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배후(19)

 

로저 키란(Roger Keeran)ㆍ토마스 케니(Thomas Kenny)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차례]

서문

1. 서론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3. 제2경제

4. 약속과 불길한 예감, 1985-86

5. 전환점, 1987-88

6. 위기와 붕괴, 1989-91

7. 결론과 영향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8.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

 

 

 

7. 결론과 영향(2)

 

여러모로 쏘비에트 붕괴의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고르바쵸프의 기회주의가 쏘비에트 공산당 내에서 발생했다는 점이 아니다. 이전에 기회주의를 저지했던 것처럼 고르바쵸프의 기회주의를 공산당이 저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왜 쏘련 공산당은 1964년의 흐루쇼프나 1929년의 부하린에 대처한 것처럼 1987년과 1988년의 고르바쵸프에 대처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어느 정도 당이 방심했고, 제2 경제와 이로부터 불거져 나온 당과 정부의 부패를 일소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은 당원 자격에 있어 너무 방만해졌다. 당의 문호가 너무 넓어진 것이다. 특히 노동자가 아닌 당원이 증가했다. 민주 집중제는 변질되었다. 당과 노동계급을 연결하는 노동조합, 쏘비에트 그리고 여러 기제들은 경직되어 갔고, 비판과 자기비판은 사라져 갔다. 집단 지도도 쇠퇴했다. 당의 화합과 지도부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 맹목적인 최고 덕목이 되었다. 이념적 고양은 시들해졌다. 흐루쇼프는 이념적으로 잘못을 범했고, 여러 분야에서 이념은 현실과 멀어져 갔다. 많은 면에서 이념은 현실에 안주하고 형식화되고 의례적으로 된 것이다. 그 결과 매우 훌륭하고 뛰어난 많은 사람들이 이념에 혐오감을 느꼈다. 최고 지도자들 대부분은 기회주의의 의미와 위험에 충분히 주의를 돌리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당 스스로가 개혁이 필요했다.

1990년대 초에 반공주의자들이 광범위하게 퍼트린 생각과는 달리, 쏘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전위당, 국가 소유와 집단 소유, 그리고 중앙 계획에 근거한 사회주의가 파멸한 것이 결단코 아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사회주의 사회를 개선한다고 사회개혁주의자들이 제3의 길을 추종하여 재앙을 초래한 것뿐이다. 이 제3의 길은 러시아 날강도들이 자본주의로 가는 지름길이었고 제국주의에 굴복하는 길이었다. 1985-91년의 뻬레쓰뜨로이까는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악화시켰다.

우리의 주된 목표는 쏘련 붕괴의 원인을 밝히는 협소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논제가 맑스주의 이론과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간략하지만 경우에 따라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출하려고 한다. 이것이 더 많은 사고, 연구 및 토론을 자극하길 바란다.

이 광범위한 문제들이란 맑스-레닌주의의 정치 범주로써의 기회주의, 두 체제의 상대적 힘, 중앙 계획 대 시장, 혁명 정당 이론, 역사적 불가피성, 일국 사회주의 그리고 20세기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집요한 책임 회피와 관련이 있다.

쏘비에트의 붕괴로 역사적 유물론이 손상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 유물론이야말로 1985-91년 쏘련에서의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해 준다. 잘못된 관료주의론에 기대지 않고도 반혁명의 물질적 뿌리를 보여 준다. 맑스주의 철학자 도메니꼬 로쉬르도(Domenico Losurdo)가 최근에 아직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 내부의 투쟁에 관한 이론이 부족하다라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다.1) 주요 정치 투쟁은 계급적 이익에서 비롯된다. 쏘비에트에서 반혁명이 일어난 것은 고르바쵸프의 정책들 때문이다. 이 정책들은 사유 재산과 자유 시장에 물질적, 이념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회 집단들이 이전의 지배적이던 사회주의 경제 관계 즉, 계획적이고 공유적인 제1 경제를 파괴하고 대체하는 과정을 열어 놓았다.

1989-91년에, 미국 공산당은 쏘비에트 붕괴가 인물의 잘못 때문인지 씨스템적 약점 때문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전자의 관점은 나쁜 지도자들을 탓했고, 후자는 쏘비에트 체제에 깊게 자리 잡은 문제점들을 비난했다. 두 관점 모두 진실을 담고 있지만 같은 정도는 아니다. 인물의 잘못을 강조한 견해가 결정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더 나은 설명이다. 고르바쵸프의 잘못, 우유부단함 그리고 궁극적으로 친자본주의적인 리더십이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씨스템의 신봉자들은 깊게 뿌리박힌 원인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물질적 이해관계보다는 민주주의의 결핍에서 원인을 찾으려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 우리가 제시한 해석 틀은 이러한 초기 논쟁자들의 문제 제기 방식을 1991년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극복했다.

쏘비에트 붕괴의 결과와 해석은 민주주의 투쟁,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 공산주의 운동 그리고 인류 미래 등의 현황과 전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쏘련 사회주의의 종식은 남아 있는 사회주의 국가들과 저개발 세계의 억압받는 인민들,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좌절을 의미했다. 그리고 몇 년 전 스티븐 F. 코헨(Stephen F. Cohen)이 ≪네이션(The  Nation)≫에 썼듯이, 결국은 쏘련 노동자들이 가장 가혹한 고통을 당했다.

 

최근 10년간 러시아는 근대 역사상 최악의 경제 공황을 겪었다. 만연한 부패로 인해 자본 도피가 모든 해외 차입과 투자를 능가했으며, 평화 시에 전례가 없는 인구 재앙을 가져왔다.

그 결과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비극이었다. 러시아인의 약 75%가 빈곤선 이하이거나 겨우 빈곤을 모면한 상태였다. 학령기 아동의 50-80%가 신체적 또는 정신적 손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류되며, 남성의 기대 수명은 60세 미만으로 급감했다. 그리고 불길하게도 완전한 핵보유국의 대량 살상 무기 체계가 역사상 처음으로 심각한 불안정 상태에 놓였다. 8월의 꾸르쓰끄 잠수함(Kursk) 참사가 하나의 사례이다.2)

 

막 끝난 지난 세기가 현 세기의 지표가 된다면, 사회주의 혁명은 쏘비에트 연방이 직면했던 것과 유사한 많은 도전들을 마주할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계급 투쟁과 민족 해방 투쟁이 교차하는 국가들에서 먼저 승리할 것이다. 20세기 사회주의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중국, 꾸바, 조선, 비엣남(베트남)은 계급과 민족 모순의 중첩이 혁명을 이끌었고, 지속적으로 사회주의에 헌신하도록 도왔다. 그렇다면 새로운 혁명에서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과 다른 중간 계층들도 사회주의 국가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면 쏘련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비슷한 정치적 상황과 문제들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제국주의는 끈질기게 공격할 것이고, 그 이데올로그들은 사사건건 민주주의쓰딸린주의라는 악령을 불러낼 것이다. 레닌은 꼬뮌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과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도록 가르쳤다3)고 말했다. 쏘련의 경험은 이러한 과제를 확장시켰다.

 

우리의 분석이 함의하는 바는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맑스-레닌주의 정치사상의 중요 범주로서 우익 기회주의를 다시 강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맑스와 엥엘스가 고타 강령을 비판할 때도, 레닌이 제2 인터내셔날을 교정할 때도, 쏘련 공산당 다수가 부하린을 물리칠 때도 그랬다. 공산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우익 기회주의를 적대계급의 압박에 대한 무원칙하고 무익한 굴복이라고 본다. 어떤 싸움이라도 후퇴는 종종 필요하다. 후퇴의 필요성은 언제나 세력 간의 실제적 대치 상태와 상황에 대한 현실적 평가에 달려 있다. 이에 따라 후퇴가 이후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닦는 것인지 혹은 손쉬운 도피인지가 규정된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익한 후퇴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수정주의라 부른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우익 기회주의는 대개 국내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투항(투쟁보다는)의 형태를 취한다. 수정주의는 때때로 현실을 바꾸기 위한 투쟁보다는 현실 존중에 대한 옹호로,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점진적 접근만을 고집하는 일방주의로, 그리고 객관적인 정세에 대한 굴복으로 나타난다. 또한 항쟁을 회피하는 길을 통해, 빠르고 쉽게 사회주의로 가려고 한다. 이런 사고의 습성은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과정의 자동적이고 자생적인 성질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회주의 발전의 열쇠로서의 생산력 발전을 강조하고, 생산관계를 완전하게 하는 계급 철폐 투쟁을 경시한다. 흐루쇼프하에서,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기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 분명히 시작되었다.4) 두 전임자와는 다르게, 흐루쇼프는 사회주의의 발전 도상에서 기회주의가 존재할 어떤 사회적 토대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부정은 노동자계급 국가가 전 인민의 국가가 되었고 공산당이 전 인민의 당이 되었다는 흐루쇼프의 표현에서 발견된다. 흐루쇼프의 낙관론이 어리석었다는 것은 고르바쵸프의 배신으로 드러났다.

1930년대 인민전선 이후 자본주의 세계에서 맑스주의자들은 사회개혁주의자들과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중간 세력(center forces), 특히 사회민주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공동 행동을 추구하는 정책은 전적으로 올바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데올로기로서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 운동에서 혁명적 맑스주의가 방심할 수 없는 영향력 있는 경쟁자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않는 이념 투쟁과 함께, 우파에 대한 좌파 중심의 실천 형태를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한다.

1990년대 초반에 전 세계 공산당들의 쏘련 붕괴에 대한 초기 평가는 일부 절충적인 것들이 존재했지만, 두 가지 설명 틀을 가지는 경향이 있었다. 첫 번째 그룹은 붕괴를 쏘비에트의 민주주의 결핍 탓으로 돌렸고, 두 번째 그룹은 기회주의 탓으로 설명했다. 첫 번째 견해는 일찍이 고르바쵸프 지도부의 반쓰딸린주의 용어를 되풀이한 것으로,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저술가들이 공유했던 표현 형식이다.

쏘련에서의 민주주의가 1985년 이래 과거보다 더 발전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쏘비에트 연방 종식의 주요 원인이 민주주의의 결핍일 수는 없다. 다수의 논평자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실질적 특징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5)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일하는 사람들의 지위 강화를 의미한다면 쏘비에트 연방은 그 어떠한 자본주의 사회를 능가하는 민주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쏘비에트 국가는 당과 정부에 참여한 노동자계급의 비율이 그 어떤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보다도 훨씬 높았다. 소득 평등 수준6), 무상 교육 수준, 의료 및 기타 사회 서비스, 고용의 보장, 조기 정년, 물가 안정, 주택과 식량 및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보조금 등, 모든 것이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사회라는 것이 명백했다. 사회주의 산업 및 농업의 건설과 2차 세계 대전에서 조국 방어라는 서사적 노력들은 적극적인 대중의 참여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쏘비에트에는 3천 5백만 명의 사람들이 참여했다.7) 쏘련의 노동조합은 생산 목표, 해고, 그리고 그들만의 학교와 휴양지 등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만일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조합이 요구할 수 있다고 해도 거의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아래로부터의 엄청난 압력이 없는 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결코 기업 재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서구 민주주의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계급 착취를 무시하고, 실질적 내용이 아닌 과정에 초점을 맞추며,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의 성과를 민주주의의 진정한 방어자이자 촉진자인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자본에게로 돌린다. 그들은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의 성과를 그것의 과거와 비교한다. 반면에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의 성과는 상상해 낸 완벽한 이상과 비교한다.

민주주의의 결핍이 붕괴의 원인이었다는, 즉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생각은, 원인붕괴라는 말을 상식적 의미에서 쓴다면 잘못이다. 쏘비에트 연방에 대한 배신은 사회주의의 전복과 연방 국가의 분열로 인한 것이다. 이것은 다섯 가지의 구체적인 과정으로부터 직접 비롯된 것이다. 당의 청산, 반사회주의 세력에게의 언론의 이양, 계획적인 공공 소유 경제의 사유화와 시장화, 분리주의 촉발, 미 제국주의에의 굴복 등이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부정확하고 추상적인 단점들이 이러한 정책들의 원인일 수는 없다. 쏘련 공산당의 고르바쵸프 지도부는 이 모든 정책들을 의식적인 정치적 선택으로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결핍 이론은 일부 사람들이 구체적인 분석을 꺼려하기에 부분적으로 살아남았다. 구체적 분석에 대한 거부는 쏘비에트 붕괴의 중요성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 맑스주의에 제기되는 중대한 이론적 도전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거리 두기는 자멸적이고 지적으로 기만적이다. 이 주제를 피하는 것은 쏘비에트 연방의 종식에 대한 지배적인 부르주아적 설명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피는 다음과 같은 독선적인 자기만족을 가져온다. 쏘비에트 연방은 실천에 있어 뿌리 깊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이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우리는 관료적이지도 않고 비민주적이지도 않다. 이런 말은 역사적 유물론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야기다.

공산당과 노동당의 주요한 국제회의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적인 분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쏘비에트 동지들이 처리할 것이다라는 말을 여전히 듣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맑스는 빠리 꼬뮌 이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프랑스 내전≫을 썼다. 레닌은 1914년 8월에 제2 인터내셔날의 붕괴에 대해 즉각적으로 분석했다.

미국 공산당(CPUSA) 위원장 거스 홀(Gus Hall)은 초기에 뻬레쓰뜨로이까의 방향에 대해 공식적으로 회의를 표명했다. 1987년 이전에, 그는 가끔 사회주의 국가들을 비판했지만,8) 가끔 공식적인 비판은 부적절하다는 뜻을 암묵적으로 표했다.9) 그러나 1987년 겨울에, 대체로 뻬레쓰뜨로이까에 대해 긍정적인 ≪세계 맑스주의 리뷰(World Marxist Review)≫의 글에서, 미국 공산당 위원장은 기회주의는 보통 새로움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로 위장해서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경고했다.

 

대부분의 오류들, 맑스-레닌주의의 과학을 수정하려는 대부분의 역사적 시도들, 그리고 착취계급의 압력에 굴복하는 정책과 행위들 대부분은 새로움에 대한 논쟁에 의해 정당화되어 왔다. 노동자계급 운동의 역사에서 무언가 새로운 개념은 계급 투쟁의 개념을 우회하거나, 감추거나, 제거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10)

 

홀은 새로운 생각의 보편적 인간 가치가 계급을 경시하는 문제로 넘어갔다. 1988년과 1989년에, 여전히 뻬레쓰뜨로이까에 대해 지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비판은 좀 더 강력하고 구체적이 되었다. 1989년 후반에 동유럽이 붕괴했을 때, 그리고 1990년과 1991년에 쏘련의 위기가 최종적 단계에 이르렀을 때, 쏘비에트 지도자들의 정책에 대한 그의 대중적 비판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분별 있는 지도자들이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에 절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회주의에 대한 완강한 반대자인 거스 홀조차도 쏘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 건설 방안에 대한 갈등이나 성장하는 제2 경제 후반기의 물질적 뿌리를 보지 못했다. 미국 공산당이나 다른 공산주의자들은 1989년까지 사회주의 종식과 쏘비에트 연방의 분열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 이것은 아마도 세계 운동에 있어서 쏘련 공산당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며, 자신이 속한 곳 이외의 복잡한 사회를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많은 사회민주주의 저술가들은 쏘비에트 정치의 두 가지 경향성을 알아차렸고, 일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제2 경제가 성장하는 것을 감지했다.

쏘비에트 연방에 대한 명석한 분석이 힘든 것은 쏘비에트적 방식에 대한 일반화된 적개심 덩어리로부터 정당한 비판을 구분해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1956-64년에 흐루쇼프 수정주의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의 논쟁은 투박하고, 교조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중국의 정책은 변덕스럽게도 좌에서 우로 방향을 틀었고, 마오는 미국과 사실상의(de facto) 반쏘 연합을 형성했다. 쏘비에트 연방을 약간이라도 지지했던 사람은 누구나, 중국의 비판을 점차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단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낡은 비판만을 되풀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많은 쏘비에트 연방 지지자들 사이에서, 쓰딸린 이후의 쏘련은 사회주의를 완벽하게 해 왔다는 검증되지 않은 가정이 커져 갔다. 흐루쇼프는 쓰딸린보다 나았고, 고르바쵸프는 브레쥐네프보다 나았다는 식이다.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와 켄 카메론(Ken Cameron)의 경우를 제외하고, 쓰딸린, 흐루쇼프, 브레쥐네프 시대를 비판적이면서도 균형 잡힌 방식으로 다루려던 시도는 거의 없었다. 특히, 쓰딸린의 경우, 쏘비에트 지지자들은 전면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본질적 어려움이 있거나, 그러한 노력이 어떤 결실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쏘비에트의 진보가 쓰딸린을 역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변종으로 만들었다는 가정 때문일 것이다. 쏘비에트 연방의 적들은 손쉽게 이 빈 공간을, 쓰딸린을 괴물이나 광인으로 묘사하는 책들로 가득 채워 놓았다. 이러한 희화화는 결국 쓰딸린 시대에 대한 지식을 간접적으로만 경험한 공산주의자들의 견해에 점차 영향을 미쳤다.

 

쏘비에트의 종식은 시장 사회주의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적어도 사회주의 정치 경제에서 시장의 정당한 역할이 평가받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다른 때처럼, 시장 사회주의에 관한 문헌들이 1985-91년의 경제 재앙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온갖 부류의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문헌의 대부분은 순진한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칼 맑스에 의해 논파된 삐에르 조제프 쁘루동의 쁘띠부르주아 사회주의의 직계 후손이었다. 시장 사회주의의 대부분의 버전은 노동 시장과 노동 착취가 시장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회피하는 모순적인 이론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장 사회주의가 사회주의일 수 있겠는가?11)

 

뻬레쓰뜨로이까 기간 동안, 시장 사회주의는 가교 역할을 했다.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를 개혁하고 완성한다는 목적을 쏘비에트 인민에게 정당화하는 데 유용했다. 구호로서 그것은 효과적이었다. 재임 기간 말미에, 경제 개혁이 자본주의의 부활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만들어 냈을 때, 고르바쵸프는 사회주의라는 가식을 던져 버렸다. 서유럽이나 스칸디나비아를 닮은 규제된 시장 경제를 확립한다는 목표로 발전했다.

고르바쵸프 시장 사회주의의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쏘비에트 붕괴의 진정한 교훈은, 역설적이게도 사회주의는 중앙 계획, 공유, 시장의 제한을 필요로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고전의 인용구를 모아 교조적으로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맑스주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라이브먼(David Laibman)이 조언한 바와 같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법은 1917년 이후 사회주의 건설과 관련된 실천적 경험을 연구하는 것이다.12)

고르바쵸프 시대의 수백만 쏘비에트 인민들의 경제적 불만은 중앙 계획 체제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해체로 인한 것이었다. 1985년 경제는 여전히 중앙에서 계획되었고, 쏘비에트 역사상 가장 높은 생활 수준을 가져다주었다.13) 수십 년 동안, 쏘비에트 경제는 미국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전처럼 빠르게 격차를 좁히지는 못했고 경쟁의 성질이 바뀌었다. 선두 주자로서 미국은 새로운 산업으로의 중요한 질적 전환을 이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에 쏘비에트 경제는 연 3.2퍼센트의 놀랄 만한 속도로 성장하면서, 여러 면에서 미국 경제를 천천히 따라잡고 있었다.14)

쏘비에트 성장률의 장기적인 하락에 대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시장이 사회주의에 역동성을 부여할 수 있고, 시장의 광범위한 활용이 쏘비에트 성장률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다. 이들은, 설사 지배적인 중앙 계획하에서의 시장을 지지하는 신중한 사람일지라도, 다음의 이상한 사실들을 설명해야 한다. 쏘련의 마지막 35년 동안, 시장 관계와 다른 개혁들이 도입될수록(이는 흐루쇼프, 꼬긴, 고르바쵸프에 의한 여러 개혁 물결에 의해 공식적으로, 합법적으로 그리고 조용하고 꾸준히 도입되었으며, 때로는 불법적인 제2 경제를 통해 확산되었다), 장기간의 경제 성장률은 점점 더 떨어졌다. 심지어 몇몇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제2 경제가 하락세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인정했다.15) 쏘비에트가 지금까지 달성한 가장 빠른 성장률은 1923-53년에 이루어졌다. 이때 쏘비에트 지도부는 중앙 계획을 견고히 떠받치고, 1921-29년의 신경제 정책(NEP)에서 용인되었던 시장 관계를 억압했다. 이것은 흐루쇼프와 고르바쵸프가 표방했던 경제 개혁이 왜 성장을 감소시켰는지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중공업에 대한 투자 감소, 소비재에 대한 보다 큰 강조, 보다 높은 임금 수준16) 등 모든 것이 성장률을 낮추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성장은 분산화 때문에 둔화되었다. 분산화는 쓸모없는 경쟁을 야기하고 기업 간 협력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것은 1985년에서 1991년까지 시장의 마법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상품-화폐 관계가 확대될수록 뻬레쓰뜨로이까는 점점 더 실패했다. 1992년 옐찐이 충격 요법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자, 쏘비에트 경제는 재앙적인 침체에 빠졌고,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1991년 이후에, 시장 관계는 마이너스 혹은 낮은 성장률을 유지했다. 사실, 20세기 계획 경제는 일반적으로 시장 경제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17)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1) 도메니꼬 로쉬르도(Domenico Losurdo), “역사로부터 도피인가? 자기비판과 자기비하 사이의 공산주의 운동(Flight from History? The Communist Movement between Self-criticism and Self-contempt)”, ≪자연, 사회, 그리고 사상(Nature, Society, and Thought)≫, Vol. 13, No. 4, 2000, p. 507.

 

2) 스티븐 F. 코헨(Stephen F. Cohen), “미국 저널리즘과 러시아의 비극(American Journalism and Russia’s Tragedy)”, ≪네이션(The Nation)≫, 2 October 2000, 23 December 2000. <http://www.thenation.com/doc.mhtml?I=20001002&s=cohen>

 

3) ≪레닌주의와 세계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Leninism and the World Revolutionary Working-class Movement)≫,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1, p. 133.

 

4) 존 피트만ㆍ마그리트 피트먼(John and Margrit Pittman), ≪평화 공존(Peaceful Coexistence)≫,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4, p. 69.

 

5) 알버트 지만스키(Albert Szymanski), “쏘련 정치 과정의 계급적 기초(The Class Basis of Political Processes in the Soviet Union)”, ≪과학과 사회(Science and Society)≫, Vol. 62(winter 1978-79), pp. 426-457.

 

6) 우리는 쏘비에트의 평등주의 측면과 비평등주의 측면을 동시에 말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도 해명할 필요가 있겠다. 여러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쏘비에트 산업의 임금 수준 증가는 흐루쇼프 때 시작됐고, 노동자에 대한 생산성 인센티브를 줄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다른 성장 저해 요인을 감안하더라도 전체 쏘비에트 경제 성장률을 감소시키는 데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쏘련 정책인 보편적 평등주의는 긍정적인 성취였다. 불평등은 제2 경제에서의 부정 이득으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증가했다. 하지만 이는 자본가, 특히 미국의 기준에서 보면 쥐꼬리만 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당과 국가의 고위직이 갖는 물질적 특권은 실재했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엘리트 특권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불법적 돈벌이와 공적 특권은 레닌주의 기준에서는 정치적으로 부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국내외 반공주의자들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했다.

 

7) 보리쓰 N. 뽀노마료프(Boris N. Ponomarev), ≪변화하는 세계의 공산주의(Communism in a Changing World)≫, New York: Sphinx Press, 1983, p. 78.

 

8) 거스 홀(Gus Hall), ≪변화하는 세계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Socialism and Capitalism in a Changing World)≫, New York: New Outlook Publishers, 1990, pp. 50-53.

 

9) 거스 홀(Gus Hall), “기회주의에 맞선 세계적 투쟁에서의 맑스-레닌주의(1982년 2월 28일 정치 포럼에서의 연설)(Marxism-Leninism in the World Struggle against Opportunism(speech at Political Affairs Forum, 28 February 1982))”, ≪정치 문제(재판)(Political Affairs(Reprint)≫, p. 5.

 

10) 거스 홀(Gus Hall), “우리가 지키는 세상은 반드시 견뎌낼 것이다(The World We Preserve Must Be Livable)”, ≪세계 맑스주의 리뷰(World Marxist Review), Vol. 35, No. 5(May 1988), pp. 22-23.

 

11) 버텔 올먼(Bertell Ollman), “자본주의 사회와 시장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시장 신비화(Market Mystification in Capitalist and Market Socialist Societies)”, ≪시장 사회주의: 사회주의자 사이에서의 토론(Market Socialism: the Debate among Socialists)≫, New York: Routledge, 1998, p. 99.

 

12) 데이비드 라이브먼(David Laibman), “편집자의 견해, 사회주의: 대안적 비전과 모델(Editorial Perspectives, Socialism: Alternative Visions and Models)”, ≪과학과 사회(Science and Society)≫, Vol. 56, No. 1(spring 1992), p. 4.

 

13) 마이클 엘먼(Michael Ellman)ㆍ블라지미르 꼰또로비치(Vladimir Kontorovich), ≪쏘비에트 경제 씨스템의 붕괴: 내부자의 역사(The Destruction of the Soviet Economic System: an Insider’s History)≫, Armonk: M. E. Sharpe, 1998, pp. 34-35.

 

14) 안데쉬 오슬룬드(Anders Aslund), ≪러시아는 어떻게 시장 경제가 되었는가(How Russia Became a Market Economy)≫, Washington, D. C.: Brookings, 1995, p. 13.

 

15) 블라지미르 G. 뜨레믈(Vladimir G. Treml)ㆍ마이클 V. 알렉시브(Michael V. Alexeev), op. cit., pp. 25-26.

 

16) 바만 아자드(Bahman Azad),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Heroic Struggle, Bitter Defeat)≫,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2000, p. 116.

 

17) 빅터 펄로ㆍ엘렌 펄로(Victor and Ellen Perlo), ≪역동적인 안정성: 쏘비에트 경제의 오늘(Dynamic Stability: the Soviet Economy Today)≫,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80, p. 337.

 

신재길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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