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인간에게 있어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예발트 일리옌꼬프(Э́вальд Илье́нков)

해제ㆍ번역: 한동백(회원)

 

* E. V. Ilyenkov, “The Biological and the Social in Man”.

<https://www.marxists.org/archive/ilyenkov/works/articles/biological-social.pdf>

 

 

해제

 

인간 행동의 본질적이고도 지속적인 계기가 무엇인가에 관한 수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논쟁이 무색하게도, 오늘날까지 그것은, 그 계기가 “자연적인 것이냐, 사회적인 것이냐”라는 극단적인 두 방향으로 나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 행동과 관련된 모든 학문 분야―심리학, 유전학, 철학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철학 분야에서 이 대립되는 논제는 각각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사회적 구성주의라는 양대 진영을 파생하였다.

 

일리옌꼬프는 이 논문에서 인간 생활의 내적이며,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계기를 사회적인 것에 두며, 인간을 구성하는 자연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이 그 자신의 규정력을 이어 나가게 하는, 일종의 유동하는 기체(基體)임을 밝힌다. 이는 인간이 사회적 제 관계의 앙상블이라 간주한 맑스와 엥엘스의 인간론과 표리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자연적인 것, 좁게는 인간을 구성하는 생물학적인 요인은 사회적인 활동, 사회적인 존재의 존재 양식이 자신의 외화 과정에서 거치는 매개체이며, 그것의 변화ㆍ발전 반경은 사회적 존재의 운동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일리옌꼬프에 따르면, 개별 인간의 구체적인 질(質)은 생산력 발달로 대표되는 역사적 발달 국면에 의해 조건 지워진 각 상이한 역사적-사회적 형태의 제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이 제 관계가 달라지는 만큼 인간의 속성들, 구체적인 존재 양식도 달라진다.

 

물론 이는 단순히 인간의 존재 양식이 역사적-사회적 형태의 제 관계에 의해 일방적인 방식으로만 조건 지워진다는 뜻이 아니다. 이 제 관계는 인간이 그것에 개입할 여지를 항상 자기의 존재 양식에 남겨 두며, 인간은 그 사회 형태의 모순을 인식하여 사회 형태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생물학적 요인도 차츰 변화해 간다.

 

인간의 구성 요소에 있어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서로 변증법적 관계에 있기에 상호 규정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인 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제 자연적 요인이 없이는 그 규정력을 이어 나갈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게 있어 자연적인 것은 인간의 사회적 활동, 즉 인간에게 있어 사회적인 것을 존재할 수 있게끔 해 주는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이 관계에서 지배적이고 규정적인 위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며, 인간을 구성하는 제 자연적 요인의 존재 양식은 사회적인 것이 규정한다. 그리고 그 반대는 아니다.

 

일리옌꼬프는 당대 쏘련 교육에서 나타난 편향을 지적한다. 그것은 교육에 있어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점을 망각하고, 인간의 능력을 그 인간을 구성하는 생물학적 요인에서 찾으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교육이 이러한 자연주의적 환상에 빠져 있을 경우, 누구나 가지고 있는 표준으로서의 재능을 최상의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에 소홀히 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그것은 교육 대상의 심리적 내용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친다. 쏘련에서는 실제 수정주의가 자라나면서 영재 교육과 갖가지 특권적인 특수 교육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이는 교육에서 평등권의 침해를 불러왔다. 이 현상은 돌고 돌아 쏘련 사회 내에서 사상적 무장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우리 시대의 교육―가정 영역에서 비공식적으로 진행되는 모든 교육 방식까지 포괄하여―에서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것을 파악하고, 바로 그렇기에 인간의 생활에서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 지배적인 규정적 지위에 서 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의 의미에는 물론 반봉건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갖가지 특권적인 교육 제도 비판, 교육 대상의 심리에 반사회적인 영향을 끼치는 교육 내용 ―특히, 주입식 교육, 경쟁 교육, 그리고 이른바, ‘스파르타식 조기 교육’이 함의하고 있는 것― 비판, 최상의 조건에서 최상의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소질은 누구에게나 갖춰져 있으며, 그것은 전혀 타고난 것이 아님을 주지시키는 것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더더욱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교육 체계는 한 사회의 생산 양식을 반영하며, 혁명적, 발전적 교육은 혁명적, 발전적 생산 양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를 위해서 자본주의 지양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서 사회적인 현상의 내적인, 지속적인, 지배적인 계기를 모두 진화적 요인에 빗대어 설명하는, 생물학적 환원주의의 일종인 ‘진화심리학’이 군중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D. M. 버스의 ≪진화심리학: 마음에 대한 새로운 과학(Evolutionary psychology: the new science of the mind )≫은 그것의 입문서로서 현재까지 청년 세대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진화심리학’은 진화생물학을 인간 사회생활의 전반적 내용을 설명함에서 무비판적, 무매개적으로 적용한다는 점에서 그 비과학성이 있다.

 

이들은 몇 가지 유전학적 내용을 편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분업과 “더 나은 수준의 분업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인간의 본성상 전혀 없앨 수 없으며, 인간이 있는 이상 영원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완전히 맞지는 않아도, 가장 합치하는 사회 형태이다”; “인간에게 내재한 근원적 폭력성은 없앨 수 없기에 전쟁 위기는 항상적이다.”

 

‘진화심리학’은 유전학의 제 법칙을 빙자하여 낡은 사회 질서를 수호하는 데 쓰이는 모든 류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에 ‘과학적 성격’을 부여한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여성이 남성보다 그 능력 면에서 뒤떨어지며, 남성은 엄연한 가장으로서 그 역할을 맡는 것이 인간에게 내재한 본성상 가장 합리적이라는 매우 반동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은 그 체계상, 필연적으로 진화생물학의 극히 일부 법칙만을 응용할 수 있으며, 유전적 요인은 사실상 차이가 없으나, 사회 형태가 극단적으로 상이한 경우에 인간의 생활 수준과 영위 방식이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이유에 대해서 올바르게 설명해 내지 못한다. 심지어 ‘진화심리학’은 후성유전학(epigenetics)의 발전적 성과와 조응할 수도 없는 학문적 체계이다.

 

체계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진화심리학’은 전혀 새롭지 않으며, 발전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과거 사멸한 사회진화론, 골상학, 우생학이 공통적으로 지닌 본질의 이질적 현상 형태일 뿐이다.

 

유전적 요인을 모든 사회 현상의 본질로 설명하려는 부르주아지의 망동은, 전반적 위기의 상시화에서 파탄이 나 있는 부르주아적 심리의 표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전체 노동계급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이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계획적이고 교활하다. 그리고 그만큼 인간의 본성과 활동 계기에서 자연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의 위에 놓으려는 시도는 노동계급 내에서도 일정하게 발생하고 있다. 소위, 인간이 ‘사회주의’에 적합하다는 ‘근거’로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이타심’이 있으며, 그것이 ‘이기심’을 누를 수도 있다는 식의 설(說)이 대표적이다. 다시 말해, ‘이기심’만큼, 인간의 본성에는 ‘이타심’이 영속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력 수준이 유효한 변수로 된 이래 인간의 본성은 오로지 사회적 존재의 사회적 본성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은 어떠한 생물학적인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총체, 즉 이질적인 사회적 관계 항의 변증법적 배합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타적이거나, 이기적인 표현 형태를 지니는 것은 모두 앞서 지적한 요인의 반영이다. 또한, 인간의 심리적 표현 형태는 사회 형태에 내재한 관계들에 따라 천차만별로 현상하며, 그것을 ‘이기심’과 ‘이타심’으로 나누는 것은 구체적인 것을 극도로 추상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동계급이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자본가계급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데에는 노동계급이 자본가계급의 논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짓뭉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현시대의 자연주의적 환상은 자본주의 영속화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며, 따라서 우리 노동계급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를 설명함에서 그것 운동의 내적이며,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계기를 생물학적인 것에 놓는 모든 자연주의적 편향에 맞서야 한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밝은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이 주제는 우리가 진지하게 논의할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 그 모든 것이 단순해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생물학적 유기체로 호모 사피엔스 종의 표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은 항상 이런저런 사회적 유기체의 구성원으로 여겨진다. 특정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의 대표자, 따라서 특정 계급이나 직업, 특정 사회 집단의 대표자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 철학자나 의사가 될 필요는 없다. 이 사실은 볼가강이 카스피해로 흐른다는 사실만큼이나 자명하다.

 

그렇다면 왜 이 문제는 수 세기에 걸쳐 과학계에서 거듭 제기되었는가? 인간의 생명 활동에 있어 이 두 가지 측면 사이의 정확한 상호 관계에 대한 논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작위적 논쟁, 인간을 단단히 지배하는 실제적 문제와 아무 관련도 없는 논쟁이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인간이 적어도 사고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존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변증법적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사회적 시도, 어떤 행동, 어떤 사회생활의 발현도 생물학적 메커니즘, 특히 신경계의 메커니즘에 의해 가능함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인간 유기체의 모든 생물학적 기능은 인간의 사회적 기능의 수행에 어느 정도 종속되어 있다. 여기서는 생물학 전체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원리의 발현 형태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특정 사례나 구체적인 사례에 대한 두 가지 극단의 해석이 항상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기체의 생물학적 기능을 특정한 개인의 역사적으로 결정된 사회적 기능이 발현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또는 그 반대로 사회적 기능을 인간 유기체의 타고난 유전적 특성의 발현 형태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사회적 기능은 단순히 이 유기체에 기질적으로 내장된 기능이 외부로 드러난 형태일 뿐이다.

 

순수 논리나 형식 논리의 관점에서 볼 때, 두 접근법은 모두 옳다. 이것은, 우리가 이 동일한 사실을 취급할 때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서로 충돌하는 두 논리를 얻게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동일한 사실을 반대 방향에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 단지 형식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다툼의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가치는 추상적인 것이 발현된 구체적 형태이다. 사용가치는 그 속에 교환가치가 체화된 형태일 뿐이다. 그리고 그 반대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례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발생한다. 이례적 상황은 일상적 인간 생활의 “정상적인” 과정으로부터 벗어난 이탈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러한 이례적 상황의 원인, 즉 정상적 생활이 훼손된 원인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정상적 과정을 변화시키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이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물론 나는 하나하나의 사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전형적이고 널리 퍼지는 경향이 있어서 일반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사례들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출산율의 감소나 사망률의 증가, 특정 질병의 유병률의 증감, 또는 범죄 통계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중요한 모든 문제들이다.

 

여기서 순전히 사회적 기원에서 유래한 현상을 자연적 원인의 결과로 볼 가능성이 항상 발생해 왔다. 말하자면 사회적인 것을 생물학적인 또는 (보다 넓게는) 자연적인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론하며, 의학적 수단으로 사회적 질병을 치료하고 사회적 조치로 유기적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결국엔 의사와 약사가 토론을 끝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특정한 조건하에서 특정 유형의 사람들에게 매혹적으로 작용하여 학리적 문화사에서 끊임없이 나타났고, 오래전에 완전한 세계관으로 확고해졌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생활에 대한 자연주의적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교과서적인 예로, 우리는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결코 재미있지 않았던 본성상 어떤 사람은 노예이고 다른 사람은 주인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명제가 바로 고전 고대 사회가 쇠퇴와 해체의 단계로 진입하기 시작하던 때에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바로 붕괴하는 사회 조직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한 이론적 정당화로 생겨났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막연하게나마 형성되고 있던 삶을 다른 방법으로 준비하고 계획하려는 요구에 대한 반론이었다.

 

그러나 특정 사회 현상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은 방어적일 뿐만 아니라, 그 특성과 결과에 있어 파괴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소위 인간성이라는 명목으로 봉건적 신분 질서를 “자연”에 반하는, “부자연스러운” 인간 생활의 조직화라고 선언하면서 혁명을 일으켰다. 반대로, 사유 재산권과 사적 소유의 자유는 자연적이라고 선언되었다. 따라서 자연주의적 환상은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개념이나 객관적으로 진보적이거나 심지어 혁명적인 개념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경우 모두의 환상은 심지어 매우 진보적인 사람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상으로 남아 있다.

 

유물론 철학은 모든 환상에 대한 원칙적 적대자로서, 가장 예상치 못한 형태로 되살아나는 경향의 환상도 예외는 아니다.

 

맑스주의는 혁명적 경향의 헤겔 좌파들과의 논쟁하는 과정에서, 그 태생부터 자연주의적 환상에 맞서야 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엘스는 이 이론적 환상의 교활성을 모두 보여 주었다. 이 시기 급진적 헤겔 좌파들―바우어와 슈티르너―은, 그들의 진지한 혁명적 경향과 어구가 무색하게,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이론적 변론자로 변하였다.[1]Soch., vol. 3, pp. 424-426.

 

맑스와 엥엘스는 인간 생활에 대한 자연주의적 개념의 모든 변종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의도와 결합될 때에도 항상 단호히 그것에 반대하였다. 맑스와 엥엘스는 이 환상이 과학적-유물론적 해명이 아니라 정확히 환상에 불과하기에, 조만간에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부정확하고 해로운 결정으로 이끌 것이며, 머지않아 그들은, 그들의 모든 주관적인 혁명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사회 질서, 다시 말해 그들에게 비정상적으로 보였던 바로 그 질서에 대한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대부분 헤겔 좌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우리 세기의 주요 대규모 재앙과 이상 현상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은 언제 어디서나 반공주의에 매우 적합한 사고방식임이 입증되었다. 자연주의적 설명의 교활함이 특히 두드러지는 과격하고 극단적인 사례로 서구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론가인 아르투어 쾨슬러(Arthur Koestler)[2][역자 주] 190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의 작가이자 기자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교육받았으며, 1931년에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 Continue reading의 개념을 들 수 있다.

 

맑스, 엥엘스, 레닌이 공식화한 진정한 유물론의 일반적 입장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특징지을 수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인간적인 모든 것, 즉 인간과 동물을 명확히 구별하는 모든 것은 100%(90%도 아니고 99%도 아닌) 인간 사회의 사회적 발전의 결과이며, 개인의 모든 능력은 자연적인 유기체가 아니라 사회적인 유기체가 개별적으로 행사하는 기능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 신체에 있어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기관들, 특히 뇌에 의해 항상 수행된다.

 

이 입장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며, 과장된 방식으로 강조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일부 동지들은 이와 같은 이론적 입장이 실제 각 개인에게 특수하게 작용하는 생물학적-유전학적인 선천적 특성에 대한 과소평가 또는 심지어 각 개인에 있어 그것의 평준화와 표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 같다. 반대로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생활을 설명하는 데 있어 자연주의적 환상에 대한 아무리 작은 양보라도 조만간 이러한 양보를 한 이론가가 유물론적 입장의 모든 부분을 포기하도록 이끌 것이며, 쾨슬러식 이론에 완전히 항복하도록 이끌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발톱을 제거하면 건장한 새도 죽는 법이다.” 인간 능력의 개별적 변이의 유전적(즉, 자연적) 기원에 관한 초기 논쟁은 항상 이러한 능력 자체가 자연적이고 선천적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이러한 능력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을 통해 (처음에는 상상 속에서, 나중에는 실천적으로도)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계승된 기존의 인간 노동 분업 방식을 영속화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이는 이론가가 인간 유기체의 순수한 신체적 지표(예: 키, 머리카락 색깔, 눈 색깔)를 “모델”로 삼아 지적 영재성 정도나 예술적 재능과 같은 정신적 지표도 이해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결과이다.

 

이러한 논리는 재능(그리고 그 반대 개념인 바보)을 전형적 행동 양식에서 벗어난 드문 예외로, ‘전형적 행동 양식’을 평범성, 창의력의 부족, 창조적이지 못한 성향, 수동성, 종종 틀에 박힌 행위로 보는 시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맑스주의자의 의무는 정신적 특성의 차이에 대한 이런 종류의 설명에 단호히 반대하는 것이다. 인간의 “전형”이 바로 재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훨씬 더 진실인 것 같다. 그리고 재능을 희귀성, 전형에서 벗어난 일탈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히 대자연에 우리 자신의 책임, 의학적으로 정상적인 각 개인이 최고 수준의 재능으로 발전할 수 있는 모든 외부 조건을 만들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떠넘기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람의 정신적 제 능력이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해롭다. 이러한 견해의 실천적인 결과는 각 개인의 전면적인 발전을 보장하는 임무, 즉 공산주의 변혁에로의 주요 임무에 매우 필수적인 것으로서 교육자와 의사 사이의 협동을 확립할 데에 대해서 항상 잘못된 전략을 가져오는 것이다.

 

일단 학교가 재능이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배출하고, 재능 있는 사람은 너무 적게 배출한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인간 신체 기관에 두는 식으로 그것의 원인을 대자연에 떠넘기게 되면, 교육 체계와 인간 발전의 다른 모든 조건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자동적으로 신체 기관―개인의 뇌와 신경계―을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인간 유기체 기능의 생물학적 전형을 보존하고,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형을 개조하는 유토피아적 작업에서 의학과 의사의 임무를 찾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는 우리 교육 씨스템과 자녀 양육 방식의 모든 결함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 어울리지 않는 일에 내몰릴 것이다. 먼저 우리는 그 아이를 신경증 환자나 반사회적 인격장애자(psychopath)로 만든 다음 신경과 전문의에게 보내고, 그 후 그 아이는 자연히 신경증 판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원인을 쉽사리 결과로 여기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활 영위와 인간의 마음에서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관계 문제는 작위적인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며, 의사는 교육자와 마찬가지로 맑스-레닌주의 철학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숙지하고 있어야 특정 구체적인 사례에서 실수를 덜 수 있을 것이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Soch., vol. 3, pp. 424-426.
2 [역자 주] 190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의 작가이자 기자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교육받았으며, 1931년에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1938년 공산주의 운동에 ‘환멸’을 느끼고 이탈하였다. 1940년 반공주의ㆍ반(反)볼쉐비끼적 내용을 담은 소설인 ≪한낮의 어둠(Sonnenfinsternis)≫을 출간하였다. 1954년부터 그는 자신의 집필 방향을 소설 분야에서 자연과학과 심리학 분야로 옮겼으며, 이후 생리학주의적 심리 이론을 전개하였다. 1983년, 영국 런던에서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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