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2)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2장 제국주의의 간섭과 내전, 그리고 전시 공산주의

― 쏘련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 과정(1)

 

 

1. 전쟁의 종식과 쏘비에트 권력의 공고화를 위한 볼쉐비끼의 투쟁

 

타도된 지배계급은 혁명이 승리한 직후부터 쏘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체포를 피해 달아났던 께렌쓰끼는 까자끄(코사크) 부대로 하여금 뻬뜨로그라드로 진격하게 하였고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쉐비끼는 뻬뜨로그라드에서 사관 학교 생도들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 반란들은 노동자 부대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11월 말 뻬뜨로그라드에서 입헌민주당의 음모도 진압되었고 남부 우랄에서 까자끄들의 반란도 진압되었다. 이리하여 혁명 초기 러시아는 혁명 세력이 반혁명 세력을 격파하는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로 진입하고 있었다.

토지에 관한 포고는 중세의 유물을 뿌리 뽑아 버렸는데 반(半)봉건적 토지 소유로 인한 신분적 구별을 폐지하고 러시아 공화국 시민이라는 단일한 호칭이 사용되었다. 또한 종교 세력의 압제를 제거하여 국가와 교회의 분리, 학교와 교회의 분리를 실현하였다. 이는 정교분리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과제를 사회주의 혁명이 실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일체의 차별을 철폐했는데 여성의 동등한 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여성 해방 투쟁의 역사에서 거대한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1917년 11월 2일 러시아 각 민족의 권리 선언이 공포되었는데 레닌이 주장했던 민족 자결권이 선언에서 전면적으로 승인되었고 실제로 우끄라이나와 핀란드의 국가적 독립이 승인되었다. 또 러시아와 동방의 모든 이슬람교도 근로자에게라는 호소문은 이슬람교도의 민족적ㆍ문화적 제도, 관습과 신앙은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했다.1) 약소민족에 대한 볼쉐비끼의 이러한 정책은 소수민족, 약소민족들이 독립적인 민족 국가의 수립을 포함하는 민족 자결권을 실현할 때만 각 민족의 노동자계급 간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과거 민족들의 감옥에서, 이제는 각 민족의 자유로운 연대에 입각한 새로운 국가의 건설로 나아갈 수 있었다.

10월 혁명 전에 명부가 작성되어 1917년 11월 치러진 선거에 의해 구성된 헌법제정회의는 10월 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사회혁명당 우파 등이 다수인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1918년 1월 5일 소집된 헌법제정회의는 근로ㆍ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심의를 거부하며 반(反)쏘비에트적 성격, 부르주아적 성격을 드러내었다. 이에 대해 전(全)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헌법제정회의를 해산시켰고 근로ㆍ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은 곧이어 개최된 쏘비에트 제3차 전(全) 러시아 대회에서 채택되었다.2) 근로ㆍ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은 러시아가 노동자ㆍ병사ㆍ농민 대표 쏘비에트 공화국임을 선언하고 민족들의 자발적 연합에 의한 연방 공화국이라는 것을 선언했다. 또한 근로ㆍ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계급의 폐지를 선언했다. 이러한 근로ㆍ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의 내용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의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이 새로운 부르주아 시대의 개막을 알린 것과 달리, 인류가 프롤레타리아 시대, 사회주의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쏘비에트 권력은 이러한 혁명적 정책을 통해 내적으로 강화되어 갔지만 러시아가 여전히 제국주의 세력과 전쟁 상태에 있는 현실은 언제든지 혁명과 쏘비에트 권력이 압살될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또한 4-5년 동안 계속된 전쟁에 지쳐 있는 러시아 인민과 병사들의 입장에서 전쟁의 종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쏘비에트 정부의 무병합ㆍ무배상을 조건으로 한 즉각적인 전쟁의 종식 제안은 영국과 프랑스 등 협상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리하여 쏘비에트 정부는 독일과 단독 강화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독일과의 교섭은 1917년 11월 20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시작되어, 12월 2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3) 그러나 이어진 강화 교섭에서 독일은 뽈쓰까(폴란드), 리에뚜바(리투아니아), 라뜨비야 및 백러시아 일부의 할양을 요구하였고 우끄라이나를 복속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무도한 요구에 대해 러시아 인민은 분노하였지만 러시아는 독일에 맞설 수 있는 군대가 없었다. 짜르 시대의 병사들 상당수는 동원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아갔고 또 그나마 있는 군대조차 지속된 전쟁에 지쳐 있었다. 따라서 단기간에 혁명적 군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혁명을 구하기 위한 평화로운 휴식 기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독일과의 강화 교섭이 일정에 오르자 러시아 국내의 견해들, 심지어 볼쉐비끼 당내에서조차 견해들이 갈리게 되었다. 짜르의 잔당들, 부르주아 입헌민주당, 사회혁명당, 멘쉐비끼는 독일과의 강화 교섭에 대한 반대를 선동했고 볼쉐비끼와 함께 쏘비에트 내각을 꾸렸던 사회혁명당 좌파조차 강화 교섭에 반대했다. 그리고 볼쉐비끼 내에서는 뜨로쯔끼, 부하린 등이 독일과의 강화 교섭을 반대했다. 심지어 볼쉐비끼 당의 중앙위원회에서조차 즉각적인 강화의 체결을 주장하는 레닌의 입장은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레닌은 강화를 반대하면서 혁명전쟁을 주장하는 견해들은 공론(空論)에 불과하다는 것을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제3차 쏘비에트 대회로부터 강화에 대해 쏘비에트 정부에 전권을 위임한다는 결의를 끌어내어 강화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쏘비에트 정부의 위임을 받아 강화 교섭에 대표로 나선 뜨로쯔끼는 레닌의 지시를 위반하고 독일이 제시한 현재의 조건으로는 강화 교섭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며 러시아는 독일과 전쟁을 중지하고 군대를 동원 해제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파멸적 선언으로 인해 독일은 며칠 만에 공세를 재개하여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수도인 뻬뜨로그라드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민위원회는 사회주의 조국이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격문을 발표하고 쏘비에트 공화국의 방위에 인민이 나서 줄 것을 호소하였다.4) 이러한 호소에 응하여 선진 노동자들과 동원 해제되었던 병사들이 의용병을 조직하여 독일군과 맞서 싸워 수도를 지켜 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하린이 이끄는 좌익 공산주의 그룹은 전쟁의 지속을 주장했지만, 레닌은 강화를 주장하여 볼쉐비끼 당 중앙위원회의 표결에서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더욱 가혹해진 조건이긴 하지만 독일과의 강화가 1918년 3월 3일 조인되었다. 뽈쓰까, 우끄라이나, 발트 국가들이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렇게 쏘비에트 러시아는 큰 손실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전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전쟁에 지친 인민과 병사들에게 휴식의 기간을 줄 수 있었고 혁명과 쏘비에트 권력이 압살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평가해 보면 부하린 등의 좌익 공산주의 그룹은 독일과의 강화를 반대하고 전쟁의 지속을 주장했는데 이는 혁명을 현실로서가 아니라 관념으로서, 공론(空論)으로서 사고하는 것이었다.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대 자체가 없다는 현실, 그리고 수년간 지속된 제국주의 전쟁에 지친 인민들로서는 휴식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현실, 그리고 쏘비에트 혁명은 막 태어났을 뿐이며 제국주의와 정면 대결하기 위한 능력이 당시로서는 없었다는 것을 좌익 공론가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브레쓰트 강화는 1918년 3월 6일 긴급 소집된 제7차 볼쉐비끼 당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회혁명당 좌파는 크게 동요하면서 쏘비에트 정권으로부터의 탈퇴를 결정하였다. 이는 소부르주아 세력의 이중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혁명의 성공 가능성이 높을 때는 그에 가담하지만 혁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혁명을 배신한다는 것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있었지만 쏘비에트 권력은 일정 기간의 휴식 기간을 활용하여 혁명의 강화와 진전에 집중할 수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1918년 여름부터 본격화된 제국주의의 간섭과 내전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제7차 당 대회는 10월 혁명의 성과를 반영하여 당 강령을 개정하고 당명을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볼쉐비끼)으로 개정하였다. 이러한 당명 개정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최종 목표를 분명히 한다는 의미가 있고, 또 제2 인터내셔날의 사회민주당들과 명칭의 구분을 통해 선을 그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브레쓰트 강화 조약은 제7차 당 대회 직후 모쓰끄바로 수도를 옮긴 상태에서 소집된 제4차 전 러시아 쏘비에트 임시대회에서 최종적으로 승인되었다. 그리하여 쏘비에트 공화국은 적군(赤軍)을 창설하고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수행하는 단계로 접어들었고 쏘비에트 권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2.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혁명적 조치들

 

사적 유물론에 따를 때, 한 사회의 기초는 경제적 생산관계이며 국가와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기초 위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토대에 해당하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혁명의 실제 내용을 실현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본격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의 과정은 공업에서의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과 농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농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은 1920년대 말, 30년대에 걸친 농업의 집단화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공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은 1917년 혁명 직후부터 1918년 여름과 가을까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대부분 실현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단지 자본가의 생산수단을 수탈하여 전 인민의 재산으로 사회화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에서 공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지주와 자본가계급이라는 수탈자를 수탈하는 과정, 다시 말하면 지주와 자본가로부터 토지와 공장, 기업을 빼앗는 과정이 첫 번째 과정이며, 그 다음으로 혹은 그 과정과 동시에 공장과 기업에 대해 노동자의 통제(control) 혹은 감독을 실현하여 생산을 유지하고 자본가의 사보타주를 분쇄하는 과정이 있다. 이러한 노동자 통제가 성공적으로 실시되면, 그 결과 노동자 중에서 경영 전문가, 관리 전문가가 배양되고 이후 노동자 통제에서 노동자 관리(administration)로 이행하게 된다. 노동자 관리는 노동자들이 실제로 경영을 지배하게 되고 또 소유권에서 있어서도 자본가의 소유권이 완전히 박탈되는 단계로서 기업의 사회주의적 국유 기업으로의 이행이 완성되는 단계를 가리킨다. 그러면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러시아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수탈자의 수탈, 국유화의 과정을 검토해 보자.

1917년 11월 중순, 소비에트 권력은 국립 은행과 개인 은행을 국유화하고 은행 사업은 국가가 독점한다5)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은행이 국유화 과정에서 최초의 대상이 된 것은 노동자계급이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재정, 재무, 회계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실제로 레닌은 혁명을 전후하여 노동자계급이 지배계급으로서 가장 급선무로 수행해야 할 과제로서 계산(account. 장부 기록, 회계를 의미한다)과 통제(control. 자본가의 소유를 전제로 하여 생산 과정에 대해 노동자가 감독하는 것을 의미한다)를 꼽았다. 그런 점에서 은행의 국유화는 노동자계급이 전체 경제를 장악하기 위한 관제고지를 점령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17년 11월 말 자본주의적 대기업들이 국유화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18년 봄에는 석탄, 야금, 석유, 화학, 기계 제조, 섬유 부문의 대다수 자본주의적 대기업과 제당업 부문의 모든 기업이 국유화되었다.6) 이러한 과정은 최초로 국유화되는 기업들이 주로 기간산업에 해당되는 것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중소 규모의 자본주의적 기업의 국유화는 최초에는 일정에 올라 있지 않았다. 그런데 자본가들이 도망가거나 생산을 사보타주하는 것에 대한 징벌로서 국유화를 실시하게 되어 중소 규모의 기업들도 국유화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1918년 여름이면 대부분의 자본주의적 기업에 대한 국유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수탈자에 대한 수탈이 이루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을 유지하고 국유화를 법적인 형식이 아니라 경제적인 의미에서 실제로 조직화하기 위해 국유화의 전(前) 단계로서 노동자 통제가 도입되었다. 1917년 11월 14일 쏘비에트 정부는 노동자 통제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에 의해 규정된 노동자 통제위원회는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노동자 협동조합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생산량의 최저한도, 원가의 조사 등에 대한 권한이 있었다.7) 이러한 노동자 통제는 사회주의로 향해 가는 불철저하지만 또한 필요한 조치였는데 왜냐하면 포고를 통해 즉각적으로 모든 공업에서 사회주의를 실시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단지 노동자계급이 관리를 배우고, 노동 대중의 위신이 수립되어야만, 사회주의가 비로소 형성되고 공고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는 소망에 지나지 않게 된다.8)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 통제의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이 경영과 관리를 익히는 것을 통해 점차적으로 노동자 통제(control)에서 노동자 관리(administration)로 이행해 가게 되었던 것이며 1918년 여름이면 국유화가 완성되면서 노동자 관리로의 이행이 대체로 이루어지게 된다.

레닌은 1918년 4월에 ≪쏘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라는 저작을 발표하는데 여기에는 혁명과 건설에 있어서 당시 러시아가 부딪히고 있는 상황과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방향이 집약되어 있었다.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에서 노동 인민의 역할은 주요한 파괴력이었으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긍정적 혹은 건설적 역할은 부르주아지의 몫이었으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는 노동 인민이 긍정적 혹은 건설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혔다.9) 그러면서 노동 인민이 러시아를 관리(administration. 행정, 통치)하는 과제를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특히 레닌은 결정적인 것은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 전국적인 계산(account)과 통제(control)의 조직화이다10)라고 규정했다. 계산은 일종의 회계 혹은 장부 기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노동자계급이 억압받는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지배계급으로서의 생산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계산, 회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나 자본가들과 과거 정권의 정부 관리들이 사보타주하고 횡령하는 것이 비일비재한 현실에서,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계산, 회계에 대한 엄격한 조직화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레닌은 계산의 조직화와 더불어 통제의 조직화를 주장했는데, 이는 자본가들이 생산을 사보타주하는 상황에서 생산을 유지하고, 이후 전면적인 국유화로 나아가기 위한 전(前) 단계로서 노동자 통제의 단계를 설정한 것이었다. 레닌은 1918년 4월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수탈자를 수탈하는 것에 비해, 노동자계급의 계산과 통제의 조직화가 뒤쳐져 있다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자본가에 대한 수탈, 진압의 방법에서 관리(administration. 행정, 통치)의 방법에 의한 승리를 획득해야 함을 강조했다. 레닌은 ≪쏘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 생산에서 노동자 간의 사회주의적 경쟁을 조직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노동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경쟁의 조직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이 글에서 레닌은 쏘비에트 민주주의의 성격을 분석했는데, 첫째, 선거에서 노동자, 피착취자가 선거권을 가지고 착취자인 부르주아들이 선거에서 배제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적이며, 둘째, 선거에 대한 관료주의적 형식들과 제한들이 폐지되었고 인민 스스로가 선거의 질서와 시기를 결정하고 선출된 인물을 언제든지 자유롭게 소환할 수 있으며, 셋째, 피착취 대중을 이끄는 전위로서 노동 인민,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범한 조직화가 이루어져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들이 독립적인 정치 생활로 나아가고 관리, 행정의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11)

≪쏘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에서 강조된 계산과 통제는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인 의미에서만 지배계급이 아니라 경제적인 의미에서도 지배계급이 되기 위한 선결 조건이었다. 볼쉐비끼 당은 공업 기업에서 전국적인 국유화와 더불어 사회주의적인 경제 조치들을 실시하였다. 자본가들의 사적인 상업을 국유 상업으로 대체해 나가고 이를 통해 계획적, 조직적 분배를 실시하여 일체의 상업을 대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12) 그리하여 도매 상업은 국유화하고 영세 상업은 시유(市有)화하는 과정을 밟았다.13) 이 과정에서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자본가들을 수탈한 이후에는 일체의 상품-화폐 관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레닌은 이를 반대하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상품-화폐 관계와 신용 대출 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당시 이러한 점이 쟁점이 된 것은 혁명 직후 상황에서 노동자계급과 소상품 생산적인 농민의 연합을 위해서는 상품-화폐 관계의 활용이 불가피하다는 점이 이론적으로, 정치적으로 명확히 정립되지 못했던 것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실제로 당적인 차원에서 확인되고 정립된 것은 전시 공산주의를 거쳐, 신경제 정책(NEP)에 이르러서였다.

쏘비에트 정부는 사적인 상업을 국유 상업으로 대체해 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존에 형성되어 있던 소비자 협동조합을 사회주의 경제에 결합시켜 인민에게 소비 물자를 공급하는 매개로 삼고자 하였다. 이는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의 지배에 봉사하는 것이지만 생산에서 사회주의적 관계가 확립되고 난 후에는 협동조합이 사회주의적 관계에 봉사할 수 있다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비단 분배의 영역만 아니라 향후 농업에서의 생산에 있어서도 협동조합적 방식을 중시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쏘비에트 정부는 무역에 있어서 사적 자본가를 배제하고 국가 독점을 실시하여 경제에 있어서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 가능성을 차단하고 사회주의 건설의 조건을 확보하였다. 또 외환에 대한 국가 독점, 황금에 대한 국가 독점을 확립하여 자본가들의 경제적 지반을 박탈하면서 쏘비에트 정부의 경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자본가에 대한 수탈이 일단락되고 국유화가 완성되면서 세무 행정의 건설, 즉 수탈에서 일상적 징세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세무 행정의 수립은 계산과 통제의 수립과 발전에서 중대한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공장과 광산의 국유화는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을 초래했다. 그러나 토지의 국유화는 그 자체로는 농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을 초래하지 않는다. 즉, 농업에서는 공동 경작으로 이행해야만 농업에서의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수립되는 것이다.14) 혁명 직후 토지 포고령에서 토지 국유화를 선언하면서도 토지를 농민 개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여 경작하게 한 것은, 사회혁명당 좌파의 입장을 고려하고 또 당시 농업에서 집단적 농업으로 이행할 물적인 조건(농기계 등)이 부재하고, 또 농민 상당수가 개인적 경작을 포기하고 집단적 농업으로 이행할 의지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집단적 농업의 우월성에 대한 이해가 당시 농민들에게 없었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럼에도 토지 국유화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거대한 의의가 있는데, 당장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의 실현, 집단적 농업으로 이행할 수 있는 주요한 조건이 확보된 것이었다. 레닌은 토지의 농민 개인들에 대한 평균적 분배와 사용에 대해, 권력이 노동자ㆍ농민 정부에게 있고 가장 중요한 혁명적 조치가 시행되면,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협하지 않으며 사회주의로 가는 과도적 방법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15)

토지 국유화로 인하여 절대 지대가 소멸하여 농산물 가격은 인하된다. 그리고 토지의 비옥도, 토지의 입지, 교통 관계 등에 따른 차액 지대는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되게 된다.16) 그리고 토지에 대한 행정적 지배권은 지방의 쏘비에트에 귀속되었다. 농민들에 대한 토지의 구체적 분배는 지방의 쏘비에트가 관할한 것이다. 토지 개혁은 러시아에서 2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먼저 지주의 토지를 전면적으로 몰수하여 대부분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그리고 그중 약 1% 남짓의 토지만 국영 농장과 집단 농장을 실험하는 것으로 돌려졌다. 이것은 사회혁명당 좌파, 농민들에 대한 양보와 타협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농민 전체가 보유한 토지는 혁명 전에 비해 거의 2배로 늘어나게 되었고, 특히 토지가 없거나 약간밖에 없던 농민들이 대부분 토지를 보유하게 되거나 토지 보유가 늘어나게 되어, 농촌 전체적으로는 빈농이 감소하고 중농이 늘어나서 농촌의 중농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농촌 전체에서 중농의 비중은 30%에서 60%로 늘어났다.17)

그런데 1918년 여름에 식량 위기가 발생했다. 혁명 후 쏘비에트 정권은 식량 거래의 국가 독점과 고정 가격에 의한 곡물의 수매 정책을 폈는데, 이에 대해 부농계급이 격렬히 반발하여 도시에 대한 식량 공급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즉, 지주계급이 사라진 상태에서 농촌의 지배계급이 된 부농(꿀라끄)들은 도시에 상품적 식량을 공급하는 주요한 위치였는데, 이들이 쏘비에트 정권의 정책에 격렬한 저항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쏘비에트 정부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식량 징발대를 농촌에 파견하여 부농과의 투쟁 속에서 식량을 확보하여 식량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쏘비에트 정부는 1918년 6월 1일 빈농위원회를 수립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들 빈농위원회와 노동자 식량 징발대가 연합하여 부농의 잉여 식량을 징발하여 도시 주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이러한 과정은 빈농위원회가 농촌에서 사회주의의 거점이라는 것을 보여 주며, 이는 노동자계급과 빈농계급과의 동맹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현실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토지 개혁 과정에서 부농이 절취한 토지의 상당 부분과 부농의 토지 중 기준을 넘어서는 토지의 상당 부분을, 토지 없는 농민과 토지가 적은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그리하여 토지 개혁의 사회주의적 단계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농촌의 빈농위원회는 1918년 11월 촌(村) 쏘비에트와 합병되게 된다. 이로써 빈농위원회는 형식적으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노동자계급과 빈농과의 동맹 정책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레닌은 빈농위원회와 촌 쏘비에트의 합병에 대해 우리의 방법은 빈농위원회를 쏘비에트로 성장ㆍ전화시키는 것이다18)라고 말한 바 있다.

빈농위원회의 소멸은 볼쉐비끼 당의 중농에 대한 정책의 변화 때문이었는데, 혁명 직후 볼쉐비끼 당은 중농에 대해 중립화 정책을 폈다. 그러나 토지 개혁의 결과 농촌 전반이 중농화되고 또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중농을 사회주의 건설로 끌어들이는 정책이 필요하게 되었고, 또 주체적으로는 중농들이 쏘비에트 정부에 대해 1918년 가을부터 지지하는 추세로 전환한 것이 주요했다.19) 그리하여 볼쉐비끼 당은 중농에 대해 과거의 중립화 정책으로부터 전환하여 중농과 동맹하고 부농과 투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방침의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중농들이 쏘비에트 혁명으로 인해 토지를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토지에 얽매인 채무 관계 또한 소멸되었고, 이후 혁명과 건설 과정이 진전되어 농촌에 대한 쏘비에트 정부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중농들이 부농(꿀라끄)의 영향력으로부터 서서히 독립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18년 중반부터 시작된 내전에서 백위군은 점령 지역에서 토지를 혁명 전의 원소유주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폈는데, 이를 목격한 농민들은 토지를 지키기 위해 쏘비에트 정부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게 되었고 실제로 백위군과 맞서는 병사로서 투쟁했다.

계산과 통제의 단계를 거쳐 자본주의적 기업에 대한 국유화가 1918년 여름경 완성되면서, 그 기업들의 사회주의적 경영이 당면 과제로 되었다. 쏘비에트 정부는 국유화된 기업들의 경제를 조직하기 위해 통상 3단계의 관리 기구를 두었는데, <최고국민경제회의 산하의 중앙관리국(혹은 총관리국)-지방의 성(省)의 관리국-국유화된 기업>의 계통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규모가 크거나 국민 경제에 중추가 되는 기간산업은 <중앙관리국-기업>의 2단계 계통을 두어 중앙에 직속된 기업으로서 관리되었다. 그리하여 공업 부문에서는 국민 경제 전체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서 계획적으로 조직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의 관리 체계를 정돈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혁명 직후의 경영에 있어서 실시되었던 위원회 체계를, 공장장 1인 책임제로 전환하는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1인 책임제를 프롤레타리아적 원칙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반대를 하였다. 이에 대해 레닌은 현대적인 대기업의 운영에 있어서 의지의 통일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들어 1인 책임제를 옹호하였다. 어떠한 기계제 대공업―즉, 사회주의의 물질적, 생산적 원천이자 기초―도 무조건적이고 가장 엄격한 의지의 통일을 요구하며 이를 통해 수백 명, 수천 명 심지어 수만 명의 공동의 작업을 지도하게 된다.20) 좌익 공산주의 그룹의 후신인 민주집중제파는 1919년 3월의 8차 당 대회에서 1인 책임제를 반대했는데, 레닌은 이에 대해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집단적인 토론과, 실제상에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한 1인 책임제와 지도제의 실행을 결합시켜야 함을 주장했고,21) 당 대회에서는 레닌의 관점에 따른 결의를 도출해 냈다. 그리하여 혁명 직후의 위원회제 경영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통제를 조건으로 한 경영상의 1인 책임제로 이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에 따른 분배 원칙을 수립하여 평균적 분배를 극복하는 것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제고하고 노동 규율을 강화해 나가는 조치를 실시했다. 혁명 직후의 혼란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기업의 국유화의 의미, 전(全) 인민적 소유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의 질과 양의 차이에 따른 차등적 분배는 타당한 것이었고, 이러한 방침은 이후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일관되게 관철된다. 그러나 단, 내전의 상황에서는 노동에 따른 분배보다는 평균적 분배가 불가피했는데, 내전으로 인해 식량과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배급과 현물 급여의 형식을 통한 평균적 분배가 실시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1921년 10차 당 대회에서 신경제 정책(NEP)으로의 전환이 결의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레닌은 당시의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러시아의 사회 경제를 5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하였다. 1. 가부장제적 즉, 상당한 정도 자연적인 농민 경제, 2. 소상품 생산(여기에는 대다수의 식량을 판매하는 농민이 포괄된다), 3. 사적 자본주의, 4. 국가자본주의, 5. 사회주의.22) 흔히 우끌라드라 불리는 이러한 사회 경제 성분의 종류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불가피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자급자족적인 농민의 가부장제적 자연 경제, 그리고 약간의 식량과 농산물을 판매하는 소농민들, 이들이 러시아 농촌에서 대다수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들을 러시아 사회를 규정하는 기본적 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레닌은 과도기에 있어서 기본 모순은, 타도되었지만 사멸하지 않은 자본주의와 막 태어나서 발전해 나가는 사회주의 간의 모순으로 파악했다.23) 누가 누구를이라는 문제가 과도기에 있어서 핵심적 문제이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 누가 농민들을 동맹자로 획득하는가의 문제가 관건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과도기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레닌의 기본적 인식이었다.

레닌은 이러한 인식하에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소상품 생산이 자본주의 요소를 끊임없이 발생시킨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국가자본주의 요소의 활성화를 통한 소생산의 빠른 극복의 길을 탐색했다. 레닌은 국가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서로 용납할 수 없다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국가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소상품 생산과 사적 자본주의보다 우월한데, 왜냐하면 국가자본주의는 집중된, 통계화된, 감독이 있는 사회화된 것이며, 반면에 우리는 바로 이러한 것을 결여하고 있다. 소부르주아지의 나태한 자연 발생적 세력이 지금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발생적 세력은 우선 우리의 역사와 경제가 만들어 낸 것이다24), 사회주의와 국가자본주의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부르주아지 더하기 사적 자본주의가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25)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레닌의 견해는 자본주의가 타도되고 사회주의 건설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농민 등 광범한 소생산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이 최대 과제이며, 국가자본주의는 그를 위한 하나의 유력한 수단임을 강조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서 국가자본주의는, 구체적으로 자본가를 흡수하여 경영과 관리의 전문가로 활용하는 것, 자본가 특히 외국 자본에게 특허 등 이권을 할당하여 러시아 국내에서 경영하게 하는 것, 협동조합을 국가와 결합시켜 국가자본주의의 하나의 형식으로 삼는 것, 국가가 경영할 여력이 없는 국유 기업을 사인에게 임대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문제의식과 정책적 방향 제시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내전, 그리고 제국주의 세력의 봉쇄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서 국가자본주의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과도기 경제의 하나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조건으로 하여 국가자본주의 형식을 활용할 수 있다는 레닌의 문제의식은, 향후의 혁명과 건설에서 하나의 유력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18년 7월 4일 모쓰끄바에서 제5차 전 러시아 쏘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대회가 열리는 기간 동안 사회혁명당 좌파는 주러 독일대사를 살해하여 독일과의 전쟁을 도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모쓰끄바에서 반(反)쏘비에트적인 폭동을 일으켰는데 볼쉐비끼는 그 폭동을 진압하고 독일과의 교섭도 이루어 내어 전쟁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쏘비에트는 사회혁명당 좌파를 쏘비에트에서 제명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제5차 쏘비에트 대회는 러시아 쏘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했다.26) 헌법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본가 및 지주의 사적 소유 폐지, 각 민족의 동등권 등을 담았다. 그리고 착취계급의 선거권은 박탈되었다. 이러한 쏘비에트 헌법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에 대해 독일의 카우츠키는 독재와 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 대립시키면서, 러시아의 볼쉐비끼가 사회주의를 민주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독재적 방식으로 실현하려 한다면서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레닌은 계급을 떠난 순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에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레닌과 카우츠키의 이러한 논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면서, 러시아의 현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민주주의 발전의 이론적 기초를 강화하였다.

 

 

3. 제국주의의 간섭과 내전의 발발

 

10월 혁명이 승리한 직후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세력은 러시아에 대한 무력간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지원을 받은 로므니아(루마니아)는 1918년 1월 러시아와의 접경 지역인 베싸라비야를 점령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독일 간에 브레쓰트 강화 조약이 체결되자, 영국과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세력은 러시아 북부의 무르만쓰끄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어 영국과 미국, 일본이 러시아 동부 블라지보쓰또끄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중앙아시아의 러시아령인 뚜르께쓰딴의 일부를 점령했고 까프까쓰(코카서스)에서는 영국군이 백위군과 협력하여 바꾸를 점령했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 세력은 러시아 북부, 동부, 남부에 걸쳐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브레쓰트 강화 조약을 위반하면서 핀란드, 발트해 국가들, 우끄라이나를 점령하고 돈강 연안 그리고 그루지야를 점령했다.

이렇게 제국주의 세력의 포위망이 형성되는 가운데, 러시아 중심부에서 사회혁명당 좌파의 반란 음모가 분쇄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내전이 발발하기 시작했는데, 그 계기는 체쓰꼬쓸로벤쓰꼬(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이었다. 이 반란에 다수의 반혁명 세력이 결합하면서,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 백위군 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체쓰꼬쓸로벤쓰꼬 군단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에 포로로 잡힌 체쓰꼬쓸로벤쓰꼬의 병사들로서, 이들이 씨비르(시베리아)와 극동을 거쳐 프랑스로 이동하는 것을 쏘비에트 정부가 승인한 상태에서,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으로 이들이 씨비르에서 반혁명으로 돌아서면서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자신들을 프랑스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송환하려 한다는 제국주의자들의 이간질이 이들을 반혁명으로 돌아서게 했다. 체쓰꼬쓸로벤쓰꼬 군단은 씨비르와 블라지보쓰또끄 등 극동 지역을 점령했다. 제국주의의 간섭과 내전 발발 당시 쏘비에트 러시아는 군대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쏘비에트 정부는 인민들에게 조국 전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고, 그 호소에 응하여 1918년 여름까지 약 50만 명의 지원병이 자원입대했다. 그러나 이 병력은 러시아 내부의 지주와 자본가계급에 맞서기에는 충분했지만,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에 따라 쏘비에트 정부는 의무 병역 제도로 이행했고, 병사들을 주로 노동자계급과 농민 중에서 선발하는 계급적 정책을 폈다.27) 볼쉐비끼 당은 열성 공산당원을 군대에 동원했고, 공산주의 청년동맹, 각지의 노동조합이 선진 노동자들을 군대로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쏘비에트 군대에는 과거 짜르 시대의 장군과 장교 등 군사 전문가들이 등용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군사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하여 쏘비에트 군대의 승리에 공헌했으나, 그중에는 쏘비에트 국가를 배신하고 백위군과 제국주의 세력에 가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 군사 전문가의 등용은, 쏘비에트 군대가 스스로 전쟁을 치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군사적 지식, 군사적 전략과 전술의 능력을 가진 지휘관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각 부대에 꼬미싸르라 불리는 정치위원이 볼쉐비끼 당에서 파견되어 군대의 사기의 제고와 정치적 방향의 결정, 지휘관에 대한 감독 등을 수행했다. 이러한 군대에 있어서 정치위원 제도는 이후 쏘련의 역사 전체에 걸쳐 지속되었고, 쏘련 이외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 있어서도 군대에서의 정치위원 제도가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쏘비에트 군대가 형성될 당시부터 군대는 당의 지도를 따른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쏘련의 경우만이 아니라 중국 혁명의 경우에도, 홍군은 공산당이 조직하고 지도하는 군대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국가 권력의 핵심인 군대에 대한 당의 지도 원칙은, 빨치산 투쟁을 넘어서서 정규군의 편성이 불가피한 상태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1918년의 여름, 동부 전선이 전황을 결정하는 전선이 되었다.28) 체쓰꼬쓸로벤쓰꼬 군단은 부농 등 백위군과 연합하여 모쓰끄바로의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험이 풍부한 당 활동가들이 전선에 파견되었고 모쓰끄바와 뻬뜨로그라드 등 중부의 거대한 당 조직들은 당원의 1/5을 전선으로 보냈고 볼가와 우랄 지방의 당 조직은 당원 대부분을 전선으로 보냈다.29) 쏘비에트 군대는 체쓰꼬쓸로벤쓰꼬 군단과 백위군이 모쓰끄바로 진격하는 것을 차단했고, 까자끄 군이 모쓰끄바 등 중부 지구를 향하기 위해 돌파하려고 했던 짜리 지구에서 백위군을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북까프까쓰 군관구 군사회의가 창설되었는데, 그것은 쓰딸린, 보로쉴로프, 미닌 등으로 구성되었다. 짜리 전투의 승리는 전체 전선에 걸쳐 쏘비에트 군대의 사기를 고양시켰고 동부 전선의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1918년 8월 30일 사회혁명당원이 레닌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레닌은 총탄 2발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이후 쏘비에트 정부는 반혁명파의 테러에 대응해 적색 테러를 시행하게 되었고, 백위군에 가담하거나 음모와 폭동에 가담한 자는 총살형에 처해졌다.30) 레닌에 대한 저격이 전체 인민을 분노하게 하는 가운데, 쏘비에트 군대는 공세로 전환하여 체쓰꼬쓸로벤쓰꼬 군단과 백위군을 격멸했다. 이로써 내전의 초기에 쏘비에트 군대는 전선에서 주요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1918년 가을에 쏘비에트 군대는 100만 명의 군대로 성장해 있었다.31) 이즈음에 독일군 점령 지구였던 뽈쓰까, 우끄라이나, 백러시아, 발트 국가들에서 공산당 주도의 봉기가 시작되고 빨치산 투쟁이 전개되었다.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병력을 빼 와서 대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 병사들은 쏘비에트 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쏘비에트 정권이 근로 인민의 정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독일 병사들은 독일로 돌아가 혁명 사상을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군은 영국, 프랑스 등의 협상국에게 군사적 패배를 당하고, 이어 독일과 벌가리야(불가리아), 오스트리아, 마쟈르(헝가리) 등에서 혁명이 발발하였다. 독일 제국주의의 이러한 붕괴는, 쏘비에트 러시아로 하여금 굴욕적인 브레쓰트 강화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게 했다. 브레쓰트 조약이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는 레닌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독일에 승리한 영국, 프랑스 등 협상국이 이제 군대를, 쏘비에트 러시아를 압살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러시아 북부 무르만쓰끄와 아르항겔쓰끄에 영국군과 미국군 4만 명 이상이 상륙했다. 일본은 극동에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상륙시켰다.

제국주의 세력은 러시아 내의 백위군 세력에 대한 원조를 강화하여 씨비르에서 짜르 시대의 제독 꼴차끄의 정권을 수립하게 하였고, 남부에서는 짜르 시대의 장군 제니낀에게 장비와 탄약을 공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쏘비에트 정부는 협상국 열강들에게 강화 조약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제국주의 세력이 쏘비에트 러시아를 이렇게 전면 압살하려는 상황에서, 레닌은 300만 명의 군대를 창설할 것을 내걸었고, 전시 동원을 위해 1918년 11월 30일,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노농 국방회의가 설치되었다.32)

1918년 여름에 식량 위기가 발생하자, 볼쉐비끼 당은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농촌에 파견해 식량을 조달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농촌에 빈농위원회를 조직하여 노동자 식량 징발대와 빈농들이 연합해 부농의 잉여 식량을 징발하였다. 그리고 전시 상황에서 전반적인 노동 의무제가 실시되어, 주민들로 하여금 당시 연료의 대체물로 쓰였던 목재의 벌채와 운반, 석유 등 연료의 운반 등에 종사하게 하였다.

1918년 말 남부 전선의 정세가 악화되었다.33) 경험이 풍부한 활동가들이 남부 전선으로 파견되어 백위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역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제국주의 세력은 남부 전선을 교란하기 위해, 씨비르의 꼴차끄로 하여금 북부 지역을 공격하게 하고 모쓰끄바로 진격하려 했다. 쏘비에트군은 이 전선에서 처음에는 패배를 당하고 밀렸으나, 당이 직접 개입하여 군대를 재정비하여 반격에 나서게 되었다. 남부 전선에서도 공세로 전환하여 곳곳에서 승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 군대는 자신들이 싸우는 것이 인민의 정권이라는 점을 깨닫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는 적 점령 지구 내에서 당의 지하 조직이 광범한 선전 활동을 벌인 것이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1919년 4월 흑해의 프랑스 함대에서 본국 귀환을 요구하는 반란이 발생했다. 그리고 유럽 전역에 확산되어 있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쏘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라는 인민들의 요구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점은 제국주의 세력이 쏘비에트 러시아에 개입하는 정도를 약화시키게 하였다.

1919년 3월 18일 공산당(볼)의 제8차 당 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반영하여 제2차 당 강령을 채택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와 사회주의 건설을 일정에 올렸다. 강령 채택 과정에서, 부하린 등은 제국주의는 독점자본주의 이전의 여러 경제 형태와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제출했다. 이는 제국주의하에서 오직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제국주의하의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에서의 반봉건 운동, 민족 해방 운동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당시 쏘비에트 러시아의 현실에서 중농과의 동맹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레닌이 주장했던 중농과의 동맹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 방침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 입장은 실천적으로 당시 내전 상황에서, 노농 동맹의 강화를 통한 반혁명 세력의 고립이라는 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서, 내전에서의 승리를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부하린은 민족 자결권을 강령상에서 승인하는 것을 부정했는데, 당 대회는 이러한 부하린의 입장을 비판하며 레닌적 강령을 채택했다.

8차 당 대회는 또한 당의 강화를 위해 중앙 기관으로서 정치국, 조직국, 서기국을 두었고 당원 등록제를 실시하여 당원에 대한 일종의 숙청을 진행하였다. 당원 등록제를 통한 숙청은 볼쉐비끼 당이 권력을 장악한 집권당으로 된 상황에서, 출세주의분자, 관료주의분자 등을 걸러 내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숙청은 당원들에 대한 밑으로부터 대중들의 비판을 반영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그리고 당 건설에 있어서 각 민족 쏘비에트 공화국들의 상호 관계와 각 민족 공산당들의 관계가 문제되었다. 이에 대해 당 대회는 공화국 간의 국가적 관계는 연방적 관계이지만 당은 연방이 아니라 단일한 공산당으로 결합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는 각 민족 쏘비에트 공화국들의 각각의 공산당들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단일한 당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각 민족 공화국의 공산당은 전체 연방 공산당의 지방위원회로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10월 혁명 승리는 곧바로 국제 노동 운동의 지형을 변형시키면서 세계 각국에서 혁명 운동을 고양시켰다. 1918년 1월 뻬뜨로그라드에서 사회주의당 좌파회의가 열려서 국제주의자 국제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18년에는 많은 나라에서 공산당이 창립되었다. 독일에서는 1918년 말부터 1919년 1월 초에 걸쳐 독일 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렸다.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 메링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얼마 되지 않아 독일 제국주의자들의 손에 희생되었다. 이어서 핀란드, 오스트리아, 마쟈르, 뽈쓰까 등지에서 공산당이 창립되었다. 1919년 1월에 뻬뜨로그라드에서 국제주의자 대표회의가 열려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의 참가를 호소했다. 1919년 3월 초에 모쓰끄바에서 30개의 공산당, 좌파 사회주의 조직이 대회에 참가한 가운데, 대회는 제3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창설을 결의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의 정강을 채택했다. 이로써 세계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국제 연대의 틀이 마련되어,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 운동과 변혁 운동은 한 차원 높은 발전 단계로 접어들었다.

한편, 8차 당 대회 직후에 백위군은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아 새로이 공세를 가하였다. 씨비르의 꼴차끄 군대에 모든 백위군들이 집결하여 모쓰끄바로 진격하려 했다. 꼴차끄 군대가 공세를 취하자 남부의 제니낀 군대도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5월에는 유제니치 군대가 뻬뜨로그라드로 쳐들어왔고, 뽈쓰까 군대는 협상국의 지원을 받아 리에뚜바와 백러시아로 쳐들어왔다. 이 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꼴차끄 군대와 제니낀 군대가 합류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볼쉐비끼 당은 꼴차끄 군대에 맞서는 동부 전선의 결정적 의의를 강조하며 다수 활동가와 공산당원을 동부 전선으로 파견하였다. 노동조합은 6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였다.34) 동부 전선에서 반격이 시작되었고 꼴차끄 군대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꼴차끄 군대의 후방에서는 지하의 당 조직의 주도로 빨치산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19년 8월에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꼴차끄 군대를 물리쳤다는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35)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이외의 주변의 각 민족의 쏘비에트 공화국들이 러시아와 군사적 동맹을 결정하고 통일적인 사령부를 세우고 국민경제회의, 운수, 노동의 조직에 있어서 통일을 결정했다. 이로 인해 내전에 임하는 전체 역량이 급속히 상승하였다.

그러나 남부 전선에서는 상황이 악화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증강한 남부의 제니낀 군대는, 석탄 기지인 돈바쓰를 점령하고 짜리을 함락시켰고 모쓰끄바로의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당의 지도적 활동가들이 남부 전선으로 파견되어 군대를 재정비하여 남부 전선과 동남부 전선이라는 2개의 전선에서 반격에 나서게 되었다. 이 시기에 볼쉐비끼 당은 당의 대열을 보충하기 위해 당 주간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당원 모집에 나섰는데 중부 지구에서 20만 명의 노동자와 농민이 새로 당에 입당했다.36) 당원이 되는 것이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는 것과 거의 동일한 의미를 지니던 시기에, 노동자와 농민의 대대적 입당은 내전에 있어서 볼쉐비끼 당이 인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으며 볼쉐비끼 당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했다.

쏘비에트 군대는 제니낀 군대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 서서히 남부 지역을 해방시키기 시작했고 1919년 말까지 제니낀 군대의 주력을 분쇄할 수 있었다. 레닌은 1919년 12월 말에 우끄라이나의 노동자와 농민에게 제니낀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알리는 편지를 쓸 수 있었다.37) 이러한 승리를 바탕으로 쏘비에트 정부는 협상국들의 정부에 강화 교섭을 제안했고, 에쓰또니야, 라뜨비야, 핀란드 등과, 그 나라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을 조건으로 강화 교섭을 체결했다. 제니낀 군대가 무너지자 쏘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포위망도 무너졌다. 꼴차끄는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까프까쓰에서는 노동자들이 백위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으며, 쏘비에트 군대는 이를 지원하면서 까프까쓰 지역을 다시 쏘비에트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러시아 전체에 걸쳐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은 실패하고 백위군은 결정적 타격을 입고 소멸되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제국주의 세력은 쏘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봉쇄를 해제하지 않을 수 없었고 러시아와 무역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전쟁으로부터 잠시간의 휴식기로 접어들었고 사회주의 건설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1920년 3월 29일 열린 9차 당 대회는 경제 건설의 당면 임무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는 임무를 제기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는데 제국주의 세력은 부르주아 뽈쓰까를 사주하여 쏘비에트 러시아를 침공하게 했다. 1920년 4월 25일 뽈쓰까 군대가 우끄라이나를 침략하여 수도 키예프가 점령되었다. 이에 대해 볼쉐비끼 당은 당원의 거의 절반을 군대에 동원하여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쏘비에트 군대는 공세를 취하여 뽈쓰까 군대를 러시아에서 밀어내고 뽈쓰까 영내로 진격하여 뽈쓰까의 수도 바르샤바 부근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제국주의 세력이 뽈쓰까에 대해 대거 원조를 하면서 뽈쓰까 군대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쏘비에트 군대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뽈쓰까와 쏘비에트 러시아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뽈쓰까와의 이 전쟁은 쏘비에트 러시아가 영토 밖에서 수행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뽈쓰까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볼쉐비끼 당내의 일부는 이것을 일종의 혁명전쟁의 시작으로 보면서 전쟁을 통한 뽈쓰까의 해방을 사고했었는데, 뽈쓰까 전선에서의 실패는 혁명전쟁을 통한 유럽 혁명이라는 환상이 무너지게 되는 데 일조했다.

1920년 9월 남부 전선의 브랑겔 군대에 맞서는 전투가 시작되어 브랑겔 군대를 끄림 반도로 몰아넣었고, 11월에는 끄림 반도를 해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중부와 서부, 남부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백위군을 소멸시켰는데, 극동 지역의 간섭군과 백위군을 최후로 소멸시킨 것은 1922년에 이르러서였다.

볼쉐비끼가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공고했기 때문이었다. 농민은 10월 혁명으로 인해 토지를 획득했고, 백위군에 맞서 토지를 지키기 위해 내전에 병사로 참가하여 싸웠다. 내전 중에 잉여 식량 징발로 인해 농민의 불만이 높아졌지만 지주를 소멸시키고 토지 혁명을 수행한 볼쉐비끼 정권에 대한 농민의 지지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리고 빈농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중농과도 동맹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볼쉐비끼의 정확한 방침이 세심한 배려와 주의가 노농 동맹을 굳건하게 한 주체적 요인이었다. 이와 같이 노농 동맹은 쏘비에트 권력의 근간이었으며, 이 점은 내전뿐만 아니라 이후 쏘련의 역사 전체에 걸쳐 관철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볼쉐비끼가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해 제국주의 세력이 최초에는 러시아에 적극 개입할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이후에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노동자계급과 인민이 러시아에 대한 개입을 반대하는 투쟁을 광범하게 전개하여 제국주의의 개입의 정도를 제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생생한 사례인데, 쏘비에트 러시아가 이러한 국제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민족 자결권 등으로 러시아 내에서 이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실천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볼쉐비끼 당의 혁명 노선이 전체 인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고, 당이 혁명의 사수를 위해 전 당력을 집중하고 당원을 동원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볼쉐비끼 당은 내전의 과정에서 5만이 넘는 당원을 전선에서 잃었다.38)

그런데 볼쉐비끼가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커다란 요인은, 최대 400만 명에 달했던 군대를 유지하고 물자 공급을 가능하게 했던 전시 경제의 조직화를 이루어 냈다는 점이다. 식량과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더욱이 백위군이 석탄 기지, 석유 기지, 식량 기지 등 핵심적 전략적 물자의 생산 기지를 점령하고 차단하는 가운데, 전선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전시 동원을 이루어 내면서 사회주의적 경제를 조직해 냈다는 것은, 볼쉐비끼 당과 러시아의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영웅적 투쟁을 드러내 주며 또한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후 전시 공산주의라 불리게 된, 당시의 전시 경제의 조직화, 사회주의 경제의 조직화에 대해 검토해 보자.

 

 

4. 전시 공산주의

 

제국주의의 간섭과 내전의 발발은 순조로운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리하여 쏘비에트 러시아의 경제는 전시 경제로 전환되었는데, 레닌은 일체의 것을 전선을 위하여! 일체의 것을 승리를 위하여!39)라는 슬로건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식량과 모든 물자는 우선적으로 전선으로, 군대, 병사들에게 보내졌다. 생산에 있어서도 우선순위는 무기와 군수품의 생산에 돌려졌고 주민들의 일상 생활용품들의 생산은 뒤로 밀렸다. 특히 백위군이 우랄, 우끄라이나, 바꾸 등을 점령하여, 석탄, 석유, 금속, 식량 등 주요 물자의 생산과 보급을 차단하게 되면서 극심한 물자난을 겪게 되었는데 그나마 확보되는 물자 대부분이 무기와 군수품의 생산에 돌려졌다. 연료난의 경우 심각했는데, 석유와 석탄의 공급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1919년의 경우 전체 연료의 88%가 목재로 대체되었다.40) 석탄을 사용했던 증기 기관차의 경우도 목재로 간신히 운행하는 정도였다.

식량난도 심각했는데, 특히 도시에 공급하는 상품적 식량 생산의 주요 담당자들인 부농이 사보타주를 하면서 도시와 병사들은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1918년 여름부터 시작하여 내전이 종료되기까지 기아는 일상적인 상황이 되었다. 이에 대해 쏘비에트 정부는 도시의 노동자들로 식량 징발대를 구성하여 농촌에 파견하여 부농들의 잉여 식량을 징발해서 식량난을 넘겼다. 특히 1918년 6월 1일, 농촌에서 빈농위원회 수립하는 것에 대한 법령이 통과되어 노동자로 구성된 식량 징발대와 빈농위원회가 연합하여 부농과 투쟁하면서 식량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데 실제 집행에 있어서는 부농만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잉여 식량이 거의 없는 빈농을 제외하고, 중농의 경우에도 잉여 식량, 심지어는 꼭 필요한 식량과 다음 해 쓸 종자까지 징발하는 일이 빈번하여 농민들의 불만이 커져 갔다. 식량 징발의 대가로, 쏘비에트 정부는 당시 통화 팽창으로 인하여 가치가 현격히 떨어지고 있던 지폐만을 지불하여, 사실 거의 무상으로 식량을 징발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기아 전선은 군사 전선 바로 다음가는 전선이라고 인식했다.41) 그리고 레닌은 한 나라가 전쟁으로 인해 곤궁해지고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우선적이고, 기본적, 근본적 경제적 조건은 노동자를 구제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구제되고 기아에서 벗어나고 파괴되지 않아야만, 파괴된 생산이 회복될 수 있다. … 기아를 견뎌 내는 노동자의 소비를 보장하는 것이 생산력을 회복하는 기초이고 조건이다42)라고 파악했다. 이와 같은 인식하에, 레닌은 식량의 확보와 그것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급을 조직해 냈다. 그럼에도 레닌은 그것은 농민에 대해 빚을 지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레닌은 농민이 손에 얻은 지폐는 식량과 가치가 같지 않고 농민들은 식량을 국가에 빌려준 것이다43)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쏘비에트 정부는 농민들의 불만을 의식하고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농민들에 대해 공산품의 최대한의 공급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1919년 1월-8월에 걸쳐 농촌에 공급된 공산품의 가치는 1918년-1919년에 징발된 혹은 구매된 농산물 가치의 50% 이상이었다.44) 이러한 잉여 식량 징발제는 1918년 말에 법령으로 통과되어 1921년 10차 당 대회에서 신경제 정책(NEP)하의 현물세로 전환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는데, 농민들의 이러한 희생 덕으로 전선의 병사와 노동자계급이 굶주리지 않고 전선에서 군사적 승리를 쟁취하고 경제 영역에서 생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시 상황에서 쏘비에트 정부는 잉여 식량 징발제와 더불어 식량 거래의 국가 독점을 유지했으나, 실제로는 도시 노동자들이 국가로부터는 필요한 식량의 절반밖에 얻지 못했고, 나머지 절반은 암시장에서 투기업자로부터 국가가 공급하는 가격의 거의 10배를 주고 구입하여 소비하였다. 법령상으로 이러한 투기업자는 엄하게 단속되었지만 국가가 공급하는 식량의 양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현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쏘비에트 정부는 전시 경제를 계획적으로 조직해 갔다. 보편적 노동 의무제가 실시되어 군수품의 운반, 연료의 운반 등에 지역 주민들과 역축이 동원되었고 자본가들도 이러한 의무 노동에 종사하도록 강제되었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화폐로 지불받았는데, 지폐가 통화 팽창으로 인해 감가되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급은 점차 현물로 대체되게 되었다. 식량과 생활용품은 낮은 고정 가격에 지급되어 사실상 거의 무상으로 공급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운수, 공공시설, 주거 등도 무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양상, 즉 식량과 필수품의 현물 공급, 그리고 상당한 공공시설의 무상 사용이 전시 공산주의의 특징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점은 통화 팽창의 부담을, 현금을 많이 소유한 자본가계급에게 전가하는 것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에 있어서 35개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그 최저한도와 최고한도의 비율은 1:5였다. 그리고 전시 상황에서는 노동의 질과 양에 따른 분배가 아니라 사실상 평균적 분배가 불가피했는데, 이는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전시 상황에서 생산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전시 공산주의하에서 개인의 상업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사실상 현물 경제가 상업을 대체해 가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상품-화폐 관계, 재정과 신용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파악했는데, 레닌은 이를 반대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상품-화폐 관계의 활용을 견지했다. 그럼에도 전시 공산주의 현실에서는 물자 부족으로 인해 등가 교환이 보장되지 않았고, 상품-화폐 관계는 도시와 농촌의 교환의 기초가 될 수 없었다.45) 그렇지만 화폐의 필요성은 여전했는데, 농산물의 징발에 대한 지불 수단, 노동 의무제에서 노동력과 역축의 사용에 따른 지불 수단, 병사들에 대한 수당의 지불, 그리고 병사 가족에 대한 보조금의 지불, 노동자와 직원에 대한 임금의 지불, 기관과 기업의 경상 경비 등에서 그 필요성은 유지되고 있었다.46)

전쟁은 당시 상황에서 철도 연변을 따라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철도의 전략적 가치는 전쟁에서 결정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누가 철도를 장악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가에 따라 전선의 상황이 달라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을 감격시킨 일이 발생했다. 모쓰끄바-까잔의 철도 노동자들이 휴무일인 토요일에 자발적으로 작업장으로 나와서 무상으로 기관차를 수리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노동생산성은 평상시의 노동생산성의 몇 배에 이르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토요 노동이라 불리게 된 이 운동은 레닌에 의해 공산주의의 싹이라고 찬양을 받았고, 이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수백만의 노동자가 무상으로 공산주의 토요 노동에 나서게 되었다. 레닌은 감격하여 1919년 7월 28일 ≪위대한 창의(후방 노동자의 영웅주의를 논한다. 공산주의 토요 의무 노동을 논한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모범적인 생산 작업, 모범적인 공산주의 토요 의무 노동, 매 1푸드의 식량의 취득과 분배에 대하여 표현된 모범적인 관심과 성실함, 모범적인 식당, 어떤 노동자 주택 그리고 어떤 거리의 모범적인 위생 사업 ― 이 일체의 것은 우리의 신문과 모든 노동자, 농민 조직이 응당 현재에 비해 열 배의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이다. 이 모든 것은 공산주의의 싹이다. 이러한 싹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공통되고 으뜸가는 의무이다.47) 레닌이 말한 노동 영웅주의가 공산주의 토요 노동이라는 형태로 표현된 것은, 내전의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기아를 이겨 내며 생산을 유지, 발전시키는 가운데 공산주의적 계급 의식으로 단련되고 발전해 가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자본가가 없는 세상, 노동이 하나의 공동체의 사업으로 되는 세상에서 형성되는 인간 간의 유대와 연대, 그리고 진보와 발전, 승리에 대한 확신의 성장이 이러한 공산주의 토요 노동이라는 창의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한편 공업의 영역에서 쏘비에트 정부는 사회주의 경제의 조직화에 착수했는데 최고국민경제회의 산하에 국가 건축공정위원회, 연료 총위원회, 물질자원 이용위원회 등을 두어 전시 상황에서 필수적인 영역에서의 계획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전체 경제에 있어서 부문과 지역의 사업과 조직을 통일적으로 결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 점은 이후 쏘련의 계획 경제의 골간이 되었다.

농업의 영역에서 지배적이었던 것은 여전히 개인적인 소농 생산이었지만, 제한된 영역에서나마 국영 농장과 집단 농장 등 사회주의 농업이 시도되고 발전되기 시작했다. 주로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형성된 국영 농장은, 규모의 크기, 높은 수준의 기술 장비, 더 우수하고 더 값싼 농산물의 생산을 통해 사회주의 농업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기지가 되었다. 집단 농장은 일종의 협동조합적 성격을 띠는데, 프롤레타리아 독재와의 연결을 상실하면 협동조합적 성격인 집단 농장은 사회주의적 성격을 상실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에서 그 지도를 전제로 성립하는 집단 농장은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니며, 따라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하나가 된다.

초기에 집단 농장은 3가지 종류로 나타났었다. 농업 꼬뮌, 아르, 공동 경작이 그것이다. 농업 꼬뮌은 주로 이전에 노동자, 고용농, 병사 등 생산수단을 전혀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토지, 농기구의 공동 소유만이 아니라 주택, 식당 등도 공유로 한 공동체였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는 전형적인 공산주의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당시 다수 소농민의 대안이 되기에는 거리가 있었고, 특히 공동 식당 등은 농민들에게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아르은 토지와 농기구를 공동 소유하고 공동 경작하면서 각 농가마다 약간의 텃밭을 가꾸고 약간의 가축을 기르는 형태였다. 이 아르은 이후 1920년대 말과 30년대에 걸친 집단화 운동에서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로 자리 잡는다. 세 번째의 공동 경작은 토지와 농기구 등 생산도구를 개인 소유로 유지한 상태에서 노동, 경작만 공동으로 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의 형태는 널리 확산되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만 존재했었다.

그런데 전시 상황에서 집단 농장원들은 노동에 따른 분배를 할 수 없었고 평균적인 분배를 했다. 잉여 식량 전체가 국가에 징발되는 상태에서 평균적 분배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평균적 분배는, 당시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에 따른 분배가 아니라 평균적 분배를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균적 분배가 사회주의에 고유한 것은 아니며, 단지 전시 상황이 강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후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는 평균적 분배를 타파하며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분배가 정착되었다.

전시 상황에서도 쏘비에트 러시아 사회의 사회주의적 측면은 점차 발전해 갔는데, 예를 들면 1919년 5월 17일 인민위원회는 법령을 공포하여 대도시와 공업 중심지에서 16세 이하의 아동에 대한 무료 급식을 시작했다.48) 기아가 광범위하던 당시에 이러한 조치의 시행은, 아동에 대해 우선적 복지를 실시한다는 사회주의적 측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1920년 1월 7일부로 공공 식당에서의 무료 식사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여 시행했다. 이 또한 전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복지를 시도한 것이다.

혁명 전 러시아는 9세-50세 주민의 72%가 문맹이었다. 그리고 변경의 소수민족 지구에서는 97-98%가 문맹이었다. 이에 대해 1919년 12월 26일 문맹을 제거하는 것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8세-50세의 주민은 의무적으로 글을 익혀야 했는데, 민족어와 러시아어 중에서 본인이 원하는 글자를 택하여 익히면 되었다. 1919년의 8차 당 대회에서는 17세 이하 아동에 대한 무상 교육을 강령상에 채택하여 사회주의적인 무상 교육의 길을 열었다. 소수민족 지구였던 뚜르끄메니쓰딴은 혁명 전에 학교가 50개, 학생 수는 2,000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1920년 말에는 2,022개의 초등학교, 학생 수는 16만 5천 명으로 늘어났다.49) 이와 같이 볼쉐비끼 정권은 민족 자결권의 의미를 단지 법적인 것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소수민족과 러시아 민족의 평등한 발전을 보장하는 정책으로까지 상승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쏘비에트 러시아는 전시 상황에서 경제를 계획적으로 조직하였고 이는 이후에 전시 공산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체제가 되었다.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에서 신경제 정책으로 전환하던 당시, 전시 공산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전시 공산주의는 전쟁과 경제의 파괴가 우리에게 강요하여 실행된 것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경제적 임무에 조응하는 정책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임시적 방책이었다.50) 레닌의 이러한 평가는, 전시 공산주의에 대해 마치 그것이 공산주의의 본령인 양 착각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에 화폐가 필요하지 않고 상품 거래도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견해를 철저히 반박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은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건설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의 독자적 길을 가는 것이지, 전쟁 상황이 요구하는 일종의 통제 경제가 그 본령은 아니라는 점을 레닌은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럼에도 전시 공산주의는 그 역사적 임무,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호라는 역할을 다했으며, 그에 따라 내전이 종식되면서 볼쉐비끼 당은 노농 동맹의 강화를 핵심으로 하고 농민에 대한 양보를 포함하는 신경제 정책으로 이행하게 된다.

노사과연

 

 


 

1) 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3권, 편집부 역, 거름, 1991, p. 22.

 

2) 같은 책, pp. 29-30.

 

3) 같은 책, p. 34.

 

4) 같은 책, p. 37.

 

5) 같은 책, p. 30.

 

6) 같은 책, p. 32.

 

7)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一卷, 北京: 生活ㆍ读书ㆍ新知三联出版, 1979, p. 143. ≪쏘련 사회주의 경제사≫는 1970년대 말 쏘련에서 발간된 집단 저작으로 전체 7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0월 혁명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쏘련 경제사를 다루고 있다. 맑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졌는데 후반부에는 쏘련의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을 정당화하는 관점을 보이고 있다.

 

8) 같은 책, p. 148.

 

9) V. I. 레닌, “쏘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The Immediate Tasks of the Soviet Government)”, Lenin Selected Works, Vol. 2, Moscow: Progress Publishers, p. 588.

 

10) ibid., p. 592.

 

11) ibid., pp. 613-614.

 

12)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 64.

 

13) 같은 책, p. 212.

 

14) 같은 책, p. 81.

 

15) 같은 책, p. 84.

 

16) 같은 책, p. 81.

 

17) 같은 책, p. 264.

 

18) 같은 책, p. 263.

 

19) 같은 곳.

 

20) 같은 책, p. 182.

 

21) 같은 책, p. 312.

 

22) 같은 책, p. 50.

 

23) 같은 곳.

 

24) 같은 책, p. 53.

 

25) V. I. 레닌, “좌익 소아병과 소부르주아적 정신 상태(‘Left-Wing’ Childishness and the Petty-Bourgeois Mentality)”, Lenin Selected Works, Vol. 2, p. 632.

 

26) B. N. 포노말료프 편, 앞의 책, p. 65.

 

27) 같은 책, p. 82.

 

28) 같은 책, p. 87.

 

29) 같은 책, p. 88.

 

30) 같은 책, p. 89.

 

31) 같은 책, p. 90.

 

32) 같은 책, p. 94.

 

33) 같은 책, p. 97.

 

34) 같은 책, p. 116.

 

35) 같은 책, p. 119.

 

36) 같은 책, p. 123.

 

37) 같은 책, p. 124.

 

38) 같은 책, p. 145.

 

39)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p. 302-303.

 

40) 같은 책, p. 367.

 

41) 같은 책, p. 475.

 

42) 같은 책, p. 316.

 

43) 같은 책, p. 314.

 

44) 같은 책, p. 482.

 

45) 같은 책, p. 505.

 

46) 같은 책, p. 507.

 

47) 같은 책, p. 469.

 

48) 같은 책, p. 502.

 

49) 같은 책, p. 531.

 

50) 같은 책, p.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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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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