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4)*

일렌코프(Evald Ilyenkov)**

번역 : 노준엽 │ 회원

 

* 출처: https://www.marxists.org/archive/ilyenkov/works/abstract/index.htm/ 이 번역물은 일렌코프의 저서인 ≪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을 분량을 나누어 연재하는 것이다.

 

** 역주: 쏘련의 철학자로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연구사, 1990) 등의 저서가 있으며, 변증법적 논리학의 문제를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1장 구체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과 형이상학적 개념

 

  1. 변증법적 논리학과 형식논리학에서 추상과 구체의 개념

  2. 추상과 구체의 개념들의 역사로부터

  3. 맑스에게 있어서 구체의 정의

  4. 개념에 대한 관념의 관계에 대하여

  5. 인간의 개념과 그것의 분석으로부터의 약간의 결론들

  5. 구체, 그리고 보편과 개별의 변증법(이번 호)

  6. 대립물의 통일로서 구체적 통일(이번 호)

 

 

 

구체, 그리고 보편과 개별의 변증법

 

유(genus) 개념 속에서 인간을 관념적으로 등치함을 통한 인간 본질의 연구는 보편의 개별에 대한 관계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전제한다.  

형이상학자에게는 개별만이 구체이다―하나의 개별적인 감각적으로 지각된 사물, 대상, 현상, 사건, 한 명의 고립된 인간 개인 등. 그(형이상학자-역자)에게 추상은 정신적 분리의 산물―현실 속에서 그것(정신적 분리의 산물-역자)의 대응물은 많은 (혹은 모든) 개별적 사물들, 현상들, 인간들의 유사성이다―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보편은 오직 많은 개별적 사물들 간의 유사성으로서만, 오직 구체적인 개별적 사물의 하나의 측면으로서만 현실 속에서 존재한다. 반면 그것(보편-역자)이 개별적 사물로부터 분리되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단어로서만, 용어의 의미로서만, 오직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현실화된다.

처음 보면, 보편과 개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유일하게 유물론적이고 상식적인 관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처음에만 그렇다. 이러한 입장은, 그 문제에 대한 그러한 접근 자체에서, 머리 밖의 현실 속에서의, 사물들 자체 내에서의 보편과 개별의 변증법을 완전히 무시한다.

이 점은 인간 본질에 대한 포이어바흐와 맑스-레닌주의적 개념이 나뉘는 방식을 숙고함으로써 가장 생생하게 나타날 수 있다.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관념론에 대해서, 헤겔이 ‘순수 사고’를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는 데 대해서 꽤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사회적 삶의 물질적 생산 속에,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 포함된 변증법적 개념을 헤겔에 대립시키지 못했다.

그 점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에 그 자신이 관심 있었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사회학과 인식론 모두에서 추상적 개별에 대한 집중에 머무는지에 대한 이유였다. 이 인간은 오직 포이어바흐의 상상 속에서만 ‘구체적’인 것임이 입증된다. 그는 인간의 현실적인 구체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제쳐두더라도, 그 점은 ‘구체’와 ‘추상’이라는 용어가 포이어바흐에 의해 그것들의 참된 철학적 의미와 직접적으로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구체라고 부른 것은, 사실 맑스에 엥엘스에 의해 훌륭하게 증명되었듯이, 극히 추상적이며, 그 역도 그러하다.

‘구체’라는 용어는 포이어바흐에 의해 모든 개별들에 공통적이고 각각의 개별 속에 내재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특성들의 집합에 적용되었다. 인간에 대한 그의 개념은 이러한 특성들에 기초한다. 맑스와 엥엘스의 관점에서, 변증법적 관점에서,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전형적으로 추상적인 묘사이다.

맑스와 엥엘스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인간 존재의 진정한 구체성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철학자가 ‘구체’라는 용어를 그것의 완전한 의미로 적용하게 되는 객관적 현실은 무엇인지를 보여준 첫 번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각의 개별 속에 내재된 일련의 특성들 속에서가 아니라 사회생활의 전체 과정과 그것의 발전 법칙 속에서 인간의 구체적 본질을 발견했다. 인간의 구체적 본질의 문제는 여기서,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사회적 관계들의 체계의 발전 문제로 정식화되고 해결된다. 인간과 사물 간의 상호작용의 보편적 (사회적으로 구체적인) 체계는, 한 고립된 개인과 관련해서는, 그와는 독립적이고 그의 외부에서 형성된 그 자신의 인간적 현실로서 나타난다.

자연 자체는 ‘인간적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창조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특수한 인간적인 특징들을 지닌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신의 노동의 산물이다. 심지어 직립보행조차, 처음에는 인간의 자연적이고 해부학적으로 타고난 특성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립된 사회 내에서 아이를 교육한 결과이다: 사회로부터 고립된 한 아이, 라 모글리(a la Mowgli)(그리고 그러한 경우는 많다)는 팔 다리 모두로 뛰기를 선호하고, 그의 그러한 습관을 버리게 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든다.

다시 말하면, 궁극적으로 사회적 노동의 산물인, 개별의 그러한 특징들, 성질들 그리고 특성들만이 특수하게 인간적인 것이다. 물론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전제조건들을 제공하는 것은 어머니 자연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전제하는 특수한 인간적인 형태는 노동의 산물이며, 그것은 오직 노동으로부터만 파악되고 추론될 수 있다. 역으로, 노동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모든 특성들은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특징들에 속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부드러운 귓불은, 비록 그것들이 인간의 하나의 ‘특수한 특징’이고 다른 어떤 생물에게도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적 삶의 활동으로 깨어나는 개인, 즉 사회적 존재가 되고 있는 자연적인 생물학적 존재는, 교육을 통해 이 모든 활동 형태들에 강제적으로 동화된다. 그것들(인간적 삶의 활동들-역자) 중 어떤 것도 생물학적으로 유전되지 않는다. 유전되는 것은 그것들(인간적 삶의 활동들-역자)에 동화되기 위한 생리학적 가능성이다. 처음에 그것들(인간적 삶의 활동들-역자)은 그(인간-역자)와는 독립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무엇으로서, 완전히 객체적인 어떤 것으로서, 동화와 모방을 위한 대상으로서 그(인간-역자)와 대면한다.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 인간 활동의 이 형태들은 개인적, 개별적, 주관적 재산으로 변모하고 그것들은 심지어 생리학적으로 공고화된다: 한 명의 성인은 더 이상 팔다리로 걸을 수 없으며, 심지어 그가 원한다고 해도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조롱받을 것이며, 생고기는 그를 병들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많이 이야기된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총합을 이루는 그러한 모든 특징들은 사회적 인간의 노동 활동의 결과이고 산물(물론, 궁극적으로)이다. 인간은 그것들(인간의 사회적 특징들-역자)을 그러한 자연에 빚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신이라고 부르든 혹은 어떤 다른 명칭(예를 들어, 이데아)으로 부르든 간에,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빚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그것들(인간의 사회적 특징들-역자)을 오직 이전 세대의 노동과 그 자신에 빚지고 있다. 이것은 심지어 직립보행보다도 더 감각적이고, 객관적인(물질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인간 활동의 더 복잡한 형태들에서도 더 참된 것이다.

역사를 통해 축적된 인류 문화는 현대의 개인들에게 개별적인 인간 활동을 결정하는, 일차적인 어떤 것으로서 나타난다. 과학적인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개별, 인간적 개인은 그러므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 모두에서, 보편적인 인간 문화를 체현하는 하나의 단위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화는 개인 속에서 다소간에 일면적이고 불완전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현실화된다. 개별이 풍부한 문화를 그의 소유로 만들 수 있는 정도는 그 자신 한 사람에게만 달려있지 않다; 훨씬 더 큰 정도로, 그것은 사회에, 그리고 사회에 특징적인 노동 분업 양식에 달려있다.

문화의 이러저러한 영역의, 인간적인 활동의 어떤 형태의 동화는, 하나의 독립적인, 개별적인, 그리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그것(인간적인 문화-역자)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정도만큼 그것을 동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것도 수동적인 관조를 통해서 동화될 수는 없다―그것은 공기 속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 활동적인 실천 없는 동화는 아무런 결과도 산출하지 않는다. 그 점은, 개별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 문화를 동화시키는 형태가 노동 분업의 형태에 의해 결정되는지의 이유이다. 물론 거기에는 일면성들이 가득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맑스와 엥엘스의 주요한 성과는, 노동의 부르주아적 분업의 모순에 대한 그들의 신중하고 구체적인 연구였다.

적대적인 계급적 노동 분업은 각각의 개별들을 극단적으로 일면적인 인간, 한 명의 ‘부분적인’ 인간으로 만든다. 그것(적대적인 계급적 노동 분업-역자)은 그(개별-역자)의 능력의 어떤 부분을 다른 부분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제거함을 통해 발전시킨다. 어떤 개별들에게서는 특정한 능력들이 발전되고, 다른 개별들에서는 다른 능력들이 발전된다. 그리고 보편적인 발전이 현실화되는 형태로 작용하면서, 개별들을 인간으로서 서로 간에 연결시키는 것은 이러한 발전의 일면성이다.

인간적인 발전의 구체적인 풍부함은 여기서 개인적, 개별적 발전의 풍부함에 기인하며, 고립적으로 취해진 각각의 개별이 결함 있고, 일면적인, 즉, 추상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포이어바흐가 그러한 객관적으로 추상적 개인을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간주한다면, 그것은 부르주아적 이론가의 한계, 사물의 실제적 상태를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한계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입장의 논리적 취약성의 한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포이어바흐는 재단사와 페인트공, 열쇠장이와 점원, 농민과 성직자, 임금 노동자와 기업가의 똑같이 특징적인 일반적 속성을 찾으면서, 역사에 의해 발전된 모든 실제적 차이를 추상했다. 그는 모든 직업과 계급의 개인들에게 공통적인 속성 속에서, 인간의 본질, 인간 존재의 진정한 구체적 본성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는 하나의 추상을 했다. 즉, 인간 활동의 상호간에 조건 짓는 양식들의 총체로서 대립물을 통해 발전하는, 인류의 실제적인 본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로부터 추상을 했다. [헤겔의 ‘추상적 보편에 관하여’를 보시오]

맑스와 엥엘스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의 구체적인 이론적 개념은, 인간의 본질의 구체적 표현은, 오직 정반대로 대립하는 방식으로, 포이어바흐가 간과한 바로 그러한 차이들과 대립(계급, 직업, 그리고 개별)을 통하여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오직 능력들의 잘 발달되고 명료한 체계로서만, 그리고 자신의 필요에 부합하게 개인들―수학자들, 철학자들, 기업가들, 은행가들, 하인들 등―을 형성하는 노동 분업의 복잡한 체계로서만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 본질에 대한 이론적 정의는, 사회적-인간적 활동의 모든 다양한 표현과 양식을 야기하고 발전시키는 필연성을 드러내는 데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체계, 즉, 인간 본질에 대한 ‘보편적 정의’에 대한 가장 일반적 특성과 관련하여, 혹자는 그 특성이 인간 문화의 전체적인 부가 필연적으로 성장하는,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보편적 토대를 표현해야 한다고 지적해야만 한다. 잘 알다시피, 인간은, 그가 직접 만든 노동 수단을 사용하여 노동하기 시작할 때 동물세계와 분리되게 된다. 노동 도구의 생산은 인간의 생명 활동의, 인간의 존재의 정확히 (논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첫 번째의 그리고 시의적절한 형태이다. [엥엘스의 ‘노동의 역할’을 보시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적인 모든 것의 실제적인 보편적 기초는 생산 수단의 생산이다. 의식과 의지, 언어와 사고, 직립보행과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인간 존재의 다른 다양한 성질들이 발전한 것은 이 기초로부터이다.

만약 누군가 인간 일반에 대한 하나의 보편적 정의, 그 개념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이다’. [프랭클린, ≪자본론≫ 1권을 보시오] 이것은 한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보편적 정의의 특징적인 예시가 될 것이다.

이 정의는, 낡은 논리학의 견지에서 보면, 보편이 되기에는 용납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모짜르트, 라파엘, 뿌슈낀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인간 종족의 의심할 수 없는 대표자들은, 삼단논법을 통하는, 단순한 형식적 추상에 의해서는 이 정의 안에 포함되기 어려울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 도구들을 생산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정의는, 낡은 논리학에 의해서,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순수하게 특수한 정의로서 평가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특수한 유형, 계급 혹은 직업―기계공업 노동자 혹은 상점 일 같은 것―과 같은 정의로 인식될 것이다.

이 의견 차이의 원인은 무엇일까? 문제는 사실상, 이 구체적인 보편적 정의가 이루어지는 기초인 맑스의 논리학이, 비변증법적 논리학의 개념과는 다르게, 보편, 특수, 그리고 개별 사이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상이한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 도구의, 생산 수단의 생산은 정말로 인간 존재의 하나의 실제적이고, 따라서 매우 특수한 형태이다. 동시에 그 점은 그것을 인간의 발전의 나머지의 보편적 기초로서, 인간에게 있는 인간적인 모든 것의 보편적인 유전적 기초로서, 덜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인간 활동의 최초의 보편적 형태로서,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의 특성의 객관적 기초로서, 인간의 유적 존재로서의 가장 단순하고 초보적인 형태로서, 노동 도구들의 생산―그것이 맑스와 엥엘스의 체계 속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보편적 개념 속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전체적인 가장 복잡한 사회적 현실의 객관적으로 보편적인 기초가 되는 노동 도구의 생산은, 1천 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개별적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개별적 행동 속에서 실제로 실현되는 인간의 활동 매우 특수한 형태이다. 노동 도구 생산이라는 사회적 행위에 대한 분석은, 이 행위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고, 언어, 의지, 사고, 미적 감수성 그리고 나아가 집단의 계급으로의 분화, 법률, 정치, 예술, 철학, 국가 등의 출현을 발생시키는 그것들(내적 모순들-역자)의 본성을 드러내야만 한다.

이 개념 속에서, 보편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상들의 풍부함에 대한 정신적 추상으로서 특수와 개별에 형이상학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보편, 특수 그리고 개별의 실제적인 통일로서, 객관적인 사실로서,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구체적인 역사적으로 발전한 체계 속에서 객관적인 사실들로서의 다른 것에, 이 경우에는, 인간의 사회적 및 역사적 현실에 대립한다.

개별에 대한 보편의 관계의 문제는 이 경우에, 감각적으로 주어진 객관적 실재에 대한 정신적 추상의 관계의 문제로서 라기보다는,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의 다른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에 대한 관계의 문제로서, 대상의 그 대상 자체에 대한 내적인 관계로서, 그것의 상이한 측면들의 다른 측면들에 대한 관계로서, 그것 자체 내에서 객관적인 구체성의 내적인 분화의 문제로서 떠오른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그리고 그것의 결과로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표현된 구체성을 이러한 관련 속에서 표현하는 개념들 간의 관계의 문제로서 나타난다.

추상적 보편이 올바르게 혹은 올바르지 않게 추출되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형식적 추상을 통해서, 예외 없이 각각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실들을 직접적으로 포괄하고 있는지를 보아야만 한다. 만약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보편으로서 주어진 관념을 고려하는 데에서 실패한 것이다.
구체적 보편 개념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실들의 감각적으로 주어진 다양성에 대한 관계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하나의 주어진 개념이 대상의 보편적 정의를 드러내는지 혹은 비보편적인 정의를 드러내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의미 있는 분석에 착수해야 한다. 이 경우 우리는, 그것(주어진 개념-역자) 안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특수한 현상이 동시에 보편적인 발생적 기초―이것의 발전으로부터 주어진 구체적 체계의 다른 모든, 특수한 현상들이 그 필연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한다.

노동 도구의 생산 행위는, 인간의 다른 모든 다른 특성들이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회적 현실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개념의 논리적 성격이 보편적인 것인가 비보편적인 것인가를 결정한다. 개념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이 경우 긍정적인 대답을 산출한다.

지식인의 추상적 논리의 입장에서는 동일한 개념에 대한 분석이 부정적인 대답을 산출한다. 인류의 의심할 수 없는 개별적인 대표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 정의에 직접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 낡은 비변증법적 논리학의 입장에서 이 개념은 보편적인 것으로 정의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다. 그러나 맑스의 논리학에서, 이 개념은, 그것이 인간의 다른 모든 특성들의 사실적인 객관적 기초―인간은 이 기초 위에서 사실적으로, 역사적으로 발전했다―를, 인간적인 것의 구체적인 보편적 기초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정으로 보편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 개념의 보편적 성격의 문제는 다른 영역으로, 즉 실제적인 발전의 과정에 대한 연구로 이행한다. 발전에 대한 접근은 그러므로 논리에 대한 접근이 된다. 이 접근은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명제를 결정한다. 그 명제는, 개념이 추상적 보편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레닌의 적절한 정식에 따르자면, 그 자체 속에 특수, 개별, 단일성의 풍부함을 체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체적 보편이 된다.

특수와 개별의 이러한 풍부함은, 이러한 개념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개념 속에 반영되는 객관적 실재 속에서, 그 특성이 보편적 개념의 정의들로서 추상되는 특수한 (그리고 심지어 개별적인) 감각적으로 주어진 실재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현된다.

그리므로 모든 다른 인간적 특성들의 개념들을 자신 속에 포함하는 것은 노동 도구들을 생산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노동 도구를 생산한다는 실제적 사실이 그것들의 기원과 발전의 필연성을 자신 속에 포함하는 것이다. 자신 속에 자본주의의 다른 이론적 정의들의 전체적 다양성을 포함하는 것은 상품 개념 혹은 가치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생산자들 간의 연계의 실제적인 상품 형태가 임금 노동자의 빈곤을 포함하는, 모든 ‘부’가 발전하는 싹이다. 이 점이 맑스가 사람들 간의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관계로서, 단순한 상품교환에 대한 그의 분석 속에서 현대 사회의 모든 모순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이다.

자연히 이러한 종류의 어떤 것도, 상품의 개념 속에서 관찰될 수 없다. ≪자본론≫에 대한 부르주아 비평가들과의 논쟁에서, 맑스는 그의 책의 첫 부분은 상품 개념에 대한 분석을 전혀 담고 있지 않으며, 상품 관계―하나의 실제적인 감각적으로 고려되는 사실, 그리고 머릿속에 존재하는 추상이 아닌―라고 불리는 기초적인 경제적 구체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했다.

가치 범주의 보편성은 그러므로 개념의, 정신적 추상의 성격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출현에서 상품 형태가 하는 객관적 역할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결과로서만 보편성은 또한 이러한 현실을 표현하는 개념과, 고찰 중에 있는 전체적 구조에서 그것(그 개념-역자)의 역할의 논리적 특성으로 입증될 수 있다.

‘가치’라는 단어와 그에 상응하는 보다 정확한 관념은 페티 혹은 스미스 혹은 리카도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다. 사고, 팔고, 교환할 수 있는 어떤 것들, 값이 나가는 모든 것들은 그 시대의 모든 상인들에 의해 가치로서 언급되었다. 정치경제학 이론가들이 전통적인 용법 속에서 ‘가치’로서 언급되는 모든 대상들에 있는 일반적인 요소를 추상함을 통해 개념의 정교화를 시도했다면, 그들은 물론 개념을 결코 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가치’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모든 상인들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만 도출했을 것이다. 그들은 ‘가치’라는 단어가 적용될 수 있는 그러한 현상들의 속성들을 열거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그 단어, 이름의 적용가능성의 한계를 찾는 것 이상으로, 이름에 함축된 의미의 분석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체적인 요점은, 그들이 이 문제를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정식화했고, 그래서 그것에 대한 결론적인 대답이 하나의 개념임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접근의 실제적인 본질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페티로 시작되는 정치경제학의 고전가들은, 자본주의적 유통의 표면에서 관찰되는 모든 개별적인 경우들로부터, 그리고 가치들의 운동의 경우들로서 언급되는 유행하는 용법으로부터 추상을 하는 것에 전혀 빠져들지 않았다. 그들은 사물들의 가치 속성들의 실제적 원천에 대한, 가치의 실체에 대한 문제를 매우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제기했다.

그들의 주된 성취는, 그들이 기본적인 상품교환에 대한 고려를 통해서 가치의 내용을 엄격하게 정의하려고 시도했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이 덕분으로, 그들은 가치의 실체가 사회적 노동에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가치 개념을 끌어내는 작업 속에서, 그들은 왜, 어떤 객관적 기초 위에서, 어떤 구체적 실체 속에서, 하나의 사물이 다른 것과 실제로 등치되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한 상품의 다른 상품과의 교환을 실제적으로 면밀하게 연구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들의 작동의 논리적 본질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은 가치 운동의 하나의 특수한 경우, 즉 단순한 상품교환의 사실을 실제적으로 고려했다. 이 특수한 경우에 대한 분석은 가치 개념을 산출했다.

최초의 영국 경제학자였던, 윌리엄 페티는 이렇게 추론함으로써 가치의 개념을 획득하였다: ‘만약 한 사람이 페루 동부에서 런던으로 1온스의 은을 가져올 수 있다면, 같은 시간에 그는 1부셸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고, 그러면 하나는 다른 것의 자연가격이다 … ’ [맑스의 ≪잉여가치학설사≫ IV]

이 주장에는 ‘가치’라는 단어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주목하자―페티는 ‘자연가격’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정확히 하나의 상품 속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의 체현물로서 가치의 개념이다.

하나의 개념은, 단순히 하나의 용어 속에 표현되는 일반적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개념인 한에서, 추상적인 보편이 아니라 구체적인 보편, 즉 하나의 실재를 언제나 표현한다. 그 실재는, 다른 특수한 현상들 중의 하나의 특수한 현상이면서, 동시에 진정으로 보편적인,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요소이며, 다른 모든 특수한 현상들 속에서 하나의 ‘세포’이다. [맑스, ≪자본론≫ 1장 3절]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고전적 대표자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시행착오를 통해서, 가치를 정의하는 이 올바른 길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고 양식의 진정한 중요성을 잘 깨닫지는 못했다. 그들의 사고가 의식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로크의 철학은 그들에게 보편적 개념을 정의하는 문제의 해답을 주지 못했다. 이 점은, 논리적 관점에서 꽤 유용한 수많은 역설로 그리고 수많은 근본적인 어려움들로 그들을 이끌었는데, 이것들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맑스의 분석 속에서만 명료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다른 모든 범주들을 위한 보편적 기초로서 가치에 대한 맑스적 분석과 부르주아 정치경제학 속에서 획득된 종류의 분석 간의 주요한 차이는, 맑스가 화폐를 연관시키지 않으면서 한 상품의 다른 상품과의 직접적인 교환에 대한 구체적 고려의 기초 위에서 ‘가치 일반’, ‘가치 자체’에 대한 과학적 정의를 형성했다는 사실에 정확히 놓여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맑스는 이 기초 위에서 발전한 다른 모든 종류의 가치(잉여가치, 이윤, 지대, 이자 등)로부터 엄격한 추상을 하였다. 리카도의 주요한 오류는, 맑스에 따르면, ‘가치 자체’를 고려함에 있어서 ‘이윤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그의 무능에 있었다. 그래서 그의 추상은 불완전하고, 불충분하고, ‘형식적’으로 되었다. 맑스는, ‘가치 일반’에 대한 정의에서, 한 가지 종류의 가치, 즉, 역사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즉, 본질에서 그리고 시간에 있어서) 기초적이며 최초의 것으로 입증되는 것으로 밝혀진 가치의 종류만을 분석하고 그를 통하여 드러난 그러한 정의들만을 포함한다. 그의 분석의 산물은 가치 일반에 대한 진정으로 보편적인 정의들이며, 화폐와 이윤과 관련해서도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정의의 의미를 지닌 정의들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들은 다른 모든 특수한 종류의 가치 표현의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정의들이다.

그것은 가장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개념의 가장 빛나는 예시이다. 그것의 정의는, 다른 모든 특수한 범주들의 기본적이고 ‘발생적인’ 본질을 구성하는 실제적인 (형식적이 아니라) 일반적 계기를 표현한다. 이 진정으로 보편적인 정의들은, 화폐에서, 이윤에서, 지대에서 더욱 재생되는데, 이 모든 범주들에 공통적인 정의들을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맑스가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상품, 화폐, 이윤, 그리고 지대의 특수한 특징들로부터의 단순한 형식적 추상을 통해서 이러한 정의들을 결코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가치의 보편적 정의는, ≪자본론≫에서의, 단순한 상품교환의 특수한 특징, 이들 특수한 특징을 드러내는 법칙에 대한 이론적 표현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 그것의 이유는, 단순한 상품형태의 특수한 특징이, 전체 체계의 진정으로 보편적인 토대, 그것의 ‘기초적인 세포’, ‘가치 일반’의 표현의 최초의 실제적 형태를 구성한다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이러한 특수한 예시를 고려하면, 맑스는, 자신의 분석을 통해, ‘추상의 힘’에 의해, 가치의 보편적 정의를 그것(특수한 예시-역자) 속에서 드러낸다. 처음 보면 개별적 예시에 지나지 않는 린넨과 코트의 교환에 대한 분석은, 그 결론으로서 개별적 정의가 아닌 보편적 정의를 산출한다. 개별에서 보편으로의 상승은 형식적 추상의 단순한 행위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한눈에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을 이윤, 지대, 그리고 다른 종류의 가치와 구별하게 하는 기초적인 상품 형태의 특수한 속성은 비본질적인 어떤 것으로서 무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속성들에 대한 이론적 분석은 보편적 개념의 형성을 가져온다. 그 점이 개별을 보편으로 상승시키는 변증법적 방식이다.

낡은 비변증법적 논리학은 여기서 다른 접근을 권할 것이다. 그것의 원칙들에 따라서, ‘가치 일반’에 대한 정의는, 상품, 이윤, 지대, 이자 등의 공통적 특징들을 확인하는 것을 통해, 단순한 상품교환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가치의 특수한 형태로부터 추상을 통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가치의 상품 형태의 특수한 특징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무시될 것이다. 보편은 특수로부터 고립되어 취해질 것이다.

맑스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보편이 특수와 개별을 통해서만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한, 그것은 오직 특수로부터의 추상의 행위보다는 특수에 대한 철저한 분석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보편은 특수와 개별의 이론적 표현이며, 그것들의 존재의 법칙의 표현이다. 자연에서 보편의 현실성은, 단지 현상들의 몇몇 측면에서의 형식적 유사성―그것들을 하나의 부류에 포함시키기 위한 기초로서 기여하는―이라기보다는, 특수와 개별의 존재의 법칙이다.

상품 형태, 화폐, 이윤, 그리고 다른 모든 범주들의 실제적인, 현실적인 일반적인 내용을 도출하도록 하는 것은 맑스적 변증법이다. 이 일반적 내용은 단순한 형식적 추상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날 수 없다. 그것(형식적 추상-역자)은 오직 현상들의 최초의 분류에서만 유용하다. 그것은 더욱 심각한 이론적 과제―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이론적 정의들,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 것―가 떠오를 때 불충분한 것으로 입증된다. 더구나 그것은 여기서 자신의 영역 너머에 적용되면서 과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더 심오한 방법이 여기에서 필요하다.

구체적 보편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변증법적 개념에 매우 가깝게 다가갔던 헤겔은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변증법을 배반했고, 그것은 그의 개념의 관념론적 성격에 기인한다.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에 대한 그의 개념 설명에서, 헤겔은 잘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기하학 형태에 대한 주장을 언급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형상들 중에, 오직 삼각형과 다른 명백한 형상들”, 직사각형, 평행사변형 등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형상이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형상, 즉 공통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며, 정신의 텅 빈 것이다. 그것은 오직 추상일 뿐이다. “반면에, 삼각형은 최초의 형상이자, 실제적이고, 일반적인 것이며 그것은 또한 직사각형에서도 나타난다, 등등.”―가장 단순한 정의로 축소된 형상. 한편으로 삼각형은 하나의 특수한 것으로서 직사각형, 오각형 등과 나란히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그리고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의 위대함이 있다―그것(삼각형-역자)은 실제적인 형상, 정말로 일반적인 형상이다.’ [헤겔, ≪철학사 강의≫]

 

처음 보면, 헤겔은 구체적 보편 개념과 공허한 추상의 주요한 차이를, 그것(구체적 보편 개념-역자)이 직접적으로 객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경험적으로 주어진 구체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헤겔은 자주 보편, 특수, 그리고 개별 간의 관계가 수학적 (기하학을 포함하여) 이미지와 그것들의 관계들과 견줄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한다. 후자(수학적 이미지-역자)는, 그의 설명에 따르면, 단지 개념에 대한 어떤 비유일 뿐이다; 그것들은 너무 많이 “감각”의 짐을 지고 있다. 그가 개념으로서 해석하는 진정한 보편은 ‘감각적인 사물’로부터, ‘감각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그는 유물론자들을 이 점에서 공격했는데, 보편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본질적으로 보편을 제거하고, 그것을 ‘다른 특수의 예시들과 나란히 있는 특수’로 변형시키기 때문이었다.

특수와 개별의 풍부함을 포함한 보편, 이러한 보편은, 헤겔에 따르면, ‘외적 실재’의 영역에서가 결코 아니라, 오직 개념으로서만, 오직 순수 사고의 에테르에서만 존재한다. 이 점은, 정확히 말하자면, 헤겔이 유물론이 철학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이유이다(왜냐하면 철학은 보편의 학문이며, 그리고 보편은 사고이고 사고 이외의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생명체로서 인간의 정의는 헤겔의 논리학에서는, 그것에 선행하는 논리학에서처럼, 보편적 정의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헤겔의 관점에서, 그것은 단지 인간에 대한 특수한 정의일 뿐이며, 헤겔의 보편적인 ‘사고하는’ 자연이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특수한 형태일 뿐이다.

보편에 대한 관념론적 개념, 보편을 오직 개념으로서만 해석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헤겔을 그것의 형이상학적 해석과 동일한 결과로 이끈다. 만약 헤겔의 논리학이 그것의 원래의 교조적인 형태로 맑스의 ≪자본론≫에 대한 분석에 적용되었다면, 맑스의 전체적인 추론 과정은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가치에 대한 정의들은, 맑스가 그것들을 획득했던 방식으로 획득될 수 없다. 헤겔주의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자본론≫의 첫 번째 부분에 대해서, 가치의 한 특수한 형태에 대한 정의들이, 그것들이 보편적 정의가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가치의 보편적 정의로 취해졌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가치의 보편적 정의를 추론적인 의지의 정의들로부터 연역할 것(그것들이 헤겔의 ≪법철학≫에서 연역되는 방식)을 추천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헤겔의 논리학이, 낡은 형이상학적 논리학에 대한 그것의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비판 없이는, 관념론의 모든 흔적의 근본적인 제거 없이는, 유물론에 의해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맑스에게서 가치 범주는 헤겔의 ‘순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단순한 형식적인 추상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맑스의 가치 범주-역자)은 명백히 ‘감각의 짐을 지고 있고’, 특수의 이론적 표현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맑스가 말하기를, 가치는 ‘감각적-초감각적’ 성격을 지니는데,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있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더욱이 맑스가 강조하듯이, 가치의 단순한 (보편적) 형태는, 처음부터 모든 시기의 경제적 관계들의 보편적 형태가 결코 아니다. 오직 자본주의의 발전만이 그것(가치의 단순한 형태-역자)을 그러한 형태(보편적 형태-역자)로 전환시켰다.

직접적인 상품교환은, 이것을 고려하는 가운데 가치의 보편적 정의가 획득될 수도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가치가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화폐, 잉여가치, 그리고 가치의 다른 특수한 발달된 형태들의 출현 이전에 현실화된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하에서 진정으로 일반적인 것이 되는 경제적 관계들의 형태가, 매우 특수한 현상으로서 혹은 심지어 우연적인 개별적 현상으로서 그것(자본주의 하에서 일반적으로 되는 것-역자) 이전에 실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에서는, 나중에 보편적인 것이 되는 하나의 현상이 개별적인, 특수한, 특정한 현상으로서, 법칙으로부터 예외적인 것으로서 발생하여 출현한다는 것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다른 어떤 다른 방식으로도 나타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는 상당히 신비한 형태를 띨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새로운 노동의 개선도, 생산에서 인간의 행위의 모든 새로운 양식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승인되기 전에, 이전에 받아들여지고 법률화된 규범으로부터의 어떤 일탈로서 최초로 나타난다.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노동 속에서 규율로부터의 개별적인 예외로서 출현하는, 새로운 형태는 이윽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적절한 시기에 새로운 보편적인 규범이 된다. 새로운 규범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실제적으로 보편적인 형태가 될 수 없을 것이며, 단지 환상 속에서, 희망적 사고 속에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실제적인 보편을 표현하는 개념은, 그 속에 개별과 특수의 보편으로의 이행의 변증법의 개념을 포함하고, 현실에서 인간의 머리 밖에서 발전의 보편적 형태를 구성하는 개별과 특수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레닌은 헤겔 논리학에 대한 개요와 노트에서, 변증법의 중요한 지점들 중 하나―지성에 의한 추상적 보편의 추출물에 대립하는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보편 개념―를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특수와 개별에 대한 보편의 관계는 변증법에서 ‘아름다운 정식’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레닌은 제기하고 있다:

 

“단지 추상적인 보편이 아니라, 그 속에 특수의 부를 포함하는 보편.”

 

‘≪자본론≫을 참고할 것,’ 레닌은 가장자리에 주를 달고 있는데, 그리고 이어나간다:

 

‘하나의 아름다운 정식: “단지 추상적 보편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특수, 개별, 단일한 것의 부를 포함하는 보편” (특수와 단일한 것의 모든 부!)!! 대단히 훌륭하다!’ [레닌, ≪헤겔 논리학 개요≫]

 

개념 속에서 표현되는 구체적 보편은 물론, 그것이 모든 특수한 예시들을 포괄하고 일반적 명칭으로서 그것들에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자신 속에서 이 모든 부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헤겔이 반대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며, 그 점은 레닌이 그(헤겔-역자)의 입장에 대해 승인하는 점이다. 구체적 보편 개념은 두 가지 의미에서 구체적인 정의들 속에 ‘특수들의 부’를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다.

첫째, 구체적 보편은 그 정의 속에, 하나의 단일한 것의 특수한 구체적 내용 (내적인 법칙 지배적 구조), 고찰 중에 있는 대상의 발전의 매우 특정한 형태를 표현한다. 그것은 이 형태, 그것의 구조와 그것의 특수성에 대한 정의들의 ‘전체적 부’를 자신 속에 포함한다. 둘째, 그것(구체적 보편-역자)은 그 정의 속에, 전체로서의 대상의 발전의 어떤 자의적으로 선택된 형태를 표현하지 않으며, 그 위에서 다른 구성물의 ‘전체적 부’가 성장하는, 실제적인 보편적 기초 혹은 토대를 구성하는 형태만을 표현한다.

그러한 개념의 가장 놀라운 예시는 ≪자본론≫에서의 가치 범주이다. 이 개념은 자본주의 세계의 ‘가장 기초적인 경제적 구체성’―화폐를 전혀 연루시키지 않는, 한 상품의 다른 상품과의 직접적 교환―에 대한 철저한 분석의 결과이다. 이 형태의 특수성은, ‘세포’ 혹은 ‘싹’과 같이,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더욱 복잡하고 더욱 발전된 형태들의 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이 왜 ‘이 매우 단순한 현상 속에서(부르주아 사회의 이 “세포”속에서), 분석이 현대사회의 모든 모순들(혹은 모든 모순들의 근원)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레닌의 ≪헤겔 논리학 개요≫] 그것이 왜 가치 범주의 정의 속에서 표현되는 이 분석의 결과와 생산물이, 자본주의 세계 전체의 이론적 개념으로의 열쇠를 제공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이 범주의, 단순한 추상들(‘가구’, ‘용기’ 혹은 ‘달콤함’과 같은)과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것이다. 후자(단순한 추상들-역자)는 물론, 그 어떤 ‘특수와 개별의 부’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이 부는 일반적인 이름들로 그것들과 단지 외면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을 뿐이다. 이 개념들의 구체적 정의는 어떤 방식으로도 이러한 부를 표현하지 않는다. 가구 일반의 개념은 단지 탁자가 의자, 찬장, 등과 공통적으로 가지는 일반적 요소를 기록할 뿐이다. 그것(가구 일반의 개념-역자)은 의자, 테이블, 찬장의 특수한 특징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정의는 단일한 종을 표현하지 않는다. 반면에, 가치 범주는 그 특수성이 동시에 유(genus)가 되는 그러한 종의 완전한 표현을 자체 속에 포함한다.

그것은, 물론 기초적이고 ‘지성적인’ 일반적 추상들의 중요성과 인식적 역할을 낮추지 않는다. 그것들의 역할은 크다: 어떤 구체적 보편 개념도 그것들 없이는 가능할 수 없다. 그것들은 복잡한 과학적 개념의 출현의 전제와 조건을 구성한다. 구체적 보편 개념 또한 하나의 추상이다―그것이 그것의 정의 속에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것, 독특한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전형적인 현상의 본질을,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일반적이고 백만 번 반복되는 현상의 본질을, 보편적 법칙의 표현이 되는 개별적 사례의 본질을 표현한다. 단순한 가치 형태의 분석에서, 맑스는 물론, 코트나 린넨의 개별적 특징들에 관심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트와 린넨의 관계는 분석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취해졌는데, 그것이 단순한 상품 교환의 전형적인(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일반적인) 경우, 화폐 없는 교환의 전형적인 특성에 조응하는 경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일반적 분석에서, 실제적인 조건들은 그것들의 개념에 조응하거나, 혹은 같은 말이지만, 실제적인 조건들은, 그것들이 전형적으로 그것들 자신의 일반적인 경우가 되는 정도로만 대표된다는 것이 대개 언제나 전제된다.’ [≪자본론≫ 3권]

 

물론, 구체적 보편 개념은 이러한 이유로 단순한 지적인 추상들과 유사하다. 그것들(단순한 지적인 추상-역자)이 항상 개별적 경우들, 사물들, 현상들의 일반적인 성질들을 표현하고, 또 ‘개별에서 보편으로의 상승’의 산물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과학적인 개념과 어떤 기초적인 추상의 관계의 유사성을 가리키는 이러한 계기 혹은 측면은 틀림없이 항상 개념 속에 나타나며 개념 속에서 발견하기 쉽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계기는 과학적 개념의 특수한 특징을 주지 않으며, 그것의(과학적 개념의-역자) 특수성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치와 흰색, 그리고 물질과 가구와 같은 추상들을 단순히 등치시키는 논리적 이론들―두 종류가, 단일한 개별적인 현상보다 많은 개별적인 현상들을 똑같이 언급하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똑같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다 라는 것을 근거로 하는―이 전혀 불합리한 어떤 것을 주장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단순한 추상들을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복잡한 과학적 개념을 위해서는 매우 부적당하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과학적 개념의 본질로 취해진다면, 이러한 관점은 오류가 되는데, 왜냐하면 예를 들어, ‘가치는 노동생산물이다’라는 명제가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하나의 현상이 너무 심하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매우 잘못된 것이 된다. 물론, 인간은 하나의 동물이고, 과학적 개념은 하나의 추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의 부적절함은 그것의 극단적 추상성에 있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보편적 개념이 고립된 경우들, 개별적 사물들, 현상들, 사건들의 ‘일반적 본질’, ‘보통의 유형’을 표현하는 추상이라는 명제의 진리성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변증법적 논리학-역자)은 더 나아가고 더 깊어지며, 이 점에 그것(변증법적 논리학-역자)의 개념과 낡은 논리학의 개념의 차이가 놓여 있다. 보편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은 개별의 보편으로의 이행과 보편의 개별로의 이행, 어떤 실제적인 발전에서도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이행을 가정한다.

그러나 이 입장이 사물에 대한, 개념 속에서 표현되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전제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점이, 로크와 엘베시우스 심지어 헤겔도 구체에 대한 추상의 관계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을 주지 못한 이유이다. 헤겔은 그러한 해결을 제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발전의 사상, 역사적 접근은 사고와 관련하여서만 그의 체계 속에서 완전한 실천으로 되었고 사고의 주체 문제를 구성하는 객관적 실재와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객관적 실재는 헤겔의 관점에서, 그것(객관적 실재-역자)이 오직 사고, 정신의 발전의 외적인 형태가 되는 한에서, 정신이 그것(객관적 실재-역자)을 내부에서 감화시키고 북돋우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고 심지어 발전시키는 한에서만, 발전한다. 객관적인 감각적 실재는 그 자신의 내재적인 자연발생적인 운동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헤겔의 눈에는 그것(객관적 실재-역자)은 진정으로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객관적 실재-역자)의 서로 다른 측면들 간의 살아있는 변증법적인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은 사실상 이러한 실재 자체가 아니라 그것(객관적 실재-역자)에 스며드는 정신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헤겔에게는 오직 개념만이, 다른 것이 아닌 오직 개념만이, 개별적인 현상들의 관념적인 상호 연관의 관념적인 원리로서 구체적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개별적인 사물들과 현상들은 단지 추상적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관념론뿐만 아니라 인식에 대한, 감각적 자료의 이해과정에 대한 변증법적 견해도 포함한다. 헤겔은 개별적 사물, 현상 혹은 사실을 추상이라고 불렀는데, 이 용법은 매우 근거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의식이 개별적 사물들에 대해, 그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상호 연관들의 구체적 사슬의 전체를 파악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식한다면, 의식이 그 사물을 직접적인 구체적 관찰을 통해 인식하였고, 감각적으로 만질 수 있는 정도의 명료함으로 지각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사물을 극히 추상적인 방식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의식이 하나의 사물을, 개별적 사물들, 사실들, 현상들과 같은 다른 모든 것과의 상호 연관 속에서 인식한다면, 만약 의식이 개별을 그것의 보편적 상호 연관을 통해서 파악했다면, 그러면 의식은 처음으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 사물에 대한 관념이 직접적인 직관, 접촉 혹은 냄새를 통하지 않고 다른 개별과의 언어 소통을 통해 형성되고, 따라서 직접적인 감각적 특징을 결여하고 있을 지라도.

다른 말로 하면, 헤겔에서는 이미 추상성과 구체성이, 지식이 개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형태의 직접적인 심리적 성격의 의미를 잃게 되고, 의식의 내용의, 지식의 논리적 성격이 된다.

만약 개별적 사물이 실제적으로 출현하고, 존재하며, 발전하는 보편적인 구체적 상호 연관을 통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의 진정한 본성을 구성하는 상호 연관의 구체적 체계를 통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직 추상적 지식과 의식이 획득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만약, 다른 한편으로, 개별적 사물(현상, 사실, 대상, 사건)이, 완전히 일관된 체계를 형성하는 다른 사물과의 객관적 연계 속에서 이해된다면, 그것이 단어의 가장 철저하고 풍부한 의미에서 구체적으로 이해되고, 지각되고, 인식되고, 파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이상학적 유물론자의 눈에는, 오직 감각적으로 인식된 개별만이 구체적이고, 반면에 보편은 추상과 동의어다.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에게 사물들은 매우 다른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구체성은 무엇보다도, 정확히 수많은 개별적 현상들의 보편적인 객관적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 ‘다양성 속의 통일’이며, 추상적 동일성, 추상적인 죽은 통일이 아니라 구별되고 상호 대립하는 것들의 통일이다. 기껏해야 후자(추상적 동일성-역자)는 사물 속에서 내적인 연계들, 현상들의 잠재적 통일의 존재의 가능성을 암시하거나 나타낼 뿐이지만, 그것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며 필연적인 것도 전혀 아니다: 당구공과 시리우스(큰개자리의 항성-역자)는 그것들의 기하학적 형태에서 동일하지만, 물론 그것(추상적 동일성-역자)은 여기서 어떤 실제적인 상호작용도 전혀 찾으려 하지 않는다.

 

 

대립물들의 통일로서의 구체적 통일

 

우리는 그러므로 개념적 사고는 사물들의 살아있는 실제적인 통일을 드러내는 것을, 즉 추상적 통일, 죽은 동일성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구체적 연관을 드러내는 것을 겨냥한다는 것을 정립했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범주에 대한 분석은, 두 개별적 사물의 단순한 동일성, 단순한 일치는 그것들의 상호 연관의 원리의 표현이 전혀 아님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만일 한 대상이 다른 대상에게서 그것의 보완물, 즉 그것이 결여하고 있는 어떤 것을 찾아낸다면, 상호작용은 강력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물론, ‘동일성’은 상호 연관의 고리가 수립된다는 것의 전제 혹은 조건으로 가정된다. 하지만 바로 상호 연관의 본질 자체는 동일성을 통해 실현되지 않는다. 두 개의 톱니바퀴가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톱니바퀴의 이가 반대편의 같은 종류의 이와 맞물리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편이 드라이브 톱니바퀴의 두 이 사이의 공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본래 명백히 동일한, 두 화학적 미립자가 하나의 분자로 ‘고정’되었을 때, 그것들 각각의 구조는 어떤 변화를 겪는다. 그 분자 속에 실제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두 미립자 각각은 다른 미립자 속에 자신의 보완물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이 가장 외곽에 있는 껍질의 전자를 교환하는 순간 마다, 이 상호 교환은 그것들을 단일한 전체로 결속시킨다. 그것들(미립자-역자) 각각은 상대방의 중력에 이끌리게 되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주어진 순간에 그것의 전자(혹은 전자들)는 다른 미립자 내부에 있게 되기 때문인데, 그 미립자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로 그 전자를 결여하고 있다. 그러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지속적으로 소멸하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결합 혹은 상호작용도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이 경우에 우리가 가지는 것은 다소간에 우연적인 외적인 접촉이다.

만약 혹자가 현실에서 완전히 불가능한 하나의 가정―모든 특질이 절대적으로 동일한 두 현상―을 도입한다면, 그것들 사이의 강력한 끈 혹은 결합 혹은 상호작용을 상상하거나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이 과정과 연관된 두 개의 (혹은 더 많은) 발전하는 현상 사이의 연계를 다룰 때, 이 지점을 고려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물론 두 개의 완벽히 동일한 현상은 나란히 공존할지도 모르고 심지어 어떤 접촉을 할 수도 있다. 이 접촉은 그러나, 그것이 그것들을 어떤 통일된 전체 내에서의 상이하고 서로 대립하는 계기들로 변형시킬, 그것들 각각 안에서의 내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전까지는 전혀 새로운 것을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각각이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며, 이웃 가족도 동일한 것을 생산하는 가부장적 가족 생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강한 고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노동의 분업, 노동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가족생계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는 곳에서, 노동생산물의 상호 교환의 가능성 또한 최초로 발생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끈은 차이를 공고화하고 발전시키며, 그와 함께, 상호 연관을 발전시킨다. 한때 동일했던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무관심하게 공존하는) 가계들 사이에서 차이의 발전은, 그들 사이의 상호적인 연계들의 발전이며, 그것은 단일한 경제적 전체, 불가피한 생산 유기체의 구별되고 대립하는 요소들로의 이행의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노동 분업의 형태의 발전은 동시에 물질적 생활의 생산에서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의 형태의 발전이다. 노동 분업이 없는 곳에서는, 심지어 그 기본적인 형태도 없다면,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그곳에는 사회적 유대가 아니라 오직 생물학적으로 묶인 무리가 있을 뿐이다. 노동 분업은 적대적인 계급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반면에 그것은 동지적 협동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노동 분업으로 남아 있으며, 결코 노동의 모든 형태의 ‘동일화’일 수는 없다: 공산주의는 정신적 및 물질적 생산에서 이 능력들의 평준화보다는 각 개별의 능력의 최대한의 발전을 전제로 한다. 각각의 개별은 여기에서 개념의 완전하고 고귀한 의미의 개인이 된다. 왜냐하면 그와 상호작용하는 다른 모든 개별이, 똑같이 정형화되고, 규격화되고, 추상적으로 동일한 행위 혹은 활동을 수행하는 존재라기보다는, 독특한 창조적인 개성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한 작업은 일반적으로 인간 활동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고 기계의 손에 맡겨진다. 그리고 정확히 이러한 이유로 여기에서 각 개별은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의 세계에서보다 훨씬 더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개인과 개인을 결속시키는 사회적 연계는, 상품생산에서의 연계보다 여기에서 훨씬 더 직접적이고 포괄적이고 강하다.

그 점은, 실제적인 개별적 것들 간의 살아있는, 사실적인, 객관적 끈과 상호작용의 표현으로서 이해되는 구체성이, 고찰 중인 것들의 추상적 동일성, 공허한 평등, 혹은 단순한 유사성으로서 표현될 수 없는 이유이다. 자연, 사회, 혹은 의식에서의 실제적인 상호작용의 어떤 사례도, 아무리 기초적이라고 할지라도, 단순한 동일성이 아니라 구분되는 것의 동일성, 대립물들의 통일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상호작용은, 하나의 대상이 자신의 주어진 특수한 본성을 오직 다른 대상과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만 실현하며, 이 관계 밖에서 ‘이것 하나’로서, 하나의 특수하게 규정된 대상으로서, 이와 같은 것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상정한다.

사고에서 개별을 표현하기 위해, 개별의 다른 예시들과의 유기적 연계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연관의 구체적 본질 속에서 개별을 이해하기 위해, 혹자는 벌거벗은 추상을, 분리되어 취해진 그것들 모두에서 추상적으로 공통적인 동일한 특징을 찾아서는 안 된다.

이제 더 복잡하고 동시에 더 충격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예를 들면,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실제적이고, 살아있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끈은, 이 개별적인 경제적 등장인물 각각이 상대와 비교할 때 가지는 ‘공통적 요소’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 모두 사람이고, 그들 모두 음식과 옷 등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들 모두 사고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일할 수 있다는 사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들은 심지어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로서의 그들의 끈의 필수적인 전제를 구성하기조차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로서의 그들 관계의 본질 자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들의 실제적 끈은 그들 각각이 상대방이 결여하고 있는 경제적 특질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의 경제적 정의는 정반대로 대립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 중 하나가 다른 하나가 결여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는 다른 하나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은 그들의 경제적 정의들의 정반대의 대립 때문에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를 어떤 것(‘그들의 유사성’)보다 더 강하게 그들을 묶어주는 동일한 관계의 필연적인 극들로 그들을 만들어주는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개별적인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인 이유는, 다른 것이 모든 특질에서 그것과 정반대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 점이, 왜 그것이 다른 것이 없이, 그 자신의 대립물과의 연관 밖에서 존재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자본가가 자본가로, 그리고 임금 노동자가 임금 노동자로 남아 있는 한, 그들 각각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 속에서 정반대로 대립하는 경제적 특징을 재생산한다. 그들 중 하나는 임금노동자로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다른 것이 전자(임금노동자-역자)와 마주하는 자본가이기 때문이며, 두 경제적 인물은 정반대로 대립하는 특질을 가지고 때문이다.

그 점은, 주어진 구체적 관계 내부에서 그들의 끈의 본질이 양자에게 추상적으로 공통적인 정의의 완전한 부재 자체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명의 자본가는, 이 끈 속에서, 한 명의 임금 노동자가 가지는 어떤 특질도 가질 수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점은 그들 중 아무도 상대 속에 동시적으로 내재하는, 양자에 공통적인 경제적 정의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구체적인 경제적 끈 속에서 결여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공통성이다.

맑스가 혹평한 진부한 변호론자가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상호적인 연계의 기초를, 그들의 경제적 특성들의 공통성 속에서 찾을 것을 주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맑스의 견해에 따르면, 두 개의 혹은 그 이상의 상호작용하는 개별자, 특수자들(현상들, 과정들, 사람들, 등등)의 실제적으로 구체적인 통일은, 상호간에 배타적인 대립물들의 통일로서 언제나 나타난다. 그들 사이에서, 이 구체적인 상호작용의 측면들 사이에서 추상적으로 동일한 혹은 추상적으로 일반적인 것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이 경우, 구체적으로 일반적인 것으로서 공통적인 것은, 정반대의, 상호보완적인, 그리고 상호 전제하는 대립물로서의 상호작용의 요소들 간의 상호적인 끈 자체이다. 각각의 구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측면들이 무엇인지는, 주어진 구체적 연계의 맥락 속에서, 오직 그 자신의 대립물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공통적’이라는 용어는 여기에서 ‘동일성’ 혹은 ‘같음’과 의미를 같이하지 않는다. 하지만 변증법적 논리학에 특징적인 이 용법은 공통의 용법에 대해 결코 이질적이지 않으며 ‘공통적’이라는 단어에 존재하는 의미의 뉘앙스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언어에 있어서 결합된 혹은 집단적인 소유의 한 대상은 ‘공통적’(공유-역자)이라고 불린다: 예를 들면, 누군가는 ‘공통의 토지’(공유지-역자), ‘공통의 조상’ 등으로 말한다. 변증법적 접근은 항상 의미의 어원적 뉘앙스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 ‘공통적’은 상이한 상호 연관된 대상들, 사람들 등의 동일한 특징과 내용에서 결코 부합하지 않는 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토지를 결합하여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구체적 끈의 본질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동일한 특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그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그들 각각이 그들의 밖에서 가지고 있고 그들과 마주하고 있는 특수한 대상이며, 그것에 대한 관계를 통해 그들 사이의 관계가 수립되는 그러한 대상이다. 그들의 상호적인 끈의 본질은, 그러므로 그들이 그 내부에서 가장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들의 더 일반적인 체계, 상호작용의 체계에 의해 주어진다.

독자는 그가 읽는 책과 어떤 공통성을 가지며, 무엇이 그들의 상호의존적 관계의 본질인가? 확실히 그 공통성은 독자와 책이 3차원적이며, 그 둘 모두가 공간적으로 정의된 대상에 속하며, 둘 다 동일한 원자, 분자, 화학적 원소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에 있지 않다. 그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둘의 동일한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이다: 독자가 독자인 이유는 그가, 그것 없이는 독자가 되지 않는 조건으로서, 그가 읽는 것과, 즉 독자의 구체적 대립물과 마주한다는 것 때문이다.

어떤 것은 이렇게 존재한다. 즉, 주어진 구체적으로 정의된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과 구체적으로 상이한 어떤 것―그 정의가 전자의 대상의 정의와 정반대로 대립하는 대상―과 마주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오직 그러한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하나에 대한 정의는 다른 정의의 역전된 정의이다. 그 점은 대립물들의 구체적 통일, 구체적 공통성이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유일한 방식이다.

구체적 연계들(구체적 공통성, 구체적 통일)의 본질은,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의 공통성의 각각의 요소들에 추상적으로 내재하는 동일한 특질들을 찾는 것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수단에 의해 결정된다.

이 경우 분석은, 그 내부에서 두 개의 요소들, 대상들, 현상들 등이 출현하는 조건들의 체계로, 동시적으로 양자가 상호 간에 서로를 배제하고 상호 간에 서로를 전제하는 조건들의 체계로 향하게 된다. 그 상호 관계들이 문제가 되는 상호작용 체계, 어떤 주어진 구체적인 공통성을 존재하게 하는 대립물을 성립시킨다는 것은 그 과제의 해결을 의미한다. 변증법적 공통성의 분석은, 그러므로, 각각이 상대가 가지고 있지 않은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각각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두 요소의 상호작용(예를 들면,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혹은 독자와 책)을 창출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임이 입증된다.

이 경우, 상호작용하는 두 대상의 각각에서, 주어진, 독특하게 특수한, 구체적인 상호작용의 양식의 하나의 요소로서 그것에 고유한 하나의 정의가 발견될 것이다. 오직 이 경우에서만, 두 개의 연관된 대상들의 각각에서, 대상을 주어진 구체적 전체의 요소로 만드는 그 측면이 발견될(그리고 추상을 통하여 추출될) 것이다.

구체적 동일성, 대립물들의 동일성―이것들은 변증법적 정식이다: 상이한 것들의 동일성, 상호 배제하는 그리고 따라서 상호 전제하는 정의들의 구체적 통일. 중요한 것은 하나의 요소로서, 보편적인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내용의 개별적 표현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교환 관계의 본질, 실체, 하나의 집과 다섯 개의 침대의 동등성의 신비를 발견하는 것을 가로 막은 어려움을 설명한다. 여기서 고대의 위대한 변증법론자는, 역시 그 추상적 동일성보다는 두 사물의 내적인 통일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후자(추상적 동일성-역자)를 찾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반면, 전자(내적인 통일-역자)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나의 집과 하나의 침대 사이의 교환관계를 고려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에 풀 수 없는 과제에 부딪혔는데, 그것은 그가 둘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논리학에 정통하지 않은 한 두뇌는 집과 침대 모두에 공통적인 추상적 특징들을 찾으려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집과 하나의 침대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한 쓸 수 있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었다. 집과 침대 모두는 똑같이 일상 생활의 대상들이며, 사람의 가정환경의 부분이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사물들이고, 둘 모두 무게, 형태, 강도(强度) 등 무한하게 전개되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집과 침대 모두는 똑같이 인간 (혹은 노예)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그 둘은 인간 노동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의를 돌리려 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려움은, 집과 침대 모두에 공통적인 추상적인 일반적 속성을 찾는 것에, 혹은 양자를 ‘공통의 유(genus)’ 안에 포함시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주관의 의도, 추상하는 두뇌, 그리고 사람들이 실용적 편의의 목적을 위해 만든 순수하게 인공적 장치와 관계없이 그들 양자가 동등하게 되는 실제적인 실체(내용 substance)를 드러내는 데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나아간 연구를 포기하였는데, 그가 하나의 집과 하나의 침대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어떤 것을 찾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상호간의 교환이라는 사실, 두 개의 상이한 대상들이 자신의 실현 혹은 표현을 위해 서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하나의 전체를 그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개의 그러한 상이한 사물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의 논리적 능력의 약점 혹은 관찰의 결여보다는 오히려 그의 사고의 변증법적 힘과 심오함을 드러내준다. 추상적 일반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그는 사실의 더 깊은 뿌리를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혹자가 그렇게 원할 수도 있지만, 그 둘 모두가 포함될지도 모르는 근사성(近似性)으로서의 유(proximate genus)에 단순히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의 학적 전통이 그를 구속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개념을 갖게 해주는 실제적인 유(real genus)에 관심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 사이의 교환관계에 기인하는 하나의 집과 하나의 침대의 속성으로서만 효력을 갖는 하나의 실재를 찾고 싶어 했으며, 그것의 표현을 위해 교환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어떤 것을 찾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가 그것들 속에서 관찰하는 그러한 모든 공통적 속성들은 그것들이 교환과 관계가 없고 따라서 교환의 특수한 본질을 형성하지 않을 때도 또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2천 년 후에 하나의 사물의 가치의 성질의 내용과 본질을 그것의 유용성 속에서 보았던 이론가들의 머리와 어깨보다 훨씬 더 위에 있다. 하나의 사물의 유용성은 교환과 전혀 필연적으로 연관되지 않으며, 그것은 교환으로 드러날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교환을 통해서 그 자신을 표현하고, 그것이 그 사물의 ‘숨겨진 본성’을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교환 밖에서는 결코 표현되지 않는 하나의 본질을 찾기를 원했다. 맑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환관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무엇을 배제하고 있는지 명백하게 밝혔다: 가치 개념의 결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들의 교환의 속성의 실제적 본질, 실제적 실체(내용 substance)가 사실은 사회적 노동임을 이해하거나 드러낼 수 없었다. 전체적인 요점은 가치와 노동의 개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둘의 일반적인 추상적 관념은 그의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을 동시에 지적해 두자. ‘노동은 매우 단순한 범주인 것처럼 보인다. 이 보편적 형태 속에서, 노동일반으로서의 노동의 관념은, 또한 극도로 오래된 것이다.’1)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확실하게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집과 침대를 ‘노동 생산물 일반’이라는 추상적 관념 속에 포함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렇게 복잡하고 풀 수 없는 논리적 과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결여된 것은 가치 개념이었다. 가치에 대한 단순한 추상을 포함하는 단어, 이름은 물론 그의 시대에도 존재했으며, 구매와 판매라는 추상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상인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노동의 개념은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점은, 맑스의 용어법에서 그 개념이 하나의 용어 속에 고정된 추상적인 일반적 관념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점을 단지 다시 한 번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노동의 개념은 (그것과 구별되고 대립되는 것으로서) 인간 생활의 전체 과정에서 노동의 역할의 실현을 전제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노동은 인간적인 모든 것의 ‘실제적 본질’로서,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의 특질의 실제적 원천으로서, 사회생활의 모든 현상들의 실체로 나타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현상에 대한 개념은, 이 현상이 추상적으로가 아니라(즉, 반복되는 하나의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즉, 상호작용하는 현상들의 명확한 체계 속에서, 어떤 통일된 전체를 형성하는 하나의 체계 속에서, 그것의 위치와 역할에 관해서 이해되는 곳에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개념은, 그 특수와 개별이 단순한 개별과 특수 이상으로 (반복되는 것일지라도) 실현되는 곳에서 존재한다―그것들(특수와 개별-역자)은, 그것들 간의 상호 연계들을 통하여, 이 연계들의 원리의 표현으로서 보편적인 추론을 통해서 실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노동 개념을 가지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인류는 아직 그 시대에서는 사회적 생활의 체계 속에서 노동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그 어떤 명확한 자각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시대인들은 노동을 인간생활의 영역 안에 응당히 포함될 수도 있는 생명 활동의 형태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노동을 인간 생활의 모든 형태와 양식의 실재적인 실체(내용-역자)로서 인식하지 못했다. 놀랍지 않은 것이지만, 그는 하나의 사물의 교환 속성들의 실체로서 그것(노동-역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맑스의 용어법으로는, 그 점은 바로 다음을 의미한다. 즉, 그는 노동과 가치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그것들에 대한 단지 추상적인 관념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추상적 관념은 상품 교환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고전적 대표자들은 노동을, 다른 무엇보다도, 상품교환의 형태를 포함하여, 경제적 생활의 모든 형태의 실재적 실체로서 인식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그 점은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오직 추상적 관념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그 실재의 개념을 형성한 최초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물론, 영국 경제학자들이 스타게이아(Stagirte: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어난 지역-역자)보다 더 훌륭한 논리학자들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경제학자들이 이 실재를 보다 더 발전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연구했다는 점이다.

맑스는 여기에 무엇이 관계되어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연구의 대상 자체가, 이 경우 인간 사회가, 그것의 모든 표현들의 구체적 실체를 표현하는 개념들의 용어 속에서 그것(인간 사회-역자)을 연구하는 것이 필연적이고 가능한 수준으로 성숙했다는 점.

보편적 실체로서, ‘능동적인 형태’로서 노동은, 여기에서 의식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지 못한 ‘근사성(近似性)이 있는 실제적인 유(proximate real genus)’로서 나타났다. 모든 현상들의 ‘노동 일반’으로의, 모든 질적이 차이가 결여된 노동으로의 환원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이론가들의 추상이 진행되는 두뇌 속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관계들 자체의 현실성 속에서 발생했다. 가치는, 노동 속에서 실현되는 모든 것이 지향하는 목표가 되었다; 그것(가치-역자)은 ‘능동적인 형태’가 되었고, 각각의 분리된 것 그리고 각각의 분리된 개별의 운명을 지배하는 구체적인 보편적 법칙이 되었다.

중요한 점은, 모든 차이를 결여한 노동으로의 환원이 여기에서 하나의 추상으로서, 그러나 ‘생산의 사회적 과정 속에서 매일 만들어지는’2) 하나의 실제적인 추상으로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맑스가 제기하듯이, 이 환원은 유기적 육체를 공중으로 분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추상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리하여 시간에 의해 측정되는 노동은, 물론, 상이한 사람들의 노동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상이한 노동하는 개인들이 이 노동의 단순한 기관으로 보이게 된다.’3)

여기서 노동 일반, 그러한 노동은, 구체적인 보편적 실체로서 나타나고, 하나의 단일한 개인 과 그의 노동의 단일한 생산물은 이 보편적 본질의 표현들로서 나타난다.

노동의 개념은, 개인의 노동활동으로부터 추상될 수 있는 단순히 동일한 요소들보다 더 큰 어떤 것을 표현한다. 그것은, 특수와 개별을 지배하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들을 조종하고, 그들을 그것의 기관으로 만들며, 그들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게 강제하는 실제적인 보편적 법칙이다.

특수와 개별 그 자체는 이 실제적 보편에 포함되어 있는 요구에 부합하여 형성되며, 그 함의는, 개별이 자신의 특수성 속에서 실제적인 보편의 개별적 체현자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개별 자체들 간의 구별은, 보편과 나란히 있으며 그리고 그것(보편-역자)과 어떤 관계도 없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보편의 표현의 하나의 형태임이 증명된다.

하나의 개념은 이러한 보편의 이론적 표현이다. 하나의 개념을 통해서, 모든 특수적 및 개별적 요소들은, 주어진 전체에 속하는 그러한 측면들 속에서 정확히 파악될 수 있고, 주어진 구체적 실체의 하나의 표현이며, 그리고 상호작용의 구체적인 특수한 체계의 운동의 출현하고 소멸하는 요소로서 이해된다. 실체 자체, 상호작용하는 현상들의 구체적 체계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하나의 체계로서 이해된다.

하나의 개념(하나의 단어로 표현되는 일반적 관념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은 단지 하나의 것(대상, 현상, 사건, 사실, 등등)을 근사성(近似性)의 유(proximate genus)에 있는 다른 것과 등치시키고, 그것 속에서 그것의 모든 차이들을 소멸시키고, 그것들로부터 추상하는 것이 아니다. 상당히 다른 어떤 것이 개념 속에서 발생한다: 개별적 대상은, 그것을 어떤 전체의 필연적인 부분으로, 구체적 전체의 개별적 (한 측면의) 표현으로 만드는 그것의 특수한 특징들 속에서 반영된다. 어떤 변증법적으로 나누어지는 전체의 각각의 분리된 요소는, 그것들에 대한 추상적 유사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 속에서 이 전체의 보편적 성질을 일면적으로 표현한다.

개념(그것의 엄격하고 정확한 의미 속에서)은 그러므로 과학적인 이론적 사고의 독점물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용어로 표현되는 일반적 관념이 아니라, 테이블 혹은 의자, 칼, 혹은 성냥과 같은 것들에 대한 개념을 가진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생활에서 이것들의 역할과 특수한 특징―이 역할과 특징 때문에, 그것들(테이블, 의지 같은 사물들-역자)이 만들어지고 출현하게 되는 사회적 생활의 조건들의 체계 속에서, 그것들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어진 역할을 하고,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어진 위치를 차지한다―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 이 경우 개념은 완전히 풍부한 정의들로 나타나며, 모든 사람들은 사물들을 그것들의 개념에 부합하게 의식적으로 조종하며, 그럼으로써 그가 이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원자나 예술과 같은 것들은 매우 상이한 문제이다. 모든 예술가가, 그가 위대한 예술 작품을 창조했을지라도, 예술에 대한 충분히 발전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는 물리학자와 비교해서, 원자에 대해 좀 모호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물리학자가 그 개념(원자-역자)에 대해 하나의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을 피하는 물리학자는 그것(하나의 개념-역자)을 습득할 것 같지 않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조건들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현재의 작업에서 사고는 무엇보다 과학적인 이론적 사고, 즉,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적 연구 속에서 작동하는 사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작업 범위에 대한 이 제한은, 소위 일상의 사고가 과학으로서의 논리학만큼 가치가 없다거나, 혹은 그것이 상이한 법칙에 따라서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전체적인 요점은 과학적인 이론적 사고는 사고의 가장 발전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것의 분석은 그러므로, 사고 일반 속에서 작동하는 법칙을 수립하는 것을 훨씬 더 수월하게 한다. 다른 한편, 일상 속에서 행해지는 사고는 사고의 이 보편적 법칙들과 형태들을 쉽게 발견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수많은 복잡한 것들과 다양한 요인과 환경들에 의해 시야로부터 감추어져 있다. 사고의 과정은 순수한 연상(聯想) 혹은 순수하게 개별적인 감정적 동기들이 끼어들기 때문에 자주 방해를 받는다; 매우 자주 추론의 사슬 속에서의 수많은 연결고리는 단순히 생략되며, 그 공백은 마음을 가로지르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경험들에 기초한 주장으로 채워진다; 적지 않은 경우에, 인간은 하나의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 혹은 사건과의 관계 속에서, 충분히 발전된 미적 기호와 지각의 도움으로 방향을 잡아가며, 반면에 엄격한 의미의 추론은 부수적 혹은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등등. 이러한 모든 이유들 때문에 일상의 사고는, 논리적 분석, 즉 사고 일반의 보편적 법칙을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의 매우 편리하지 못한 대상이다. 이 법칙들은 여기에서 영구적으로 작동하지만, 과학적인 이론적 과정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보다, 복잡한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그것들을 연구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후자(과학적인 이론적 과정에 대한 분석-역자)에서는, 사고의 보편적 형태와 법칙은 일반적으로 훨씬 ‘더 순수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모든 곳에서처럼 여기에서도, 더 발전된 형태는 덜 발전된 형태를 그것의 진정한 본질 속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며, 더 높고 진보된 형태로의 발전의 가능성과 전망들이 고려될 수 있는 것은 더욱 더 그러하다.

과학적인 이론적 사고는 ‘일상적 사고와 정확히 이러한 종류의 관계 속에 있다: 인간에 대한 해부학은 유인원에 대한 해부학의 열쇠를 제공하지만, 그 역은 아니다. 그리고 ‘더 진보된 형태의 싹’은, 오직 이러한 더 진보된 형태들 자체가 알려질 때만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방법론적 가정으로부터 나아가면서, 우리는 사고 일반의 법칙들과 형태들을 대개 그것들이 과학적인 이론적 사고에서 나타나는 방식에 관련해서 고려한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과학적인 사고보다 훨씬 더 복잡한, 즉, 과학적인 이론적 문제들, 명확하고 엄격하게 윤곽이 그려진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사고하는 응용능력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고의 다른 모든 형태들과 응용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획득하게 된다. 사고의 보편적 법칙이 과학적인 사고와 소위 일상적인 사고 모두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사고의 보편적 법칙들-역자)은 과학적 사고 속에서 더 쉽게 파악되는데 (같은 이유로) 자본주의적 구성체의 발전의 보편적 법칙들은 러시아 혹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19세기 중반 영국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더 쉽게 수립될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1) Karl Marx,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p. 209.

 

2) Karl Marx,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p. 30.

 

3)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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