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식민지 조선의 여성 맑스주의자 정칠성의 여성론

 

정칠성(丁七星)

해제: 정호영(회원)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자. (1929년 근우회 선언)

 

 

[차례]

해제

– 근우회의 래디컬 페미니즘 비판: 여성은 약자가 아니다. 여성이 스스로 해방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 숙대에 입학하려던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래디컬 페미니즘이 가한 단체나 다중의 위력에 의한 협박

– 페미니스트 권김현영의 피해자 경쟁 문화 비판

– 콜론타이, 벨 훅스: 맑스주의 여성론과 페미니즘의 만남

– 정칠성의 래디컬 페미니즘 비판: 여성은 단일계급이 아니다. 여성 해방은 무산계급 여성이 가져온다

– 맑스주의 여성론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비판

 

정칠성 연보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여성 단체들의 선언과 강령

– 조선여성동우회 선언과 강령(1924년 5월 23일)

– 김제여우회 선언(1924년 10월 7일)

– 경성여자청년동맹 강령과 규약(1925년 1월 18일)

– 근우회 선언(1929년)

– 근우회 강령(1929년)

 

정칠성의 여성론

– 남복(男服)하고 말 달릴 때(1927년)

– 의식적 각성으로부터―무산 부인 생활에서(1929년)

– 연애의 고민상과 그 대책(1931년)

– [신여성의 신년 신신호(新年 新信號)] 앞날을 바라보는 부인 노동자(1932년)

– 나는 왜 이렇게 됐나, 나는 왜 도로 장발을 했나(1932년)

– 여성으로서 본 세계관(1932년)

– 정칠성 씨에게서 “내가 본 남성의 불만”을 듣는다(1935년)

– 생활문화를 말하는 좌담회에서의 정칠성의 주장(1945년)

 

 

해제

 

근우회의 래디컬 페미니즘 비판: 여성은 약자가 아니다. 여성이 스스로 해방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자. 90년 전 근우회 선언은 이렇게 끝났다. 이 선언은 맑스주의 여성 운동가들만의 선언이 아니었다. 근우회는 식민지 조선에서 좌, 우 여성 운동가들이 협동전선으로 같이 만들어 전국 조직으로 출범했던 조직이었기에 근우회 선언의 사상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 운동가들이라면 모두가 공유하는 사상이었다.1)

90년 전 식민지 조선의 여성 운동은 래디컬 페미니즘처럼 여성의 피해자화를 이데올로기적 자원2)으로 삼지 않았다. 여성을 약자, 무기력한 희생자로 묘사하지 않았고, 여성은 약하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세계 안에서 여성만의 안전한 공간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해방되는 날 세계가 해방된다고 하였다. 래디컬 페미니즘과 완벽하게 대비된다.

오늘 우리는 식민지 조선의 맑스주의 여성 운동가인 정칠성의 여성론을 읽으면서, 오늘날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문제를 짚어 보도록 하자.

 

정칠성 (≪동아일보≫, 1928. 1. 6.) 당시로는 드문 머리를 짧게 자른 ‘신여성’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 우선 숙대에 입학하려던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래디컬 페미니즘의 협박 사건을 통해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즘의 상황을 잠깐 들여다보자.

 

숙대에 입학하려던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래디컬 페미니즘이 가한 단체나 다중의 위력에 의한 협박

2020년 2월 한 트랜스젠더 여성은 숙대에 합격하고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 그 조직들의 다중과 단체의 위력에 의한 협박으로 인해서 일주일 만에 입학을 포기했다. 이 사건은 1992년 미국 미시간 여성음악축제(Michigan Womyns Music Festival.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womyn born wyman3))만 입장하는 음악축제로 1975년에서 2015년까지 열렸다])에서 수술한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장을 거부한 사건이 한국에서 훨씬 더 큰 규모로 재현(?)된 것이다. 미시간 음악축제 사건 당시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입장을 거부하면서 빈번하게 등장한 개념들이 남성 성기가 없는 안전한 공간(safe space, free of male genitals), 영역의 안정성(the safety of the Land)이다.4) 이 개념들은 여성들을 무기력한 희생자로 보는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나왔다. 한국에서 2020년 수술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숙대에 입학을 하지 못한 이유와 미국에서 1992년 수술한 트랜스젠더 여성들이 미시간 음악축제에 입장을 못 한 이유는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면서 든 이유는 여성은 약자이기에 공포를 언제나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거부하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자신들의 주장을 포스터로 만들면서 늑대에 의해 잡혀 먹힐지 몰라 공포에 떠는 토끼들로 여성들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실제 일어났던 일은 그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한 개인이 단체나 다중의 위력에 의한 협박으로 인해서 일주일 만에 대학 입학을 포기해 버린 사건이었다. 토끼들이 늑대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굶주린 하이에나 떼가 자기들의 위세를 믿고 토끼 한 마리를 공격하는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래디컬 페미니즘은 어떠한 사상이기에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고 공격을 하는가?

 

여성 운동을 1920년대보다 뒤로 후퇴시킨 래디컬 페미니즘의 포스터

 

 

앨리스 에콜스는 래디컬 페미니즘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남성들이 구제 불능의 성차별주의자고 억압계급의 일원으로서 자기가 가진 특권을 내주려 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희생자였다. 여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주장은 여성을 세상에 맞서 행동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희생자로 격하시켰다.5)

친여성 진영에 깊숙하게 몸담은 적이 있는 퍼트리샤 메이나디도 지금은 친여성 노선이 남성의 권력과 여성의 무권력을 과장했을지 모른다는 점을 인정한다. 친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에게 개인적 해결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하면서 여성 억압을 개인이 저항하기에는 너무 총체적인 현상으로 묘사했다. 친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오늘날의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그렇듯 여성 억압을 획일적이고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실제로 월리스는 남성을 획일적인 덩어리로 보고 여성을 무력한 희생자로 본 레드스타킹스의 경향은 본디 의도에 무관하게 앤드리아 드워킨(Andrea Dworkin)이 설명하는 식의 분석이 등장하는 무대를 마련했다고 주장한다.6) (강조는 인용자.)

 

공교육을 통해 자국민들을 철저하게 피해자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스라엘이 가진 가장 큰 추진력은 그 피해자가 가진 정당성이다. 피해자의 정당성은 복수의 성격을 갖는다. 즉, 아무리 지속되어도 끝이 나지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전 세계 유대인들을 난민이라고 부르고 이들의 귀향(알리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폴란드의 강제 수용소 흔적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운영한다. 즉, 끊임없이 홀로코스트 전후에서부터 현재 중동에서 고립된 위치까지 이어지는 정당한 희생자 역할의 유일한 소유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프레임은 이스라엘이 실질적인 강국이며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고 태생부터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인종 청소를 하면서 시작했었다는 모든 사실 관계들을 잊게 만든다. 강하게 들고일어난 피해자, 그게 이스라엘의 모습이 되었다.7)

안드레아 드워킨은 페미니즘에 이스라엘에게서 생존자/피해자 권력 휘두르기를 도입한 래디컬 페미니즘을 열었다.8) 안드레아 드워킨은 이스라엘의 피해자 권력 휘두르기 전략―홀로코스트를 전면에 내걸고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반유대주의자라고 단죄를 함으로써 사회에서 매장시켜버리는 것―을 페미니즘에도 적용했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은 희생자라는 명제를 도그마로 하여 피해자인 여성과 가해자인 남성으로 세계를 이분화하여 본다. 세상은 래디컬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바대로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가해자의 의도나 기타 주변적 상황 등 어떠한 조건도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서 통제되어야 한다.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는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면서 가해자로서의 악행을 모두 정당화하고 있다. 시오니스트와 래디컬 페미니즘의 모든 사건 해결의 종결의 주체는 피해자이다. 이스라엘이 유대인만이 유일한 피해자임을 내세워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마저도 정당화하고 있는 것처럼 래디컬 페미니즘에서는 여성 혐오, 2차 가해,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워 피해자로서의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생존자/피해자 권력 휘두르기는 자승자박이 될 것이다. 제레미 코빈은 유대인의 생존자/피해자 권력 휘두르기에 의해서 공격을 당하고 있는 정치인이다. 지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을 비판한다.

 

코빈에게 조직적으로 덧씌워진 반유대주의자 이미지다. 총선 직전 미국에 본부를 둔 유대인 단체 사이먼 비젠탈 센터는 코빈을 2019년 최악의 반유대주의자로 선정했다. 나는 이것이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만큼이나 심각한 선거개입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 단체들은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모든 이를 반유대주의자라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처럼, 반유대주의는 반자본주의가 전치되어 발생한다. 사회적 적대의 원인으로 자본주의를 탓하는 대신, 유대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9) 거꾸로 이스라엘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급진주의자 좌파들을 무조건 반유대주의자로 몰아붙인다. 이런 일은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혐오를 조장하는 데 이것보다 더 위험한 방법이 있을까.10) (강조는 인용자.)

 

우리도 래디컬 페미니즘에게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를 조장하는 데 이것보다 더 위험한 방법이 있을까?

 

페미니스트 권김현영의 피해자 경쟁 문화 비판

페미니스트 권김현영은 래디컬 페미니즘이 만든 문화인 피해자 경쟁 문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마치 피해자의 말이 곧 진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오해라고 해도 이 말이 주는 효과는 그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의 말에 유일한 해석의 권위를 부여한 결과, 남은 것은 피해자 존중이 아니라 피해자 되기 경쟁이었다. 피해자 경쟁 문화에서는 더 정확하고 자세한 설명보다는 더 세고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말이 선호되었다. 성희롱에서 강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해는 본질적으로 동질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고, 문화와 범죄는 점점 구분되지 않았다. 모든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이며,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합의된 섹스가 강간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매키넌의 주장은 강간 문화를 충격적으로 환기하는 데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실제 강간 사건의 개별 피해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성 범죄 전문가 조디 래피얼은 모든 여성이 강간당했음을 암시하는 것은 실제 강간 피해자에게 모욕적일 뿐 아니라, 강간의 만연과 끔찍한 실상을 오히려 사소화하는 중대한 실수였다고 지적한다.11) (강조는 인용자.)

 

페미니스트 권김현영은 이 피해자 경쟁 문화에 대해서 추상적인 비판을 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 경쟁 문화가 확산시킨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고 2차 가해라는 용어의 사용을 가능한 지양해야 하는 이유도 밝혀 준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이 용어는 2000년 운동권 내 성차별과 성폭력을 문제 삼는 과정에서 만연했던 가해자 중심주의에 대응하며 사용된, 맥락적 지식의 결과였다(이 맥락에 대해서는 󰡔페미니스트 모먼트󰡕에 실린 전희경의 글을 참조하라).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피해자 중심주의는 ① 피해자에게 사건에 대한 판단 기준 전체를 위임하는 것이 아니고, ② 처벌의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피해자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도 아니며, ③ 경험에 대한 독점적 해석을 주장하는 개념도 아니다. 하지만 자주 오해되어 온지라 2005년부터 한국에서 성폭력 문제를 고민하는 일선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이를 피해자 관점으로 바꿔 부르자고 제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만들어진 말이 사라지지 않은 채 통용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12) (강조는 인용자.)

 

피해자 관점이라는 말을 쓰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가해자의 의도나 기타 주변적 상황 등 어떠한 조건도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주장은 피해자의 관점이라는 말을 쓰고 있더라도 결국 피해자 중심주의의 오용일 뿐이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의도나 기타 주변적 상황 등 어떠한 조건도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이다. 이것은 ① 피해자에게 사건에 대한 판단 기준 전체를 위임하고 ② 처벌의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피해자에게 일방적으로 주고 ③ 경험에 대한 독점적 해석을 주장하게 하는 중세 마녀 사냥의 제소자 절대주의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상처를 받은 이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 의견을 존중하고 불쾌감에 대해 사과하는 문제와 해당 사항이 성폭력에 해당하기에 그에 따른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

주관적으로 불쾌한 행동폭력은 같지 않다. 폭력에 관한 규약들이 보호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이다. 제소자의 감정을 기준으로 삼는 관점은 여성 또는 제소자의 직관이 언제나 올바르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반을 둔 것이다. 제소자가 감정적으로 느낀 폭력은 어떤 권리에 대한 것이든 모두 성폭력이라는 주장은, 제소자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여러 조치들이 갖는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오히려 피제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등 정당화되기 어려운 또 다른 폭력을 낳을 위험이 언제나 있다.

이런 왜곡된 피해자 중심주의는 제소자가 피해를 호소하기만 하면 제소자가 피제소자를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고 자의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성이 제소하면 제소 내용에 대한 조사 없이 바로 처벌을 피제소자에게 가해 버리는 것이다.

또 이러한 원칙하에서는 제소자는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피해를 최대한 크고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데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대화가 불가능해지는 이유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2차 가해이다. 이제는 페미니스트 권김현영의 2차 가해 용어에 대한 비판도 보자.

 

2차 피해라는 용어는 피해자 입장에서 성폭력 사건 이후에도 성폭력을 용인하고 지속하도록 하는 강간 문화(rape culture)에서 받게 되는 고통을 드러낸다. 이와 구분되어서 사용되는 2차 가해라는 용어는 불특정 다수가 아무 문제의식 없이 향유하는 강간 문화의 문제를 구체적인 행위자에 의해서 실행되는 문제로 특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강간 문화가 문제야라고 할 때보다, 네가 바로 문제야라고 하는 것은 확실한 규제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렇게 2차 가해라는 말은 강력한 제재가 가능해진다는 장점이 있으므로 2차 피해와 함께 많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2차 가해2차 성폭력 같은 용어의 사용은 가능한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용어들로 인해, 1차 피해에 대한 조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있고, 문제가 전도되어 버려 정작 가해자는 사라지고 결국 피해자는 고립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정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피해자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즉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사가 반드시 필요한데, 2차 가해라는 개념이 조사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이후의 논의를 막는 데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참고로, 경찰이나 의료인들이 수사과정과 치료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성희롱하는 일이 생겼다면, 그것은 2차 가해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해결해야 할 성범죄다. 이는 별건으로 따로 고소를 진행하고 처벌해야 할 사안이다. 2차 가해라는 용어는 피해자를 비난하고 가해자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문화 속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문제제기보다는 그런 문화와 관련된 모두를 가해자라고 지목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의 가장 큰 문제는 이 개념 때문에 1차 피해에 대한 조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정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피해자에게도 필요한 일이다.13) (강조는 인용자.)

 

피해자 중심주의제소자 절대주의로 받아들이고 2차 가해란 개념을 끝도 없이 남용하면 중세의 마녀사냥과 똑같은 절차가 열린다. 제소가 들어오는 것만으로 피해자, 가해자가 결정되어서는 안 되고, 제소가 들어오면 제소자와 피제소자가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해 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제소가 들어온 것만으로 피제소자를 가해자로 부르는 것은 중세 마녀사냥이 취한 제소자 절대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제소가 들어오면 제소자, 피제소자 혹은 피해 호소인, 가해 지목인으로 출발해야 한다. 래디컬 페미니즘 문화에서는 2차 가해를 가리켜, 성폭력 가해자에 동조하는 발언,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피제소자에 대한 진상 조사 절차도 제대로 없이 가해자로 바로 결정하고 처벌까지 바로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겠다.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성폭력 가해자에 동조하는 발언, 행위로 2차 가해를 규정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가해 지목인을 가해자로 확정하기 때문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경우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도 발언할 수 없고 심지어 관련 사건의 증인도 2차 가해자일 뿐이다. 이후에 진실이 드러나더라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래디컬 페미니즘에서는 2차 가해로 지목된 이의 발언의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2차 가해란 성폭력 가해자에 동조하는 발언, 행위는 진실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피해 호소인의 편에 서서 가해 지목인을 같이 공격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해 지목인을 우리와 같이 공격하지 않는다면 이제 너도 가해자다. 증인으로 나서거나 절차상 문제를 제기한 이가 2차 가해자가 되어 집단 공격을 받는 것을 보고 2차 가해자가 되어 공격을 받고 싶지 않은 모든 이들은 입을 다문다.

 

이제 사건은 해결이 힘들다. 제소자에게 아무런 가해도 하지 않았는데 진실을 말한 것으로 2차 가해자가 되어 버린 증인이 다중이나 단체의 위력에 의한 집단 공격을 받고 있는 독립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처음부터 사과할 생각을 했던 피제소자가 언제라도 불쾌한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를 할 수 있다고 계속 말하고 있어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피제소자가 제소자에게 사과를 하는 것으로 해결될 사건과 2차 가해로 몰려서 다중이나 단체의 위력에 의한 협박을 받은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다. 2차 가해자로 지목받아서 다중이나 단체의 위력에 의한 집단 공격을 받은 무고한 증인에 대한 사과 문제는 피제소자가 제소자에게 사과하는 것과는 사건의 맥락상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과할 주체와 사과받을 대상이 다르다.

그러나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정의를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을 제소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또 다른 2차 가해자가 되어 공격을 받는 것이기에 모두가 입을 다문다. 자기 개인 안위 문제를 걱정하는 데다가 자신들이 속한 조직 보존 논리 때문에 입을 다문다. 이것이 2차 가해라는 개념의 오용으로 1차 피해에 대한 조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의 한 예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조직 보존 논리에 충실해서 사과도 하지 않는다. 2006년 경희대 서정범 교수 사건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무죄 추정의 원칙의 부재와 조직 보존 논리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30대 무속인 권 모 씨가 무속 신앙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인 80대 서정범 교수에게 연정을 가지고 성관계를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조작된 증거로 서정범 교수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하였다. 이후 증거가 조작된 것이 드러나고 무고라는 밝혀졌지만, 총여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서정범 교수에 대한 집단 공격으로 법정 공방이 끝나기도 전에 서정범 교수는 이미 직위 해제를 당했고 사회적으로는 매장이 된 상태였다. 서정범 교수는 사건 발생 이후 계속 앓다가 진실이 밝혀진 지 1년 후 사과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작된 증거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자 경희대 총여학생회에게는 서정범 교수에게 사과하라는 사회적 압박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경희대 총여학생회는 여성 운동이 타격을 받는다는 이유로 사과를 거부했다.

 

이런 예를 보더라도 페미니즘=여성 운동이라는 잘못된 공식은 깨어져야 한다. 경희대 서정범 교수 사건으로 타격을 받는 것은 래디컬 페미니즘 여성 운동이지, 전체 여성 운동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래디컬 페미니즘은 전체 여성의 이름으로 사과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이 사과하지 않은 이유는 사실은 조직 보존 논리에 있었다. 아래의 경희대 총여학생회의 성명서는 이들 래디컬 페미니즘의 조직 보존 논리가 무엇인가 잘 보여 준다.

 

사과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교수님에 대한 사과가 없다. 섣부른 기자 회견에 대한 사과가 없다.

그동안 저희들의 글에 많은 분들이 지적하신 부분입니다. 물론, 저희에게도 사과를 하느냐, 마느냐는 총여학생회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 저희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 이후 총여학생회 불신임과 사퇴, 여론의 뭇매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하면서도, 그래서 어찌 보면 가장 쉬운 방법이 될 수도 있는 사과를 두고, 저희들이 몇 날 며칠을 고심했던 이유는 그 사과가 저희 총여학생회를 비롯해서 경희 구성원 모두에게 독이 든 사과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14) (강조는 인용자.)

 

위 성명서 내용의 핵심은, 우리 래디컬 페미니즘의 조직이 보존되어야 여성들을 지켜 줄 수 있는데 사과를 해 버리면 우리 조직이 보존되지 않아서 여성들을 지켜 줄 수 없다. 그래서 사과를 하는 것은 독이 든 사과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못 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이렇게 래디컬 페미니즘에게는 정의는 자기들에게만 있다. 중세 부패한 교회의 성서 무오설, 교황 무오류설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자신들만 정의가 있다고 믿은 중세의 부패한 교회가 한 것은 제소자 절대주의, 유죄 추정원칙에 의한 마녀사냥이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정의는 자기들에만 있기에 자기들과 다른 발언을 하는 이들은 모두 여성의 적이다. 이스라엘과 다를 바 하나 없다. 여성 운동에서 더 이상 안드레아 드워킨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골간으로 만든 이스라엘 시오니즘의 생존자/피해자 권력 휘두르기의 폭력이 난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숙대에 트랜스젠더 여성이 입학하려고 했을 때 래디컬 페미니즘이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피해자 중심주의가 제소자 절대주의로 바뀌어 버리는 것은 정확하게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에게 배운 생존자/피해자 권력 휘두르기라는 같은 맥락 내에 있다. 래디컬 페미니즘이 한국의 여성 운동에서 주변부화되지 않는 한, 래디컬 페미니즘이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는 시오니스트에게서 배운 생존자/피해자 권력 휘두르기, 피해자 경쟁 문화를 통한 단체나 다중의 위력에 의한 협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권김현영의 피해자 경쟁 문화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숙대에 입학하려던 트랜스젠더 여성이 단체나 다중의 위력에 의한 협박으로 입학을 못 하게 되는 상황의 반복이나 피해자 중심주의가 중세 마녀사냥의 제소자 절대주의가 되는 폐단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은 이스라엘의 생존자/피해자 권력 휘두르기는 결국 이스라엘에게는 자승자박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의 뜻을 다시 한 번 새겨보자.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 자신이 구속되어 괴로움을 당함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생존자/피해자 권력 휘두르기, 피해자 경쟁 문화의 결과는 자승자박이 되어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낳을 것이다. 자승자박으로 이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운동의 주류로 있는 한,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같이 싸워야 하는 남녀 간의 갈등 수위는 끝 가는 데 없이 전개될 것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이 자본주의 착취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줄 모르고 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문제는 자신들만 알고 있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에 비판을 거부하고, 믿고 싶은 것만 계속 믿는 확증 편향이 있는 반지성주의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래디컬 페미니즘에 폐해가 있더라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적대시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같이 세상의 공멸로 나란히 가고 있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vs 안티페미니스트만 보더라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적대시하면 이들의 성별 분리주의만 더 격화시킬 뿐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오랜 남녀차별로 인해 생긴 역편향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래디컬 페미니즘의 문제점들을 꾸준히 비판하면서 여성 운동의 주류 자체를 바꾸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숙대 입학을 막은 다중이나 단체의 위력에 의한 협박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권김현영은 그를 막고자 하는 움직임이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일부 있던 것을 기록하였다.15) 페미니즘 내에 이런 긍정적인 움직임들이 더 명확해질 것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주변화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이나 억압자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남성들을 일상의 고역을 나누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로 본다.

 

콜론타이, 벨 훅스: 맑스주의 여성론과 페미니즘의 만남

남성을 주적으로 보는 것이 1세대 페미니즘 여성 참정권자들의 출발이었고 래디컬 페미니즘에서는 노골적인 분리주의로 한껏 고양되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또한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출발하였기에 남녀 갈등을 부추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너무도 쉽게 꼴론따이를 남녀 갈등을 부추기는 여성으로 왜곡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꼴론따이에 대한 대표적인 왜곡을 하나만 보자.

 

마르크스가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았다면, 콜론타이는 남녀 사이의 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그가 쓴 대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여 다른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자신들의 문제를 한결 쉽게 풀어나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모범이 되기를 바랐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여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특히 볼셰비키의 노선과 먼 견해를 갖고 있었고, 공산주의자로서 외교 분야에서 활동해야 했다. 공산주의 여성 운동에서는 여성의 해방에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았고, 당에서도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은 여성들이 콜론타이가 누렸어야 할 영예를 차지했다.16)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룩셈부르크나 꼴론따이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자양분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위와 같이 룩셈부르크나 꼴론따이를 페미니스트로 뒤틀어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기원으로 삼으려는 이유는 명확하다. 1차 대전에서 모든 여성들의 이름을 내걸고 여성들을 전쟁에 동원시키는 대가로 부르주아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던 1세대 페미니스트ㆍ여성 참정권자들을 여성 해방 운동의 기원으로 하기에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 앞에서는 너무나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활동하는 주공간인 지식 상품 시장, 특히 제국의 백인 중심 학계에서는 맑스주의 여성론 연구자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17) 이런 두 가지 이유가 겹쳐져서 그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꼴론따이를 왜곡시켜서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는다. 이들은 맑스주의 여성 혁명가들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덧칠해서 이용하고 있다. 심지어 꼴론따이를, 꼴론따이가 들었다면 너무나 끔찍해 했을 용어인 볼셰비키 페미니스트라고까지 부르면서 꼴론따이가 볼쉐비끼에 의해서 외교 분야로 쫓겨 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에서 대사의 역할을 모르고서 한 말이거나 악의적 왜곡일 것이다. 사실을 짚어 보자.

 

콜론타이는 이듬해에 모든 면에서 자원이 부족하여 외국과의 무역과 교류가 절실히 필요했던 신생 국가 소련의 막중한 외교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는 레닌에게 반대했던 콜론타이를 국외로 추방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현재 학계의 지배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콜론타이와 같이 6, 7개국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다른 나라에 대해 수준 높은 학술적 글을 적을 수 있으며 국제 활동을 다양하게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래 연표를 보면 레닌이 혁명 전 콜론타이 같은 국제 활동가들 덕분에 러시아와 연락망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레닌은 특히 콜론타이에게 수많은 국제 활동을 요청했다. 국내 정치에서 배제하려고 국외로 쫓아낸 여성 혁명가에게 굳이 세계 최초의 여성 대사라는 명예를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부는 콜론타이가 가진 국제 활동가로서의 오랜 역량과 경험을 인정했으므로 외교 업무를 맡긴 것이다. 콜론타이는 기대에 부응해서 2번의 노동 적기 훈장과 레닌 훈장을 받았고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혁혁한 성과를 보였다.18) (강조는 인용자.)

 

1923년 5월 30일, 노르웨이에서 소련 외교와 무역에서 전권을 가진 대표와 수장이 되었다. 여성으로서 이런 지위에 오른 사람은 콜론타이가 세계 최초였다.

1926년, 소련과 노르웨이 간의 무역과 항해 조약에 서명했다.

9월 17일, 멕시코 무역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1933년 3월 7일, 레닌 훈장을 받았는데 그 공로는 여성 노동자 농민에 대한 공산주의 교육에서 헌신적인 활동을 펼친 것이었다. 6월, 케렌스키 정부가 스웨덴 은행에 맡긴 금을 소련으로 돌려보내는 조약 체결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19) (강조는 인용자.)

 

사회주의 국가에서 무역을 하는 주체는 기업이 아니라 국가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대사는 자본주의 국가의 대사들과 다르게 그 무역의 전권을 맡았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대사인 동시에 그 나라에 진출한 삼성그룹, 현대그룹을 포함한 모든 기업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것이다. 꼴론따이는 외교라는 한직에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원이 부족하여 외국과의 무역과 교류가 절실히 필요했던 신생 국가 소련의 무역 증진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것이다. 꼴론따이가 그 막중한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다고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무역의 전권을 받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그 어떤 남성 대사도 역사상 누구도 해 보지 못한 것이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1933년 받은 레닌 훈장은 그동안의 여성 운동의 공로를 인정해서 받은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맑스주의 여성 혁명가들을 자기들 계보 안에 넣기 위한 조작들을 그만두어야 한다.

꼴론따이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 역사를 남녀 사이의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꼴론따이는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며 부르주아 여성 참정권만을 요구하던 1세대 페미니즘과 선을 단호하게 그었다. 들어라. (꼴론따이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아. 꼴론따이의 다음 말을.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현재 자본주의 세계의 틀 안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 그 자체로 충분히 구체적인 목표인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 있어서 현재의 동등한 권리란 단지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착취에 맞선 투쟁이 나아갈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주적으로 보며, 남성들이 부당하게 모든 권리와 특혜를 쥐고서 여성들에게는 속박과 임무만 남겨 놓았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승리란 이전에 남성들이 독점적으로 누렸던 특권이 공정한 성에게 허용될 때를 말한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다르다. 그들은 남성을 적이나 억압자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남성들을 일상의 고역을 나누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로 생각한다. 여성과 여성의 남성 동지는 똑같은 사회 모순으로 인해 착취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똑같은 혐오스러운 굴레가 그들의 의지를 억누르고 그들에게서 기쁨과 삶의 매력을 앗아 가는 것이다. 현 체제의 몇몇 특정한 면들이 여성에게 과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용 노동의 조건들이 때로 여성 노동자들을 남성들의 경쟁자나 적대자로 만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듯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노동자계급은 잘 알고 있다.20) (강조는 인용자.)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벗어난 페미니즘이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래디컬 페미니즘의 분리주의를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반대한다.

 

할머니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되찾아야 합니다.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페미니스트는 내 남동생 케네입니다. 케네는 다정하고, 잘생기고, 대단히 남자다운 청년입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21) (강조는 아디치에.)

 

벨 훅스의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는 아다치에보다 더 나아가서 남녀를 분리하자는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남자―투쟁을 함께하는 전우라는 것을 깨달아야 된다고 한다.22) 벨 훅스의 책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책 제목만 도용되고 있지 그 내용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벨 훅스의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분리주의 페미니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이 페미니즘의 전부인 양 하면서 이 책 제목을 도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벨 훅스는 래디컬 페미니즘을 아래와 같이 비판한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젠더가 어떤 이의 상황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라는 그릇된 전제를 고수했다. 이러한 아집을 깨뜨리는 일도 페미니즘 정치를 위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덕분에 여성들은 인종과 계급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여성 운동이 대중화되지 못했던 과정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23)

 

벨 훅스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젠더를 유일한 요소로 보는 그릇된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이 비판에서 더 나아가 좌파 페미니즘의 유일한 이슈는 계급이라고 한다. 벨 훅스는 계급을 인정하지 못하고 흑인 대 백인, 여성 대 남성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혁명적인 좌파 페미니즘의 유일한 이슈는 계급이다. 그들에게는 계급 분석이 중요하지만 인종과 성의 분석도 중요하다. 계급은 중요하다. 인종과 성은 계급 정치학이 폭로하는 가혹한 현실에서 관심을 끌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우리가 계급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의 새로운 의미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에도 사회와 국가는 인종과 인종의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한다. 계급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인종차별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할 수는 없다. 이제는 제발 속지 말자. …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는 계급 권력의 이익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계급에 대해 말하려 들지 않는다. 이 문제는 결코 섹시하거나 귀엽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는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척하는 편이 더 낫다. … 흑인들이 계급을 논하기는 쉽지 않았다. 계급 차이를 인정하면 인종차별이 우리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흔들린다. 그러면 흑인들의 인종 연대라는 환상이 깨질 수도 있다. 이런 환상은 계급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인종에 상관없이 손을 잡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한다.24) (강조는 인용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벨 훅스의 이 주장을 보면 성평등과 차별이 계급 모순만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벨 훅스의 사회주의는 노자계급 대립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잣대와 다를 수 있다, 계급환원론이다라고 할 것이다.

 

벨 훅스에 따르면 혁명적인 좌파 페미니즘의 유일한 이슈가 계급인 이유 중 하나는 지배계급은 끊임없이 피지배계급이 인종이나 성에 집착하게 해서 계급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여 자신들의 계급 권력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상에 깨어나지 못하면 흑인은 흑인끼리 단결해서 백인과 싸워야 하고, 여성은 여성 전체가 남성 전체와 싸우는 것에 멈추어 버린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이와 같이 여성은 단일계급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기존 페미니즘을 비판했다.

흑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역사에서 처음으로 젠더를 넘어서서 여성 문제를 인종 문제와 같이 볼 것을, 여성 문제를 계급 문제로 파악할 것을 주장하고 래디컬 페미니즘의 분리주의에서 벗어났다. 흑인 페미니즘의 이런 건강한 주장들이 여성 운동의 대세가 되면 래디컬 페미니즘은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이다.

 

맑스주의가 부르주아 여성 참정권만 요구하던 1세대 페미니스트들과 남녀 분리주의를 고양시킨 2세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는 만날 길은 없었다. 피해자화를 이데올로기 자원으로 삼는 라이프 스타일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벨 훅스 등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적으로 보지 않는다.25) 페미니즘과 맑스주의가 만날 수 있는 길은 페미니즘 내부에서 분리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벨 훅스 같은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시작하면서 겨우 열렸다.

 

흑인 페미니즘이 여성이 단일계급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 래디컬 페미니즘의 분리주의를 넘어섰기에 페미니즘은 이제야 맑스주의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분명히 하자. 여성이 단일계급이 아니라는 주장을 가장 먼저 한 것은 여성 맑스주의 혁명가들이다.

 

정칠성의 래디컬 페미니즘 비판: 여성은 단일계급이 아니다. 여성 해방은 무산계급 여성이 가져온다

정칠성은 여성이 받는 억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분노하였다. 정칠성이 주도해서 만들었던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 조직인 조선여성동우회는 1924년 5월 23일 창립 선언에서 여성이 성적(性的), 경제적으로 남성의 노예가 된 현실에 저항하고 우리[여성]도 살아야 하겠다. 우리도 잃었던 온갖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하겠다!는 강렬한 투쟁 의지를 피력했다. 정칠성은 1928년 5월 20일 황주 청년회관에서 신간회 황해도 황주지회가 주최한 사회 문제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 여성 운동과 신간회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강연 중 그는 우리 조선 여자들은 남자들의 완롱물이요, 남자의 위안물이며, 남자들의 일개의 생식 기계에 지나지 않는 노예였다는 내용이 문제시되어 임석 경찰관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26)

 

조선여성동호회의 설립 이후 전국 각지에서 사회주의 여성 단체가 생겨났다. 김제여우회도 그중 하나이다. 박애라든가, 여자 해방이라든가, 남녀평등이라든가 하는 호언우리 여자에게는 하등의 도움이 없었고 오직 자기 혹은 자기네에 속한 계급의 지위를 견고히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고 동시에 이 비참함의 근본 원인이 사회 현상의 기초인 경제 조직의 불합리에 있음을 절실히 체험했다는 내용의 선언은 당대에 맑스주의 여성 운동이 계몽 운동의 여권 운동/페미니즘 운동과 명확한 선을 그었음을 보여 준다.

정칠성은 여성이 남성 독재의 희생자라고 해도 동일하게 여성으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성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여성 해방은 프롤레타리아가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칠성은 1926년 일본에 머물면서 삼월회 간부의 이름으로 신여성이란 무엇―가치대폭락의 허물은 누구에게, 참자유의 길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맑스주의자로서 사상 투쟁의 첫발을 내딛었다. 이 글은 강렬한 계급의식을 지닌 무산 여성만이 모든 불합리한 환경을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진정한 신여성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글에서 기존의 신여성(新女性)의 이미지는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잔재가 남아 있고, 상층계급으로 포괄되는 반동(反動)으로 규정된다. 근대의 미명하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안하면서도 가정에 대한 순종 같은 봉건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당시 여성 담론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정칠성은 여성 해방을 쟁취할 수 있는 진정한 신여성은 불합리한 자본주의적 구조를 부인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 즉 무산 여성이라고 강조하였다.27) 당시 사이비 신여성이 넘쳐 나는 가운데서 진정한 신여성은 반봉건과 반부르주아 이념에 입각하여 모든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급의식을 가진 무산 여성으로서 새로운 환경을 창조코자 하는 열정이 있는 신여성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정칠성은 여성을 단일계급으로 보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살기 좋은 세상에 다 같은 여성으로서도 그 생활이 정반대로 되어 있으니 그 하나는 현대의 주인공인 유산계급의 처, 첩, 따님으로 타고난 팔자 좋은 운명의 소유자이며 또 하나는 모든 발달에 따라 더욱 비참한 운명에서 고력을 더욱 하게 되며 현대 문명의 하등 혜택을 입지 못한 무산계급의 여성이다.28)

 

근우회 선언에서 여성이 해방되는 날, 세상은 해방된다고 했는데 정칠성에게 그 해방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이다.

 

그런데 내가 보는 신여성이나 신신호(新信號)는 당신들(신여성, 신여성 하는 분들)이 보는 신여성과 좀 다릅니다. 요사이 종로네거리에서 보면 유행 화장, 유행 의복을 다투어 경쟁하는 신여성분들. 이 중에는 예수님 덕분으로 멀리 미국 유학한 분도 훌륭한 학교를 마치고 부자이면 첩도 좋다는 분도 있으며 자본주의 말기의 대표적 표현인 카페와 여러 신여성들 이들 신여성의 신년의 신신호는 거울을 대하여 정자옥(丁字屋. [충무로에 있는 미도파 백화점의 전신]), 삼월(三越)을 연상하여 가면서 연구 중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는바 신년에 신호를 울리며 앞날의 거룩한 신생활의 힘찬 신호를 울릴 진짜 신여성은 오직 연초, 제사, 방직 공장 등 흑탄연돌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29) (강조는 인용자.)

 

아! 자매여 이와 같이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 비극을 어찌하여야만 할 것이며 누구의 죄인가? 형제여 우리는 어느 때까지 이 불행을 천명에만 맡기고 말 것인가.

구조선(救助船)이 오도록 시절만 바랄 때가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오직 하나인 단결과 각성이 우리의 무기이다!30) (강조는 인용자.)

 

정칠성에게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관념으로 설정한 억압받는 여성 전체는 없었다. 정칠성은 남성과 여성을 획일적인 한 덩어리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보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사회에 붙은 기생충에 다시 붙는 기생충31)인 부르주아 여성―자기의 주인인 남편의 노리갯감에서 낙제되지 않으려고 미용법 웃음 연습을 하는 유산계급 아낙네―과 새벽부터 온종일 논과 밭 노동으로 그들의 몸은 피곤하며 그들의 형태는 흑인이 부럽지 않게 타고 익은, 그것뿐이랴. 밤이면 좀 편안히 쉴 틈도 없이 시부모와 자녀와 남편의 시종 및 기타 가정 노동으로 닭이 울 때까지; 잠잘 수도 없으며 그중에도 남편의 주정과 우월감에 트집까지 받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며 기계 공업이 발달되었든 말든 태고의 수공업인 길쌈까지도 다 하지 않을 수 없는32) 피지배계급의 여성은 같은 여성이 아니었다.

N명의 여성들이 가진 N개의 페미니즘 중 인간의 권리는 동등하지 않다고 보는 것도 많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쟁을 지지하면서 부르주아 여성 참정권만 요구하던 1세대 페미니스트들인 부르주아 여성들은 무산계급의 여성들을 자신들과 동등하다고 보지 않았다. 남성거세 결사단 선언을 외치며 앤디 워홀을 총으로 쏘아 죽이려고 했던 밸러리 솔래너스로 대표되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모든 성에 해당되는 보편적 인권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는가? 페미니즘은 파씨즘 발흥을 돕거나 파씨즘에 복무하기도 하였다. 독일에서 가난한 농촌 여성들이 나찌에게 표를 준 이유는 페미니즘은 부르주아 여성의 사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33) 당시 독일에서 페미니즘은 중간직급과 고위직에 미혼모 채용을 요구했다. 페미니즘 운동은 교육에 중점을 두고 의무를 지키고 이행하는 것으로써 여성의 권리를 얻고자 했고 선거권 요구는 소극적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여성 노동 운동은 사회 정치, 선거권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34) 파씨즘 체제하의 이딸리아 여성 단체들은 라틴 페미니즘을 옹호했다. 라틴 페미니즘은 전통, 가정, 인종을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시했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배격했다.35) 페미니즘은 인권과 동의어가 아니며 심지어 여성 권리와도 동의어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N개의 이념ㆍ방법론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개념이다. 이 N개의 페미니즘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허다하다. N개의 페미니즘 중 어떤 페미니즘은 여성은 생존자, 약자라고 그러고, 어떤 페미니즘은 여성은 강하다라고 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페미니즘과 래디컬 페미니즘도 대척점에 서 있다. N개의 페미니즘 중 남성부터 박멸하라. 그러면 여성들은 더 나아질 것이다(분리주의), 남자는 기계에 의해 인간 노동력이 대체되고 자동화되기 전까지만 쓸모 있을 것이다(여성 우월주의)36)라고 남성의 기본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래디컬 페미니즘도 있고, 자본주의 정치 체제 중 가장 극악한 체제인 파씨스트 체제의 기둥이 되었던 파씨즘 페미니즘도 있다. N개의 페미니즘 중 어떤 페미니즘은 여성 권리 향상을 위해서 젠더 감수성에서 남성을 거세ㆍ박멸하자는 방법론이고, 어떤 페미니즘은 여성 권리 향상을 위해서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적극 복무하는 파씨즘의 하부 이념이다.

페미니즘=여성 해방 운동이 아니다. N개의 페미니즘 중 성평등을 그 가치로 여기는 페미니즘도 있고 성 간의 갈등을 부추겨서 궁극적으로는 여성 해방 운동을 가로막는 페미니즘도 있다.

페미니즘 없이 자본주의를 뚫고 나갈 대안을 세울 수 있다고 정말 믿는 거야?라는 질문을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한다면, 래디컬 페미니즘이나 파씨즘 페미니즘 등은 없는 게 자본주의의 대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바로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질문자가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N개의 페미니즘 중 어떤 페미니즘을 말씀하시나요?라고 질문을 정확하게 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성은 모두 희생자들이기에 단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전태일처럼 분신자살해라는 의미의 태일해라는 구호가 남성 혐오를 표현하기 위해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서 흘러나올 때, 페미니즘 진영에서 이에 대한 비판은 나오지 않았다.

 

언니는 왜 이런 걸 나한테 줬어? 입술이 다 부르튼 스물한 살의 강명자씨는 문제의 책을 건네준 학출(학생운동권출신공장노동자) 언니를 붙들고 따졌다. 아마도 1983년의 일이다. 책 제목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당시엔 금서였다.

언니를 닦달한 것은 금서를 줘서가 아니라, 책을 읽은 후 마음이 어수선해져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이 꺼진 구로공단 기숙사에서 강씨는 창밖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 자꾸 눈물이 나서 입술이 다 부르텄다. 다음날 기숙사에선 아침밥으로 수프를 줬는데 차마 입에 댈 수 없었다. 누구는 차비를 털어서 시다들 풀빵을 사줬다는데, 수프마저도 사치 같았다. 시다 시절을 거친 현역 미싱사 강씨에게 책 속 재단사의 기행은 사무치게 다가왔다. 그다음 날은 더 심했다.

나는 이 사람처럼 살 수 있나, 나는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즈음 공장에서는 빨갱이들이나 한다는 노동조합 설립 얘기가 오갔다. 강씨는 책을 읽고 나서는 노조 설립을 놓고 고민하거나 뒤로 물러서거나 이런 게 없어졌다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 노조는 이듬해 한국 최초의 연대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의 중추가 된다.37)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을 위해 죽어 갔던 전태일을 남성 일반을 혐오하기 위해서 모독했을 때도, 페미니즘 진영에는 그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보다는 여성의 분노가 표현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태일해라는 구호 앞에서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입장과 맑스주의자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2019년 2월 12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페미니스트 최태섭이 고 김용균 노동자의 사고를 언급하며 남자니까 안전장치 같은 것은 안 해도 된다는 식의 말을 나이 많은 남성들이 한다. 여성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냐?는 발언을 하며, 산재의 원인을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에 두는 발언을 했을 때,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입장과 맑스주의자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여성을 생존자/피해자로 보고 남성을 가해자로 보는 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가부장제는 노동 운동 내에서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으로 변환되어서 들어왔다.

 

맑스주의 여성론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비판

식민지 조선의 여성 운동을 주도하던 정칠성 등의 여성 맑스주의자들은 한(조선)반도가 분단이 되면서 역사 속에서 잊혀졌고, 맑스주의 여성론 또한 같이 잊혀져야 했다.

 

현재 한국에서의 주류 페미니즘 이론인 래디컬 페미니즘은 80년대 초부터 서구 특히 미국의 강단에서 수입되었는데 그때 사회주의 페미니즘도 같이 들어왔다.38)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혹독한 사상적 탄압으로 맑스주의 여성론이 나올 수 없었던 8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 여성론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면서 맑스주의 여성론으로 오해를 받았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핵심 내용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체제가 상호 연관되어 여성을 억압한다는 이중체계론이다. 이들의 기본 주장은 성평등과 차별이 계급 모순만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는 노자계급 대립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잣대와 다를 수 있다는 것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철폐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맑스주의를 학습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조금씩 열리면서 맑스주의 여성론이 다시 나오게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맑스주의자들인 정칠성과 정종명이 번갈아 회장을 맡으며 근우회를 주도하던 시절이 다시 열리는 듯하였다. 맑스주의 여성론이 다시 나오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들은 맑스주의 여성론 고전들의 번역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붕괴 후 운동이 쇠퇴해 가면서 다시 맑스주의 여성론은 묻혀 갔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힘을 얻었다.

 

2020년 한국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소개된 지 40년이 지난 시점, 운동의 쇠퇴와 함께 이중체계론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다시 나왔다. 이 오래된 주장에 대한 비판을 위해 새로 글을 쓸 이유는 없다. 2020년 한국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 80년대 한국의 여성 맑스주의자들이 집단 토론을 통해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했던 내용들을 다시 꺼내겠다. 당시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중체계론의 핵심에 대한 비판은 잊혀서 묻혀 있었을 뿐 여전히 예리하다.

 

1987년 이승희의 여성문제의 본질과 형태에서 이중체계론 비판에 대한 핵심인 가부장제 비판 부분들을 그대로 옮긴다. 이 글은 맑스주의 여성론의 입장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집단 토론해서 정리한 것이다. 다만 개념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1987년 당시 사회주의 페미니즘 진영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쓰던 사회주의적 여성 운동론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용어로, 급진주의래디컬 페미니즘으로 고친다.

 

 

여성문제의 본질과 형태(이승희, 1987)

  • 이승희, “여성문제의 본질과 형태”, 윤한택ㆍ조형제 외, ≪사회과학개론≫, 백산서당, 1987, pp. 202-203, 209-210.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두 개의 체계가 상호연관되어 여성을 억압한다고 보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은 이중체계론(dual system theory)이라고 불린다. 이 이론의 가장 큰 특징은 자본주의사회의 계급문제와 별도로 발생하는 여성문제가 있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여성이 받고 있는 독특한 억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체제만으로는 부족하며, 남성지배체제인 가부장제라는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첫째, 가부장제 개념에 대해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들의 가부장제 개념은 여성문제를 올바르게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는 대답이 나왔을 경우, 이중체계론은 여성문제 인식에 도움을 주는 것아 아니라 혼란을 가져다 줄 뿐이다.

둘째, 이중체계론이 남성은 계급에 관계없이 모두 이득을 보기 때문에 남성자본가와 남성노동자는 서로 이해가 일치하며 여성을 억압한다고 보는 점에 대하여 검토해 보아야 한다.

셋째, 여성 억압의 기원 문제를 볼 때 성차별이 계급차별보다 이전에 있었다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는 충분한 이론적 근거가 있는가에 대하여 검토해 보아야 한다.

넷째, 이중체계론의 실천적 함의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 이론이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 내놓은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1) 가부장제 개념에 대하여

후기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래디컬 페미니즘이나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가부장제를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 취급한 점을 비판하면서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였고 그 결과 여성억압체제인 이중체계를 보다 분명한 모습으로 밝혀냈다. 이 노력은 래디컬 페미니즘들의 기본인식인 여성이 받는 성차별은 계급차별에 우선하는 특수한 차별이라는 인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었다.

 

먼저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를 여성노동력에 대한 통제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검토해 보자. 가부장제의 물적 기반이 여성노동력에 대한 통제라면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노동력을 통제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여성노동력을 통제하는 가부장적 체제는 그 물적 기반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또한 하트만은 가부장제가 일종의 사회적 관계로서 생산의 사회적 관계와 독립하여 상호작용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 가부장적 사회관계가 가족에 국한되지 않고 노동 현장에도 있다면([표 4]를 참조), 이러한 가부장적 사회관계를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원칙이 없다. 만일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같은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나타난다면 그것들은 분리된 두 개가 아니라 한 개의 체계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억압은 이중체계론의 도식인 [표 4]가 아니라 [표 5]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음, 성과 출산에 대한 통제를 여성억압의 주요 요인으로 보아 재생산의 영역에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를 상정하는 경우, 가부장제는 인간재생산을 둘러싼 남녀 간의 사회적 관계를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이들은 래디컬 페미니즘과 초기 사회주의 여성론이 가부장제를 보편적이고 초역사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봄으로써 몰역사적 개념이 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인간재생산 관계가 생산양식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그러나 이들은 가부장제 자체의 변화의 동인을 찾지 못하고 항상 외적 생산양식에 의해 변화된다고 봄으로써 가부장제를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독자의 체계로 분리해 내는 데 실패했다. 인간 재생산 관계, 즉 가부장제가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생산양식에 대해 자율적일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재생산 관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 받는다.

 

이와 같이 이중체계론은,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를 생산의 영역에 두었거나 재생산의 영역에 두었거나 간에, 가부장제가 독자의 물적 토대를 갖고 자본주의에 대해 자율적인 체제라는 것으로 분리해 내는 데 실패했다. 이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의 체계로 존재하는 것을 책상에서 별개의 이중체계로 분리시키려고 아무리 애써도 실제로 분리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중체계론의 오류는, 여성의 억압이 자본주의라는 땅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과, 따라서 여성문제는 전체 자본주의 사회 문제의 일부분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체제에서 성차별과 계급차별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 여성억압의 문제를 분리해 내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 중략 …

 

(4) 이중체계론의 여성문제 해결방법에 대하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이중체계론의 문제들은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 안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여성억압체제인 가부장적 자본주의는 어떠한 방법으로 소멸되는가? 이중체계론은 계급구조와 가부장적 구조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양식의 변동이 가부장적 구조의 변동에 영향을 미친 것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적 구조의 변동은 불가불 계급구조의 변동을 초래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여성운동이 가부장제를 공격함으로써 가부장적 구조가 흔들리면 계급구조도 흔들리기 때문에 여성운동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여성운동의 과제로 성별 직업분리의 변화나 출산양식의 변동을 들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체제가 변화하지 않고 성별 직업분리나 출산양식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일까? 여성이 출산과 양육에 대한 선택권을 갖기 위해서는 충분한 경제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에서 여성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립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질 수 없다. 노동시장에서 차별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별 직업분리가 여성운동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노동시장의 성별 직업분리로 여성은 저임금 하위직종에 몰려 있고 이 저임금 여성노동력은 자본축적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에 자본이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여성운동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보는 것은 관념적이다. 그렇다면 가부장적 자본주의체제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 이중체계론은 이 문제에 부딪히면 결정적으로 그 오류가 드러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들 간의 밀접한 관련만을 증명하려고 했지 그 둘이 어떻게 대립, 갈등하고 있는가의 문제, 즉 두 체제 간의 모순구조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두 체제의 결합체계인 가부장제 자본주의가 어떻게 변혁될 수 있을 것인지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이상으로 이중체계론의 이론적, 실천적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중체계론의 기본적인 오류는 성차별과 계급차별을 분리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별개의 것으로 분리해 내려고 한 것이었다. … 이 이중체계론은 첫째는 개념적으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분리사용하여 여성 노동력착취의 가부장제전체 노동력 착취의 자본주의로 규정하나, 두 체계의 분리에 사실상 실패하여 우선 이론상으로조차도 자가당착적 논리에 빠져버렸다. 두 번째는 소련사회에 남아있는 여성불평등의 문제를 물적 조건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가부장제는 하부토대를 지닌 것이라면서 새로운 여성억압의 물적 조건을 찾으려고 온갖 정열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모든 혁명이 기계적으로 물적 토대에 조응하고 사회는 그에 따라 자동전화한다는 속류유물론의 전형으로서 반레닌주의적 반혁명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사회주의적 여성운동론자들은 대부분 부르주아계급 출신의 지식인여성들이 그 계급적 한계 내에서 여성문제를 관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여성문제에서 계급문제를 사상시켜 버렸다. 예를 들면 남성자본가와 남성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여성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본 것이나, 여성은 계급에 관계없이 여성억압을 경험한다는 것만으로 하나로 뭉쳐 여성운동을 할 수 있다고 본 것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일종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을 적대관계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을 남녀의 동질성보다는 대립, 갈등면을 부각시켜 봄으로써 계급운동의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강조는 인용자.)

 

[표 5]를 다시 보자. 자본의 논리는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유지, 이용, 강화하기 위해 가족 내 여성, 시장 내 여성을 착취한다. 여성은 가족 내에서도 시장에서도 자본의 논리에 의해 착취를 당한다. 자본은 차별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제도화, 물질화하여 착취를 강화한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계급들이 한 사회 내에서 문화, 종교, 성, 인종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차별의 논리를 이용해서 착취를 강화한다. 그리고 이는 다양하다.

1980년대 미국에서 시에 고용된 거리 청소부는 고등학교 선생보다 많은 봉급을 받는다. 청소년기에 빗나갔던 래퍼 노토리어스 B.I.G는 왜 학업에 충실하지 않냐는 선생의 꾸지람에 거리 청소부가 되면 선생님보다 돈을 잘 벌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대꾸한다.39) 그러나 인도의 거리 청소부는 최소 생계비도 못 받는다. 인도 헌법에서 카스트는 철폐되었지만 대대로 청소부 자띠(jati. [카스트에 따라 대대로 내려오는 직업])였던 불가촉천민의 자손들은 지금도 그 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인도 자본주의는 미국에서는 할 수 없는 기존 힌두교가 만든 봉건 지배 이데올로기를 지금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이 대대로 내려오는 종교적, 문화적 관념인 카스트 제도를 이용해서 이들을 착취하는 것이다.40) 이 불가촉천민들의 삶을 바꾸는 것은 브라만과 불가촉천민의 투쟁만으로는 될 수 없다. 문제는 자본주의이다.

무슬림들은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에서는 시민으로서 살아가지만 미국에서는 범죄자 취급을 받으면서 전반적으로 최저 임금도 못 받다가 언제나 산업예비군으로 몰릴 위기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무슬림들은 기독교와 투쟁을 진행할 것인가? 문제는 자본주의이다.

그리스에서 금발은 나는 흑인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금발은 가난한 알바니아 이민자로 그리스 내 최하층계급을 이룬다.41) 그리스에서 금발은 흑발과의 투쟁을 전개해서 자신들의 삶을 바꿀 것인가? 문제는 자본주의이다.

질문을 해 보자. 여성은 남성과 투쟁해야 하는가?

문제는 차별을 최대한 이용하고 증폭시키고 끊임없이 새로 개발하여 잉여가치를 더 착취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에 있는 것이지, 종교, 인종, 성 등이 근본 문제는 아니다. 인도에서 브라만은 불가촉천민 집안 출신들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며, 미국에서 기독교인은 무슬림들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며, 그리스에서 흑발은 백발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남성은 여성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차별들을 제도화시켜서 잉여가치를 더 착취하고자 하는 자본주의가 철폐되지 않고서는 차이를 차별로 제도화하여 인민을 억압하며 착취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철폐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이야기해 보자. 계급은 생산수단을 누가 어떻게 소유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한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누가 어떻게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회의 종교, 인종, 성의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방법들이 달라진다. 즉, 각 사회마다 다른 계급 관계가 종교, 인종, 성에 관한 문제를 사회마다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계급적 입장으로 한 사회를 보아야 각종 차별들이 만들어 내는 착취들이 어떻게 다층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고, 사회를 바꾸기 위한 실천의 지침을 구체적으로 낼 수가 있다. 계급은 종교, 인종, 성과 같이 배열해 놓고 이 중 어느 것이 우위이냐를 다투는 문제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종교, 인종, 성, 계급을 쭉 나열해 놓고 이 모든 것들이 상호 교차되고 있다. 그중 성이 가장 큰 문제, 그 다음이 계급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나온 이들의 강령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철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과 노동이 성별화된 이유를 모르고, 성이 가장 큰 문제라고 외치는 페미니즘들은 자본주의를 뚫고 갈 수 없고 자본의 착취에 복무한다.

남녀차별 문제를 성별을 떠난 계급 문제라 주장하면서 엄연히 존재하는 남녀차별 문제를 무시하고 있는 자칭 맑스주의자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철폐를 강령으로 내세우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나 동일한 수준이다. 양자는 모두 계급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가 주조해 낸 동전의 양면이다. 이 때문에 자칭 맑스주의자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는 서로 싸우고 있지만 남녀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맑스주의는 페미니즘이 생기기 전부터 여성을 포함한 모든 차별받는 이들을 위해서 싸워 왔다. 1880년 쥘 게드와 맑스가 초안을 잡은 프랑스 사회당 강령의 전문(前文)은 생산계급의 해방은 성과 인종의 구별 없이 모든 인간을 포함한다로 시작하고, 경제 강령으로 들어가면 5. 남녀 노동자에게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 들어있다.42)

래디컬 페미니즘이 사회주의의 외피를 입고 있을 뿐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맑스주의는 한계가 있고 보완을 위해서 이중체계론, 상호교차이론을 운운하면서 우리만이 여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설득력이 전혀 없다.

지금 누가 사회주의가 성평등과 차별이 계급 모순만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맑스주의를 계급환원론이라 비판하는 이유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계급 개념이 빈부 격차에 따른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들 수준에서 볼 수 있는 맑스주의는 그것뿐인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계급 개념이 이렇게나 빈약하기 때문에 이들은 성차별을 설명하기 위해서 태초부터 여성이 남성을 억압해 왔다는 몰역사적 가부장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여성이 고통받는 것은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라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몰역사적 가부장제 주장은 남성 노동자계급과 여성 노동자계급을 갈라놓아서 자본의 착취 논리를 강화시켜 줄 뿐이다.

자본은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해서 모든 차별을 가능한 한 최대한 제도화시킨다. 그리고 기존 착취 제도가 수명이 다 되면 문제가 되지 않던 차이들을 새로운 차별들로 만들고 강화하여 새로운 착취 제도를 받히도록 한다. 자본은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해서 종교, 인종을 이용하듯이 성차별을 이용한다. 여성이 자본주의에서 남성보다 억압받는 것은 가능한 모든 차별을 이용하여 더 많이 착취하라라는 자본의 기본 순환 논리에 의해 성차별이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같은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나타난다면 그것들은 분리된 두 개(가부장제, 자본주의)가 아니라 한 개의 체계(자본의 착취 체계)에 속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중체계론에서 나온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철폐를 비판하는 우리의 주장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에서 여성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철폐를 외치면서 하던 주장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정칠성을 비롯한 여성 맑스주의자들이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하면서 사회주의 여성 운동의 물꼬를 트고, 근우회로 전국 조직을 만들어서 여성 운동을 주도하던 시절의 주장이다.

 

앞날의 거룩한 신생활의 힘찬 신호를 울릴 진짜 신여성은 오직 연초, 제사, 방직 공장 등 흑탄연돌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재촉하는 새벽 다섯 시 고동 소리와 함께 피곤한 다리를 옮겨 놓는 그들! 여기에 그들의 걸음이야말로 이 앞날 신생을 개척할 행군의 조련이며 그들의 눈물과 고역의 피와 땀은 앞날 약속을 신호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클라라 쩨트킨, 사로지니 나이두 등 여러 훌륭한 혁명 부인들이 걷는 걸음을 따라 걷지 않으면 아니 될 우리 조선 부인들, 한 발 자칫하면 멸망이 올 것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신호를 올려야 합니다.43)

 

 

정칠성 연보44)

 

1897년, 대구 출생.

1905년, 기생 수업 시작. 고된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시조, 판소리, 가야금 등 각종 기예를 익혔다. 이 시기 기생들이 대략 12-13살에 수양딸로 팔려 기생 학교에 들어갔음을 생각할 때, 꽤 이른 나이에 기생이 된 셈이다. 그만큼 딸을 키우기 힘든 가난한 가정으로 추측된다.

드라마 등에서 오랫동안 잘못 재현된 이미지 등으로 기생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이들은 매춘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 예인이었다. 제일 천대를 받는 창부들에게 기생이라는 명칭을 주게 된 후 기생에 대한 오해가 생겼다.45)

1914년, 18살 때 상경했다.

1916년, 남도 출신 기생들이 모여 있던 한남 권번에 이름을 둔다. 기명은 금죽(錦竹)이었다.

1919년, 3ㆍ1 운동이 일어나자 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일약 민족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46)

1922년,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영어강습소에서 어학과 타이핑 기술을 공부했다. 영어권 나라로 유학을 갈 목적이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가지 못했다.

그리고 기명(妓名)이던 금죽(錦竹)을 버리고 사회 운동가 칠성(七星)으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정칠성은 과거 기생으로서의 정체성과 완전히 단절했다. 하지만 기생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의 정보 보고에는 기생 출신이라는 표시가 덧붙여졌고, 국내 잡지에서는 남도 소리의 명창인 그녀의 국악과 가무 실력이 종종 회자되었다. 사회 운동에 투신한 후 정칠성은 노래나 가무 공연을 거의 하지 않았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로부터 가야금 과목 교수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옷감을 짜는 편물(編物)과 직조(織造)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여성 해방을 위한 활로를 꿋꿋이 개척했다.47)

1923년, 귀국하여 한때 물산 장려 운동에 참여, 10월 이춘수와 대구여자청년회(첫 여성 대중 조직) 창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4년 5월, 허정숙, 정종명 등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하여 집행위원이 된다(이 단체는 사회주의 여성 운동계의 통합을 견인하였다고 평가된다).48) 조선여성동우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 해방론을 주장한 강령을 선보였다. 일반 부인을 대상으로 동지 규합에도 노력하였다. 창립 이후 교양 강좌, 음악회 개최와 공장 여공들의 파업 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1925년부터 내부 사회주의 그룹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분열되고 말았다.49)

1925년 3월, 경상북도 단위 사상 단체인 사합동맹(四合同盟)을 결성한다. 이때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3월 31일 동경여자기예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현경, 황신덕 등의 유학생들과 함께 사상 단체인 삼월회(三月會)를 조직, 일본의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 야마카와 키쿠에와 교류했다.50)

두 번째 일본 유학 때 기예학교에서 편물과 자수를 공부한 정칠성의 이력과 이후의 편물 강습회는 분명 경제적인 자립의 실천을 위한 것임을, 그래서 또 다른 형태의 이념 운동임을 짐작케 한다.51) 두 번에 걸친 동경 유학에서 베벨과 야마카와 키쿠에의 사회주의 여성 운동론을 수용하였고,52) 이 시기에 ≪로자 룩셈부르크―여성과 사회≫ 팸플릿을 발간하였다.

1926년, 일본에 머물면서 삼월회 간부의 이름으로 신여성이란 무엇―가치대폭락의 허물은 누구에게, 참자유의 길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본격적인 사회주의적 논평을 쓰기 시작한다. 6월 전에 귀국하여, 잠시 동안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하였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설립에 참여하였고, 간사 및 신간회 본부의 의안작성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5월 27일, 정칠성은 유각경, 황신덕, 허정숙 등과 함께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선전조직부위원으로 활동했다. 근우회는 식민지 시기 조선 최대의 여성 단체이자 최초의 전국적 조직으로 60여 개의 지회를 거느렸고, 조선 근대 여성 운동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협동전선에서 같이 사업을 하는 것이기에, 좌, 우를 막론하고 여성 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운동 단체였다.

근우회의 회장직을 맑스주의자인 정종명과 정칠성이 번갈아 맡은 것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이 컸다. 여성 운동에서 전 인민에게 참정권, 남녀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등을 쟁취한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과와 1918년 부르주아 여성의 참정권만을 획득한 1세대 페미니즘의 성과는 대조하면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1928년 5월 20일, 황주 청년회관에서 신간회 황해도 황주지회가 주최한 사회 문제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 여성 운동과 신간회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9년 6월, 신간회 복(複)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7월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그동안의 운동 방식을 근우회라는 전국적 조직 차원에 구현하고자 노력하였고 선전 조직 강화와 노농부 신설 등을 통해 여성의 무산계급성 자각을 강조하는 여성 해방론을 견지하였다.53) 또한 조선어사전편찬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9년 9월 27일, 근우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내무성 앞으로 조선인 노동자 귀환에 관한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다. 교육 문제와 부녀자, 아동의 노동 문제 등 사회 복지적 측면에서 선구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야간작업 금지와 시간 외 작업 금지, 탁아 제도 도입 등의 항목을 살펴보면 당시의 여성들이 얼마나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신음하고 있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해 철저한 사회주의적 비판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민족차별에 대한 시각이 날카롭다는 점이다.54)

11월에는 광주 학생 의거에 간여하여, 정종명, 허정숙과 함께 투옥되기도 하였다.

1930년 1월, 항일 민족주의적 학생 운동에 근우회 간부가 조직 지도에 관련되었다 하여, 허정숙, 정칠성, 박호진, 박차정 등이 체포ㆍ구금되었으며, 강아그니아 등도 공산주의 재건 운동에 관련되어 체포ㆍ구금되었다. 근우회 운동에 대한 일제의 지속된 탄압은 사회주의 여성 운동에 동조하지 않았던 지회 운동까지도 힘을 잃고 소멸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55)

1931년, 근우회 해산 시기상조론을 제기하였으나, 결국 근우회는 해체되었다.

1월 1일, ≪조선일보≫에 계몽 운동에 주력―해소론은 시기상조다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해소는 운동이 필요 없어지면 말할 것도 없이 이뤄지는 것이지, 당장 필요한 운동을 사라지게 하는 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또한 일반 여성의 의식을 촉성시키기 위한 계몽 운동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56)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는 30년대부터 모든 사회주의 운동권이 지하로 숨어들어 숨을 죽이게 되는데, 정칠성 또한 바짝 몸을 낮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짧은 소감을 쓴 것이 있는데, ≪조선지광≫ 1931년 정월호에 실린 연애의 고민상과 그 대책이다.57)

5월, 신간회 해소론 수용, 신간회 전체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해소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경성, 평양, 대구, 통영에서 편물 강습 따위로 살아갔다.

1932년 1월, ≪별건곤≫에 나는 왜 이렇게 됐나, 나는 왜 도로 장발을 했나를 발표하였다.

단발은 동아시아 근대에서 신여성의 상징이었다. 모던 걸을 모단(毛斷)으로 표현할 정도로 근대적 상징 그 자체이었다. 그러나 단발이 기생과 신여성 사이에 동시에 이뤄짐으로써 일반 사회는 단발한 신여성을 흔히 탕녀로 매도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여성 사회의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다만, 의복 개량에 비해 남성들의 반대가 컸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간섭 또는 억압을 단발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58) 맑스 걸, 엥겔스 레이디로 불리던 좌파 신여성들은 단발을 많이 했다. 홍군 여전사들의 이미지는 권총을 찬 단발 여성의 이미지였다.59) 1927년 4월 12일 중국 장개석의 상하이 쿠데타 때, 단발 여성들을 좌익이라고 하여 보는 대로 학살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알고, 정칠성이 자신의 머리에 대해서 쓴 글을 보면, 정칠성의 시원시원하고 실무를 중시하는 실용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1935년, ≪조선일보≫에서 잠시 기자 생활을 했다. ≪삼천리≫에 동지 생각60)을 발표하여 쇠퇴한 운동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하였다.

1937년, 함경남도 장진 삼포금광배급소에서 주임으로 생활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대구로 돌아와 조선 공산당 경북도당 부녀부장을, 이후에는 조선부녀단체대표자대회 소집준비위원회 준비위원, 조선부녀총동맹 결성대회 임시의장,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위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성지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6년, ≪독립신보≫에 조선의 남편들이여, 여성 계몽에 힘쓰는가?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해방이 되고 각종 공식 직책을 맡으면서 식민지 시기보다 활동하기 좋아졌지만, 남녀평등에 대한 그녀의 염원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이 인터뷰에 잘 드러나 있다.

 

그중에도 이중 삼중으로 억눌리고 질식하는 여성들의 운명은 언제까지든지 기구만 하구려. 정치적 압력은 우리들의 직접적인 투쟁 대상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은 더욱 절박한 고통을 주는 건 조선의 남편들이에요. 소위 민주진영의 일꾼들까지 가정 내의 민주주의는 영 모르고 안해[아내]를 계몽하지 않고 독서나 집회를 위해서 시간을 주지 않고 이러고는 여성 운동이 활발하지 못한 것만 개탄하잖아요.61)

 

1947년, 조선 부녀에 대한 미군의 만행 사건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62)

1947년, 미 군정은 8ㆍ15 폭동 음모설을 조작ㆍ유포하며,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당시 미 군정과 극우 세력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통일 정부 수립에 찬성하던 남조선 노동당을 탄압했다. 7월 29일, 남로당은 미쏘 공위 성공을 촉진하고자 20만 명이 참여한 군중대회를 연다.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조선 민중의 염원을 전달하기 위한 이 집회에는, 미국 대표와 쏘련 대표가 모두 참석했다. 그런데 8월 11일, 미 군정은 남로당이 8월 15일을 기해 전국적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며, 경성에서만 1,300여 명, 전국 13,00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체포한다. 그리고 이어진 남로당의 불법화로, 정칠성 또한 지하로 잠적하게 되었다.

1948년 4월, 전 조선 정당ㆍ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월북하였다. 남북 협상에 참가한 후, 8월 23-25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5년,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1957년,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에 올랐고,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58년, 반종파 투쟁 당시 반혁명 사건에 연루, 더 이상 공적인 활동 기록은 없다.

정칠성의 이북에서의 삶은 분단된 현실로 인해 상세히 알 수 없다. 단지 ≪북한인명사전≫ 등의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북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63)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여성 단체들의 선언과 강령

 

조선여성동우회 선언과 강령(1924년 5월 23일)64)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권리 없는 의무만을 지켜 오던 여성 대중도 인류 역사의 발전을 따라 어느 때까지든지 그와 같은 굴욕과 학대만을 감수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게 되었다.

우리도 사람이다. 우리에게도 자유가 있으며 권리가 있으며 생명이 있다. 우리의 지방(地方)은 누구에게 빼앗기었으며 우리의 자유는 누구의 짓밟힘이 되었는가. 우리는 성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남성의 압박 노예가 되고 말았다. 저 무리(無理)한 남성은 우리의 가졌던 온갖 권리를 박탈하였고 그 대신 우리에게는 오직 죽음과 질병만을 주었다. 아! 우리도 살아야 하겠다. 우리도 잃었던 온갖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하겠다.

 

[강령]

一. 본회는 사회 진화 법칙에 의하여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 해방 운동에 입(立)할 일꾼의 양성과 훈련을 기(期)함.

一. 본회는 조선 여성 해방 운동에 참가할 여성의 단결을 기함.

 

김제여우회 선언(1924년 10월 7일)65)

역사는 부절히 전진하여 필연적으로 소위 20세기 문명 시대라 하는 피치 못할 금일의 살육 시장을 산출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 난국에 처하여 과거를 회상하지 아니하지 못하게 된다.

원시 여성 중심 시대를 탈한 이후 금일까지의 역사는 (일일이 매거하지 아니하나) 비분참담한 혈루의 역사였다. 그동안에도 박애라든가, 여자 해방이라든가, 남녀평등이라든가 하는 호언이 무소부지요, 대자대비하신 선지자라 할까, 성인이라 할까 하는 양반님들의 구호에 많이 발로되었었다.

그러나 그 금과옥조의 말씀이 우리 여자에게는 하등의 도움이 없었고 오직 자기 혹은 자기네에 속한 계급의 지위를 견고히 하며 권리를 신장하야, 불합리한 사회 제도를 지체케 한 마술사의 술책에 불과하였음을 우리는 깨달았다. 동시에 여자로 하여금 비절담화한 생활을 영위케 한 근본 원인이 사회 현상의 기초인 경제 조직의 불합리에 있음을 절실히 체험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족적인 종래의 인권 운동보다는 일보를 진하여 대중 해방 운동으로써 우리의 적년 원한을 풀고자 하여 이에 본회를 조직한다. 오라! 가장 신흥기분이 농후한 신여성이여! 단결하자!

 

[강령]

一. 규중처녀로 하여금 ○○[판독이 어려움] 같은 현대 사회를 이해케 하여 여성의 자각을 촉진함.

一. 현대 여성의 인권적 입장과 경제생활의 파멸을 자각케 하여 여성의 반역을 기함.

一. 단결의 힘으로써 대중 해방 운동과 제휴하여 완결무결한 신사회 건설을 기함.

집행위원: 최원선, 국순신, 신기숙, 이복련, 김순봉, 이순희

 

경성여자청년동맹 강령과 규약(1925년 1월 18일)66)

[강령]

一. 무산계급여자청년의 투쟁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기함.

一. 무산계급여자청년의 단결력과 상부상조의 조직력으로 여성의 해방을 기하고 당면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규약]

제1조 본동맹은 경성여자청년동맹이라 칭하고 본부를 경성에 설치함.

제2조 본동맹의 강령은 상(上)과 같음.

제3조 본동맹의 맹원은 본동맹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만 16세 이상 만 26세 이하의 여성으로서 맹원 2인 이상의 보증ㆍ추천함(保薦)으로 집행위의 결의를 거쳐야 함. 단 본동맹이 제한하는 연령을 초과했을 때는 준맹원으로 있게 되며 투표의결권은 없음.

제4조 본동맹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기 사업을 수행함.

가. 일반청년 여성에게 해방적 의식을 각성케 하는 수양기관을 설치한다.

나. 출판강연강습연구회 등을 수시로 개최한다.

다. 기타 필요사업

제5조 대회는 본동맹의 최고기관으로서 집행위의 보고를 받고 일체의 사항을 의결하며 집행위 7인을 선출한다.

제6조 본동맹의 정기대회는 매년 3월, 9월의 2회로 한다. 집행위의 의결 및 맹원 3분의 1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집행위에서 임시총회를 소집한다.

제7조 집행위는 본동맹을 대표하는 일반사무를 집행하며 위원의 보선(補選) 증보(增補)를 할 수 있다.

제8조 집행위원회에 하(下)의 각부(各部)를 둔다.

1. 서무부(庶務部) 2. 교육부 3. 사회부

제9조 본동맹의 경비는 맹원의 의무금(義務金)과 의손금(義損金)으로 충당한다.

1. 가맹금은 50환으로 정한다. 그 의무금은 매월 20환이다.

제10조 본동맹의 강령 규약을 위반하는 맹원은 집행위의 결의로써 제명하며 최근 총회의 승인을 요한다.

제11조 본규약은 대회의 결의로서 증삭(增削)하며 통과일로부터 실시한다.

 

근우회 선언(1929년)67)

역사 있은 후부터 지금까지 인류 사회에는 다종다양의 모순과 대립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유동무상(流動無常)하는 인간관계는 각 시대에 따라 혹은 이 부류에 유리하게 혹은 저 부류에 불리하게 되었나니 불리한 처지에 서게 된 민중은 그 설움을 한껏 받았다. 우리 여성은 각 시대를 통하여 가장 불리한 지위에 서 있어 왔다. 사회의 모순은 현대에 이르러 대규모화하였으며 절정에 달하였다. 사람과 사람 상에는 인정과 의리의 정열은 최후 잔해도 남지 아니하고 물질적 이욕이 전 인류를 몰아 상벌의 수라장으로 들어가게 했다. 전쟁의 화는 갈수록 참담하여 가며 확대하여 가고 빈국과 죄악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 시대 여성의 지위에는 비록 부분적 향상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환상의 일편에 불과하다.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일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그런데 조선 여성을 불리하게 하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 조선 사회 전체를 괴롭게 하는 그것과 연결된 것이며 일보를 진하여는 전 세계의 불합리와 의존 합류된 것이니 문제의 해결은 이에 서로 관련되어 따로따로 성취될 수 없게 되었다. 억울한 인류가 다 한 가지 새 생활을 개척하기 위하여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며 또 역사는 그 분투의 필연적 승리를 약속하여 주고 있다. 조선 여성 운동의 진정한 의의는 오직 이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의 이해에 의하여서만 비로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니 우리의 역할은 결코 편협하게 국한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은 조선 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 전체를 위하여 분투하게 되는 행동이 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이하 11자 삭제당함). 그러나 일반만을 고조하여 특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고로 우리는 조선 여성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조선 여성의 모든 특수점을 고려하여 여성 따로의 전체적 기관을 갖게 되었나니 이와 같은 조직으로서만 능히 현재의 조선 여성을 유력하게 지도할 수 있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여성 운동은 세계 사정에 의하여 또 조선 여성의 성숙도에 의하여 바야흐로 한 중대한 계단으로 진전하였다. 부분 부분으로 분산되었던 운동이 전선적 협동전선으로 조직된다. 여성의 각층에 공통되는 당면의 운동 목표가 발견되고 운동 방침이 결정된다. 그리하여 운동은 비로소 광범하게 또 유력하게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단계에 있어서는 모든 분열 정신을 극복하고 우리의 협동전선으로 하여금 더욱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이 조선 여성의 의무이다. 조선 여성에게 얼크러 있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것을 일반적으로 요약하면 봉건적 유물과 현대적 모순이니 이 양 시대적 불합리에 대하여 투쟁함에 있어서 조선 여성의 사이에는 큰 불일치가 있을 리 없다. 오직 반동층에 속한 여성만이 이 투쟁에 있어서 회피 낙오할 것이다. 근우회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사업을 전개하려 하는 것을 선언하나니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1,000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자.

 

근우회 강령(1929년)68)

여성에 대한 일체 차별 폐지

조혼 폐지와 결혼의 자유

근우회(槿友會) 행동 강령

 

시내 근우회 본부에서는 지난 23일 위원회를 열고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각지의 지회(支會)는 시급히 대의원 명부 및 조사표를 송부할 것.

 

본부 제출 의안

– 회원 교양에 관한 건

– 회관 건축에 관한 건

– 기관지 속간(續刊)에 관한 건

– 회기(會旗) 및 마크에 관한 건

– 행동 강령 제정에 관한 건

 

[행동 강령]

1. 여성에 대한 사회적ㆍ법률적인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다.

2. 일체의 봉건적인 인습과 미신을 타파한다.

3. 조혼을 폐지하고 결혼의 자유를 확립한다.

4. 인신매매 및 공창(公娼)을 폐지한다.

5.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한다.

6. 부인 노동의 임금차별을 철폐하고 산전 및 산후 임금을 지불하도록 한다.

7. 부인 및 소년공(少年工)의 위험 노동 및 야근을 폐지한다.

 

 

정칠성의 여성론

 

남복(男服)하고 말 달릴 때(1927년)69)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나는 여자 중에도 남달리 기구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올시다. 따라서 한 많고 눈물겨운 일도 남보다 많았고 또 그 반면에는 기쁘고 유쾌한 일도 많았습니다. 지금에 장황하게 여러 가지 말씀은 다 할 수 없겠습니다만은 나의 생활하던 중에 제일 상쾌하게 생각하는 일은 17세에 즉 이 몸이 아직까지 화류계에 젖어 있을 때에 말 타던 일이올시다.

그때에 말타기를 시작한 동기로 말씀하면 다른 동무들은 어찌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결코 오락적이나 호기심으로만 말타기를 배운 것이 아니올시다.

활동사진이나 소설 중에서 외국 여자들이 흔히 말을 타고 적지에 나아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남자 이상으로 활발하고 용감스럽게 싸워서 개선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는 거기에 느낀 바가 있어서 혼자 생각에 나도 어찌하면 그런 여자들과 같이 말도 잘 타고 싸움도 잘하야 한번 조선에 유명한 여장부가 될까 하고 먼저 말타기부터 배웠습니다.

원래에 잘 생각하였거나 못 생각하였거나 생각이 그러한 중에 말타기를 공부하야 불과 두어 달에 말도 비교적 곧잘 타게 되야 남복을 하고 성내 성외로 다니고 돌아다녔으니 그때에 마음이 어찌 상쾌치 않았겠습니까. 그와 같은 생각으로 말타기를 배웠으나 아직까지는 별로 소용이 없고 일이 바쁘면 정강말[정강이의 힘으로 걷는 말이라는 뜻으로, 아무것도 타지 않고 제 발로 걷는 것을 농으로 하는 말. 뚜벅이] 신세나 끼치지만은 이따금 옛일을 생각하면 마음까지는 퍽 상쾌합니다.

 

의식적 각성으로부터―무산 부인 생활에서(1929년)70)

지금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이다. 과거 여성 중심 시대 이후 수 세기를 통하여 무한의 설움으로만 내려온 우리 여성도 이제는 좋은 시대를 만나 자유평등을 부르짖으며 여성의 천국인 안방과 부엌으로부터 사람의 세상인 가두에로 나서 밥 짓고 옷 짓고 아이 기르는 천직 외의 온갖 학문을 다 배우게 되었으며 남자에 지지 않는 생활과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것뿐인가. 전에 볼 수 없는 온갖 향락의 기구며 시설은 여자뿐만이 아니지만 어떻든지 살기 좋게 된 세상이다.

이와 같이 살기 좋은 세상에 다 같은 여성으로서도 그 생활이 정반대로 되어 있으니 그 하나는 현대의 주인공인 유산계급의 처, 첩, 따님으로 타고난 팔자 좋은 운명의 소유자이며 또 하나는 모든 발달에 따라 더욱 비참한 운명에서 고력을 더욱 하게 되며 현대 문명의 하등 혜택을 입지 못한 무산계급의 여성이다. 보라 저 유산계급에 속한 아낙네의 생활이 어떠한가. 차라리 옛날 궁중 생활 이상으로 향락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그들 아낙네의 중요한 노력으로는 자기의 주인인 남편의 노리갯감에서 낙제되지 않으려고 미용법 웃음 연습이 그 제일이다. 사랑스러운 자녀는 일신의 안일을 위하여 무책임하게도 유모란 노예에게 맡기고 손가락 하나 꿈적거림에도 자유자재이다. 능라주단에 금의육식도 부족하여 인삼녹용에 갖은 복약으로 신체를 윤택케 한다. 그중에도 신교육을 좀 받은 아낙네는 더욱 행복스럽다. 집 안의 오락 장치는 물론이요 가끔 활동으로는 자동차 전차 인력거 기타로 교외 산보 친구 심방, 활동사진 구경, 음악회, 예배당, 사치품 사기 위한 출입으로 심심풀이를 하며 그 밖에 그들의 힘으로도 능히 할 수 있는 한에 일반 공공사업에는 말만 들어도 열 길 스무 길 뛰며 회피한다. 그중에도 혹 눈뜬 자가 있다면 백의 둘을 세기 어려운 현상이다.

또 구식 아낙네를 보면 남편과 자녀와 자기에게 손복이 돌아올까 두려워하며 죽어 극락세계를 가려고 무당 판수 사원 발원 등으로 그들의 종생(從生) 사업을 삼는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며 행복스러운 사람인가?

그러나 다 같은 세상에 같은 여자만으로도 그와 딴판의 생활을 하고 있는 무산 여성은 문명도 무엇도 아무 상관없이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이 한없는 천대와 빈곤에서 시달림을 당하고 있다. 한 몸으로 능히 감당하기 어려운 고력이 아니고는 하루의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가련한 운명이다. 보라! 농촌의 여성들을. 남들은 봄을 맞을 때 거룩한 차림으로 아버지는 아들, 어머니는 딸의 손목을 이끌고 공원으로 야외로 산보 구경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대신 길고 긴 봄여름 날 새벽부터 온종일 논과 밭 노동으로 그들의 몸은 피곤하며 그들의 형태는 흑인이 부럽지 않게 타고 익었다. 그것뿐이랴. 밤이면 좀 편안히 쉴 틈도 없이 시부모와 자녀와 남편의 시종 및 기타 가정 노동으로 닭이 울 때까지; 잠잘 수도 없으며 그중에도 남편의 주정과 우월감에 트집까지 받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며 기계 공업이 발달되었든 말든 태고의 수공업인 길쌈까지도 다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엄동설한 추운 시절에 의복과 덮을 것도 변변치 못한 그들은 그중에도 가장 서러운 것은 배고픈 것이다. 남들은 한가한 농촌 생활 하지만 그것은 향락자의 배 두드리는 소리요 참말 농촌 생활이 얼마나 참담한가는 그들 자신이 아니고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것이다.

그 밖에 도시의 각 공장 및 기타 각 방면에 산재한 무산 여성을 보라. 어린 자식의 배고파 우는 소리 어머니를 부르며 흙과 똥을 함부로 집어 먹음에도 돌볼 틈도 없이 하루에 열두 시간 내지 열 시간 노동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공장 부인이다. 게다가 공장의 해고란 선고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첨과 화장은 마침내 개성을 여지없이 유린을 당하고 현대 경제 조직의 표현인 생산 과다란 병은 그들로 하여금 때때로 거리에 방황하게 한다. 여기에서 요사이 세상의 자랑거리인 룸펜 프롤레타리아 대군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행에 빠진 여성이 어찌 농촌과 공장뿐이랴. 유곽 부잣집 하인 기타 각 방면에서도 많은 여성의 비참을 우리는 잘 알며 보지 않는가. 최근 수년 이래 우리 곳에도 삶에 눈뜨기 시작하자 표어로 농촌에로 공장께로 하고 부르짖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아직껏 우리 여성에게는 조그마한 진보도 볼 수 없으며 의연히 고력과 암흑과 빈곤에서 신음하고 있다.

아! 자매여 이와 같이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 비극을 어찌하여야만 할 것이며 누구의 죄인가? 형제여 우리는 어느 때까지 이 불행을 천명에만 맡기고 말 것인가.

구조선(救助船)이 오도록 시절만 바랄 때가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오직 하나인 단결과 각성이 우리의 무기이다!

나는 여기에서 끝으로 한마디하고 싶은 것은 일반 선각 여성들은 너무 개인의 향락만에 정신을 쓰지 말고 같은 운명에서 울고 있는 암매(暗昧)한 동렬(同列)을 위하여 분투와 책임을 가져야 될 줄 안다. 따라서 모든 운동에 있어서는 남녀 공동전선을 벌이면서 또는 여성 운동은 전체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떠들기만 하고 오히려 봉건적 낡은 도덕은 여성 자신에게만 맡겨 두고 무자비한 비판과 무책임하게 방관 조소만 하는 신구 남성의 철저한 각성과 노력도 잊어서는 아니 될 줄 안다.

 

연애의 고민상과 그 대책(1931년)71)

연애로 인한 고민상은 혹은 각 나라의 특수한 사정과 각 시대의 변천을 따라서 그 정도와 건수의 차이점은 있다 할망정 영원히 없지 못할 난제라고 나는 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남녀가 대등한 지위에서 그들이 자유로 결합할 수 있는 시대라 할지라도 원시난혼제를 실시하지 않는 한에는 이성과 이성이 접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따라서 연애의 고민은 의연히 있을 것이란 말이외다.

 

그러나 연애 고민을 대량 생산하여 인간에게 적지 않은 불행을 초래케 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 할 것이외다. 그렇다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으니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순결하고 진실하여야 할 애정 그것까지도 물질적 이해로 타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외다. 따라서 그런 연애는 불미한 결과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속담에 연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요마는 현대와 같은 계급 사회에 있어서는 연애에 있어서도 그것을 초월하게 되지 못합니다. 하기야 연애 자체의 원리 원칙으로만 하면 동일한 인간인 이상 누구나 연애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현대와 같은 과도기에 있어서는 피차간 진실한 연애는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남존여비의 봉건사상과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모든 권한이 있는 이상 연애에 있어서도 여자는 자연히 불평등한 지위에 서게 됩니다. 우선 정조관부터 남자가 다르게 되어서 남자는 제 맘대로 성적 방종을 하면서도 여자에게는 한쪽에게만 의무를 강요하는 정조를 강제하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혹은 남녀는 원래 생리적으로 다른 까닭에 모성을 가진 여자 편은 그 여자의 혈통을 밝힐 필요상 정조를 지켜야 하겠다 하지만은 그것은 전혀 남성의 성적 방종을 옹호하려는 한갓 구실에 불과한 줄 압니다. 만일 그들의 연애가 진실하다 할 것 같으면 결코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성의 관계란 복잡하니만큼 남녀가 절대 평등한 지위에 서 있다 할지라도 연애의 고민은 언제나 다소간 있을 줄 압니다. 예를 들면 삼각관계라든지 경제적 관계라든지 사상적으로나 감정적인 허다한 원인에서 ― 그러나 그중 큰 원인은 사회 제도에 있다고 볼 것이니 연애의 고민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남녀 간 사회적 지위가 균등되고 또한 전 인류가 보다 행복한 지상낙원 시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 진화의 구원한 장래에서나 바랄 것인즉 현재의 정세 밑에서는 동지 연애로서나 만족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연애를 위한다는 것보다도 어떤 사업을 위한 결합으로서나 ― 다시 말하면 장래 인류 사회에서의 완전한 연애를 이룰 터전을 닦기 위해서 현재의 불합리한 환경과 투쟁하는 결합으로서나… 황망 중 좀 더 구체적으로 쓰지 못하고 이만 그치겠습니다.

 

[신여성의 신년 신신호(新年 新信號)] 앞날을 바라보는 부인 노동자(1932년)72)

신년(新年)에 신여성(新女性)의 신신호(新信號)요, 참 어떻든 신여성이란 이름이 퍽 높이 알려진 모양인가 봐요. 왜 신남성은 없고 하필 신여성인가요. 좌우간 고맙습니다. 훌륭한 신(新) 자를 여성에게만 붙여 주니까요.

그런데 내가 보는 신여성이나 신신호는 당신들(신여성, 신여성 하는 분들)이 보는 신여성과 좀 다릅니다. 요사이 종로네거리에서 보면 유행 화장 유행 의복을 다투어 경쟁하는 신여성분들. 이 중에는 예수님 덕분으로 멀리 미국 유학한 분도 훌륭한 학교를 마치고 부자이면 첩도 좋다는 분도 있으며 자본주의 말기의 대표적 표현인 카페와 여러 신여성들 이들 신여성의 신년의 신신호는 거울을 대하여 정자옥(丁字屋. [충무로에 있는 미도파 백화점의 전신]), 삼월(三越)을 연상하여 가면서 연구 중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는바 신년에 신호를 울리며 앞날의 거룩한 신생활의 힘찬 신호를 울릴 진짜 신여성은 오직 연초, 제사, 방직 공장 등 흑탄연돌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재촉하는 새벽 다섯 시 고동 소리와 함께 피곤한 다리를 옮겨 놓는 그들! 여기에 그들의 걸음이야말로 이 앞날 신생을 개척할 행군의 조련이며 그들의 눈물과 고역의 피와 땀은 앞날 약속을 신호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클라라 쩨트킨, 사로지니 나이두 등 여러 훌륭한 혁명 부인들이 걷는 걸음을 따라 걷지 않으면 아니 될 우리 조선 부인들, 한 발 자칫하면 멸망이 올 것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신호를 올려야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됐나, 나는 왜 도로 장발을 했나(1932년)73)

내가 머리를 깎은 것도 아무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이요 또한 깎았던 머리를 다시 기르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외다. 그리 말하면 혹은 말하되 아무 까닭 없이 여자가 머리를 깎고 또 이미 깎은 것을 기른다는 것은 그가 무슨 어리석은 것이냐고 말할 리가 있을 것이나 머리를 깎고 기른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님으로 거기에 무슨 약속이나 있고 결심이나 있는 듯이 해석하는 것이 도리어 우스울 뿐입니다. 머리 깎은 것이 경편(輕便)한 점이 많습니다. 머리를 빗기에 시간이나 노력이 덜 늘고 늘 청결하여 위생에도 좋으려니와 마음이 상쾌하고…

그런데 머리를 왜 길렀느냐 그것은 머리를 깎고 보니까 일반의 가정부인하고 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무리 그들하고 가까이 하려 하나 그들은 딴 세상의 사람으로 취급해 줍니다. 또 한 가지의 이유는 무슨 일이 생기는 때에 임시변통의 길이 없습니다. 단발한 여자가 많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나 지금은 그 수효가 적으니까 곧 발견되고 맙니다. 이에서 일에 지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길렀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았다고 하여 무슨 위법의 짓이나 한 듯이 야단할 것도 아니요 또한 깎았던 머리를 길렀다 하여 거기에 무슨 이유를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여성으로서 본 세계관(1932년)74)

필자의 우견(愚見)으로는 처음 실은 제목이 그 내용에 있어 제목으로서의 문제성이 희박한 감이 없지 못하야 좁은 생각이나마 붓을 잡기에 자못 주저스러웠으나 ≪비판(批判)≫ 편집자의 모처럼 부탁을 저버리기 두려워서 두어 자 적는 바이다.

 

세계관이란 말을 정의하자면 우리 인류가 기거하는 자연 내지 사회의 생성 운동 발전을 수반하여 일어나는 동적 내지 정적 제 현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그 시각으로 규정하는 기준율이 될 통일된 철학적 범주일까 한다. 그러나 각인각자의 주관과 객관체에 대한 인식 착오는 인류로 하여금 공통된 세계관을 갖지 못하게 하고 각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 문화 정도의 차이에 따라 각 종족의 특수한 환경에 따라서 각 종파의 종진(宗眞)에 따라 각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에 속한 각 사회군은 각종 수이(殊異)한 세계관을 소유하게 되였다.

상고 시대에 있어 미개한 우리 조상들이 자연의 위력에 대한 극단의 공포로 일체 자연 현상을 신의 소위로 관념하고 자연의 생활 행동 그것까지도 신의 섭리로 알게 된 신비적 세계관으로부터 시작하여 중고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배태된 유일신의 절대 권력을 이념으로 삼아 절대적 지배 관계로서 길러온 중세 세계관과 갈릴레오가 지동설로써 지구로부터 우주의 중심권을 박탈하여 지구로 하여금 대우주의 일속성으로 변하게 함에 따라 땅 위에 열쇠―권력―를 가진 교황의 보좌를 흔들기 전 세계관과 그 후의 세계관과 컬럼버스의 대륙 발견으로써 인류의 지역 관념에 일대이상을 가져오기 전과 그 후 다윈의 진화론 창도(唱導)로써 인류의 선민적 권위를 유린시키기 전과 그 후 와트의 증기 동력 발명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키기 전과 그 후 등등… 인류 문화 변천은 그 시대 시대에 처한 인류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관을 발견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의 선민족 우월성은 그들이 가진 시오니즘을 통하여 그들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게 하고 남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흑인은 그들이 유일신인 이겅이란 군신을 통하여 그들 특이한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 밖에 각 종족의 특이한 세계관을 일일이 어찌 다 말하랴.

그러나 상술한 잡다의 사회군이 각자 특이한 조건 아래 소유하게 된 관념적 미망을 벗어나지 못한 봉건적 세계관을 근세 부르주아지의 발흥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과 함께 진보된 과학의 투광(投光) 아래 세계관의 일면인 자연관만은 그 신비의 면사(面紗)를 용서 없이 벗겨 버리고 순전한 계급적 시각에서 규정된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대립되었으니 전(前) 시대에 있어서 잡다한 봉건적 세계관은 여기서 새로이 생긴 부르주아지의 세계관 속으로 혹은 합류되고 혹은 극복되어 대부분 녹아 버리고 만다.

그러나 모처럼 대립된 저들 부르주아지의 세계관이 그 자연관에 있어서는 경험과 실천을 근거로 한 과학적 세계관을 파악하였으나 중요한 사회관에 있어서는 그들의 소위 순수이성―순수이념―을 거부하지 못하는 동시에 유물적 변증법을 발견치 못하고 의연(依然)히 그 일면을 관념의 후광에 도망시켜 모순과 오류된 세계관을 이룬 동시 그들 세계관의 최후의 대변자인 칸트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용사들은 그들이 파지한 순수이성과 함께 정사(情死)하고 만다.

최후로 이 모든 신비적 내지 준신비적 세계관을 분쇄하고 참으로 과학적 근거와 경험과 실천을 기조로 한 세계관을 파악한 계급이 있으니 이는 전(前) 시대의 모든 편견과 미망을 일소하고 일체 신비주의와 순수이성의 철비(鐵扉)를 개방하여 세계의 참된 얼굴을 나타나게 한 프롤레타리아 세계관이 그것이다. 이는 묻지 않아도 우리의 유일한 철학이요, 우리의 유일한 세계관인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일 줄 안다.

세계란 자체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객관적 존재이라고 할진대 객관적 존재를 정당히 인식한 세계관 그것도 객관적으로 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인식 내용에 있어서 남녀의 성별에 따라 변호와 차이가 없을 것은 분명한 이론일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성별로 말미암은 인식 내용의 변화가 있다면 그 어느 한편이라도 편견과 오류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자체가 객관75)적 존재인 이상 이것을 인식한 정확한 세계관을 발견하고 파악할 뿐이요, 증명하고 창조할 권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속 성인 여성으로서의 세계관은 당연히 전술한 프롤레타리아 세계관과 합류되고 일치될 것이다. 만약 여기서 여성 독자의 특이한 세계관이 있다고 하면 세계 자체가 인류의 이성과 절대 독립한 객관적 존재인 이상 그는 이단적 편견과 선을 그을 뿐이요, 전에 열거한 시대별 종족별 종교별 세계관 부르주아지의 이행적 세계관과 아울러 주관의 함정에 전락된 세계관이 되고 말 것이다.

 

정칠성 씨에게서 내가 본 남성의 불만을 듣는다(1935년)76)

장소: 낙원동 정칠성 씨 하숙

시일: 초동 어느 날 오전 10시

인물: 정칠성 씨와 기자

 

기자: 서울 오신 지가 여러 날 되십니까?

정: 한 2주일가량 됩니다.

기자: 그간 어듸 계셨습니까?

정: 원산 있었습니다. 원산서 강습소를 경영하려고 그동안 꽤 애를 썼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를 않더군요.

기자: 그러시면 서울서 바로 원산으로 가셨나요.

정: 아-니요. 작년 겨울에는 평양 대구 등지에도 가 있었습니다.

기자: 서울에서 여성 운동 단체를 조직하시고 다시 활약해 보고 싶으시지 않으십니까?

정: 글쎄요. 아직은 공상이겠으니까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자: 선생이 생각하시는 남성의 불만을 말씀해 주신다면 퍽 긴하겠는데요?

정: 글쎄요. 내 자신으로 보는 바에 의하면 남성에 대하야 밉다니 좋다니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생활을 영위해 가는 데에는 남녀가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니까 특별히 남자라고 해서 그에게 불만한 점을 가져 본 일은 없습니다. 사상적으로 볼 때 남자가 여성보다 더 유동적이요 변동하는 것이 어떻게 말하면 불만이라 하겠으나 그것은 불만보다도 결점이겠지요. 오히려 어떠한 사업을 하는 때는 남자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이 더 든든하고 보람이 있는 생각이 나더군요.

기자: 남성의 고집이라거나 소유욕 같은 그 성질에 대해서 숨김없이 말씀하신다면은 어떠하십니까?

정: 글쎄요. 조선의 남성을 일반적으로 본다면 거기 어떠한 불만이라든가 그 횡폭에 대하야 말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까지 남성을 내 손에 놀게는 하였으나 남성의 지배 밑에 속박을 받아 보지도 못했고 그 앞에 머리를 숙여 보지를 않고 하야 남성의 횡폭에 대하야 나만이 가진 무슨 할 말은 없습니다.

기자: 선생은 현재 선생의 생활에 권태를 갖고 계십니까?

정: 그런 말은 물어서 무엇하시오. 권태라기보다 부족을 느끼지 않을 이유가 어데 있단 말이요.

기자: 이번 동아의 편물 강습회는 성적이 좋습니까?

정: 김장 때가 되어서 효과가 아주 적습니다. 될 수 있으면 김장이 끝난 때 따로 다시 주최하였으면 합니다만은 적당한 장소가 없습니다.

기자: 이즘 서울에는 여성의 교양 단체가 여럿 있는데 그중에 들어가시어 활동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정: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되풀이하고는 싶지 않습니다.

 

*          *          *

 

정칠성은 본래 기생 출신이었다. 기생은 사회구조적으로는 남성 중심주의의 희생물이지만, 가정이라는 보호막이자 감옥을 모르기에 남성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이탈자가 나올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 황진이가 그러했고, 근대 초기 대중문화의 푸른 꽃인 배우와 가수로 등장한 기생들도 그러했다.

정칠성은 일찍부터 남녀평등 실현을 꿈꿨다. 17세 때 우리나라의 유명한 여장부가 되고자 승마를 배운 여성이다. 3ㆍ1 운동 뒤 홀연히 화류계를 떠나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였고, 여성 동우회 발기에 참여하였다. 그 후 일본 동경기예학교에서 유학하면서 여성 사회주의자가 모인 독서 모임인 삼월회를 조직하여 활약했다. 여기서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적 기반을 쌓고 1926년 봄에 귀국하여 근우회의 기관지인 ≪근우≫의 편집인으로 활동했었다.

활동적이고 독립적인 성격 탓인지 정칠성은 근우회 해소 이후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작은 활동들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다시 조직적인 단체 활동은 꺼리는 듯하다. 본래 남성과 무관하게 자기 나름대로 살아온 그녀라 특별히 남성에게 불만을 갖고 있지는 않다. 사상적으로 남성이 유동적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여성이 더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통이 큰 그녀는 앞서 유영준이나 우봉운보다는 남자에 대해 너그럽다(?). 함께 일할 때 든든하다는 것이다. 남성을 손아귀에 놀게 하기는 하지만 남성 지배를 받아 보지 않은 그녀이다. 지식인류의 소심함과 거리가 먼 그녀는 남성과 대등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 여성 일반이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남성의 횡포나 사회적인 억압에 대해 할 말이 정말 없을까? 기자의 질문 자체가 그녀와 연인 관계에 있던 남성들을 향해 던졌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칠성 역시 작은 기술 강습회 정도만 하고 있을 뿐, 여성 단체 활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근우회와 같은 실패를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녀들을 환멸에 젖게 한 걸까?

 

생활문화를 말하는 좌담회에서의 정칠성의 주장(1945년)77)

1945년 12월 열린 생활문화 개선을 위한 여성 좌담회는 해방 공간 지식층 여성들이 새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꿈꾸었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이 좌담에서 여성 활동복으로 양복이 제안되는가 하면 김장, 고추장 같은 연중 먹는 음식을 공장에서 제조해서 각 가정에 배급하자(김영택 여자의전 소아과장)는 주장도 잇따랐다. … 정칠성의 생활 개선 방책은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이 새로이 발흥하던 1980년대에도 여성 운동권에서 제기됐던 담론일 뿐 아니라 지금을 사는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절박한 이슈라는 점에서 역사의 더딘 걸음을 절감하게 한다.

(허미경, “해방공간 달구었던 여성들의 당당한 목소리”, ≪한겨레≫, 2015. 11. 6.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16208.html#csidx2336e784acbfda694d9e1ffdad3446d>)

 

 

우리의 당면한 일은 여성 해방입니다. 여성이 직장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부엌도 누구든지 쓸 수 있도록 개조하고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먼저 집에 돌아온 사람이 밥을 짓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선 만들고자 하는 것은 직장으로 가는 부인을 위한 탁아소입니다. 유산 부인은 문제 아니지만 직장에 나가는 부인이나 농촌 부인은 탁아소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조선 부인이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또 한 가지는 빨래입니다. 공동 세탁소에서 빨아 입을 수 있는 옷감을 선택해야 합니다.

노사과연

 

 


 

1) 식민지 여성 운동사 연구로는, 이임하, ≪조선의 페미니스트―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 철수와영희, 2019; 이윤희, ≪민족주의와 여성운동≫, 신서원, 1995. / 1920년대 좌, 우에 걸친 여성 운동 전반에 대해서는, 오숙희, ≪한국 여성운동에 관한 연구: 1920년대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1987. / 사회주의 운동을 중점으로 본 연구는, 박혜란, ≪1920年代 社會主義女性運動의 組織과 活動≫, 이화여대 사학과 석사 논문, 1993; 조경미, ≪1920年代 女性團體運動에 關한 硏究; 社會主義 女性團體를 中心으로≫, 숙명여대 사학과 석사 논문, 1990. / 근우회를 중점에 두고 쓴 논문들로는, 김정연, ≪「槿友會」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논문, 1996; 관원백합, ≪1920年代의 女性運動과 槿友會≫,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2003; 최은오, ≪일본강점기 근우회의 결성과 활동≫,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논문, 2013. / 당시의 좌파 내부 사상 투쟁 중심으로 보려면, 장인모, ≪근우회를 통해 본 일제시기 사회주의 여성의 여성운동론≫,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2007. / 정칠성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근우회의 해산이,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분열 때문이었다는 그간의 통념을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연구로는, 장원아, “근우회와 조선여성해방통일전선”, ≪역사문제연구≫ 제42권, 연사문제연구소, 2019.

 

2) 정호영, “해제: 2. 사이보그가 될 것인가. 피해자가 될 것인가?”,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알렉싼드라 꼴론따이의 “공산주의와 가족””, 정호영 해제ㆍ서의윤 역, ≪정세와 노동≫ 제157호(2019년 12월), pp. 148-166.

 

3) 여성을 Women이 아닌 womyn으로 쓰는 이유는 women에는 기준이 되는 단어인 men이 들어가 있기에 대체 단어로 제안된 것이다.

 

4) 당시 논쟁에 대해서는, Emi Koyama, “Whose Feminism Is It Anyway? The Unspoken Racism of the Trans Inclusion Debate”, Susan StrykerㆍStephen Whittle(eds.), The Transgender Studies Reader, Routledge, 2006, pp. 699, 702-703.

 

5) 앨리스 에콜스, ≪나쁜 여자 전성시대≫, 유강은 역, 이매진, 2017, p. 240.

 

6) 같은 책, p. 241.

 

7) 슐로모 산드, ≪유대인, 불쾌한 진실≫, 알이따르 역, 훗, 2017. 슐로모 산드는 에릭 홉스봄의 역사방법론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이데올로기적 자원화하여 대내외적으로 피해자를 명분으로 권력을 구성해 가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8)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알렉싼드라 꼴론따이의 “공산주의와 가족””, 정호영 해제ㆍ서의윤 역, ≪정세와 노동≫ 제157호(2019년 12월), pp. 151-166.

 

9) [인용자 주] 카를 마르크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김현 역, 책세상, 2015; 훗 출판사, “백남기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 살해된 요르단 언론인 나헤드 하타르 선생의 유족들은 요르단 정부의 사과를 요구한다”, ≪정세와 노동≫ 제127호(2016년 10월).

 

10) 슬라보이 지제크, “[세계의 창] 영국 총선, 노동당은 왜 졌는가”, ≪한겨레≫, 2019. 12. 22.

 

11) 권김현영 편,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p. 52.

[권김현영의 주] 린 시걸. (조디 래피얼, ≪강간은 강간이다≫, 최다인 역, 글항아리, 2016, p. 38에서 재인용.)

 

12) 권김현영,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허핑턴포스트≫, 2018. 3. 15. <https://www.huffingtonpost.kr/hyunyoung-kwonkim/story_b_15352452.html>

 

13) 같은 글.

 

14) 2007년 경희대 총여학생회 성명서.

 

15) 권김현영, “[세상읽기] 무지의 공포”, ≪한겨레≫, 2020. 2. 12.

 

16) 마르트 룰만, ≪여성 철학자―아무도 말하지 않은 철학의 역사≫, 이한우 역, 푸른숲, 2005, p. 598.

 

17)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역, 책세상, pp. 299-300. 미국 학계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금기이다. 미국 학계에서 맑스주의를 하려면 지식 상품 시장 진입은 포기해야 한다. 학자로서 지식 상품 시장에서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방어막을 쓰지 않고 자본주의를 언급하는 건 자살 행위이다.

 

18) 서의윤, “옮긴이 해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ㆍ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콜론타이의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ㆍ세계 여성의 날≫, 서의윤 역, 좁쌀한알, 2018, pp. 126-142.

 

19) 서의윤, “연표”, 같은 책, pp. 140-142.

 

20) 같은 책, pp. 38-39.

 

21)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김명남 역, 창비, 2016, p. 52.

 

22) 벨 훅스, “5장 남자-투쟁을 함께 하는 전우”,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 윤은진 역, 모티브북, 2010.

 

23)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경아 역, 문학동네, 2017, pp. 260-261.

 

24) 벨 훅스,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이경아 역, 모티브북, 2008, pp. 18-19.

 

25) 이에 대해서 우리는 벨 훅스가 이룬 성취를 논하면서 맑스주의와 같이 갈 수 있는 페미니즘이라고 이미 말한 바 있다. 정호영, “해제: 5. 남자, 일상의 고역을 나누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 앞의 책, pp. 176-184.

 

26) 위키 백과 검색(검색어: 정칠성, 검색일: 2020년 3월 5일).

 

27) 박순섭, “[독립운동가열전] 정칠성―여성노동자를 대변한 근우회의 리더”, ≪내일을 여는 역사≫ 제76호(2019년 가을), p. 137.

 

28) 정칠성, “의식적 각성으로부터―무산 부인 생활에서”, ≪근우≫ 제1권 제1호(1929년 5월).

 

29) 정칠성, “[신여성의 신년 신신호(新年 新信號)] 앞날을 바라보는 부인 노동자”, ≪동광≫ 제29호(1932년 1월).

 

30) 정칠성, “의식적 각성으로부터―무산 부인 생활에서”.

 

31) 로자 룩셈부르크, “로자 룩셈부르크 여성론”, 정호영 해제ㆍ서의윤 역, ≪정세와 노동≫ 제152호(2019년 6월), p. 101.

 

32) 정칠성, “의식적 각성으로부터―무산 부인 생활에서”.

 

33) 케빈 패스모어, ≪파시즘≫, 이지원 역, 교유서가, 2016, p. 237.

 

34) 로제마리 나베-헤르츠, “2. 1894년에서 1933년까지의 여성운동”, ≪독일 여성운동사≫, 이광숙 역, 지혜로, 2006, p. 66.

 

35) 케빈 패스모어, 앞의 책, p. 238.

 

36) 밸러리 솔래너스, “남성거세 결사단 선언문”, ≪페미니즘 선언≫, 한우리 기획ㆍ번역, 현실문화, 2016, pp. 223, 230.

 

37) 이효상, “봉제 노동자 이숙희ㆍ강명자씨가 본 ‘전태일 열사 50주기’―“‘학출’ 언니가 준 금서 한 권”…어린 시다의 삶을 바꿨다”, ≪경향신문≫, 2020. 1. 2.

 

38) 앨리슨 재거ㆍ폴라 로덴버그 스트럴, ≪여성해방의 이론체계≫, 신인령 역, 풀빛, 1983. 이 책은, Alison JaggarㆍPaula Rothenberg, Feminist Frameworks: Alternative Theoretical Accounts of the Relations Between Women and Men, McGraw-Hill, 1978을 번역한 것이다. 93년에는 3판이 나왔다. ≪여성해방의 이론체계≫의 목차를 한번이라도 훑어보면 60년대 말-70년대 미국에서 나온 이론들이 현재 한국에서의 주류 페미니즘 논의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정보는, 노동자의 책(http://www.laborsbook.org)에서 검색하면 나온다. 노동자의 책에 가입하면 한국에서 나온 거의 모든 맑스주의 여성론 관련 고전과 중요 연구 성과들을 볼 수 있다.

 

39) 조지 틸만 주니어 감독, ≪노토리어스≫, 2009. 이 장면의 배경은 미국의 80년대 중후반이다.

 

40) 관련해서 인도 종교를 분석한 사례를 더 보고 싶으면, 정호영, “종교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 2―이중고를 겪는 무슬림 달리트들”, ≪친디아 저널≫ Vol. 65(2012년 1월), 포스코경영연구소; 정호영, “종교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 3―불가촉천민 비중 가장 많은 인도 기독교”, ≪친디아 저널≫ Vol. 66(2012년 2월); 정호영, “종교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 4―달리트 시크, 그들만의 종교 꿈꾸다”, ≪친디아 저널≫ Vol. 67(2012년 3월).

 

41) 데이비드 그레이버,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 정호영 역, 이책, 2015, p. 52.

 

42) Karl MarxㆍJules Guesde, “The Programme of the Parti Ouvrier”, 1880.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0/05/parti-ouvrier.htm>

 

43) 정칠성, “[신여성의 신년 신신호(新年 新信號)] 앞날을 바라보는 부인 노동자”.

 

44) 정칠성에 관해 짧게 전기 형식으로 쓴 글들은 연도가 제각각이다. 그래서 이 연보는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서인, 이임하, “정칠성의 발자취와 글”, ≪조선의 페미니스트≫, 철수와 영희, 2019, pp. 164-165의 연표를 기준으로 하여 다른 글들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지금까지 나온 정칠성에 대해서 전기 형식으로 쓴 글 중에는 이 책에 수록된 “사람이 있고 운동이 있다. 정칠성”이 가장 입체적으로 정칠성의 삶이 들어오게 쓰였다.

 

45) 한국컨텐츠 진흥원, “구한말 기생이야기―권번은..”.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428&index_id=cp04280004&content_id=cp042800040001&search_left_menu=1>

 

46) 박정애, “3ㆍ1 독립운동 뛰어든 ‘사상기생’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 ≪한겨레≫, 2002. 4. 15. <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2/04/005000000200204151900118.html>

 

47) 박순섭, “[독립운동가열전] 정칠성―여성노동자를 대변한 근우회의 리더”, 앞의 책, p. 135.

 

48) 박순섭, “1920-30년대 정칠성의 사회주의운동과 여성해방론”, ≪여성과 역사≫ 제26집(2017년 6월), 한국여성사학회, p. 261.; 진선영, “기름에 젖은 머리를 턱 비어 던지고―사회주의, 여성주의, 지역주의, 혁명가 정칠성의 겹서사 연구”, ≪한국문화연구≫ 제37집(2019년 12월),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p. 271.

 

49) 박순섭, “[독립운동가열전] 정칠성―여성노동자를 대변한 근우회의 리더”, 앞의 책, p. 136.

 

50) 야마카와 키쿠에에 대해서 참조할 수 있는 연구서는, 우에노 지즈코, “7. 여성 사회주의자인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자인가-야마카와 키쿠에의 경우”,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다시 쓰는 내셔널리즘과 젠더≫, 이선이 역, 현실문화, 2014. / 근우회 행동 강령에 야마카와가 작성한 일본노동조합평의회의 ‘부인부 테제’의 영향이 있음을 주장하는 연구가 있다. 송연옥, “야마카와 기쿠에와 황신덕”, ≪여성과 역사≫ 제15집, 2011, pp. 159-178.

 

51) 정칠성, “신여성이란 무엇”, ≪조선일보≫, 1926. 1. 4.

 

52) 박순섭, “1920-30년대 정칠성의 사회주의운동과 여성해방론”, 앞의 책, p. 261.; 진선영, “기름에 젖은 머리를 턱 비어 던지고―사회주의, 여성주의, 지역주의, 혁명가 정칠성의 겹서사 연구”, 앞의 책, p. 271.

 

53) 박순섭, “1920-30년대 정칠성의 사회주의운동과 여성해방론”, 앞의 책, p. 261.

 

54) 김중순, “근대화의 담지자(擔持者) 기생(妓生) I―대구 지역 문화 콘텐츠로서의 가능성”, ≪한국학논집≫ 제43집, 2011, p.184.

 

55) 국사편찬위원회, “근우회의 해소”, ≪신편 한국사≫.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9_0040_0030_0050_0040>

 

56) 정칠성, “계몽 운동에 주력―해소론은 시기상조다”, ≪조선일보≫, 1931. 1. 1.

 

57) 김성동, “7. 고통받는 여성들 말을 알아듣는 꽃 정칠성”,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박종철출판사, 2014. 김성동의 정칠성에 대한 글 제목은 너무나 적절하다. 정칠성이 예전에 해어화 생활을 하다가 사회주의 운동가로 바뀐 것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낼 수 없다. 해어화(解語花)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의미로 기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58) 국사편찬위원회, “단발과 구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대적 스타일”, ≪한국문화사≫.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35_0090_0020_0020>; 이병학, “[ESC] ‘단발은 좃슴니다’…돌고돌아 다시 ‘찰랑찰랑’”, ≪한겨레≫, 2018. 3. 1.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35_0090_0020_0020>

 

59) 윤태옥 “현대중국의 始原-옌안대장정의 길(마지막 회)―대반전, 그리고 영속된 권력―군사력 열세를 조직ㆍ기율ㆍ도덕성으로 극복”, ≪월간중앙≫, 2014. 10. 17.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3685>

 

60) 정칠성, “동지 생각”, ≪삼천리≫ 제7권 제3호(1935년 3월).

 

61) ≪독립신보≫, 1946. 11. 14. (김중순, “근대화의 담지자(擔持者) 기생(妓生) I―대구 지역 문화 콘텐츠로서의 가능성”, ≪한국학논집≫ 제43집, 2011, p.186에서 재인용.)

 

62) ≪부인≫ 제2권 제2호, 1947. (이임하, 앞의 책에 수록되어 있음.)

 

63) 김희정, “[대구ㆍ경북 근ㆍ현대인물사. 38] 정칠성”, ≪영남일보≫, 1997. 12. 23.

 

64) 이윤희, 앞의 책, p. 174. 이 책의 “5장 1920년대 항일여성운동 3. 사회주의 여성단체의 대두”를 보면 좌파 여성 단체들을 설립한 인력들과 배경이 나온다.

 

65) 조선여성동우회의 설립 이후 전국 각지에서 사회주의 여성 단체가 생겨났고, 김제여우회도 그중 하나이다. 1924년 10월 7일의 김제여우회 창립총회 기록을 보면, 임시의장 김순봉의 사회로 총회가 진행되었다. (≪동아일보≫, 같은 날 기사, 오숙희, 앞의 책, pp. 166-167에서 재인용.)

 

66) 이윤희, 앞의 책, p. 184.

 

67) ≪근우≫ 제1권 제1호(1929년 5월).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49_0040_0030_0050_0020_0020&whereStr=>

 

68) ≪동아일보≫, 1929. 7. 25.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20107&tabId=01&levelId=hm_124_0080>

 

69) ≪별건곤≫ 제8호(1927년 8월). “의분공분심담구상 통쾌(義憤公憤心膽俱爽 痛快)!! 가장 통쾌(痛快)하엿든 일” 중 수록.

 

70) ≪근우≫ 제1권 제1호(1929년 5월).

 

71) ≪조선지광≫ 1931년 1월호. (김성동, 앞의 책, pp. 253-255에서 재인용.)

 

72) ≪동광≫ 제29호(1932년 1월), pp. 70-75.

 

73) ≪별건곤≫ 제47호(1932년 1월), p. 21.

 

74) ≪비판(批判)≫ 창간호(1931년 5월), pp. 89-91.

 

75) 원문은 容觀인데 객관(客觀)의 오기로 보인다.

 

76) “그 뒤에 이야기하는 “제여성(諸女性)의 이동좌담회(移動座談會)” 제2회장 정철성”, ≪중앙≫(1935년 1월).

 

77) ≪생활문화≫ 제1권 제2호, 1946. 1945년 12월 12일 생활문화사가 주최한 좌담회에서 정칠성이 주장한 것이다. 생활문화사가 주최한 좌담회는 박경호(음악가), 임학수(시인), 배상명(상명고등여학교 교장), 김호식(숙명여전 교장), 김영택(여자의전 소아과장), 정칠성(조선부녀총동맹), 생활문화사 측 장운표, 박용덕, 곽종원 등이 참석했다. (이임하, 앞의 책, p. 162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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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 정칠성(丁七星,1897~1958)
    직업 기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정칠성은 대구에서 출생 7세에 한남권번(한강 이남에서 올라 온 기생들의 조합 및 교육단체)에 들어가 기생수업을 받고 어려서부터 당시 기생을 뜻하는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로 생활합니다.

    11세에 3.1독립운동을 참여하고 1922년 15세에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영어강습소에서 수학합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11살, 15살이 어리지만 그 당시는 여자 나이로는 결혼을 하고 빠르면 출산을 할 나이로 지금으로 치면 20대의 나이입니다.

    15세의 나이로 발표한 ‘연애의 고민상과 그 대책’이란 기사(1931년 1월 조선지광)가 있는데 나이는 어리지만 그녀의 사상수준을 짐작할 수 있고 현재를 사는 우리와도 같이 고민해 볼 내용이기에 옮겨 봅니다.

    “연애로 인한 고민상은 혹은 각 나라의 특수한 사정과 각 시대의 변천을 따라서 그 정도와 건수의 차이점은 있다 할망정 영원히 없지 못할 난제라고 나는 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남녀가 대등한 지위에서 그들이 자유로 결합할 수 있는 시대라 할지라도 원시 난혼제를 실시하지 않는 한에는 이성과 이성이 접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따라서 연애의 고민은 의연히 있을 것이란 말이외다.
    그러나 연애고민을 대량생산하여 인간에게 적지 않은 불행을 초래케 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사회라 할 것이외다.
    그렇다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으니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순결하고 진실하여야 할 애정 그것까지도 물질적 이해로 타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외다.
    따라서 그런 연애는 불미한 결과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속
    담에 연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요마는 현대와 같은 계급사회에 있어서는 연애에 있어서도 그것을 초월하게 되지 못합니다.
    하기야 연애 자체의 원리원칙으로만 하면 동일한 인간인 이상 누구나 연애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현대와 여(如)한 과도기에 있어서는 피차간 진실한 연애는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남존여비의 봉건사상과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모든 권한이 있는 이상 연애에 있어서도 여자는 자연히 불평등한 지위에 서게 됩니다.
    위선 정조관 부터 남자가 다르게 되어서 남자는 제 맘대로 성적 방종을 하면서도 여자에게는 편무적으로 정조를 강제하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혹은 남녀는 원래 생리적으로 다른 까닭에 모성을 가진 여자 편은 그 여자의 혈통을 밝힐 필요상 정조를 지켜야 하겠다 하지마는 그것은 전혀 남성의 성적 방종을 옹호하려는 한갓 구실에 불과한 줄 압니다.
    만일 그들의 연애가 진실하다 할 것 같으면 결코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성의 관계란 복잡하니만큼 남녀가 절대 평등한 지위에 서 있다 할지라도 연애의 고민은 언제나 다소간 있을 줄 압니다. 예를 들면 삼각관계라든지 경제적 관계라든지 사상적으로나 감정적인 허다한 원인에서 – 그러나 그중 큰 원인은 사회제도에 있다고 볼 것이니 연애의 고민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남녀 간 사회적 지위가 균등 되고 또한 전 인류가 보다 행복한 지상낙원 시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 진화의 구원한 장래에서나 바랄 것인즉 현하 정세 밑에서는 동지연애로서나 만족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연애를 위한다는 것보다도 어떤 사업을 위한 결합으로서나- 다시 말하면 장래 인류 사회에서의 완전한 연애를 이룰 터전을 닦기 위해서 현재의 불합리한 환경과 투쟁하는 결합으로서나… 황망 중 좀 더 구체적으로 쓰지 못하고 이만 그치겠습니다.“

    1923년 귀국해 대구에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고, 10월 대구여자청년회를 조직해 불모지인 대구에서 여성운동을 대표하며 활동합니다.

    1924년 17세로 조선여자동우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에 선입되고, 1925년 다시 동경으로 유학 동경여자기예학교를 수료하는데 그의 나이가 17살입니다.

    삼월회란 사상당체에 활동하며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합니다.
    1928년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해방강연을 하다 수차례 투옥됩니다.

    1931년 신간회 해산 후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경성 낙원동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다 1945년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부녀부장, 조선부녀총동맹의 중앙위원으로 대구지역에서 활동합니다.

    1948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참가 후 북에 남아 남조선을 대표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같은 해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 1955년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후보, 1957년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평북 대의원을 지냅니다.

    이동수(李東樹)라는 아들이 알려지는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이 박헌영을 체포하려 하자 1946년 9월~10월 사이 박헌영이 서울을 탈출해 평양으로 올라가는데 그를 호위한 경호원으로 나옵니다.

    #정칠성 #기생 #해어화 #연애의고민상과그대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고인민회의대의원 #이동수(李東樹) #근현대불교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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