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노동력의 위축된 재생산’에 따른 저출산 및 인구감소

― ‘인구학 권위자’ 조영태의 ≪인구, 미래, 공존≫ 비판

 

김조일 | 회원

 

 

서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라는 미국 히어로물 영화에서는 ‘타노스’라는 악당이 등장한다. 타노스는 외계인으로서, 자신의 고향이 인구과잉으로 몰락하는 것을 보고 우주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는 우주 전체의 인구의 절반을 날려 버려야겠다는 굳센 신념을 가지게 된다. 이 타노스라는 악당의 견해는 인구과잉이 빈곤의 원인이라는 케케묵은 맬더스주의로부터 흘러나온다. 이미 반박되고 폐기된 지 수만 번도 넘은 맬더스의 견해를 가진 미친 인간이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에 실존한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믿기 어렵겠지만, 이런 사람이 실존할 뿐만 아니라, ‘인구와 미래전략 TF 공동자문위원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윤 정권의 인구정책을 세우고 있다. 현실의 타노스 조영태 교수(이하 존칭 생략)를 소개한다. 현대판 맬더스주의자인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조영태는 “인구과잉이 빈곤의 원인”[1]조영태, ≪인구, 미래, 공존≫, 북스톤, 2021, p. 298.이고, “[대한민국의] 인구는 방임보다는 조절의 대상”[2]조영태, 앞의 책, p. 26.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시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이비 학자의 궤변이 대중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어[3]조영태는 온갖 대중 매체에 등장하면서 ‘인구학 권위자’ 행세를 한다., 그가 쓴 ≪인구, 미래, 공존≫이라는 책 속에 녹아들어 있는 신맬더스주의 사상독소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고자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질적 규정성

 

≪인구, 미래, 공존≫을 펼치자마자, 조영태의 맬더스식 궤변이 안구를 강타한다. “[인구학은] 단순히 인구변화상을 넘어 이 변화에 어떤 특성이 있는지,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두루 살핀다. 여기에는 역사적 과정, 사회구조, 인간의 삶이 모두 들어 있다. 그런 면에서 인구학은 인구통계를 다루는 학문을 넘어 사회를 이야기하는 학문이다.”[4]조영태, 앞의 책, p. 26.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조영태는 이어서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 분석하고, 현재 벌어지는 일들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할 때 인구학적 관점이 큰 통찰을 줄 수 있다”[5]같은 곳.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인구학적 관점”이란 무엇인가? 바로 “‘오늘의 출생아 수는 대략 30년 후의 출생아 수를 결정한다’는 원리”[6]같은 책, pp. 26-27.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인구변화의 합법칙성을 30년 후의 사회의 성격을 파악하지 않고 “인구학적 관점[의] 큰 통찰”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사회과학자가 범해서는 안 될 심대한 오류이다.

 

사람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질적 규정성과는 다른, 사회적 존재로서의 질적 규정성을 지닌다는 것은 사회과학의 초보적인 진리다. 다른 모든 동식물은 자연이 제공하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생존하고 번식하며, 따라서 자연적 제 조건에 종속되어 있지만,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자신에게 복무하도록 개조해 나가면서 자신의 요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물질적 재부를 창조한다. 사람은 자연이 제공하는 생존수단을 단순히 수취할 뿐 아니라 자연을 주동적으로 개조해 나가면서 자신의 생활수단을 직접 마련해 나가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후손의 생존 여부는 자연 자체보다는 사람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노동은 우선 인간과 자연 간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인간이 그 자신의 활동에 의하여 인간과 자연 간의 물질대사를 중개하고 조절하며 통제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연물질에 대하여 그 자신이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대립한다.[7]K. 맑스, ≪자본론≫ 제1권(1), 백의, 1989, p. 217.

 

인간이 자신의 활동을 통해 인간과 자연 간의 물질대사를 중개하고, 조절・통제하는 과정, 즉, 자연에 대해 “그 자신이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대립”하며 자신의 요구를 실현시키기 위한 여러 물질적 재부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 노동이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다른 생물학적 존재와는 달리 사회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존수단 자체를 마련함으로써 자기 삶을 영위해 나간다.

따라서 인구법칙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생존수단의 양보다는 자연에 대한 사람의 개조 활동의 작용력인 생산력, 그리고 생산의 과정을 매개하는 사회적 관계인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다시 말해, 인구법칙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혹은 양자를 포괄하는 개념인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또한 자신에게 고유한 인구법칙을 가진다. 자본주의 사회를 자연적인 질서로, 따라서 영원불변한 자연의 섭리로 파악하는 부르주아 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고유한 인구법칙을 가진다는 것을 망각하고, 동식물에게만 적용되는 추상적인 인구법칙을 들이댄다. 자신들의 반동적인 사회 질서를 옹호하고자 하는 부르주아지에게 과학성을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은 그들의 사회 질서가 역사적인 것임을, 따라서 그 붕괴 또한 필연적임을 보지 않으려 하고, 부르주아 질서의 영속성을 이야기한다. 조선의 봉건 통치배들이 하늘과 땅 같은 반상의 구별이 없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듯이, 부르주아지도 자신들의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역사적 수명을 다한 모든 지배계급이 그랬듯이, 부르주아지도,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조영태도, 부르주아 질서의 영생이라는 사이비 신앙에 빠져 있다.

사실이 이렇게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조영태는 마치 신앙고백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처럼 오늘의 인구는 한 세대 전의 인구변동에 의해 이미 정해졌다. 30년 뒤의 인구 역시 정해진 미래다.”[8]조영태, 앞의 책, p. 36.

 

 

인구와 ‘한정된 자원’

 

기독교 신자가 성경 구절을 읊듯, 맬더스교 신자 조영태도 맬더스의 ≪인구론≫을 읊지 않을 수 없다. “≪인구론≫의 많은 이야기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맬더스가 보기에 인구는 역사 속에서 항상 ‘조절’되어 왔는데, 그에 따르면 자원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두 가지를 꼽으라면 본인의 생존 욕구와 후속세대 재생산 욕구다. 이 중 ≪인구론≫에서 인구증가 요인의 주요 축으로 다룬 것은 출산, 즉 재생산 욕구인데, 문제는 자원이 한정돼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경쟁이 필요 없을 만큼 식량이 풍족한 사회에서는 재생산에 전혀 문제가 없지만, 계속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재생산보다 본인의 생존이 우선시되었다.”[9]같은 책, pp. 79-80. 부르주아 사회과학계가 워낙 임의적으로 분리되어 있어, ‘인구학자’인 조영태가 경제사상사에는 무지할 수도 있겠지만, 맬더스는 “자원이 한정돼 있다”는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임금기금설”이라는 경제학 이론을 옹호했다. 이 부르주아적 궤변은 노동자들의 임금 총액이 일정량으로 규정되어 있어, 노동자들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일인당 배분받는 임금 총액이 줄어들게 되어 있고, 따라서 평균적인 임금 수준이 줄어든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일 특정 노동자 집단의 임금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누구는 일을 하고 누구는 일을 하지 못하고 돈도 받지 못하는, 즉 ‘구조적 실업’까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비과학적 궤변은 임금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불가역적인 현상이고, 실업률의 증대를 막기 위해서는 임금 수준을 ‘고착화’시키고, 임금 인상을 부르짖는 노동조합을 박살 내고, 노동 시장을 ‘개혁’해야 한다는 반동적인 주장의 이론적 근거로 된다.

 

조영태는 “경쟁이 너무 격해지면 재생산 본능마저 억누르고 생존 본능이 더 크게 발현되는 것은 거대한 자연의 법칙”[10]같은 책, p. 81.이라고 다시금 신앙고백을 하며 매듭을 짓는다. 그에 의하면 수도권 인구과잉으로 인해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니, 사람들이 자신의 ‘재생산 본능’마저 억누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무엇을 아무리 굳게 믿는다고 해서, 그게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뜻으로는 되지 않는다. 조영태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은가와 관계없이, 맬더스교의 교리는 과학성과는 거리가 멀다. 맬더스가, 또 맬더스의 충직한 제자 조영태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원, 혹은 임금 총액은 한정적인 것이 아니다. 앞서 보았듯,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특수한 질적 규정성을 가지며, 따라서 사람의 인구법칙도 동식물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사람[11]여기서 ‘사람’은 타인의 잉여노동을 전유하여 먹고사는 착취자가 아닌 생산자를 의미한다.의 인구수를 규정하는 주요 요인은 수취 가능한 생활수단의 절대적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활수단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수단과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있다.[12]이는 또한 생산양식의 본질을 이룬다. 즉, 생산의 주체적 요인인 사람과 객관적 요인인 생산수단의 결합양식인 생산관계가 인구법칙을 규정하는 주요 요인으로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아래서는 지배적인 생산관계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인구법칙을 규정한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노동의 실현조건에 대한 소유가 노동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단 자기 발로 서게 되자 그것은 이 분리를 다만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부단히 증대되는 규모에서 재생산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관계를 조성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그의 노동조건에 대한 소유로부터 분리하는 과정, 즉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부터 전화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화하는 과정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도 없다.[13]K. 맑스, ≪자본론≫ 제1권(2), 백의, 1989, pp. 896-897.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주체적 요인인 노동자들은 생산의 객관적 요인인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오직 자본에 포섭된 채로만 생산수단과 결합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산은,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배제된 노동자와 사회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사회에 대한 적대적 형태인 자본이 결합해 이루어지는 생산이며,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어 생산을 할 수 없다. 자본가들이 공장이며, 기계며, 슈퍼컴퓨터며 다 소유하고 있는 조건 아래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에 의해 고용되어야만 생산을 하고, 또 자신이 먹고살 수 있는 생활수단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총액—사회적 총생활수단[14]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자본가와 지주 등을 포함한 비노동 인구의 생활수단은 제외한다.의 화폐적 표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과 직접 생산자의 결합양식, 즉 자본과 임금노동자 간의 연계인 자본-임노동관계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며, 계급대립에 의해 변동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가변자본의 소재적 존재 즉 가변자본이 노동자들을 위하여 대표하는 생활수단의 양 또는 소위 노동폰드는 자연 자체의 극복할 수 없는 힘에 의하여 규정되는, 사회적 부의 특수부분이라는 우화를 만들어냈다. 사회적 부 중에서 불변자본으로서 또는 소재적으로는 생산수단으로서 기능해야 할 부분을 운동케 하려면 물론 일정한 양의 산 노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양은 생산기술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러나 이 노동량을 지출케 하는 데 필요한 노동자 수도 일정하지 않으며 —이 수는 개별적 노동력에 대한 착취정도의 변동에 따라 변동한다— 이 노동력의 가격도 일정하지 않다. 다만 그 가격의 최저 한계, 그것도 대단히 신축성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을 뿐이다.[15]K. 맑스, ≪자본론≫ 제1권(2), p. 774.

 

생산의 기술적 조건은 사회적 재부 중 일부를 “소재적으로는 생산수단으로서 기능해야 할 부분”, 또는 불변자본으로 기능하게 하고, 이를 운동하게 하려면 “일정한 양의 산 노동”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일정한 양”은 생산기술적 토대에 의해 규정된다. 자본주의 아래서 생산의 기술적 조건이 계속 갱신되고 발전을 거듭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불변자본을 운동하게 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양의 산 노동”이 가변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정한 양의 산 노동을 제공할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생활수단의 양, 그리고 그것의 화폐적 표현인 임금 총액 또한 가변적이다. 이와 더불어 “생산기술에 의하여 규정”된 일정한 양의 산 노동을 지출케 하는 데 필요한 노동자의 수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노동자에게 제공하는 노동력 재생산비, 즉 노동력의 가격 — 임금 또한 일정하지 않다.

다시 말해 개별적 노동력에 대한 착취 정도가 변동하면, 노동자 개인이 지출하는 잉여노동량 또한 변동한다. 개별적 노동력에 대한 착취 정도를 증대시키는 방법에는, 노동자 개인의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방법—절대적 잉여가치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비를 낮추어 잉여노동시간을 상대적으로 늘리는 방법—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이 있다.

 

노동일은 불변의 크기가 아니라 가변의 크기인 것이다. 노동일의 두 부분 중 그 하나가 노동자 그 자체의 부단한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일의 전체 길이는 잉여노동의 길이 또는 계속에 따라 변동한다. 그러므로 노동일은 확정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비확정적인 것이다.[16]K. 맑스, ≪자본론≫ 제1권(1), p. 282.

 

노동자 그 자체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불변이라고 가정하면 노동일[17]노동일: 노동자가 하루 동안에 노동하는 시간.의 전체 길이는 잉여노동시간의 길이에 따라 변동한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일을 연장시킴으로서 개별적 노동력에 대한 착취 정도를 높여 더 적은 수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도 불변자본을 운동하게 할 “일정한 양의 산 노동”을 확보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이전과 같은 임금을 주면서도 더 많은 잉여노동을 전유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적은 사람들을 고용하면서도 이전과 같은 수준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장 A를 돌아가게 하는 데 필요한 총노동시간이 하루에 100시간이며, 노동자 개인의 필요노동시간은 2시간, 잉여노동시간은 3시간으로 노동일의 길이가 5시간이라고 가정하자. 공장주는 공장 A를 굴리기 위해 5×20=100시간, 20명의 사람들을 고용해야 한다. 또한 총필요노동시간은 40시간, 총잉여노동시간은 60시간이다. 만일 공장주가 잉여노동시간을 3시간에서 8시간으로 늘려 노동일의 길이가 10시간으로 연장된다면 공장 A를 돌아가게 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자의 수는 10×10=100시간, 10명이며, 총필요노동시간은 20시간, 총잉여노동시간은 80시간이다. 만일 2시간의 필요노동시간의 화폐적 표현이 2원이라면, 노동일의 길이가 5시간일 때 공장주가 선대해야 하는 임금 총액은 40원이며, 노동일의 길이가 10시간일 때 공장주가 선대해야 하는 임금 총액은 20원에 불과하다. 노동일의 길이를 5시간에서 10시간으로 늘려 임금 총액을 40원에서 20원으로 감소시킨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일의 길이를 늘이는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방식으로 임금 총액을 줄일 수 있다.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을 통해 임금 총액을 줄이는 방식 외에도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방식이 있다.

 

필요노동시간이 단축되며 이에 상응하여 노동일의 두 구성부분의 양적 비율이 변화하는 데서 나오는 잉여가치를 나는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한다.[18]K. 맑스, ≪자본론≫ 제1권(1), p. 394.

 

자본가는 필요노동시간을 줄임으로서 더 적은 임금을 제공하면서도 동일한 양의 산 노동을 수취할 수 있다. 단, 필요노동시간은 노동력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필요노동시간의 전반적 저하에 따른 임금 총액의 감소는 노동력의 가치의 저락을 필요로 한다. 노동력의 가치, 즉 생활수단의 가치가 줄어들어야만, 노동력의 가치를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따라서 필요노동시간 또한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노동력의 가치가 전반적으로 줄어들기 위해서는 생활수단을 만드는 산업부문에서의 노동생산력이 제고되어야 한다.

 

공장 A의 예시로 돌아가 보자. 공장 A를 돌아가게 하는 데 필요한 총노동시간은 100시간이며, 노동자 개인의 필요노동시간은 4시간, 잉여노동시간은 6시간으로 노동일의 길이가 10시간이라고 가정하자. 또 노동자 개인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4단위의 생필품이 필요하다고 하자. 4단위의 생필품을 재생산하기 위해 노동자는 4시간을 일해야 한다. 공장 A를 돌아가게 하기 위해 공장주는 10×10=100시간, 10명의 노동자를 고용해야 하며, 따라서 총필요노동시간은 40시간이다. 만일 생활수단을 만드는 산업부문에서의 노동생산력이 제고되어 1시간을 일해도 2단위의 생필품이 생산된다면, 4단위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2시간만 일해도 되며, 노동자 개인의 필요노동시간은 4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어든다. 이에 따라 총필요노동시간은 40/2=20시간으로 감소한다. 만일 4시간의 필요노동시간의 화폐적 표현이 4원이라면, 노동생산력이 제고되기 전 임금 총액은 40원이며, 노동생산력이 제고된 이후 임금 총액은 20원으로 줄어든다. 이처럼 자본가는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방식을 통해서도 임금 총액을 줄일 수 있다.

 

조영태의 상상 속의 ‘거대한 자연의 법칙’은 생활수단의 화폐적 표현인 임금 총액이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 노동력의 착취 정도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경제학적 현실 앞에서 완전히 무너진다. 임금 총액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결정되며, 임금 총액의 제한은 자본주의적 제한이지 사회적/자연적인 제한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를 자연적 한계로 바꿔치기하려는 조영태의 시도는 천박하기 그지없다.

 

 

과잉인구와 자본주의

 

아무튼 조영태는 말을 이어 간다. “그런데 맬서스나 다윈의 가정처럼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바라는 자원의 범위가 거의 똑같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있고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면? 당연히 치열한 경쟁의 서막이 올라가고, 경쟁에 내몰린 인간은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보단 생존에 모든 것을 걸 것이다.”[19]조영태, 앞의 책, p. 83.

 

그런데 잠깐, 지금 한국에서 지속적인 인구감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일정한 수준으로 인구가 감소하면, 다시 자연적으로 인구가 증대해야 마땅하다. 물론 인구가 줄면 노동인구도 주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빛이자 소금이신 맬더스 선생님께서는 노동을 하지 않는 과잉인구가 늘어나게 되면 평균적인 임금 수준이 하락하고, 빈곤이 보편화됨에 따라 인구감소가 발생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렇다면, 과잉인구가 일정 수준으로 줄어들면, 낮아진 평균 임금 수준도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인구는 다시 증대할 것이다. 따라서 초저출산 문제가 지속되면 안 될 텐데, 맬더스식 인구과잉설과 초저출산 지속 현상을 어떻게 조응시켜야 하는가? 사탄이 준 이 신앙의 시련 속에서, 맬더스교 신도 조영태는 수도권 집중 현상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신앙심을 다시 확인한다. “저출산의 원인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수도권 집중 현상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최근 서울대 인구학연구실은 자유전공학부의 장대익 교수가 지도하는 서울대 인간본성/생철학 연구실과 공동으로 우리나라의 초저출산 현상을 연구했다. 이 공동연구팀은 사람들이 수도권, 특히 서울로만 집중되는 현상이 대학입시와 군입대를 어렵게 하고 부동산 시장에서 서울과 지역 간 격차를 불러오는 것은 물론 초저출산 현상을 더 심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했다.”[20]같은 책, p. 77. 인구절벽, 예측되는 인구감소에도 불구하고 초저출산 현상의 지속이 예상되는 이유는 맬더스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되어, 인구과잉 현상이 수도권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군입대에서도 대학이나 부동산과 마찬가지로 수도권 집중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그것이 “병력이 부족할 텐데 대기”를 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21]같은 곳. 어리석은 이교도들! 원래 살던 곳에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을, 자꾸만 사람이 차고 넘치는 수도에 모여들어 초저출산 현상을 왜 지속시키는가?

 

조영태는 수도권에서의 “치열한 경쟁의 서막”[22]같은 책, p. 83.에 대해 지껄이다, 이러한 주장이 헛소리로 치부될 수 있음을 직감했는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게 그저 그럴듯한 궤변 아닌가 할 수 있지만, 밀도, 즉 일정 공간에 인구가 모여 있는 정도와 출산 정도의 상관관계가 실제로 있음을 뒷받침하는 경험적 연구들이 존재한다. 오스트리아의 인구학자 볼프강 러츠는 2006년 세계 145개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출산의 주요 변수들(영아사망, 1인당 GDP, 여성 노동참여, 여성 문맹률, 도시인구 비율 등)을 고려한 뒤에도, 인구밀도가 합계출산율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23]같은 곳.

 

러츠의 경험적 연구는 인구밀도와 출산 정도의 상관관계가 현상적으로 존재함을 보여 준다. 다만 러츠의 연구는 현상기술에 불과할 뿐, 현상의 본질, 인구밀도와 출산 정도의 내적 연관에 대해서는 그 무엇도 알려 주지 않는다. 조영태는 양자의 인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미래지향적인 성향이 짙으며, 그럴수록 출산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미래지향적인 사람일수록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을 선호할 수도 있을 텐데, 이를 고려해도 같은 결론이었다.”[24]같은 책, p. 85.

 

다음과 같은 주장은 올리버 승의 연구[25]Oliver Sng et al, “The Crowded Life Is a Slow Life: Population Density and Life History Strateg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Vol. 112, No. 5, 2017.를 기초로 한 주장이다. 해당 연구는 연구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질문 등을 토대로 참가자들의 인식 정형을 유추하고, 그에 따라 생리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미래지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고, 미래지향적인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출산을 미루려는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 출산율이 낮다. 이는 상당히 황당한 결론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람의 심리적 특질이 출산율을, 따라서 인구법칙 자체를 규정하는 것으로 보는 전형적인 주관적 관념론적 견해이다. 개별적 사람의 이러저러한 심리적 특질이 인구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개별적 사람의 심리적 특질도, 인구수의 변화 양상도 규정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사람들이 결혼 및 출산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고려하는 것은 생활 수준, 즉 아이를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생활수단이 있냐 없냐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본질은 다시 ‘자원’, 또는 생활 수준/임금 수준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수준이, 또는 조영태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고정불변하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궤변이다.

 

그렇다면 러츠의 경험적 연구가 보여 준 인구밀도와 출산 정도의 상관관계의 원인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는가? 인구밀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일정한 지역 내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단순히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아무런 문제로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노동)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노동생산물 또한 늘어나고 따라서 생활수단의 양 자체가 증대하게 되면 생활 수준(또는 임금 수준)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활 수준이 불변인 조건에서는 출산율 또한 변동할 이유가 없다. 인구밀도의 상승, 그리고 노동인구의 증대가 출산율의 저하로 이어지는 것은 생활수단의 양, 즉 자본주의 아래서는 가변자본의 크기에 대비해 노동자의 수가 더 많아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채 존재하는 노동자들, 즉 과잉인구가 늘어날 때이다. 맑스는 이를 상대적 과잉인구라 명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구가 항시적으로 과잉상태에 있으며, 상대적 과잉인구가 형성ㆍ유지된다. 높으신 양반들이 보기에 하층민들은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넘쳐 난다.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상대적 과잉인구는 자본에 의해 구매된 노동력, 또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안정적으로 제공받는 노동자들 이외의 ‘잉여’인력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판매하지 못해 자본가로부터 노동력 재생산비인 임금을 안정적으로 제공받지 못하는, 다시 말해 생존수단의 소비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다.

 

이러한 상대적 과잉인구는 한정된 자원 이상으로 인구수가 불어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 과정에 의해 발생하고, 일정한 크기로 유지된다. 즉, 노동력에 대한 자본의 수요 이상으로 ‘과잉공급’되는 노동력, 또는 그 노동력을 (그리고 노동력만을!) 소유한 사람들이 상대적 과잉인구로 분류된다.

 

조영태는 “수도권 인구집중 현상”이 저출산 문제의 근본 원인임을 주장한다. 수도권에 인구가 과잉상태에 있기 때문에, 저출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인구과잉이 왜 발생했는지, 인구과잉과 저출산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러츠의 경험적 연구가 보여 준 인구밀도와 출산 정도의 상관관계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주의 인구법칙 자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아래서 어떻게 인구수가 증대하며, 또 상대적 과잉인구는 어떻게 유지되는지 알아야 조영태가 단순히 인구밀도의 상승에 따른 ‘미래지향적 성향’의 팽배로 퉁친 저출산 문제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저출산 문제는 그 무슨 ‘미래지향적 성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인구법칙에 따른 현상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인구법칙의 구체적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자본주의 인구법칙

 

단순재생산이 자본관계 자체를, 즉 한편에 자본가를, 다른 한편에 임금노동자를 부단히 재생산하는 것과 같이 확대된 규모에서의 재생산 즉 축적도 자본관계를 확대된 규모에서 재생산한다. 즉 한 극에 보다 많은 자본가 또는 보다 큰 자본가를, 다른 극에 보다 많은 임금노동자를 재생산한다.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자본가치의 증식수단으로서 부단히 자본에 결합되어야 하며, 자본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없으며, 또 자본에 대한 그 예속은 그것을 구매하는 개별적 자본가의 교체에 의하여 은폐될 따름인 노동력의 재생산은 사실상 자본 자체의 재생산의 계기이다. 따라서 자본의 축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증가이다.[26]K. 맑스, ≪자본론≫ 제1권(2), p. 778.

 

자본의 축적은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의 확대재생산이다. 맑스가 지적하듯이, 자본의 축적은 곧 “한 극에 보다 많은 자본가 또는 보다 큰 자본가를, 다른 극에 보다 많은 임금노동자를 재생산”한다. 다시 말해 자본의 축적은 자본-임노동관계의 확대를 뜻하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가치의 증식수단으로서 [노동력이] 부단히 결합되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생산의 주체적 요인인 노동력, 또는 노동자의 생활수단이 자본으로서 존재하고, 노동자가 자본과 결합하지 않고서는 생존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을 보자.

 

자본의 구성은 두 개의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다. 가치의 측면에서 고찰하면 이 구성은 자본의 불변자본 또는 생산수단의 가치와 가변자본 또는 노동력의 가치 즉 임금 총액으로 분할되는 비율에 의하여 규정된다. 생산 과정에서 기능하는 소재의 측면에서 고찰하면 어떤 자본이든 생산수단과 산 노동력으로 분할되는데, 이 자본구성은 한편으로는 사용되는 생산수단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생산수단의 사용에 필요한 노동량과의 비율에 의하여 규정된다.[27]같은 책, p. 777.

 

맑스는 자본이 생산수단을 이루는 가치부분과 생산수단의 사용에 필요한 산 노동력의 가치, 즉 임금 총액의 가치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이제 자본가치가 증식하면 그 가변부분 즉 노동력으로 전화되는 구성부분 또한 늘어나는 것이다.

 

자본의 증가에는 그 가변부분 즉 노동력으로 전화되는 구성부분이 포함된다. 추가자본으로 전화되는 잉여가치의 일부분은 부단히 가변자본 또는 추가적 노동폰드로 재전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28]같은 책, pp. 777-778.

 

자본이 증가하면 생산수단을 이루는 가치부분인 불변부분과 노동력으로 전화되는 구성부분인 가변부분이 증가한다. 잉여가치가 발생해 기존의 자본가치에 추가되면, 한 부분은 불변자본, 또 다른 한 부분은 “가변자본 또는 추가적 노동폰드로 재전화”할 것이다. 새로 생산 설비를 세웠으면, 그것을 굴릴 노동자 수 또한 늘려야 한다. 가변자본의 증대는 개별 자본의 층위에서는 단순히 개별적 자본가가 더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사회적 총자본의 층위에서는 생활수단 자체가 늘어나고, 또한 자본-임노동관계에 포섭되어야만, 혹은 자본가에게 고용되어야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무산자의 대오가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인구가 늘어나는 것이다. 만일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즉 “생산수단의 사용에 필요한 노동량의 비율인 기술적 구성을 반영한 자본의 가치구성”이 불변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자본의 증대는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노동자의 생활수단의 증대에 정비례하고, 자본의 축적이 가일층 빨라질수록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생활수단의 증대, 그리하여 노동인구 자체의 증대 또한 가속화된다.

 

다른 사정들이 불변이고, 또 자본의 구성도 불변이라고 가정하자. 즉 일정한 양의 생산수단 또는 불변자본이 운동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동일한 양의 노동력이 요구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명백히 노동에 대한 수요와 노동자의 생존폰드는 자본에 비례하여 증가하며 자본의 증가가 빠르면 빠를수록 그것은 빨리 증가한다.[29]같은 책, p. 778.

 

맑스의 지적대로, 자본의 증대는 불변자본과 그것의 운동을 가능케 하는 산 노동의 양의 증대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자본이 증가하면 임금 총액이 늘어나고, 따라서 노동 시장에서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것이다. 노동력의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노동자 수, 즉 노동력의 공급 또한 늘어나며,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와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노동인구는 자본의 확대재생산에 필요한 만큼 늘어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구는 자본의 축적에 조응하고, 또 그에 의해 규정된다.

 

하지만 노동인구의 증대는 언제나 자본의 축적 운동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시기에는 자본 축적이 노동력의 수의 증가를 능가하여, 노동력의 가격인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를 웃돌게 되거나, 반대로 자본 축적이 약화되어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 만일 임금 등귀가 발생하여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된다면, 노동인구가 증대될 수 있지 않을까? 맑스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만약 노동계급이 제공하고 자본가계급이 축적하는 부지불노동의 양이 지불노동의 비상한 추가에 의하지 않고서는 자본으로 전화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장성한다면 임금은 등귀하며 그리고 기타 조건이 같다면 부지불노동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그러나 이 감소는 자본을 길러 내는 잉여노동이 더 이상 정상적인 양으로 제공되지 않게 되는 점에 도달하자마자 반작용이 시작된다. 즉, 소득 중 보다 적은 부분이 자본화되고, 축적이 약화되고, 임금의 등귀 운동은 반격을 받는다. 그리하여 노동가격의 등귀는 자본주의 체계의 기초를 침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확대된 규모에서의 그 재생산을 보장하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30]같은 책, p. 787.

 

자본주의 사회 아래서 임금 등귀 현상은 자본의 “확대된 규모에서의 … 재생산을 보장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노동력의 가치 이상으로, 따라서 자본의 확대재생산에 요구되는 생활수단의 양 이상으로 임금 수준이 인상된다면, 부지불노동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되며, 따라서 잉여노동이 자본으로 전화하는 속도인 자본의 축적률(잉여가치 중 재투자 부분/총잉여가치)이 저락되어 “임금의 등귀 운동은 반격을 받는다.” 자본의 축적이 약화됨에 따라 노동인구의 증가를 능가하는 자본 축적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임금 수준은 다시 본래의 수준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구의 증감은 언제나 자본의 축적 운동과 맞물려 있게 된다. 자본의 축적 운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활기증진기, 번망기)에는 노동인구도 이에 조응하여 폭발적으로 증대할 것이며, 역으로 자본의 가치 파괴가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시기(공황기) 및 자본 축적이 약화되는 시기(침체기)에는 노동인구의 증가율이 감소하거나 줄어들 것이다.

 

다만 자본은 양적 변화를 거듭하는 것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산기술적 토대를 갱신하며 새로운 조건 위에서 자기 자신을 재생산한다. 생산기술적 토대가 제고되어, 노동의 자연에 대한 작용 범위가 확대되면, 생산의 주객관적 요인 중 객관적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주체적 요인의 그것에 비해 더 높아지게 된다. 노동생산력이 높아졌기 때문에, 생산자는 더 거대한 노동수단으로 더 많은 노동대상에 대한 작용을 가할 수 있다.

 

노동생산능률의 사회적 수준은 노동자가 노동력의 동일한 긴장으로서 일정한 시간에 생산물로 전화하는 생산수단의 상대적 크기로 표현된다. 노동자가 기능하는 수단인 생산수단의 양은 그의 노동생산능률에 따라 장성한다. 이 경우에 이 생산수단들은 이중의 역할을 한다. 어떤 생산수단의 장성은 노동생산능률의 장성의 결과이고 또 어떤 생산수단의 장성은 그 조건이다.[31]같은 책, p. 788.

 

노동생산성이 제고되면 “생산물로 전화하는 생산수단의 상대적 크기”가 증대한다. 원료, 연료 등 노동대상의 장성은 “노동생산능률의 장성의 결과”이고, 또 기계, 도구 등 노동수단의 장성은 “그 조건”이다. 동일한 산 노동량에 의해 움직여지는 생산수단의 양이 늘어나고, 반대로 생산수단의 양에 비한 산 노동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노동력을 대변하는 자본부분인 가변자본이 생산수단을 이루는 자본부분인 불변자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이러한 변화 즉 생산수단을 활기 있게 하는 노동력에 비한 생산수단의 양의 장성은 이번에는 자본의 가치구성에, 즉 자본가치의 가변적 구성부분을 희생으로 하는 불변적 구성부분의 증대에 반영된다.[32]같은 책, p. 789.

 

개별 자본은 노동생산력을 제고하는 방법으로 특별잉여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은 필연적으로 노동생산성의 계속적인 고도화를 수반한다. 따라서 불변자본에 대비한 가변자본의 상대적 크기 또한 계속 감소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가변자본은 노동력으로 전화되는 자본부분이자, 임금 총액—생활수단의 화폐적 표현—이다. 따라서 가변자본 크기의 상대적 감소는 생산수단의 양에 대비한 생활수단의 양의 상대적 감소를 의미하며, 이는 곧 노동인구의 증가율이 저락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노동에 대한 수요는 총자본량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총자본의 가변적 구성부분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므로, 이 수요는 우리가 앞에서 가정한 바와 같이 총자본의 장성에 비례하여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누진적으로 감소한다.[33]같은 책, p. 795.

 

이렇듯 노동인구는 자본 축적에 따라 늘어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구성의 부단한 질적 변화에 따라 그 증가율이 점차적으로 감소한다. 또한 자본의 양적 확대로서의 축적과 노동생산성의 제고로 인한 자본구성의 질적 변화는 상호 연관 속에서 상대적 과잉인구의 수를 규정하기도 한다. 다음을 보자.

 

이미 기능하고 있는 노동자 수의 확장에 따라, 노동자들의 노동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부의 모든 원천이 확대되고 증가됨에 따라,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보다 큰 흡수가 노동자들의 보다 큰 배척과 결부되어 있는 규모도 확장되며,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자본의 기술적 형태의 변동도 촉진되며, 또 때로는 동시적으로 때로는 서로 교대 교대로 이 변동을 받게 되는 생산분야들의 범위도 확대된다. 따라서 노동인구는 그들 자신이 생산하는 자본 축적에 의하여, 그들 자신을 상대적으로 과잉케 하는 수단을 점점 더 큰 규모로 생산한다.[34]같은 책, p. 797.

 

자본 축적이 거듭됨에 따라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보다 큰 흡수가 노동자들의 보다 큰 배척과 결부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규모도 확장된다. 전기자동차의 보급으로 배터리 공장의 노동자들은 크게 증가하지만, 그보다도 더 큰 규모로 내연기관 자동차 공장 노동자는 해고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 고도화되어, 가변자본의 상대적 크기가 감소한다. 이전에는 자본의 분할이 불변자본 100원 : 가변자본 10원이었다고 하자. 일당이 1원이라면 10명의 노동자가 필요하다. 이제 자본의 구성이 100원(불변) : 1원(가변)이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10명의 노동자가 취업하기 위해서는, 1000원의 불변자본(생산수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본의 구성이 변화하는 그만큼 자본의 양이 증가하여야 기존의 노동자를 계속 취업시킬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본의 양보다 구성이 더 크게 변화한다. 따라서 노동인구 “그들 자신이 생산하는 자본 축적”은 자신을 보다 더 큰 규모에서 배척하고, 노동인구의 증가율의 감소로 이어지며, 이전보다 더 높은 비율로 “자신을 상대적으로 과잉케” 한다.

 

정리하자면, 맑스가 해명한 자본주의 인구법칙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의 운동, 즉 증가, 정체, 감소는 언제나 자본 축적과 맞물려 있다;

상대적 과잉인구는, 자본의 양적 확대와 그 구성의 질적 변화에 따른, 자본의 노동력에 대한 흡수와 축출 운동에 따라 규정된다.

노동생산성 제고(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따라 상대적 과잉인구가 증가한다. 이는 인구증가율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인구법칙의 현실적 적용

 

한국의 저출산과 ‘인구절벽’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미래지향적 성향’을 운운하며 앉아 있을 게 아니라, 자본주의 인구법칙의 이론적 체계를 이용해 인구수의 변동 원인을 밝혀내어야 한다. 자본의 양적 증감(축적 및 가치 파괴), 자본구성의 질적 변화, 그리고 양자 간의 상호 연관 모두를 파악해야 원인을 올바로 규명하고, 조영태가 왜곡한 ‘인구과잉’과 저출산의 문제를 제대로 해명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인구감소는 실재하는 현상이다. 실제로 2020년부터 2022년까지 한국의 총인구는 5,184만 명에서 5,163만 명으로 줄었다.[35]통계청, ≪장래인구추계≫, 2021. 12. 19. 필자는 자본주의 인구법칙의 이론적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자 한다. 한국의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노동생산성이 고도화되어, 과잉인구가 증가하고, 이로 인해 인구증가율이 감소하였다. ‘2007년 대공황’ 이후 본격화된 만성적 대공황으로 인해 노동인구가 위축된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다. 두 가지 요인의 복합적 작용이 현재 저출산과 인구감소라는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수도권에 보다 더 많은 노동인구가 몰리는 동시에, 전국적으로는 인구감소가 발생하고 있다.

 

먼저 노동생산성의 고도화에 따른 인구증가율의 감소 문제를 살펴보자. 위에서 언급되었듯, 노동생산성의 고도화는 불변자본에 비한 가변자본의 상대적 감소로 이어진다. 가변자본은 노동력으로 전화되는 자본부분이며, 사회 전체의 층위에서는 생활수단을 이루기 때문에, 가변자본의 상대적 감소는 곧 사회 전체의 물질적 재부의 축적에 대비해 노동인구의 증대가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 통계청 그래프[36]송헌재, “소득이 증가하는데 출산율이 감소하는 까닭은?―저출산의 경제학”, ≪나라경제≫ 2017년 3월호. … Continue reading는 한국의 생산력 발전 수준과 합계출산율의 상관관계를 대략적으로나마 보여 준다.[37]필자는 대략적인 발전 추세를 나타내기 위해 그래프를 차용했다. 그러나 1인당 GDP는 생산력 발전 수준의 올바른 반영으로 될 수는 없다. 생산력 … Continue reading 그래프에서 보여 주듯, 1953년도부터 2015년까지 한국 자본주의의 생산력은 그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합계출산율은 역으로 계속 떨어져 왔다. 이와 같이 얼핏 보기에 역설적인 현상은 사실 노동생산성이 제고됨에 따라 가변자본의 상대적 크기가 감소하는 데로부터 흘러나온다.

 

다음으로 만성적 대공황으로 인한 노동인구의 위축된 형태의 재생산 문제를 보자. 공황기에는 자본의 가치 파괴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자본의 축적이 심각한 수준으로 위축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임금 총액을 이루는 자본부분인 가변자본 또한 파괴된다. 동시에 축소된 시장에서의 자본의 경쟁이 격화되어, 이른바 ‘구조조정’이 진행된다. 기존의 산업부분은 더욱 자본집약적으로 변화하고, 첨단 신산업으로 자본이 대거 이동한다. 이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급격하게 높인다. 이에 따라 자본에 의해 흡수되었던 노동력이 축출되고,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 노동력의 가격인 임금 수준 또한 하락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임금의 전반적 운동은 전적으로 산업순환의 시기의 교체에 상응하는 산업예비군의 팽창과 수축에 의하여 조절된다. 따라서 이 운동은 노동자인구의 절대수의 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이 현역군과 예비군으로 분열되는 비율의 변동에 의하여, 과잉인구의 상대적 규모의 증감에 의하여, 그리고 또 과잉인구가 때로 흡수되며 때로는 다시 축출되는 정도에 의하여 규정된다.[38]K. 맑스, ≪자본론≫ 제1권(2), p. 804.

 

자본의 축적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기에, 자본은 상대적 과잉인구로서 존재하는 노동력을 흡수하며, 노동력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가 상승함에 따라 임금 등귀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후 공황기에 자본은 노동력을 다시 축출하고,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며, 수많은 노동자가 실업자로 전락함에 따라 상대적 과잉인구가 다시 증대한다. 임금 수준이 다시 하락하는 것이다. 공황의 심도와 폭에 따라, 즉, 자본의 가치 파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발생하는가에 따라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어느 수준으로 떨어질지, 따라서 임금 수준이 어느 수준으로 하락할지가 규정된다. 만일 임금 수준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진다면, 노동인구가 이전에 비해 줄어들 수 있다.

 

노동자는 [임금 수준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인하됨에 따라] 보다 적은 생활수단을 얻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그의 노동력의 축소된 재생산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39]K. 맑스, ≪자본론≫ 제1권(1), p. 393.

 

노동력의 재생산은 단순히 노동자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재생산일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재생산이다. 노동자들이 후대에 의해 계속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 자녀 부양 비용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임금 수준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저락된다면, 노동자는 “보다 적은 생활수단을 얻게 되며”, 그 자신이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단이 줄어들 뿐 아니라, 자녀들을 부양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노동활동을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자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의 재생산뿐만 아니라 예비노동자인 자녀들의 재생산도 위축된 수준에서 일어난다. 다시 말해 생계가 어려워지니 자녀 부양이 어려워지고, 출산 기피가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것이다.

 

올 1월 초 한 민간 결혼정보회사가 ‘2023 출산 인식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결혼정보회사인 D사가 이달 초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혼 남녀 4명 중 3명이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부담과 미래에 대한 막막함 등 현실적인 여건으로 인해 결혼 후 희망 출산시기에 대한 질문에서 응답 여성의 44.8%와 응답 남성의 29.2%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저출산의 주요 원인을 묻는 질문에는 남성의 36.2%와 여성의 32.2%가 ‘육아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꼽았고, ‘실효성 없는 국가의 출산정책’을 든 남성도 14.2%나 됐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정부의 저출산 정책이 출산의지에 미치는 영향을 묻는 질문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답변한 비율이 남성은 50.6%, 여성은 5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40]이동기, “저출산문제 해결을 위한 인식과 제도 개선”, ≪국세신문≫, 2023. 1. 23. <https://www.int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6820>

 

해당 출산 인식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주요 원인은 ‘육아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다. 한국의 일반적인 임금 수준은, 노동력 재생산의 비용에 포함되는 식비, 주거비, 난방비, 사교육비 등 여러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미흡하다.

 

한국은행과 통계청, 금융감독원이 공동발표한 ‘2022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가구의 평균 부채는 9,170만 원으로 전년 대비 4.2% 증가했다. 가구당 평균 부채액이 9,000만 원을 넘어선 것은 해당 조사 시행 이후 처음이다. 특히 29세 이하 가구의 빚이 전년 동기 대비 41.2% 증가했다.[41]윤희준, “이자 부담, 1년 새 두 배 급증…적자부된 가계부, 소비 절벽ㆍ자영업 부실 확대”, ≪조선비즈≫, 2023. 1. 5. … Continue reading

 

임금 수준이 노동력 재생산비, 즉 생계비에 못 미친다면, 인민들은 은행에 돈을 빌려 부족한 생계비를 충당하는 수밖에 없다. 가구당 평균 부채액이 점차 늘어나 9,170만 원에 달한 것은 일반적인 임금 수준이 노동력 재생산비에 못 미친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은 점점 더 허리띠를 졸라매게 되며, 육아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출산을 기피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이전보다 삶이 더 윤택해지고, 생활 수준이 더 높아졌는데, 왜 미흡한 생활 수준이 저출산의 원인으로 되는 것인가? 왜 한국보다 낙후된 자본주의 나라에서의 출산율이 한국보다 높은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노동력의 가치가 사회역사적, 문화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컨대 만일 한국의 노동자들과 미국이나 일본, 서유럽 등지의 노동자들, 혹은 한국의 노동자들과 동남아 여러 나라의 노동자들 사이에 그 평균적인 필요생활수단의 종류와 양이 크게 다르다면, 그것은 어떤 원인, 어떤 이유에 의한 것일까?

각 국민ㆍ민족 간의 인종적, 육체적, 생리적 차이 때문에?

아닙니다. 그러한 인종적, 육체적, 생리적 차이 때문에 각국의 노동자들 사이에 그 필요생활수단의 종류와 양에 커다란 차이가 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차이는 주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습니다.

사실은 구태여 외국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에서의 역사적 경험만 봐도 그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인 1950년대나 1960년대에는 예컨대 초등학생들, 특히 농촌의 초등학생들은 사내아이의 경우 대부분 머리를 박박 깎고, 또 남녀를 불문하고 고무신을 신고, 가방 대신에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서 허리춤이나 어깨에 동여매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머리를 길러 관리하는 것보다는 박박 깎는 쪽이, 운동화나 구두보다는 고무신이, 그리고 가방보다는 보자기가 훨씬 값이 싸고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값이 싸고 비용이 적게 든다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이 사회적ㆍ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1950년대나 1960년대에는, 예컨대 두발의 경우에는 중ㆍ고등남학생들이 모두 그 머리를 박박 깎도록 강요당하는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 때문에, 그리고 고무신이나 보자기는 전쟁 후의 전반적인 가난 때문에,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는 그런 것들이 전혀 어색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주 정상적 혹은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42]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제6판), 노사과연, 2015, pp. 285-286.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 한국 자본주의하에서는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생활 수준 또한 높아졌기 때문에, 노동력의 가치도 이를 반영해야 한다. 임금 수준이 현 시기의 노동력의 가치에 비해 한참 못 미치기 때문에, 노동력의 위축된 재생산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근로인민대중이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일시적이어야 할 공황기가 계속 지속되고, ‘노동력의 위축된 재생산’에 따른 인구감소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인가? 왜 저출산 문제는 장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로 전화되었는가? 먼저 공황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공황은 자본의 가치 파괴가 보편화, 일반화되는 시기이다.

 

공황은 … 과잉자본ㆍ과잉생산을 파괴함으로써 그 자체로써 생산을 축소하고, 자본과 자본 간의 경쟁을 완화하여, 그리고 실업을 증대시켜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이윤율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43]같은 책, pp. 497-498.

 

공황은 빈곤한 대중의 소비가 제한되는 반면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소비를 초월하면서, 생산과 소비의 비조응이 축적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이 파국으로 치닫는 현상이다. 이 과정 속에서 과잉자본은 파괴되고, 생산이 다시 소비에 조응하게 되며, 자본주의적 생산은 다시금 정상화된다. 그런데 최근에는 왜 “자본주의적 생산이 다시금 정상화”되지 못하고, 만성적 공황이 계속되고 있는가.

 

대부분의 독점자본은,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그 막강한 자금력으로 공황 국면에서도 파산하지도, 그 생산설비를 폐기하지도 않고 꿋꿋이 살아남습니다. 이는, 한편에서는 사회적 생산이 확대―번영―축소―정체― 확대……의 순환을 반복하면서도 모순과 위기를 만성적, 항상적인 것으로 전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순환이 반복할수록 위기가 엄청나게 증폭된 규모로 폭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44]같은 책, p. 605.

 

대부분의 독점자본이 “그 막강한 자금력으로 공황 국면에서도 파산하지도, 그 생산설비를 폐기하지도 않고 꿋꿋이 살아남는다면”, 과잉자본ㆍ과잉생산은 파괴되지 않고, 이윤율 또한 낮은 수준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모순과 위기는 “만성적, 항상적인 것으로 전화”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정상화되지 않고, 항상적인 위기 속으로 굴러떨어진다.

 

다른 한편 국가가 사독점의 파산을 방지하기 위해 재생산 과정에 적극적으로 간섭, 개입해 나서면서 과잉자본은 폐기되지 않고 축적되기를 거듭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공황이 만성화되고, ‘노동력의 위축된 재생산’에 따른 저출산 및 인구감소 또한 계속되는 것이며, 실업률 또한 늘어나 현역 노동자들이 과잉인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결론

 

소위 ‘저출산’, ‘인구감소’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증상이며, 죽어 가는 사회 제도의 최후의 발작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이제 사람들의 출생조차도 억제할 정도로 반동화되어, 자신의 역사적 수명이 다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조영태와 같은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은 인구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고, 반동적인 맬더스주의를 유포시켜 인민대중이 저출산과 인구감소 현상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게끔 혼선을 주고 있다. 하지만, 두 현상의 근원인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은 조영태가 온갖 궤변으로 은폐하고 관념 속에서 지우려 들어도 결코 지워질 수도, 영원히 은폐될 수도 없다. 우리는 인류의 생존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후대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 반동적인 사회 제도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침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갑판 위에 서 있는 한, 멸망은 필연적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화의 불구름은 다시 우리 머리 위를 감돌고 있고, 기후위기는 인류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침몰하고 있는 배에서 뛰어내려, 새 사회로 헤엄쳐 나아가야 한다. 조영태의 말마따나, “우리에게는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다.”[45]조영태, 앞의 책, p. 108.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조영태, ≪인구, 미래, 공존≫, 북스톤, 2021, p. 298.
2, 4 조영태, 앞의 책, p. 26.
3 조영태는 온갖 대중 매체에 등장하면서 ‘인구학 권위자’ 행세를 한다.
5, 21, 23 같은 곳.
6 같은 책, pp. 26-27.
7 K. 맑스, ≪자본론≫ 제1권(1), 백의, 1989, p. 217.
8 조영태, 앞의 책, p. 36.
9 같은 책, pp. 79-80.
10 같은 책, p. 81.
11 여기서 ‘사람’은 타인의 잉여노동을 전유하여 먹고사는 착취자가 아닌 생산자를 의미한다.
12 이는 또한 생산양식의 본질을 이룬다.
13 K. 맑스, ≪자본론≫ 제1권(2), 백의, 1989, pp. 896-897.
14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자본가와 지주 등을 포함한 비노동 인구의 생활수단은 제외한다.
15 K. 맑스, ≪자본론≫ 제1권(2), p. 774.
16 K. 맑스, ≪자본론≫ 제1권(1), p. 282.
17 노동일: 노동자가 하루 동안에 노동하는 시간.
18 K. 맑스, ≪자본론≫ 제1권(1), p. 394.
19 조영태, 앞의 책, p. 83.
20 같은 책, p. 77.
22 같은 책, p. 83.
24 같은 책, p. 85.
25 Oliver Sng et al, “The Crowded Life Is a Slow Life: Population Density and Life History Strateg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Vol. 112, No. 5, 2017.
26 K. 맑스, ≪자본론≫ 제1권(2), p. 778.
27 같은 책, p. 777.
28 같은 책, pp. 777-778.
29 같은 책, p. 778.
30 같은 책, p. 787.
31 같은 책, p. 788.
32 같은 책, p. 789.
33 같은 책, p. 795.
34 같은 책, p. 797.
35 통계청, ≪장래인구추계≫, 2021. 12. 19.
36 송헌재, “소득이 증가하는데 출산율이 감소하는 까닭은?―저출산의 경제학”, ≪나라경제≫ 2017년 3월호. <https://eiec.kdi.re.kr/publish/naraView.do?fcode=00002000040000100012&cidx=10948>
37 필자는 대략적인 발전 추세를 나타내기 위해 그래프를 차용했다. 그러나 1인당 GDP는 생산력 발전 수준의 올바른 반영으로 될 수는 없다. 생산력 발전은 사용가치 생산의 발전을 의미한다. 컵을 1시간에 1개 만들다가, 2개를 만들면 생산력은 두 배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가치로 따지면 1시간 = 컵 1개 = 컵 2개 = 100원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가치의 크기인 GDP의 증가로 생산력 발전을 표현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38 K. 맑스, ≪자본론≫ 제1권(2), p. 804.
39 K. 맑스, ≪자본론≫ 제1권(1), p. 393.
40 이동기, “저출산문제 해결을 위한 인식과 제도 개선”, ≪국세신문≫, 2023. 1. 23. <https://www.int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6820>
41 윤희준, “이자 부담, 1년 새 두 배 급증…적자부된 가계부, 소비 절벽ㆍ자영업 부실 확대”, ≪조선비즈≫, 2023. 1. 5. <https://biz.chosun.com/policy/policy_sub/2023/01/05/3G7QYNLZLREJPCBHD66IINP5FY/>
42 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제6판), 노사과연, 2015, pp. 285-286.
43 같은 책, pp. 497-498.
44 같은 책, p. 605.
45 조영태, 앞의 책, p. 108.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1개의 댓글

  • 아프리카 같은 후진국의 인구증가율이 훨씬더 높은데 그 이유는 이 대륙에 속하는 나라들의 유기적 구성이 낮아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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