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자료] 4월 혁명과 국가 폭력―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

 

이병진 | 회원

 

* 이 글은 사월혁명회의 요청으로 집필되어, 2020년 4월 30일 ≪민플러스≫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http://www.min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90>

 

 

 

4월 혁명의 본질적 성격

 

올해는 4ㆍ19 혁명 60주년이다. 대학에서 현대 정치를 강의하면서 4월 혁명을 주제로 학생들과 토론을 하였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이승만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던 4ㆍ19 혁명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4ㆍ19 혁명이 촉발된 직접적인 원인은 부정과 부패에 찌든 이승만 독재 정권의 타도이다. 4ㆍ19 혁명은 단지 청년 학생이 중심이 된 도시의 개혁 운동에 머물지 않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3ㆍ15 부정 선거에 항거하는 청년 학생들이 4ㆍ19 혁명에 불을 붙였지만, 그것이 대중 속으로 들불처럼 타오른 것은 당시 민족 모순의 질곡으로 인해 피폐해진 삶에 대한 대중의 자각 때문이었다. 민족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 학생들은 비극적인 삶과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갖고 투쟁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태생적으로 친미, 반북, 반공 정권이었다

이승만 반동 세력은 틈만 나면 ‘북진’ 통일을 주장하면서 반북 감정을 조장하였지만,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자 한강 다리를 폭파하여 피난민들을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고, 자신은 제일 먼저 단숨에 대구까지 피난 간 기회주의자였다. 게다가 이승만 정권은 전시 작전권을 미국에 줘 버렸다.

그는 전쟁 당사자로서 휴전 협정에 끼지도 못했다. 전쟁은 엄청난 인명 피해와 물질적 피해를 주었다. 대중의 삶은 미국의 원조에 의지해야 할 만큼 피폐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 유지가 어려웠다. 이승만 정권과 그에 기생하던 지배계급은 각종 부정부패로 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곤 그들의 치부를 감추고 대중의 반발을 억제하기 위하여 반공과 반북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한 파쑈 지배 체제를 강화시켰다. 그렇게 국가 폭력에 기대어 장기 독재 정권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친미, 반북, 반공을 국시로 하는 이승만 정권을 신뢰하지 않았다. 부정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애지중지 떠받치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없었다.

 

4월 혁명은 민중의 잠재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4월 혁명이 단순히 이승만 정권에서 장면 정권으로의 권력 이양에 그치지 않고 민중의 반외세 민주주의 투쟁으로 발전한 것은 역사 과정의 필연이었다. 대중의 혁명 열기가 미 제국주의에 기생하는 지배계급에 반대하여 ‘부정부패 척결’과 ‘민족 통일’ 그리고 ‘민중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투쟁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던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의감이 강한 청년 학생들의 선도적인 투쟁에 고무된 민중이 혁명적 열기에 고무되어 갔다. 대중의 정치적 요구도 점점 더 구체적으로 힘을 키워 갔다. 그러나 친미 보수파인 민주당 정권은 그런 대중의 요구를 수행할 능력과 정치적 지도력이 없었다. 장면 정권의 우유부단함과 반동적인 본질이 드러나면서 청년 학생들과 보수적인 지배계급 세력 사이의 긴장감이 높아 갔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부패로 촉발된 혁명의 도화선은 점점 지배계급 체제의 모순, 즉 민족 분단에 기반한 친미 정권의 한계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한국의 지배 체제 그 자체의 위기였다.

4월 혁명은 분단 이후 세워진 대한민국 체제의 허구성과 취약성 그리고 지배계급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 역사적 계기였다.

청년들은 첨예하게 대립된 민족 분단 모순을 깨닫고 통일 문제를 전면에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4월 혁명은 전국적 범위의 민족ㆍ민주 혁명으로 전화(轉化)된 것이다.

 

 

반미, 민족 자주를 요구하는 청년 학생들의 애국적 투쟁

 

1960년대의 청년 학생들이 기성세대보다 분단 모순과 체제 모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행동한 이유는 분단과 전쟁을 동시에 경험한 특수한 역사적 경험 때문이었다.

이들 청년 세대들은 일본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면서 역사의 진보적 흐름과 성취감을 느끼던 시대에 태어나서 민족 분단과 전쟁이라는 불행을 동시적으로 경험하였다. 그런 혼란과 좌절은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에게 더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기성세대들은 일본 제국주의 지배 체제에 순응하며 살다가 갑자기 해방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망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에 반해서 젊은 청년들은 해방과 민족 분단 그리고 전쟁을 통해서 사회 모순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상 그들의 미래 역시 암울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실천 운동에 복무할 수 있었다.

 

당시 한(조선)반도는 냉전 시대의 첨예한 대결 장소였다. 왜냐하면 중국 본토에서 국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자본주의 진영, 특히 미국의 태평양ㆍ아시아 지배 전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국제적 요인이 민족 분단을 강제하였고 그에 따른 민족 내부 모순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억제된 상태였다. 만약에 민주주의 방식으로 민족 모순이 해결된다면 친미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붕괴될 만큼 허약하였으므로 그들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려면 파쑈적인 지배 통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청년 학생들은 젊은 세대 특유의 감수성으로 지배 체제의 본질을 통찰하였고 그런 견해를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1961년 2월에 “우리는 미국의 무제한적인 조차지가 아니다”, “이 땅이 뉘 땅인데 미국이 날뛰느냐”, “밥 달라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라는 구호들을 내걸고 정치 투쟁을 하였다(김승균, “4월 혁명 그때는 이랬었지; 4월 혁명을 증언한다”, ≪통일뉴스≫, 2020. 4. 1.). 청년 학생들은 단순히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교체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고 반미 민족 자주를 고양시켰다.

청년 학생들은 한 발 더 나아가서 1961년 5월 31일 판문점 학생 회담 개최를 제안하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런 학생들의 제안에 5월 31일 서울 운동장에서 5만여 명의 시위 군중들이 집결하여 대규모 행사를 하였다는 것은, 학생들의 주장이 급진적인 선동 구호가 아니라 대중들이 지지하고 호응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청년 학생들은 스스로 혁명 정부를 세울 만큼 튼튼한 정치 조직으로 단련되어 있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청년들 특유의 솔직하고 대담한 방식으로 미 제국주의에 종속적인 이남의 지배 체제의 본질과 속성을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중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고 민주주의 발전의 동력을 만들었다.

 

 

국가의 폭력 그리고 국가보안법

 

청년 학생들은 단지 구호가 아니라 정치 조직을 결성하여 스스로 혁명을 진전시켜 나갔다. 1960년 11월 “민족통일학생연맹(민통련)”을 결성하여 투쟁을 조직화하였다.

이 조직은 ‘데모규제법’과 ‘국가보안법’ 폐기를 들고 반민족적인 장면 정권 총사퇴 시위를 주도하였다. 민통련은 1961년 5월 5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대회’를 조직하면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공동 성명서에는 당시의 사회 성격을 “식민지ㆍ반식민지적 반봉건성의 요소”라고 규정하고, “민족ㆍ대중 세력은 매판관료 세력을, 통일 세력은 반통일 세력을, 평화 세력은 전쟁 세력을 압도”하여 민족 통일을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4월 혁명은 이승만 독재 정권의 3ㆍ15 부정 선거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단순히 이승만 정권의 탄핵이 아니라 당시 이남의 통치 구조의 모순과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는 역사적 기회이기도 하였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학생들의 주장에 대해서 대중은 “이제까지 젊은 사람들이 혁명을 위해 피를 흘렸으니 이제 늙은이들이 앞장서서 피 흘릴 때가 왔다”(김승균, 같은 글)며 호응하였다.

 

대중의 투쟁이 고조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지배계급은 1961년 3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안(통칭 ‘데모규제법’)’과 ‘반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려 하였다.

4월 혁명을 통해서 집권한 장면 내각조차 ‘데모규제법’을 만들고 대중들의 진보적인 정치사상을 싹부터 자르려는 ‘반공산주의 특별법’을 만들게 함으로써 당시 지배계급의 성격을 명확하게 까발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공포 정치의 회귀에 대하여 혁신당, 사회대중당, 사회당, 통일사회당, 삼민당 그리고 민자통,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중통련), 조통전, 광복동지회 등 10개 정당 및 사회단체가 모여 ‘반민주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만들어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 조직은 ‘2대 악법 철회, 국가보안법 강화 기도 규탄’ 등 5개항을 결의하고, 1961년 3월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적 규모의 횃불 시위를 전개하였다. 전국 대학의 청년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련) 역시 2대 악법 반대 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민통련은 2대 악법뿐만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이 만든 국가보안법 폐지까지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지배계급과 미국의 간접적인 지지를 받아서 군사 쿠데타에 성공하였다. 박정희가 총 한 방 쏘지 않고 손쉽게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청년 학생들의 혁명적 사회 변혁 요구에 대한 지배계급의 위기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엄령하에서 5ㆍ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남북 학생 회담을 추진하였던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사건을 조작하여 군사 재판에 회부하였다. 또한 5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설치된 군사 검찰은 특별법 제6조 특수반국가행위 위반 사건을 조작하였다.

경남반민주악법반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 사건, 부산민주민족청년동맹 사건, 전라남도통일민주청년동맹 사건, 중앙사회대중당 사건, 범혁신동지회 사건 등 이북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기소하였고 이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4월 혁명의 주축이었던 청년 학생들은 민족의 자주와 대중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민주주의 투쟁을 하였다는 이유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오랜 기간 감옥에 갇혀 모진 시련을 당하였다.

 

 

나에게 4월 혁명은…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인 일제 식민 지배와 냉전의 유산인 민족 분단은 한(조선)반도에 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공포와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런 고통과 참혹함을 깨닫고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던 강고한 투쟁이 4월 혁명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4월 혁명은 박정희 군사 쿠데타에 의해서 힘없이 좌절되었고 칼바람의 회오리에 속절없이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희생되었다.

그런 국가 폭력의 망나니가 바로 치안유지법, 국가보안법, 반공법이다.

4월 혁명은 저항과 시련의 역사다.

4월 혁명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4월 혁명의 구호는 오늘날 여전히 한(조선)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모순이 무엇인지 인식시켜 주고 있다. 그런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역사의 진보를 이룩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60년이 지난 이후 오늘날 우리들이 겪는 문제들은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런 수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막막하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4월 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통찰하고 그 교훈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풀어야 할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 자주와 통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모순들은 부차적이란 것을 4월 혁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진보적인 정치 환경이 조성되었어도 무자비한 지배계급의 반동적 폭력에 대응할 힘이 없다면 혁명의 전취물도 지켜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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