.
3 같은 곳.
4 같은 책, p. 301.
5 같은 책, p. 298.
6 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1권, 거름, 1990, p. 267.
7 중국사연구회 편저, 앞의 책, p. 338.
8 같은 책, p. 341.
9 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 20.
10 브루노 쇼 편, ≪中國革命과 毛澤東思想≫ 제2권, 석탑, 1986, p. 196.
11 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 57.
12 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p. 56-59.
13 같은 책, p. 64.
14 같은 책, p. 65.
15 우노 시게아끼, ≪中國共産黨史≫, 일월서각, 1984, p. 203.
16 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 45.
17 같은 책, p. 50.
18 같은 책, p. 52.
19 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20 毛泽东, ≪毛泽东文集≫ 第七券, 人民出版社, 1999, p. 204.
21 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p. 237.
22 毛泽东, ≪毛泽东文集≫ 第八券, 人民出版社, 1999, p. 12.
23 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 98.
24 같은 책, p. 115.
25 毛泽东, ≪毛泽东文集≫ 第八券, 人民出版社, 1999, p. 307.
26 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p. 258.
27 肖效欽ㆍ李良志, ≪중국혁명사≫ 제3권, p. 121.
28 같은 책, p. 122.
29 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p. 263.
30 같은 책, p. 267.
31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제2권, 이산, 2004, p. 586.
32 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p. 275.
33 같은 책, pp. 280-281.
34 같은 책, p. 286.
35 같은 책, p. 313.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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