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쏘련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위한 시론(始論)*

 

김해인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편집출판위원

 

 

* 이 글은 토니 클리프, 크리스 하먼,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이 주장하고 있는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위한 시론(始論)적 성격의 글이다. 따라서 이 글은, 제목처럼 그들의 핵심적인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일단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들 중, 주로 곁가지에 해당하는 부분들이 먼저 다루어질 것이다. 그것도 아주 일부만이 다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시길, ‘가시’에 찔린 작은 상처가 당신의 생명을 앗아가 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리고 이 글은 ‘끝’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고 있음을 명심하라.

 

 

들어가며

 

1917년 10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1) 이 체제는 인민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끊임없이 성장했으나, 그 전진의 과정은 때때로 오류를 범하기도 했던, 따라서 후퇴를 포함한 과정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체제가 사회주의의 이상이 순결하게 구현된 사회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순수한 사회주의 사회는 공상가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반면 현실의 그 사회는, 존재하는 온갖 난관들을 헤쳐 가야했던, 그러한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한발 한발 전진해야했던 사회였다.

그것의 이름은 ‘쏘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었다! 74년 동안 온갖 난관들을 헤쳐 가며 인민의 힘으로 전진했던 그 사회는 1992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혁명의 시대’라고 불리는 20세기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다! 20세기 쏘련의 성립과 전진은,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 우리 인류가 연주했던, 거대한 전주곡 같은 것이었다. 역사의 발전은 직선이 아니다. 역사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지그재그로 발전한다. 역사의 막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지금 격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인민들로 하여금 역사의 새 행진곡을 연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전진하는 역사의 다음 연주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쏘비에트 인민들의 위대한 경험을 배우는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시행착오들을 겪었고, 어떻게 그러한 현실을 극복해 나갔던가, 그러한 과정들을 배워야 한다. 동시에 그들이 어떤 오류들을 범했는지 정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연주자로서 우리는, 그들보다 한 단계 더 전진할 수 있다.2)

하지만 여기, 이러한 과정 없이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쏘련은 자본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사회가 아니었다. 그 곳에는 여전히 ‘관료’라는 착취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악랄하게 착취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보기에 그 착취계급은 나찌 히틀러보다 더 사악한 존재였다. 동시에 그들은 거기에서 자본주의와 완전히 동일한 원리와 법칙들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회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그리고 그 사회의 인민들은 사회의 모순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갔는지, 전혀 배울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야기한다.

 

… 소련이 사회주의 사회의 실례이거나 또는 적어도 사회주의로 가고 있는 사회라는 … 그들의 생각이 맞다면, 우리는 아예 마르크스주의를 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소련의 성장률 저하와 노동자에 대한 계속되는 억압을 고려해 볼 때, 소련이 사회주의라면 일반 근로 인민대중의 해방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신뢰를 잃을 것이다.3)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던 쏘비에트 인민들의 땀과 열정은 내팽개쳐버리고, 즉 그들의 경험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배울 필요 없이, 반대로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그것의 모든 오류와 시행착오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소련은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로 가고 있는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형태, 즉 국가자본주의이다. 그런데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라는 점을 이해하려면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에 바탕을 두고 소련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련의 사회체제는 서방 사회 체제들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소련은 서방 제국주의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이며 자본주의 열강이다. 그래서 소련도 서방 자본주의 발전의 기본 법칙을 따르고 있다.4)

 

그리고 1947~8년 이래 이미, 그들의 스승 토니 클리프가 이와 같은 사실을 밝혀놓았다. 그들에 따르면, 토니 클리프는 “소련을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라는 관점에서 고발”했으며, 동시에 “바로 그 체제의 근원적 동력을 찾아내어 이를 세계사적 견지에서 규명”했다. 그것이 바로, 소련이 “관료제적 국가자본주의”5)라는 이론이다. 따라서 자칭 ‘국제사회주의자’들, 혹은‘혁명적 맑스주의자’들께서는, 이것으로 무장했기에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한 사건들[쏘련과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과정: 인용자] 때문에 동과 서에서 행세하고 있던 기존의 정치 분석들 대부분은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상황은 혼란스러운 것으로 가다왔다. … 불행하게도 좌익의 대다수는 이러한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6)

 

즉, 그들이 보기에,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는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를 설명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1947~8년 이래로 쏘련을 자본주의로 보아왔던 자신들만은 그러한 혼란을 피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용자]… 언제나 동유럽 사회들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해 왔다. 이러한 관점은, 동유럽 사회들이 서방의 생산양식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생산양식을 체현했다는 ‘상식적’ 편견과 충돌했다. 우리가 좌익 속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이 이론만이 지난 수개월간의 사건들―다른 관점을 통해서 보면 단지 혼란스럽기만 할 뿐인 사건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7)

 

그러한 문제들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토니 클리프가 발전시킨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8)

 

그들에 의하면, 토니 클리프의 이 이론은 다른 쏘련 비판 이론들과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이론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자본주의론의 아버지”는 카우츠키이다. 하지만 카우츠키의 국가자본주의론은 1917년 10월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자본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하고, 소련에서 국가자본주의의 기원을 1917년까지 소급한다는 점에서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 미국의 제임스와 두나예프스카야도 1940~50년대 국가자본주의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캘리니코스에 따르면, 이들의 국가자본주의론은 “국가자본주의를 생산과정 자체에만 전적으로 위치”지웠기 때문에, “왜 소련 관료가 작업장에서 전제주의를 강제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공장관리자 간의 의지의 충돌로 환원되고 말았다. … 이와는 대조적으로 클리프는 군사적 경쟁에 지배되는 국제적 국가체제라는 범세계적 맥락 속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를 위치지움으로써 소련에서 노동자계급이 자본축적의 동학에 예속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또 클리프 이후에 국가자본주의론을 주장하는 주요 논자로는 베틀레임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소련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의 원인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힘에서 찾고, 국가자본주의의 역사가 1928년이 아니라, 1956년 제20차 당대회(혹은 최근에는 아예 1917년 혁명)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점에서, 마오주의적 혹은 카우츠키적 소련 비판의 아류일 뿐이다.(강조는 인용자)9)

 

이와 관련하여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최근에 주장된 것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약 반세기 전인, ‘현존 사회주의’의 극성기라고 할 수 있는 2차 대전 직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0) 히틀러를 패퇴시키고 동유럽 전역에 ‘현존 사회주의’ 체제를 확산시켰던 그 당시 소련을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고 비판하고, 서방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노동자 혁명에 의해 타도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클리프의 혁명적 용기와 예언자적 통찰은 요즈음 ‘사회주의의 몰락’ 정세에 편승하여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각종의 ‘현존 사회주의’ 비판 이론(예컨대 ‘국가사회주의론’ 따위)과는 아예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11)

 

또한 그들에 의하면, 이 이론은 쏘련과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통해 역사적 시험에서 검증된 이론이다.

 

… 클리프가 발전시킨 그 이론―소련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맹목적 낙관주의와 그 체제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1984년≫식 암울한 비관주의 이 모두를 40년 전에 거부할 수 있었던―은 그 때 이후 일어난 일들에 의해 그 타당성이 입증되었다. … 이 책은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 보야 할 마르크스주의 고전이다.12)

 

혁명 이론이 정치적 실천을 지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제 세계의 변화에 맞추어 발전해야만 한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강점은 이 이론이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쏘련과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과정: 인용자]을 해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났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자본주의 발전의 경향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역동적인 이론이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모든 종류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시험을 통과한 셈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분석할 뿐더러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13)

이제 그들은 위대한 스승이 밝혀놓은 길을 따라, 쏘련과 현실사회주의가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었으며, 사실은 자본주의였다는 증거를 더욱 구체적으로 찾아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승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발전시키면 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제4인터내셔널의 만델 등 수많은 뜨로쯔끼주의자들이 그들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반박했다. 지금 한국에서도 정통 뜨로쯔끼주의자들에게 의해서, 또는 맑스-레닌주의자들에게 의해서 그들의 이론은 계속적으로 반박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들은 그들에게 소용없다. 그들에게는 강철 같은 신념이 있다; 쏘련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이다! 이것을 믿을지어다. 이것이 그들의 계명이며, 사도신경이다.

1980년대 초,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내에서 ‘쏘련에서의 임금노동’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피터 빈즈와 마이크 헤인즈는 자신들의 스승의 교리에 따라, 쏘련에서의 임금노동의 존재를 부정했다.14) 하지만 캘리니코스는 이를 반박하며, 쏘련에는 노동시장이 존재하며, 임금노동도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의 스승 토니 클리프가 “트로츠키의 한 사도(使徒)”를 자처하며,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데 대단히 커다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지만,15) 트로츠키가 주장하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는 결국 트로츠키 자신의 말을 통해서도 오류로 드러나며, 이는 그가 쏘련의 국유화라는 “과거의 경험”16)에 사로잡혀, 쏘련이 관료적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며 그를 비판했던 것처럼, 이제 자신도 ‘쏘련에서 임금노동의 부재’를 주장하는 스승 토니 클리프의 논지는 스스로 모순에 있다고 말하며17), ‘쏘련에서 임금 노동이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에게는 어떠한 비판도 소용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쏘련에서 임노동이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쏘련은 언제나 국가자본주의이다!

예언의 핵심은 하나뿐이다; 쏘련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이다! 이것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쏘련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심지어 예언자의 오류도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쏘련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근거로 추가되어, 예언에 대한 믿음은 강화되어 간다. 그들은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의 경험을 배우기 위해 그 사회를 연구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단지,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였다는 국가자본주의론을 더욱더 발전시키기 위해 그 사회를 연구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캘리니코스는 이렇게 말한다.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의 세밀한 구조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킬 틀을 제공하였지만, 그러한 분석 자체는 아직 이루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발전시키려는 빈즈-헤인즈의 시도는 따라서 환영되어야 한다. 비록 그들 자신의 혼동이 그들을 결국 애통스럽게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지만 말이다.18)

 

이제 그들이 “혁명적 용기”와 “예언자적 통찰”19)을 가졌다고 극찬해마지 않는, 그 예언자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들어보자.

 

… 전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은 지금 막중한 임무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이제 스탈린주의에 대해 체계적인 비판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제 1917년의 혁명을 패퇴시킨 반혁명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제 스탈린주의라는 기나긴 어두운 밤에 의해 그 의미가 모호해져 버린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들을 재차 삼차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소비에트 혁명과 스탈린주의 반혁명, 그리고 그 모든 결과들에 대해 대단히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다름 아닌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이 이론으로 무장한다면, 우리는 1917년의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이었고, 이 혁명이 1920년대 후반에 패배 당했으며,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 새로운 지배계급한테 권력을 상실해 버렸다는 사실을 쉽게 설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 노동자 계급 자신의 행동에 의해 이룩될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이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필수불가결한 무기인 것이다.20)

 

예언자께서는 아직 진리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스딸린주의라는 ‘악마’의 꼬임에 빠져있는 한국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교리를 다리로 천국으로 가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교리는 쏘련 사회를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들”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스탈린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제공”하고 있다. “이 이론으로 무장한다면” 우리는 쏘련에 대한 진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은 노동자계급 해방의 “필수불가결한 무기”이다.

이 어마어마한 교리를 ‘스딸린주의’라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불신자의 입으로 어떻게 감히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이 글도 그들에게는 이전의 모든 비판들처럼, 한낱 불신자의 견성(犬聲)으로 들릴 것임에 분명하다; 아직 진리의 세례를 받지 못한 불쌍한 불신자여! 하지만 이 글도, 저들을 비판한 이전의 무수히 많은 글들처럼, 쏘련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려는 이들에게, 그리고 쏘련과 현실사회주의의 경험들로부터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교훈을 배우고자하는 사람들에게, 미력하지만 조금의 도움이 되고자 쓰는 것이다.

 

*             *              *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일단 상당히 방대하다. 그것의 세세한 부분들까지 비판하고자한다면, 아마 그를 비판하는 사람은, 그의 주저 ≪소련국가자본주의≫의 몇 배나 되는 분량의 책을 써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중, 몇 가지만 우선적으로 비판하고자 한다.21)

그들의 이론은 대강 이러한 토대로 구성되어 있다.

 

1) 쏘련의 관료는 지배계급이다.

– 1920년대 후반 스딸린 반혁명을 통해, 관료는 지배계급이 되었다.

– 쏘련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착취에 시달리고 있으며, 지배계급인 관료들은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며 호위호식하고 있다.

– 그리고 ≪소련국가자본주의≫의 대부분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근거들(분배관계, 노동자의 권리 등)로 구성되어 있다.

– 하지만 이것만으로 쏘련을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 ‘관료’라는 지배계급이 다수의 피착취계급을 억압‧착취하는 사회는, ‘관료 노예제’일 수도, 혹은 ‘관료 봉건제’일 수도, 아니면 전혀 새로운 체제22)일 수도 있다. 따라서 노련한 토니 클리프는 이러한 방대한 근거들만으로 쏘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관료의 착취가 자본주의적 축적에 강제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이 외부와의 군사적 경쟁을 통해 강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제 전술한 착취의 근거들은 쏘련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이 강제되고 있다는 예들로 변신하게 된다.

 

2) 군사적 경쟁이 자본주의적 축적을 강제한다.

– 쏘련은 관료들이 지배하는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하나의 공장이기 때문에, 상품 생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 노동력 또한 상품이 아니며, 쏘련에서 임금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 따라서 쏘련을 세계와 분리해서 본다면, 거기에서 가치법칙은 작동하고 있지 않다.

– 하지만 쏘련은 외부와의 군사적 경쟁 속에 있고, 그로 인해 내부에서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동력이 발생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가치법칙이 작동하고, 축적에 소비가 종속되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가 발생한다.

 

3) 쏘련에서 노동시장과 임금노동은 존재한다.

– 1981년 캘리니코스가 새롭게 주장한 내용이다.

– 임금노동이 존재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없다. 국가자본주의에도 임금노동은 존재한다.

– 자유로운 노동시장의 존재를 쏘련에서 임금노동이 존재하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4) 그 외 악의적인 반쏘 선전들

– 쏘련의 대조국 전쟁에 대한 비판들

– 쏘련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들(주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와 쏘련의 관계에 관한 내용)

– 소수민족들을 억압했다는 근거들

 

예언자 토니 클리프와 그들의 사도 크리스 하먼,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이 주장하고 있는 교리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위와 같다. 그럼 이것에 대한 불신자의 견해는 어떠한가?23)

 

 

1. 쏘련의 관료는 지배계급이다.

 

가) 관료의 ‘반혁명’은 어떻게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는가?

 

토니 클리프는,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쏘련이 노동자 국가로부터 자본주의 국가로 이행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29년부터 전개되었던 ‘제1차 5개년 계획’과 1930년대 후반의 ‘모스끄바 재판’이 바로 이 ‘반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먼저 그는 왜 제1차 5개년 계획이 ‘반혁명’이라고 주장하는가?

 

… 처음에는 하나의 왜곡으로 나타났던 관료 도당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부르주아지의 과제를 수행하는 계급으로 자신을 점진적으로 전화시킨다. 1928년까지 계속되었던 대중의 통제로부터 관료의 점진적‧진화적 절연은 제1차 5개년계획과 함께 혁명적인 질적 변화의 단계에 도달했다.(강조는 인용자)24)

 

5개년계획이 왜 그러한 전환점이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관료층이 프로레타리아트를 창출하면서 급속히 자본을 축적하고자 했던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달리 말하면, 관료층이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을 가급적 신속하게 실현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이 이때였던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 안 되고, 생산 수준이 낮은 상태에서 자본을 신속하게 축적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소비, 그들은 생활수준에 견디기 어려운 압력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사정 하에서 자본의 화신으로 전화되어 오로지 자본축적만을 지상의 목적으로 삼게 된 관료층은 노동자 통제의 모든 잔재들을 제거하고, 노동 과정에서 확신을 강제로 대체시키고, 노동자 계급을 원자화하고, 모든 사회‧정치적 생활을 전제주의 틀에 두들겨 맞춰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축적 과정에 필요한 존재가 되는 그리고 노동자들의 억압자가 된 관료층이 분배관계에서 그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생산관계에서의 그들의 사회적 우월을 지체 없이 이용할 것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포위 상태에 있는 후진국의 공업화와 농업에서의 기술 혁명(집단화)은 관료층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직‧간접적인 압력과 통제 하에 있는 한 계층으로부터 지배계급으로, 다시 말해 ‘사회의 일반적 관심사, 즉 노동 감독‧국사‧사법‧과학‧예술 등등’의 관리자로 탈바꿈시킨다.

모순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변증법적 역사 발전은, 관료층이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을 서둘러 해 내겠다는 주관적 의도를 가지고 내디딘 첫걸음이 국가자본주의 건설의 토대가 되는 역설적 현상을 가져왔다.(강조는 인용자)25)

 

그런데 “관료층이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을 가급적 신속하게 실현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이 이때였던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 안 되고, 생산 수준이 낮은 상태에서 자본을 신속하게 축적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소비, 그들은 생활수준에 견디기 어려운 압력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그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레닌의 말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레닌은 후진국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발전시키지 못했던 부르주아지의 과제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는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이 완수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을 레닌은 다음의 두 요건으로 요약했다: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 증대와 노동의 사회화.26)

 

이것은 토니 클리프가 일국에서 사회주의는 결코 건설될 수 없으며,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의 혁명 없이는 쏘련은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청출어람’이라, 토니 클리프 선생은 그의 스승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쏘련의 어떠한 발전도 필연적으로 그의 후진성 때문에 국가자본주의로 변질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이 장(1. 쏘련의 관료는 지배계급이다.)의 말미에서 다시 살펴볼 기회가 있을 테니 이쯤에서 넘어가자.

그런데 그는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남는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국가론과 모순되지 않는가?

형식논리의 관점에서 볼 때,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자 국가로 점진적으로 전화시킬 수 없으며 국가기구를 분쇄해야만 한다면, 지배계급이 된 관료 역시 노동자 국가를 부르주아 국가로 점진적으로 전화시킬 수 없으며 국가기구를 분쇄해야만 한다는 점은 논박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27)

 

그는 잠시 고민에 빠지지만, 곧 영국처럼 아직 군국주의가 들어서지 않았고, 완전한 관료제도 없는 나라에서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인 이행이 가능하다는 맑스의 말을 언급하면서, 스탈린 ‘반혁명’이 어떻게 평화적으로 이행될 수 있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28)

 

노동자의 평화적인 권력 접근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관료와 상비군이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는 관료도 상비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이러한 제도들이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 국가로부터 그것들이 존재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평화적인 이행이 이루어 질 수 있다. …

관료 없는 국가, 혹은 대중의 압력에 의존하는 미약한 관료를 가진 국가는 노동자들의 통제로부터 관료가 자유로운 국가로 점진적으로 전화될 수 있다.29)

 

또 다시 모순되는 문장이다. 앞서 클리프는 관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처음에는 하나의 왜곡으로 나타났던 관료 도당 … 1928년까지 계속되었던 대중의 통제로부터 관료의 점진적‧진화적 절연은 제1차 5개년계획과 함께 혁명적인 질적 변화의 단계에 도달했다.(강조는 인용자)30)

 

앞서서는 “대중의 통제로부터” “관료 도당”들이 “점진적‧진화적”으로 “절연”했다고 주장하더니, 이제 ‘반혁명’이 어떻게 저항 없이, 소리 소문도 없이 진행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관료 없는 국가, 혹은 대중의 압력에 의존하는 미약한 관료”를 이야기한다.

이런 자가당착에 빠진 클리프와 달리 레닌은 짜르 시대의 유제로 남아 있는, “관료주의의 해악”을 경고하고, 그것과 장기간에 걸친 투쟁이 필요함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31) 스딸린 또한 그러한 인식 하에서 사업을 진행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당 내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된 ‘숙청’이었다(이에 대해서도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그는 쏘련에서 관료주의의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왜 존재했으며, 그리고 당시 당은 이를 어떻게 해결해나갔는가를 고민하기 전에, 간단하고 전지전능한 해답을 내 놓는다; 쏘련에서 관료는 없거나 대중의 압력에 의존하는 미약한 존재였다가, 반혁명으로 국가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이 되었다.

더 나아가 ‘상비군’에 대한 그의 주장은 더 가관이다.

 

… 만약 민병대의 장교가 병사들의 의지에 점점 덜 종속된다면(그들이 그 어떠한 제도적 관료와도 대립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볼 때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민병대 장교가 병사들과는 독립적인 장교 신분으로 전화하는 것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 민병대로부터 상비군으로 이행하는 것은, 그것이 민병대 내부 경향의 결과인 한, 점진적일 수 있으며 또 점진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32)

 

먼저 관료는 “대중의 압력에 의존하는 미약한 관료”가 점진적으로 전화 가능한데, 장교는 “병사들의 의지에 점점 덜 종속된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사소한 것으로 넘기자; 클리프가 말한 “대중의 통제로부터” “점진적‧진화적”으로 “절연”했던 “관료 도당”이 바로 “장교”였나 보다! 그럼 ‘관료’는?

그런데 상비군에 대한 클리프의 언급 역시,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을 뿐더러, 다른 곳에서 한 자신의 말들과 완전히 모순된다.

쏘련이 전차‧장갑차‧전투기 등으로 기계화된 상비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파쇼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야욕이 본격화된 1930년대였으나, 상비군이 도입된 것은 이미 그보다 훨씬 전인 ‘내전기’였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소규모 자원병으로 이루어진 민병대를 ‘적위대(赤衛隊)’로 변모시킨 사람이, 당시 군사인민위원이자 클리프의 스승이기도 한 ‘트로츠키’였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따라서 그는 앞의 말들과는 모순되게, 이렇게 말한다.

 

… 그러나 진정한 군대의 민주화, 즉 민병대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볼셰비키의 희망은 객관적 현실의 장애물 위에서 재난에 부딪혔다.

10월 혁명 후 초기에, 혁명적 무장력은 소그룹의 자원자로 구성되었다. … 강력한 외국 열강으로부터 지원받는 백군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볼셰비키는 자원제 원칙 대신 징병제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휘관들의 경험 부족 때문에 이전의 짜르군대 장교들을 수만 명이나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군사령관을 뽑는 데서 선거원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 인민 민병대를 도입하려는 어떤 계획도 객관적 현실―러시아의 후진적인 생산력, 인민의 낮은 문화 수준, 프롤레타리아트가 인구의 소수라는 사실―에 의해 가로 막혔다.(강조는 인용자)33)

 

그리고 나중에 좌익반대파가 되는 스밀가의 말을 인용해서 다시 한 번 그것의 불가피함을 이야기한다.

 

이전에 임명된 모든 장교들을 사병들에 의해 선출된 장교들로 대체한다는 기존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볼셰비키는 과거 짜르의 장교들을 임명하는 것이 불가피함으로 느꼈다. 경험 있는 지휘관들 없이 백군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만약 선택권이 병사들에게 맡겨진다면, 그들은 구 짜르 장교들을 선출하지 않았을 것이다.34)

 

이것이 클리프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상비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다음의 말들 역시 자신의 말들과 완전히 모순된다. 클리프에 의하면, 그 군대는 관료적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정치인민위원을 한편으로 하고 군대내 당 집단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 사이에 투쟁이 있었다. 이 충돌은 중앙집권적 경향과 분권주의적 경향 사이의 또 다른 충돌과 맥을 같이 했다. 이러한 두 가지 투쟁에서 정치인민위원들은 당 집단들에 대해 승리했고, 중앙파는 게릴라파적 경향을 눌렀다. 이러한 두 가지 투쟁이 맥을 같이 하게 된 것은 군대에서 관료적 경향의 강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강조는 인용자)35)

 

그런데 여기서는 도를 더해, 관료적 경향의 강화를 군대의 분권주의적 경향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잡고 있다. 그것도 엄혹한 내전기에 구짜르의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에 대한 당 정치인민위원들의 투쟁을. 아차! 그런데 그가 잊은 것이 있다. 그 때의 군사인민위원은 자신의 스승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직권 남용에도 불구하고, 전군대에 세포를 가지고 있던 볼셰비키당의 존재는, 일반 병사들의 혁명적 열정과 자기희생, 그리고 그 지도자 트로츠키의 존재와 더불어 내전 기간 중에 적군이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확고히 유지할 수 있게 했다.(강조는 인용자)36)

 

역시 트로츠키라면 능히 장교들의 직권 남용에도 불구하고, 적군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확고히 유지할 수 있지.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는 또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1923년에 관료층의 부분적 승리로, 군대에 대한 거만하고 전횡적인 태도는 장교들 사이에서 예외라기보다는 규칙이 되었다. …37)

 

선생, 내전이 끝났다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트로츠키는 1925년 1월 15일까지 군사인민위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군의 많은 부분에 트로츠키파들이 포진해 있었다(이는 1930년에도 큰 문제가 된다). 그런데 클리프에 의하면, “관료층의 부분적 승리”로 “거만하고 전횡적인 태도”가 “규칙이 되었”다. 큰 실수! 게다가 그는 1920년대 후반 이전 쏘련에서의 상비군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는 기억이나 하고 있으신가?

군대 문제가 나왔으니 끝으로 하나 더! 클리프는 처음에는 쏘련은 “상비군도 가지고 있지 않다 … 민병대의 장교가 병사들의 의지에 점점 덜 종속 …” 운운하다가, 다음에는 “직권”을 “남용”하고, “거만하고 전횡적인 태도”가 “장교들 사이에서 예외라기보다는 규칙이 되었”다고 하더니, 이제는 적군 지위관 볼렌베르크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 병사들은 군검찰관실에 자신들의 장교에 대해 불평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실제로 그랬다. 1925년 매달 1,892건, 1926년에는 매달 1,923건, 1927년에는 매달 2,082건의 불평이 평균적으로 있었다. 1931~33년까지 장교와 사병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가 있었다.”38)

 

30년대 초까지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였다. 그런데 그는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그것은 다음의 문장을 위해서이다.

 

역사상 쏘련 장교들보다 더 막강한 징계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군대가 과연 있었을까? 1940년 10월 12일 제정된 법규는…불복종의 경우에 지휘관은 폭력과 화기 사용을 포함하는 모든 강제조치를 취할 권리 …39)

 

나찌 침공이 임박한 초미지급(焦眉之急)의 시기의 ‘전시군사법규’를 통해, 스딸린주의의 억압적 성격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자연스럽고 편안”했던 군대가 스딸린으로 인해, “역사상” 가장 억압적인 군대가 되었다!

다음으로 스딸린의 ‘반혁명’이었다는 ‘모스끄바 재판’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모스크바 재판은 대중에 대한 관료의 내전이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는 한 편만이 무장하고 조직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재판은 인민의 통제로부터 관료의 전면적 해방의 완성이었다.40)

 

역사적 사실만으로 봐도, ‘모스끄바 재판’이 “대중”에 대한 내전일 수가 있는가? 재판에 기소되었던 사람들 다수는 당 고위 관료이거나, 군 수뇌부가 아니었는가? 대충이라도 이야기가 되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포괄하고 있는, 악명 높은 1930년대 ‘숙청’을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클리프가 생각하는 것은, 모스끄바 재판의 결과로 대중들이 공포에 떨며 스딸린 관료에 복종하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하지만 당시 모스끄바의 공개재판은 인민들의 지지 속에 열렸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기만 당한 인민들’이 있어야, 당신들이 주장하는 바, 그것이 ‘조작 정치’, ‘조작 정치’, ‘선동 정치’였다는 말이 맞지 않는가?41)

 

 

나) 관료가 생산 수단을 사적 소유로 변화시키지 않는 이유

 

아무튼 클리프의 말에 의하면, 살펴본 대로 쏘련의 스딸린주의적 관료들은 ‘평화적인’ 반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이 되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왜 관료는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우리의 예언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쏘련에서 생산수단의 압도적 다수는 국가의 수중에 있다. …

왜 그와 같은 사적인 청구권 형태를 대규모로 도입하는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가? …

그러나 소련의 관료는 점진적으로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전화시켰기 때문에, 생산관계의 변화는 법의 완전한 변화로 즉각 표현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그 중 주요한 것은 스탈린주의 외교 정책이 전 세계 노동자들 사이에 사이비 혁명적 선전을 해야 될 필요―때문에 소련 관료는 반혁명이 일어났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관료 전 구성원이 안전한 경제적 지위를 그의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경제 전체를 포괄하는 증권이나 주식의 형태로 사유재산을 복귀시키는 짓을 왜 하지 않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다른 요인들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계급이나 카스트 또는 사회 계층의 욕망은 자기 생활의 물질적 제조건에 의해 주조된다. 각 계급은 생산과정에서 자신의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소유계급은 사회적 부에 대한 상이한 요새를 갖고 있다. …

봉건 영주는 그와 그의 자식의 영지 범위를 넓히기 위해 노력 … 상인은 자기 자식들에게 보다 많은 돈을 물려줌으로써 … 물리학자, 법률가 그리고 다른 자유 전문직종의 구성원은 자식들에게 ‘정신적 생산수단’―교육―을 줌으로써 …

만약 기업의 경영자, 정부 부서의 우두머리 등등을 뽀는 지배적인 방식이 호선이라면, 모든 관료는 그의 자식에게 백만 루블을 상속하기 보다는(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연줄’(connection)을 물려주려고 애쓸 것이다. 동시에 그는 대중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것을 제한하여 관료 자리를 둘러싼 경쟁자의 수를 제한하려고 명백히 노력할 것이다.(강조는 인용자)42)

 

 관료는 “점진적으로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전화시켰기 때문에, 생산관계의 변화는 법의 완전한 변화로 즉각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것 대로이고, 두 번째, “주요한 것은 스탈린주의 외교 정책이 전 세계 노동자들 사이에 사이비 혁명적 선전을 해야 될 필요” 때문이라는 말은, 스탈린이 사이비이기 때문에 생산 수단의 국유화만은 지키고 있다는 것인데, 누가 사이비인지는 비판이 거듭될수록 찬찬히 드러나지 않을까한다.

남는 것은 “계급이나 카스트 또는 사회 계층의 욕망은 자기 생활의 물질적 제조건에 의해 주조된다. 각 계급은 생산과정에서 자신의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소유계급은 사회적 부에 대한 상이한 요새를 갖고 있다.” 따라서 ‘연줄’과 ‘자리’에 그들의 요새를 가지고 있는 관료는, 생산수단보다는 그것들을 상속시키려 한다는 클리프의 기괴한 논리이다.

그런데 만약 클리프의 말처럼 쏘련에서 관료가 자본가라면, 그는 왜 ‘연줄’과 ‘자리’를 가지려고 하고, 또 그것을 자식에게 상속하려고 하는가? 그의 말처럼 관료가 자본가이고 쏘련이 자본주의라면, 그것은 다 ‘자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탈린주의 체제의 국가자본주의적 본질을 인정한다면, 그 체제의 운동법칙―세계 자본주의의 압력이 지시하는 바의 자본축적―뿐만 아니라 그 역할의 역사적 한계도 인정하는 것이다. 일단 자본이 축적되고 노동자 계급이 대규모로 되면 관료층은 자기의 발밑에서 지반을 침식당하게 된다.43)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극한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국가자본주의가 전통적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임은 틀림없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신의 기초 위에서 자본주의의 부정이다. …44)

 

생산 수단과 노동자 계급이 대규모로 집중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는 클리프의 생각대로라면,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이며, 관료들의 착취가 계속 될수록, 더욱더 대규모로 결집한 “노동자 계급”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그들의 권력은 무너지고, 그것은 “노동자국가”, “사회주의”로 전화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그가 ≪소련국가자본주의≫의 “5장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에서 여러 차례 분석하고 있는 바이다. 그는 여기서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라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다음 절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왜 쏘련의 관료는 이렇게 위험한 상황을 자초하고 있는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쉬운 길을 두고, ‘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연줄’이라는 괴이한 우회로를 이용하면서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클리프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전통적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이 각자가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장해 준다.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사회의식, 사회적 이익의 보호, 사람들 간의 조화로운 관계 등이 효율성을 위한 바탕이 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관료는 소련 사회에 만연해 있는 조화로운 인간관계의 결여, 계급들과 개인들 사이의 적대감, 무제한의 이기심 등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따라서 소련에는 계획화된 사회주의 경제(즉, 생산자들 자신을 위한 생산자들의 통제)의 동기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의 효율성이 보장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사적 자본주의 아래서는 개별 기업의 효율성과 기업 경영자의 소득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존재하는 반면 소련에서는 이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효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관료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 개별 관료들에 대한 직접적인 테러이다.45)

 

클리프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는 “정통적 자본주의”에서조차 “최대한” 보장해주고 있는 “효율성”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효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관료들 자신이 “직접적인 테러”를 당해야 한다. 이것이 이 사회의 효율성을 보장해주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이렇게 자신들에게도 끔찍한 체제를 그들은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클리프 선생이 지나가면서 흘린 “생산관계의 변화와 법의 변화 사이에는 항상 시간지체가 존재”46)한다는 지상명령적 명제가 “관료가 생산 수단을 사적 소유로 변화시키지 않는 이유”의 핵심인가?

만약 그렇다면, 쏘련의 법과 소유 관계는 1920년대 후반부터 60년이 넘는 세월을 지체하다 1990년대 초반 드디어 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이 된다. 눈물겨운 이산의 아픔이다!

그런데 클리프가 말하고 있는 ‘연줄’이라는 것 자체도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어느 사회나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 친분이라는 것이 작용하겠으나, 그가 여기서 ‘연줄’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이용해서 어떤 목적을 이루겠다는 ‘친분’보다는 더 강한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된다. 분명 자본주의의 모반이 남아 있는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 또한 잘 처리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의 예를 우리는 가까운 ‘조선’에서 찾을 수 있다.

보통 이러한 것은 경험상, 동창‧동향‧친인척 등의 관계에서 많이 생겨난다. 따라서 조선의 ‘10대 생활원칙’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생활 규범’을 통해, 조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에는 본관이 없고, 향우회나 종친회, 동창회 등이 없다.47)

클리프에 의하면,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모두 사회주의가 아니고, 조선 역시 악독한 스딸린주의 국가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런데 이 스딸린주의 사회는 그가 말한 ‘연줄’을 나름대로 문제로 인식하고 관리하려고 한다. 이를 어쩌나! 끝으로 선생께서는 쏘련에서의 불평등한 교육 문제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음 기회에 독립된 절에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다)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

 

또 하나의 괴이한 이론을 보자. 이제 우리의 예언자께서는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논하신다. 이것을 논하는 이유는 쏘련이 노동자국가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국가자본주의의 일종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는 이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

 

자본의 집적이 한 자본가나 자본가들의 집합 또는 국가가 국민총자본을 자기 수중에 집적하는 단계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세계시장에서 경쟁이 지속되는 한 그와 같은 경제도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는 아무도 없었다. 동시에 모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이미 오래 전에 자본의 집적이 그와 같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적대가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가져오든지, 아니면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적대가 그들을 파괴적 제국주의 전쟁 속으로 몰아넣어 사회가 총체적으로 쇠퇴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자본주의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적 자본주의가 진화적 발전을 통해서 실제로 사회의 모든 자본이 하나의 손에 집적되는 상황까지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48)

 

그는 국가자본주의와 쏘련을 동의어로 보기 때문에, 여기서 주요하게 읽어야 할 것은 “세계시장에서 경쟁이 지속되는 한 그와 같은 경제도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 운운하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의 핵심이다. 이것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 기회에 전개할 것이다.

아무튼 그는 “국가자본주의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적 자본주의의 진화적 발전을 통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쏘련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것이 가능했다.

 

소유자 자신들 간의 모순, 국가가 자본주의적 소유의 보편적 집적소로 됨으로써, 국가가 너무나도 유혹적인 사회혁명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전통적인 사적 자본주의가 100% 국가자본주의에 도달할 때까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왜 전혀 그럴 듯하지 않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들 두 요인이, 집권한 노동자 계급이 타도되고 난 후에 전통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주의 부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수단을 하나의 기구에 이미 집적시켰기 때문에 첫 번째 요인을 제거했다. 두 번째 요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에 의한 노동자 억압과 착취는 국가를 ‘사회혁명의 … 유혹적인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 …(강조는 인용자)49)

 

그래서 “집권한 노동자계급이 타도되고 난 후에” 생긴, 쏘련에서의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는 생산수단의 국유라는 소유형태에서 동일하며, 다음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극한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국가자본주의가 전통적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임은 틀림없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신의 기초 위에서 자본주의의 부정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 국가가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가장 낮은 단계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노동자 국가는 반드시 국가자본주의와 많은 공통적인 양상을 갖게 된다. 그들을 범주로 구분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차이이다. …50)

 

 즉, 소유형태에 현혹되어 보면 비슷하지만, 사실 쏘련과 노동자국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차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국가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의 고용주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임금노동이 부분적으로 부정 …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는 하나의 집합체로서 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멈췄다는 점에서 임금노동이 부분적으로 부정 … 국가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에 의한 노동자 계급의 극단적인 예속을 의미 … 노동자 국가는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가의 억압을 의미 …51)

 

여기서 클리프 선생은 두 가지 잔꾀를 부려, 집권 노동자 계급이 타도되고, 그 자리에 국가자본주의주의가 부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첫 번째 논리는 이렇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수단을 하나의 기구에 이미 집적시켰기 때문에”, “소유자 자신들 간의 모순”은 제거되었다. 그래서 이제 반혁명은 언제든 가능하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수단을 하나의 기구에 집적시킨” 것이 바로, 클리프 선생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위대한 10월 혁명이다. 즉, 혁명이 이미 “소유자 자신들 간의 모순”을 제거했으므로, 이제 반혁명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논리적으로는 당연히 혁명이 있어야, 그것을 꺼꾸러뜨릴 반혁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의 반혁명은 “소유자 자신들 간의 모순”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아니라, 전(前)소유자와 현재의 소유자 간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 되어 발생한다. 그 전(前)소유자를 대표하는 것이, 외세든 현소유자내부의 반동파이든, 만약 그 혁명이 사회의 생산관계를 변혁시켰던 ‘사회적 혁명’이라면, 반혁명은 전(前)소유자의 생산관계가 지배하는 사회로 다시 돌아감을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혁명을 막기 위해, 현재의 생산관계를 더욱 강화‧발전시키며, 전사회의 경제적‧정신적 유제를 정리해나가고, 다시 이 사회의 주인이 되고자 온갖 수를 부리는 전(前) 사회의 지배계급들(내부든, 외세든, 그러한 경향이든)과 끊임없이 대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더 어려운 과제에 부딪히고 말았다. 우리는 예언자께서는, 혁명으로 “소유자 자신들 간의 모순”을 제거했으므로, 반혁명은 가능하다고 주장하신다. 즉, 우리가 혁명으로 ‘소유자 자신들 간의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영구 반혁명’에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두 번째 잔재주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에 의한 노동자 억압과 착취는 국가를 사회혁명의 유혹적인 대상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이것도 당연히 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현실이다. “국가가 자본주의적 소유의 보편적 집적소로 됨으로써, 국가가 너무나도 유혹적인 사회혁명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말한 바는 무엇인가?

이것은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전화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유혹’은 고정되고 불변된 개념이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실체이다. 그것은 사회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노동자계급이 사회를 바꾸지 않을 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유혹’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억압과 착취”는 “사회혁명”을 강제한다는 그 ‘유혹’이 아니라, 엥겔스가 ≪반뒤링론≫에서 밝힌 것처럼, ‘이미 대규모로 사회화된 생산관계와 한줌 자본가에 생산수단의 독점된 사적 소유와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생산력들 자체는” 이제 이 “모순을 지양하라고, 자신을 자본으로서의 성질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사회적 생산력으로서의 자신의 성격을 실제로 승인하라고 더욱 강력하게 독촉”52)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독촉에 노동자 계급이 필연적으로 강제되고, 응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엥겔스는 그 과정을 이렇게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 힘차게 성장하는 생산력들이 자신의 자본으로서의 성질에 이처럼 저항하고 자신의 사회적 본성을 승인하라고 이처럼 더욱 강력하게 강요함에 따라 점점 더 자본가 계급 자신은, 자본 관계 내에서 대체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이 생산력들을 사회적 생산력들로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대량적 생산 수단의 사회화 형태를 촉진한다. … 예컨대 철도처럼 애초부터 그 규모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이와 다른 어떠한 자본주의적 이용 형태도 취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이 형태도 더 이상 충분하지 못하게 된다; … 트러스트 … 훨씬 더 집적된 사회화를 재촉; 산업 부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주식회사로 전화하여, 국내에서의 경쟁은 이 회사의 국내에서의 독점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다.

트러스트에서는 자유 경쟁이 독점으로 전도되고, 자본주의적 사회의 무계획적 생산이 닥쳐오는 사회주의적 사회의 계획적 생산 앞에 항복한다. 물론 우선은 여전히 자본가들을 위해서이다. … 착취가 손에 잡힐 듯 너무나 분명해서, 와해될 수밖에 없다.

이렇든 저렇든, 트러스트가 있건 없건,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적 대표자인 국가가 생산에 대한 지휘를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국가 소유로 전화시켜야 할 필요성은 우선 먼저 대규모의 교류 시설에서 나타난다: 우편, 전신, 철도.

… 그러나 주식 회사로의 전화도, 트러스트로의 전화도, 국가소유로의 전화도, 생산력의 자본으로서의 성질을 지양하지 못한다. … 현대 국가가 생산력들을 더 많이 자기의 소유로 떠맡으면 떠맡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현실적 총자본가로 되며, 국민들을 더욱더 착취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노동자로, 프롤레타리아로 남는다. 자본 관계는 폐기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정점에서 그 자본 관계는 전도된다. 생산력들의 국가 소유가 충돌의 해결책은 아니지만, 해결의 형식적 수단, 해결의 칼자루는 그 안에 숨겨져 있다.

이 해결은 … 어떠한 지휘에 비해도 웃자란 생산력을 사회가 공공연하고도 솔직하게 점유 회득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강조는 인용자)53)

 

레닌은 같은 의미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회주의란 국가자본주의적 독점으로부터 한걸음을 내딛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란 전체 인민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국가자본주의적 독점이며, 그런 한에서 더 이상 자본주의적 독점이기를 중단한 국가자본주의적 독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중간의 길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로 전진하지 않고서는 독점체들(전쟁은 독점체의 수와 역할과 중요성을 열 배나 증대시켰다)로부터 전진해 나아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객관적인 발전과정이다.(강조는 인용자)54)

 

그런데 만약 쏘련에서 그러한 반혁명이 실재했다면, 그리고 이 형이상학자의 말처럼, 그것이 “사회주의로의 이행기”55)인 국가자본주의로의 반혁명이었다면, 쏘련의 노동자들은 그 “정점으로 치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에 의한” 가혹한 “억압과 착취”를 견디고, 가슴에서 일어나는 “사회혁명”에 대한 모든 “유혹”을 참아내며, 60년 이상을 지낸 것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역사의 법칙성에 대한 엥겔스의 말은 허공의 공문구로 날아가 버린다.56)

그런데 우리는 이 글을 이제 시작했고, 그는 아직 할 말이 많다. 일단 논의의 전개를 위해, 그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자.

 

국가자본주의 하에서든 노동자국가 하에서든, 국가는 생산수단의 집적소이다. 그 두 체제 간의 차이는 소유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트로츠키가 소련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서 그 근거로 사용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는 적절한 준거가 되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은 준거로서 사용될 수 없다.(강조는 인용자)57)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비판한 구절이다. 모든 맑스주의자들은 토대의 규정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규정성 속에서 상부구조가 토대에 영향을 미치며, 상부구조 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물며 사회구성체를 규정하는 것이 생산수단의 소유형태에 있지 않다는 것은, 도대체 자칭 맑스주의자라고 하지 않으면, 모를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처음에는 토니 클리프가 ‘아직 생산수단의 소유관계가 확립되지 않은, 혹은 소유관계의 확립 방향이 결정되지 않은 짧은 이행기의 사회구성체’를 제외한다면58), 쏘련 사회를 제외한 어떤 사회에도 대해서도 이런 방식으로 관찰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앞서 그가 말한 대로 쏘련을 이렇게 관찰하지 않으면, 그것은 노동자 국가와 너무도 유사한 것이 많아 쏘련을 자본주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논지의 전개를 시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속은 이유는, 그가 세계적으로 맑스주의자이자 혁명가로 알려진 사람이었다는 점, 그를 예언자로 받드는 사람들도 자신들을 모두 맑스주의자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 세계적으로 유명한 맑스주의 정치학 교수부터, 국내에도 유명하신 맑스주의 경제학 교수님께서도 그를 “예언자”로 칭송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였다. 명불허전(名不虛傳)에 속은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허전(虛傳)된 것임에 분명하다! 그는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 국가 간의 차이를 넘어, 자본주의 일반과 노동자 국가를 구별할 때도,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충격적 발언을 들어보자.

 

노동자 국가의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는 공통된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불가피하게 노동자 국가―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과도[이행] 단계―는 그것이 딛고 일어선 사회의 특징들 중 일부와 미래 사회의 핵심들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적대적 요소들은 이행기에 함께 매여 있으며, 과거는 미래에 종속되어 있다. 분업, 일차적으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는 노동자 국가와 자본주의에 공통적이다. 양자를 서로 구별 짓는 특징은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의 유무이다. … [이후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에 대한 설명들이 계속 된다: 인용자, 강조는 인용자]”59)

 

그는 “노동자 국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를 말하고 있다.60) 그런데 맑스는 분명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19세기 후반 이래, 보통 ‘사회주의’라고 부른다)와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 모두를 “생산 수단을 공유 재산으로 하는 것에 기초를 둔 조합적 사회”라고 부르고 있다. 다만 그 차이는 클리프 선생께서도 잘 설명하고 있는 바대로,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는 “자기 자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이며, “그 모태인 낡은 사회의 모반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아직도 들러붙어 있는 공산주의 사회”61)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와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의해, “근본적이고 본질적”62)으로 구분된다.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 국가 사이에서 헤매기 시작한 우리의 예언자께서는 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에서 헤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일단 다 접어두자. 왜냐하면, 이 전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런 논의도 전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예언자께서 내려주신 신약(新約)의 길―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유무―을 따라가 보자.

앞을 조심하시라! 우리의 예언자가 땅(현실)으로 내려오셨다. 이제부터는 그의 사기꾼 기질이 발휘될 차례이다.

 

 

라) 쏘련의 노동조합

 

그는 첫 문장부터 이렇게 사기를 치신다.

 

레닌과 트로츠키 하에서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국가로부터 조차도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강조는 인용자)63)

 

한 문장에서 그는 두 개의 사기를 치고 있다.64) 첫째, 그의 이 말은 이런 뜻을 담고 있다; 레닌이 지도자로 있던 시기(트로츠키도 함께)에는 쏘련은 ‘노동자 국가’였다. 하지만 스딸린이 지도자로 있던 시기는 억압과 착취의 국가자본주의였다. 이것은 그가 평생을 먹고 살아온 사기 ‘밑천’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둘째, 그는 1920년대 초반, 당과 노조, 그리고 국가기구들을 뜨겁게 달구었던, ‘노동조합논쟁’을 모른다 말인가? 그는 “트로츠키의 사도”를 자처하고 있기에, 그것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서 뜨로쯔끼는 레닌에 대립해서 “노동조합의 국가기구화, 군사화”를 주장했고, 레닌으로부터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이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는 노동조합에 관한 절의 첫 문장에서, 레닌의 오른쪽 자리에 스승을 슬그머니 끼워 넣고 있다.65)

계속해서 그는 말한다.

 

‘노동조합’은 임금 결정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1947년 2월에 소위 단체협약이 다시 체결되었지만, 스탈린주의 지도자들은 이 새로운 협약이 다른 나라들에서 흔히 단체협약이라고 불리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임금 문제는 그 협약에 포함되지 않으므로―는 점을 아주 명확히 했다. …

임금에 관한 그 어떤 교섭도 배제하는 단체협약(임금교섭은 결국 그 같은 어떤 협약에서도 반드시 노동자들의 주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즉 협약의 주된 쟁점들에 관하여 정부가 결정적인 발언권을 갖도록 허락하는 절차를 통해 도달되는 단체협약이란 관료적 형식주의와 속임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66)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의 세 문장으로 요약된다; 단체협약을 맺었다. 임금 문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관료적 형식주의와 속임수이다.

클리프 선생은 자본주의와 노동자 국가가 땅(현실)에서도 여전히 헷갈리나 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조합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끊임없이 적대하고 있으며, 자본가계급의 개별자본가들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으므로, 개별 자본가들은 여기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더 낮추고, 노동자들의 노동시간과 강도를 더 늘리고 높이려고 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면, 그들은 언제나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에 시달릴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단결했고, 그 단결된 힘으로 자신들의 임금과 근로조건들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 국가에서는 국가와 노동자가 적대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클리프가 문제로 삼고 있는 임금에 관해서 말하자면, 국가와 노동자 사이에 전혀 적대적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NEP시기까지는 쏘련에 사적자본가 존재했기 때문에 일정한 대립이 존재했고, 이에 따라 임금에 관한 부분이 단체협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논하고 있는 쏘련사회는 사적 자본가가 사라지고, 이미 사회적 생산이 확립된 사회이다. 노동자와 국가가 임금에 관련해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노동자 임금이 실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56년의 경우, 쏘련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1913년과 비교해서 3.4배 상승했다. 실업의 근절을 고려하면 그 차는 3.7배가 되고, 노동시간의 축소를 추가로 계산하면 4.8배가 된다. 1956년 현재와 혁명전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혁명전에는 주택비와 공공시설비가 노동자 가계 예산의 20% 이상, 대다수의 경우에는 임금의 1/3이나 되었으나, 지금에는 그것이 5~6배 감소되었다. 1956년 현재, 쏘련 노동자들은 임금 외에, 국가로부터 사회 보험 지불금, 각종 보조금, 연금, 장학금, 휴가지불금, 무료 교육, 무료 의료 등등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혁명전 시기에는 노동자들에게 개인 임금 외에, 이러한 혜택들은 미미했다. 과거에는 유급 휴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통례였다. … 또한 우리는 실질 임금을 계산할 때, 쏘련에서는 실업이 완전히 근절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쏘련에서는 노동시간이 혁명 전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적은 까닭에 노동자는 매개 노동 시간에 보다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67)

 

그리고 임금 문제에서 말해두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클리프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쏘련을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의 사회로 본다면, 여기에서 임금은 노동자가 사회에 기여한 만큼, 즉 그의 노동의 양과 질을 따져 정확하게 지불되어야 한다. 동일한 노동에 대해 여기서는 얼마를 저기서는 얼마를 준다면, 노동의 규율도 서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노동자들 사이에 근로의욕을 떨어뜨리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쏘련에서 임금은 협약의 대상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쏘련에서 임금은 다양한 노동의 형태에 맞추어 다양한 방식으로 계산(노동의 기준화)된 일정한 사회적 기준에 의해, 공평하게 지불된다.

그럼 다시 우리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다; “어떤 협약에서도 반드시 노동자들의 주된 관심사”68)일수밖에 없는 “임금”교섭도 못하는 노동조합이 무슨 노동조합인가?

그런데, 앞서 말한 이유들로 쏘련에서의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하의 노동조합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길지만 다양한 자료들을 인용한다.

 

■ 노조의 기능

 

소련의 노동조합은 공산주의 학교로서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9가지의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행정과 경제경영의 학교로서 노동조합

둘째, 노동자의 입법발의권의 기초로서 노동조합

셋째, 소비에트 노동자의 법적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기구로서의 노동조합

넷째, 국가사회보험 그리고 연금경영자로서 노동조합

다섯째, 요양, 진료소, 휴일, 그리고 보양시설 운영자로서 노동조합

여섯째, 근로자 주거의 공동행정 주체로서 노동조합

일곱째, 노동자의 문화교육을 위한 학교로서의 노동조합

여덟째,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내에서 스포츠와 여행 조장자 및 조성자로서의 노동조합

아홉째, 소비에트 대외 정책의 수단으로서의 노동조합69)

 

이 중 첫 번째로 언급되고 ‘행정과 경제경영의 학교’로서의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정부의 사회적 봉사의 집행과 국가경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소련 사회가 완전한 공산주의의 사회로 이행했을 때, 소련정부는 노동과 노동관계 분야에서 현존하는 모든 기능을 노동조합에게 인계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낳게 해준다.

두 번째로 노동자의 입법발의권의 기초로서의 노동조합의 기능은 행정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사회적 입법의 준비 및 초안에 참가를 의미하고 있다. 소련 헌법에는 법률입법권은 국가기관의 최고기관을 통해 행사되며, 전연방적 기구를 통한 사회단체도 법률입법권을 가진다고 명시하여 노동조합의 법률입법권을 인정하고 있다.

세 번째, 노동자의 법적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기구로서 노동조합의 기능은 아마도 본질적인 의미의 기능으로 노동조합의 성격과 일치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소련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권리보호와 이익보장에 최우선을 부여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공산당 역시 그들의 권익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또한 노동법에서도 노동자의 권리보장에 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즉, ‘기업, 시설, 단체의 관리부의 발의에 의한 노동자, 직원의 해직은 소련법규 소정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노조공장지방위원회의 사전동의 없이는 행사할 수 없다’는 소련 노동기본법의 제18조 1항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기업, 시설, 단체의 관리부는 종종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동법의 규정이 너무 엄격해서 무능력하고 신뢰할 수 없는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 …

네 번째 기능부터는 주로 세 번째 기능인 노동조합의 노동자에 대한 이익‧옹호 기능으로 좀 더 구체적인 항목들을 제시하고 있다. … 이러한 기능들은 직접적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 생산, 관리의 운영이나 법규의 준수 등에 대한 협력 및 참가기능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70)

 

■ 노조의 역할

 

대중들에 대한 전선조직으로부터 공산주의학교, 그리고 다시 대중과 당을 연결시키는 전달벨트로서의 소련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은 오늘날 그들의 활동을 통해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생산에 대한 의무감을 주입시키고 산업과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창조적인 태도를 발전시키면서 노동자 대중을 국가행정으로 끌어들인다.

둘째, 임금생활자와 봉급생활자의 합법적 권리와 물질적 이익을 보호하며, 좀 더 나은 생활조건과 노동조건, 여가활동, 공중위생시설을 위해 애쓴다.

셋째, 교육활동에 참여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노동과 공공재산에 대해 양심적 태도를 가지도록 훈련시키며, 새로운 인간―잘 교육받고, 의식있고, 근면하고, 도덕적으로 건전한―을 만들어 내고자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소련의 노동조합은 국제노동자 활동과 모든 국가의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결속을 강화하고, 쁘롤레따리아 국제주의를 촉진시키는 데 참여한다. 또한 세계 노동조합운동의 단결을 위한 투쟁에 참여한다.71)

 

기업 수준에 있어서 단체 협약은 경영자와 ‘기업 노동조합위원회(Fabkom) 간에 매년 체결되는 것으로서, 다음 해에 양측이 수행하기로 한 상호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임금규모 및 기타 몇몇 노동조건들은 정부차원의 전반적 경제계획 구조 내에서 범국가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기업의 단체 협약에는 그 지역의 노동 시간, 휴가 시간, 보너스 분배율 및 기업의 주택 건설 등만이 명시된다. 이 때 노조는 경영자가 협약의 모든 조항들을 준수하고 있는가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노조의 임원들은 기업 내의 복지 혜택의 배분을 감독하고 그에 관련된 물자조달, 주택건설, 교육, 스포츠 및 여가 서비스를 관리하는 기능도 한다. 뿐만 아니라 기업 노동조합위원회는 작업장에서의 건강 및 안전규칙을 강화시킬 의무를 갖으며 그러한 규칙이 침해되었을 경우 공장을 폐쇄할 권한도 갖는다.72) 

 

사회보장면에서 노조의 활동 영역은 매우 광범위하다. 기초 단위로서의 ‘노조지역공장위원회(fabzavmestkom)’는 해당 지역의 사회 보장을 직접 관리한다. 즉, 연금을 지급하고 요양소 및 휴양소로의 여행증을 발급하며, 어린이들을 ‘개척자 캠프’에 보낼 뿐 아니라 의료기관 및 기업 경영자들과 협조하여 질병을 감소시킬 방안을 강구하기도 한다. 또한 진료증명서가 올바르게 발행되고 있는가와 고용주들이 사회 보장 기금을 납부하고 있는가를 점검한다. …73)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은 노동자의 개인적 의사에 의하여 결정되나, 월급의 1%라는 낮은 조합비를 납부한 대가로 매우 풍성한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가입하고 있다.74)

 

 

■ 노조의 권한

 

노조의 권한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노조의 규모에 따라 두 가지 수준으로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 먼저 … 소련내 최고의 노조 기구인 전연방 중앙노동조합 평의회는 경제 계획을 작성하고 노동시간, 휴가, 노동지표 및 안전 수단 등에 관한 법률을 입안하는 데 참여하여 국가에 조언할 권한을 갖고 있다. 또한 경제 전체의 임금 규모를 결정하는 중앙 계획 기구에 대하여 자문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

한편 공화국 및 지역 수준의 노조는 연금 및 의료 혜택 뿐 아니라 질병 수당, 출산 수당, 산업재해 수당 및 가족 수당 등 각종 사회 복지 혜택의 분배를 감시할 권한을 갖는다. … 또한 문화 궁전을 건설하고 스포츠 행사를 주관하는 등 휴일 및 휴양 혜택을 관리하는 권한도 갖고 있다.75)

 

선생께서 말씀하신 바와는 전혀 다른 노동조합의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이건 법률이나 규정상, 혹은 선언상에서나 존재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모습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되받아 치실지도 모르겠다. 방금까지 전까지 자본주의와 노동자 국가도 제대로 구분 못하시더니, 이제 정신이 좀 드셨는지?

그런데 정신이 들자마자 클리프는 쏘련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클리프가 앞서 언급한 1947년의 “다른 나라들에서 흔히 단체협약이라고 불리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순전히 “관료적 형식주의와 속임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소위” 그 “단체협약”76)은 어떻게 체결되고 있는가를 봐야하기 때문이다.

 

1947년에 산업 운수 및 건설기계업체에서는 1천4백만 명의 노동자 기사 기수일꾼 및 사무원들을 포함한 2만5천 이상의 단체계약이 체결되었다. 단체계약의 심의는 노동자 사무원들의 높은 정치적 및 생산적 열성의 분위기 가운데 진행되었다. 단체계약 체결에 바쳐진 회의에는 전체근무자의 90% 이상이 참가하였으며, 8십8만 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그 회의에서 발언하였고, 70만 이상의 제안이 제출되었다. 제안의 반은 노동조직의 개선, 노동량이 많이 드는 노동의 기계화, 기술적 과정의 완성, 안전기술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 제출된 제안들은 대부분 실현되었고, 약 20만의 제안은 단체계약에 포함되었으며, 그의 실현은 거대한 효과를 가져왔다.

… 총회는 또한 임금지불 이행, 주택형편과 문화건설, 노동보호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의무의 실행을 보장하지 않은 약간의 경제적 및 직업 단체들로부터의 단체계약 위반의 사실들도 지적하였다. 총회의 결정에서는 이러한 위반을 제거하는 방법들이 강조되었다.77)

 

이렇게 협약 체결의 모습은 “관료적”이거나 “형식적”이거나 혹은 “속임수”가 아닌, 인민 대중의 열의로 가득찬 ‘창발적’인 과정이었다. 협약은 아래로부터의 전국적 토론과 제안들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오류들은 비판되고 수정되었다. 다음의 그림을 보자.

 

쏘련 노동조합의 구조78)

쏘련의 노동조합은 위와 같이 아래로부터 선출되며, 아래로부터 의견이 제출되고, 동시에 그러한 힘들을 기초로 상부단위에서는 그것을 취합하여 전국적 계획에 참여하고, 그 결과를 다시 아래로 보내는 상․하 소통의 유기적 과정, 소위 민주집중제의 원리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경제계획’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저들이 말하듯 ‘관료적 지령 경제’는 아니었던 것이다(이 점은 다음에 살펴볼 것인데―여기서 잠시 언급만 해보면―후기 쏘련의 계획에서 하부 생산 단위들이 의도적으로 낮은 계획량을 제출해서, 그것의 달성이 거의 항상적인 것이 되고 있음이 오히려 사회적 문제였다는 것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높은 생산 계획량을 열심히 노력해서 달성하는 것보다, 낮은 계획량을 제출하면 그것을 달성하기는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79) 이에 상부 계획 단위는 다시 생산량을 높여서 계획을 하달하고, 아래에서는 자신의 능력치를 낮춰 보고 하는 일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만약 단순히 ‘관료적 지령 경제’였다는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마) 노동자 계급의 원자화

 

여전히 계속되는 그의 사기들을 짧게 언급해 보기로 한다. 그는 ‘스따하노프 운동’를 노동자계급을 원자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며, “일반 노동자들이 스타하노프제 포상 노동자들을 살해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사건을 인용한 신문들의 발행 연도는 모두 1935년이다! 이때가 쏘련 내에서 계급투쟁이 가장 첨예했던 시기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클리프의 말만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아무튼 이 문제는 다음에 보다 상세히 다룰 것이다.

다음으로 ‘테일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들어보자. 그는 레닌의 권위에 기대어, 이렇게 말하고 계신다.

 

레닌이 테일러주의를 ‘기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로 규정한 것과 비교해보라.80)

 

하지만 사실 그는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역사에서 쏘련에 테일러주의를 도입한 장본인이 바로 ‘레닌’이며, 그는 이것을 쏘련에서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를 주장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제목만 인용한 그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는 것을.

 

자본은 노동자에 대한 가일층의 억압을 위해, 자신들의 이윤 증대를 위해 공장 내부의 노동을 조직화하고 합리화한다. 그런데 모든 사회적 생산에는 위기들로 이끄는 카오스가 남아서 강화되는데, 그때에는 축적된 부가 구매자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수백만 노동자들은 일터를 찾지 못해 굶주려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테일러 시스템은―그 작성자들의 승낙도 없이 그리고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손아귀에 모든 사회적 생산을 장악하고 모든 사회적 노동의 올바른 배치와 합리화를 위해 자신들의, 노동자들의, 위원회들을 임명하는 그런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다. 거대 생산, 기계, 철도, 전화기― 이 모든 것은 조직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네 배로 단축시키고 지금보다 네 배나 더 많은 복지를 그들에게 보장할, 수천가지 가능성들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 위원회들은 노동조합들의 도움을 얻어서 사회적 노동에 합리적인 배치의 이런 원칙들을 적용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그때에 그것은 자본에 의한 그 시스템의 노예화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강조는 인용자)81)

 

구구절절 ‘속임수’ 투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현란한 사기술을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겠다. 이 글의 제목이 ‘시론(始論)’인데, 구구절절 다 보여주면, 그것은 더 이상 시론이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검토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들은 대강 이런 것들이다: 노동보건, 축적에 대한 소비의 종속, 빈곤의 축적, 분배관계, 교육, 관료적 지령경제, 그리고 당, 국가 문제 등등.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클리프 선생은 거기서도 교묘한 사기술과 장난질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바) 쏘련의 민족 억압 정책

 

그의 사기술은 대를 이어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민족 문제는 본래 이 장에서 다룰 것이 아닌데(이 장은 관료와 억압의 문제들을 다루고, 이 문제는 본래 반쏘 선동에서 다룰 것이었다), 여러 가지 사정상 여기서 먼저 다루기로 한다.

클리프의 법통을 계승하신 지도자82) 크리스 하먼 선생은 그의 선생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민족 공화국들의 학교에서조차 러시아어가 토착 민족어를 계속 밀어내고 있다. … 비러시아인들이 소련 인구의 약 절반을 이루고 있는데도, 1958년 현재 비러시아어 신문의 발행부수는 총발행부수의 단 18%에 불과했다.”83)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방법론 중에 중요한 한 가지를 포착할 수 있다. 그들의 글들을 따라 가다보면, 주요한 근거들이 모두 자신들의 문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서로서로 이론적 받침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쏘련이 자본주의라는 근거를 서로서로의 글에서 발견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만 보면, 평소에 들어오던 ‘반쏘 선전’들과 결합되어 쏘련이 연방 내 민족들을 문화적으로 억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자. 아래는 혁명 전과 1956년 현재, 쏘련 내에서 발행되고 있는 서적들의 연간 부수를 각 민족어별로 조사한 것이다.

 

쏘련 각 민족어로 발행된 서적84)

 

언어별

1913년

1956년

종수

부수

(단위 천부)

종수

부수

(단위 천부)

로어

23,805

80,218

43,730

917,014

우크라이나어

228

686

2,671

68,267

백로씨야어

2

4

285

7,068

우즈베크어

37

86

697

16,258

까자흐어

40

161

636

7,820

그루지야어

232

453

1,365

7,837

아제르바이쟌어

91

112

736

7,208

리트바어

1,393

8,885

몰다비야어

없었음

없었음

410

3,113

라트비야어

1.097

7,836

끼르기즈어

없었음

없었음

319

1,940

따쥐크어

없었음

없었음

320

2,850

아르메니야어

257

349

827

5,537

뚜르크멘어

없었음

없었음

393

2,815

에스또니야어

822

4,848

바슈끼르어

없었음

없었음

129

620

부랴트-몽고어

없었음

없었음

77

179

다게스딴

제 민족 언어- 총수

16

26

229

548

ㄱ) 아바르어

3

6

46

172

ㄴ) 다르긴어

1

1

41

107

ㄷ) 라크어

12

19

34

36

ㄹ) 꾸?크어

없었음

없었음

50

134

ㅁ) 레즈긴어

없었음

없었음

43

85

ㅂ) 따바싸란어

없었음

없었음

14

13

ㅅ) 따트어

없었음

없었음

1

1

까바르진어

없었음

없었음

67

165

분란어

1

10

99

314

꼬미어 및

꼬미-뻬르먀크어

2

1

86

203

마리어

(평야마리어 및

산악마리어)

18

28

81

229

모르드바어

(목솨어 및

에르쟈어)

없었음

없었음

58

177

오쎄찐어

5

3

108

226

따따르어

340

1,671

334

3,545

우두무르르어

19

29

75

506

체첸어 및

인구슈어

없었음

없었음

31

168

츄와슈어

56

93

167

894

야꾸트어

1

2

109

621

 

통계가 말해주는 진실은 무엇인가? 

40개 이상의 민족들이 혁명 이후에야 최초로, 자신들의 말을 문자(키릴문자)로 표현할 수 있었다. 대학과 학교를 하나도 가지지 못한 민족들이 자신들의 공화국 내에 대학과 학교들을 가지게 되었다.

위에서 알 수 있듯, 비러시아 민족들의 서적 출판은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절대적 수치를 보지 않고, 비율만을 보게되면, 우리는 클리프의 말에 속아 넘어간다. 그런데 클리프의 말이 정당화되려면 이런 일이 발생해야 한다; 혁명 전 서적의 출판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던 러시아민족은 다른 민족들이 발전하고 있을 동안, 아무런 발전도 없이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각 민족들이 인구별로 평등한 비율로 출판된 서적을 가지게 되고, 그래야 민족을 억압하지 않는 것이다! 해괴망측한 논리다!

또한 공용어로 러시아어를 사용한 문제가 계속 제기되는데, 이는 쏘련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다음의 자료를 보자.

 

타지크 공화국에서는 공문서․신문․잡지․라디오․텔레비전 등은 타지크어, 우즈베크어, 러시아어의 3종류로 발행․발송되고, 국회나 재판소에서도 3개 언어의 동시통역이 이루어진다. 학교 교육은 타지크어로 하지만 국민 학교 1학년부터 러시아어를 배운다.85)

이것이 현실이다. 쏘련은 아주 넓은 나라이다. 수많은 민족들이 섞여있고, 혁명 전 오지에 살던 민족들은, 바로 이웃한 민족들과도 언어가 통하지 않은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이러한 민족적 현실 속에서 쏘련의 민족문화 정책이 나온 것이다. 민족 문화에 대한 쏘련의 정책은 각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화와 차이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공산주의적 초문화(super culture)를 형성함과 동시에, 각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 정책의 주방향이었다.

따라서 여러 민족들이 서로 화합하고 교통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말이 필요했고, 그것이 인구의 절반이 사용하는 러시아어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동시에 위에서 보듯이, 각 민족어는 여전히 발전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 러시아의 후진성

 

이제 이번 글에서 검토할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다. 먼저 선생께서 이번에는 또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보자.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은 레닌이 지적한 두 가지 명제, 즉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 증대와 노동의 사회화’라는 말로 요약된다. 세계적 규모에서 이 임무는 이미 달성된 상태였다.

러시아의 경우는 혁명이 생산력의 발전에 저해가 되는 요인들을 제거하고, 봉건 잔재들을 일소하고, 대외무역의 독점을 구축하여 세계자본주의의 파괴적 압력으로부터 자국 생산력의 발전을 보호하고,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라는 형태로 생산력 발전에 강력한 지렛대를 제공했다. 그러한 사정 하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명―사회주의의 확립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되는,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제공할 수 없었던 노동의 사회화와 생산수단의 집중―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 요인들은 폐지된다. 10월 혁명 이후에 러시아는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 달성을 앞에 두었다.(강조는 인용자)86)

 

하지만 클리프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 국민소득이 낮은 수준에 있었던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적 과제들의 완수가 중심적 문제였다.87)

 

그런데, 이에 반해 선진 공업국 미국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상황은 러시아와 전혀 다를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노동의 사회화에 필요한 새로운 생산수단의 추가가 대중들의 생활 수준의 향상, 생산 규율에서 확신이라는 요소의 강화, 노동자들의 통제 강화, 육체 노동자와 정신 노동자 사이 소득차의 점진적 축소 등등을 동반 할 수 있다.88)

 

그러나 러시아는,

 

... 포위 상태에 놓인 후진국에서도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생산 수준이 매우 낮은 상태에서, 주로 확신에 기초한 노동 규율이 널리 보급 될 수 있는가? 나라의 후진성과 세계자본주의의 압력 때문에 필수적이게 된 속도의 축적이 사회의 분리, 즉 사회 전반적일들이 경영자와 피경영자로, 노동의 감독자와 피감독자로 분리되지 않고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가? 생산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분배까지도 하는 일이 생기기 전에 그러한 분리 상황이 종식될 수 있겠는가? 의기양양한 국제 자본주의에 의해 고립되어 있는 후진국의 노동자 혁명이란 것이 자본가 계급이 폐지된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속의 한 지점’이 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있을까?(강조는 인용자)89)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 안 되고, 생산 수준이 낮은 상태에서 자본을 신속하게 축적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소비, 그들은 생활수준에 견디기 어려운 압력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사정 하에서 자본의 화신으로 전화되어 오로지 자본축적만을 지상의 목적으로 삼게 된 관료층은 노동자 통제의 모든 잔재들을 제거하고, 노동 과정에서 확신을 강제로 대체시키고, 노동자 계급을 원자화하고, 모든 사회‧정치적 생활을 전제주의 틀에 두들겨 맞춰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축적 과정에 필요한 존재가 되는 그리고 노동자들의 억압자가 된 관료층이 분배관계에서 그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생산관계에서의 그들의 사회적 우월을 지체 없이 이용할 것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포위 상태에 있는 후진국의 공업화와 농업에서의 기술 혁명(집단화)은 관료층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직‧간접적인 압력과 통제 하에 있는 한 계층으로부터 지배계급으로, 다시 말해‘사회의 일반적 관심사, 즉 노동 감독‧국사‧사법‧과학‧예술 등등’의 관리자로 탈바꿈시킨다.

모순과 놀라움으로 가득찬 변증법적 역사 발전은, 관료층이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을 서둘러 해 내겠다는 주관적 의도를 가지고 내디딘 첫걸음이 국가자본주의 건설의 토대가 되는 역설적 현상을 가져왔다.(강조는 인용자)90)

 

즉, 러시아는 자신의 후진성으로 인해 선진제국의 혁명이 없다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도 더 악랄한 국가자본주의로!

이것은 뜨로쯔끼의 ‘영구혁명’론에 기반하고 있는데, 양자의 차이점은 ‘트로츠키의 사도’ 토니 클리프는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갔다는 것이다;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쏘련의 눈부신 발전을 보라. 조국전쟁 이후, 수많은 나라들이 사회주의가 되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진실한 ‘사도’가 아니라, ‘유다’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실 쏘련은 자본주의라고 선언하게 된다.

클리프는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트로츠키가 소련이 타락한 노동자국가라는 자신의 분석을 좇아 관료가 전쟁을 버텨 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데 반해, 오늘날 많은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전쟁 승리로부터 소련이 노동자국가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사후적 주장은 비판을 견뎌 낼 수 없다. …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누릴 수 없었던 전쟁의 또 하나 이점은 모든 민주적 권리를 결여했던 소련 노동자들의 존재이다. 나찌 독일처럼 소련도 조직적 저항을 두려워 할 필요 없이 버터 대신에 대포를 생산하고, 수백만 노동자를 서부에서 우랄 산맥 이동(以東)으로 이주시켜 지하 방공호에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경제와 노동자들 위에 군림한 국가의 권위, 바로 이것이 소련의 군사‧산업 생산의 강점이다. …

소련의 군사적 승리 자체가 소련이 새로운 사회 체제를 대표한다는 믿음은 나찌 독일이 그러하다는 믿음 이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강조는 인용자)91)

 

소련에서 관료의 지배력을 강화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소련의 군사적 승리였다. 이 군사적 승리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대중에 대한 절대적인 탄압 덕분에 스탈린은 국민소득의 대부분을 서방 나라들의 경우보다 더욱 쉽게 전쟁 목적에 동원할 수 있었다. 예컨대, 그는 수백만 노동자들을 동부로 이주시켜 토굴에서 살게 하며 ‘소련 공업의 기적적 소개(梳開)’를 완수할 수 있었다. 둘째, 경찰의 탄압 덕분에 후방을 조용히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이것은 소련이 민주적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해 누렸던 또 하나의 ‘이점’이었다. … 소련의 군사적 승리는 대체로 후방의 ‘안정’, 그리고 근로 대중의 의기소침과 절망의 결과인 동시에, 또 스탈린 정권의 안정화에도 크게 기여한 중요한 요소였다. …(강조는 인용자)92)

 

줄잡아 수천만이 목숨을 바쳐 파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전쟁, 세계 사회주의의 건설을 강화한 해방전쟁을 두고, 그는 그 체제가 나찌와 똑같았기 때문에, 아니 나찌보다 더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언제는 광범위한 이직률에 대해 이렇게 말해 놓고,

 

현실에서 소련 노동자들은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독일 노동자보다, 또는 그 문제에 관한 한 전 세계의 어느 나라 노동자보다도 훨씬 더 큰 정도로 한 공장에서 다른 공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일찍이 1930년 9월 노동자들이 특별한 허가 없이 근무지를 바꾸는 것이 금지되었고, 해마다 새로운 금지 조항이 덧붙여졌는데도 불구하고 전직률은 엄청난 것이었다. 1928년에, 산업체에 고용된 노동자 100명당 92.4명의 전직이 기록되었다. 1929년에는 115.2명, 1930년에 152.4명, 1931년에 136.8명, 1932년에 135.3명, 1933년에 122.4명, 1934년에 96.7명, 1935년에 86.1명이 각각 기록되었다. 이후에는 수치가 발표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대규모의 전직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언론의 빈번한 비난이 증언해 주고 있다. 전쟁조차도 그것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강조는 인용자)93)

 

이제는 쏘련의 인민들이 열성적으로 서부 공장의 기계를 뜯어와 우랄 산맥을 넘어 동쪽에 새로 공장을 짓고,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어 내었던 영웅적 투쟁을, 노동자들을 “토굴”에서 살게 하며, 강압적 노동을 강요했던 결과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있었던 전쟁 전․중의 여전히 높은 이직률들을 보면, 과연 억압된 노동이 있었는가? 사실 대조국전쟁의 진실은,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인민의 애국심, 사회주의 건설을 향한 인민들의 열망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전쟁 후, 그를 ‘유다’로 만들었던 결정적 사건이 하나 더 있다.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 이것은 ‘신민주주의 체제들’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사실 이들 혁명은 스탈린주의자들이 민족통일, 부르주아지와의 연정, 수백만 독일 근로자들과 그 가족의 추방을 가져온 국수주의 등에 기초하여 이끈 것이다. 이 정책들은 그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만일 사회혁명이 동유럽 나라들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 없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미래의 사회혁명들에서도 과거의 사회혁명들처럼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투쟁은 하지만 지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신민주주의 체제들’이 노동자 국가라고 가정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그 원칙에서 부르주아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인민에 대한 사기에 기초한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신민주주의 체제들’이 노동자 국가라면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실현시킨 것이 된다. 그것도 아주 신속하게 말이다. 1억 4천만 인민이 사는 나라에서 최초의 노동자 국가가 확립되기까지 파리꼬뮌 이후 47년이 지났다. 그런데 다수의 나라들이 추가로 노동자 국가가 되는 데는 4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폴란드‧유고슬라비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가 그들 나라의 7천5백만 인민을 새로 추가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발틱 연안 국가들, 동부 폴란드, 베사라비아를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소련에 합병된 이들 나라에는 2천만 인민이 살고 있었다.) 동양에서는 6억 인민이 살고 있는 중국이 더해졌다. 이들 나라가 노동자 국가라면 마르크스주의는 도대체 무엇이며 제4인터내셔널은 왜 있어야 하는가? ‘신민주주의 체제들’이 노동자 국가라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회주의 혁명은 “그 자신을 의식하는 역사”라고 말한 것은 논파당한 셈이다. …(강조는 인용자)94)

 

그가 새로운 사회의 출현에 얼마나 놀랐는지 글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그는 이것을 온 몸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너무 빨리 너무 많은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비난하는 것을 보면 그를 ‘혁명가’라고 부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를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다.

그는 열거된 국가들 내부에서의 계급투쟁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럼 우리가 잘 아는 중국공산당의 혁명은 무엇이란 말인가? 중국 공산당의 반제투쟁은 단지 부르주아민주주의적 민족주의 투쟁일 뿐인가? 중국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파업 투쟁들은 다 무엇인가? 노-농 동맹을 했다는 것이 노동자 혁명이 아닌 농민혁명이었다는 증거가 되는가? 2단계 혁명론은 노동자혁명을 향한 길이 아닌가?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의 수많은 노동자 투쟁은 또 무엇인가? 항일 빨치산 운동은 오로지 민족주의적 투쟁일 뿐이었는가? 해방기의 조선노동당, 전평이 주도한 수많은 노동자 투쟁들은 다 무엇이었는가?

동유럽에서 전개되었던 수많은 반나찌-빨치산 투쟁은? 그들이 쏘련군의 진주만으로 그냥 집권을 할 수 있었던 줄 아는가? 그럼 쏘련군이 진주하지 않았던 나라들에서 선거로 집권한 나라는 무엇이 되는가? 제국주의의 저항으로 혁명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토대들을 기초로 혁명 직전의 상황까지 갔었던 나라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왜 인민들이 그러한 사상에 열광적으로 반응했는지 클리프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사회혁명이 동유럽 나라들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 없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미래의 사회혁명들에서도 과거의 사회혁명들처럼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투쟁은 하지만 지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는 당으로 표현된다. 클리프의 이 말은 위에서 열거한 나라들의 당은 노동자의 당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이에 대한 실례를 들어보라. 어디에서 그런 증거들을 찾으실건가? 당원 구성에서? 농민의 비율에서? 당 지도자의 출신 성분에서? 도대체 클리프는 맑스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맑스와 엥겔스, 레닌은 끊임없이 노-농의 동맹을 강조했다. 노동자 계급의 주도하에서 사회의 다양한 세력과 동맹을 맺을 것을 혁명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강조했다. 노동자 계급의 혁명은, 자신의 목표가 모든 계급의 폐지이기는 하지만, 일단 혁명을 위해서는 먼저 사회의 보편적 대표자로서 대중들의 지지받아야 한다는 것을, 클리프는 잊고 있는가?

또한 노동자계급의 당원은, 혹은 이론가나 지도자조차도, 기계적인 출신성분, 계급성분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계급의 이해를 버리고,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드릴 때, 그리고 그 이해 속에서 자신의 이론적 전망을 찾을 때, 그는 노동자 계급의 당원, 이론가,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물론 맑스는 여기에, 노동자계급에서 쓸모 있는 것을 가지고 와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덧붙인다.

그리고 맑스도 엥겔스도, 레닌도 그 자신의 출신 성분은 노동자가 아니라 점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또한 당신들의 캘리니코스도 대표적인 중간계급적 직업인 교수95)를 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관료집산제를 비판하는 당신의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그것은 필수적 원동력으로서 피억압자의 계급투쟁을 부정하는, 역사에 대한 기계론적‧숙명론적 접근이다.”96)

 

 

2. 군사적 경쟁이 자본주의적 축적을 강제한다.

 

■ 맛보기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2장이 사실 클리프 논지의 핵심이다. 이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비판하도록 한다. 다만 대충 그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만 적어둔다.

먼저 쏘련에서 가치법칙은 작동하지 않는다.

 

소련에서 기업들 간의 관계는 얼핏 보기엔 전통적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의 기업들 사이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런 것이다. 사적 생산자들의 사회에서는, 한 공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분업과 사회 전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분업 사이의 차이가 전자의 경우 생산 수단 소유권이 한 사람 또는 한 법인체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후자[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경우 결정들을 내리는 중심이 없고 ‘종잡을 수 없이 변동하는 평균치’가 고용과 상품 생산량의 결정 기준이 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소련에서 그러한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개별 기업과 경제 전체가 모두 계획적 생산 규제를 따라야 한다. 예컨대, 트랙터 공장 안의 분업과, 트랙터 공장과 그곳에 원자재를 공급하는 철강 공장 사이의 분업은 저도만 다를 뿐이지 근본적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소련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분업은 한 공장 안의 분업과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것이다.

생산물들은 형식상 교환을 통해 경제 각 부문에 분배된다. 그러나 모든 기업에 대한 소유권이 국가에 귀속되어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상품교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들’이나 ‘사적 개인들을 위해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생산물만이 상품이 될 수 있다.’

교환을 통해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 사적 생산자 사회에서 사회 전체의 분업을 조정하는 매개자 노릇을 하는 것은 교환가치의 화폐적 표현인 가격이다. 소련에서는 기업들이 기업 생산의 거의 대부분을 통제하는 국가를 매개로 하여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가격은 노동의 사회적 성격의 표현, 곧 생산의 조정자라는 특성을 상실한다. …

두 부문의 생산(생산재 생산과 소비재 생산)사이의 관계는 축적과 소비사이의 관계에 곧바로 좌우된다. 전통적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경쟁이 공장주들로 하여금 축적하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증가시키게 하는 반면에, 소련에서는 정부가 모든 공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이라는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련에서는 축적과 기술 혁신이 경쟁 기업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서 추구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소련에서는 가격이 생산과 사회 전체의 분업을 조정하는 매개자가 되지 못한다. 그것들을 조정하는 것은 바로 국가이다. 가격은 국가가 조정 활동에서 사용하는 하나의 무기일 뿐이다. 따라서 가격은 원동기가 아니라 전달 벨트이다.”97)

 

동시에 임금노동도 없다.

 

만일 고용주가 한 명밖에 없다면, ‘주인 바꾸기’는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자신을 주기적으로 파는 일’도 단지 형식적인 일이 되고 말 것이다. 판매자가 많고 구매자가 한 명일 때에도 계약은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만다.(소련에서는 계약의 이러한 형식성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상벌 제도와 ‘교정노동’등에서 분명히 드러난다.)98)

 

하지만 군사적 경쟁이 쏘련 내에 가치법칙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고려할 때만 쏘련의 관료는 경쟁을 통해, 노동자를 억압하고, 축적을 위한 축적을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기경쟁이 소련 경제의 발전을 결정짓는 메커니즘은 관료의 정치적 활동을 통해 관철된다. … 관료의 정치적 결정들은 비록 시장경쟁이라는 제한된 의미의 ‘경제적’ 경쟁은 아니라 할지라도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99)

 

따라서 

 

소련 경제가 일정한 사용가치의 생산을 지향하고 있다고 해서 소련 경제가 사회주의 경제인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경제가 사용가치들(매우 다른)의 생산을 지향하는 경제일지라도 말이다. 오히려 소련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는 완전히 대립된다. 소련에서 지금처럼 버터가 아니라 총을 대량으로 생산함에 따라 생긴 착취율의 증가와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예속 심화는 인민에 대한 억압을 줄이기는커녕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가치법칙을 무정부적 세계시장이라는 오늘날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살펴보면 가치법칙이 소련 경제구조의 조정자임을 알 수 있다.”100)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견해를 이렇게 충실하게 요약하고 있다.

 

클리프는 스탈린주의 소련에는 서방 자본주의와의 군사적 경쟁을 매개로 하여 가치 법칙이 작동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한 축적을 위한 축적이 진행된다고 본다.101)

 

우리는 자본주의가 이중의 분리를 수반한다는 점을 살펴본 바 있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직접 생산자의 분리라는 첫 번째 분리는, 러시아에서는 1930년대의 강제 집산화와 공업화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면 두 번째 분리, 즉 경제가 경쟁하는 다수 자본으로 분할된다는 점에서는 어떠한가? 소련에서는 노동력을 포함한 재화의 시장이 대체로 국가계획과 통제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현실은 그것의 겉모습과 다르다. 우리가 러시아를 일단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맥락에 놓고 보면, 사태는 달라진다. 왜나하면 소련이 세계체제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경제에서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가 군비 생산에 있다는 사실로 반영되는데, 실제로 러시아에서 군비 생산은 국민총생산의 12~14%라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20년대에 집산화와 공업화 정책을 처음 결정한 것은 스탈린의 악의와 권력욕의 소산이라기보다는 개관적 상황의 압력―서방의 군사력에 맞설 필요―의 결과였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압력이 러시아를 세계체제에 계속 결박하고 있으며, 잉여노동을 연합한 생산자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재투입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 결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분석한 것과 원리가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목적은 소비가 아니라 축적, 즉 생상을 위한 생산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은 소비가 아니라 축적, 즉 생산을 위한 생산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은 자본가들의 자발적 의사결정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가들은 경쟁 때문에 자신의 이윤을 재투자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쟁자들한테 밀려나기 때문이다. ‘개별자본들의 상호작용은 그들이 스스로 자본으로서 행동해야만 하는 결과를 낳는다’102) 이는 러시아와 서방 간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단지 차이점은 여기에서는 민간 기업들이 아니라 국가자본들이 경쟁하고 있으며, 또 그 경쟁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수행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소련에서 지배적인 생산관계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이다.103)

 

그들은 자본주의에서 ‘경쟁’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경쟁’이라는 개념만 들어가면, 이것은 다 자본주의적 경쟁인가? 아무튼 맛보기이니 비판은 일단 삼가 한다.

그런데 아시는 대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비판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들을 하신다.

 

소련을 ‘노동자 국가’라고 보는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군사적 위협의 압력 때문에 노동자 국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생산해야만 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무기경쟁이 보편적인 것이 때문에 무기경쟁이 국가자본주의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논의가 지닌 정치적 의미의 핵심을 제기한다. 개별 노동자 국가의 요구는 국제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종속될 것이며 노동자 국가의 국내 조직과 국제적 압력 사이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무기 생산을 위해 당면한 소비를 제한하려는 결정은 노동자계급이 내릴 것이다. 그 결정들은 축적을 위한 축적의 맹목적 경향의 결과가 아닐 것이다. 소련에 가해진 외적인 무기경쟁 압력이 노동자 국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는 주장은 스탈린의 반혁명을 무시하는 것이다.104)

 

당신들의 국가는 쏘련에서와 다르게, 자본주의 제국이 군사적 위협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겠다. 당신들은 무슨 용빼는 재주라도 있는 모양이다. 군비경쟁은 쏘련의 경제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쏘련도 수많은 회의에서 군축과 평화를 주장했었다. 하지만 되돌아 온 건, 쏘련을 무너뜨리기 위한 더 심한 군비경쟁이었다(또한 사회주의 쏘련과는 대비하여, 자본주의에서 군비경쟁은 독점자본의 이해와 맞아떨어지는 좋은 수익사업이었다).

그럼 ‘정치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당신에 한 마디: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그런데 사실 그들의 해결책은 다음의 문장에서 들어난다. 영구혁명론자인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본주의에서 축적을 위한 축적은 두 가지 요인의 결과인데, 그 중 하나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노동자의 분리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가들―사적 독점자본가든 국가자본가든―간에 존재하는 경쟁이다.

사회주의는 생산관계의 이 두 측면을 모두 폐지한다.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와 국경의 철폐― 이것들은 소비에 대한 축적의 완전한 종속을 위한 두 조건이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 사회는 소비하기 위해 축적할 것이다.(강조는 인용자)105)

 

사회주의가 국경을 철폐한다. 그렇다. 자본주의 국가가 없으면, 군비 경쟁은 불필요한 일이 된다. 그들의 해결책은 자본주의 국가가 없는 세계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는 이것을 모르나? 그리고 현실사회주의국가들은 그렇게 하지 했나? 그럼 2차 대전 이후의 급속한 사회주의 성장은 무엇인가? 아, 그건 사회주의가 아니고!

아무튼 우리가 사는 곳은 현실이다!

 

 

3. 쏘련에서 노동시장과 임금노동은 존재한다.

 

■ 맛보기

 

여기서 캘리니코스는 재미있는 주장을 한다. 쏘련에서의 이직률과 성과금 지급 등을 근거로 쏘련의 노동시장의 존재와 임노동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물론 스승의 견해를 일정하게 비판하면서,

그런데 그 와중에 재미있는 일이 발생한다. 캘리니코스는 빈즈-헤인즈의 ‘소련에서 임금노동이 존재하는 않는다’는 말을 비판하기 위해, 임금노동이 존재하지 않는 소련은 노예제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임금노동이 소련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기서의 직접생산자를 노동자로 기술할 수 있을까? 오히려 거대한 플랜테이션―소련 유한회사―에서 노역하는 국가노예로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106)

 

그래서 그는 노예제와 자본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먼저 증명한다. 그는 그것의 예로 미국의 노예제 플랜테이션의 작동 원리들을 예로 든다. 이것은 유통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성격을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노예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그런데 IS(국제사회주의자들)이 펴낸 ≪국가자본주의란 무엇인가?≫에는 미국의 노예제 플랜테이션 농업이 외부의 자본주의와 경쟁하게 되면 그 내부는 자본주의가 되는, 즉 2장에서 맛보기로 본 자신들의 논리에 꼭 들어맞는 대표적인 예로 쓰이게 된다.

아! 또 서로 간의 모순이 발생한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런 모순들을 그들 서로 간에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국가자본주의’로 뭉친 한 가족이다!

마지막으로 캘리니코스에게 한 마디,

언제는 쏘련에서 노동자의 이동을 제한한다고 이직을 제한한다고 비판하더니, 이제는 그럼에도 이직률이 높다고, 그 이직에 개별 기업들 간의 성과급 등을 통한 노동력 구입 경쟁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시는데, 그럼 어떡하란 말인가? 이래도 비판, 저대로 비판, 정말 사면초가다!

그래도 맛보기니, 캘리니코스의 논지만 쭉 훑어보자.

 

…지금까지 나는 임금노동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본질적 특징이며 이 임금노동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구성체들―그러나 빈즈-헤인즈가 자본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회구성체들―은 실제로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일단 주력하였다. …

그럼에도, 여기까지의 내 논지들에 동의하면서도 아직 여전히 임금노동은 소련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빈즈-헤인즈의 주장을 받아들여, 소련은 따라서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결론내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운치 못한 결론이며, 따라서 나는 임금노동이 소련에 실재로 존재함을 보여주려 할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빈즈-헤인즈의 논지는 다음 세 개의 문장에 있다.

 

모든 의도와 목적들에도 불구하고 소련에는 단지 하나의 고용주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는 노동력을 상품으로 전화시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의 임금노동이 아니다.

 

… 이에 대한 응답 속에서 몇 가지 논점이 세워질 수 있겠다.

첫째, 어떤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노동력의 이동률이 실제로 무제한적인 곳은 없다. 많은 노동자들이 평생 동안 같은 일자리에 고착 … 나라들 간에 노동자의 이동은 엄격히 제한되고 규제 … 더욱이 전시에는 …

둘째, … 서방에서처럼 지배계급은 사람들을 일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물리적 강제가 아닌 경제적 강제에 의지하며,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더 열심히, 더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위해 복잡한 성과급 제도를 고안해 냈다. … 더욱이 노동 전직률은 주요 서방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소련에서 더 높다. 그리하여 20%의 청년 노동자들이 취업 첫 해에 그들의 직업을 바꾸었다.

모든 증거는 소련에서 고도로 발달된 노동력 시장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 …

자본들 간의 경쟁이 없다면, 어떻게 노동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기업들은 노동자를 놓고 경쟁하며, 성과급, 상여금.

노동자들은 상당한 선택 폭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특정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되지 않는다.107)

 

따라서

 

소련 자본주의와 서방 자본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실질적 차이도 없다.

오히려 칠레나 남한의 노동자들처럼, “민주적 자유권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108)

 

이에 대한, 데렉 하울의 견해이다.

 

소련에서도 임금노동이 지배적이어야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유지된다. 확실히 잉여 생산은 존재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스탈린 치하에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잉여는 관료들이 직접 노동자들로부터 착취한 것이다. 문제는 관료의 이러한 착취가 임금노동과 자본주의적 착취한 것이다. 문제는 관료의 이러한 착취가 임금노동과 자본주의적 착취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

루블로 받는 임금 수준은 명백히 노동자들의 소비와 관련되어 있다. 상여금은 소련에서 노동자들의 임금 중 종요한 부분이고, 차별 임금이 노동정책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힘든 작업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북쪽에서 일한ㄴ 노동자들은 초과임금을 받으며 시베리아 유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소련 국내 평균 임금보다 세 배 더 벌 수 있다. …

만약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가 절대적이고 화폐임금이 순전히 공허한 제스처라면 위와 같이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노동자가 작업을 할지 말지 결정할 ‘자유’가 허구라면 그들은 왜 특수한 지역에서의 노동에 대해 추가로 임금을 받는가? 물론 소비재의 부족은 상여금 제도의 효율성을 감소시키며 그리하여 임금 이외의 다양한 자극제가 사용되지만 이것들은 임금체제의 부정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뜻하는 것이다. …

우리가 소련을 국제적 맥락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소련과 그 경쟁국 사이의 노동경쟁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노동이 진정한 임금노동이라면 러시아 내부에 노동력 시장이 존재해야한다. …

토니 클리프가 [말한: 인용자]… 소련에서 ‘주인 바꾸기’가 단지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이러한 노동력 부족은 이직률을 더욱 높였다. 노동자들이 일할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실질적인 것이었다.

소련에서 노동력 시장은 ‘불완전함’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사정은 어떤 노동력 시장이든지 마찬가지이다. … 그러한 착취는 임금관계를 통해 은폐된다. 화폐임금은 취득할 수 있는 일정 부분의 소비재에 대한 권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임금노동은 임금 수준에 기초해서 노동자들이 직업을 옮길 수 있게 해 준다. …109)

 

그렇다. 그들은 이미 스승의 견해를 완전히 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승보다 더 못하다. 그래도 그들의 스승은 이것은 알고 있었다.

 

노동자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 노동자는 노동자 국가에서도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아니며, 하나의 집합체로서 그들의 소유권이 생산수단의 집적소인 국가의 소유를 통해서 표현 …110)

 

노동자 국가에서도 개별노동자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일정하게 자유롭다. 아니, 집단적․사회적 소유 하에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야, 한 생산 수단에 메여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생산수단과 관계를 맺고 노동할 수 있다. 그런 자유를 캘리니코스와 하울은 임금노동의 증거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나가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이 글을 쓰며, 이 말이 이렇게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한 분 알게 되었다. 이 글의 나름의 성과라면 이것이 아닐까?

이 글은 어떻게 보면, 시론(始論)으로 썼지만, 같은 의미로 다르게 보면, 그것은 미완성작이라는 말이 된다. 곧 미비한 점들을 보완하여, 완성작을 제출할 것을 약속드리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비판은 계속될 것이다!

 


 

1)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최초의 노동자‧민중 정부인 ‘빠리 꼬뮌’이 존재했었다. 그것의 역사적인 의의는 지대하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열기에 그것이 존립했던 기간은 너무도 짧았다.

 

2) 하지만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역사는, 그 전개 과정 속에 나타났던 다양한 모순들에 대응하며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었기에, 그 과정 전체를 정확하게 분석하며 그 속에서 교훈을 찾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많은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 역시 그러한 과정의 하나로 제출된 것이며, 내용 중 여러 부분은 여전히 많은 연구와 토론을 통해 규명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3) 국제사회주의자들(IS), ≪국가자본주의란 무엇인가≫, 1996, p. 4.

 

4) 같은 곳.

 

5) 크리스 하먼, “크리스 하먼의 서문”, ≪소련국가자본주의≫, 책갈피, 1993, p. 24.

 

6) C. Harman, “The storm breaks”, International Socialism, Spring 1990. (크리스 하먼, “폭풍이 인다: 소련과 동유럽에서의 혁명”,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 갈무리, 1995, pp. 31-32.)

 

7) 같은 글, p.35.

 

8) 크리스 하먼, “후기: 스탈린에서 고르바초프까지”, ≪소련국가자본주의≫, p. 272.

 

9) 정성진, “토니 클리프”, ≪이론≫ 제2호(1992년 가을호), pp. 187-188.

 

10) 우리도 정성진 교수와 마찬가지로 그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다만, 주목의 이유가 정반대일 뿐이다. 대조국 전쟁의 폐허를 딛고, 쏘련 인민들이 다시금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그 시기, 토니 클리프는 대략 이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쏘련의 노동자들을 나찌독일 하의 독일 노동자들보다 가혹하게 착취당하고 있다. 쏘련은 관료들이 지배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이다. 쏘련의 서방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체제이다. 쏘련 인민들은 스딸린주의적 관료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체제를 건설해야 한다.’ 또한 그는 나찌독일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인민민주주의 사회 건설이 한창이던 동유럽 각국을 ‘쏘련제국주의에 종속된 국가자본주의’(“On the Class Nature of the “People’s Democracies””, 1950. 7.)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1950년 6월부터 시작된 ‘조선반도의 전쟁’을 제국주의 간의 전쟁이라고 비판하며, 결국 쏘련을 ‘타락한(degenerated) 노동자 국가’, 동유럽 각국을 ‘왜곡된(deformed) 노동자 국가’라고 하며, ‘조선반도 전쟁’에서 ‘조선’의 방어를 주장했던 제4인터내셔널의 영국지부(혁명적 공산주의당, Revolutionary Communist Party)와 논쟁 끝에, 자신의 조직으로부터 축출되었다. 이후 그는 ≪사회주의 평론(Socialist Review)≫이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며, 이 조직은 1960년 국제사회주의(International Socialism) 그룹으로, 1976년 현재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 Socialist Workers Party)으로 발전되었다. 이것이 토니 클리프의 역사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역사이며, 한국의 다함께의 전사(前史)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가장 힘들 때, 그때부터 자신들은 그것을 자본주의라고 했다! 그것을 타도해야한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커다란 자랑꺼리일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 그것은 경멸의 대상일 뿐이다!

 

11) 정성진, “역자 서문”, ≪소련국가자본주의≫, p. 5.

 

12) 크리스 하먼, “크리스 하먼의 서문”, ≪소련국가자본주의≫, p. 25.

 

13) D. Howl, “The law of value and the USSR”, International Socialism, Winter 1990. (데렉 하울, “가치 법칙과 소련”,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풀무질, 1995, p. 149.)

 

14) P. Binns‧M. Haynes, “New Theories of Eastern European Class Societies”, International Socialism, Winter 1980.

 

15) 토니 클리프,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본 트로츠키의 정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 같은 책, p. 273.

 

16) 같은 글, p. 293.

 

17) “[쏘련은 거대한 하나의 공장이고, 쏘련에서 임노동과 가치법칙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인용자] 이러한 클리프의 주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운동법칙을 개별 생산 단위에 강제하는 자본들 간의 경쟁이 소련의 경우에는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의 형태를 취한다는 그의 논증을 향한 일보 전진이다. 그런 식으로 그것은 전적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소련이 “하나의 거대 공장”이라는 가정은 우리가 임금노동의 문제를 논의하게 될 때 무너진다. … 스탈린 사후에 강제노동의 감소에 대한 클리프의 설명(1964년에 출간된, 러시아에 관한 그의 책 제2판에 제시된 설명)은 임금노동이 국가자본주의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을 무너뜨린다.”(A. Callinicos, “Wage Labour and State Capitalism: a reply to Peter Binns and Mike Haynes”, International Socialism, Spring 1981; 알렉스 캘리니코스, “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pp. 252-253.)

 

18) 같은 글, p. 257.

 

19) 정성진, 같은 곳.

 

20) 토니 클리프, “한국어판에 붙이는 저자 서문(1990. 8.)”, 같은 책, p. 18.

 

21) 따라서 이 글은 ‘쏘련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의 시론(始論)적 글이다. ≪노동사회과학≫ 제1호(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08.)의 졸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이행기”에서 “현실사회주의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청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약속했는데(p. 143.), 이 글 역시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이 작업은 계속될 것이며 보다 많은 연구와 토론을 통해, 국제사회주의자(IS) 그룹의 ‘쏘련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보다 세세한 차원의 비판도 더불어 계속될 것이다. 즉, 이 글이 끝이 아니다; 비판은 계속될 것이다!

 

22) 브루노 알(Bruno R)이나 막스 샤흐트만(Max Shachtman)은 쏘련을 역사상 전혀 새로운 체제인 ‘관료 집산제’로 규정한다.

 

23) 앞서 말한 대로, 이 글은 시론(始論)적 성격의 글로, 이 중 간략하게 몇 가지만 먼저 제출하기로 한다.

 

24) 토니 클리프, “6장 스탈린주의 사회‧경제‧정치에 대한 심층 고찰”, 같은 책, p. 174.

 

25) 토니 클리프, “4장 10월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 사회의 물질적 유산”, 같은 책, pp. 149-149.

 

26) 토니 클리프, “부록Ⅱ 관료집산주의 이론: 비판”, 같은 책, pp. 310-311.

 

27) 토니 클리프, “6장 스탈린주의 사회‧경제‧정치에 대한 심층 고찰”, 같은 책, p. 174.

 

28) 맑스는 당시 이러한 국가의 예로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 등을 언급한 적이 있다.

 

29) 토니 클리프, “6장 스탈린주의 사회‧경제‧정치에 대한 심층 고찰”, 같은 책, p. 175.

 

30)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74.

 

31) 토니 클락, “트로츠키주의란 무엇인가”(≪노동사회과학 제1호≫, 2008. 11.,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제5장 트로츠키와 쏘비에트 관료주의”를 참조하라.

 

32)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75.

 

33) 토니 클리프, “2장 스탈린주의 러시아에서 국가와 당”, 같은 책, pp. 102-103.

 

34)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04.

35)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04.

36)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05.

37)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05.

38)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06.

39)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08.

 

40) 토니 클리프, “6장 스탈린주의 사회‧경제‧정치에 대한 심층 고찰”, 같은 책, p. 175.

 

41) 모스끄바 재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라. 마리오 소사, “1930년대 쏘비에트공화국에서의 계급투쟁”, ≪정세와 노동≫ 제37호(2008. 7/8.)~41호(2008. 12.).

 

42)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p. 167-168.

 

43) 토니 클리프, “부록Ⅱ 관료집산주의 이론: 비판”, 같은 책, p. 310.

 

44) 토니 클리프, “5장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의 공통점과 차이점”, 같은 책, p. 154.

 

45) 토니 클리프, “9장 소련의 계급투쟁”, 같은 책, p. 234.

 

46) 토니 클리프, “6장 스탈린주의 사회‧경제‧정치에 대한 심층 고찰”, 같은 책, pp. 167.

 

47) 김현식,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 김영사, 2007, p. 147을 참조하라. 탈북 교수 출신인 저자는, 오히려 한국에서 그러한 연줄의 존재를 느꼈으며, 여기서는 연줄이 없으면 교수도 할 수 없다는 경험담을 적어놓고 있다. 저자는 탈북 후, 교수자리를 구하고 있지 못하다가 우연히 만난 총장, 학장 등의 연줄로 한국에서 교수직을 가지게 된다.

 

48) 토니 클리프, “5장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의 공통점과 차이점”, 같은 책, p. 152.

 

49)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52.

50)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54.

51)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p. 157-158.

 

52) F.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박종철출판사, 1994, p. 305.

 

53) F. 엥겔스, 같은 글, pp. 305-307.

 

54) V. I. 레닌,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새길, 1990, p. 88.

 

55) 토니 클리프, “5장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의 공통점과 차이점”, 같은 책, p. 154; p. 157.

 

56) 토니 클리프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 나라가 노동자 국가라면 마르크스주의는 도대체 무엇이며 제4인터내셔널은 왜 있어야 하는가? ‘신민주주의 체제들’이 노동자 국가라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회주의 혁명은 “그 자신을 의식하는 역사”라고 말한 것은 논파당한 셈이다. 엥겔스의 다음과 같은 진술 역시 반박된다. …

모든 마르크스주의 교사들이 쓴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 로자 룩셈부르크도 엉터리 같은 얘기를 한 것이 된다.” (토니 클리프, “부록Ⅰ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본 트로츠키의 정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 같은 책, pp. 290-291.) 이제 우리는 이 말을, 위대한 형이상학자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57) 토니 클리프, “부록Ⅰ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본 트로츠키의 정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 같은 책, p. 289.

 

58) 사실 그는 ‘이행기’의 의미도 굉장히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소련국가자본주의≫ 전체에서 모두 그러한데, 특히 “제3장 노동자 국가의 경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이행기’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김해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이행기”, ≪노동사회과학 제1호≫, 2008. 11., 노동사회과학연구소.

 

59) 토니 클리프, “3장 노동자 국가의 경제”, 같은 책, p. 136.

 

60)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의 저작 전반에 걸쳐 계속되는 혼동이 있다. (예: “노동자 국가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동전의 앞면으로서 사회주의로의 이행 단계임에 반해…”(같은 책, p. 154.))

 

61) K. 맑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박종철출판사, 1995, p. 375.

 

62) 토니 클리프, “5장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의 공통점과 차이점”, 같은 책, p. 154.

 

63) 토니 클리프, “1장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사회‧경제 관계들”, 같은 책, p. 31.

 

64) 사실은 세 개인데, 나머지 하나는 사기는 아니다. 그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번역상의 문제일수도 있고, 어찌 보면 관용적으로 쓰는 것이기도 하니 밝히지 않고 넘어간다.

 

65) 1920년대 초, 쏘련이 ‘노동조합논쟁’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토니 클락, “트로츠키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사회과학 제1호≫, 2008. 11., 노동사회과학연구소; V. I. 레닌, “직업동맹, 현 시기 그리고 뜨로츠끼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 ≪노동자정치신문≫ 제44호~46호.

 

66) 토니 클리프, “1장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사회‧경제 관계들”, 같은 책, pp. 32-33.

 

67) ≪쏘베트 정권 40년 업적 통계집≫, 1958, 외국문 서적 출판사, p. 342.

 

68) 토니 클리프, “1장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사회‧경제 관계들”, 같은 책, p. 33.

 

69) 기연수, “소련의 노동조합과 정책참여”, ≪슬라브 연구≫ 5권, 1989. 1., 한국외국어대학교소련 및 동구문제연구소 , pp. 89-90.

 

70) 기연수, 같은 글, pp. 90-91.

71) 기연수, 같은 글 , p. 89.

 

72) 한홍순, “소련의 노동조합의 역할”, ≪슬라브 연구≫ 5권, 1989, 한국외국어대학교소련 및 동구문제연구소 , p. 108.

 

73) 한홍순, 같은 글, p. 111.

74) 한홍순, 같은 글, p. 102.

75) 한홍순, 같은 글, p. 101.

 

76) 토니 클리프, “1장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사회‧경제 관계들”, 같은 책, pp. 32-33.

 

77) ㄴ. ㄱ. 아렉산드롭‧ㄷ. ㅁ.겐끼나, ≪쏘련에 있어서의 단체계약의 제문제≫, 1949, 농민신문사, pp. 4-5.

 

78) 기연수, 같은 글, p. 88.

 

79) 이러한 노동의 성격에서, 쏘련이 여전히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은 여전히 자발적인 것이기 보다, 배분되어야 하고 통제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의식적으로 ‘삶의 제일 욕구로서의 노동’ ‘보편적 노동’이라는 것을 계속적으로 이야기하고, 교육해내는 것이 역시 여전히 중요한 과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쏘련에서의 이 문제―자발적이고 보편적인 노동―는 그 체제가 붕괴되기 직전까지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다.

 

80) 토니 클리프, “1장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사회‧경제 관계들”, 같은 책, p. 37.

 

81) 레닌, “테일러 시스템― 기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 레닌 전집, 24권, 임채희 역, ≪진실의 길≫ 35호, 1914년 3월 13일, 서명 : 엠. 엠. 수고본과 대조한 신문 ≪진실의 길≫ p. 370-371.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최근 당건설 토론과 강령논의에 대한 비판과 입장”, ≪노동자정치신문≫ 제51호, p. 4에서 재인용.)

 

82) “크리스 하먼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자로서 당의 주간 신문 Socialist Worker의 편집자이다.”(크리스 하먼, ≪알기 쉬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1996, 풀무질의 책 앞날개의 저자소개에서)

 

83) Cliff, “Russia: A Marxist Analysis”. (크리스 하먼, “후기 스탈린에서 고르바초프까지”, 같은 책, p. 258에서 재인용.)

 

84) ≪쏘베트 정권 40년 업적 통계집≫, 1958, 외국문 서적 출판사, p. 308.

 

85) 鴨川和子, “제3장 소련 각지를 방문하고”, ≪12년간의 소련생활 체험기≫, 1990, 비봉출판사, p. 159.

 

86) 토니 클리프, “4장 10월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 사회의 물질적 유산”, 같은 책, p. 147.

 

87)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48.

88)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48.

89)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48.

90)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49.

 

91) 토니 클리프, “부록Ⅰ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본 트로츠키의 정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 같은 책, pp. 291-292.

 

92) 토니 클리프, “9장 소련의 계급투쟁”, 같은 책, p. 237.

 

93) 토니 클리프, “부록Ⅱ 관료집산주의 이론: 비판”, 같은 책, p. 308.

 

94) 토니 클리프, “부록Ⅰ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본 트로츠키의 정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 같은 책, pp. 289-290.

 

95) ‘교수 노조’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96) 토니 클리프, “부록Ⅱ 관료집산주의 이론: 비판”, 같은 책, p. 302.

 

97) 토니 클리프, “7장 소련 경제와 마르크스의 가치법칙 및 자본주의 위기론(스탈린주의 체제의 경제 결정론)”, 같은 책, pp. 191-193.

 

98) 토니 클리프, 같은 글, p. 195.

 

99) 데렉 하울, 같은 글, p. 128.

 

100) 토니 클리프, “7장 소련 경제와 마르크스의 가치법칙 및 자본주의 위기론(스탈린주의 체제의 경제 결정론)”, 같은 책, p. 199.

 

101) 정성진, “역자 서문”, 같은 책, p. 4.

 

102) Grundrisse, S. 657.

 

103)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책갈피, 1993, pp. 250-251.

 

104) 데렉 하울, 같은 글, p. 131.

 

105) 토니 클리프, “3장 노동자 국가의 경제”, 같은 책, p. 128.

 

106)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은 글, p. 256.

107)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은 글, pp. 247-251. 

108)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은 글, p. 254.

109) 데렉 하울, 같은 글, pp. 134-139.

 

110) 토니 클리프, “6장 스탈린주의 사회‧경제‧정치에 대한 심층 고찰”, 같은 책, p. 173.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0개의 댓글

연구소 일정

3월

4월 2024

5월
31
1
2
3
4
5
6
4월 일정

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6

일정이 없습니다
7
8
9
10
11
12
13
4월 일정

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0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3

일정이 없습니다
14
15
16
17
18
19
20
4월 일정

1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0

일정이 없습니다
21
22
23
24
25
26
27
4월 일정

2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7

일정이 없습니다
28
29
30
1
2
3
4
4월 일정

2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0

일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