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쓰딸린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쏘련에서의 ‘시장 사회주의’ 문제*

비자이 싱(Vijay Singh)**

번역 : 김의진 │ 회원

 

*출처: https://www.revolutionarydemocracy.org/rdv1n1/marksoc.htm

 

**비자이 싱(Vijay Sing)은 인도에서 1995년부터 발행되고 있는 반년간지 «Revolutionary Democracy»(혁명적 민주주의)의 편집장이다. 2014년에는 쓰딸린 협회(Stalin Society) 인도 지부의 창립 성원으로서 활동을 전개했고,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글들을 집필하고 있다.

 

 

“오늘날의 쓰딸린” 국제 세미나는, 쏘련의 최종적인 해체 이후, 그 폐허 위에서 떠오른 국가들의 노동자계급이 부활한 자본의 지배에 맞서는 첫걸음을 내딛었을 때인, 10월 혁명 77주년 기념일에 모쓰끄바에서 개최됐다. 쓰딸린이 이러한 발전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줄 어떤 것이 있을까? 쓰딸린의 생전 마지막 대작(大作)인 ≪쏘련 사회주의 경제의 제 문제≫는 1953년 이후 쏘련에 도입된 ‘시장개혁’을 검토하고, ‘시장개혁’의 경제적 및 정치적 성격에 대한 결론에 이르기 위한 중심적인 출발점으로 여기서 제기되고 있다.

경제적 논쟁의 맥락은 무엇이었는가?

쏘련 공산당(볼)은 1935년까지 사회주의 사회의 토대가 주요하게 놓였다고 간주했다. 제18차 당 대회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나라의 더 이상의 발전을 위해 전진하는 경로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당 강령을 작성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941년 국가계획위원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토대를 놓기 위한 15개년 경제발전 계획을 정식화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러한 전망은 비록 나찌 독일의 침략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지만, 전후(戰後) 시기에 즉각적으로 부활했다. 1947년에 말렌꼬프는 제9차 당 정보국 협의회에서 당이 “쏘련 공산당(볼)의 새로운 강령을 준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쏘련 공산당(볼)의 기존 강령은 명백히 시대에 뒤떨어졌고, 새로운 강령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적시했다. (게오르기 말렌꼬프,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활동 보고>, ≪영구평화를 위해,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에 실림, 뭄바이, 1948년, p. 79.) 이러한 과제는 1952년 19차 당 대회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됐다. 니꼴라이 보즈네쏀쓰끼도 말렌꼬프와 동일한 선상에서 1946년에 4차 5개년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최고 쏘비에트에 제출했을 때, 1941년에 자신에게 주어졌던 그 과제를 회상했다. 그는 그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 계획은 계급 없는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의 완수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구상하고 있다. 그 계획은 1인당 공업 생산량의 측면에서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따라잡고 넘어선다는, 쏘련의 기본적인 경제적 과제들의 완수를 구상하고 있다.” (니꼴라이 보즈네쏀쓰끼, ≪쏘련 국민경제의 회복과 발전을 위한 1946-1950년 5개년 계획≫, 쏘비에트 통신, 런던, 1947년, p. 10.)

 

쓰딸린은 ‘일국에서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지 여부를 묻는 영국 특파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이러한 강령적 전망에 동의했다. 쓰딸린은 “특히 쏘련과 같은 나라에서는 완벽할 정도로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이오씨프 쓰딸린, ≪전후 국제관계에 대하여≫, 쏘비에트 통신, 런던, 1947, p. 13.)

≪쏘련 사회주의 경제의 제 문제≫에서 국가계획위원회의 경제학자인 야로쏀꼬(L.D. Yaroshenko)에 대한 쓰딸린의 비판은 보그다노프 견해의 두드러진 유산이 전후 시기까지 지속됐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야로쏀꼬는 어떤 고립된 시각을 대표하지 않았다. 유딘(Yudin)은 과학일꾼들 사이에서 틀림없이 어떤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뜨로츠끼주의-부하린주의-보그다노프주의로의 상습적인 복고를 의미했던 야로쎈꼬프치나였다고 시사했다. 이후에도 재차 언급되겠지만, 보그다노프는 혁명 이전 시기에 영향력을 발휘했던 정치경제학 교과서의 저자였다. 보그다노프는 철학의 영역에서 레닌으로 하여금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형태의 답장을 집필하게 만든 마하(Mach)와 아베나리우스(Avenarius)의 관점을 채택했다. 1917년에 그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사 멘쉐비끼적 관점을 지지했다. 문화 분야에서 그는 혁명 이전 시기의 유산을 부정하는 “프롤레타리아 순수문화”를 주장했다. 보그다노프는 생애 말년에 그 자신이 테크톨로지(tektology)로 일컬었던 ‘조직 과학’을 개발했으며, 구조적 관계들이 수학에서의 양과의 관련에서처럼, 형식적 계획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철학대사전≫ 제1권, 모쓰끄바, 1960년, p. 177.) 이러한 견해들은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명제들로부터 명백히 멀리 떨어진 것이었다. 보그다노프는 루나차르쓰끼와 부하린, 고리끼를 비롯한 러시아의 좌익 인사들 사이에서 특출 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견해는 정치경제학, 사적 유물론 그리고 과학 및 기술의 문제들에 대한 부하린의 저술들에 스며들었다.

 

쓰딸린은 야로쏀꼬가 생산관계의 중요성을 소극적으로 다루고, 사회의 진보적 발전에 있어 생산력의 역할을 과대평가 했으며, 생산관계를 생산력의 구성 요소로 축소시켰다는 것을 지적했다. 야로쏀꼬는 다양한 소유 형태들, 상품의 유통, 일반적으로는 가치 범주들의 지속적인 존재와 같은 중심적 문제들을 무시함으로써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실질적으로 폐지했다. 정치경제학은, 보그다노프의 잔재인 생산력의 무계급적 조직화로 변형되었다. 이 두드러진 경제주의와 대비되게, 쓰딸린은 쏘련에서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들이 지속적으로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만약 지도 기관이 올바르지 못한 정책을 수행한다면, 갈등은 출현할 수밖에 없으며, 이와 같은 조건에서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다. 야로쏀꼬의 견해는, 농촌에서 계급적 갈등의 분출에 눈을 감으려는 부하린의 시도, 그리고 농업에서 기존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고정시키려 하고 ‘기술혁명’으로 주의를 돌리고자 했던 부하린의 바람을 연상시킨다. 부하린은 193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새로운 단계, 즉 기술혁명의 단계에 진입했다”고 공공연하게 진술했다. (N. I. 부하린, ≪Metodologiya i Planirovanie Nauki i Tekhniki’, Izbrannie Trudy≫, 모쓰끄바, 1989, p. 135.) 이러한 견해는 1953년 이후의 불모의 시기에 지배적으로 되었다. 사회주의는, 레닌과 쓰딸린의 견해에서처럼, 계급의 철폐와 공산주의로의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라, 집단농장 소유의 보존과 무계급적인 ‘과학-기술적 진보’라는 이데올로기의 발전, 상품-화폐 관계의 보편화된 적용을 의미했다. 야로쏀꼬의 견해는 1953년 이후 시장 관계의 수립과 전적으로 합치됐다. 쏘련 지도부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유지 내지는 발전에 무관심했으며, 쓰딸린 시대의 주요한 특징을 이뤘던 높은 수준의 생산력 발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무능함을 드러냈다. 야로쏀꼬는 그 자신의 주장이 끼친 여파에 대해 모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92년에 쓰인 글에서 야로쏀꼬는 쏘련 해체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 제기한 화두들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야로쏀꼬는 어떤 사회적 문제들보다 생산력 발전법칙의 선차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1951년에 있었던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둘러싼 토론의 핵심적인 과제가 사회주의 경제의 합리적, 조직적 기능화의 제반 문제들로 되어야 했다는 당시의 주장을 반복했다. 그는 사회주의 하에서 생산관계라는 쟁점을 논하면서, 경제의 과학적 조직화는 그 자신이 당시 용어로 ‘사회-조직적 관계’와 ‘경제적 기제’라고 했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완벽화를 전제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기발한 것이었다. (Yaroshenko,L.D., ‘Svidetel’stva Vremeni’ in Igor’ Troyanovskii (ed), I. Stalin, ‘Ekonomicheskie Problemy Sotsializma v SSSR’, Peredelkino, 1992, pp.100-104.) 야로쏀꼬는 바로 이러한 논리를 통해 뻬레쓰뜨로이까 시기의 정치경제학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생산관계와 생산력 간의 사회적 모순의 지속적인 출현의 문제는 보다 광범위한 파급력이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는 계급적 충돌의 근원에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있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쓰딸린의 야로쏀꼬에 대한 비판은, 쓰딸린이 자신의 마지막 이론적 저작물에서 사회주의 사회 내부에서 모순들이, 계급투쟁이 지속적으로 출현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야로쏀꼬에 대한 비판에서 보이는 것처럼, 올바르지 못한 정책들이 실시된다면 생산력 발달을 저해하는 갈등이 출현할 것이다. 동시에 쓰딸린은 뒤처진 생산관계를 생산력의 성격과 조응시키기 위해 사회가 시의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하에서 사태는 갈등이 발생할 정도에 이르지 않을 것임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가 저항을 조직할 만한 퇴화한 계급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생산관계를 변화시킬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후진적이고 관성적인 세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쓰딸린은 사태를 갈등으로 가져가지 않아도 이러한 견해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사회주의 하에서 비록 모순이 지속되지만, 적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했던 레닌의 주장과 합치하는 것이었다.

쏘비에트 사회에서 사회적 모순의 지속에 대한 논의는 쏘비에트 철학에 대해 명백한 영향을 끼쳤다. 유딘은 그 자신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쏘비에트 사회에서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양자 사이에서 모순의 존속을 부인했다고 말했다. 철학자 글레저만(Glezerman)은 1951년의 소책자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완전한 조응”에서 이러한 결론에 안이하게 도달한 채, 쏘비에트 사회의 경제관계, 생산력 혹은 생산관계를 분석하지조차 않았다. 유딘은 모순의 존재에 대한 일체의 부정이 쏘비에트 철학을 생동감 없고 형이상학적인 도식의 건립으로 이끌었다고 결론지었다. (Yudin,P.F., “Trud I.V. Stalina ‘Ekonomicheskie Problemy Sotsialisma v SSSR’- Osnova Dalneishego Razvitiya Obshestvennikh Nauk”, Moscow, 1953, pp.23-24.)

레닌은 1921년 5월에 사회주의적 공장의 생산물이 ‘정치경제학적 견지에서 상품이 아니’며, 이미 ‘상품이기를 중단하고 있는 상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V.I. Lenin, ‘Polnoe Sobranie Sochinenya’, Volume 43, 5th edition, Moscow, 1963, p.276) 하지만 우리는 ≪경제적 제 문제≫ 에서 쏘련의 경제학자 A. I. 노뜨낀이 사회적 부문에서 제작되는 생산의 도구들이 사실상 상품이라는 견해를 표출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쓰딸린은 이러한 이해를 거부했고, 생산의 도구들이 기업들에 할당되는 것이지 판매되는 것이 아니며, 국가는 생산 도구들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고, 이 생산 도구들이 국가의 대리인인 기업 경영진에 의해, 국가계획에 부응하여 이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1948년에 니꼴라이 보즈네셴쓰끼(N.A. Vozhnesensky)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에 의해 어떤 시도가 있었는데, 이 시도는 중공업과 운수 부문에서 국가보조금 체계를 종식시키기 위해 기획된 1949년 1월의 도매가격 개혁으로 현실화되었다. 보즈네셴쓰끼는 생산비용의 3-5% 정도의 최소한의 이윤 원칙을 중공업과 철도 운송을 포함하는 생산 분야들에 도입하고자 했고, 그럼으로써 생산수단의 상품으로의 변형을 위한 기초를 놓고자 했다. (Trifonov, D.K., et al, ‘Istoriya Politicheskoi Economii Sotsializma, Ocherki’, Leningrad, 1972, p.201.) 가치법칙을 기본적인 생산수단에서 작동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는 신속하게 종식됐다. 보즈네쏀쓰끼는 쓰딸린의 지시로 1949년 3월 5일에 본래의 직책에서 축출됐다.

≪쏘련 사회주의 경제의 제 문제≫에서 쓰딸린은 쏘련에서 상품생산의 영역이 한정되어 있으며 제한되어 있다고 단언했다: 부르주아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 협동조합, 집단농장에서 연합된 사회주의적 생산자들만이 존재한다. 상품생산은 개인적 소비 품목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쓰딸린은 쏘련에서 상품생산이, ‘상품으로서의 노동력, 잉여가치, 자본, 자본주의적 이윤, 평균이윤율’과 같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경제적 범주들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이오씨프 쓰딸린, ≪쏘련 사회주의 경제의 제 문제≫, 모쓰끄바, 1952년, p. 21.) 사회과학에서의 반맑스주의적 오류에 대한 유딘의 비판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처럼, 그와 같은 견해는 쏘비에트 경제학자들 일부분에서 지배적이었다. 메르제네프(Merzenev)와 미꼴렌꼬(Mikolenko)는 쏘련에서 노동력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상품이라는 의견을 견지했다. 야꼬블레프(A. Yakovlev)는 ‘자본’의 범주가 쏘비에트의 조건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아뜰라스(Atlas)는 쏘비에트 경제에서 평균 이윤율이 작동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경제정책의 근본적인 변화가 쓰딸린 사후부터 쏘련 공산당 20차 대회 사이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발생했다. 공산주의 사회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계획적 전망은 포기되었고, 소비 중심주의적 복지강령에 의해 대체되었다. 상품 유통을 대체하여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의 생산물 교환을 점진적으로 도입하기 위한, 쏘련 공산당 19차 당 대회에서 승인된, 쓰딸린의 제안은 1953년 5월을 기점으로 효력을 상실했으며, 상품 유통의 확대를 위한 강령이 ‘쏘비에트 거래(trade)’를 확대한다는 슬로건 하에서 채택되었다. 쏘련 경제에서 국가계획위원회의 영역은, 1953년 4월 전 연방 쏘비에트 성(省)들의 경제적 권한 확대로 인해, 그리고 1955년 기업 관리자 및 연방공화국들의 성(省)들의 권한 확장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제한되었다. 쓰딸린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법률로서의 중앙집중화된 지령적 계획의 체계는 1955년을 기점으로 종언을 고했고, 국가계획위원회와 전 연방 및 연방 공화국 성(省)들에 의한 ‘협동적 계획’이라는 새로운 체계에 의해 대체되었다.

쏘련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2년이 지난 후 쏘비에트 경제의 운영 과정에서 일련의 급진적인 변화들이 추가적으로 발생했다. 1957년 5월 22일자 쏘련 각료 협의회의 제555호 결정 하에서, 국영 부문 생산물들에 대한 할당 체계는 종식을 고했으며, 쏘비에트 공업에 의해 제조된 공업 생산물들을 판매하기 위한 많은 수의 중앙집중화된 판매 조직들이 국가계획위원회 산하에 창설되었다. 쏘련 공산당 지도부에서 몰로또프와 까가노비치, 싸부로프의 제거는 경제정책에 즉각적인 영향을 끼쳤다. 생산수단의 상품으로의 변형은 1957년 9월 22일자 쏘련 각료 협의회의 제1150호 결정을 통해 명백히 달성되었는데, 그것에 의해 기업들은 이윤의 기초 위에 작동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1958년에 출판된 ≪정치경제학 교과서≫ 3판은, 생산수단이 국영 부문에서 상품으로서 유통되고 있다고 적시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체제를 정확히 반영했다. (Ostrovityanov, K.V., et al, ‘Politicheskaya Ekonomiya, Uchebnik’, 3rd edition, Moscow, 1958, p. 505.)

사니나(A. V. Sanina)와 벤제르(V. G. Venzher)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쓰딸린은 농업에서 기본적인 생산 도구들을 보유했던 기계-트랙터 기지(MTS)가 집단농장에 매각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반대했다. 이것은 특히 막대한 양의 생산 수단들이 상품생산의 궤도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사니나와 벤제르는, 그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명했을 때, 결코 고립된 위치에 있는 경제학자들이 아니었다. 1년 전에 팔체프(A. Paltsev)는 ‘사회주의로부터 이행의 길’(끼예프, 1950)’이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기계-트랙터 기지(MTS) 내에서 농업 기술의 성장과 함께, 그리고 소규모 집단농장의 병합과 함께, 집단농장의 작업과 밀접하게 연계되는, MTS 부서들이 집단농장의 편제 하에 수립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을 하였다.(Yudin, op. cit, pp. 31-32.) 이러한 조치를 통해 팔체프는 전 인민적 소유, 즉 국가소유였던 기계-트랙터 기지(MTS)를 집단농장의 집단적 소유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계-트랙터 기지(MTS) 해체의 전제조건은 농업에서 주요한 생산수단을 할당하는 체계의 종식이었다. 국가계획위원회 포고령 제663호 하에서, 국가계획위원회는 쓰딸린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농기계 할당 체계를 폐지했으며, 자신이 감독하는 기구로서, 농업 부문에 필요한 농기계들의 판매를 전담했던 트랙터 수리-기술 배급소(Glavavtotraktorsbita)를 신설했다. 흐루쇼프는 1958년에, 벤제르에 의해 수 년 전에 상정된 제안과 공식적으로 선을 그으면서도, 기계-트랙터 기지(MTS)를 해체하고, 농업 생산 도구들을 집단농장에 매각하는 조치를 도입했다. 그 결과 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에서도 생산수단은 이제 상품으로서 유통되기 시작했다. 벤제르 및 흐루쇼프와 막역한 사이였던 쏘련의 평론가 빈니첸꼬(Vinnichenko)는 농업에서 기본적인 생산 도구들을 집단농장이 보유해야 한다는 견해에 쓰딸린이 반대한 기저에는 농민을 향한 ‘불신’이 작용했다고 논했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았다. 쓰딸린은 단지, 엥엘스의 맑스주의적 입장, 즉, 1886년 1월에 베벨(Bebel)에게 보낸 서신에서, 개개 협동조합 농민의 특수한 이해관계가 사회 전반의 총체적 이해관계를 압도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농촌에서 생산수단이 사회 전체에 의해 소유되어야 한다고 주저 없이 말했던 입장을 옹호했을 뿐이었다. (Engels to A.Bebel in Berlin, 20-23 January 1889, in K. Marks and F. Engels, ‘Sobranie Sochneniya’, Volume 36, Moscow, 1964, p. 361.). 더 나아가, 엥엘스와 쓰딸린은 모두 부농들이 집단농장의 성원으로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꿀라끄(부농)가, (그리고 심지어 일부 지주들조차) 농업 생산자 협동조합의 성원이었고 농업에서 주요한 생산 도구들이 이 협동조합에 의해 소유되었던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사니나와 벤제르에 대한 쓰딸린의 비판이 차가운 반응을 맞이하게 될 것은 이해할 만하다.

유딘의 저술들을 보강하는 것은, 1947년에 출판된 보즈네쏀쓰끼(N.A. Vozhnesensky)의 저서인 ≪대조국전쟁기 쏘련의 전시경제≫의 견해들에 담긴 함의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던, 1952년 12월 25일에 ≪이즈베스띠야≫지에 게재된 쑤슬로프의 글이다. 보즈네쏀쓰끼에 대한 쑤슬로프의 가장 핵심적인 비판은 쏘비에트 경제의 상이한 분야들에서 노동의 분배를 규율하는 것처럼 보였던 가치법칙에 대한 숭배였다.

이는 보즈네쏀쓰끼의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통해 보다 명백하게 표현된다. “가치법칙은 쏘련의 국민경제의 다양한 분야들 사이에서 생산물의 분배뿐만 아니라 노동 자체의 분배 속에서도 작동한다. 이 영역에서 국가계획은, 사회주의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경제의 다양한 분야들에서 사회적 노동의 적절한 분배를 확보하기 위해 가치법칙을 활용한다.” (N. 보즈네쏀쓰끼, ≪대조국전쟁기 쏘련의 전시경제≫, 모쓰끄바, 1948년, p. 118.)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쏘비에트 사회에서 가치법칙의 작용이 중요한 쟁점으로 남는 한, 맑스주의 경제 이론의 의의는 더욱 빛을 발한다. 맑스와 엥엘스는 가치법칙이 상품생산이 현존하는 사회에 한해서만 작동한다고 여겼다. 가치는 상품생산의 부상과 함께 작동하게 되며, 상품 체계의 종말과 함께 소멸된다. (엥엘스, “취리히에서 칼 카우츠키에게 보내는 편지”, 맑스의 ≪가치론≫에 수록, 벨파스트, 1971년, p. 5.) 경제에서 가치가 노동의 분배를 규율한다는 주장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적 결론은, 일반적인 상품생산의 체계, 즉, 자본주의가 쏘련에서 지배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즈네쏀쓰끼는 이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사회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

맑스와 엥엘스에게 가치법칙은 상품생산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가치 개념은 상품 생산의 경제적 조건들의 가장 일반적이며, 따라서 가장 포괄적인 표현이다.” (프리드리히 엥엘스, ≪반뒤링론≫, 모쓰끄바, 1978년, p. 376.) 상품생산의 사회는 ‘사적 생산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곳에서는 상품이 “이들 사적 생산자들에 의해, 그들의 사적 이해를 위해 서로 간에 대립하여 생산되고 교환된다.” (같은 책, p. 240.) “사회에 의한 생산수단의 장악과 함께” 상품생산이 종식되는 사회에서, “상품생산은 사라지게 되며, 동시에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사라지게 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체계적이고 명확한 조직화에 의해 대체된다.”(같은 책, p. 343.) 그러면, 가치법칙은 불필요해진다. 이는 또한 1868년 7월에 쿠겔만에게 보낸 맑스의 서신에서 제시된 주장의 함의이기도 하다. 쿠겔만에게 보낸 서신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노동이 일정 비율로 분배될 이러한 필요성은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형태에 의해 없어질 수는 없으며, 다만 그것이 띠게 되는 형태만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자연법칙들은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서,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법칙들이 관철되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노동의 상호연관이 노동의 사적 생산물들의 사적 교환으로 나타나는 사회 상태에서, 노동의 이러한 비례적 분배가 관철되는 형태는 다름 아니라 이 생산물들의 교환가치입니다.” (맑스, ‘쿠겔만 박사에게’, 런던, 연도 미상, pp. 73-74.)

 

사회적 노동의 상호연관이 상품 체계의 부재 속에서, 즉, 사적 생산자들의 부재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에서, 사회적 노동의 할당은 가치의 작동 없이 발생할 것이다. 이 점은 사회주의 하에서 분배에 대해 논한 엥엘스의 제언을 통해 확인된다:

 

“물론 그 경우에도 사회는 각 소비 물품 제작에 얼마만큼의 노동이 필요한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회는 생산수단의 생산에 부합하여 생산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특히 그 생산수단에는 노동력도 속한다. 상이한 소비 물품의 효용은, 즉 그것들의 생산에 요구되는 노동의 양을 서로 간에 비교하는 것을 통해, 결국 계획을 결정할 것이다. 사람들은 몹시 우쭐해 하는 ‘가치’가 끼어들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아주 간단하게 처리하게 될 것이다.” (엥엘스, 같은 책, p. 375.)

 

이러한 점은 정치경제학을 다룬 맑스의 마지막의 일련의 저술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아돌프 바그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논평’에서, 맑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치가 작동할 것이라는 논변이 맑스 자신에게서 비롯됐다는 바그너의 주장을 배격한다. 맑스는 ‘“맑스주의 사회적 국가”에서, 부르주아 사회를 대상으로 발전된 그의 (맑스의) 가치 이론이 가치를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그너의 전제’를 비판했다.

맑스와 엥엘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치법칙의 작동을 배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농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속하는 이행기적인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치가 잔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엥엘스는 1884년에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농민 문제≫라는 자신의 글에서 그러한 조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우리가 국가권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소농들을 향한 강압적인 수탈은 (보상의 여부를 불문하고) 대지주들의 경우와 달리 상상조차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소농들에 관한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무엇보다도 소농의 사적인 기업과 사적 소유를 협동조합적 소유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강제적인 방식이 아니라 사례의 힘으로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한 사회적 원조의 제공을 통한 것이다.”

 

쏘련에서 사적 생산은 집단화와 집단적 소유가 확립된 이후에도 제한된 형태로 계속해서 존재했다.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가 명확한 계획을 통해 사회적 노동의 할당을 규율함에 의해, 국영 공업, 국영 농장, MTS의 영역에서 가치법칙의 작동을 철폐할 수 있었던 데 반해, 집단농장에서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 집단농장에서는 파종지, 수확량, 트랙터 작업의 정도, 사회적으로 소유된 가축의 수, 농업 총생산, 의무 교부금과 MTS에 대한 현물 지급의 양이 지령적 계획의 범주 하에 포함됐지만, 국가는 잉여 상품생산 혹은 특정 시기의 특정 과제에 맞는 노동력의 사용을 계획할 수 없었다. (Smolin,N., ‘O zachatkakh produkto-obmena’, Voprosi Ekonomiki, No.1, 1953, pp. 33-45.).

보즈네쏀쓰끼는, 쏘비에트 경제의 다양한 분야들 사이에서, 즉 농업 부문만이 아니라 공업에서도 가치법칙이 노동의 분배에 있어 작동한다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맑스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지 못했다. 보즈네쏀쓰끼는 이러한 입장을 설파함으로써 쏘련 경제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와 유리됐다. 1943년에 편집된 글인 “정치경제학 강습의 몇 가지 문제들”에서는 “개별적인 생산 분야들에 대한 기금과 노동력의 할당은 계획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적인 과제들에 따라 수행된다”고 논해졌다. (≪맑스주의의 기치 아래≫ (Pod Znamenem Markzisma), 1943년, No.7-8.) 유사하게 다음해에 쏘련 정치경제학의 중진인 오쓰뜨로비쨘꼬프(K. V. Ostrovityanov) 역시 사회주의 경제에서 “국민경제의 다양한 분야들에서 노동과 생산수단의 분배는 우연적인 가격의 운동과 이윤 추구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법칙을 활용하는 계획적 지도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Ostrovityanov,K.V., ‘Ob osnovnikh zakonomernostyakh razvitiya sotsialisticheskogo khozaistva’, Bol’shevik, No. 23-24, 1944, pp. 50-59.) 가치는 “사회적 노동의 분배”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쏘비에트 경제의 제반 분야들에서 노동과 생산수단의 계획적 분배를 위한 보조적인 도구라는 역할을 했다.”

가치는 생산수단의 생산의 발전을 지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치법칙이 제한되지 않을 경우 그 부문을 위한 필요한 기금의 할당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즈네쏀쓰끼는 보다 확대된 규모로의 재생산을 위한 생산수단의 생산과 소비재의 생산 사이에 적절한 비율을 수립하는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소비 수단의 생산(2부문)에 대한 생산수단의 생산(1부문)의 우위―이것은 국민경제의 지속적인 확대를 위해 필요하다―를 지적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장한다. 그러면서 문제를 전후(戰後) 경제와 관련한 사업의 부문으로 축소시켰다. 보즈네쏀쓰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우리가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1부문과 소비재 품목들을 생산하는 2부문으로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적 생산을 구분한다면, 쏘비에트 국가에 의해 2부문 기업들에게 배치된 생산수단의 가치는 1부문 기업들에게 배치된 소비재 품목들의 가치에, 명백히 계획에 의해 규정되는 방식으로 조응해야 한다. 물론 1부문 기업들이 소비재 품목들을 취득하지 못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2부문의 기업들이 생산수단을 취득하지 못하게 된다면, 보다 확대된 규모의 사회주의적 재생산은 불가능할 것이다.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기업의 노동자들이 소비재 품목들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고, 소비재 품목들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생산수단, 즉 연료, 원자재, 장비를 획득하지 못하게 되는 만큼.” (보즈네쏀쓰끼, 같은 책)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쓰뜨로비쨘꼬프는 생산수단의 분배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가치가 단지 보조적인 역할에 그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오쓰뜨로비쨘꼬프, 앞의 글)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1943년 당시의 편집물(≪맑스주의의 기치 하에서≫)의 저자는, 마께예프까의 끼로프 공장과 마그니토고르스크, 꾸즈네츠끄 콤비나트의 사례를 거론하며, 가치가 쏘비에트의 철강산업의 발전을 지배하지 않았는데, 이 산업들은 여러 해 동안 이윤을 창출하지 않고도 국가예산의 기금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맑스주의의 기치 아래≫ (Pod Znamenem Markzisma), 앞의 글)

보즈네쏀쓰끼의 저술에 대한 쑤슬로프의 비판은 적중했다. 그러나 보즈네쏀쓰끼는 단순한 이론가가 아니라, 쏘련 각료 협의회 산하의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의장으로서, 1948-1949년에 쏘련에서 상품-화폐 관계의 작동의 영역을 확장하는 정책을 수행하는 위치에 있었다. 고르바초프 치하 당시에 실시된 레닌그라드 사건에 대한 검토의 결과, 보즈네쏀쓰끼의 국가계획위원회가 1949년 1/4분기 동안 전국적 규모의 공업 계획을 축소시킨 조치에 대해 쏘비에트 연방 국가공급위원회 부의장인 포마즈네프(M. Z. Pomaznev)가 반대의사를 개진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당 통제위원회의 쉬낄랴또프(Shkiryatov)는 그러한 혐의를 재론에 부쳤으며, 쏘련 각료 협의회는 정부의 계획적 지령을 보즈네쏀쓰끼가 옹호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Izvestiya Ts.K. KPSS No 2, 1989.) 공업 계획의 축소라는 혐의는, 1949년 1월 중공업 제품에 대한 도매가격의 인상과, 그리고 생산수단의 생산에 이윤 원리를 도입하고 생산수단의 생산을 상품-화폐 관계의 영역으로 견인하기 위한 시도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1949년 3월 5일 보즈네쏀쓰끼가 국가계획위원회에서 제거된 것은 기존의 보즈네쏀쓰끼의 경제정책을 폐기하는 것의 시작이었는데, 몇 단계에 걸쳐서 도매가격이 1949년 수준보다 궁극적으로 30% 낮아졌다. 보즈네쏀쓰끼는 쏘비에트 경제를 시장경제 노선에 따라 재구성하기를 원했던 이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쓰딸린 사후에 즉시 복권되었다.

쑤슬로프의 1952년 글은 가치와 관련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사회주의 하에서 가치가 사회주의에 복무하는 방식으로 ‘변형’, 혹은 ‘변경’된다는, 쏘비에트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기간 동안 유행하였던 견해를 비판했다. 쓰딸린은 ≪경제적 제 문제≫에서, 이것(가치의 변형-역자)이 발생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조건 하에서, 가치가 ‘변형’된다면, 그러면 경제적 법칙은 폐지되거나 다른 법칙들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견해를 거부했다. 경제법칙의 작동 영역은 제한될 수 있지만, ‘변형’되거나 ‘폐지’될 수 없다. (쓰딸린, 앞의 책, p. 97.) 사회주의 하에서 가치 범주의 ‘변형’이라는 주관주의적 관념은 쏘비에트 정치경제학 속에 침투했다. 보즈네쏀쓰끼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는 이러한 경향의 표본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서 기원하는 상품적-자본주의적 사회의 특징인 가치와 사용가치의 대립으로부터 자유롭다.” (보즈네쏀쓰끼, “전시경제”, p. 97.)

사회주의 하에서 상품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 쏘련에서 가치는 두 가지 상이한 소유의 형태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존속했다. 집단농장의 형태로 주로 구현된 집단적 소유가 국가소유의 수준으로 상승했다면, 가치의 잔재들의 작동을 위한 기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세포’, 혹은 ‘싹’으로 간주했던 것은 상품의 본성 자체였다. 상품은 ‘변화’될 수도 혹은 ‘변형’될 수도 없으며, 단지 그 범위가 한정되고 제한될 뿐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쓰딸린의 이해는, 1884년 9월에 카우츠키에게 서신을 보낸 엥엘스의 맑스주의적 입장과 일치했다. 카우츠키는 독일의 강단 경제학자인 로드베르투스(Rodbertus)의 경제이론에 대한 논문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는데,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귀하는 가치에 대해 (로드베르투스 등처럼) 유사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가치는 상품 생산의 가치이지만 상품 생산의 폐지와 함께 가치는 스스로를 ‘변경’시킨다고, 즉 가치 자체는 그대로 있지만 그 형태가 바뀐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경제적 가치는 상품생산에 속한 범주의 하나이며, 상품생산 이전에 가치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상품생산과 함께 소멸합니다. (≪반뒤링론≫, pp. 252-62.를 보십시오.) 노동과 생산물의 관계는 상품생산 이전에 가치로 표현되지 않았고, 상품생산 이후에도 더 이상 그렇게 표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엥엘스, 취리히의 칼 카우츠키에게, 칼 맑스 ≪가치론≫, pp. 5-6.)

 

엥엘스에게 가치의 ‘변형’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허용될 수 없는 가치법칙의 작동에 대한 완곡한 밀수입을 의미했다. 카우츠키의 글에서 이것은 고립적인 큰 실수였지만, 쓰딸린은 쏘련의 경제학자들 전반이 실질적으로 이러한 오류를 승인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변형’된 가치라는 관념은, 집단농장의 존속이 상품-화폐 관계의 지속적인 보존을 수반하던 때에 가치가 인위적으로 쏘련에서 폐절될 수 있다는 생각을 비판하기 위한, 그리고 그와 결합하여,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조건 하에서 가치의 작동이 보조적이고 부차적이며 제한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명히 하기 위한, 이중적 필요의 표현으로서 떠오른 것 같다. 그럼에도 ‘변형’된 가치라는 개념은, 맑스적 의미에서 명확한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지녔는데, 쏘련에서 오랫동안 유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식이 정확성을 위해 포기되어야만 한다고 쓰딸린이 간주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내용 때문이었다. ‘변형’된 가치론은 이중적 문제를 지녔는데, 가치가 인위적으로 창출되거나 폐지될 수 있다는 인식을 여전히 수반하고 있었고, 그리고 보즈네쏀쓰끼의 사례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상품-화폐관계의 작동의 영역에서, 가치의 수축이 아니라 가치의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지렛대로 쉽게 변모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53년 이후 쏘련 경제에서 상품-화폐관계의 급격한 팽창과 함께 ‘변형’된 상품이 복원되는 것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954년 ‘정치경제학 교과서’는 사회주의 경제가 사적 노동과 사회적 노동 사이의 모순을 알지 못한다고 논했다. (K. V. 오스뜨로비쨔노프 외, ≪정치경제학 교과서≫ 제 1판, 모쓰끄바, 1954년, p. 442.) 이러한 추론은 많은 문제들을 제기했다. 그 추론은, 상품-화폐관계가 여전히 제한된 방식으로 활용되어야 할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소비재를 구매하기 위해 임금의 형태로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노동이 완전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제기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추론은 맑스의 저술에서 공산주의 사회 하에서 비로소 종식될 수 있다고 말해진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 사이의 모순이 이미 해결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추론은, 특정 기간 동안 특정 과제에 대한 사회주의적 계획의 영역에 충분히 있지 못하고 또한 노동과 생산물들의 관계가 가치형태로 완전히 표현되는 바와 같이 일정한 사적 노동의 특징을 여전히 보전하였던, 집단농장 농민층의 노동력을, 당시에 전 인민 소유를 통제하던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노동의 수준으로 끌어들임에 의해, 사적 노동이 근절될 것을 요구하지도 못했다. 1954년 판 ‘정치경제학 교과서’는 쏘비에트 정치경제학을 보즈네쏀쓰끼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품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 교과서는 생산관계와 생산력 간의 사회적 모순이 쏘비에트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한다는 ≪경제적 제 문제≫에서의 쓰딸린의 입장을 거부했다.

1953년 이후 쏘련 공산당은 더 이상 레닌주의적 전통에 입각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 아니라, 전인민의 당으로서 스스로를 규정했다. 맑스가 공산주의의 확립 이전까지 지속된다고 간주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전인민국가로 대체됐다. 1953-1958년 경제개혁 이전에, 쏘련에서 상품 생산은 특수한 형태라고 쓰딸린이 했던 것과 같은 주장이 가능했었다.

“연합한 사회주의적 생산자(국가, 집단농장, 협동조합)들의 생산물들과 주로 관계하고, 그 활동의 영역이 개인적 소비품목에 국한되며,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그리고 그것의 ‘화폐 경제’와 함께 사회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공고화를 위해 복무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상품생산.” (쓰딸린, 앞의 글, pp. 20-21.)

그러나 생산수단이 상품으로서 유통되기 시작한 1953-1958년의 시장개혁 이후, 상황은 질적으로 변화했다. 사회주의 하에서도 존재하는 생산의 상품 형태는, 쓰딸린이 지적했던 것처럼, 특수한 형태였다. 상품 생산에 가해진 제한은 개혁 이후로 사라졌고, 상품형태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는 다른 유형의 경제관계를 체현하기 시작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기본 세포인 상품이 그 자체 내에 임금노동과 자본의 싹을 포함한다는 점을 확립했다. 급속하게 팽창하는 상품생산의 논리는, 노동력, 잉여가치, 자본주의적 이윤 그리고 평균이윤율과 같은 경제적 범주들이 다시 한 번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흐루쇼프에 의해 1961년에 제시된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한 강령이 평가되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공산주의로의 전진에서,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이 작동하는 영역의 모순을 살피는 대신, 쏘련 공산당은 그와 같은 범주들의 가일층의 활용을 구상했다. 그 강령은 사회주의 하에서 계급의 폐지라는 과제로부터 후퇴했으며, 쏘비에트 사회의 생산관계를 재구축하는 것을 회피했다. 집단농장의 집단적 소유를 전 인민적 소유로 끌어올린다는, 쓰딸린이 제기한 전망은 종언을 고했다. 이를 대신하여 흐루쇼프 하에서 집단농장 소유와 국가 소유 간의 추가적인 합병이 채택되었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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