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이 달의 역사] 세계 혁명 운동의 지도자들이여! 모두 모쓰끄바로!―공산주의 인터내셔날(코민테른) 창립되다

 

오해영 | 회원

 

 

 

3월 4일은 이른바 제3 인터내셔날,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코민테른)의 창립일이다. 1919년의 일이고 1943년에 해체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다. 창립 후 24년 동안 세계 현대사의 가장 역동적인 한 시기에 세계 혁명 운동을 지휘했고 그 유산이 오늘날까지 직ㆍ간접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코민테른 해체를 둘러싼 이견과 쟁점을 차치하더라도 그 역사적 의의는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코민테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중적 연구 성과는 ―자본주의 사회이기에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무척 미비하며, 많은 부분 왜곡되어 객관적 접근조차 어렵고, 일부에서는 그 존재 의의마저 부정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번 호 <이 달의 역사>에서는 3월을 맞아 코민테른의 창립에 대해 쓰고자 한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짧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달의 역사>에 담기엔 너무도 광범하고 장대한 시간이며, 필자의 공부가 턱없이 모자라 창립 시기 정도만을 다루려고 하니 양해 부탁드린다. 추후 충분히 학습한 후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혹여나 이번 글의 부족한 점을 채워 다른 분이 기고해 주신다면 더욱 감사하겠다.

 

 

제3 인터내셔날의 기원 및 배경

 

제3 인터내셔날이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것은 러시아에서 볼쉐비끼 그룹이 결성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전에 레닌이 쓴 많은 저작은 맑스의 저작과 함께 이 그룹의 혁명적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바로 이 그룹의 전통 속에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1905년의 2월 혁명과 1917년의 10월 혁명이라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레닌의 끈질긴 노력으로 전쟁 전의 제2 인터내셔날에서 좌익이 급속히 성장했다. 그리고 이 혁명적인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제2 인터내셔날의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투쟁을 배신한 뒤의 일이었다.

1차 대전을 둘러싼 기회주의자들의 배신으로 제2 인터내셔날은 조직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완전히 분열되었는데, 우익, 좌익, 중간파의 분열은 전쟁이 길어지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각각 세 개의 국제 조직으로 굳어졌다. 즉, 우익의 제2 인터내셔날, 중앙파의 제2반(半)인터내셔날, 공산주의의 제3 인터내셔날이 그것이다.

 

 

제2 인터내셔날의 세 흐름

 

우익은 계급 평화를 추구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전면적으로 지지했다. 이들은 계급 간의 국내 평화와 전쟁에서의 조국 옹호의 필연성을 떠벌리면서 지배계급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제국주의 전쟁의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것을 노골적으로 원조했다. 에베르트, 샤이데만(독일), 빅터 아들러(오스트리아), 르노델, 게드, 상바(프랑스), 하인드먼(영국), 쁠레하노프(러시아), 비쏠라띠(이딸리아), 반데르벨테, 브란팅(스웨덴) 등 저명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사회배외주의1) 입장을 취했다.

중앙파는 승리하지도 말고 패배하지도 말자는 슬로건을 제출했다. 겉보기에 이 슬로건은 조국 옹호라는 사회배외주의자의 입장과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르주아적 평화를 희구한 다른 표현에 불과했다. 이는 전시에는 평화를 위한 투쟁, 평화 시에는 계급 투쟁!이라고 했던 카우츠키의 주장을 보아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중앙파의 대표자는 카우츠키, 하제, 레데부어(독일), 오토 바우어, 프리드리히 아들러(오스트리아), 롱게(프랑스), 맥도날드, 스노든(영국), 마르또프, 뜨로쯔끼(러시아), 뚜라띠, 모딜리아니(이딸리아), 힐킷트(미국), 그림(스위스) 등이 있다.

좌파는 제국주의적 도살에 반대하는 투쟁,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으로 국내 평화라는 사회배외주의자들과 정면으로 맞섰다. 볼쉐비끼로 이루어진 이 좌익 지도자들은 찜머발트, 쉬투트가르트, 바젤 결의 정신을 발전시켜 제국주의 전쟁의 약탈적 본질을 폭로하고, 전쟁으로 인한 위기를 사회주의 혁명의 매개로 활용하도록 하여 대중의 반전 분위기를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에 의해 훗날 공산주의 제3 인터내셔날이 결성되었다. 좌익의 혁명적 국제주의자의 조류에 속했던 것은 레닌이 지도한 러시아 볼쉐비끼와 블라고예프, 끼르꼬프, 꼴라로프 등을 선두로 하는 불가리아의 쩨쓰니 쏘찌알리쓰찌2), 독일의 좌익(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 메링), 세르비아의 사회주의자(필리뽀비치, 뽀뽀비치, 까츠레로비치), 폴란드의 좌익 사회민주주의자(하네츠끼, 바르쓰끼), 라트비아의 사회민주주의자(베르진), 네덜란드의 트리뷴파3)(판네쿠크, 베인코프), 스웨덴, 노르웨이, 이딸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랑스, 영국, 미국, 아르헨티나, 덴마크, 스위스 등지의 좌익 사회민주주의자였다. 서구의 좌익 사회민주주의자의 입장은 레닌주의 견지에서 볼 때 다소 일관되지 못한 면도 있었지만, 그들은 자국의 배외주의자와 싸워야 하는 자신들의 임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했으며,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창립의 중요한 전제 중 하나였다. 레닌과 볼쉐비끼는 새로운 혁명적 인터내셔날 창설에 필요한 조건들이 성숙해 가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국제 노동 운동의 좌익적인, 진실로 국제주의적인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세계, 혁명으로 고양되다!

 

1917년 11월 7일(구력 10월 25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했다. 부르주아 권력은 타도되고 지구의 6분의 1의 지역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되었다. 10월 혁명은 세계를 2개의 체제,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나누고, 제국주의의 모든 모순을 격화시켰다. 전 세계 노동자를 고무하며, 폭력과 억압적 제도에 대항하여 혁명 투쟁을 고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핀란드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투쟁이 일어났다. 프랑스, 영국, 이딸리아, 미국 등에서도 강력한 파업 운동이 일어났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 칠레 등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토지ㆍ노동 개혁이 요구됐다. 중국, 인도, 조선, 인도네시아에서는 반제ㆍ반봉건 운동이 일어났다.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집트, 리비아, 수단, 소말리아 등에서는 농민 반란이, 콩고, 세네갈 등의 아프리카에서도 반식민지 투쟁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세계 혁명 과정은 식민지 영유국뿐 아니라, 식민지ㆍ반(半)식민지 종속국을 포함한 전 대륙의 수천만 대중을 투쟁으로 고무시켰다.

이에 겁이 난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는 자국 내의 프롤레타리아 운동 진압은 물론, 내전을 도발해 무력간섭을 시도하는 등 쏘비에트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진압에 전념했다. 이같이 자본주의의 공격과 계급 투쟁이 격화되면서, 사회주의 세력 역시 가능한 한 빨리 결속을 굳히고, 국제 연대를 강화해야만 했다.

 

 

다가오는 제3 인터내셔날의 창립

 

10월 혁명은 국제 정세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창립의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에 관한 맑스-레닌주의 사상을 실행에 옮겨 개량주의에 대한 혁명적 이론의 승리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의 승리를 증명한 것이었다.

1918년 1월 뻬뜨로그라드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을 준비하기 위한 국제협의회가 개최됐다. 여기에는 볼쉐비끼, 좌파사회혁명당4),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미국의 사회민주주의자,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크로아티아의 국제주의자 대표가 참가했다. 협의회는 (1) 각 당, 각 조직은 본국 정부에 반대하고 즉시 강화를 목표로 혁명적 투쟁의 길로 나아가는 데 동의할 것, (2) 러시아의 10월 혁명과 쏘비에트 권력을 지지할 것이라는 원칙을 세워 좌파 각 당과 그룹에 보냈다. 이 기초 위에 여러 나라의 국제주의적 세력을 제3 인터내셔날로 통합하기 위한 끈기 있는 활동이 전개됐고, 많은 나라에서 공산당과 공산주의 그룹이 형성됐다. 사실상 제3 인터내셔날이 성립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지만, 러시아 공산당은 1918년 12월 24일 각국의 공산주의자에게 제3 인터내셔날의 창립을 서둘자고 호소했다. 이유는 당시 사회배외주의자와 중앙파가 공산주의 운동과 싸우기 위해, 제2 인터내셔날을 부활시켜 개량주의 국제연합체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계 혁명 운동의 지도자들이여! 모두 모쓰끄바로!

 

1919년 1월 모쓰끄바에서 새로운 국제협의회가 열렸다. 이 협의회는 가능한 한 빨리 제3 인터내셔날의 창립 대회를 소집하자는 레닌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사회배외주의자와 중앙파도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사회주의 혁명의 깃발 아래 통합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같은 해 2월 베른 회의에서 제2 인터내셔날을 부활시켰다.

1919년 2월 말, 각국 공산당 대의원들은 엄청난 장애와 봉쇄, 내전의 전선을 돌파하며 모쓰끄바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딸리아 사회당의 대의원과 프랑스, 영국, 미국 좌익 사회주의자 그룹의 대표는 결국 봉쇄를 돌파하지 못해 참가하지 못했다. 헝가리 공산당의 대의원들과 독일의 한 대의원은 오는 도중 체포되었고, 일부 대의원들은 늦게 도착했다.

3월 2일 밤 끄레믈 궁에서 국제 공산주의자 회의가 시작됐다. 의장단의 상임위원으로는 레닌(쏘비에트 러시아), 에버라인(독일), 플라텐(스위스) 등이 선출되었다. 회의에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의 21개국 35개 조직을 대표하여 대의원 총 52명이 출석했다. 19개 조직이 의결권을 갖고 16개 조직이 평의권을 가졌다. 대의원들은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영국, 헝가리, 독일, 세르비아ㆍ크로아티아ㆍ슬로베니아 왕국,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쏘비에트 러시아, 핀란드,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스웨덴, 미국의 공산주의 및 좌익 사회주의적인 각 당과 각 그룹을 대표하고 있었다. 우끄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및 백(白)러시아5), 에스토니아, 아르메니아, 볼가 연안 독일인, 투르키스탄,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의 공산주의 조직들은 독자의 대표단을 보내왔다. 한편 이란, 중국, 조선, 터키의 피억압 민족 대표도 참가했는데 이런 종류의 회의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이 회의에 참석했던 그룹 중 실질적으로 대중적인 당은 러시아 공산당뿐이었다. 핀란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헝가리, 폴란드, 독일 각 공산당은 최근에 창립되었기에 강고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동 운동이 고양되는 조건 속에서 이들 당은 혁명적 투쟁의 경험을 빨리 쌓아 갔다.

각 나라의 혁명 운동에 관한 보고가 끝난 후, 3월 3일 밤 회의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 지침에 대한 심의에 착수했다. 지침은 레닌의 제국주의에 관한 학설과 사회주의 혁명 이론의 가장 중요한 명제들을 간결히 요약ㆍ서술한 것으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면 임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는 것으로,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의 획득이란 군대ㆍ경찰ㆍ관리단으로 구성된 낡은 국가 기구를 파괴하고 ―부르주아지를 무장 해제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시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적 행정 기관을 창출해 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확인하고, 일국 내의 계급 투쟁의 승리와 세계 혁명의 임무들을 결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국주의 세계 체제의 종국적인 붕괴를 촉진하기 위하여 제국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 투쟁과 식민지ㆍ반식민지의 피억압 민족의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하며 양자를 밀접하게 결합하는 것을 의무로 내걸었다. 그와 동시에 사회주의 공동 방어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하여 권력을 쟁취한 나라들은 코민테른과 가장 긴밀하게 동맹하고 형제적으로 상호 원조할 것을 선언했다. 지침 초안의 토의에는 많은 대의원이 참가했으며, 많은 보충 및 수정 의견을 제안했다. 최종 문안은 기명 투표로, 기권한 노르웨이 노동당의 대표를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3월 4일 회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레닌의 테제와 보고를 청취했다. 레닌은 사회개량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소위 순수 민주주의가 실제로는 부르주아지의 특권을 옹호하는 것임을 폭로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계급적 한계를 철저히 파헤쳐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바뀌는 필연성을 설명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한 쏘비에트 권력만이 부르주아적 국가 기구를 분쇄하고 노동자에게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해 줄 수 있음을 피력했다. 마지막으로 레닌은 쏘비에트 내에서 안정적인 공산주의적 다수파를 획득해야 할 필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승리는 쉽게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또 오래가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새삼 주의를 환기했다. 레닌의 이 테제와 공산당의 임무에 관한 결의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기본 강령적 문서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이미 각국 공산주의자들의 의견과 행동의 일치를 확인했던 것으로, 세계 공산주의의 통일적인 이론으로서 레닌주의가 갖는 국제적 성격을 입증하는 것이다.

 

 

드디어, 코민테른 창립!

 

1919년 3월 4일 밤, 새로운 대의원들이 도착한 후 제3 인터내셔날 결성의 문제가 재차 제기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공산당, 스웨덴 좌파사회민주당, 발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연합의 대표들은 제3 인터내셔날의 결성은 … 무조건적인 역사적 요청이며, 모쓰끄바에서 개최 중인 국제 공산주의자 회의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제출했다. 독일 공산당의 대의원 에버라인은 즉시 창립에 대해 전술상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의원들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을 창립해야 할 시기가 이미 완전히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다. 토론이 끝난 후 의결권과 평의권을 가진 모든 대의원의 기명 투표가 행해졌고, 독일 공산당 대의원의 기권을 제외하고는 전부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을 즉시 결성하는 것에 찬성했다. 채택된 결의에는 모든 당, 조직 및 그룹은 8개월 이내에 제3 인터내셔날로의 가맹을 최종적으로 신청할 권리를 갖는다라고 규정하였다. 표결 후 에버라인은 독일에 돌아가면 공산당을 코민테른에 가맹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하였고, 실제로 코민테른에 가맹한 초기 당 중의 하나가 되었다.

3월 4일 이후 국제 공산주의자 회의는 이미 코민테른 제1차(창립) 대회로서 계속 진행되며 일련의 중요한 결정들을 채택했다. 사회주의적 조류들과 베른 회의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국제 정세와 협상국의 정책에 관하여,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여성 노동자를 흡수하는 문제에 관하여, 백색 테러에 관하여 등의 결의를 채택했고,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에게 보내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선언만국의 노동자에게라는 격문도 승인했다.

 

 

코민테른 제1차(창립) 대회

 

코민테른 제1차 대회에서 채택된 문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권력 획득 투쟁의 전투적 강령을 제시하고 공산당의 임무와 기본 전술 방향을 명확하게 규정했다. 대회는 코민테른 지도를 위해 쏘비에트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발칸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연합, 스위스, 스칸디나비아의 각 공산당 대표로 구성된 집행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최종 규약은 다음 대회에서 확정하기로 하고, 우선은 5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에 조직 활동을 위임했다. 후에 러시아 공산당의 대표 지노비예프가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서기에 발라바노바, 베르진이 승인되었다. 이로써 코민테른은 1943년 해체 전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 투쟁의 공식적인 지도부로 활동하며, 세계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그 시기에 세계 혁명의 시대를 이끌었다.

 

 

코민테른의 역사적 의의

 

첫째, 코민테른의 최대 업적은 무엇보다 제2 인터내셔날의 기회주의적ㆍ수정주의적 배반으로 인해 흐트러진 혁명 진영을 세계적 규모에서 다시 복구한 것이다. 제1 인터내셔날의 이론적 지도를 부활시키고 제2 인터내셔날의 초기 업적―사회민주주의의 정치 세력화, 대중으로의 확산―을 이어받아 정통 맑스주의의 진영을 재정비했다.

둘째,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수호하고 확충하며 맑스-레닌주의의 정통성을 올바르게 이어 간 것이다. 구호뿐인 원칙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 원칙을 견지한 것은 그들뿐이었다. 이것은 정통 맑스-레닌주의와 기회주의ㆍ수정주의를 구별 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셋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전통을 재확립하고 나아가 강화했다. 맑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호소한 이래 국제주의는 모든 혁명 세력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제2 인터내셔날의 기회주의ㆍ수정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끼리 서로를 학살하도록 제국주의의 전쟁터로 내몰았다. 이때 찜머발트 좌파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혁명적 국제주의의 슬로건을 내세워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지킴으로써 일시 흐트러졌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재확립했고, 이를 이어받아 보다 강고히 한 것이 코민테른이었다. 또한, 민족 문제 및 농민 문제를 거의 무시했었던 제2 인터내셔날과 달리 동양 민족대회, 국제 농민평의회 등을 조직하고 서구 선진국의 공산당까지도 포괄하여 비로소 세계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대 혁명 운동의 주요 3대 세력, 즉 사회주의 국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 식민지 종속국의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함께 세력을 결집한 것은 코민테른의 지도하에서였다.

넷째,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 및 지도하고 이후 민족 해방 운동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제2 인터내셔날과는 달리 코민테른은 창립 대회에서부터 일관되게 피착취 식민지 인민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대회에 피억압 민족의 대표를 참석시키고 앞장서서 피억압 민족의 모임을 주선하고 지원했다. 또한, 제2차 대회 및 제4차 대회에서 채택된 민족 문제에 대한 테제는 이후 민족 해방 운동 이론의 기본 문서가 되었다.6)

다섯째, 노동계급 통일전선에서 시작하여 인민전선 나아가 제2차 제국주의 전쟁 이후에는 인민 민주주의론으로까지 발전한 통일전선론의 확립이다. 인민 민주주의 혁명론―이것은 시기적으로 코민테른 해산 후의 일이지만 그 맹아는 이미 코민테른 당시에 나타났다―의 확립 결과 노동계급을 위시한 다양한 계급ㆍ계층ㆍ집단의 진보적 운동을 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길을 한 걸음 앞당겨 놓았다.

여섯째, 평화를 위한 투쟁(전쟁 반대 투쟁)의 초석을 마련했다. 코민테른은 반파씨즘ㆍ반전 투쟁의 구체적인 통일전선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의 힘에 의해 전쟁을 억지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어 이후 평화를 위한 투쟁의 이론적 및 실천적 근거를 제시했다. 제국주의자에 의한 전쟁 도발 위협,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한 군비 확장, 핵무기로 인한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코민테른의 반전 투쟁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1919년 당시 레닌은 제3 인터내셔날의 역사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제1 인터내셔날은 사회주의를 위한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토대를 마련했다. 제2 인터내셔날은 많은 나라에서 운동이 광범하고 대중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준비하였다. 제3 인터내셔날은 제2 인터내셔날 활동의 성과를 이어받아, 그들의 기회주의적, 사회배외주의적, 부르주아적 및 소부르주아적인 오류를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기 시작했다.

 

빵과 자유, 평화, 민주주의, 진보를 위해 투쟁했던 코민테른. 비록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코민테른이 남겨 놓은 유산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실존하는 노동자의 삶 속에 남아, 끊임없이 자신의 역사적 의의와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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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김성윤,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제1권, 거름, 1986.

W. Z. 포스터,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 제2권, 동녘, 1988.

백의 편집부, ≪코민테른과 통일전선≫, 백의, 1988.

 

 


 

1) 사회주의를 배반하는 기회주의적 조류.

 

2)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쩨쓰니 쏘찌알리쓰찌). 넓다는 뜻의 쉬로끼(широки)에 대비하여, 좁다는 뜻의 쩨쓰니(тесни)를 붙였음. 낡은 사회민주노동당의 좌우 분열로 인해 1903년 독자적인 당으로 성립하였음. 제1차 대전 중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했으며 1919년 코민테른에 가입, 불가리아 공산당을 결성함.

 

3) 신문 ≪트리뷴≫을 기관지로 하는 네덜란드 사회민주당의 좌파 그룹, 일관된 혁명당은 아니었으나 1차 대전 중 국제주의 입장을 취하였고, 1918년 네덜란드 공산당을 결성함.

 

4) 러시아 10월 혁명 후 사회혁명당에서 좌파가 분리되어 결성한 독립당.

 

5) ‘벨로러시아’라고도 하며, 1991년 9월 현재의 국호인 ‘벨라루스’로 변경하였음.

 

6) 피억압 국가들의 공산당은 계급적 임무와 함께 민족적 임무를 담당해야 하며, 이를 위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이 필요하다는 것, 그와 함께 노동 운동은 완전한 정치적 자주성을 온전하게 잘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 등의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기본 원칙들이 담겨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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