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여성해방론의 쟁점들

천연옥 │ 부산지회장

1. 글을 시작하며

여성해방론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명칭도 다양하다. 나는 여성억압에 반대하는 모든 이론을 여성해방론으로 통칭하고, 그 속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즘,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으로 구분지으려 한다. 이렇게 다양한 여성해방론의 여러 쟁점들을 살펴보고 가장 과학적인 이론으로서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에 대한 왜곡을 반박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는 여성해방론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다양한 이론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장과 쟁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특히 맑스주의만으로는 여성해방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주장들을 도입해서 여성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시도가 결국 맑스주의를 왜곡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2. 여성해방론의 역사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부르주아 혁명기에는 봉건귀족에 대항한 부르주아가 진보였듯이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선구자들, 계몽주의 여성운동가들, 참정권자들 등 이들이 여성들의 권리를 발전시키는 데 행한 진보적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니 그들의 선구적인 고뇌와 활동이 없었다면 이후의 여성운동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억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조류의 이론들이 존재한다. 수 천 년 인류의 역사에서 최근의 300년 정도에 걸쳐 여성운동이 전개되어 왔다. 부르주아 혁명의 시기에 다양한 계몽철학자들 틈에서 소수의 선각자들이 인권에서 여성의 권리가 빠져있음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보다 더 이전 중세에도 ≪여인들의 도시≫를 쓴 크리스틴 드 피잔(1364-1430)이란 선구자가 있었다. 내용은 남성들이 일으킨 전쟁과 무질서가 없는 도시는 어떤 곳일까를 상상해서 쓴 글이라고 한다. 그 후 프랑스혁명이 전개되자 여성들도 아주 적극적으로 혁명에 동참했다. 여성들은 <진정서>를 통해 “귀족은 서민을 대표할 수 없듯이, 남성은 여성을 대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여성들의 <진정서>는 묵살되었고, 1789년 8월 국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는 성차별적 단어가 하나도 없었지만, 인간은 남성만을 의미했다. 2년 후, 올랭프 드 구즈(1748-1793)는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였다. “여성이 교수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연단에 등단할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녀는 1793년 단두대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또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이며 보수적인 남성으로부터 ‘치마 입은 하이에나’로 불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는 1792년에 ≪여성의 권리옹호≫를 통해 여성의 개인적 권리만이 아니라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성 평등주의, 여성의 경제적 독립, 그리고 여성의 정치적 참여 필요성, 여성 국회의원의 선출을 옹호했다. 이러한 계몽주의 여성운동은 1793년 10월에 최초의 패배를 경험한다. 여성조직들은 해산당하고 여성들은 길거리에서 5명 이상 모이지 못하게 되었고, 11월에 올랭프 드 구즈가 단두대에서 참수되었고, 수많은 여성들이 감옥에 갇혔다. 그로부터 15년 후 제정되어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 전역에서 받아들이게 된 <나폴레옹 법전>에서 여성은 자신의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하며 여성의 권리를 부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여성운동은 잠잠해졌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다. 부르주아 여성과 중산층 여성들에 의해서 주도된 이 흐름은 여성 참정권을 핵심으로 남성과 평등한 교육의 기회 등 다양한 법, 제도적 개선을 요구했다. 이때 여성 참정권을 비롯한 제도적 요구를 함께 하면서도, 그것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는 노동자계급의 해방운동과 여성해방을 결합시키는 맑스주의 여성해방 운동이 함께 활동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에밀리 팽크허스트(1858-1928)는 제국주의 전쟁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여성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 조력을 인정받아 영국에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 조력에 대한 대가로 30세 이상의 여성에게만 투표권을 인정하는 법을 만들었다가, 10년 후인 1928년에 완전한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였다. 이러한 에밀리 팽크허스트의 자서전의 제목이자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구호는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였는데, 현재 여성운동을 하는 분들이 이 구호를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 시기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던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클라라 제트킨(1857-1933),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 등의 여성 혁명가에 의해 지도되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남성에 대립하는 모든 여성의 단결을 호소하는 것에 반대하며,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자본가에 대항하는 남녀 노동자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되, 완전한 해방에 이르는 과정으로 설정하였고,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쏘비에트 연방공화국은 여성의 보통선거권을 도입했다. 이후 1919년에 독일, 1920년에 미국의 순서로 여성의 보통선거권이 인정되자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잠잠해졌고,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쏘련과 중국, 그리고 여러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적용되고 실천되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1969년 ≪성의 정치학≫을 쓴 게이트 밀렛(1934-2017), 1970년 ≪성의 변증법≫을 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1945-2012)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여성이 생물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남성에게 종속되었으며, 인류의 역사에서 언제나 가부장제라는 남성의 권력과 지배에 의해 여성이 억압당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여성문제의 핵심은 여성이 어머니이기를 강요당하는 것과 남자의 성적 노예라는 것, 그리고 여성의 육체를 남성이 통제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것이 여성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이들의 공격목표는 억압적 성관계와 사회관계를 창출하는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을 뛰쳐나와 레즈비언이 되든지, 과학기술의 힘으로 출산통제권을 가져야 한다. 한국에서는 메갈리아 등의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전파되어 일베와 같은 여성혐오론자와 댓글투쟁을 벌이기도 하고, 계속되는 여성혐오 범죄와 n번방과 같은 디지털 성범죄가 판치는 세상에서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각종 급진주의 페미니즘 동아리에 모이고 있다.

다음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살펴보자.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개념을 받아들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성차별과 계급차별을 분리시키지 않고 통합하여 양자 모두에 대해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장단점을 수용하여 새로운 여성해방론을 수립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한편으로 당시 존재했던 쏘련 등의 20세기 사회주의가 여성차별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음에 주목하고, 자본주의가 철폐되어도 여성해방의 과제가 남아 있다고 보면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부터 가부장제의 개념을 가져온 것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두 체계가 상호 연관되어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는 것 때문에 ‘이중체계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문제와 별도로 발생하는 여성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이론의 일부 논자는, 남성은 계급에 관계없이 이득을 보기 때문에, 남성자본가와 남성노동자가 공모하여 여성을 억압한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남녀 노동자의 단결을 해치는 반동적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흐름 내에서 맑스주의 개념을 사용하여 여성 억압의 원인과 해법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사회재생산’이론이다. 이들은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중체계론’을 비판하면서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하나로 통합한 단일이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맑스주의가 생산을 다루지만,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력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공백으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현재 가장 광범위한 지지자들을 가진 듯하고, 한국에서도 많은 지지자들이 있다.

 

3. 여성해방론의 쟁점

1) 여성억압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 가능한가?

여성억압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여성의 생물학적 특수성에 의해 여성이 남성에 종속되었다는 입장과, 역사의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생산력의 발전으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고 사적소유가 발생하고 계급이 발생하면서 재산 상속의 필요에 의한 일부일처제의 부권제가 성립하면서 여성이 남성에 종속되었다는 입장으로 나뉜다.

전자는 여성은 인류역사 전체를 통해 언제나 남성에 종속되었다는 입장인데, 이 종속의 메커니즘을 가부장제라고 명명한다. 가부장제를 받아들이는 이론은 사실상 이 입장에 서 있다고 보인다. 후자는 맑스주의의 사적 유물론에 근거하여 인류는 처음에 원시공동체 사회를 이루며 살았는데, 계급도 없고, 성별분업이 성차별로 연결되지도 않는 남녀 평등한 사회였다고 설명한다. 맑스가 죽기 전에 써 놓은 모건의 ≪고대사회≫에 대한 평주를 모아, 두 사람의 공동 연구의 이론적 성과물을 엥겔스가 맑스가 죽은 후인 1884년에 출판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출발한다. 좀 길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엥겔스의 위의 책에서 인용해 보자.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자는 가정에서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어 여자는 자기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자의 정욕의 노예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여성의 이와 같은 굴욕적인 처지는 특히 영웅시대의, 특히 고전시대의 그리스 인들 사이에서 노골적이었는데, 나중에 점차 경감되어 그럴 듯하게 꾸며졌으며, 때로는 조금 완화된 형태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그러한 처지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확립된 남성독재의 최초의 산물은 당시 발생하고 있던 ‘가부장제 가족’―토지를 소유하고 가축 떼를 돌보기 위해 일정수의 자유민과 비자유민(노예)을 가장의 권력 하에 하나의 가족으로 조직하였다. 가장은 일부다처제 생활을 하며, 비자유민은 한 명의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며 일정한 구역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이라는 중간 형태였다. (pp. 94-95, 두레 출판사)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자연발생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소유의 승리를 기초로 한 최초의 가족 형태였다. 가족 내에서의 남편의 지배와 자기의 재산을 상속해야 할 확실한 자기의 자식을 보자는 것, 이것이 그리스 인이 공공연히 선포한 단혼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 이와 같이 단혼은 결코 남녀 간의 합의에 의한 결합으로 역사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합의의 최고 형태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그것은 한 성에 의한 다른 성의 예속이며, 과거 어느 시대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양성 간에 존재하는 모순의 선언으로 등장한 것이다. 출간은 되지 않았으나 1846년 맑스와 필자가 쓴 오래된 원고(독일 이데올로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즉 “최초의 분업은 자식을 생산하기 위한 남녀 간의 분업이었다.” 이제 나는 여기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자 한다. 즉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적 대립은 단혼 제도에서 보게 되는 남녀 간의 적대적 발전과 일치하며, 따라서 최초의 계급적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 단혼은 역사상 일대 진보이기는 했으나, 동시에 그것은―노예제와 사유재산제와 함께―현재까지도 그렇지만, 온갖 진보가 동시에 상대적 퇴보이기도 하며, 한 사람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사람의 고난과 억압을 대가로 하여 실현되는 시대를 열어 놓았다. (pp. 111-112. 두레 출판사)

엥겔스는 현재까지의 일부일처제는 여성에게만 해당되고 남성은 여전히 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생산수단이 사회적 소유가 되면 매음(성의 상품화)이 사라지고 일부일처제는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현실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여성해방의 첫 번째 조건은 여성 전체가 사회적 노동에 복귀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여성해방을 위해 여성이 사회적 노동으로 복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사노동이 사회화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사회적 노동으로 참여시키면서 가사노동을 사회화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는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도 더 여성이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시작된 여성의 사회적 노동에의 참여는 여성해방의 물질적 기초가 된다.

 

2) 가사노동은 왜 가치가 없는가?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가운데, 맑스주의자들도 여성문제에 개입하려고 한 시도 중에 불행한 사례가 ‘가사노동 가치논쟁’이다. 맑스주의자만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의 수많은 논자들이 참여하여 오랫동안 진행되었음에도, 아직도 가사노동에도 가치가 있으며, 맑스가 가사노동이 가치가 없는 비생산노동으로 본 것이 바로 여성문제에 대해 맑스주의가 무능한 증거라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그래서 가사노동에 임금을 달라는 시위도 등장했다. 아직도 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가사노동에 가치가 없다는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자본론≫을 학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왜곡된 입장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맑스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 사실상 이것은 경제학을 윤리학과 혼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여성의 가사노동이 가치가 없거나 쓸모없거나 하찮다고 생각하는 것과 경제학에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상품의 이중성을 논하면서 사용가치와 가치를 설명했다. 가치란 상품으로서 교환이 되기 위한 다양한 사용가치들의 공통점인 추상적 인간노동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가사노동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사용가치만 있고 가치는 없는 것이다.

레닌은 1919년에 ≪여성과 사회≫에서 가사노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해방 법률[1]러시아혁명 이후 1917년 쏘련은 여성을 차별하는 모든 법을 폐지하고 남녀 모두의 보통선거권 도입, 이혼의 자유, 사생아에 대한 권리보장, … Continue reading이 통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여전히 가내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다. 아직도 사소한 가사노동이 여성을 짓누르고 질식시키고 무능력하게 만들고 퇴화시키며, 여성을 부엌과 육아실에 묶어놓으며, 자신의 노동을 비생산적이고 단조롭고 어리석게 만드는 허드렛 일에 허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여성해방, 진정한 공산주의는 대중투쟁(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도하는)이 이 소규모 가정경제를 반대하고 대신에 그것이 대규모 사회주의 경제로, 대중적인 규모로 변형될 때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이론상으로 모든 공산주의자들에게 명백한 이 문제에 대해 실제적으로 충분한 관심을 쏟고 있는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이 영역에서 이미 싹을 틔운 공산주의의 어린 싹에 대해 충분한 배려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시 한 번 아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공공식당, 탁아소, 유치원―이것들은 새싹의 예들이며 단순한 일상수단들이며 결코 뽐내거나 호언장담하거나 엄숙하게 약속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여성을 해방시킬 수 있는, 사회적 생산과 사회생활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과 관련하여 남성에 대한 그들의 열등한 지위를 사실상 개선하거나 폐지시킬 수 있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 ≪여성해방론≫, pp. 60-61. 동녘 )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은, 여성의 완전한 평등을 완수하는 과정이며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여성과 함께 새로운 과업을 수행하는 바로 그 때 시작된다고 보았다.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임금을 지불하라는 주장은 얼핏 진보적인 듯 보이지만, 여성을 계속해서 가사노동에 묶어두라는 반동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

3) 맑스주의는 여성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가? 또는 20세기 사회주의는 여성문제를 왜 해결하지 못했는가?

1980년대에 조금안과 더불어 여성해방론의 소개와 전파에 많은 기여를 한 이승희가 1994년에 ≪여성운동과 정치이론≫에서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이 제1기 여성운동 이후 여성해방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맑스・엥겔스・베벨 등의 고전만 끌어다 대며 교조주의적 테제만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노동자연대 활동가 정진희는 ≪진보평론≫ 2015년 9월호에 실린 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최근 쟁점들>과 2020년 9월에 쓴 <노동전선 천연옥 씨에게 답한다 : 옛 소련 블록의 사회에서 성평등은 실현되지 않았다>라는 글을 통해 20세기 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었으며, 스탈린 독재로 인한 국가자본주의사회였기에 성평등은 실현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에서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이 교조주의적 테제로서 이론과 실천에서 발전하지 않았다는 주장부터 반박해 보려고 한다.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에서 이론과 실천으로 발전해왔다

먼저 클라라 제트킨[2]≪정세와 노동≫ 159호(2020년 2월)에 실린 서평, <클라라 제트킨 선집을 읽고>을 참고하시오.은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평등≫이란 기관지를 통해, 독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서 여성해방론을 발전시켰다. “여성해방은 사회주의의 승리를 통해서, 사회주의 승리는 오직 프롤레타리아 여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클라라의 명제는 여성해방과 계급해방의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계급문제는 보편문제이고 여성문제는 특수문제이다. 그러나 하늘의 절반이며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인 여성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때, 사회주의가 남성만의 힘으로 전진할 수 있겠는가? 클라라는 제2차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여성해방을 위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여성 노동자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가정으로 돌려보내려 하는 후진적인 남성 노동자를 비판하고 남녀 노동자의 단결로 자본가에 대항하는 투쟁을 해야 함을 주장했다. 또 클라라 제트킨은 1907년 사회주의 여성 노동자협의회에서 3・8 세계 여성 노동자의 날을 제안하여, 현재까지 전 세계 여성들이 3・8을 기억하게 하였다. 또한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제국주의 전쟁에 협력하자 거기에서 탈당하여 독일공산당을 만들어서 제국주의 전쟁반대라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원칙을 지켰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 후에 만들어진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여성국의 국장이 되어 전 세계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여성해방운동의 원칙을 전파하였다.

다음으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3]≪노동사회과학≫ 14호(2020년 11월)에 실린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 ≪위대한 사랑≫을 읽고’를 참고하시오.는 러시아 혁명의 과정에서 1909년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를 통해 엥겔스, 베벨 등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 후에 후생성 인민위원으로 제노텔(볼세비키당의 여성국)의 수장으로 이론을 현실화하는 데 정열을 바쳤다. 코민테른 여성국에 제노텔 사업의 성과를 보고하기도 하고, 클라라와 함께 코민테른 여성국의 부국장으로서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레닌이 가사노동에 대해서 쓴 것처럼 법률의 선포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에서 아내를 가장 심하게 구타하는 남편으로 유명하고, “암탉이 새가 아니듯 여자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속담을 가진 러시아에서 봉건적인 여성차별 의식과 싸우며 여성해방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닌은 1899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에서 맑스가 ≪자본론≫에서 다룬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 인한 여성노동의 도입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으로 여성을 몰고 갔는지를 분석했다. 그리고 1903년 당 강령 초안을 만들면서도 여성노동에 대한 보호를 잊지 않았고, 혁명 이후 세계 여성의 날이나 여성 대표자회의 등에서 연설을 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1919년 11월 6일 자 ≪프라우다≫에 실린 <소비에트 권력과 여성의 지위>에서 레닌은 여성의 지위가 부르주아와 사회주의 민주주의 간의 차이를 특히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부르주아 공화국(즉 토지, 공장, 기계, 소득분 등의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나라들)에서도, 비록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아니 가장 선진적인 나라조차 여성이 완전한 평등한 지위를 획득한 나라는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쏘비에트의 선거에서 당원이든 비당원이든 더 많은 여성노동자를 선출하라고 주문했다. 레닌은 여성의 완전한 자유를 실현하지 않고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완전한 자유를 획득할 수 없다고, 형식적 평등이 아닌 진정한 평등을 위해 여성들을 사회적 생산노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그들을 가내노예로부터 해방시켜야 함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기술과 관습 두 가지가 급속하게 개조될 것을 필요로 하는 긴 투쟁이며, 이 투쟁은 공산주의의 완전한 승리와 더불어 끝나게 될 것이라고 레닌은 보았다.

1988년에 나온 ≪세계의 여성운동 2-민족해방여성운동 편≫에는 정말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사례만 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 강서 쏘비에트와 해방구의 여성>이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29년 홍군이 호남・강서 변경의 정강산 지구로부터 퇴각하여 강서・호남・광동의 변경 산악지대에 향후 5년간 중국소비에트의 중심적인 지역으로 될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했다. … 소비에트 시기는 중국공산당이 처음으로 한 지역에 대한 조직적인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제도들을 검증하고 발전시켰던 시기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여성들을 제한적이나마 최대한 생산노동에 참여시킴으로써 여성의식의 전반적 개혁과 혁명 활동에의 참여를 증진시킨다는 여성운동의 새로운 방침과 함께 시행되었다. 이 글은 이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며, 주로 1931년 11월에 건설된 강서 소비에트의 자료들에 근거하여 쓰여졌다. … 강서 서금에서 개최되었던 ‘제1차 중화 소비에트 전국대표단회의’에서 공표된 ‘소비에트 공화국 헌법’ 11조에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공표하고 있다. “여성의 철저한 해방을 보장하는 것이 중화 소비에트 정부의 목적이다. 중화 소비에트 정부는 혼인의 자유를 인정하고 각종의 여성보호 조치들을 시행하며. 여성들이 가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물적 기반을 획득할 수 있게 하여 여성이 경제적・정치적・문화적인 모든 사회생활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이렇듯 헌법에서 공표된 여성해방의 방침은 소비에트 지구에 있어서 원칙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실제로 조직과 법령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중국혁명이 1949년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에 비로소 여성해방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광대한 중국 땅에서 해방구를 통해 몇 십 년 동안 여성해방이 점차 전파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의 헌법의 내용은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이 관철되고 있었다.

중국만이 아니라 베트남,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쿠바에서도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물론 쏘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시장경제로 변하는 과정에서 반동이 일어났고, 여성의 지위는 다시 후퇴했다, 그러나 쿠바[4]<전선> 128호, ‘쿠바공화국은 파리코뮌의 계승자이다’,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를 통해 사회주의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떠한 지 알 수 있다.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

쏘련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평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노동자연대의 정진희씨나 기타 여러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의 입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책 한 권으로 부족할 것이다. 우리 연구소의 문영찬 연구위원장이 ≪정세와 노동≫ 159호(2020년 2월)부터 20세기 사회주의 관련 연재를 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그 내용을 여성문제와 관련해서만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물론 20세기 사회주의는 완전한 성평등 사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서 계급이 완전히 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국가권력이 존재하는 사회이며, 계급이 완전히 폐지되고 국가가 소멸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이행기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쏘련을 비롯한 20세기 사회주의가 이룩한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천의 성과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정진희가 주장하는 쏘련의 스탈린주의 체제는 1953년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탈린 사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흐루쇼프는 1956년 20차 당 대회에서 소위 비밀연설을 통해 스탈린과 스탈린 노선을 탄핵하고 수정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흐루쇼프는 제국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평화공존, 양 체제간의 평화적 경쟁,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의회제적 방식을 포함하는 평화적 이행이라는 세 가지 평화를 주장했다. 이러한 노선은 스탈린 체제에서 30여 년에 걸친 혁명적 노선, 레닌주의적 노선을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루쇼프의 주장은 서유럽의 각국 공산당들에게 영향을 주어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폐기하고 유로코뮤니즘이란 개량주의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이는 또 중-쏘 논쟁으로 세계 사회주의 진영을 분열시켰고,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다.

흐루쇼프는 당과 국가의 노동계급적 성격을 타격하는 공격을 감행하여 이후 수정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먼저 당의 성격을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에서 ‘전 인민당’으로, 국가의 성격을 ‘프롤레타리아독재’에서 ‘전 인민국가’로 바꾸었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말했듯이 국가는 계급지배의 도구인데 전 인민의 국가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인 바, 결국 전 인민국가는 인민에게 군림하는 관료주의 국가로의 변신이었다.

흐루쇼프는 농업정책에서 집단농장의 형성기에 만들어졌던 쏘비에트 국가와 집단농장의 농민이 연결되는 핵심고리인 MTS(기계・트랙터 기지)를 해체했다. 1958년 MTS를 해체하고 MTS 소유의 트랙터와 기계들을 집단농장에 매각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집단농장은 기계와 트랙터 대금 지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른 긴급한 사업을 유보시켰다. 결국 MTS의 해체는 농업생산력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고, 이후 농업의 위기는 계속된다. 1962년 <계획, 이윤, 상여금>이라는 리베르만의 보고서를 통해 경제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이론적 시도가 있었다. 리베르만의 구상은 품목별 생산 총량과 국가에 대한 이윤 상납액을 빼고는, 쏘련의 국유기업에게서 국가로부터의 지령적 계획에 따른 구속을 제거하여 기업 자율로 경영 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국유기업을 자본주의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구상과 제안에 다름 아니었다. 1964년 10월 궁정반란을 통해 권력을 잡은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를 더 밀어붙여, 1965년 꼬씌긴 개혁을 단행하는 데, 이것은 리베르만의 시도의 현실화였다. 꼬씌긴 개혁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물 모두를 상품으로 간주하는 이론적 전환을 토대로 신경제체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로써 쏘련경제 전체적인 경제 계획은 균열되고 각 부문의 비례적인 발전은 점차 생산의 무정부성에 의해 침식되고 균열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쏘련이 ‘발달한 사회주의’가 되었다고 선언하였지만, 특권층(노멘끌라뚜라)의 대두와 쏘련 사회주의 해체 요소가 성장하고 있었다.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안드로뽀프가 원칙적인 입장에서 쏘련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1년 여 만에 사망하고 뒤를 이은 체르넨코도 얼마 못가서 사망하였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쏘련의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더욱 우경화하여 1986년에 ‘개인노동법’, 1987년에 ‘국영기업법’, 1988년 ‘협동조합법’을 제정하여 시장경제로 서서히 이행하였다. 고르바초프의 우경적 개혁의 속도에 불만을 품은 옐친이 나타나서 마침내 쏘련은 붕괴하였다.

정진희는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가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화’ 됐다는 것인지 천연옥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질적으로 우월한 체제라면서도, 어떻게 이런 역전이 가능한지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위의 설명이 대답이 되었기를 바란다. 정진희는 역사에서 역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한국의 현대사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음에도, 역사가 나선형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또한 정진희는 말한다.

“스탈린주의 체제하의 사회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옛 소련, 동유럽, 중국, 쿠바, 북한 등 스탈린주의 체제 하의 사회를 착취와 차별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로 봤던 좌파들은 그 사회의 실상이 드러나자 큰 환멸에 빠졌다. 1970년대 서구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부상한 것도 스탈린주의 체제하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를 보고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무계급사회로 여기다 보니, 그 사회의 여성 차별을 계급사회와 무관한 남성의 본성이나 심리에서 찾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이론을 수용하게 됐고 결국 개혁주의로 나아갔다.

천연옥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그의 주장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제대로 반박할 수 없다. 스탈린주의 체제 하에서 여성들이 차별받고 열악한 처지에 있었다는 기록과 증언이 차고 넘친다. 그 사회에서 성 평등이 거의 실현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이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해 오해를 심어 주거나 반감을 사기 쉽다. 옛 소련과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체제가 1980년대 이후 심각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위기를 겪으며 붕괴한 상황에서 그 체제를 미화하는 것은 더더욱 터무니없다.”(≪노동자연대≫ 336호)

옛 쏘련과 동유럽, 중국, 쿠바, 북한을 모두 스탈린주의 체제로, 국가자본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1970년대는 이미 쏘련이 수정주의의 폐해로 제2 경제(지하경제)가 발달하고 사회주의 발전이 지체되어 여성들의 지위도 그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사회주의의 역사를, 인류의 위대한 전진이었던 그 역사를 ‘스탈린주의다, 사회주의가 아니다’라고 한 마디로 뭉개버리면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사회주의를 오해받지 않고 반감도 사지 않는 것일까? 차고 넘치는 기록과 증언이 제국주의의 악의적 선동에서 비롯된 것들은 없었을까? 한국의 종편에서 매일 매일 방영되는 ‘모란봉클럽’이나 ‘이제 만나러 갑니다’ 류의 이데올로기 조작은 아니었을까?

쏘련사를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국민대 유라시아연구소 연구원인 노경덕의 강의를 ≪노동사회≫ 2011년 1・2월호에 정리한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 그 진실과 왜곡>이란 글이 있다. 노경덕은 1990년대 이후 쏘련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문서에 근거한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스탈린 시대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고 한다. 러시아 혁명 이후 일국 사회주의론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의 혁명이 실패하고 제국주의 간섭과 내전으로 인해 선택이 아니라 강제였다. 독일에서의 히틀러의 집권은 전쟁의 임박을 예고했고, 사회주의 조국을 방위하기 위한 전쟁준비로 인해 중공업 우선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관료주의에 대한 공격으로서 숙청이 진행되었으며, 스탈린 시대를 규정한 것은 전쟁위협과 국제적 고립이었다. 파시즘을 타도하는데 2,700만 명이나 희생되었던 쏘련은 전쟁 후에 비로소 경공업을 발전시키는 조건을 얻게 되지만, 미국 트루먼의 냉전 정책으로 다시 고립과 중공업 우선정책으로 내몰리게 된다. 현실적인 한계, 국제 질서에서의 고립, 쏘련의 약한 경제력 속에서 홀로 사회주의를 이루고 지탱해야 했던 것이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다. 스탈린 시대를 반인권, 반민주의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했던 이들은 쏘련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7년에 한국에서도 출판된 ≪붉은 의료≫라는 책이 있다. 쏘련의 의료를 분석한 것인데, 붉은 의료가 없었다면 현재 자본주의 국가들의 사회보험으로서의 건강보험제도도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지위와 관련하여 노동법이나 모성보호에 관련된 법은, 실제로 레닌이 말했듯이 후진국 러시아에 비해 선진자본주의가 몇 백 년 동안 실행하지 못했던 것으로서, 쏘련은 이를 2년 동안에 이루어내었다. 현재 이북의 모성보호 제도는 한국의 모성보호제도보다 더 낫다.

 

4. 글을 마치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억압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법, 제도적으로 형식적 평등은 많이 이루어졌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사회적 노동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차별받고 있다. 여성해방의 물질적 기초인 여성의 사회적 노동으로의 편입은, 여성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이 좀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기계제 대공업이 출발하면서 숙련된 남성노동자들이 해고되고 그 자리를 여성과 아동이 채우게 되었다. 그 당시 육아를 위한 사회제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어린 자녀를 둔 여성은 자기 자식에게 마약을 먹여 가면서 노동을 했고, 당연히 유아 사망률은 대단히 높았다. 노동자 인구의 필요성으로 인한 총자본으로서의 국가의 개입과 노동조합 등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저항으로 상황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여성 노동자는 비정규직・저임금 노동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비정규직과 저임금이란 현실을 남녀 문제로 해결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비정규직 철폐와 임금인상을 걸고(임금제도 철폐를 걸고) 남녀 노동자의 총단결로 자본에 대항할 때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다음으로 여성이 억압받는 장소인 가정으로 가보자. 가사노동이 사회화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사회화 비용이 너무 비싸서 비정규직・저임금 여성 노동자가 감당할 수가 없다. 보육, 간병, 요리, 청소 등의 가사노동을 자본주의에서 이용하려면 자신이 사회적 노동으로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질 낮은 서비스를 받거나, 아니면 사회적 노동을 마치고 귀가해서 밤늦게까지, 아니면 새벽부터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물론 성평등 의식을 가진 남편이나 아들이 도와줄 수도 있지만, 남편이나 아들도 사회적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것은 또 마찬가지가 아닌가?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실시되지 않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최소한 중산층 이상만이 자본주의에서는 가사노동의 사회화의 혜택을 왜곡된 형태로나마 누릴 수 있다. 또 가사노동이 사회화된 영역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처지는 어떠한가?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조리사, 가사도우미 등 대부분 여성인 이 노동자들은 또 다시 비정규직・저임금 노동자층을 형성하고 있고, 공공부문이어야 할 이 영역들은 자본가들의 새로운 이윤 창출의 먹잇감이 되어 업체가 난립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억압의 현실은 남성 노동자들의 불행으로 이어져서 이혼의 증가와 출산의 거부로 나타나고 있다. 남녀 노동자의 단결로 이 상황을 바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계급해방과 분리된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것은 어떤 실천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결론적으로 현실의 여성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는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이다. 맑스가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부터 언급하기 시작한 여성해방론은 170년 이상 여러 혁명가와 여러 나라의 혁명의 역사에서 실천적으로 적용되고 발전되어온 이론이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고, 역전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를 부정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전복되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철폐된다고 해서 성차별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정신이 하루아침에 교정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그대로 두고 가부장제 타령만 한다고 해서 성차별의식이 사라질 수 있을까? 성차별의식은 성차별의식을 낳는 물질적 토대가 사라질 때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물질적 토대, 역사 속에서 마지막 계급사회인 자본주의를 제거하는 투쟁에 함께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남녀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여성해방 쟁취하자!! 노사과연

 

 

참고자료

누리아 바벨라 지음, 박도란 옮김, ≪초보자를 위한 페미니즘≫, 2020, 시대의 창.
김민재・이지완・황정규 지음,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 2019, 해방.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대웅 옮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2012, 두레.
이승희 지음, ≪여성운동과 정치이론≫, 1994, 녹두.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 조금안 옮김, ≪여성해방론≫, 1988, 동녘.
김지해 엮음, ≪세계의 여성운동2-민족해방 여성운동 편≫, 1988, 동녘
노경덕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그 진실과 왜곡>, ≪노동사회≫ 2011년 1・2월호.

References

References
1 러시아혁명 이후 1917년 쏘련은 여성을 차별하는 모든 법을 폐지하고 남녀 모두의 보통선거권 도입, 이혼의 자유, 사생아에 대한 권리보장, 남녀노동자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을 법적으로 도입하였다.
2 ≪정세와 노동≫ 159호(2020년 2월)에 실린 서평, <클라라 제트킨 선집을 읽고>을 참고하시오.
3 ≪노동사회과학≫ 14호(2020년 11월)에 실린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 ≪위대한 사랑≫을 읽고’를 참고하시오.
4 <전선> 128호, ‘쿠바공화국은 파리코뮌의 계승자이다’,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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