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쏘련 사회주의의 흥망과 스탈린*

 

문영찬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 이 글은 제4회 맑스 꼬뮤날레(2009년 6월 25~26일) 제3섹션(맑스주의 역사와 정치)에 발표된 글이다. 그 자료집에도 같은 글이 게재될 예정이다.

 

 

머리말

 

쏘련이 붕괴한 지 18년이 지났다. 쏘련은 러시아와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었고 사회주의 생산관계는 소멸하였다. 20세기를 시작하였던 러시아 혁명, 그리고 20세기를 마감한 쏘련의 붕괴, 이는 역설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20세기의 규정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말한다.

현재 세계는 대공황에 빠져 있다. 가치 증식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의 운동의 필연적 결과로서 공황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세계 각국에서는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한 투쟁들에는 깃발이 없다. 쏘련 붕괴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가 영향력을 상실한 후 그것이 아직까지 복구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즉, 노동자계급은 새로운 전망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고 쏘련 붕괴의 원인도 명료하게 정리가 되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심지어는 쏘련이 사회주의사회가 아니었고 국가자본주의사회였다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은 전망의 부재와 이론적 혼돈으로 귀착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유일한 무기는 과학이다. 과학의 관점에서 이론적 혼돈을 치유하고 비판하고 쏘련 붕괴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소위 대안이라는 새로운 체계를 성립시키고 이를 실현하는 과정은 아니다. 운동은 현실의 모순에 기초하는 것이고 이를 비판적으로 지양할 때 운동의 승리는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쏘련 붕괴의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은 사회주의자로서 자기비판의 과정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쏘련의 역사를 검토하고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검토하여 운동의 토대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현재 사회주의는 대중의 신뢰를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것조차 꺼리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쏘련 붕괴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 즉 자기비판의 과정을 철저히 하여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제국주의자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소위 스탈린주의라는 절대악을 설정하고 그것으로 원인을 돌리는 비과학적, 비역사적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쏘련이 하나의 사회주의적 사회구성체였음을 밝히고 그것이 어떠한 진보를 이루었고 어떠한 오류가 축적되어서 결국에는 붕괴에까지 이르렀는가를 규명하여야 한다.

자본의 압제에 시달리는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희망은 사회주의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금 노동해방이라는 기치를 움켜잡고 과학의 도움으로 투쟁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2. 쏘련 붕괴의 원인

 

1) 과도기 경제

 

1917년의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인류에게 사회주의가 현실로 가능하다는 전망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타도된 자본가계급은 즉각적으로 혁명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에 대해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혁명을 압살하기 위해 개입하여 약 3년간의 내전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전하기 위한 악조건을 만들었고, 1920년 볼셰비키가 내전에서 승리하기까지 러시아는 혁명의 왜곡을 겪어야 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정책이 이후에 전시공산주의라 불리는 것이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반란군과의 전쟁에 모든 물자를 집중하는 체제였고 또 반란군의 점령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물자의 절대적인 부족이 심화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농민의 잉여농산물에 대한 강제적 징발, 화폐의 부분적 폐지, 대부분의 공업기업의 국유화, 상업제도의 배급제로의 대체, 시장의 폐지 등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를 총괄하는 최고경제회의가 조직되기도 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계획을 총괄하는 성격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정상적인 계획경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전시공산주의에 대해 레닌은 “그것은 전쟁과 폐허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임무에 일치하는 정책이 아니었으며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잠정적 수단이었다”1)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의 반란은 혁명에 대한 농민의 이반이 심각화되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었고 이를 계기로, 그리고 내전이 승리함에 따라 볼셰비키는 경제정책의 전환을 가져온다. 농민에 대해 현물의 식량세를 제외한 강제적 징발의 폐지, 상업의 활성화, 국유화된 공업기업의 이윤원리 도입, 사적 자본주의적 기업의 허용 등이 그러한 전환의 예인데 이는 노농동맹의 회복을 중심으로 하여 전시공산주의에 의해 경직화되었던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경제정책(NEP)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쏘련 경제의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한다. 신경제정책이 실시되고 난 후 5, 6년 만에 쏘련의 경제는 1차 대전 전의 수준을 회복한다. 공업과 농업 모두에서 생산량이 증가하고 특히 농업의 경우 곡물의 수출도 가능하게 되어 쏘련의 경제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신경제 정책은 나름의 모순이 있는 체제였다. 먼저 소유의 측면에서 보면 공업에 대한 국유화로 인한 사회주의적 소유와 농민의 소부르주아적 소유, 그리고 네프맨이라 불린 자본가들의 자본주의적 소유 등 여러 가지 생산관계가 존재하는 다(多)우클라우드 경제였다. 일종의 혼합경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다우클라우드적 성격은 경제의 활성화에는 기여를 했지만 사회주의적 공업과 소생산적 농업의 모순과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농업과 공업의 모순은 협상가격차의 위기, 도시에서 식량문제의 심각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협상가격차라는 것은 공업제품의 높은 가격과 농업생산물의 낮은 가격으로 인한 가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1923년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협상가격차가 나타나는 원인은 사회주의적 공업기업에 이윤추구를 허용한 결과 공업제품의 가격이 급속하게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농민은 잉여농산물을 시장에 내다팔기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농민이 대다수인 당시 러시아 현실에서 이는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 즉, 쏘비에트 권력의 기본축인 노농동맹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볼셰비키 당은 공업제품의 가격인하를 결의하고 실시하였다. 또한 NEP 말기 즉, 1926-29년에 이르면 농산물은 풍작을 이루었지만 도시는 식량부족에 시달려 노동자와 병사들이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시장에 내놓는 상품적 농산물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부농들이 보다 높은 농산물의 가격실현을 위해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팔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회주의적 공업과 소소유적 농업의 불균형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서 이에 대해 공산당은 농업의 집단화를 결의하게 된다. 또한 NEP는 대외무역의 적자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쏘련의 주요 수출품은 농산물인데 이의 확대는 한계가 있었고 반대로 수입은 기계류 등의 공업화를 위한 것으로서 갈수록 확대되었다. 따라서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을 통해 무역적자를 바로잡고 균형을 취하는 것이 시급하게 되었다. 이러한 NEP 자체의 전반적인 모순의 결과 쏘련 사회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 기초한 계획경제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닌이 NEP로의 이행을 이끌었던 것은 전시공산주의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NEP 자체는 혼합경제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서 독자적인 사회구성체가 될 수 없고 자본주의로 후퇴냐, 사회주의로 전진이냐는 기로에 처할 수밖에 없다. 중국 등 소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논자들이 NEP를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독자적인 사회구성체가 될 수 없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의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현재 중국이 자본주의화된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에서의 변화는 정치에서 노선투쟁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 그룹은 NEP시기에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을 통한 사회주의 경제로 이행을 주장했다. ‘국가경제체계 밖에 놓여 있는 원천으로부터 획득되는 물질적 수단의 국가 손에의 축적’2)이라고 규정된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은 사실상 농민으로부터 수탈을 하여 산업화를 위한 본원적 축적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그 발상이 반민중적일 뿐만 아니라 농민과의 동맹이라는 쏘비에트 체제의 근본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기각되었다. 한편 이와 반대로 부하린은 NEP를 옹호하면서 심지어 부농을 옹호하기도 했다. 즉, 부하린은 농민들에게 “부자가 되라(enrich yourself)”고 권하기도 했다. 부농은 토지, 농기구, 가축 등 나름대로 생산수단을 갖고 고용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는 농민이었고 농촌에서 고리대금업을 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농에 대한 옹호는 부하린이 NEP가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면서 공업에서 사회주의적 관계와 농업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병행을 생각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부하린이 보지 못했던 것은 NEP자체가 모순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NEP 자체의 모순에 의해 쏘련 경제 전체의 상황이 계획적 경제로 이행을 압박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하린이 간과한 것이다.

이러한 노선투쟁은 스탈린의 노선을 공고화시킨다. 스탈린은 레닌 사후, 그리고 독일혁명이 좌절된 후 일국사회주의 노선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데 이는 당시의 국제정세에 맞지 않는 비과학적 주장이었다. 독일혁명이 좌절된 상황에서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좌편향적 주장이다. 트로츠키는 독일 등 서유럽혁명의 지원이 없는 한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일종의 패배주의이며 레닌주의로부터 일탈이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을 규명하고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러한 ≪제국주의론≫의 분석에 따를 때 일국의 혁명은 승리할 수 있고 사회주의 건설도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진전됨에 따라 트로츠키 노선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을 향하여

 

NEP의 모순의 결과, 즉, 농업과 공업의 불균형, 대외무역적자의 급증, 사회주의적 우클라우드와 자본주의적 우클라우드의 공존, 협상가격차, 식량위기의 발생 등은 경제에서 계획의 필요성을 절실히 부각시켰고, 1929년부터 제 1차 5개년계획이 실시된다. 5개년 계획은 투자율을 높이고 중공업분야에 집중투자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5년간에 걸쳐 투하된 총투자액은 국민소득의 1/4에서 1/3에 이르는 경이적인 액수였다. 그리고 총투자액의 1/3에 이르는 공업에 대한 투자액 중 2/3가 중공업에 투자되었다3). 근대의 산업화과정에서 외국에서 차관 등의 도움 없이 자체적 노력만으로 이러한 투자를 성공시킨 사례는 없다. 이는 사회주의적 기업의 이윤을 주로 투자재원으로 하였고 상업과 무역을 국가가 장악한 데서 오는 집중력과 효율성 때문이었다. 또한 노동생산성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는데 5개년 계획기간 41%가 증가하였다. 이는 투자로 인한 노동수단의 개선과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고양된 결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간에 노동자의 소득은 2배로 증가되었다. 개인별 소득만 증가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수가 급팽창하면서 사회총소득 중 임금소득 총액이 4배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1차 5개년 계획의 이러한 투자와 건설의 성공적 실시로 쏘련은 중공업에서 확실한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소비재 부분이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성장했는데 이 기간에 87%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공업에서 성장이 순조로웠던 반면 농업에서는 격동을 겪게 된다. 이는 공업에서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이미 성립했음에 반하여 농업은 아직 소농생산체제였고 따라서 농업에서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립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립은 계획상으로는 점진적으로 실시될 예정이었다. 1차 5개년 계획기간에 총 경작면적의 15%를 집단농장으로 묶는 계획이 세워졌었다. 처음에는 농업집단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예상했던 목표치를 초과달성하게 된다. 그러자 목표를 상향조정하게 되는데 이를 기화로 1929년 말에서 1930년 초에 걸쳐 급속한 집단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따라 집단화된 농민의 비율은 55%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이는 행정적 강제를 수반하는 것이었고 부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성공에 현혹되어”라는 글을 발표하여 집단화운동의 강제성을 비판하고 집단농장에서 농민의 자유로운 탈퇴를 보장한다고 약속하였다. 이 글이 발표된 후 3개월 만에 집단화율은 23%로 떨어졌다4). 이 숫자가 보여주는 것은 집단화에 강제가 수반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거의 절반에 이르는 농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5개년 계획의 목표치를 상회하는 것이었다. 이는 집단화가 빈농들의 절실한 이해를 대변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중농들의 대거 탈퇴에도 불구하고 집단화운동은 확고한 기초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이를 기초로 집단화운동은 점차로 농민 전체의 지지를 받게 되고 1932년 말에 전체 농가의 60%가 집단화에 참여한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90% 이상의 농민이 집단화에 참여하게 된다.

집단화는 농업에서 생산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집단화는 경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집단화과정에서 부농들은 공산당원을 비롯한 집단화운동가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고 약 5만 명이 이 테러에 희생되었다. 그리고 부농들은 가축을 대거 살해했는데 약 절반의 가축들이 이 과정에서 사라졌다. 이 손실은 30년대 내내 회복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집단화가 격렬한 투쟁을 수반한 것은 근본적으로 집단화의 자발성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 레닌이 누차 강조한 자발성원칙이 훼손되었기에 농업집단화가 막대한 희생을 불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비판적 글을 발표했지만 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개인이 아니라 노선의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농업의 강제적 집단화는 스탈린의 오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오류가 쏘련의 붕괴원인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립은 역사의 필연이었다는 점에서 쏘련의 붕괴원인이 될 수 없다. 반대로 농업에서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립에 격렬하게 저항한 부농들이 집단농장에서 배제된 것으로 과정이 종결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이는 쏘련을 제외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 이러한 농민들의 저항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집단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는 것과 비교할 때 분명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공업과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되기까지 ‘누가 누구를’이라는 원칙이 지배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타도된 자본가들의 반혁명을 진압하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할 것인가, 아니면 소부르주아지와 동맹한 자본가에 의해 혁명이 압살당할 것인가의 문제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농업에서 집단화가 일단락되는 가운데 1차 5개년 계획은 초과달성된다. 그리고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쏘련은 2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한다. 이 기간에 쏘련은 국민소득이 2배, 총공업생산이 2배로 각각 증가한다. 2차 5개년 계획은 중공업 중심의 투자확대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1차 5개년 계획과 유사하지만 ‘기술숙련, 획득된 성과의 결합’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이는 거대한 설비를 제대로 움직이는 숙련된 노동이 부족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2차 계획은 1차 때의 난관과 계산 착오를 극복하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 기간에 노동자의 임금도 약 2배로 상승하였고 농업도 안정적인 성장을 보인다. 그리하여 농업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도시에 공급할 수 있는 안정적인 잉여생산물이 발생하였고 농민들의 소득도 2-3배 증가한다.

이러한 1, 2차에 걸친 10여 년의 계획경제로 인해 쏘련은 후진 농업국에서 독일과 버금가는 공업강국으로 변모한다. 이 덕분으로 쏘련은 나찌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는 중공업을 보유하게 되고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주역으로 떠오른다.

이러한 10여 년의 계획경제의 성과를 잠시 살펴보면 1934년에 실업이 일소되었고 또 문맹이 30년대 후반에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각종의 사회보장제도가 실시되었고 또 30년대 후반에는 소비재의 생산량이 증대하고 이를 기초로 소비재 가격이 체계적으로 인하되기 시작하였다. 소비재가격의 인하는 노동자의 구매력을 높이고 실질임금을 상승시키는 것인데 이는 자본주의와 달리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생산성의 향상의 성과가 자본가에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민이 향유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이 기간에 노동생산성이 급속하게 향상되는데 이는 노동자 대중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고양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시기에 유명했던 것이 스타하노프운동인데 이는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노동조직의 개선, 장비의 개선, 기술의 숙련을 통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자본주의와 달리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쏘련의 한 공화국이었던 우크라이나의 채탄부였던 스타하노프는 자신 휘하에 있는 보조노동자를 조직하는 방식, 그리고 노동과정의 개선을 통해 몇 배의 산출량을 만들어냈다5). 이러한 모범사례는 쏘련 전역으로 퍼져 노동자의 창발성이 급격하게 고양되게 하고 사회주의적 경쟁이 정착되게 한다. 스탈린 시대가 창조성을 억눌렀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러한 사례는 그와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노동을 해방하여 창조성을 고양시킨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3) 제2차 대전과 전후 복구

 

그런데 이러한 쏘련 내부의 사회주의 건설의 전진과 더불어 국제정세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1933년에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여 전쟁의 기운이 급속도로 높아진 것이었다. 히틀러는 대공황에 대해 전쟁경제로 전환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는 공공연하게 반공, 반쏘련 정책을 폈으며 쏘련에 대한 침략을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에 암운을 드리우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쏘련 내에서는 대대적인 숙청의 외부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약 3, 4년간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1차적으로는 쏘련 내부에서 사회주의건설을 파괴하는 자들과 독일과 내통하여 음모를 진행한 자에 대한 숙청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2차적으로는 관료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이었다. 1935년에 쏘련 지도자였던 키로프가 암살되었고 이를 계기로 암살을 음모하고 집행한 자들에 대한 검거가 있었으며 이후 트로츠키주의자,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이 재판을 받게 된다. 1920년대 노선투쟁의 패배자들이었던 이들은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쏘련 사회를 내부에서 파괴하는 작업을 했었고 이들은 공개된 법정에서 정당한 재판절차를 거쳐 심판되었다. 그리고 투하체프스키 등 군대지도자들의 쿠데타 음모가 적발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쏘련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파시즘의 공격 위협에 의해 위기에 처하자 내부에서 파괴적 분자들이 발생하고 활동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청은 이러한 파괴분자들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1937년의 숙청의 경우 거물급 관료주의자들을 숙청하는 것이었는데 혁명 후 몇 차례 있었던 숙청들이 출세주의자들을 걸러내는 것이었다면 1937년 고위 관료들에 대한 숙청은 밑으로부터 대중들의 비판을 통한 관료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일종의 문화혁명이었다.6) 이러한 숙청을 통하여 쏘련은 내부의 단결을 강화했으며 제2차 대전에 대비할 수 있었다. 이른바 제5열의 제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청과정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숙청에서 오류도 있었다. 이러한 오류를 과장하여 제국주의자들은 수백만 명이 숙청되었고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독재였다고 악선동을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악의적인 것이다. 숙청과정에서 오류를 입증하는 것은 숙청을 진두지휘했던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수장 2명이 잇달아 숙청과정에서의 오류를 근거로 총살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결정적으로 숙청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스탈린은 숙청과정에서의 오류를 인정하고 1939년에 많은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복권시킨다. 이렇게 숙청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원인을 살펴보면 법적으로 제재할 사람과 사상적으로 비판할 사람 간의 구분이 무너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사회주의적 법치주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자의적인 권력이 아니다. 엄격히 법적으로 규정된 절차와 규칙에 따라 권력이 행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법치주의는 자유주의에서 유래하는 개념이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도 견지되어야 한다. 즉, 국가가 소멸하기 전까지는 법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프롤레타리아적 법을 강화하는 것을 통해 국가와 법의 소멸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1930년대 후반의 숙청에서의 오류는 스탈린의 결정적인 오류이다. 특히 이러한 숙청에서 오류는 농업집단화와 달리 역사의 필연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쏘련 붕괴의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는 숙청에서 오류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후르시쵸프가 수정주의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뼈아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쏘련의 인민은 제2차 대전을 맞이하여 영웅적으로 투쟁한다. 쏘련 인민의 영웅적 투쟁은 수많은 일화로 전해진다. 그러나 특기할 것은 노동자계급의 영웅적 투쟁이다. 나찌 독일이 침공을 개시하고 물밀듯 쳐들어오는 순간에 쏘련은 대대적인 소개작전을 전개한다. 독일군의 진군속도가 피란을 불가능하게 하는 상황에서도 1941년 7월에서 11월까지 1,523개나 되는 공업체가 서부의 위험지역으로부터 소개되어 동부의 우랄과 시베리아로 이전했으며 그중 1,360개는 대공장이었다.7) 거대한 기계와 설비를 분해하고 뜯어내어 기차에 실어 동부지역으로 이전하고 불과 한 두 달 만에 공장을 다시 설치하여 생산을 해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트랙터를 만드는 공장이 탱크를 만들어내는 생산의 전환까지 같이 이루어졌다. 이는 노동자들이 그 공장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아가 전 인민의 재산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일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고 노동자의 국가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동자계급의 영웅적 정신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위기의 시기에 본질이 드러나는 법이다. 스탈린 시대는 노동자의 창발성이 억압된 관료주의 사회라는 악선동은 이 사례로 충분히 반박될 수 있다.

제2차 대전의 핵심은 쏘련과 독일의 전쟁이었다. 쏘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얻기까지 영국과 미국은 사실상 전쟁을 수수방관했으며 1944년 쏘련의 승리가 확실해질 때 비로소 작전다운 작전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쏘련이 나찌 독일에 우세를 보임에 따라 전쟁은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대 반파시즘의 구도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쏘련 인민은 2,000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인데 이는 독일군의 초토화 작전, 민간인 학살에 기인한다. 독일군에 대한 쏘련의 항쟁이 인민전쟁이었다는 것은 독일군이 점령한 점령지역에서 쏘련 인민 100만 명 이상이 빨찌산으로 투쟁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쏘련이 승리함에 따라 또 쏘련군의 진격으로 동유럽이 나찌 치하에서 해방됨에 따라 동유럽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진행되었고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성립했다. 그리고 중국혁명의 승리는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라는 점에서 전세계 식민지 체제 붕괴의 기폭제가 되었다.

제2차 대전의 결말은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성립, 미국주도의 자본주의세계의 재편, 식민지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영국 등은 사회주의세력의 성장에 위협을 느껴 반공, 반쏘적인 냉전을 개시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이 국가자본주의사회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는 쏘련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인데 역사가 진보를 거듭하던 당시의 상황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극단적인 주장을 한 것이었다. 쏘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냉전을 개시하고 있던 제국주의자들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었다. 즉, 과거 사회주의진영 내부의 비판자였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변질된 것이었다.

한편 쏘련은 전후 복구를 신속하게 마친다. 미국의 도움을 받았던 서유럽과 달리 외부의 도움이 없는 가운데서 4차 5개년 계획을 수행하는데 1950년까지 산업생산이 전전(戰前) 수준을 넘어 50% 정도 늘어났다. 쏘련의 사회주의 경제는 이후 성숙된 모습을 보이는데 소비재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중공업과 소비재 생산이 균형을 이루고 농업생산도 안정적인 증가를 보인다. 그리고 동유럽, 중국 등에 대해 막대한 원조를 하는데 이는 사회주의 경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스탈린은 1952년에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라는 논문이 그것이다. 이 논문에서 스탈린은 최초로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법칙’을 제기하고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사회에도 존재하며 사회주의 경제에서 상품-화폐관계가 존재하지만 생산수단은 상품이 아니라는 것 등을 제기한다.8) 이 논문은 쏘련에서 정치경제학 교과서의 저술의 지침이 되었는데 사회주의 사회의 정치경제학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계획경제도 지도부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경제법칙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법칙의 예는 자본주의의 잉여가치의 법칙에 대당하는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법칙’과 자본주의의 경쟁의 무정부성과 대당하는 ‘균형 있는 발전법칙’이 있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 고유의 법칙인데 사회주의 사회에 가치법칙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완연히 다른 사회구성체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스탈린 시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제국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독재자의 시대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를 직접 살았던 쏘련의 인민들 사이에서는 ‘인민의 정열이 폭발했던 시기’였다는 주장도 나온다. 스탈린의 공과를 간략히 따지면 먼저 공적으로는 인류최초로 착취를 폐지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인류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스탈린의 공적이다. 그리고 각종의 사회주의 제도를 도입하여 인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후연금 등이 스탈린 시대에 도입된 것이고 실업을 일소한 것이 스탈린 시대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2차 대전에서의 승리로 사회주의 세계체제를 성립시킨 것이다. 그러나 오류도 있다. 농업집단화에서 일정한 강제를 수반하여 농민들의 자발성을 억압했다는 것, 그리하여 쏘련 농업을 오랫동안 어려움에 처하게 했다는 것, 그리고 숙청에서의 오류로 인해 사회주의적 법치주의를 훼손한 것 등이 그의 뼈아픈 오류이다. 이렇게 스탈린의 공적과 과오가 엇갈리고 평가가 갈리는 것은 스탈린 시대가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시대였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의 모택동은 후르시쵸프의 스탈린 비판에 대해 스탈린은 공적이 7이요, 과오가 3이라고 했다. 이제 스탈린 시대는 지양의 대상이 된다. 단순한 부정도, 단순한 긍정도 아닌 변증법적 지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4) 수정주의의 등장과 자본주의적 경제개혁

 

스탈린이 사망하고 말렌코프가 주도적 역할을 하지만 곧 후르시쵸프가 전면에 등장한다. 후르시쵸프는 쏘련에서 낙후된 것으로 꼽히던 농업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인다. 농산물 조달가격의 인상, 집단농장이 국가에 진 빚의 탕감, 농민에 대한 세금의 감축, 집단농장의 정책 결정권의 강화, 집단농장의 통합을 통한 규모의 경제 추진 등으로 농민들의 소득은 크게 늘어났다. 1952-1957년 사이에 집단농장 농민들의 소득은 거의 2배로 늘어났다. 그리고 후르시쵸프는 농업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처녀지 개간운동을 벌여 많은 성과를 거둔다. 그리고 이 시기에 소비재 가격도 체계적으로 인하되었는데 1953년의 가격인하로 인해 소비자의 구매력이 1/6 정도 상승하였다. 1930년대 후반의 가격인하, 그리고 1940년대 후반, 1950년대 초반의 가격인하는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에서 가격인하가 일정한 합법칙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가격인하를 통해 전인민의 복지로 연결되는 것이다.

1956년 20차 대회에서 정식으로 6차 5개년 계획이 승인된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후르시쵸프는 스탈린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에 대해 몰로토프, 까가노비치 등 주요세력이 반발했지만 후르시쵸프는 이를 제압하고 이후 자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후르시쵸프는 중공업중시라는 기본정책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농업의 중시, 소비재생산의 중시, 지방분권의 옹호라는 노선을 밀고 나간다. 후르시쵸는 지방분권화를 밀고나가면서 1957년에 연방차원의 중앙기구인 30여개의 성(省)을 폐지하고 100여 개가 넘는 지역경제회의(소브나르호스)를 신설한다.9) 그러나 곧 문제가 발생하는데 6차 5개년 계획이 쏘련에서 계획경제가 도입되고 난 후 처음으로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1959년 7개년 계획으로 대체된다. 이는 중앙이 전체경제의 지도에서 허점을 드러낸 것으로서 계획의 요소에 중대한 균열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후르시쵸프의 지방분권의 강화가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즉, 올바른 중앙의 지도가 결여된 지방분권화는 지방주의의 강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것은 지방의 활력을 높이고 사회가 성숙된다는 지표가 되지만 지방분권은 동시에 중앙의 강화와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후르시쵸프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1950년대 초반까지의 소비재 가격인하 경향과 달리 물가가 인상되기 시작했다. 1962년 식료품 가격이 강압적으로 인상되었고 그 결과 몇몇 도시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이는 전국적 사태로까지 발전되었다. 그리고 1963년에는 쏘련 성립 후 최초로 대량의 곡물을 수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국내경제정책에서 실정은 후르시쵸프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켰다.

또 하나 주목할 점으로 후르시쵸프가 집단농장과 국유부문의 연결고리를 이루는 기계ㆍ트랙터 스테이션(MTS)를 폐지하고 그 자재와 기계들을 집단농장의 소유로 전환시킨 것이다10). MTS는 1930년대 집단화운동의 산물인데 국가가 대량의 기계와 트랙터를 농촌에 공급하는 매개로서 농촌 곳곳에 MTS를 설치하고 그것 자체는 국유기업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의미를 넘어 당과 국가가 농촌과 연결되는 주요한 정치적 고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협동조합인 집단농장의 생산관계와 공업부분의 국가소유, 즉, 전인민적 소유관계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향후 협동조합인 집단농장이 국유로 발전하기 위한 디딤돌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 고리를 끊은 것이었다. 그 결과 집단농장은 기계류와 트랙터에 대한 소유는 획득했지만 그 대금을 장기에 걸쳐 국가에 지불해야 했고 실제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는 집단농장의 자발성 강화라는 면에 치우쳐 실제적 조건을 무시한 것이었다.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 집단농장과 MTS는 협력의 관계였고 이를 국가가 보증하는 체제였는데 이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한편 후르시쵸프는 대외관계에서 스탈린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제국주의 국가와 평화공존을 주장하고 전쟁의 불가피성을 부정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을 방문하는 등 활발한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외화내빈이라고 오히려 군비경쟁은 1960년대 들어 가속화되었다. 우주 및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이 폭증하여 군사지출이 1961년 30%나 늘어난 것이다11). 그리고 1970년까지 공업과 농업생산에서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후르시쵸프가 말과 의욕은 앞서지만 그의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안에는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탈스탈린 정책의 전개로 1956년 헝가리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1962년 쿠바위기에서 미국에 일방적으로 양보하여 쿠바의 반발, 중국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후르시쵸프의 오류가 전반적으로 쌓여감에 따라 국내외적 반발에 직면하게 되고 그는 1964년 실각한다.

그러나 후르시쵸프에게 있어 이론적 의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전인민국가론과 전인민당이라는 노선이다. 이로 인해 후르시쵸프는 중국에 의해 수정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전인민국가를 제기한 것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여전히 강화된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즉, 제국주의와의 대결이 국가의 소멸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인민국가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대체할 수 없다.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된 후에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불가피한데 왜냐하면 계급사회의 잔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상품-화폐관계가 사회주의 사회에도 일정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유지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런데 후르시쵸프는 인민에 대한 억압이 더 이상 없다는 의미로 전인민국가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류이다. 전인민국가는 전인민에 대한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인민전체가 국가의 주체가 된다는 논리는 인민전체가 국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개념은 전인민국가와 달리 국가의 필요악적 성격을 완전히 승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인민국가는 바로 이러한 국가의 필요악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국가 소멸을 준비하는 것을 사실상 부정하게 되고 나아가 국가의 관료주의화의 토대가 되는 개념이다. 실제로 전인민국가라라는 후르시쵸프의 치하에서 국가기구는 대규모로 팽창했다. 이는 합리화되었는데 왜냐하면 전인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기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인민당이라는 노선도 잘못된 것이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있어 노동자계급의 관점은 과학적 노선을 보증하는 지표가 된다.

그러나 전인민당은 바로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폐기하고 무당파적인 전인민의 관점으로 과학적 노선을 대체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인민당이라는 무당파적 노선 하에서 후르시쵸프 시대에 수정주의는 거세게 자라났다. 경제에서 생산력주의, 시장관계를 사회주의 하에서 전면화해야 한다는 주장,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 선진제국에서 공산당들의 개량주의화에 대한 승인 등 이른바 ‘해빙의 시대’를 맞아 수정주의가 활개치게 되었고 과학적 사회주의는 영향력을 점차 상실해 갔던 것이다.

 

후르시쵸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는 전인민국가 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하나라고 일종의 절충을 한다. 이러한 절충은 브레즈네프 시대의 모든 정책에서 나타나는데 그로 인해 쏘련은 깊은 정체의 늪에 빠져 든다. 과학적 노선에 대한 치열한 탐구의 자세를 버리고 쉽게 절충하는 순간 더 이상의 진보는 멈추는 것이다. 브레즈네프는 후르시쵸프를 비판했지만 실제로는 후르시쵸프의 수정주의를 심화시켰다. 후르시쵸프가 정치와 사상에서 수정주의였다면 브레즈네프는 경제에서 수정주의를 심화시켜 쏘련의 경제를 붕괴로 몰아넣는다.

1965년에 경제에서 중대한 ‘개혁’이 실시된다. 개별 국유기업에 자본주의적 이윤원리를 도입하고 독립채산제를 실시하는 것이 이 개혁의 주요 내용인데 이 개혁은 코시킨이 주도한 것이어서 코시킨 개혁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원리를 도입하는 것은 이미 후르시쵸프 당시에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1962년 쏘련 경제학자 리베르만은 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계획, 이윤 및 상여금”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경제의 지방분권화와 이윤제도의 도입을 주장한 것이었다.12) 중앙의 계획은 산출목표에만 한정하고 투입요소는 개별기업이 결정하고 또 가격개혁을 시도하는 것을 중심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리베르만의 주장이 채택된 것이 1965년의 경제개혁이었고 따라서 리베르만 방식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경제개혁에 따라 1967년 도매가격이 일제히 인상된다. 이는 기존에 생산비용에 산입되지 않았던 각 기업의 고정기금(기계, 설비, 건물 등)의 사용료를 국가가 개별기업의 이윤에서 징수하는 것을 기초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기존에는 상품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생산수단의 생산에서 이윤원리가 도입됨으로써 생산수단의 가격이 상승하고 이것이 도매가격의 상승으로 반영된 것이다. 이는 상품적 성격이 없는 생산수단에 의식적으로 상품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1965년 이전에는 고정기금의 사용료를 개별기업에서 징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산수단의 가격은 최소한의 비용만 산정하여 제 2부문(≪자본론≫의 분류에 따른다면)에 공급되었고 제 2 부문, 즉, 소비재 생산에서 제 가치를 모두 산정하여 제 가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소비재에 대해 매상고세를 붙여 이를 국가가 세금으로 징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원칙을 정면에서 부인한 것이다. 고정기금에서 사용료를 징수한다는 것은 고정기금(맑스의 ≪자본론≫의 분류에 따르면 불변자본)이 스스로 자기증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정기금에 대상화되어 있는 죽은 노동, 과거의 노동이 스스로 가치증식한다는 것으로서 죽은 노동, 과거의 노동이 산 노동의 우위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회주의의 생산수단이 자기증식하는 자본주의적 자본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는 죽은 노동, 과거노동에 대한 산 노동의 우위를 통해 노동해방을 실현한다는 사회주의의 대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의 우위에 있기 때문에 죽은 노동은 자본이 되는 것이고 산 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임금노동이 되어 착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바로 이 점을 뒤집은 것이다. 즉, 산 노동이 죽은 노동, 과거의 노동의 우위에 서게 되어 노동해방이 쟁취된다는 것이고 따라서 죽은 노동은 더 이상 자본이 아니라 산 노동을 위한 단순한 물적 조건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1965년의 경제개혁, 1967년의 도매가격인상은 사회주의 생산관계에 위배되는 자본주의 원리의 도입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브레즈네프 시대에 이윤원리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심각한 불협화음을 내게 되었고 쏘련 경제는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한다. 브레즈네프 말기인 1970년대 후반 쏘련 경제의 성장률은 0-2%에 머물고 경제는 완전히 균열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쏘련을 붕괴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코시킨 개혁 혹은 리베르만 방식은 개별국유기업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적으로 기업을 운영하라는 지시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국가가 총산출량과 가격을 통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개별기업의 자율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는 계획의 요소의 균열과 마비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사회주의적 계획과 개별기업의 자본주의적 운동은 끊임없이 충돌하게 된다. 계획이 이완됨에 따라 생산의 불균형, 물품의 부족이 일반화되었고 그에 따라 부패, 뇌물수수, 밀매, 축장이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고객요구의 무시, 재고의 증대, 건설의 장기화 등으로 모순이 표면화되었다13). 1979년까지 미완성된 건설사업에 들어간 총액은 1064억 루블에 달하였다14). 이는 건설계획을 입안하여 물자를 획득하고는 실제 공사에서는 손을 놓기 때문이었다. 생산의 불균형과 공급의 부족은 기업, 개인으로 하여금 사재기를 기본원칙으로 하게 만들었다. 각 기업체는 사재기 덕분으로 공급에 이상이 생겨 필요자원을 제 때 조달받지 못하더라도 ‘숨겨놓은 자재’ 덕분에 계획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규모 지하경제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사영경제도 불법적이지만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통계의 조작도 성행했는데 1985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수천 톤의 면화를 더 생산한 것으로 보고하여 더 많은 대가를 국가로부터 받고 심지어는 초과달성 수당까지 받았다.15)

이러한 경제에서의 균열은 노동해방이라는 사회주의의 대원칙, 죽은 노동에 대한 산 노동의 우위라는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윤 자체를 몰랐던 사람들이 이윤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을 발생시켰던 것이다.

코시킨 개혁은 많은 오류를 보여주는데 첫째, 국가에 대한 맹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주의 원리와 자본주의 원리를 절충시키면서 서로 적대적인 두 관계를 통일시키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는 국가에 대한 비과학적 태도이다. 사회주의사회 또한 국가가 마음대로 발전시키는 사회는 아니다. 국가 또한 ‘사회주의의 기본적 경제법칙’, ‘균형 있는 발전법칙’ 등 일정한 경제법칙에 의거할 때만 경제를 올바로 지도할 수 있다. 코시킨 개혁은 이러한 초보적인 원칙을 무시한 것이었다. 둘째, 코시킨 개혁은 상품-화폐관계를 전면화시킨 것이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은 상품으로서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특히 생산수단은 상품의 성격이 전혀 없다. 그러나 코시킨 개혁은 이러한 생산물에 이윤원리를 도입하여 상품적 성격을 의식적으로 부여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중앙과 지방의 계획의 마비를 불러왔고 결국 경제 전체를 균열시키게 된 것이었다. 셋째, 코시킨 개혁은 노동해방을 부정하였다. 죽은 노동에 대한 산 노동의 우위라는 원리, 그를 통한 해방된 노동이라는 원리를 부정하고 사회주의의 국유기업의 설비와 기계, 원료를 자기증식하는 자본으로 변경시킨 것이었다. 넷째, 코시킨 개혁은 생산력주의의 반영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다 같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생산력 발전을 위해 착취의 폐지라는 내용을 함축하는 생산관계를 희생시킨 것이었다. 중국의 경우 전형적인 생산력주의인데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실제로는 자본주의로의 전환이었던 것이다. 다섯째, 코시킨 개혁은 철학 상의 절충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거대한 생산설비의 효율화를 위해 사회주의 원리를 강화하는 어려운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기존 성과를 갉아 먹고 자본주의적 탐욕을 도입하는 쉬운 길을 간 것이다16). 절충주의는 문제를 더 어렵게 꼬이게 만들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고통스럽고 어려운 길이지만 절충주의를 거부하고 과학적 노선을 수립하는 길로 갈 때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고르바쵸프가 등장하여 개혁을 실시하지만 그는 계획의 마비를 해결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하고 소위 인간적 사회주의라는 구실 하에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대안으로 제시하여 쏘련을 붕괴시키고 사적 소유의 부활을 초래한다.

 

 

2. 쏘련 붕괴의 교훈

 

1)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은 무엇인가

 

쏘련의 붕괴는 사회주의 건설이 단지 이상의 추구가 아니라 일정한 합법칙성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건설이 합법칙성을 따랐을 때 사회주의 건설은 순조롭고 일취월장했으며 반대로 사회주의 건설의 합법칙성을 위배했을 때 사회주의 건설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결국 파탄의 길을 걸은 것이다. 코시킨의 반동적 경제개혁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쏘련 사회에 적용하면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한 후 그 사회를 규정하는 주요 모순은 무엇인지를 해명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한 후에도 기본적인 모순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다. 생산력이 발전하는 것에 발맞추어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끊임없이 개선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기본모순의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이 무엇인가를 해명해야 한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야 사회주의 건설이 순조롭고 사회주의 건설의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기존의 쏘련에서는 바로 이 점이 부족했다.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한 후에도 그 사회에는 많은 모순이 존재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 도시와 농촌의 모순, 잔존하는 반혁명분자와의 투쟁 등 여러 모순이 있다. 여기에서 주요모순을 추출하기 위해 우리는 모택동의 도움을 빌 수 있다. 모택동은 1956년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는 후르시쵸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그 영향을 받아 발생한 헝가리 사태에 대해 모택동이 충격을 받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인민내부의 모순의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집필한 것이다. 모택동은 당시 막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하던 때였는데 적아(敵我)의 모순과 인민내부의 모순을 구분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잠시 인용해보자.

 

우리의 면전에는 두 종류의 모순이 있는데 적아간의 모순과 인민내부의 모순이다. 이는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모순이다. … 우리나라의 현재의 조건 하에서, 소위 인민내부의모순은 노동계급내부의 모순, 농민계급내부의 모순, 지식인내부의 모순, 노동자와 농민 두 계급 간의 모순, 노동자ㆍ농민과 지식인 간의 모순, 노동자계급 및 기타 노동인민과 민족부르주아지 간의 모순, 민족부르주아지 내부의 모순, 등등. 우리의 인민정부는 진정으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부이고 인민에게 봉사하는 정부이지만 그것과 인민대중 간에 일정한 모순이 있다. 이 종류의 모순은 국가의 이익,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 간의 모순, 민주와 집중의 모순, 지도와 피지도간의 모순, 국가기관의 어떤 공작인원의 관료주의 작풍과 대중간의 모순을 포괄한다.17)

 

이러한 모택동의 언급을 분석하여 보면 자본주의의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적대적인 모순과 달리 인민내부의 모순은 비적대적 모순이며 다만 그것을 올바르게 처리하지 못하면 적대적 모순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을 추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여러 모순 중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주요 모순이 아니라 기본모순이다. 그리고 반혁명분자와의 투쟁은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과정에서는 주요모순이지만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확립된 후로는 주요모순이 아니라 부차적인 모순이다. 남는 것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간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다. 이 중에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공간적 표현’(엥겔스, ≪반듀링론≫)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간의 모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존에 쏘련에서는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었다. 스탈린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라는 논문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언급하고 있으나 이들 대립들이 쏘련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을 뿐, 이들 모순이 쏘련 사회의 발전의 원동력이고 관건적인 주요모순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 이와 달리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당시에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을 주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투쟁했었다. 그러나 중국노동계급의 역량의 취약성으로 문화대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중국은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주자파(走資派)에게 권력이 넘어가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는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주요모순으로 파악하는 것은 한 사회의 사회주의 건설의 원동력을 파악한다는 의미가 있다. 주요모순은 그 극복과정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어떠한 과정과 방식으로 극복되는가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모순의 극복은 모순의 발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모순론의 원리이다.

한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여러 가지 문제의 극복전망을 안겨주는 것이다. 첫째, 관료주의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을 통해 관료주의와 투쟁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둘째, 또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의 극복도 가능하다. 도시는 정신노동을 특화하고 농촌은 육체노동을 특화한 것이 오랜 계급사회의 역사이다. 따라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자본주의의 극복만이 아니라 계급사회의 역사 전체를 극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분업의 소멸 전망을 얻을 수 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분업을 소멸시키고 인간의 다면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아침에는 농사짓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토론하는 공산주의적 인간형이 실현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생산력의 발전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과정에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은 육체노동자의 정신노동자화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육체노동의 가치와 기쁨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상호침투의 과정이 지속되는 것을 통해 대립이 지양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스탈린 사후 수정주의가 발생하고 결국은 쏘련을 붕괴로 몰아넣은 것을 생각해 보면 쏘련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에 대한 처리가 정확하고 주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수정주의의 주요한 기반이 되었던 계층은 관료들과 전문가 집단, 공장의 경영층 등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극복하는 문제는 단지 이상의 추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에서 사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2)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품-화폐관계의 의미

 

쏘련은 1965년 코시킨 개혁으로 상품-화폐관계가 경제에서 전면화되어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와 충돌하고 그에 따라 경제가 침몰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사회에 존재하는 상품-화폐 관계의 성격에 대한 해명은 향후의 사회주의 건설에서 사활적인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이 국가자본주의라고 하지만 거꾸로 쏘련은 경제에서 자본주의관계가 침투하는 것을 통해 붕괴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며 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가 과연 무엇인지를 밝힐 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나아가 사회주의에서 상품-화폐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밝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존의 쏘련에서 코시킨 개혁이전에 상품-화폐관계는 ‘잔존’하는 것이었다. 즉, 상품-화폐관계는 사회주의 경제의 지배적 요소가 되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유물로서 잔존하는 것이었고 단지 활용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이를 좀 더 살펴보자.

스탈린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에서 쏘련에서 상품-화폐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 근거로는 공업에서 전인민소유인 국유형태와 농업에서 협동조합적 소유라는 서로 다른 소유형태가 존재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생산물의 교환에서 상품-화폐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생산물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집단농장에서 농민들이 개인적 부속지에서 생산하는 사적 생산물이 시장을 통해 거래되는 것도 상품-화폐관계의 하나로 들었다. 이러한 스탈린의 언급은 정확한 것이다.

서로 다른 소유형태의 교류를 위해 상품-화폐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뒤집으면 집단농장의 협동조합적 소유가 공업과 같이 전인민소유로 발전하면 상품-화폐관계가 소멸할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농업이 전인민소유가 아니라 협동조합적 소유인 것은 근본적으로 농업의 생산력이 공업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업에서 생산력 발달이 이루어지고 농업과 공업이 융합하는 단계에 이르면 농업에서도 협동조합적 소유가 공업과 같이 전인민소유로 발전할 것임을 전망할 수 있다.

여기서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물이 상품인가 여부를 보다 엄격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코시킨 개혁은 생산수단과 소비재 가리지 않고 모두 상품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생산수단의 생산―맑스의 ≪자본론≫의 분류에 따르면 I부문―은 상품의 생산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적 생산이 아니라 국유화된 기업의 생산이며 또 화폐를 매개로 거래되지 않고 국유기업에서 국유기업으로 직접 이전되기 때문이다. 또 소비재 생산의 경우 사적 생산이 아니라 국유기업에서 생산한다는 점에서 상품이 아니지만 화폐를 매개로 소비자에게 이전된다는 점에서는 상품이다. 이는 소비재의 경우 한편으로는 상품이 아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모순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불가피한 것이고 화폐가 소멸하는 단계에 이를 때 소비재도 부분적인 상품의 성격을 완전히 탈각할 것이다.

이에 대해 쏘련 교과서인 짜골로프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는 보상관계를 통해 인도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물 전체가 상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18) 이는 코시킨 개혁을 합리화하기 위한 주장이다. 그러나 상품으로서 성격은 보상관계, 즉, 유상교환인가 무상교환인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품생산은 사적 생산자의 생산물이 화폐를 통해 교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유상교환을 상품의 본질적 성격으로 보면 상품생산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상품생산의 반대는 무상교환이 된다. 그러나 이는 부정확한 것이고 상품생산의 반대는 사회적 생산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을 기초로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품-화폐관계에 대한 태도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상품-화폐관계는 ‘잔존’하는 것으로서 ‘활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즉, 상품-화폐관계는 부차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고 사회주의 경제에서 주된 지배적 법칙은 생산의 목적을 규정하는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법칙’과 자원의 분배를 결정하는 ‘균형 있는 발전법칙’이다.

끝으로 가치법칙의 운명에 대해 살펴보자. 트로츠키주의 이데올로그인 정성진 씨는 쏘련에서도 가치법칙이 존재한다는 스탈린의 언급을 근거로 쏘련이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가치법칙은 상품생산 사회에서 존재하는 법칙이다. 사적 생산물인 상품의 교환을 위해서는 상품에 응고된 노동, 즉 가치를 통한 비교를 하지 않고서는 교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품교환의 법칙으로서 가치법칙이 성립하는 것이다. 쏘련에서는 시장이 부분적으로 존재했고 또 화폐도 존재했다. 이는 쏘련이 부분적으로는 상품을 생산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회화된 국유기업의 생산물은 기본적으로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없거나 약한 것이고 또 가치법칙은 경제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나 지배적인 법칙이 아니며 가치법칙의 작용을 국가가 일정하게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격을 조정하거나 교환을 통제하는 것이 그러하다. 가치법칙은 이렇게 사회주의 사회에서 보조적인 법칙으로 활용의 대상이 되다가 농업의 발달과 집단농장의 전인민소유로 전환, 생산력의 발달에 기초하여 상품-화폐관계가 소멸하면 나란히 같이 소멸하는 것이다. 스탈린은 “가치법칙과 마찬가지로 가치는 상품생산의 존재와 관련된 역사적 범주이다. 상품생산의 소멸과 더불어 가치 및 그 형태와 가치법칙 역시 소멸한다”19)고 했는데 이러한 스탈린의 언급은 정확한 것이다. 

 

 

3)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

 

쏘련 붕괴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이자 교훈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이다. 쏘련에서 수정주의가 등장하고 사상과 경제에서 쏘련을 서서히 침몰시켰다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는 2차 대전후 성립했던 사회주의 세계체제를 붕괴시키는 역할을 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의 시초가 된 것은 후르시쵸프에 의한 스탈린 비판이다. 이에 대해 중국이 반발하면서 쏘련과 중국 사이에 사회주의 건설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이러한 논쟁은 중국과 쏘련 국경에서의 무력충돌로까지 비화된다. 이에 대해 중국은 사회주의 진영은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쏘련은 ‘사회제국주의’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사회제국주의라는 개념은 이미 사회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를 내건 제국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인데 이는 쏘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었지만 엄격히 보면 과도한 규정이었다. 쏘련은 수정주의 체제이지만 여전히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혁명과정과 사회주의 건설에서 많은 성과를 냈고 과학적 노선을 견지했지만 말년에 약간 빗나간 듯한 모습을 보인다.

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붕괴하는 또 하나의 사례는 체코에 대한 쏘련의 침공이다. 이 침공이 있은 후 브레즈네프는 ‘주권 제한론’을 주장했다. 사회주의의 길에서 벗어나는 국가는 주권을 제한해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인데 실은 수정주의의 모순의 결과 나타난 체코문제에 대해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권 제한론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민족자결권을 인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민족자결권의 토대 위에서 각 민족의 노동자계급의 자유로운 연대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실체인 것이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위기에 처하고 붕괴함에 따라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진영은 힘을 잃고 결국은 쏘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화로 귀결되었다. 만약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가 붕괴하지 않고 세계 사회주의진영의 단결이 유지되었다면 1970년대 공황으로 인한 제국주의의 위기가 새로운 혁명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나 상황은 거꾸로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로 귀결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의 토대로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사활적인 것임을 말한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살아 있을 때 사회주의운동은 전진하고 사회주의 건설은 순조롭지만 거꾸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붕괴할 때 사회주의 운동과 건설은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다.

 

 

3. 쏘련 사회주의의 성과와 한계

 

1) 쏘련이 이룩한 성과

 

사실 쏘련이 이룩한 성과는 거대한 것이다. 20세기는 쏘련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차근차근 쏘련이 이룩한 성과를 점검해보자.

첫째, 쏘련은 인류 최초로 착취를 폐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다.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현실로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후진적 농업국이었던 러시아가 이룩해낸 성과는 전 세계의 모든 피억압 인민과 민족들을 고무하였다.

둘째, 쏘련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실현하였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단지 구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정책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는 쏘련에서 각 민족들의 평등, 그리고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확립된 후로는 쏘련이 여타 민족과 국가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셋째, 쏘련은 제2차 대전에서 파시즘을 격멸하고 사회주의 세계체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파시즘이라는 인류최대의 적을 소멸시키는데 쏘련의 인민과 군대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었고 이를 통해 쏘련은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위치에까지 도달했다.

넷째, 쏘련은 식민지체제의 붕괴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고 또 세계 각지의 민족해방투쟁들을 지원하였다. 중국 혁명은 반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이라는 점에서 식민지 체제의 붕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는데 쏘련의 지원이 없었다면 중국혁명은 여러모로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쏘련은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약소민족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하였다.

다섯째, 쏘련 내부의 사회주의 건설의 성과로서 무상교육, 무상의료, 실업의 일소, 노후연금, 노동시간의 단축 등 인류에게 19세기와는 다른 사회에서 살 수 있는 현실적 전망을 안겨다 주었다. 유럽에서 사회보장이 실시된 것은 쏘련에서 실시된 사회보장을 흉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쏘련의 한계

 

쏘련의 성과는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주요한 것은 위와 같다. 그러나 쏘련은 성과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한계 또한 보여주었다. 특히 쏘련의 한계는 쏘련이 붕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 그 중요성이 더해졌고 또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운동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다.

쏘련의 한계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라는 사회주의사회의 주요모순을 정확히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30년대 까지만 해도 노동자계급은 명실상부한 사회의 주인이었다. 인민대중들이 사회적으로 존중을 받았고 인민들의 지위와 처지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상승되었다. 그리고 정신노동자도 존중을 받았지만 육체노동자도 평등하게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라는 긴급상황에서 전문가들의 역할이 중시되고 과거 부르주아 인텔리겐챠가 중용되는 상황이 있었다. 그리고 2차 대전 후에는 신속하게 복구하고 재건의 길을 걸었지만 역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문제를 예민하게 포착하지 못하고 스탈린 사후 수정주의가 등장할 토대가 쌓여갔다. 또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대립의 문제를 정확히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의 동력을 정확히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950년대 이후 사회주의 건설은 서서히 질곡에 처하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완전히 정체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 쏘련의 또 하나의 한계는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정확히 처리되지 못한 것이다. 쏘련은 후진농업국을 기초로 사회주의를 건설했기 때문에 대도시를 많이 건설하였다. 그리고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지위와 상태가 많이 상승했지만 여전히 도시노동자에 비해 낙후된 삶을 살았다. 심지어 쏘련에서 어린 학생들의 직업선호도에서 집단농장 농부는 꼴찌를 차지했었다. 이는 앞으로 사회주의 건설에서 농업과 농민, 농촌에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기존에 쏘련에서는 농업의 발전을 농업의 공업화로 파악했었다20). 농업노동이 공업노동의 한 변종으로 전화하는 것이 농업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농업은 결코 공업의 변종이 될 수 없다. 농업은 자체의 본질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데 즉, 자연의 재생산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농업은 식량과 원료만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농업노동을 통하여 논과 밭, 산림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렇게 농업의 발전전망을 정확히 해야 농업과 공업의 융합을 도모할 수 있고 공산주의 사회의 발전을 전망할 수 있다. 그리고 스탈린은 대도시는 불가피하며 엥겔스가 대도시의 소멸을 전망한 것(≪반듀링론≫)은 쏘련에는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쏘련이 농업국을 기초로 사회주의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보이는 대도시는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소멸하면 소멸할 수밖에 없고 대신에 농업과 공업의 융합을 기초로 하는 농공복합체가 사회의 기본단위로 성장할 것이다.

셋째, 상부구조의 면을 보면 쏘련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성립과 그것의 전인민국가로의 변질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숙청에서는 사회주의 법치주의의 훼손을 보여주었다. 이는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이론과 그것의 짝인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의 발전이 일정하게 정체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의 발전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문제와 긴밀히 연동되는 것인데 쏘비에트 체제는 유지되었지만 수정주의가 등장한 이후로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의 발전이 정체되었던 것이다. 이는 국가 소멸의 전망과 관련되는 것인데, 70년의 쏘련의 역사를 경과하고도 국가소멸의 전망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맑스주의는 국가의 소멸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강화를 통해 준비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쏘련의 경험은 이러한 추상적 원칙을 보다 구체화할 것을 요구한다. 국가의 소멸은 국가의 기능 중 계급적 억압에 해당하는 것이 점차 사라지고 사회의 관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국가조직이 아닌 시민사회의 조직으로 이관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성립 후로, 특히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한 후로는 국가의 조직은 점차 축소되고 계급적 억압이라는 역할이 축소됨에 따라 점차로 소멸한다는 것을 현실적 전망으로 얻을 수 있다. 단 제국주의가 존재한다면 이 과정이 장기화될 수 있는 것이다.

 


 

1) 모리스 돕, ≪소련 경제사≫, 형성사, 1989, p. 146.

 

2) 같은 책, p. 215.

3) 같은 책, p. 267.

 

4) 알렉 노브, ≪소련 경제사≫, 창작과 비평사, 1998, p. 192.

 

5) 같은 책, p. 262.

 

6) 마리오 소사, “1930년대 쏘비에트 공화국에서의 계급투쟁(4)”, ≪정세와 노동≫ 제40호, 2008. 11., 노동사회과학연구소, p. 83.

 

7) 알렉 노브, 같은 책, p. 305.

 

8) ≪스탈린 선집≫ 2, 전진출판사, 1990, p. 226.

 

9) 알렉 노브, 같은 책, p. 385.

 

10) 같은 책, p. 379.

 

11) 같은 책, p. 403.

 

12) 이영형, ≪러시아 정치사≫, 엠에드 출판사, 2000, p. 249.

 

13) 알렉 노브, 같은 책, p. 423.

 

14) 보리스 까갈리쯔끼, ≪변화의 변증법≫, 창작과 비평사, 1995, p. 312.

 

15) 같은 책, p. 323.

 

16) 코시킨 개혁에 대한 비판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쟁점들”(문영찬, ≪정세와 노동≫ 제39호, 2008. 10.) 중 p. 70의 요약이다.

 

17) 모택동,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 ≪모택동문집≫ 제7권, 인민출판사(북경), pp. 205-206.

 

18) 짜골로프 감수, ≪정치경제학 교과서≫ II-1, 새길, p. 317.

 

19) J. 스탈린,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 ≪스탈린 선집≫ 2, p. 243.

 

20) 짜골로프 감수, ≪정치경제학 교과서≫ II-2, p.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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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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