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우크라이나 전쟁] 지금, 반전운동에 요구되는 것

우크라이나 사태에서의 ‘우리’의 책임

 

오무라 사이이치(大村歳一) | ≪사상운동≫ 편집부

번역: 편집부

 

* 이 글은, 일본의 <활동가집단 사상운동>이 발행하는 ≪사상운동(思想運動)≫ 제1075호(2022년 4월)에 실린 글입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연방정부는 ‘특별군사작전’을 발표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현대 국제법의 목적은, 국제연합 헌장의 전문(前文)에 있는 것처럼, “전쟁의 참화(慘禍)로부터 장래의 세대를 구”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한 근본원칙은, 어떠한 나라도 타국에 그 정부의 동의 없이 군대를 보낼 권리가 없다는 데에 있고, 이번 러시아의 군사행동은 이 원칙을 깨뜨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전쟁은 그 자체가 악(惡)이고, 우크라이나 인민에게도, 러시아 인민에게도 어떤 이익도 되지 않으며 파멸적인 손해를 초래할 뿐이다. 우리는 즉시 정전(停戰)할 것, 그리고 교섭에 의해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태 앞에서 ‘국외자’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에는, ① 파국을 악화시킨다, ②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③ 파국을 완화하려고 노력한다는 세 가지가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①보다는 ②를 택해야 할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은 ③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주의 쿠바의 국제연합 주재 대사 루이쓰 뻬드로쏘(Pedro Luis Pedroso Cuesta)가 국제연합 총회에서 말한 것처럼, “무력을 행사하게 된, 그리고 법적 원칙과 국제규범을 준수하지 않게 된 원인”을 철저하게 검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검증 없이는 ‘우리’의 행동은 어떠한 유효성도 없을 뿐 아니라,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국제법상의 문제

 

요 몇 해 동안,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에서의 서방측 국가들과는 대조적인 대응에서 두드러졌던 것처럼 국제법의 원칙을 중시해온 과거가 있고, 직전에도 2월 4일 중국과의 수뇌회담 때의 공동성명이나 2월 18일에 이루어진 쿠바와의 외교 관계자 간의 협의에서, 일본도 포함한 서방측 국가들의 “룰(rule)에 기초한 국제질서”가 아니라 국제연합 헌장의 옹호가 필요하다고 표명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번 러시아군의 행동에는 놀라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 쿠바나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두 나라는 러시아의 군사행동을 지지하고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사태의 요인을 신중히 검증한 위에서의 대응을 찾고 있을 뿐이고, 국제연합 헌장의 옹호야말로 자기들의 입장임을 반복하여 표명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동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주민 보호”라는 구실은, 1999년에 유고슬라비아를 공습했을 때에 NATO가 사용한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 보호”라는 구실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어느 쪽이든, 2000년 4월에 쿠바의 하봐나에서 열린 싸우쓰 써미트(South Summit) 제1차 회의의 G77 선언, 제54조에서, “우리는 국제연합 헌장이나 국제법상의 일반원칙에 근거하지 않은 이른바 ‘인도적 개입’의 ‘권리’를 거부한다”고 선언된 것처럼, 국제법상의 근거는 없다.

러시아 정부는 코소보의 선례를 십분 활용하고 있는데, 실로 이 점에서 미국 및 그 동맹국들의 책임을 엄히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해 동안 잊혀 있던 국제법을 돌연 상기하게끔 한 서방측 국가들의 “이중 잣대(double standard)”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바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여러 해에 걸쳐서 위법한 전쟁을 반복하여 국제법을 취약화하고 파괴해온 데에 있는 것이다.

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은 그 시작이었다. 그 이후 국제연합 헌장이라는 명확한 문언(文言)에 따른 국제연합의 정치적 권위는 ‘국제사회’라는 애매한 ‘도덕적’ 권위로 대체되고, 국제법 질서(쏘련 ‘붕괴’까지는 일정한 한계 내에서 유지되고 있던 여러 국가 간의 질서)의 완전한 해체가 진행되었다.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면서 펜타곤[미 국방성]의 자문기관 국방정책위원회의 당시 위원장이었던 리차드 펄(Richard Norman Perle)이 국제연합의 죽음을 “신(神)에게 감사”(≪가디언(The Guardian)≫, 2003. 3. 21.)했을 때, 최초로 든 선례는 코소보였다. 그것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로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의 길을 열어젖혔다.

러시아의 군사행동은 이러한 정글적 상황에 편승한 것이다. 물론 미국과 NATO가 유고슬라비아에 부당한 작전을 했다고 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같은 작전을 할 권리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양자의 연관성을 보지 않으면 안 되고, 거기에 이번 사태를 불러온 원인의 하나가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발단 ― 2014년

 

애초에 우크라이나 위기 그 자체가 제국주의에 의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정치적 행동의 결과였다. 국제연합 헌장 제2조 제1항은 주권평등의 원칙을 확인하고 있다. 상세한 것은 ‘우호관계 원칙선언’(1970. 10. 24.) 등의 국제연합 총회 결의로 확인되어, 내정 불간섭 의무를 확인하고, 타국에 의한 합법정부의 전복활동과 그것에의 관여는 국제연합 헌장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정변은 미국이 지원했다. 이는 당시 NED(전미민주주의기금)의 공식 싸이트가 우크라이나에서의 65의 프로그램[1][역주] 이 프로그램은, 현재 NED의 홈페이지로부터 삭제되어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과 CIA의 군사 개입을 다루고 있는 책, Killing … Continue reading에의 지출을 공표하고 있었던 사실로부터도 파악할 수 있다. NED의 회장이었던 칼 거쉬만(Carl Gershman)은 우크라이나를 “최대의 획득물”(≪워싱턴포스트≫, 2013. 9. 26.)이라고 불렀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레짐췌인지(regime change)’의 표적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NED는, 레이건 정권 시대인 1983년, 라틴 아메리카나 중동에서 벌어졌던 CIA의 합법정부 전복ㆍ내정간섭 활동이 차례로 드러났을 때에, 그 같은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설립된 CIA의 하청기관이다. NED의 공동 설립자인 앨런 와인쉬타인(Allen Weinstein)은, “우리가 오늘날 하고 있는 일의 다수는 25년 전에 CIA가 비밀리에 했던 일이다”(≪워싱턴포스트≫, 1991. 9. 22.)라고 공언했다.

2013년 11월 이후 실제로 우크라이나에서 ‘반정부 데모’가 시작되자 뉼런드(Victoria Jane Nuland) 국무차관보, 맥케인(John Sidney McCain III) 상원의원, 파이어트(Jeffrey Ross Pyatt) 주 우크라이나 대사와 같은 미국의 정치가가 그 현장에 가서 ‘데모대’ 지지를 표명하는 등, 공공연히 내정간섭 행위를 했다.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퐈씨스트를 포함한 민족주의자들이 비상히 폭력적이고 과격한 언동을 하고 있었는(≪CNN≫, 2014. 3. 6.)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정변(政變)에 미국이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결정적인 것은 ‘반정부 데모’가 격화되고 있던 2014년 2월 6일에 익명인에 의해서 누설된 뉼런드와 파이어트의 통화기록이다. 같은 날 복수(複數)의 거대 미디어에도 보도되고, 익일 ≪BBC≫ 2월 7일 자에 통화 내용을 문자화한 기사가 게재되었다. 각 미디어는 이 통화기록에 관해서 뉼런드의 발언 “EU 따위 똥이나 처먹어라(EUなんてクソくらえ; Fuck the EU~!)”를 문제 삼았을 뿐이었지만, 두 사람은 거기에서 새로운 정부의 수상으로 야쩨뉴크(Arseny Yatseniuk)가 취임하는 데에 합의하고, 새로운 정부의 진용(陣容)으로 어떤 야당 간부를 선택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 몇 주 후에 야누꼬비치(Viktor Yanukovych) 대통령은 ‘해임’되고, 2월 27일 임시 대통령과 함께 합의대로 수상에는 야쩨뉴크가 취임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헌법을 위반한 쿠데타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신정권을 재빨리 “합법적”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 부당성은, 우크라이나 유권자의 극히 일부밖에 대표하고 있지 않은데도, 쓰보보다[2][역주] 쓰보보다(Всеукраїнське об’єднання «Свобода», 전 우크라이나 동맹 “자유”) ― 우크라이나의 신나치 성향 극우 민족주의 … Continue reading나 쁘라비 쎅또르[3][역주] 쁘라비 쎅또르(Правий сектор) ― 서부 우크라이나를 근거지로 하는 국수주의적 기독교 우파 극우 정당ㆍ민병대. 같은 극우세력의 관계자들이 부자연스럽게 많이 정부의 요직(부수상, 국가안전보장장관, 국가안전보장차관, 검찰총장, 농업장관, 환경장관)에 취임한 것에서도 명백했다. 이렇게 구성된 쿠데타 정부는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 각지에 있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사무소들이 습격당하고, 공산당원은 의회에서 축출되었다. 레닌 동상을 포함하여 기타 쏘비에트와 반퐈씨즘 기념비들도 파괴되었다. 그 반면에 현재의 우크라이나에서는, 유대인 학살에도 가담했던 나치 협력조직 ‘우크라이나 민주주의동맹’(OUN-B)의 창설자 쓰떼빤 반데라(Stepan Andriyovich Bandera)의 탄신제(誕辰祭)가 거행되고 있다.

미국의 간섭의 배경에는 IMF(국제통화기금)의 경제개혁안을 야누꼬비치가 거부했다는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2012년에 IMF가 우크라이나에 관해서 작성한 96페이지의 보고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본 투하의 장벽으로 되어 있던 가정용 가스 보조금의 철폐를 요구하고 있었다.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사활의 문제이고, 거부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IMF는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한 나라에 융자를 하는데, 조건으로서 자본에게 유리한 정책을 채용하도록 그 나라의 정부에 작용한다. 결국 융자는 미끼다. 거기에서 요구되는 것은 이윤의 축적을 노린, 규제의 철폐,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삭감 등으로, 그 후과는 사람들의 생활에 덮친다. 당시 뉼런드는 2013년 12월의 ‘미국-우크라이나 재단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가의 장기적인 경제적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 IMF가 제창하는 경제개혁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해임’ 직전의 야누꼬비치도 IMF와의 교섭 재개를 표명하여 사태의 진정화(鎭靜化)를 꾀하고 있었다. 이렇게 IMF가 주장하는 개혁을 받아들일 것인가 어쩔 것인가가 표면화하여 사태의 쟁점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쿠데타 정부는 재빨리 3월 27일에는 가정용 가스의 보조금을 50% 삭감하고, 2016년까지 완전 폐지할 것을 약속, IMF는 270억 달러의 융자를 결정했다.

이 쿠데타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끄릠과 돈바쓰 사람들이다. 야누꼬비치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끄릠과 돈바쓰의 러시아계 주민은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선발한 대통령이 불법적으로 타도되었다고 간주하여 저항했다. 두 지역 모두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 연방으로의 편입을 바라는 주민투표를 하여 주민의 대다수가 지지했는데, 러시아는 끄릠의 것은 받아들였지만, 돈바쓰의 것은 거부했다. 그 결과, 미국이 지원하는 끼예프의 쿠데타 정권은 고립된 돈바쓰에 대한 ‘대(對)테러 작전’을 발표하고, 정변 과정에서 형성된, 반데라를 숭배하며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나치의 상징인] 갈고리 십자가)를 내거는 퐈씨스트(네오나치) 민병 ‘아조프 대대’도 포함한 부대를 보내, 중화기를 동원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이 2014년 이래의 우크라이나 위기, ‘돈바쓰 전쟁’의 발단이다. 이 돈바쓰 전쟁은 14,000명 이상의 사망자(≪알자지라(Al Jazeera)≫, 2022. 2. 21.)를 냈고,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결코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돈바쓰 전쟁에서 마리우뽈(Маріуполь)에 근거를 둔 퐈씨스트의 존재는 초기 단계에 독립계 저널리스트가 보도했는데, 쿠데타 수개월 후에는 대형 미디어들도 보도하기 시작했다. 2014년 8월 9일 자 ≪뉴욕타임즈≫에서 약간 언급된 것을 발단으로, 9월이 되면 ≪NBC≫나 ≪워싱턴포스트≫에도 언급되게 되었다. 2015년 7월 7일 자 ≪뉴욕타임즈≫는 아조프 대대와 동맹을 맺고 이슬람 과격파가 돈바쓰 전쟁에 가담하고 있는 사실도 보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퐈씨스트는 결코 러시아의 미디어에만 나오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퐈씨스트는 어디까지나 소수파에 불과하지만, 돌격대적인 역할을 하는 ‘효율적인’ 소수파로서 존재하고 있고, 나치 협력자의 탄신제가 수천 명 규모로 개최되고 있는 사실에서도 우크라이나에서의 퐈씨즘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미국이 지원한 우크라이나 쿠데타가 돈바쓰 전쟁을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2014년 이래의 우크라이나 위기는, 미국이 국제법의 기본원칙을 위반하며 행동한 ‘레짐췌인지’ 활동의 직접적 결과이고,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수십 년간에 걸쳐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시도해온 것의 일환이다. 근원은 여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사태의 발단이 2014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쓰크 협정의 파탄

 

나아가서, 민쓰크 협정의 이행을 우크라이나 정부가 계속 게을리하고 있었던 것도 이번의 악화 요인임을 볼 필요가 있다.

2014년 9월에 ‘민쓰크-1’, 2015년 2월에 ‘민쓰크-2’가 맺어졌는데, 오늘날 일반적으로 ‘민쓰크 협정’이라고 할 경우, ‘민쓰크-2’를 가리킨다. 돈바쓰 전쟁을 바람직하게 종결시키기 위한 ‘민쓰크 협정’은 정전(停戰), 중화기의 철수, OSCE(유럽안전보장협력기구)에 의한 정전 감시, 포로교환 및 분쟁 관계자 전원의 사면, 그리고 돈바쓰의 높은 자치권 보장(외교, 교육제도, 사법, 군사의 독립성)에 합의한 것으로서, 끼예프와 돈바쓰의 분쟁 당사자들 간의 직접교섭에 의한 법률제정ㆍ헌법개정에 의해서 실시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실시 후에 비로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돈바쓰의 국경지배권을 회복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부가 돈바쓰와의 직접교섭을 계속 거부하면서 공격을 계속했지만, 러시아와 함께 협정에 서명했던 독일이나 프랑스가 이를 묵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돈바쓰 전쟁은 8년간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NATO의 동방 확대

 

미국의 우크라이나 간섭은 NATO의 동방 확대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NATO 국가들은 1990년부터 1991년에 걸쳐 고르바쵸프에게 NATO의 동방 확대를 하지 않겠다고 반복하여 구두로 약속했다. 2017년 12월 12일에 기밀해제되어 죠지워싱턴 대학의 국가안전보장 문서고에서 공개된 자료집(대화 메모 및 전보)은 일련의 약속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1990년 2월 9일, 미국의 베이커(James Addison Baker III) 국무장관은 고르바쵸프와의 회담에서 서독이 동독을 병합하더라도 “NATO의 관할 구역을 1인치라도 동방으로 확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1월 31일에 바이에른주에서의 독일 통일에 관한 대연설에서 “NATO의 영토를 동으로, 결국 쏘련에 접근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던 독일 외무장관 겐셔(Hans-Dietrich Genscher)의 말을 답습한 것이었다. 다음 날인 2월 10일에는 서독의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수상이 고르바쵸프와의 회담에서 “NATO는 활동 범위를 확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표명했다. 공개된 자료는 그 외에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영국의 싸처(Margaret Hilda Thatcher) 수상이 동종의 약속을 한 것도 증명한다. 1991년 7월 1일에는 NATO 사무총장인 뵈르너(Manfred Wörner)가 브뤼쎌의 NATO 본부를 방문 중인 러시아 쏘비에트 최고평의회의 안전보장위원회 회원에게 자신과 NATO 이사회가 확대에 반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구쏘련의 국제법상의 지위는 러시아연방이 계승하고 있고, 이것은 현재 러시아와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NATO는 동방으로 확대했다. 1999년, 2004년, 2009년, 2017년, 2020년이라는 합계 5번에 걸쳐 NATO는 동유럽에서 가맹국을 확대하여, 가맹국이 16개국으로부터 30개국으로 팽창한 것이다.

NATO의 설립 목적은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을 하나로 묶어 공통의 이익이 있는 무역협정ㆍ다국적기업ㆍ금융기관에 유리한 정치ㆍ경제 질서의 확장을 추진하는 데에 있었다. “쏘련의 위협”을 구실로 삼고 있었지만, 쏘련 ‘붕괴’ 후에도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활동범위도 가맹국도 모두 확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미국과 그 하위 동반자인 NATO의 주요 국가들은 사실상 쏘련 ‘붕괴’ 후의 동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며, 쏘련이 없어진 후의 상황에 편승해서 IMF 등의 기관도 이용, 민간투자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도록 각국 정부에 개입하고, 사회보장 프로그램과 같은 사회주의의 ‘잔재’를 일소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다수는 정치적ㆍ경제적인 간섭에 의한 전복이라는 방법을 취했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공습이라는 방법을 취했다. 군사조직 NATO의 거기에서의 역할은 자본의 확장을 밑받침하는 ‘주먹’으로 기능하는 데에 있다. 쎄르비아인들에 대한 7일간의 공습은, 당시 아직 NATO에 가맹하고 있지 않고, 국민이 NATO의 행동을 지지하고 있지 않는 불가리아나 루마니아 같은 나라들의, NATO 주요국의 요구에의 굴종을 재촉하고, NATO에 침공당하지 않는 보장으로서 NATO 가맹교섭을 촉진하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위협으로서 기능했고, 이후 동유럽 각국의 NATO로의 통합이 진행된다. 바로 NATO 주요 국가들의 자본주의적ㆍ제국주의적 이해가 NATO의 동방 확대를 가져온 것이다.

NATO의 동방 확대가, 고르바쵸프에게 했던 약속에 반하는 것은 명백하다. 분명히 NATO 국가들이 했던 약속은 구두약속이고, 새롭게 기밀해제된 문서도 구두약속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두약속이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좋은 것”으로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국제관계 속에서 감쪽같이 속여서 불시에 치는 것도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구두약속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선량한 이웃으로서 서로 평화롭게 생활”하기 위해서 있다는 국제연합 헌장의 목적에도 합치하지 않는다.

최근 수년 동안 미국과 NATO는 군대와 군사기지를 차츰 러시아 국경에 근접시키고, 우크라이나 군(軍)도 포함시켜 ‘씨브리즈 2021(Sea Breeze 2021)’과 같은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는 등, 대(對)러시아의 군사적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을 러시아 측이 위협이라고 인식한 데에는 어떤 불가사의도 없다. 이러한 동맹관계의 확대는 1999년의 이쓰딴불 수뇌 선언, 2010년의 아쓰따나(Астана)[4][역주] 1997년에 알마띄(Алматы)에서 천도한 후 2019년 3월에 현재의 이름인 누르쑬딴(Нур-Султан)으로 바뀌기 전까지의 카자흐스탄의 수도 이름. 수뇌 선언에 담겨 있는 “불가분의 안전보장 원칙”에도 반한다. 2015년 이후 ‘NATO우크라이나위원회’의 활동은 활발해지고,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NATO 가맹이라는 다음의 확대를 계속 시사(示唆)하며, 동방 확대의 정지를 요구하는 러시아 측의 외교적ㆍ합리적인 안전보장 제안도 일축해왔다. 미국 및 NATO 주요 국가들의 이러한 도발적 언동이 이번의 악화, 결국 러시아의 반발을 불러왔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독일 공산당원 멜리나 데이만의 총괄

 

물론 위에 말한 것과 같다고 해서 러시아 연방군의 행동이 정당화될 리는 없다. 자본주의 러시아의 국가적 선택에도 다른 지배계급의 이해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러시아는 쏘련이 아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독일 공산당 기관지 ≪운제레 차이트(Unsere Zeit)≫ 3월 4일 호에 게재된 기사[5][역주] Melina Deymann, “Den Kampf verloren”, Unsere Zeit, 4. März 2022. <https://www.unsere-zeit.de/den-kampf-verloren-166471/>에서 1979년생의 독일 공산당원 멜리나 데이만(Melina Deymann)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패배다. 무엇보다도 서방측, 특히 독일에서의 평화운동의 패배다”라고 말한다. 요컨대 데이만에게 있어서 이번 사태는 NATO의 확장을 저지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자국(自國)의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패배한 결과인 것이다. 그녀는 더 나아가 다시금 사태를 초래한 자국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호소한다. 일찍이 로자 룩쎔부르크나 칼 리프크네히트가 말한 것처럼, 적은 자국 정부인 것이다.

그녀 등은 “뿌찐을 지원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사무소에는 “러시아의 분뇨”라는 낙서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역내(域內) 평화” 하의 자국 독일에서 뿌찐이나 러시아인을 악마화하고 고발하는 소리는, 단지 자국의 제국주의를 면죄하고 가일층의 군비확장,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의 무기수출을 조장하고 있을 뿐이고, 전쟁을 멈추는 힘이 되기는커녕 악화시키는 연료(燃料)일 뿐이다. 그녀 등은, 일찍이 “짜르를 지원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들처럼, 그것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다.

 

 

일본의 ‘우리’는

 

그러면, 일본의 ‘우리’는 이번 사태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일본의 ‘우리’는 서방측 제국주의 국가들의 일원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해도 좋지만, 무릇 ‘일미동맹(日米同盟)’(일미안보(日米安保))이 존재하고 있다. 나아가서 2007년 1월에 NATO 이사회에 출석한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일본의 수상으로서 처음 연설한 것을 시작으로, 2014년에 ‘일ㆍNATO 국가별 파트너쉽 협력계획(IPCP)’이 체결되고, 2020년 12월에 발표된 보고서 ‘NATO 2030’이 일본도 포함한 파트너 국가들의 관계자와의 면담을 거쳐 발표되는 등, NATO와 일본 정부가 관계를 강화해온 사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2021년 이후에는 미국 이외의 NATO 주요 국가들과의 동아시아 근해에서의 군사연습이 활발해지고, ‘씨브리즈 2021’에는 옵저버로서 일본도 참가하고 있다.

아베의 방문에 앞서 2006년 5월 4일, 일본의 외상(外相)으로서 NATO 이사회에 출석한 아소 타로(麻生太郞)(2013년에 “나치의 수법에서 배우면 어떨까?”라고 발언한 인물이다)가 연설을 했는데, 거기에서 NATO에 의한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작전 ‘불후(不朽)의 자유작전’에의 참가 등을 예로 들면서, “일본과 NATO의 협력은 이미 시작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일본의 그러한 군사행동, 해외파병은 일본국 헌법 제9조를 위반하는 것이고, 아소가 말한 것과 같은 NATO와의 협력을 추진해오면서 일본 정부는 헌법 제9조의 공동화(空洞化)를 추진해온 것이다. 헌법 제9조의 공동화를 진척시키는 군사행동이 이번 사태의 요인의 하나인 국제법 질서의 취약화와 공동화에도 공헌해왔고, 이번 사태에 대하여 일본 정부와 일본의 ‘우리’의 책임을 묻는다면, 그 책임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프가니스탄 다음의 이라크에서도, 파병은 하지 않았던 리비아나 시리아에서도 일본 정부는 미국의 군사행동에 계속해서 지지를 표명했고, 일본 사람들은 거의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국제법, 국제연합 헌장의 기본원칙에 반하는 일관한 미국 및 NATO의 정책ㆍ행동이야말로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의 최대의 요인이고, 이에 ‘우리’는 계속 가담해온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크라이나 사태를 맞아 헌법 제9조의 옹호를 다시금 호소해야 할 것임은 명백한데, 무엇보다도 우선 물어야 할 것은 스스로의 국가와 그 동맹국이 추진해온 여러 군사ㆍ외교정책들이다.

문제의 그러한 맥락을 보지 않고 지금 일본에서 마구 “반뿌찐” “반러시아”를 외치는 것에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래 ‘우리’가 발언하고 쓰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측에서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것이며, 거기에서 생기는 효과가 어떠한 작용을 낳는가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령 거기에서의 ‘적’의 악마화가 전쟁 중에 드물게 얻을 수 있는 올바른 정보에 기초한다고 하더라도, 사태의 맥락을 잃게 하는 동시에, 더한층 군사적인 악화를 바라는 호전적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밖에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지금까지 이상의 일본과 NATO의 관계강화 및 핵무장도 포함한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대한 공헌으로도 될지 모르고, 사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이 오해되어 대만과 우크라이나의 잘못된 유추가 자꾸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악화의 선동으로도 연결될지 모른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쿠데타 때에도 일본 정부는 NATO 국가들과 함께 ‘G7’의 일원으로서 계속 성명을 내고, 미국의 간섭도 사실상 지지해왔다. 나아가,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2월 24일에 당시 아베 정권 하에서 외상(外相)을 하고 있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가 우크라이나의 “시장경제화”를 말한 것을 시작으로, 3월 24일에는 “IMF 등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인 지원 틀 아래” 엔(円) 차관을 표명, 7월 17일에는 쿠데타 정부와의 사이에서 “경제개혁개발정책 차관”으로 합의했다. 다음 해인 2015년 2월 5일에는 일ㆍ우크라이나 투자협정도 체결하고, 일련의 과정에 편승해왔다. 이번에 일본 정부가 ‘G7’의 일원으로서 비상히 강력한 경제제재를 하고, 38톤이나 되는 자위대 장비품을 일미물품역무상호제공협정(日米物品役務相互提供協定)에 기초하여 미 공군 C17 수송기로 우크라이나로 수송하여 사태의 가일층의 악화에 가담하고 있는 사실만큼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말하는 것은 없다.

현재 도처에서 들리는 정부 및 ‘여론’의 “우크라이나와의 연대”라는 소리도, NATO 국가들 및 일본도 포함한 그 사실상의 동맹국에 의한 우크라이나에의 이러한 대규모 군수물자 수출을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으로밖에는 되지 않는다. 해결책은 전쟁이 아니라 교섭이고, 외교에 기회를 주도록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에 책임이 있고, ‘우리’가 하는 말이 누구에게 가닿는지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진공(眞空)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있는 반전(反戰)의 호소와 운동이야말로 진실로 평화에 기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악화는 제3차 세계 대전으로까지 발전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미 다이너마이트의 도화선에 불이 붙어 있어서, 그것이 작열하기 전에 불이 붙은 도화선을 싹둑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각국 인민의 자국 제국주의와의 투쟁만이 그것을 단절할 수 있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역주] 이 프로그램은, 현재 NED의 홈페이지로부터 삭제되어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과 CIA의 군사 개입을 다루고 있는 책, Killing Hope(일역 출판명 ≪アメリカ侵略全史(미국침략전사)≫)의 저자인 William Blum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williamblum.org/aer/read/126>
2 [역주] 쓰보보다(Всеукраїнське об’єднання «Свобода», 전 우크라이나 동맹 “자유”) ― 우크라이나의 신나치 성향 극우 민족주의 정당.
3 [역주] 쁘라비 쎅또르(Правий сектор) ― 서부 우크라이나를 근거지로 하는 국수주의적 기독교 우파 극우 정당ㆍ민병대.
4 [역주] 1997년에 알마띄(Алматы)에서 천도한 후 2019년 3월에 현재의 이름인 누르쑬딴(Нур-Султан)으로 바뀌기 전까지의 카자흐스탄의 수도 이름.
5 [역주] Melina Deymann, “Den Kampf verloren”, Unsere Zeit, 4. März 2022. <https://www.unsere-zeit.de/den-kampf-verloren-16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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