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통일에 대하여(1)

 

한동백 │ 회원

 

 

 

머리말 — (1)

I. 보편-특수-개별 — (1)

II. 인식의 상승 도정 — (1)

III. 상호외재성 — (1)

IV. 각 부문운동의 추이 — (2)

  IV-1. 여성

  IV-2. 장애인

  IV-3. 생태

  IV-4. 기타

V. 주관주의의 두 흐름 — (2)

  V-1. 직접성의 인식으로서 ‘개별’에 집착하는 우경적 편향

  V-2. 추상적 보편에 집착하는 좌경적 편향

결론 — (2)

 

 

머리말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하면서 계급운동에서 새롭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수없이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크게 발전해 온 부문운동과 계급운동의 통일 문제이다.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하면서 자본주의 기본모순은 그것의 기본적인 외화인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 모순만이 아니라, 이 대립 또는 모순의 외화인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인민 간의 모순, 자본과 자본 간의 모순,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간의 모순(제국주의의 네 가지 모순)을 격화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모순,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으로서 환경 문제 등을 발전시켰다. 이 다양한 모순은 부문운동이 주요하게 취급하는 모순으로, 제국주의 네 가지 모순을 기본적으로 반영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독립된 체계를 형성하며 발전하였다.

각 부문의 모순이 각각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는 사실은, 목적의식적인 통일 노력이 없을 경우 그 운동이 상대적으로 분절된 체계 속에 완전히 포섭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문운동은 독자적인 운동 조직과 이데올로기를 갖추고 있다. 대개 부문운동의 이데올로기는 이론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내적 운동과 각자 취급하는 부문의 문제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나누지는 않지만, 그 연관성에 대한 분석과 종합이 추상적인 수준에서 그치며, 실천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운동의 통일이라는 목적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진행된다. 결국 노동운동과 부문운동은 각각 분리된 각자의 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노동운동과 부문운동의 분리는 결과적으로 부르주아의 이해에 복무하게 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변혁을 바라는 동지들은 운동 간의 통일 문제에 관해서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노동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통일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보다는, 주로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계급운동이 부문운동을 맹공하여, 각각의 운동에서 부문적 성격을 완전히 소멸하면 변혁에 더 가까워진다고 간주하는 경우가 있다. 일부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문운동의 실천적 오류를 무근거하게 과장하여 오히려 노동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통일을 요원한 것으로 만든다; 다른 방향으로는, 각 부문의 문제의식에 대해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고, 추상화된 ‘통일’을 말하면 저절로 운동 간 통일이 된다는 식의, 매우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려고 한다. ‘변혁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행한다는 부문운동에 대한 ‘비판’은 대개 통일로의 상승이 거세되어 있으며, “모 아니면 도”식의 사고로 점철되어 있다.1)

쏘련 붕괴 이후 이어진 일련의 정치적 상황, 그 경향, 그리고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를 종합할 때, 부문운동의 규모 증대에는 이중적인 내용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영역 상의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전방위적으로 후퇴했다는 것이다; (2)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할수록 계급 간 모순뿐만이 아니라 계층 간 모순도 심화했다는 것이다. 두 내용은 서로가 서로를 근거하며, 노동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분리를 촉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은 (2)라는 객관적 사태로부터 발전한 부문운동이 계급적 관점을 거세하는 조건이 된다. (2)라는 사태로 인해 발전한 부문운동의 ‘독자성‘은 (1)이라는 사태를 강화한다. 조건은 사태의 근거가 되고, 사태는 조건의 근거가 된다. 부운운동 간의 관계에 관해서,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목적의식적으로 투쟁하는 계급운동이 운동 간의 통일이라는 과제에 관해 구체적인 정견을 제시해야 한다.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명해내기 위해서는 보편-특수-개별의 상관에 대한 변증법적인 논리적 전개, 그리고 인식의 불균등성에 관한 이해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부문운동에 관한 논의는 이러한 방향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계급운동은 계급운동대로, 부문운동은 부문운동대로, 분산된 전선을 펼쳐나가는 상황이 강화되었고, 이는 운동의 통일성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이 글을 통해 보편-특수-개별 간의 관계, 그리고 인식의 하강과 상승의 관계를 기본적인 수준에서 다룸으로써 그것이 어떻게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그것을 파악함으로써 어떻게 운동의 상승을 추동할 수 있는지 파악해보도록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좌·우경적 편향의 문제점에 지적하고 결론으로 들어갈 것이다.

 

 

I. 보편-특수-개별

 

실제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변증법적 맥락에서 언급되는 보편-특수-개별을 옳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과학의 핵심은 사물의 내적 전개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전개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운동에서 일관되게 관철되는 것, 그리고 일관성 없이 항상 변화하는 것, 전자에 대한 후자의 관계, 후자에 대한 전자의 관계 등을 빈틈없이 파악해야 한다. 이것의 파악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범주가 보편-특수-개별 범주이다. 예를 들어, 파리목에 속하는 모든 곤충이 가지는 보편적인 내용은, 파리목에서 여러 과가 나누어진다고 하더라도 일관되게 관철된다. 그런데 파리목은 한편으로는 그에 속한 과를 통해서만 규정된다. 이렇게 보편의 분지로서 특수는 규정된 보편으로 된다. 그런데 이 규정된 보편으로서 특수는 그것이 전개되어, 그것을 규정하는 분지적 규정성이 확립될 경우 보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규정된 보편(특수)에서 다시 그것의 분지로 전개되어나가는 것은, 보편의 구체적 내용을 드러내는 과정인 동시에, 보편 그 자체의 의미를 참되게 확립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개별이라고 한다. 개별의 두 계기는 보편과 특수이다. 즉, 보편과 특수의 통일이 개별2)이다. 개별은 가장 구체적인 것이며, 생동하는 직관의 계기이다.

실제로 생물 분류 체계에서 상위 분류의 구체적 내용은 하위 분류의 내용에 의해 규정되며, 하위 분류를 규정하는 속에서 상위 분류의 내용은 더욱 확고해진다. 더 나아가서, 상위 분류의 내용을 풍부화 함에 따라 하위 분류의 일반적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확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는 객관적인 것과 관계를 맺는, 주관적인 것에서만 실재하는 범주가 아니다. 보편-특수-개별의 전개 운동은 한편으로는 객관적 사물의 기본적인 존재 양식이기도 하며, 오히려 주관적인 범주 상에서의 보편-특수-개별은 이것의 반영이다. 객관적 사물, 즉 존재는 그것이 수많은, 다른 사물과 연관하여 한편으로 자신의 고유한 내용을 지양·보존하고, 또 어떠한 내용은 그 필연적 법칙성에 따라 폐기하며 자신을 전개해 나간다. S. L. 밀러의 유리 실험은 무기물이 다른 사물 규정과 연관하여, 그것의 특수로서 유기물로 전개되는 필연적 법칙성이 존재함을 증명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무기물이 특정한 조건 속에서 유기물로의 전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내용을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함을 통하여 무기물의 존재 양식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보편으로의 풍부화한 복귀로서 개별이기도 하다. 이후 이어진 S. 폭스의 실험은 간단한 유기물에서 상대적으로 복잡한 유기물로 전개되는 필연적 법칙성이 존재함을 증명하였다. 여기서 간단한 유기물은 이제 보편으로, 상대적으로 복잡한 유기물은 규정된 보편으로서 특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기물의 객관적 성질이 드러났는데, 이 내용이 개별이다.

특수는 규정된 보편이며, 오로지 보편은 개별로서 현현하며, 이 매개 과정은 전개 운동의 계기가 된다는 것은 수많은, 복잡한 자연현상, 그리고 인간 사회의 현상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편-특수-개별이 변증법적으로 상관한다는 이러한 통찰은 헤겔이 제공하였다. 하지만 헤겔은 ≪논리의 학≫에서 절대이념의 자기 운동이라는 관념론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여 보편-특수-개별을 신비적인 개념의 자기 운동3)으로 설명하였다. 헤겔의 개념 논리학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규정은 이념의 절대적 자기 운동이라는 본질 속에서 정립된 그것의 계기이자 산출자로 된다. 그러나 헤겔 체계의 신비주의적 외피를 거둬내고 본다면, 그의 보편-특수-개별 범주 서술은 실로 보편과 특수, 특수와 개별, 개별과 보편 간의 관계의 진리를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보편-특수-개별에 대해서 헤겔 체계의 신비주의적 외피를 거둬내는 작업은, 헤겔의 저서에서 단순히 취할 것만 기계적으로 취하고, 버려야 할 것은 역시 기계적으로 버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이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행해지는 형이상학적 및 절충적 방식에 불과하다. 보편-특수-개별에 대한 헤겔의 체계에 내재되어 있는 관념론적 지반에 대해 일부 문장을 제외시키고 만족하는 방향이 아니라, 맑스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의 보편-특수-개별의 내용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관념론적 지반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그것을 유물론적으로 승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주체성은 주체로서만 존재하고, 인격성은 인격체로서만 존재한다”4)는 헤겔의 견해와 관련지으며, 그의 보편자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표시되는 모든 강조는 모두 인용자의 강조):

 

“헤겔이 국가의 기초인 현실적인 주체들에서 출발하였다면, 그가 신비한 방식으로 국가를 주체화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 [주체성은 주체로서만 존재하고, 인격성은 인격체로서만 존재한다는; 인용자] 헤겔은 그것들을 그것들의 주어들의 술어들로 파악하지 않고, 이 술어들을 자립시키고 그것들이 그 후에 신비적인 방식으로 주어들로 변하게 만든다. 술어의 실존은 주체이다. 따라서 주체는 주체성 등의 실존이다. 헤겔은 술어들, 객체들을 자립시키지만, 그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현실적 자립성, 즉 그것들의 주체로부터 분리시켜 자립시킨다. 그런 후에 거기에서 현실적 주체가 결과로 나타나지만, 이에 반해 우리는 현실적 주체에서 출발하여 이것의 객체화를 고찰해야만 한다.”5)

 

헤겔에 따르면 보편자의 고유한 존재 방식이자, 그 필연적인, 그리고 가장 구체적인 존재 형식은 개별자이다. 이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는 추상적으로 사유된 개념의 계기로서 보편자를 ≪법철학≫에서 현실적 범주의 그것들과 등치시킨다. ≪법철학≫에서 드러난 보편자에 대한 헤겔의 견해는, 국가의 기초인 현실적 주체를 개별의 계기로서 보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국가를 개별로 상정하는 대신, 오히려 “주체의 유일한 존재 방식은 주체성”이라는 언술을 통해 국가를 술어와의 관계로부터 떼어내어 ‘국가로 표현되는 보편(자)’을 완성시킨다. 그러나 실제로 보편-특수-개별에 대한 변증법적 관점을 견지한다면 국가는 제 현실적 주체의 전개 결과로서 개별자로서, 그리고 제 현실적 주체는 보편으로 총화되어야만 한다. 즉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제 계기인 ‘현실적 주체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사물의 전개 과정에서 선행 보편과 지속적으로 그 규정력을 생성해나가며 또 소멸하는, 변화하는 개별자와 관계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맑스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헤겔은 실제적인 존재(주체)에서가 아니라 보편적 규정의 술어들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리고 어쨌든 이 규정의 담지자가 여기에 존재해야만 하기에 신비한 이념이 이러한 담지자가 된다. 이것은 이원론인데, 헤겔은 보편자를 현실적 유한자, 즉 실존하고 있는 것, 규정된 것의 현실적 본질로서 고찰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현실적 존재를 무한자의 참된 주체로서 고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6)

 

특정한 술어를 추상적인 언술을 통해 보편으로 ’승화‘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주체는 곧 주체성”의 필연적 사례로 헤겔이 언급하는 것은, 헤겔이 보편에 대해 관념론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헤겔은 신적 주체로서 보편을 상정한 바 있으며, 그것을 “순수하고 완전한 형식 규정”으로서 다룬 바 있다. 이것은 그가 보편-특수-개별의 변증법적 상관을 견지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보편에 대한 전통 형이상학적 관점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순된 견해 사이에서 ‘보편과 상관하지 않는 개별’은 언제나 등장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는 보편-특수-개별 간 제 관계에 대한 변증법 체계는 한갓 우연적인 체계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맑스가 비판한 헤겔의 한계와 관련지어서 ≪논리의 학≫의 내용을 숙지한다면, 헤겔의 한계가 더욱 명확하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논리의 학≫에서 헤겔의 보편-특수-개별에 대한 혁명적인 통찰을 계승하되, 그가 관념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엥엘스는 실재의 전개라는 양상 속에서 보편, 특수, 개별을 이해하였는데, ≪자연변증법≫에서 이러한 이해 방식이 판단과 관계되어 나타난다:

 

“모든 형태의 운동은 다른 모든 형태의 운동으로 전화될 수 있고, 전화될 수밖에 없음이 밝혀진다,[보편자; 인용자] … 역학적 운동이 특수한 상황 하에서 (마찰을 통하여) 하나의 다른 특수한 운동형태, 즉 열로 이행하는 성질을 보여주었다, … 마찰이 열을 만들어 낸다는 개별화된 사실이 기록된다.”7)

 

모든 형태의 운동은 다른 모든 형태의 운동으로 전화될 수 있으며, 또 전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태는 보편자, 그리고 어떠한 마찰이 열을 만들어 낸다는 사태는 개별자가 된다. 그리고 이것의 중항, 즉 매개항은 역학적 운동이 특수한 상황 하에서는 열로 이행한다는 특수자이다. 여기서 보편-특수-개별은 사태가 지니는 내용 규정의 전개 양상으로 간주된다. 개별자는 보편자의 내용을 간직하고 있으며, 보편자는 개별자를 통해서만 현실화된다. 보편자의 실현, 즉 구체적인 관철은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개별자로 나타나며, 그것은 오로지 특수자라는 매개항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보편과 개별, 보편과 특수 간의 관계를 항상성, 불변성, 고립성이 관철되는 유와 종의 종차 관계와 동일시하는 형이상학적 견해―사태의 내용 규정을 완전히 사상하고, 형식 규정만이 종차 관계를 통해 그 보편과 특수를 실현한다고 주장하는―는 보편-특수-개별을 필연적 전개 양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과정으로서의 모든 사태가 이전 사태의 내용에 근거하여 생성될 수밖에 없음을 승인한다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사회적 존재―아니면, 이것에 지양되어 있는 자연의 규정력 일반까지 모두 포괄하여―의 부단한 전개 과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소시지 빵을 빨리 먹었다”는 사태의 내용을 이루는 전 측면은 서로 고립된 게 아니라 연관을 이루고 있는데, “먹었다”라는 술어는 필연적으로 빵과 연관을 이루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고, “소시지 빵” 역시 서로에 대해 그러한 통일된 관계를 지닌다. 이러한 연관이 곧 내용이 되며, 이 연관 규정이 일체성을 이루는 동일성의 규정이 되었을 때 그것을 형식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소시지 빵을 빨리 먹었다”는 “빵을 먹었다”라는 사태를 그 보편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빵을 먹었다”라는 것은 보편이 된다. 개별로 나아가는 객관적 운동의 심연을 보면, 그(개별자)에 보편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 “빵을 먹었다”는 보편은 빵을 먹게 한, 또는 먹을 수밖에 없던 계기를 그 보편으로 지니며, (나) “소시지 빵을 빨리 먹었다”라는 개별자 역시 자신의 분지를 확보해 가며 그 스스로가 보편이 된다. (가)의 보편자는 허기가 진 것을 포함하여,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게 하는 수많은 (얼핏 봐서는 외적인 관계로 보이는)규정을 그 근거로, 즉 그 자체 내에 지닌 것이다. 헤겔은 ≪본질논리학≫의 마지막 장에서 형이상학적 인과론의 동어반복적 한계를 지적하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보편-특수-개별의 전개로 파악하여 ≪개념논리학≫을 정립한다. (나)는 “소시지 빵을 빨리 먹었다”라는 보편의 구체적인 자기실현, 자기 복귀로서 자신의 분지를 형성하고 자기 운동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지닌다. 여기서 “소시지 빵” 역시 수많은 개별자로, 그리고 “빨리 먹었다”는 것 역시 구체적으로 어떻게 빨리 먹는지에 관한, 그 개별자로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레닌은 이러한 내용을 인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개념의 객관성, 개별자 및 특수자 속에 있는 보편자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헤겔은 객관적 세계의 운동이 개념의 운동 속에 반영되는 것을 연구할 때, 칸트와 그 외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마치 단순한 가치형태, 즉 주어진 한 개의 상품과 다른 하나의 상품이 교환이라는 개별적 행위는 이미 자기내에 미발달된 형태로 자본주의의 모든 주요한 모순들을 포괄하듯이, 가장 단순한 보편화, 제 개념(판단, 추론 등등)의 최초의 가장 단순한 형성이라는 것은 인간을 통한 세계의 심오한 객관적 연관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전진하는 것을 본래적으로 의미한다.”8)

 

더 나아가서 보편-특수-개별에 대한 형이상학적 견해는 제아무리 발달하여 보았자 헤겔이 옳게 밝혀낸 바와 같이, 추상적인 판단으로서 반성 판단이라는 늪에서 절대 헤어날 수 없다. 반성 판단은 경험적으로 확인된 몇 가지 ’공통성‘을 자의적으로 추출하여 그것을 추상적 보편화하는 판단이다. 보편과 개별, 유와 종에 관한 형이상학적 견해에 머무는 이상, 보편에서 개별로의 전개 과정을 고려하는 유(類)와 종(種)을 형성할 수 없으며, 항상 경험적 제한성에서 기인하는 자의성으로 구성된 ‘보편적 대상’을 매개로 하여 유를 형성할 수밖에 없기에 항상 반성 판단에 머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유는 한편으로 그것의 종에 대한 종으로 파악될 수도 있고, 다시 그 반대―문단의 초입부에 언급되었던 바로 그 상태―로 파악될 수도 있다는 심각한 결함을 가진다. 예를 들어, “(a)모든 사과는 (b)일정한 단맛을 내는 과육을 가진 과일에 (c)속한다”라고 할 때, (b)는 (a)의 유로 되고, (a)는 (b)에 대해서 종이 된다. 그러나 (b)는 (a)에 대한 추상으로서 성립된 추상적 보편에 불과하다. 즉 (b)는 계속 자기 전개하는 (a)의 내적 연관을 사상한 채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a)와 (b)간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못하다. (b)에 대해서 어떠한 ‘경험적 보완물’을 붙여나간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가 된다. 헤겔은 이를 “주관적 범유성” (subjektive Allheit)이라 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a)가 (b)에 대해서 종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모호한 사태로까지 퇴행하게 된다. 즉 어느덧 비대화된 (b)는 (a)의 ‘개별자’ 내지는 서로에 대한 한갓된 추상적 동일자―(a)에 대한 (b)의 관계와 그 반대의 관계에서 추상적으로 동일자적 관계를 내포함으로써―로 전환된 것이다. 헤겔은 전칭판단―반성 판단의 일종인―을 다루면서, 반성 판단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타당하게 총괄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전칭판단을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면, 결국 앞에서 지적된 바 있는 즉자대자적인 성격의 보편성을 이미 전제된 것으로 간직하고 있던 주어가 이제는 이 보편성을 자체 내에 정립된 것으로서도 지니고 있다. 모든 인간이라는 표현은 첫째로 인간이라는 유(類)를 나타내지만, 둘째로는 그 모든 인간이 개별화된 상태에서 유(diese Gattung in ihrer Vereinzelung)9)를 나타내는 바, 여기서 이 모든 개별자는 동시에 유의 보편성으로까지 확대되며, 반대로 보편성도 개별성과의 이와 같은 결합을 통하여 바로 이 개별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규정된다. 이로써 정립된 보편성은 전제되었던 보편성과 다름 없게 같아진 것이다. … 이로써 개별성은 더 이상 단초적인 상태에서의 개별성, 이른바 카유스10)와 같은 개별성일 수는 없고, 오직 보편성과 동일한 규정 혹은 보편의 절대적 피규정성이다.”11)

 

즉 단초적인 개별자였던 (a)는 “객관적인 보편성으로 규정됨에 따라서 주어는 더 이상 이와 같은 관계 규정하에, 혹은 총괄적인 반성 하에 포섭되기를 그친다”12) 마찬가지로 반성 판단으로 구성된 반성적 추론은 오성적 추론으로서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으로 귀납적 추론이 지닌 결함이 그것이다.

보편-특수-개별의 변증법적 전개 양상은 미리 짜여있는 보편자, 특수자, 개별자라는 형식이 미지의 목적인에 의해 배열되는 게 아니라 이전의 사태가 자신의 내용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과정이다. 현재의 순간에도 그 부단한 전개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현실은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보편으로서 가장 구체적인 개별이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될 것은, 보편과 특수, 그리고 개별 간의 관계는 내용과 형식 간의 관계도, 본질과 현상의 관계, 그리고 주요한 것과 비주요한 것과의 관계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형식은 내용이라는 본질규정의 특수일 수도 있으며, 또한 현상은 본질에 관해서, 그리고 비주요한 것은 주요한 것에 관해서 특수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과 정반대의 방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의 전개 양상은 언제나 포착된다. 특히 생산양식의 형식인 생산관계가 생산양식의 모순을 이루는 주요한 측면이 되었을 때, 대개 격화된 모순의 양상은 이 형식의 규정된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뒤의 세 쌍범주를 보편-특수-개별의 그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기본모순의 격화 양상으로서 수많은 적대적 현상은, 본래 자본주의 하 고유한 사회적 관계가 확립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 봉건제 사회에서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 간의 대립 양상―그것이 바람직하든, 바람직하지 않든 간에―은 나타날 수도 없었다. 장애인과 장애인을 차별하려는 세력 간 대립 양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장애인은 봉건제 사회에서, 그 지역적, 문화적 특수성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존재했겠지만, 현재보다 일반적으로는 극렬한 차별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서 장애인은 (차별을 당연시하는) 비장애인으로 현시되는 그들 스스로의 대립 항과 현실적으로 대립하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본제 사회가 확립된 이후 지속적으로 생산력이 발달하여 몇 가지 형식적 자유 및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되면서 장애인은 기존의 제도를 통해 정치적 주체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대립의 계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서 필연적으로 형성되는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다. 환경에 대해서 말한다면, 봉건제 사회 하에서 압도적으로 자연이 인간에게 가하는 일방적인 모순이 존재했음에 반해, 오늘날 자본제 사회 하에서 환경 문제는 산 노동을 먹고 자라는 자본의 끊임없는 자기 증식이라는 규정을 받는다. 자본이라는 사회적 존재는 자연과 인간 간 모순을 과거보다 더욱 첨예화한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부문운동의 객관적 근거인, 각 부문운동의 대상이 지니는 대립적 성격은 자본주의 기본모순이라는 기본 규정을 받는다. 각 부문운동의 객관적 대상은 그것이 자본주의 기본모순의 규정된 보편으로서 특수라는 매개 항을 갖는 구체적인 개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각 부문운동에서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회 문제는 그것 자체가 자본주의 기본모순이라는 보편의 구체적인 실현 및 관철 과정이며, 그러한 문제의 총괄이 곧 자본주의 기본모순이라는 보편의 존재 양식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흔히 계급모순이라 일컬어지는 노자 대립은 자본주의 기본모순의 개별로서, 이것의 외화이긴 한 동시에, 다양한 부문운동의 대상이 지니는 계기로도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다양한 양상이 존재한다. (1) 자본주의 기본모순으로부터 곧바로 규정된 보편으로서 각 부문의 대상이 정립되기도 하는가 하면, (2) 자본주의 기본모순으로부터 파생된 노자 대립의 개별적 양상이 각 부문의 대상의 매개항으로서 특수가 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2)의 경우는 대표적으로 노동자 처우개선 문제에 있어서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 간의 관계와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다. 이 문제는 필시 노자 대립의 규정된 보편으로서 특수이다. 실제로 한 기업 또는 산업 영역에서 노자 대립을 첨예화하는 조건이 소멸할 경우,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둘 사이의 대립이 크게 소멸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 내에서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이른바 상대적으로 직위가 높은 남성 노동자 또는 부르주아에 의한 ’갑질‘, 노동 현장에서 낙후한 성 역할의 침투, 기타 직장 내 사회적 문제 등은 자본주의 기본모순을 드러내 주는, 그것의 존재 양식으로서 개별 사태이다. 그리고 그것은 규정된 보편인 노자 대립―동시에 이 사태에 한해서는 언급된 것의 보편인―이 매개 항을 이루고 있다.

여성 노동자에 대한, 상대적으로 높은 직위에 있는 남성 노동자나 사업자의 ’갑질‘ 문제를 먼저 간략하게 다루어보자. 이 개별적 사태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 관계라는 조건이 없이는 성립하기 힘들다. 그리고 대개 그러한 사태에서 피해자는 여성 노동자이고, 남성 노동자, 그리고 남성 사업자는 그것의 반대물의 위치에 있는 개별적 사태도 실은 보편에 내재되어 있는 내용의 실현인 것이다. 대부분 여기서 거론된 문제는 이윤을 무한대로 증폭하려는 인격화된 자본으로서 자본가의 경영 일환13)14)을 그 계기로 지니는 개별적 사실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노동자에게는 이것을 거스를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조건 역시 언급된 문제를 더욱 격화시키는 요인이 된다.15) 언급된 관계 규정은 본질적으로 노동자와 자본가 간 적대적 관계로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적대적 관계의 구체적인 성립은 여성과 남성 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여성이 종속될 수밖에 없게 한 규정성을 필연적으로 붙이고 나온다.16)

 

즉 이 문제는 (1)의 내용 역시 침투되어 있다. 특히 자본주의 하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생겨나는 여성 실업자 및 반(半)실업자 문제, 30대 이상 여성의 비중이 높은 저임금 직군 내에서의 차별 문제는 (1)의 규정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1)과 (2)이라는 전개 과정이 중층을 이루어 형성된 규정성은 여성 외 장애인, 환경, 성소수자, 심지어 동물권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그 규정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에 대한 진전된 내용은 제4장에서 다룰 것이다.

 

 

II. 인식의 상승 도정

 

두 번째로 역시 실제적인 내용을 서술하기에 앞서 부문운동의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며, 또 어떻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그 원리를 간략하게 살펴보아야 하겠다. 글은 부문운동 이데올로기의 낱개 내용을 일일이 검토하지는 않을 것이며, 일반론을 논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자본주의 기본모순의 외화인 개별적 현상은 각 부문운동 이데올로기의 존립 근거이다. 이러한 사회적 존재로서 개별적 현상은 특정한 형식과 내용을 지니는 사회적 의식을 형성하는 근거이다. 즉 그것이 반동적이든, 아니면 혁명적이든 특정한 내용과 형식의 사회적 의식은 오로지 그에 대응되는 특정한 내용과 형식을 지니는 사회적 존재가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가지진 않는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은 한국 사회의 수많은 사회적 병폐, 즉 모순을 겪는 경로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어떠한 사회에서 자신이 가진 자연스러운 욕구, 또는 사회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거나 그러기 매우 힘든 경우 누구나 자신이 겪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세주의를 통해 ’극복‘하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사회 체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으로 나아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을 수호하는 정치적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는 당파, 즉 자본가, 반동적 성직자, 부르주아 국가기구 관료 등은 현재의 낡은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이해관계를 가질 것이다. 이들 역시 ‘나름대로의 사유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를 옹위하기 위한 계급투쟁을 수행한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계급투쟁, 자본주의를 옹위하기 위한 계급투쟁은 계급투쟁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계급투쟁은 아니다. 후자는 그것이 자기의식에 다다른 수준일 수는 있을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언급한 바와 같이 소외된 활동이다. 즉 그것은 자본의 강제 명령으로서 외적 합목적성에 종속되는 자연발생성의 발로일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서 목적의식적인 수준까지 매우 다양한 양상을 지닌다. 자연발생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에 대한 본질을 인식한 것과 거의 관련이 없이 진행된다. 그것은 대상화 작용에 의하여 우연적으로 자본에 대항하는 외양을 띠는 것으로 출현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것은 자본에 대항한다는 성격을 지닐지라도 일시적인 수준에 그친다. 이 과정에서 소부르주아적 혼란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계급투쟁은 목적의식적인 투쟁의 조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 즉 특정한 내용을 지니는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을 이해하는 것에 다다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반영되었던 사회적 존재를 인식―상대적 진리로서―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인식은 항상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라는 방향성을 지니고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P. 꼬프닌에 따르면 객관적 실재라는 구체(O₁)에 대한 단초적인 경험, 즉 낮은 수준의 실천(P₁)에서 추상적 사유의 정립(구체에서 추상)으로, 그리고 추상적 사유에서 이론지가 발달(Z)하여 재차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이념적 실천(P₂, 추상에서 구체)으로 나아가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 전체 과정은 반영물의 근거인 객관적 실재의 부정의 부정(인식주관이라는 매개를 거치는)을 통한 풍부화한 복귀(O₂)인데, 이 복귀는 실천을 통한 사회적 현존재의 개변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은 완전히 닫힌, 단절적 과정이 아니며, 항상 구체적 사유의 내용이 추상적 사유의 구성물과 연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개념판단은 항상 현존재, 반성, 필연성의 판단을 전제하는 동시에, 가장 접근한 판단으로서 현존재 판단은 항상 이미 인식된 수준에서 작동되는 개념판단의 내용을 전제하고 이루어진다. 인식의 상승이란 이미 인식된 사물의 모순을 발견하고, 그 새로운 모순을 다시 극복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진리 자체는 인간이 객관적 실재를 파악해가는 사회적-역사적 과정이다.”17) 꼬프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리와 오류의 대치에 있어서 이 상대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식의 현실적 과정에서는 비진리, 즉 오류의 여러 계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있는 순수한 형태의 진리란 없다는 데 있다. 진리는 그밖의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순수한 형태로는 다만 추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인식운동의 각각의 현실적 과정이 참이 아닌 데서 참으로 가는 운동을 의미하나, 그 과정은 환상이나 오류의 여러 계기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 그 어떠한 이론도, 과학발전의 경과로 인해 참이 아닌 점이 발견되는 여러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로서 또 객관적으로 참인 지식이 오류의 여러 계기를 자기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식의 발전이 일정단계에 도달하면 과학의 여러 진리(고정화됨으로써)는 그 시대의 오류가 된다.”18)

 

예를 들어, 인류는 지구가 구체라는 것을 벌써 고대에 인식하였지만,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은 N. 코페르니쿠스, J. 케플러, T. 디거스, G. 갈릴레이, G. 브루노 등 생산력 발전 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한 근세에 이르러서(물론 고대에 이미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 학자가 존재하였지만)야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인류는 고대에 지구가 구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일정한 구체가 천체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동시에 그러한 인식 과정에서 모순이 크게 발견되지는 않았던 천동설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금성 밝기 관측이 진행된 이후 천동설은 그 학설 자체가 극복되지 않은 모순을 내재한 결함된 체계로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발전은, 아무런 부정적 기반 없이 추동된 것이 아니다. 지동설은 천동설이 발전하면서 그간 쌓아놓은 몇 가지 특정한 사유방식―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이어진 천체운동을 수학화하는 고유한 방식들―을 기반으로 하여, 그것의 대립자로서 발전한 것이다.

상승하는 인식은 낡은 체계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개념적 사유와 그에 관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극복은 기존에 인식된 결함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즉 상승하는 인식의 내용과 형식은 극복되지 않은 모순을 내재한 체계와 그에 관한 낮은 수준의 인식으로부터 발전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적의식적인 투쟁과 자연발생적인 투쟁을 통해 성장한 결과이다. 그런데, 발전을 이룬 목적의식적 활동은 자연발생적 투쟁을 목적의식적인 투쟁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 이것은 당적 지도나 이론적 선전 등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모든 자연발생적인 사유형식과 내용은 그 인식주관의 경험적 내용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 경험적 내용을 구성하는 사회적 존재, 즉 각자 상이한 사회환경에서 사회적 의식을 촉발시킨 구체는 각자 상이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모든 인식주관이 단초적인, 그리고 즉자적 수준에서 가지는 표상물은 그 내용이 모두 다르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의 청년은, 청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복합적인 조건에 따른 사회적 규정력을 받게 된다.19) 물론 청년이라는 것만이 아닌, 구체적인 생활수준에 따라 받게 되는 사회적 규정력도 포함되어 더욱 복잡한 단초적 표상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단초적인 표상들, 헤겔의 표현대로라면 ‘단초적인 것’, ‘최초적인 것’은 인식의 상승 도정에서 형성되는 중간물(P₁ → Z)이 지니는 규정성을 결정한다. 이 중간물은 보편적인 대상들, 즉 추상적 보편의 잡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표상물이 지니는 경험적 제약성은 실제로 그것을 구성하는 내용적 측면인 추상적 보편의 고유한 성질로부터 비롯된다. 잡다한 추상적 보편의 ‘묶음’이 지니는 모순을 그 본질로 하는 경험적 제약성은 개념적 사유로 상승하기 전까지는 극복되지 않은 채로, 그 자체 내에 새로운 경험을 추상적 보편화하는 방식으로, 그 주관적 규정성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잔존하게 된다. 이 특수한 사고형식은 그 “감각표상 및 관념의 재료 속으로 ‘침잠(沈潛)’해서 그 속에 ‘가라앉아’ 있음으로써 외적인 실재의 형태[실천; 인용자]로 의식적인 사고작용에 대립”20)함을 거듭하며 그 규정력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러한 객관(실천으로서)-주관(중간적 표상물로서)의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응집 작용을 통해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체계, 즉 사회적 의식은 그것이 특정한 부문운동에서 작동하는 수많은 개별적 사상으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체계는 사태를 구성하는 일부 측면으로서의 표층 범주와 그 범주 간 연계를 바르게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 심층에 속하는 범주 간 연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기존에 표층을 파악하였던 모든 방식은 앞서 언급하였던 과정 그대로로, 주관 상에서 그 규정력을 보존―우리가 흔히 ”생각이 굳어졌다“고 하는 그것으로서―하게 된다. 총체적-사회적 존재21)의 변증법적 복귀 운동의 일부 측면만을 파악하여 그것을 추상화한 사유형식은 한계를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 한 개별적 여성 임노동자는 자신이 겪는 생활상에서 궁핍화의 근원을 따질 때, 그것을 정부의 일정한 여성정책의 차이 문제로 환원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사회정책의 성격에 따라 개별적인 궁핍화 수준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점에서, 해당 여성 임노동자는 상대적으로 표층에 드러난 범주의 연관을 옳게 고려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임의의 실천을 통해 ’확인‘된 것이며, 또한 실천을 총화하여 형성한 이론적 형식으로 되고, 그것은 이어질 실천의 이론적 근거로 된다.

  그러나 맑스와 엥엘스가 타당하게 밝힌 그대로, 상대적·절대적 궁핍화의 심화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운동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추동되는 것이며, 또한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사회정책이 근본적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역시 필연으로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상대적·절대적 궁핍화의 심화가 필연이라는 사실은 앞서 파악된 표층 범주에서 심층 범주로의 인식의 상승이 진행되어야지만, 이해할 수 있다.

  인류의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발달 국면에서 주체적 규정력을 얻은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실천, 그 실천을 반영한 사유물은 사태를 낱개의 정적인 추상물로 형성한다. 특정한 구체적 현실성에 대한 경험을 그 성립·형성 근거로 지니는 이러한 즉자적 존재 규정으로서의 추상물을 모아놓은 사유 내용과 형식에서 사태에 대한 본질 규정의 고려는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이 추상물은 앞서 일리옌꼬프가 언급한 과정을 거쳐서 그 특유의 보존력(保存力)을 형성한다. 이 보존력의 연쇄작용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총체적으로 활동하는 구체적인 것인 객관적 운동의 실제적 매개 작용·연관 작용의 전 측면을 옳게 파악해낼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론적-실천적 재현과 객관인 총체성 간 불일치에 기초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문운동 이데올로기가 사태의 일부 측면에 대해서는 타당한 인식을 표현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당사자 계층의 경험에만 집착하거나, 또는 잡다한 추상적 ’개별자‘―추상적인 한에서 추상적 보편자와 다르지 않은―의 나열에 그치는 이유이다.

낡은 사회에 대한 모든 자연발생적 저항은 그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 체계를 필연적으로 지닌다. 그것은 자연발생적 수준에 대응되는 이론적 내용이 일정한 수준에서 자기동일성을 지니게 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형이상학적이며, 사회의 제반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자본주의의 본질, 즉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운동법칙을 이해한 것과 거리가 먼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태운동에서 심층생태학과 같은 경우, 생태 파괴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들어가 있으나 즉자적 수준에서 그치며, 대개 고대 헤르메스주의나 티베트 밀교 등의 영성주의를 참고하여 생태문제를 신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심한 경우 그것은 인간 일반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다른 예로는 J. E. 러브록의 가이아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목적론을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에 접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이론은 인간과 자연의 적대 심화, 즉 물질대사의 균열에 있어 자본의 파괴적 운동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이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상기한 모든 이데올로기 체계는 환경 문제가 인간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는 기초적인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적지 않은 부문운동에서 발견하게 되는 이른바 ‘부문 이데올로기’는, 그 내용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전술(前述)한 대로의 성격을 필연적으로 일정 지닌다.

계급운동이 의식적이라면, 인식 상의 한계로 인해 부분적 ‘통찰’에만 머무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인식 도상에서 응집하여 형성되었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그리고 또 그것이 어떻게 하여, 상승하기 시작하는 인식 과정의 중간물로 나타났는지, 또 그것이 현재 운동 발전 도정에서 어떠한 긍정적 의미를 지니는 지까지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파악이 이루어져야지만 자연발생적 운동을 견인하는 건전한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부 부분적 인식에 머무르고 있는 각 부문운동에 대해서, 그 해당 부문의 활동가들이 실천 상에서 가장 쉽게 인식할 수 있을 만한 내용상의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파악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체성의 관점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인식 상에서 직접적으로 반영된 특정 모순을 구성하는 범주에 대한 특정한 극복 방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22) 이때 주어진 모순에 대한 극복으로 형성된, 과정으로서의 상(象)은 아직은 부문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충분히 소멸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연대의 강화를 통해 새로운 한계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 직접적 모순을 해소할 수 있도록 보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조로서 인식을 상승시키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계급운동이 구체적인 개별자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계기로 된다. 즉 계급운동이 지니고 있는 운동 상의 몇 가지 한계가, 부문운동의 고유한 활동과의 연대를 통해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계급운동은 청년으로서의 노동자, 여성으로서의 노동자, 장애인으로서의 노동자 등을 넘어서, 그것 자체 내에 지양·보존된 노동자로서의 청년, 노동자로서의 여성, 노동자로서의 장애인 등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구체적인 정립 활동으로서 보편-특수-개별의 전개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구체적 현실성에 내포한 다양한 측면을 파악하는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형성되어가는 과정으로서 구체적 보편이란, 개별을 자체 내에 포괄하는 보편이지, 개별을 사상시키는 보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써 각 부문에 대한 대처에서 계급운동은 오류와 그에 따른 맹동이 아니라 진리, 목적의식적 실천을 성취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더욱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반복됨은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 통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일은 한편으로 운동 전체가 그 이론적 고민과 실천에서 긍정적인 것을 지양·보존하고, 인식 상의 한계에서 비롯된, 그릇된 사유 규정을 폐기해 나가는 일반적 과정으로도 된다. 계급운동이 각 부문운동의 상승하는 측면, 또는 그 상승의 실재적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노동 중심성’이라는 ‘형식적 보편자’에만 얽매인다면 통일은 물론이고 가장 기초적인 견인조차 이룰 수 없을 것이다.

 

 

III. 상호외재성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통일로서 인식은, 개별화 작용하며 사회화된 객관적 실재의 반영이다. 제1장과 제2장을 통해 존재의 객관적 운동 과정과 인식 과정이 긴밀한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 관계의 규정 하에서 부문운동의 이데올로기가 성립된다는 것을, 그리고 계급운동은 부문운동의 고민 일반을 모조리 사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긍정적인 것을 자체 내에 간직하며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계급운동이 부문운동과의 연대를 통하여, 그리고 부문운동의 고민에 대한 자체 내로의 지양을 통하여 그 한계를 극복해 나가며 성장할 수밖에 없는 그 근저에는 상호외재성이라는 객관 범주가 존재한다. 계급운동을 포함한 모든 운동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동시에, 상호외재(相互外在, Außereinander)하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23) 즉 자본주의 기본모순에 대응되는 계급운동은 그것이 어떠한 ‘자기동일성을 전혀 건드리지 않는, 정지해 있는 모순’을 반영하는 ‘정지해 있는 (실천)운동’이 아니다. 기본모순의 개별화 작용을 통해 나타난 수많은 부문의 문제는 기본모순의 외화라는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로 그것에 전제되는 것으로서, 각 개별화 작용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현존재는 저마다의 그 고유한 체계를 지닌다.

유기적 연관 속에서 동시에 서로에 대해 외면적 관계를 형성하며 저마다의 고유성을 내적으로 보존하려는 구체의 ‘아이러니함’은 헤겔이 현존하는 모든 것의 보편적 존재 방식의 범주로서 ≪개념논리학≫의 <기계론>에서 다음과 같이 다루었다:

 

“지금까지 비자립적이고 스스로에게 외면적이었던 객관이 이제는 개념의 복귀를 통하여 마찬가지로 개체로 규정된다. 중심 물체의 자기 동일성은 여전히 구심점을 향한 성향, 노력(ein Streben)이라는 점에서 이 동일성에서는 외면성(Außerlichkeit)이 부착되며, 이 외면성이 중심 물체의 객관적 개별성 속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이 외면성에는 다름 아닌 객관적 개별성이 전달된다. 모든 객관은 저마다의 자기의 중심성을 통하여 그 첫 번째 중심을 벗어난 곳에 자리 잡게 되며, 이들 자신이 곧 비자립적인 객관에 대한 저마다의 중심이다.”24)

 

헤겔은 이를 객관적 개념, 즉 이념의 외화 작용으로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그는 이러한 “중심으로부터의 이탈” 작용을 추론의 구성물인 매사(媒辭)의 연관 작용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유물론자는 상호외재의 본질을 주관적 추론 과정에서 구하지 않는다. 상호외재라는 존재 방식은 물질의 일반적인 존재 양식이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실제로 상호외재를 부정하는 순간 과학적 방법의 적용 가능성도 소멸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의 본질을 통해 드러난다. 모든 과학적 분석과 종합은 구분되는 두 (상대적) 자립 체계에 대한 비교로부터 시작되는데, 구분되는 각 사물 간의 상호외재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직접적으로 동일한 것에 대한 ‘비교’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상호외재를 부정한다면 모든 규정은 동시에 모든 규정과 연관을 맺는다는 점에서 서로 모두가 직접적으로 동일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인데, 이는 이질적인 각 체계 간의 비교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으로 된다.

현재까지의 모든 과학발전의 양상은 상호외재를 부정하기는커녕 증명한다. 우리는 개별 원자와 분자의 계기인 입자를 말하는 동시에, 개별 원자와 분자, 그리고 입자가 뚜렷이 구분되는 상호외재하는 (상대적) 자립자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는 사회법칙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관계는 한편으로 계급모순의 개별화 작용에 의한 상호외재의 현실화를 반영한 것이다. 물론 앞서 밝힌 대로 모든 외재하는 것의 내부에는 보편의 규정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는 한편으로 계층의 문제라는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 동시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스스로가 본질에 대해 외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에 대한 여러 모순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것이 한편으로 본질적으로 계급의 문제임을 파악하면서도, 또한 계층의 문제임을 동시에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별임금격차, 여성인권 보장에 관한 다양한 문제, 여성 대상 범죄라는 사회 문제, 여성을 향한 모든 인습 등 모든 사태는 기본모순으로서 계급문제의 구체적 존재 양식(내면)인 동시에, 외재성을 얻은 여성 일반의 문제(외면)이기도 하다. 나열된 모든 사태는 사유재산제의 확립 과정에서 심화된 여성에 대한 종속이라는 역사성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현재 부단히 증식하고 있고 또 자기 가치 파괴를 반복하는 자본 운동의 제 양상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을 내면으로 고찰할 수 있지만, 그것이 여성이라는 규정성을 얻은 현존재와 관련되는 구체적인 사태로서의 개별로서 나타난다면 항상 나열된 사태로 나타난다. 나열된 사태의 개별적 내용은 그것의 고유한 표현방식(형식)으로 드러나고 이것이 다시 외재성의 내용을 확립한다. 예를 들어, 여성 대상 범죄는 계급제의 고유한 사회적 관계 하25)에서 추동된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적이지만) 자립적 체계성을 갖는 형식으로서 그 고유성을 보존하며 관련된 다른 사태의 조건이 된다.26)

그러나 개별의 외재성은 그것이 외재한다는 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더욱 광범위한 본질적 체계의 형성의 한 수단으로서도 기능한다. 그렇게 하여 개별 사태는 구체적인 보편을 생동하게 표현한다. 그런데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편의 절대적인 존재 양식이 될 수밖에 없다.

사태에 대한 불충분한 사유와 실천은, 특정한 사태의 내면과 외면 중 하나만을 보려고 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보는 것은 결국 본질적으로 외면적 인식이다. 전자, 즉 ‘내면’만을 보려고 하는 것도 역시 외면적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유와 실천은 내면에만, 또는 외면에만 천착하지 않는다. 구체는 내면의 외면으로의, 또 외면의 내면으로의 객관적 운동 작용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모든 개별 사태에 대한 구체적 인식은 그것의 내면으로 나아가는 와중에도 그것이 다른 사태에 대해 외재하는 면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고려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생명 활동을 이해함에서 그것들을 구성하는 각 분자 간 (생)화학적 작용을 고찰하는 대신, 각 분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의 고유한 운동 방식만을 거론한다면, 그것을 영양가 있는 연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체계의 일정 단계로서 발전한, 그리고 서로가 구분되는 각 고유한 사회법칙에 대해서 따지자면 역시 이는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법칙에 대한 인식은, 해당 인식의 대상과 관련된 고유한 범주 구성과 관련된 고유한 방식의 연구를 통해서만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각 부문운동의 추이를 살펴봄으로써 각 부문운동의 고유한 활동이 사회 변혁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제4장에서 다루어보겠다. 노사과연


1) 이러한 “모 아니면 도”식 사고로는 수많은 의제 운동과 국내 파시스트 간의 대립을 온전히 해명해낼 수 없다. 의제 운동은 몰락한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화한 소부르주아라는 연속적 사태를 반영하고 있기에 구체적인 분석과 종합을 요한다.

 

2) “직접적으로 이미 보편성이 즉자대자적으로 특수성을 이루었듯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특수성도 또한 즉자대자적으로 개별성인 것이다.” (G. W. F. 헤겔, 임석진 역 (2022), ≪대논리학≫ 제3권, 자유아카데미, p. 87.) 그러나, 1986년에 쓰여진 문건인 이진경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은 되려 특수를 보편과 개별의 통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문헌은 1980년대 학생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문건으로 보이나, 보편과 개별 사이의 매개항을 곧 통일자로 간주하며, 통일의 의미를 양 동일자의 서로에 대한 제약 관계의 성립, 또는 다양한 규정의 체계를 이루는 연관으로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진경은 이 문헌에서 통일자를 규정짓는 그것의 고유성을 사태와 사태를 매개하는 중항, 즉 특수라고 주장한다. (이진경 (1986),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증보판 (2008), 그린비, pp. 122-123, 125.)

 

3) 레닌은 이에 대해 “개념은 물질의 최고의 산물인 두뇌의 최고 산물이라고 전도시켜라”라고 하였다. (W. I. 레닌, 홍영두 역 (1989), 《≪철학노트≫, 논장, p. 116.)

 

4) MEW, Bd. 1, S. 224; K. 마르크스, 강유원 역 (2011), ≪헤겔 법철학 비판≫, 이론과 실천, p. 69.

 

5) MEW, Bd. 1, S. 224; pp. 69-70.

 

6) MEW, Bd. 1, SS. 224-225; p. 70.

 

7) MEW, Bd. 3, S. 493; F. 엥겔스, 윤형식·한승완·이재영 역 (1989), ≪자연변증법≫, 중원문화, p. 229.

 

8) 레닌, ≪철학노트≫, 논장, pp. 129-130.

 

9) 가령, (a)는 처음에 범유성으로서 (b)의 다종으로서 취급되었지만, 어느덧 모든 사과는 하나의 범유성을 이루고, 이 범유성에 (b)가 지니는 술어적 내용―주관적인 수준에서 성립된 ‘범유성’인―이 종으로 정립된다. 즉 모든 인간이 개별화된 상태에서 유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과는 개별화된 상태에서 유가 된 것이다.

 

10) 헤겔이 예시 판단문에서 단초적인 개별자로 상정했던 주어이다.

 

11) 헤겔, ≪대논리학≫, 제3권, pp. 152-153.

 

12) 헤겔, ≪대논리학≫, 제3권, p. 154.

 

13) 여기서 경영 일환의 본질은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한 자본가에의 강제 명령이다.

 

14) “‘지난 3년간 시장변화에서 경쟁업체의 수가 증가한’ 기업체에서는 여성을 채용할 의사가 3.5%p 감소(모형 2)하고 ‘경쟁업체와 비교하여 주력 제품/서비스가 가격이 매우 저렴’한 기업체나 ‘품질이 매우 우수한 업체’에서는 각각 8.9%p, 7.0%p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지미 (2007), <사업체패널조사>의 고용관련 여성차별과 그 결정요인, 한국노동연구원, 노동정책연구 제7권 제3호, p. 81.) 해당 논문의 한계와 무관하게, 이 논문에 따르면 채용 외, 승진 문제에 있어서도 이윤 실현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음(pp. 83-84.)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특히 경쟁력이 낮은 자본일수록 여성 및 여성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는 연구라 할 수 있다. 직장 내 여성 노동자에 대한 처우 문제가 자본의 이른바, ‘경영 전략’과 관계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사례는 상당히 많다.

 

15) 이 부분에 대해서 ≪기업 내 여성관리자의 성차별 경험≫(김수한·신동은 저, ≪한국사회학≫ 제48집 제4호, p. 102.)의 조사를 참고하자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동조합 역시 여성의 권익향상과 경력형성에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은 직원의 처우개선과 경력유지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 노조는 조합원의 이해와 입장을 대변해 주고, 인사결정자의 불합리한 차별적인 대우로부터 조합원의 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들이 노동조합을 통하여 남녀차별 문제를 회사에 제기할 때, 자신들의 주장에 보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2000). 실제로 여직원이 대부분 노조에 가입한 한 공기업에서는 남녀의 호봉차별이 노동조합을 통한 문제제기를 통하여 시정되었다(이주희 외, 2004:174).”

 

16) 이 부분과 관련된 변증법적 쌍범주로서 본질과 현상 간 관계에 대해서는 굳이 다루지 않겠다. 일부 동지들은 이 내용을 보고 필시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는 같은 노동자로서 자본에 대항해야 하는 동료다”라고 하면서 “갈라치기를 하지 말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급한 내용은 ‘갈라치기’(사실 나는 이러한 표현을 별다른 숙고 없이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 표현은 지배계급과 그 선동꾼들이 사회적 갈등을 억지로 봉합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객관적으로 생성되는 현상이다. 무엇보다 이 현상은 보편으로서 자본주의 기본모순이 내재한 내용의 실현태로 된다. 따로 연구보고서나 논문 인용을 하는 것마저 새삼스럽게도, 한국 사회의 직장 내에서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성 역할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에 대한 종속의 실질적인 내용을 이룬다. 계급 간 모순은 항상 계층 간 모순을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방식으로 그 존재를 실현해 나갈 수밖에 없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가는 것은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가 같은 프롤레타리아로서 자본에 대항해야 한다는 목적성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17) P. 코프닌, 김현근 역 (1988), ≪마르크스주의 인식론≫, 이성과현실사, p. 144.

 

18) 앞의 책, p. 145.

 

19) 예를 들어, 청년이 겪는 실업, 상대적 빈곤 및 기타 특수한 사회적 관계의 요소들이 그것이다.

 

20) E. V. 일렌코프, 우기동·이병수 역 (1990),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연구사, p. 143.

 

21) 총체성은 오로지 역사적 발달 국면이라는 제한성 속에서만 그 존재를 확립하고, 또 자기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 사회 형성 이래, 인간 생활과 인간을 규정짓고 또 그것을 구성하는 근거인 총체성은 사회적 존재의 총체성이 될 수밖에 없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러한 역사관 기초는 실제 생산과 과정을, 그것도 직접적인 삶의 물질적 생산에서 출발해서 전개하는 것이며 이 생산과정과 연관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생겨나는 교류 형태 즉 시민 사회의 다양한 단계를 전체 역사의 기초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그 기초는 시민 사회가 국가로서 어떤 행위를 하는가를 서술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울러 의식을 통해 생산되는 다양한 이론적 산물과 그 산물의 형태 전체를, 이를테면 종교, 철학, 도덕 등등을 시민 사회에서 설명하고 이런 의식의 산물과 형태가 발생하는 과정을 시민 사회의 다른 단계에서 추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태가 전체적으로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MEW, Bd. 03, S. 37; K. 마르크스, F. 엥겔스, 이병창 역 (2019), 《독일 이데올로기》, 제1권, pp. 82-83.)

 

22) 인식론에서 언급되는 범주는 본질적으로 논리학의 범주의 문제이기도 하다. 상이한 범주들로 구성된 특정 체계에 내재한 모순은, 그 특정 모순 체계에 상응하는 해결 방식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연쇄된 구체적 사태는 특정한 순차를 이루는 논리적 범주에 대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E. V. 일렌코프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모든 과정이 발생하는 보편적 형식에 관한 과학인 논리학은 구체적 전체의 형성과정에서 연속적으로 계기하는 단계들을 반영하는 특수한 개념(논리적 범주)의 엄밀한 체계로 정의된다. 한 이론 내에서 연속적으로 계기하는 범주들의 전개는 인간의 의지와는 독립한 객관적 특징을 지닌다. 그러한 범주들의 연속적 전개는 경험적 근거를 갖는 이론적 지식의 연속적이고 객관적인 발전에 의해 우선적으로 표현된다. 그와 같은 표현 형태로, 현실적인 역사과정의 객관적 연속은 우연적 사건들의 분열된 형태나 역사적 형태가 제거된 채 인간의 의식 내에 반영되는 것이다.”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연구사, pp. 240-241.)

 

23) 예를 들어, 우리는 ‘자연과의 투쟁 주체로서 인간‘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다. 실은 외적 자연은 인간에 대해서 외재적 관계를, 또 인간은 외적 자연에 대해서 외재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상호외재성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연과 인간이라는 의미와 통일되어 있다.

 

24) 헤겔, ≪대논리학≫ 제3권, pp. 284-285.

 

25) “즉 남성 지배를 보호하는 부르주아 법은 오직 유산자들과 프롤레타리아 통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에 대한 지위에는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한다. 그의 경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개인적·사회적 관계이다. 또한 대공업으로 인해 여자가 가정에서 노동시장과 공장으로 나와 종종 가족의 부양자로 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가정에서의 남편의 지배는 그 마지막 잔재마저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런 일부일처제 이래 그칠 줄 모르는 아내에 대한 학대는 예외이다.” (MEW, Bd. 21, SS. 73-74;F. 엥겔스, 김대웅 역 (1991),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아침, p. 97.)

 

26) “토지소유제가 확립되자마자 벌써 저당권이 발명되었다(아테네를 보라). 난혼과 매음제도가 일부일처제의 뒤꼬리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저당권이 토지소유의 뒤꼬리를 집요하게 따라다니게 된다.” (MEW, Bd. 21, S. 162; p. 227.)

 

노사과연 회원

1개의 댓글

  • 헤겔.변증법의 보특개론을 아주 엄격하게 적용한 글입니다.

    그런데 소연방 해체 후 변증법의 보특개론이 사회과학계에서 자취를 감춘 지가 꽤 됐는데 처럼 의미심장한 면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소연방 해체 후 활동가 집단 사이에서도 변증법의 보특개론이 쓰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글이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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