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쏘련 사회주의의 붕괴 ― 계획과 시장의 문제를 중심으로

 

백철현 ∣ 전국노동자정치협회 회원

 

 

우리가 괴롭고 쓰라린 진실을 솔직히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리고 확실하게 우리의 난관들을 극복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V. I. 레닌)

 

 

쏘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에 그것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는 연구와 투쟁이 진행되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트로츠키주의 정치세력 중에서 국가자본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해서 가장 활발하게 규명이 진행되었다. 이들은 1928년 집산화를 계기로 해서 30년대부터 스탈린주의 반혁명 세력에 의해서 쏘련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복귀되었고, 따라서 1991년 쏘련의 붕괴는 사회주의의 붕괴가 아닌 단지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에 다름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쏘련 사회주의의 붕괴를 진정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계기라고 보면서 환영했다. 조정환 등 자율주의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세력들이 이 주장을 중심으로 해서 쏘련 사회 붕괴의 원인을 규명하고 있다.

국가자본주의는 맑스의 ≪자본론≫의 원리로 쏘련 사회의 자본주의성을 규명해보라는 원칙적인 입장에 대해 제대로 답변을 못하는 지극히 비과학적인 이론이다. 그리고 사회 성격을 그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에 근거해서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는 도그마를 가지고 현실을 갖다 맞추는 독단적이고 종파주의적인 입장이다. 뿐만 아니라 쏘련 붕괴를 계기로 제국주의 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제국주의자들의 주장과 결과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입장이다. 이로 인해 이들의 주장은 70년 이상에 걸쳐 강력하게 현실로 존재했고, 여전히 일부 국가에서 존재하는 사회주의를 부정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일구는 새로운 계기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원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회의주와 청산주의를 가져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쏘련 붕괴 이후에 쏘련의 사회성격을 ‘국가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PD경향의 세력들도 있는데 그들은 사회주의가 발전할수록 국가가 소멸로 가야하는데 국가권력이 강화됐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들은 제국주의의 포위와 내부의 계급투쟁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권력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회주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러한 비현실적인 비판 외에 이들에게는 쏘련사회에 대한 어떠한 과학적인 분석도 기대할 것이 없다.

한국사회에 강요된 반공주의와 지적 식민지주의, 지적 게으름과 탐구정신의 부족 등으로 인해 이러한 독단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이 여과 없이 받아들여져서 만연하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는 쏘련사회의 붕괴 원인에 대해 과학적으로 규명하고자하는 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아니, 쏘련의 붕괴 이후에 전 세계적 차원에서 이뤄진 이론적‧실천적 시도들이 이제야 겨우 한국사회에 받아들여지면서 주체적 고민으로 수용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쏘련사회의 붕괴 이유에 대해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대체로 두 가지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그리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전 세계의 주요한 정치세력들은 쏘련의 몰락이 스탈린의 사망 이후에 20차 당대회로부터 시작된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흐름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맑스-레닌주의 독일공산당(MLPD) 같은 마오주의적 경향을 가진 맑스-레닌주의 정치세력들은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 반혁명 쿠데타로부터 쏘련 사회가 새로운 유형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변모됐으며 쏘련은 이를 바탕으로 사회제국주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수정주의적 흐름을 쏘련 붕괴의 주된 원인으로 사고한다는 점에서는 그리스공산당의 입장과 유사하지만 이때부터 쏘련이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사회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국가자본주의 입장과 유사하다다. 다만 이들은 반혁명의 시기가 스탈린 이후인 흐루시초프 집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점에서 국가자본주의 입장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흔히들 역사에서 레닌만큼 사회주의 적대자들로부터 적대와 시기, 규탄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또 사회주의의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레닌만큼 찬사와 존경을 받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스탈린만큼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람들로부터 적대와 시기, 찬사와 존경을 동시에 받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스탈린은 제국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 적대자로부터, 심지어는 파시스트 히틀러와 동일한 사악하고 악마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바로 이 스탈린에 의해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쏘련 사회주의의 전제와 억압이 시작되었다는 비난이 이뤄지고 있다.

물론 제국주의자들은 이것의 뿌리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시작되며 맑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사회주의 독재의 이론과 원리를 제공했다는 언사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나 일정한 왜곡과 편견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조류의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레닌은 스탈린처럼 적대와 저주를 받고 있지는 않다. 스탈린은 스탈린과 그 정치체제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트로츠키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사민주의와 유로 코뮤니즘 세력들로부터도 비난과 적대를 받고 있고, 이른바 ‘개인숭배’와 ‘공포정치’를 이유로 사후에 들어선 흐루시초프 세력들로부터 시작해서 ‘신사고’를 외치며 쏘련 사회를 직접적으로 붕괴하게 만든 고르바초프 정치집단들로부터도 극도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반면에 스탈린은 당시 전 세계의 공산당들과 인민들로부터 레닌 사후에 러시아 사회주의의 기초를 다지고 파시즘과의 투쟁 속에서도 러시아 사회주의의 거대한 발전을 이룩하고 식민지 해방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스탈린은 쏘련 붕괴 이후 실업과 착취의 강화, 빈부격차의 확대 등 자본주의의 적대적 모순들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러시아 인민들로부터 다시 존경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스탈린주의’를 바라보는 역사적,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

 

스탈린이 시기와 적대, 동시에 존경과 극찬의 대상이 된 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 30여 년 동안 사회주의를 건설한 실질적인 건설자라는 데 이유가 있다. 스탈린과 당시의 러시아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세력들로부터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비판은 ‘스탈린주의 관료주의’가 쏘련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스탈린주의’ 비판은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반공주의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사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주의 체제의 오류, 부정적인 측면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탈린주의’ 비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과학성을 회복해야 한다.

 

첫째, 가장 먼저 반공주의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반공주의는 심지어 대다수 대중들한테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의 반공주의는 그 어느 국가보다 더 극심한데 이로 인해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정보 왜곡, 역사 왜곡,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등으로 인해 사회주의 역사에 대해 지극이 잘못되고 편향된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반공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그것도 극악한 반공주의가 판치는 분단된 자본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의식적으로 극단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특히 트로츠키 진영 내부의 가장 극단적인 기회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는 정치세력들은 쏘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봄으로써 쏘련과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 북과 쿠바 등의 사회주의에 대해 타도해야할 착취체제, 반동체제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의 반쏘‧반공주의는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미치는 반공주의와 달리, 마치 국가자본주의 관점이 진정으로 올바른 혁명적 관점이라고 착각함으로써 능동적으로 반공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데 더 심각성이 있다. 이렇게 내면화된 반공주의는 강요된 반공주의보다 훨씬 더 극복하기 어렵다. 이들 좌익연하는 반공주의자들은 국가자본주의 비판에 대한 과학적 비판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을 하고 있지 못한데 그것은 이들 스스로가 얼마나 비과학적인 독단과 맹목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둘째, ‘스탈린주의’ 비판이 개인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은 스탈린을 악마화하는 제국주의 진영뿐만 아니라 흐루시초프의 ‘개인숭배’ 비판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나고 있다.

 

제20차 당대회는 그러나 부정적인 정치적 현상에 대해서 표면적이고 형식적으로 접근했다. 그것은, 집단지도 및 기타 민주집중제 원칙의 붕괴, 국가기관 내의 관료제의 성장, 출세주의, 당의 간부나 지도부에 의한 권력 및 지위의 남용, 사회 전체에 걸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원칙의 위반과 같은 모든 현상의 원인을 단순히 스탈린 ‘개인숭배’에 돌렸다. 이러한 현상들, 특히 국가와 당 조직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해진 것이나 당 자체 내부에서 관료주의적 경향이 성장한 것과 관련한 현상들의 구조적 뿌리를 찾아내려는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1)

 

개인숭배의 문제는 일면적으로 제기해서는 안 된다. 개인숭배의 문제는 핵심 지도자에 대한 권위와 신뢰의 표현일 수 있는데 이것을 일면적으로 제기한다면 레닌에 대한 그것 역시도 ‘개인숭배’라고 할 수 있다. ‘개인숭배’는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노동자와 인민의 삶을 거대하게 향상시킨 기초를 다지고,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지도력의 중심에 서 있었던 스탈린의 권위와 능력, 헌신에 대한 존경과 신뢰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도하게 나타나고 당내 활발한 토론과 민주주의를 제한한다면 극단으로 흐른다면 부정적인 현상이 될 수 있다. 또한 ‘개인숭배’ 현상은 집단적 지도체제의 약화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비판이나 자본주의 국가의 반공선전은 물론이고 ‘스탈린주의 비판’에서 나타나는 비판은, 맑스-레닌주의적 비판이 아니다.

쏘련 공산당 내부에서의 당내 투쟁은 가장 먼저 일국사회주의를 둘러싼 논쟁에서 비롯됐다. 트로츠키를 비롯해서 지노비에프 등 반대파들은 세계혁명이 되지 않으면 러시아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고 결국은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국사회주의는 국제주의 정신을 저버린 것으로 쏘련 사회주의를 민족주의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독일에서의 혁명 패배로 사실상 세계혁명의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농민과의 강력한 동맹과 자체 산업발전으로 러시아 내에서 사회주의를 충분하게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반대파의 주장이 가능성 없는 세계혁명에 기대는 모험주의적인 것이고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패배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의 성공적인 사회주의의 건설을 통해 세계혁명의 진지를 구축하고 다른 나라에서의 혁명에 대한 지원을 통해 세계혁명을 추구한다면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가 승리한다 해도 제국주의가 버티고 있는 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는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주장은 대단히 현실주의적인 것으로, 레닌 당시 독일과의 브레스트 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당과 러시아의 운명을 앞에 두고 당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촉발된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논쟁에서 부하린은 좌파 사회혁명당과 결합하여 러시아 혁명이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혁명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이 논쟁에서 ‘전쟁도 평화도 아닌’ 입장에 서 있었는데 부하린파가 당내에서 트로츠키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굴욕적이더라도 즉각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레닌의 입장에 대립했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첨예한 당내 논쟁에서 혁명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할 조건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고, 당분간 독일혁명의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전쟁을 하자는 것은 극단적 모험주의로 이는 러시아 혁명의 운명을 내건 눈먼 도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국사회주의 논쟁 이후 당내에서의 논쟁은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였다. 쏘련의 급속한 공업화 정책과 농업 집산화 정책은 후진적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만 하는 역사적 필요성 때문에 제기되었다. 이것은 격렬한 당내 논쟁을 유발하였고, 이 당내 논쟁에서 스탈린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경제계획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과정에 대해 마치 스탈린의 권력욕의 문제라든지, 당내의 트로츠키와의 경쟁심에서 비롯됐다든지 하는 관점은 운동진영 내에서의 쏘련사회 분석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이것은 몰역사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역사관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쏘련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가로막는 지극히 비과학적인 입장에 불과하다.

 

셋째, 국가자본주의 진영의 비판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은 완전한 사회주의 상을 원리적으로, 가상적으로 만들어 놓고 현실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를 침소봉대하여 쏘련을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쏘련 사회에 대한 비판은 비과학적이고 종파주의적일뿐만 아니라 방법론적으로 변증법적 부정이 아니라 전면 부정, 완전 부정의 태도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이런 국가자본주의 입장에 서서 오류와 한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현실의 사회주의가 일궜던 거대한 성과를 전면 부정한다.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진 이후에 중국에서는 이것을 두고, 스탈린 시대에 대한 전반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고, 자아비판이 없었다는 점, 사회주의 우당들과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제국주의 첩보기관과 언론기관에 먼저 이 내용을 흘린 점 등을 들어서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스탈린을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그가 어떤 점에서는 옳고 그른가를 알기 위해 적절하고 모든 방면에 걸친 분석을 해야 하며 그로부터 유익한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 그가 행한 옳고 그른 일들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현상들이었으며 그 시대의 각인을 지니고 있다.2)

 

쏘련의 1차적인 책임으로 인해 사회주의 국가 간의 국제주의는 심각하게 위협을 겪고 사회주의 국가는 분열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 간의 이러한 분열과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이 쏘련을 독점자본주의, 사회제국주의로 과도하게 규정했으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정당한 것이었다.

레닌은 물론이고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를 건설한 주도자였던 스탈린의 경우에도 역사적으로 제한된 현실을 뚫고 모순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졌던 러시아 사회의 봉건주의적인 잔재와 생산력의 낙후 여기다가 제국주의의 침략과 내전으로 인한 극단적인 어려움, 소농민적인 생산의 지배, 민중들 절대 다수의 문맹과 기술적, 문화적 후진성, 세계 혁명의 실패와 고립 등 극단적인 어려움 속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더욱이 독일 파시즘의 침략으로 인해 쏘련은 2천만 명의 인민들이 죽거나 다치고 산업기반이 폐허가 된 속에서 다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조건 속에서도 쏘련은 고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노동시간 단축, 여성의 권리 개선, 문화적 발전 등 노동자인민에 대한 거대한 복지를 일궜다.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으로 제한된 조건에서 주어진 극단적 외부상황은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엄청난 오류와 한계, 시행착오를 겪게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스탈린을 개인이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그 시대의 성과와 한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모든 방면에 걸친 사심 없는, 과학적인 분석을 하고 그로부터 실질적인, 혁명적인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파시즘에 대한 승리와 사회주의의 비약적 발전이라는 거대한 성과는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오류와 성과는 쏘련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공산주의 건설의 역사적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었고, 그것들은 그 시대의 각인을 지니고 있었다. 맑스의 말대로 인간은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는 따라서 현재를 강력하게 규정하는 과거 세대의 역사적 조건, 제한된 상황 하에서 그 자신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명한 역사적 원칙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공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의 오류가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오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객관적인 법칙을 어길 수는 없지만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전위인 당과 인민들의 주체적인 노력 속에서 오류를 최소화하고,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시한다는 맑스의 또 다른 말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스탈린 시대의 오류는 역사적으로 제한된, 지극히 극단적인 객관적인 조건 속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점도 있었고, 주체적으로 충분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주체의 오류로 인해 극심하게 나타난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1929년부터 시작된 농업 집산화와 강력한 공업화는 NEP의 거대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문제가 첨예하게 나타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농업 집산화와 강력한 공업화는 스탈린 개인의 머리나 ‘스탈린 관료집단’의 머릿속에서 인위적으로 착상된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의 내전은 공업생산과 운송수단을 철저하게 파괴했고 농촌에서도 파종면적을 대폭 축소시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각한 가뭄까지 겹치면서 혹독한 기근이 일어났다. 1920년의 곡물수확은 1909-13년 평균의 54%밖에 되지 않았다. 1921년의 수확량도 3760만 톤으로 전전(前戰) 시기 총수확량 평균의 43%에 머물렀고, 가뭄 피해지역의 수확은 훨씬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서서히 NEP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농업생산이 늘어나게 되면서 1923년에 와서는 농업에서의 파종면적은 전전(前戰) 수준의 90% 수준을 회복하고 농촌에서의 식량부족도 일정 정도 해결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농업의 회복과 성장에 비해 여전히 공업은 전전(前戰)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내전으로 인해 철저히 파괴되었던 공업기반시설이 아직 다 복구되지 못했고 원료와 운송수단의 부족에다가 숙련된 노동자의 부족, 경영능력의 미숙까지 겹쳐서 공업의 성장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농업생산의 증가는 농업생산물의 가격을 상대적으로 낮추게 한 반면 공업생산의 부진은 공업생산물의 가격을 폭등하게 했다. 1923년 10월경에는 높은 공업생산품과 낮은 농업생산품의 상대적 격차의 심화를 말하는 ‘협상가격차’ 위기가 정점에 달했는데 공산품 가격은 1913년의 276%였고, 농산물 가격은 89%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부농은 물론이고 농민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곡물을 시장에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3)

이로 인해 도시의 노동자들은 식량위기를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경제정책으로 인한 자유로운 거래의 확대로 인해 네프맨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되고, 부농 역시 강화되면서 이들이 식량을 독점하고 투기를 일삼는 등 도시에 원활하게 식량공급을 하지 않았다. 이로써 공업용 곡물이 공급되지 않아 공업이 발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근간이 되는 공업이 발전하지 않는 한 수출, 자재, 내수를 공급하지 못하고 농촌에 공업소비품과 트랙터와 기계 등 생산수단과 비료 등의 원료를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업발전과 농촌에서의 집산화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또한 공업이 발전하지 못하는 한 농업에서의 농산물을 도시로 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도시의 식량위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1925년부터 집산화와 강력한 중공업육성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날카롭게 일어나고 있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은 이 논쟁에서 당시 당내 좌파로 분류되는데 농업에서의 사회주의적 원시적 축적을 바탕으로 해서 중공업을 강력하게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우익으로 분류되는 부하린 일파는 NEP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중공업을 균형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심지어 “부자가 되라”고 하면서 농촌의 계속적인 물질적 발전이 사회주의 공업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하린의 주장은 농촌에서의 부농과 새로운 자본가들의 대두로 심각해지고 있는 계급모순을 간과한 주장이었다. 부하린은 중공업기술을 서방에서 무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주장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쏘련을 고립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현실성이 없고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쏘련이 서구 자본주의에 종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실적인 정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스탈린은 이 논쟁에서 처음에는 좌파의 입장이 노농동맹을 파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다가 이후에는 강력한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를 주장하는 좌파의 입장을 수용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이 처음에는 좌익 반대파의 입장을 비판하다가 나중에는 “좌익 반대파의 옷을 훔쳤다”고 비판하는 세력들도 있다. 실제 스탈린에 의해 취해진 28년 정책은 좌익 반대파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1928년 강력한 중공업 발전과 농업 집산화 정책이 마련되면서 프레오브라젠스키를 포함한 좌익 반대파들은 이때 스탈린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에 대해 25년도에 강력한 공업화와 집산화가 추진됐다면 때 이른 모험주의 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한다. 영국의 맑스주의 경제학자인 모리스 돕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만약 1925년에 그것이 틀렸다면, 3년 후에도 역시 틀린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1928년에 옳았다면 1925년에는 그 비난이 오류였다는 것이 이로써 증명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1928년 혹은 1929년에 실천 가능한 것이, 공업과 농업이 더 허약했던 이전 시기에도 필연적으로 실천 가능했다고는 볼 수 없다. 혹은 1928년 상황에서는 절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농촌과 곡물시장에 대한 부농의 영향이 더 작았던 시기에도 똑같이 요구된다는 식으로 결론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4)

 

NEP로 인해 나타난 경제적 문제에 대해 전면 부정하는 당내 세력들은 없었고, 다만 이러한 위기를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돌파하는가의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5년여 동안 당내에서 격렬한 논쟁과 준비를 거쳐서 강력한 중공업 발전과 농촌 집산화를 중심으로 하는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때부터 파시즘의 대두로 인해 애초에 계획되었던 소비재 산업의 투자계획이 삭감되고 그만큼을 철도건설로 돌리고 군수산업에 집중하는 강력한 중공업 우선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에 대한 최종적인 계획은 1928년에 완료되고 29년부터 실제적인 정책으로 실시되었는데 1930년에 나찌당은 독일 제2당이 되었고, 1932년에는 제1당이 된 데 이어서 1933년에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알렉 노브처럼 독일 파시즘의 대두에 대해 당시는 미약한 우려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의도적 왜곡에 불과하다.

결국 강력한 중공업 발전 정책과 농업 집산화는 레닌 당시의 전시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처럼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 추진되었다. 맑스가 생산수단 생산부문이라고 했던 제1부분 즉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공업을 우선 발전시키는 정책을 취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었다. 일부에서는 경공업 발전을 통해서 인민들의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지만 경공업에서의 생산물 생산 역시도 중공업의 발전이 선행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농촌 집산화는 공업에 필요한 공업용 곡물원료와 도시 노동자에게 식량을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는 기초였기 때문에 양자는 동시에 수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라는 객관적 필요가 그 추진 방식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은 농촌 집산화의 과정에서 농민과의 동맹이라는 레닌주의적 원칙에서 일탈했다. 물론 부농이 집단농장으로 자신의 곡물과 가축을 징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곡물을 감추고 가축을 집단도살하고, 집단농장에 대한 방화와 농촌에서 집산화를 추진하던 당 요원들에 대해 테러를 가했다는 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광범위한 중농조차도 집산화에 반발했던 것을 보았을 때 이러한 저항은 과도한 집산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실제 7주 만에 농민 인구의 절반이 집단농장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이 정책이 얼마나 단시간 내에 과도하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집산화 이전에 스탈린 스스로도 빈농과의 강력한 동맹을 축으로 해서 중농과의 협조, 부농과의 투쟁이라는 노농동맹의 정신과 강압이 아닌 설득과 모범의 창출로 집산화를 해야 한다는 레닌주의적 원칙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집산화 초기의 문제점이 극단적으로 나타나자 스탈린은 “성공에 취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여 집산화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정점에 서서 집산화를 계획하고 독려했기 때문에 집산화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문제점에서 스탈린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실제 스탈린이 집산화의 문제점을 내부 비판한 이후에 집단화에 대한 일정 정도의 자율성이 이뤄지자 집단화된 농민의 비율이 3달 만에 55%에서 23%로 떨어졌다는 것은 집산화에 강제가 동원됐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농촌에서의 집산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사회주의 농촌에서의 계급투쟁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부농은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생사를 걸고 반동적인 저항을 했던 것이고, 빈농들은 계급투쟁이 가져온 열정과 열광이 지나쳐서 당이 공식적으로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농의 재산을 빼앗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계급으로서의 부농은 소멸했다. 이 농촌 집산화 과정에서 부농은 추방당하고 기근까지 겹치면서 수백만이 죽었다는 통계가 있다. 물론 이 통계는 콘퀘스트 등 반동 우익 역사가에 의해 왜곡되고 과장된 수치기는 하지만 과도한 집산화의 방식이 재앙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알렉 노브처럼 당시의 계급투쟁을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적 관점으로 묘사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반면에 모리스 돕처럼 당시의 오류를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불가피한 산고의 과정 정도로 인식하는 것도 동의하지 못한다.5)

이 집산화와 강력한 중공업 우선 발전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는 사회주의 건설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인해 소비재산업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축소되기는 했으나 이 부분의 총생산량은 87%나 증가했다. 노동자계급이 임금 외에 사회기금으로부터 무상으로 보장받는 각종의 소비기금까지 합쳐, 쏘련 노동자 인민들의 물질적 생활수준은 훨씬 더 높아졌다. 쏘련 인민들은 물론 당시의 생산력 발전 수준의 한계로 인한 질적 한계는 있었지만 무상교육, 무상주택, 무상의료 혜택을 받게 되었고, 기업에 부설된 판매장과 식당의 현저한 증가로 인해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여기에 자본주의 어느 국가보다도 짧은 노동시간과 각종 요양소, 휴양소, 연금 등 거대한 사회주의의 물질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집중적인 기술교육 등으로 노동자계급 출신이 기술자, 생산관리자, 경영자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 사회주의의 강력한 중공업 발전은 십여 년 뒤인 1941년 독일 파시즘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산업적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또한 이 산업적 기반 위에서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에 트랙터, 콤바인 등 생산수단을 광범위하게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흐루시초프 당시 성장률이 대폭 낮아지고, 브레즈네프 시절에는 성장률이 정체상태를 겪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 시기의 비약적인 성장이 쏘련 사회주의 인민이 누리게 되는 복지정책의 근간을 마련하도록 했다. 쏘련의 비약적인 성장과 실업의 해소,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은 비슷한 시기에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미증유의 세계 대공황으로 노동자계급이 죽음과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시점이기에 더욱 빛이 났다.

그러나 이 집산화 과정에서 중농 일부에게까지 가해진 강압행위와 기근 등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손실이 발생하고 이즈음 당 내부에 가해진 숙청은 일부 그것이 당내의 제국주의자와 반혁명 분자들의 테러행위 등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비롯됐지만 무고한 당원들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면서 당내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왜곡했다. 공업화와 집산화 과정은 그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희생이 반드시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 과정에서의 혁명의 적들과 불가피하게 치르는 물리적인 내전과는 다르다. 사회주의 내에서의 모순을 처리하는 과정 역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의 계급투쟁의 한 과정이지만 그것을 적대적 모순처럼 처리해서는 안 된다. 농촌에서의 부농은 혁명 초기 대토지 소유자와 달리 신경제정책을 사용하는 과정 즉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적 요소의 활용 과정에서 생겨난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장과 왜곡이 더해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스탈린 시대의 과오가 두고두고 제국주의자들에게 반공주의 선전의 소재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흐루시초프를 비롯해서 쏘련 내 수정주의자들에 의한 분산화 된 계획과 시장요소의 과도한 도입 등 수정주의 정책의 빌미가 됐다.

 

넷째, 스탈린은 레닌 사후 수십 년 동안 쏘련 사회주의의 실질적인 건설자였다. 레닌 생전의 전시공산주의와 NEP(신경제정책)의 시기를 지나서 계획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쏘련 사회의 생산의 실질적인 조직체계를 비롯한 법적관계 등 상부구조가 스탈린 시대에 그 주춧돌을 놓았기 때문에, 쏘련 사회의 문제를 논할 때 스탈린주의라고 말하고 쏘련에 대한 비판이 ‘스탈린주의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고 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을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적 흐름은, 이른바 ‘스탈린주의’ 비판을 중심으로 해서 이뤄졌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주의 비판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과정을 ‘평화로운 이행’이라고 하고, 평화공존론은 ‘제국주의와의 협조’ 정책으로 변질됐다. 국가의 문제에 있어서도 흐루시초프는 1961년 10월 제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 인민의 국가’라고 선언하였다. 도시와 농촌의 대립,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남아 있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서 여전히 생산력 발전이 뒤떨어지는 사회주의 내부 모순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선언하는 것은 극단적인 주관주의이고 조급한 것이다. 또한 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도록 한다. 게다가 여전히 제국주의 국가의 쏘련 파괴공작과 고립말살 시도가 강력하게 펼쳐지고 있고, 쏘련 내부에서 사회주의 생산을 약화시키기 위한 저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노동자계급의 지도성을 폐기하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신사고’라는 이름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찬양하고, 이른바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의 복지정책과 국가의 개입에 대해 사회주의 계획을  ‘수렴’할 수 있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맑스주의 국가론을 전면 부정하는 고르바초프 시대의 ‘신사고’는 계급투쟁과 계급모순을 철저히 해체시키고 계급협조를 추구했다.

 

전 지구적인 대결의 상황 하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모순은 분명히 주요한 모순의 지위로 격상되었습니다. 이 모순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첫째의 이 모순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며 필연적으로 격렬한 대립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사고는 올바른가?6)

 

고르바초프 시대의 ‘신사고’는 맑스-레닌주의 계급성과 과학성의 철저한 해체이며 부르주아 국가와 자본가 계급과의 화해사상이다. 흐루시초프의 ‘전 인민의 국가’ 사상은 고르바초프 시대에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이해와 전 인류의 이해를 대립시켜서 계급성을 해체하고 부르주아 휴머니즘을 주장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갔다.7)

맑스‧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국가란 지배계급의 개인들이 그들의 공동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형태”라고 하였는데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이해를 중심에 세워야 한다. 다만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의 국가는 한 줌도 안 되는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부르주아 국가와 달리 대중국가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고, 노동자계급의 이해가 전체 사회의 이해이며, 개인의 자유와 전체 사회의 자유가 대립되지 않는다. 맑스주의를 배반하는 계급협조사상은 마침내 정치적 다원주의라는 명목 아래 부르주아 정당을 포함하는 다당제의 도입에서 자본주의 시장전면 공개, 사유화까지 나가면서 사회주의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자본주의 독재자 옐친의 등장과 쏘련의 최종적 해체는 이미 내적으로 붕괴된 사회주의의 마지막 형식마저도 내던져버리고 공개적이고 노골적인 형태로 자본주의의 복귀를 선언하는 형식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스탈린 시대의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 부정하는 수정주의가 사회주의를 붕괴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 이후 흐루시초프 때부터 고르바초프가 ‘스탈린주의’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이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스탈린시대와 다른 수정주의 정책을 취했는데 쏘련 사회 전체시기를 통틀어 ‘스탈린주의’라고 과연 부를 수 있는지 다시 평가해봐야 한다.

 

다섯째, ‘스탈린주의 관료주의’가 쏘련 사회 몰락의 원인이라는 관점의 문제다. 이러한 관점은 쏘련을 붕괴로 몰아간 경제적 토대에 대한 분석이 빠져 있고, 관료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물론 관료주의의 문제는 사회주의 경제를 조직하는 데 있어 막대한 해악을 끼치지만 관료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을 막을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을 번성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관료주의는 사회주의에서도 금방 사라질 수 없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상부구조에 반영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는 자본주의경제의 분업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맑스‧엥겔스는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최대의 분업은 도시와 농촌 간의 분리”(맑스‧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라고 했다. 사회주의에서도 관료주의는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는데 사회주의 생산조직화에 있어서도 착취자적 성격은 없어지지만 경제의 관리가 필요한데 이것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낳도록 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주의는 계획경제를 의식적으로 조직하기 때문에 대중의 참여가 보장되지 않으면 구상과 실행의 분리가 고착화되면서 관료주의가 번성할 수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노동분업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회주의를 지양하고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고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조절하는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아무도 배타적인 영역을 갖지 않고 각자가 그가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나 스스로를 도야시킬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조절하기 때문에, 사냥꾼, 어부, 양치기, 혹은 비판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곧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밤에는 비판을 할 수 있게 된다.8)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대중들이 구상과 실행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말한바 있는데 막상 혁명 이후에 노동자계급 출신의 기술자, 전문가들이 없어서 자본가들한테 양보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나오는 관료주의를 지극히 경계했다. 따라서 이러한 관료주의와의 투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계급의식의 무장을 위한 계급의식 고양과 문화혁명이 필수적으로 전개되어야 하고 관료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대중들이 국가기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기술적, 정치적, 문화적 훈련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관료주의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개인숭배’로만 현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약화시킬 뿐이다.

 

 

수정주의의 문제

 

우리는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적 흐름을 시작으로 해서 결국 고르바초프 때 가장 극단화된 형태로 나타난 수정주의, 개량주의가 장기간에 걸친 쏘련 사회주의 붕괴의 내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세는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을 어렵게 하는 외부적 요인이었고 이러한 내적 원인을 더 심화시켰다. 이러한 쏘련의 자본주의 복귀 과정은 중국에서 모택동 사후 4인방과의 투쟁을 거쳐 중국 사회주의의 지도자가 되었던 유소기나 등소평을 시작으로 해서 수십 년 동안 개혁개방 정책을 추구한 중국 사회주의가 마침내 자본주의로 변모했던 과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마오주의 공산당 진영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수정주의 경향이 단지 수정주의자들의 계획된 쿠데타나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반혁명 음모에 의해서 나타났다는 주관주의적 분석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이들은 수정주의에 대한 주목할 만한 분석9)이 있지만 대단히 주관주의적 경향이 있다.

흐루시초프 집권 이후부터 수정주의적 경향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쏘련사회를 독점자본주의, 사회제국주의로 보는 이들의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못한다. 이들은 국가자본주의와 동일한 오류에 빠졌다. 이들은 스탈린집권 시절에 관료주의와 투쟁을 했지만 위로부터의 투쟁을 하였고, 스탈린 사후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었던 말렌코프 같은 이는 관료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이 위험성을 과소평가하고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봤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이 관료주의와 자본주의자들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가장 원칙적으로 올바른 투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모택동 당시의 문화대혁명은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 같은 계급협조주의와 수정주의, 중국 내부의 유소기나 등소평 같은 수정주의와 관료주의를 아래로부터 척결하기 위해 진행됐다. 하지만 그것의 지나침과 주관주의적 오류, 경제적 혼란의 야기 등은 수정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택동 사후 수정주의자들이 그 정책을 추진하는 강력한 빌미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원칙적으로 올바른 투쟁을 했던 중국에서 모택동 사후 등소평과 유소기를 중심으로 하는 수정주의 세력들이 개혁개방이라는 이름으로 수정주의의 길을 걷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이 흐름이 극단화되어 중국을 자본주의로 이르게 한 원인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는 것인가?

이렇게 수정주의의 흐름은 이들의 사상적 경향의 문제도 있지만 스탈린이나 모택동 시기의 오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들 수정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분적 오류, 불가피한 오류, 실제적 오류나 시행착오를 해결하는 것을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에 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극단적인 수정주의의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수정주의의 문제는 음모와 쿠데타의 문제가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 레닌은 공히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소부르주아적 상품생산과 교환의 문제가 사회주의 수정주의의 물질적 토대가 된다고 보았다.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에 있어서는 이 수정주의의 경제적 토대는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 법령과 명령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강제적인 방식은 종교를 단박에 없애려면 할수록 종교가 끈질기게 저항하고 번성하는 것처럼 수정주의를 도리어 강화한다.

이 수정주의의 경제적 뿌리를 없애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집요한 폭로와 사회주의 사상 교육, 성실한 설득과 모범의 창출을 통한 사회주의 원리의 생활화, 경제적으로 우월한 사회주의의 집단적 생산의 조직화가 절실하다. 따라서 우리는 수정주의의 문제를 분석함에 있어서 사회주의 경제, 즉 사회주의 생산과 분배의 조직원리, 작동방식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

맑스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이룬 물질적 발전을 활용해서 현실을 바꿔 나가는 진보적 운동이라고 규정하면서 원론적인 수준에서 사회주의 상을 언급했다. 쏘련 노동자계급과 인민들은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봉건제의 후진적 잔재가 경제, 문화, 관습 모든 곳에 뿌리 내린 러시아 자본주의에서, 내전과 제국주의의 공세 속에서 아무도 가보지 않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70년 이상 존재했던 사회주의의 구체적 현실이 주어져 있다. 이 현실은 지나간 과거로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의 오류나 시행착오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한다.

쏘련 사회주의가 아무도 간 적이 없는 눈길을 걷는 것처럼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가면서 거대한 성과와 더불어 오류와 한계,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집단적 역사 경험이 있다. 더군다나 후진적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일궈야 했던 과정에서 고통 받아야 했던 사회주의자들의 노고를 벗어던질 수 있을 만큼 자본주의가 일궈 놓은 거대한 물질적 성과가 있다. 관료주의가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전문가들에게 양보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지적, 기술적으로 뛰어난 노동자 계급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이 사회주의 건설을 무조건적으로 수월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발전한 국가독점자본주의인 한국사회에서 혁명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세계혁명이 진척되지 않으면 상당 기간 제국주의의 침공과 고립화, 압박이 존재할 것이며, 반혁명적인 반동 집단의 단발마적인 발악으로 인해 유혈적인 내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있다고 하더라도 혁명 이전은 물론이고 혁명 이후에 과거의 오류나 한계를 최소화하기 위한 내적 역량을 쌓아야 한다. 이른바 새로운 사회의 지도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생산을 합리적이고 안정적으로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준비된’ 계급이 되어야 한다.

96, 97년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에서 현대자동차 노조의 정갑득 위원장은 “생산도 투쟁이다”라고 했는데 투쟁을 회피하고 파업을 파괴하기 위한 기회주의 논리와 역사적, 상황적 논리가 다르지만 우리 역시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생산을 조직화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을 충분하게 키워야 한다.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후에 “혁명을 성공시키는 것은 새털을 드는 것만큼 쉬웠다”라면서 혁명의 성공보다 혁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이 된다고 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정부의 즉각적 임무에서”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는 “단호함만이 아니라 회계와 적절한 분배의 능력까지도 요구하는 행정의 조직화가 정치경제적 임무의 중심”이라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혁명적 파괴자의 열정뿐만 아니라 혁명 이후에는 사회주의의 능력 있는 건설자, 합리적인 경제의 조직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생산과 분배 과정에서의 계획의 원리나 당시 발전수준에서의 시장의 활용, 노동능력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의 경제적 자극, 성과분배의 문제 등에 정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쏘련의 몰락 이후에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생산과 분배의 조직화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있어서 근본적인 경제법칙의 문제, 이 법칙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문제, 사회주의 계획은 어떻게 이뤄졌고, 계획과정에서 부딪치는 난관들, 계획을 중심에 세우되 상품-시장 관계를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문제 등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 사회주의 계획과 상품-화폐관계의 문제는 사회주의 강화와 붕괴의 문제를 규명하는데 핵심적인 문제라는 점을 철저하게 간과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경제의 조직화에 있어서 계획과 시장의 문제(정확히 말하면 사회주의 시장과 상품, 가치법칙의 문제는 자본주의와 달랐기 때문에 상품-화폐관계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에 대해서 철저하게 연구해야 한다.

과거의 유산이 우리를 짓누르기도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집단적 경험, 인류의 지성과 지혜, 오류와 시행착오의 거대한 역사적 성과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더 멀리, 더 깊이 역사발전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은 쏘련 사회의 경제적 조직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하지만 아직 살아서 투쟁하는 북한과 쿠바의 살아 있는 경험, 유고와 중국의 시장사회주의의 구체적 사례, 21세기 사회주의라는 남미 볼리비아 혁명의 경험과 사례 등의 연구를 통해 훨씬 더 풍부해져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회주의 경험에 대한 지극히 일부의 규명에 그칠 것이다. 이 글은 그 규명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방법론과 원칙에 대한 제시에 그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맑스-레닌주의 원칙과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더욱 장기적이고 집단적인 총체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쏘련 사회주의에서의 시장, 가치법칙의 문제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산물을 상품으로서 생산한다. 상품을 생산한다는 사실이 이 생산양식을 다른 생산양식으로부터 구별하는 점은 아니지만, 그 생산물의 지배적이고 규정적인 성격이 상품이라는 것은 이 생산양식을 다른 생산양식으로부터 구별하는 점이다”10)라고 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상품생산이 지배적인 사회다. 심지어 노동자의 노동력조차도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이다. 물론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도 상품시장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수준과 범위는 미약했다. 자본주의 이전 생산의 대부분은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자가 직접 생산물을 소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의 극히 일부만이 판매됐다.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은 이와 달리 대부분의 생산물이 자신이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상품교환 과정에서 자본가들은 이윤을 실현한다. 그런데 이윤이 실현되는 것은 상품시장에서 생산물이 판매된 이후지만 이윤이 만들어지는 것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해서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자본이 생산을 하는 것은 바로 이윤을 위해서다. 자본은 이윤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인류에게 절박한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생산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를 만들어가는 근본법칙은 이윤추구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윤추구가 근본법칙이고 본질이라면 시장은 그것의 현상이고 이윤실현의 기구이자 통로이다. 자본주의 상품은 개별 자본가의 이윤추구 욕구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전 사회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생산이 아니라 무계획적이고 무정부적으로 이루어진다.

 

각자는 자신이 우연히 가지고 있는 생산 수단을 갖고서, 자신의 특수한 개인적 교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위해 생산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 것과 동일한 품목의 상품이 얼마나 시장에 나올지, 도대체 그 가운데 얼마나 사용될지를 알지 못하며, 어느 누구도 자신의 개별 생산물이 실제적 수요를 발견할지, 그 비용을 회수할지, 또는 도대체 판매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가 지배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생산 형태와 마찬가지로, 상품 생산은 특유한, 내재적인, 자기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는 법칙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법칙들은 무정부 상태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무정부 상태 속에서, 이 무정부 상태를 통하여 자신을 관철해 나간다.11)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생산은 개별 공장 내에서의 계획적인 생산에도 불구하고 전체 사회 내에서 무정부적 생산이 이뤄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윤추구 욕구에 의해 추동되는 무정부적 생산과 경쟁으로 인해 자본주의에서는 과잉생산 공황이 발생하는데 이 공황은 빈곤으로 인해 노동자가 충분하게 소비할 만큼의 구매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더 극심해진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공황을 통해 전체 사회의 격렬한 혼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과잉자본을 해소하고 공황에서 몰락하지 않은 경쟁력 있는 자본은 더욱더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간다. 자본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인 소유를 통해 노동자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배자가 된다.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그것의 결실을 독차지하는 것은 자본이다.

엥겔스의 말대로 자본주의는 무정부 상태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성을 통해서 자신의 경제법칙을 관철해 가는데 이것이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이다. 생산이 사적으로 이루어지고 이 사적생산을 바탕으로 시장에서 생산물의 자유로운 교환이 이뤄지는 시장과 교환이 존재하는 한 가치법칙은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정부적 생산과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상품교환이 이뤄지는 자본주의와 달리 사회주의에서의 가치법칙은 존재하는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노동자계급이 생산수단을 장악하여 전체 사회를 위한 계획적이고 균형적인 생산과 분배를 조직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맑스는 사회주의가 발전하여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가 달성되면 상품생산은 사라지고 이에 따라 가치법칙 역시 소멸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엥겔스 역시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에서는 상품생산이 제거되고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철폐되고 사회적 생산을 조직하는 사회에서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은 사라지는가? 과연 자본주의에서의 가치법칙과 다르게 공산주의에서 가치규정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맑스는 “고타강령초안 비판”에서도 가치규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생산 수단을 공유 재산으로 하는 것에 기초를 둔 조합적 사회 내부에서는 생산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교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생산물에 사용된 노동이 이 생산물의 가치로, 즉 생산물이 보유하고 있는 어떤 물적 특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반대로 개인적 노동이 더 이상 우회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이며, 그러므로 그 모태인 낡은 사회의 모반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아직도 들러붙어 있는 공산주의 사회이다. … 상품 교환이 같은 가치물의 교환인 한, 여기서는 분명히 상품 교환을 규제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가 지배한다. 내용과 형식은 변하는데, 그 이유는 변한 사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동 이외에는 어떤 것도 줄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소비 수단 이외에는 어떤 것도 개별적인 소유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 생산자들 사이의 소비수단의 분배에 관해 말하자면, 상품 등가물의 교환에서와 동일한 원리가 지배하여, 어떤 형태의 동일한 만큼의 노동은 다른 형태의 동일한 만큼의 노동과 교환된다.12)

 

맑스는 자본주의의 생산과 분배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에서는 자본주의의 사적 노동의 생산물 교환과 다르지만 가치규정은 존재한다고 하고 있다. 심지어 사회적 생산이 유지되는 한, 몇 가지 점에서 가치규정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철폐된 뒤에도 사회적 생산이 유지되는 한, 가치규정은 다음과 같은 의미―즉 노동시간의 규제, 각종 생산분야로의 사회적 노동의 분배, 그리고 이것에 관한 부기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지배적이다.13)

 

그렇다면 쏘련에서 가치법칙은 존재했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경제법칙과 어떻게 다른가? 쏘련에서도 사회주의 사회 고유의 법칙은 존재하는가?

계획과 시장의 문제는 사회주의 경제의 조직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 때문에 가장 치열하게 토론된 부분이다. 스탈린은 계획이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에서도 다른 어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경제법칙은 존재한다고 했다.

 

사회주의의 기본 경제 법칙의 본질적 특징과 요구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기술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부단히 성장시키고 개선함으로써 전체 사회의 부단히 성장하는 물질적 및 문화적 수요를 최대한으로 충족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최대한의 이윤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 및 문화적 수요를 최대한으로 충족시키는 것, 호경기에서 공황에로 또 공황에서 호경기로, 이렇게 중단되면서 생산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이 부단히 성장하는 것, 사회의 생산력의 파괴를 동반하면서 기술 발전이 주기적으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높은 기술적 토대 위에서 생산을 부단히 개선하는 것이 곧 그것이다.14)

 

맑스와 마찬가지로 스탈린 역시 사회주의에서도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상품과 상품 생산이 있는 곳에는 가치 법칙도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가치 법칙의 작용 범위는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상품 유통 즉 매매를 통한 상품 교환, 주로 개인 소비 상품 교환에 미치고 있다. 물론 이 분야에서는 가치 법칙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조절자의 역할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가치 법칙의 작용은 상품 유통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작용은 생산에도 미친다. 물론 우리 사회주의적 생산에서는 가치 법칙이 조절적 의의는 가지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역시 생산에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생산을 지도함에 있어서 그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렇다고 하여 이 모든 것은 가치 법칙의 작용 범위가 우리나라에서도 자본주의 하에서와 같다거나 가치 법칙이 우리나라에서도 생산의 조절자로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 가치 법칙의 작용 범위는 우리 경제 제도 하에서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으며 국한되어 있다.15)

 

이처럼 사회주의에서도 가치법칙(엄밀하게 말하면 법칙이라는 말 자체에 한 사회를 지배하는 규정적인 힘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가치규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할 것이다)은 존재한다. 하지만 가치법칙이 존재하지만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과 가치법칙이 한 사회를 지배하는 조절자의 역할을 하는 경제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이다. ‘스탈린주의 비판’이 아무런 과학적, 역사적인 판단 없이 횡횡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학문적, 운동적 풍토이므로 맑스의 주장을 다시 한 번 검토함으로써 이 문제를 논의해보자!

자본주의에서의 가치법칙은 사회주의와 달리 무정부적인 생산이 지배적이므로 사전에 생산과 분배의 계획에 의해서 생산이 이뤄지지 않는다. 가치법칙은 가장 먼저 자본주의 상품의 생산과 교환, 노동력 분배를 규제하는 조절자의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상품은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동일한 노동시간이 들어간 상품과 상품이 서로 교환된다. 그런데 실제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상품의 가치와 시장가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수요보다 상품이 너무 많이 생산되면 그 상품의 시장가격은 가치에 근접하거나 내려가면서 생산은 축소되고, 일부 자본가들은 다른 생산부분으로 이전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이 부분에 대한 생산수단과 노동력 사용이 줄어들게 되면 다시 상품생산이 줄어들게 되어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지게 된다.

반대로 상품이 적게 생산된 생산부문에서는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지기 때문에 가치보다 시장가격이 높게 형성되면서 생산이 확대되고 생산수단과 노동력에 대한 사용이 늘어나게 된다. 이처럼 생산물의 가격은 외형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 형성되는데 시장가격이 가치를 중심으로 위 아래로 변동하기 때문에 그 가격을 배후에서 결정하는 중심축이 바로 가치이다. 이 가치가 배후에서 생산과 분배를 규제하고 생산의 조절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치법칙이라고 하는 것이다.

가치법칙은 또한 자본주의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시킨다. 한 생산부문에서 신기계 도입과 기술개량과 혁신으로 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이 더 적게 들어가게 되면 가치가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시장에서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므로 이 자본가는 더 적은 가치가 들어간 생산물을 같은 사회적 가치로 판매하기 때문에 특별잉여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치법칙은 단순상품 생산자를 분해하여 자본가와 임노동자로 분화시킨다. 더 월등한 생산수단과 생산방법을 채용한 자본가에 비해 그렇지 못한 단순상품 생산자는 상품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동시간이 들어가므로 경쟁에서 견디지 못하고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인 것이다. 맑스는 위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철폐된 후에도 가치규정이 지배적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자본주의 가치법칙처럼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맑스는 노동시간의 규제, 각종 생산분야로의 사회적 노동의 분배, 그리고 이것에 관한 부기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지배적이라고 했다. 이 말은 자본주의에서의 가치법칙의 전면적 적용과 다르게 가치규정이 제한적인 의미에서 작용한다는 말이다.

먼저 사회주의에서는 자본가계급에 의한 착취는 없지만 여전히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한 만큼 분배받는다. 다만 여기서도 노동의 대가를 다 받는 것이 아니라 생산확장을 위한 기금, 노인이나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을 위한 기금, 결국은 노동자 자신에게 돌아갈 사회적 복지를 위한 기금 등을 제외하고 노동시간에 의해 사회에 공헌한 만큼 분배 받는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등가교환의 원리가 작용한다. 그러나 맑스는 그 내용과 형식이 자본주의와는 다르게 변한다고 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는 타인의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고 다른 자본가로부터 생산수단과 소비수단을 공급받는다는 측면에서는 사회적 노동이지만 사전적 계획 없이 개별적으로 행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수요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사적노동의 생산물이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 그 유용성이 증명될 때만 상품이 판매될 수 있다.

반면 사회주의에서의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 노동으로 생산수단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면서 지난해의 생산과 수요를 바탕으로 하여 사전에 사회적 필요를 엄밀하게 예측하고 계산하여 생산한다. 이러한 계획을 바탕으로 사회적 노동을 재분배한다. 사회주의는 수십만 가지의 생산물 계획을 사전에 정확하게 계산하고, 균형적인 생산과 분배를 위하여 계산과 조정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어느 때 보다도 부기(簿記)가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회적 노동의 배분과 부기는 사회적 노동이 유지되는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쏘련에서는 혁명 뒤에 주요 생산수단과 금융기관을 국유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과 상품교환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먼저 농민을 비롯한 광범위한 소생산자들과 소상인들의 교환이 여전히 광범위하게 남아 있었다. 러시아에서 국가는 대외무역을 독점했는데 다른 나라와의 상품과의 교환이 존재하고 있었다. 신경제정책 당시에는 부농과 네프맨(신경영자)들에 의한 상품생산과 교환비중이 전시 공산주의 당시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러시아 농촌에서는 집산화 뒤 국영농장(소프호즈)과 협동조합 형태의 집단농장(콜호즈)이 남아 있었는데 국유화된 기업의 공업제품과 집단농장 생산물의 상품교환이 이뤄졌다. 그러나 공업제품 중 생산수단은 국가의 소유권이 변하지 않은 채로 집단농장에 임대되었기 때문에 상품이 아니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 집권 시절인 1958년 기계 트랙터 공급소(MTS)를 폐지하고 집단농장이 기계를 몇 년에 걸쳐 구매하여 직접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함으로써 상품관계가 확장되게 되었다.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상품-화폐관계의 확대는 자본주의적 요소가 강화되고 쏘련 사회주의를 붕괴로 몰아가는 주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과 그것의 자본주의적 해석

 

자본주의적 생산의 조직화, 공장제 수공업을 거쳐서 대공업으로의 발전은 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했고 자연스럽게 시장을 활성화 하였다. 봉건제 내부에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확대를 기초로 한 시장의 확대는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로 발전하게 하는 경제적 원동력이었다. 과거 원시 공동체의 교환은 상품형태를 발전시켰고 이것이 원시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일정한 대상들에 국한되긴 하지만 사적소유는 이미 이 공동체 내부에서, 처음에는 외부인들과의 교환 속에서, 상품 형태로 발전한다. 공동체의 산물이 상품 형태를 취할수록, 다시 말해 그것들 가운데 생산자 자신의 사용을 위해 생산되는 것은 적어지고 교환이라는 목적을 위해 생산되는 것이 많아질수록, 공동체 내부에서도 교환이 본래의 자연 성장적 분업을 밀어낼수록, 개별 공동체 성원들의 재산 상태는 점점 더 불평등해지면, 낡은 토지 공동 소유는 점점 더 무너지며, 공동체는 점점 더 급속히 해체되어 분할지 농민들의 촌락으로 전화한다.16)

 

원시공동체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공동체 내부에서 생긴 잉여생산물을 먼저 외부 공동체의 잉여생산물과 교환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공동체 내부에서도 상품교환이 발전하면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안데스 고원 지대의 공동체는 외부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침투 속에서 상품교환 관계가 활성화 되면서 연합한 공동체가 분열하고 결국은 붕괴했다.

원시 공동체와 역사적 조건이 분명히 다르지만 사회주의의 붕괴 역시 상품-시장관계, 자본주의적 생산과 시장이 점차적으로 증대하다가 결국은 사회주의 생산과 분배를 완전히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넘어 갔던 것이다. 실제 유고나 쏘련 사회주의에서의 자본주의적 경제관계의 지속적인 강화는 인민들 내부, 관료와 인민들 내부, 연방국가 간의 빈부격차를 확대시키고, 연방 공동체 내부의 가속화된 분열과 해체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자본주의의 복귀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과 토지소유권을 박탈당했다.

레닌 역시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이런 식의 자본주의 부활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자유로운 교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거래에 대한 제한이 없는 것으로,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자유로운 교환과 거래의 자유는 소소유자들 간의 상품유통을 의미한다. 최소한 맑스주의의 기본(elements)을 공부한 우리 모두는, 이 교환과 거래의 자유가 상품생산자를 자본의 소유자와 노동력의 소유자, 즉 자본가와 임노동자로 분화시킨다는 것, 즉 자본주의적 임금노예제를 부활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에 걸쳐 정확히 농업적 상품경제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17)

 

계획과 시장의 문제에서 시장과 가치법칙을 강조하는 것은 수정주의자들의 주요한 특징인데, 그들은 처음에는 계획을 중심에 두고 시장과 가치법칙의 부분적 활용을 주장하다가 점차적으로 시장에 대한 강조에서 나중에는 시장사회주의를 사회주의 경제 조직화에 있어서 필연적인 과정으로 주장했고 결국에는 계획을 폐기하고 시장을 수용했다. 쏘련 사회주의의 계획의 포기와 시장자유화, 사유화가 사회주의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스탈린 당시의 계획논쟁에서 우파들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가장 극단적인 수정주의자인 고르바초프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등소평 같은 수정주의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레닌주의 원칙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경제정책이다. 수정주의자들은 불가피한 후퇴, 우회로를 통한 사회주의의 강화를 위한 자본주의적 요소의 도입과 활용을 위한 일시적 정책이 마치 사회주의 경제발전의 보편적인 법칙인 양 주장하고 있다.

등소평의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라고 중국사회를 규정하면서 이 단계는 1백여 년에 걸쳐 계속될 것이고 그 동안에 급속한 생산력 발전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등소평의 유명한 ‘흑묘백묘론’이다. 쥐를 잡기 위해서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상관없다는 말이다. 즉 사회주의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충분하게 활용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주의에서는 인민의 복지를 높이고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역시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과 부조화하게 되면 이것이 사회의 붕괴를 가져온다. 공산주의적 생산관계가 더 확립되면 될수록 사회주의는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잘 알다시피, 제국주의 개입과 제국주의의 후원을 받는 반동분자들과의 내전으로 인해 생산이 황폐화되고, 식량징발로 인한 농민의 불만고조와 이로 인한 크론슈타트 반란 등으로 농민과의 동맹이 위태롭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고안되었다. 신경제정책은 내전을 수행하기 위해 잉여식량을 징발했던 것을 현물세로 대체하고 남은 잉여곡물을 그 지역시장에서 자유로이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핵심이었다. 이것은 자유교환을 확대함으로써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일정 정도의 용인이었다. 그러나 레닌에게 있어서 신경제정책은 불가피한 일시적 후퇴이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진지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레닌은 러일전쟁 때 일본의 ‘노기’장군의 예로써 신경제정책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기 위해 제1단계로 격렬한 강습의 단계를 거쳤으나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 병력의 손실을 입게 되었고 제2단계는 그보다 더 어렵고 완만한 포위공격을 했다. 그러나 격렬한 강습을 통해 거대한 희생을 당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적의 저항력을 시험하고 아군의 실력을 판단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전술마련의 계기가 되는 영웅적 행위이고 유일하게 가능한 전술이었다고 했다. 레닌에게 제1단계는 전시 공산주의를 의미하고, 제2단계는 신경제정책을 의미한다. 이렇게 레닌에게 신경제정책은 보다 더 어렵고 힘든 자본주의적 흐름에 대한 포위의 시기였다. 레닌은 신경제정책을 통해 자본주의적 요소를 활용하되 그와 동시에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강화하여 그것을 포위하여 섬멸하려 했던 것이다. 신경제정책은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일시적 후퇴이지만 동시에 장기적 공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경제정책을 전략적 후퇴의 측면에서만 보는 것은 기회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 노선인 것이다.

레닌은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주도성과 농민과의 확고한 동맹을 강조했다. 신경제정책이 자본주의로의 후퇴의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공세일 수 있는 것은 ‘누가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의 문제다. 이와 같은 ‘누가 누구를’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정치권력의 확고한 주도성과 주요 산업과 은행, 토지 국유화, 대외무역의 국가독점을 통해 사회주의적 산업을 틀어쥐고 있는 것과 협동조합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신경제정책은 자유로운 교환을 허용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복귀의 위험성에 대비해 국가에 의한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 계획이 가능하도록 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는 첨예한 계급투쟁의 문제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프롤레타리아가 정책을 지도하는 것이다. 지도 및 지배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가장 긴급하고 ‘곤란한’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정책을 지도할 수 있어야만 한다. 현재 가장 긴급한 문제는 농민경제의 생산력을 즉각적으로 증대시킬 방책을 취하는 것이다. 오로지 이러한 방식으로만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강화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18)

 

자본주의의 발전(일정 정도까지 그리고 얼마 동안은 불가피한)은 국가자본주의의 궤도로 향하게 하는 올바른 방법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국가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전화시키는 것을 보장하는 조건들로 국가자본주의를 포위할 수 있는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다.19)

 

레닌은 신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과 국가자본주의 간의 협정이고 동맹이며 블록이다”라고 했다. 레닌은 이 협정을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계제 대공업을 발전시키고 무정부적인 소소유자적 관계에 대한 국가규제적 경제관계를 강화한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신경제정책이 자본가에 대한 이권양도와 같다고 했는데 그 협정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되는 그러한 기준과 조건은 역관계에 달려 있으며 투쟁 속에서 결정된다. 왜냐하면 이권양도 또한 투쟁의 한 형태이며 다른 형태의 계급투쟁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것은 계급투쟁에 대한 계급화해의 대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천이 투쟁의 방법을 결정할 것이다.20)

 

신경제정책에 대해 오토 바우어 같은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는 “보라, 이제 그들은 자본주의로 후퇴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부르주아적이라고 항상 이야기하고 있다”며 저발전한 국가에서의 혁명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삼으려 했다.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언론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복귀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레닌은 이것을 비웃으면서 신경제정책이 자본주의와의 경쟁이 아니라 격렬한 투쟁이라고 했다.

 

이것은 경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격렬하게 필사적인 투쟁이며, 최후의 투쟁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에 가까운 생사를 건 투쟁이다.21)

 

신경제정책에 대한 레닌의 태도를 볼 때 수정주의자들이 레닌의 신경제정책을 운운하면서 자신들의 수정주의를 은폐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논리인지를 알 수 있다. 수정주의 정책의 출발인 흐루시초프가 집권할 당시에는 레닌이 신경제정책을 실시할 때와 달리, 파시즘과의 전쟁 후에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완전히 복구된 시점이었다.

 

사회주의가 발전하고 점차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 사회주의의 원리를 이미 생활 속에 형성된 공산주의의 특징과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키는 일, 그리고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는 모든 수단을 통일시키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1952년에 스딸린의 저서 ≪소련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가 이 원리로부터 이탈하게 됨으로써 문제의 해결은 방해받게 되었다 …. 이 저서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조건 아래 사용된 생산수단은 상품의 성격을 띨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했다. 사회주의에서 상품생산 범주의 이용을 강화하는 것은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운동이 아닌 공산주의로부터의 이탈로 제시되었다.22)

 

위에서 흐루시초프의 집권 이후 기계 트랙터 보급소(MTS)의 폐지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그 이후 쏘련에서 생산수단은 상품의 성격을 띠었다. 스탈린 시대에 생산수단은 상품으로써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집단농장에 공급하는 것을 통해 사회주의적 관계를 강화하는 주요한 고리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해 집단농장에 생산수단과 원료를 제대로 공급하고 생산수단의 수리와 갱신을 보장함으로써 집단농장 생산물의 가격을 낮출 수 있게 하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에서 노동자 농민의 동맹의 굳건한 경제적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을 활용할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는데 마치 시장 자체를 전면 부정한 것으로 왜곡하여 생산수단마저 상품으로 돼야 한다는 것은 수정주의적 입장에 불과한 것이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시절에 써졌는데 실제 브레즈네프 시대에 와서는 더욱더 사회주의 상품-화폐관계에 관한 수정주의적 입장이 강화되었다.

스탈린 사망 이전인 1952년 5차 계획에서는 생산성 향상과 더불어 인민의 소비수준을 높이기 위한 소비재 생산에 대한 강조가 높아졌다. 흐루시초프는 56년 20차 당대회 이후 실질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이것은 물질적 생산력이 높아짐에 따라 인민의 욕구가 크게 증대했기 때문이고, 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 조치만 놓고 보면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소비재 산업 자체와 소비재 생산의 증가에 있어서도 역시 생산수단과 원료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중공업 발전을 통한 노동 생산성 향상이 우선하면서 소비재 산업과 균형적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 생산이 성장하지 못하면 소비공급도 한계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흐루시초프는 이러한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소비재 산업의 가속적 발전에 상대적으로 더 집중하면서 성장률은 대폭 떨어지기 시작했다.

쏘련 경제의 성장률이 떨어지게 된 주요한 이유는 중앙계획의 약화와도 관련이 있는데 흐루시초프는 1957년 중앙 계획위원회(고스플란)를 지역 계획기구(소브나르호제)로 대체했다. 이 결정은 과도한 중앙집권화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면서 급속한 지방분권화를 통해 지역 자체 내에 자기 완결적인 경제구조를 갖추도록 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경제의 통일성을 약화시키고 국가 전체의 이해보다는 지역의 수요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지역파벌주의를 강화시켰다. 이와 함께 1958년에는 집단농장의 자율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기계 트랙터 보급소(MTS)를 폐지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그런데 MTS의 폐기는 집단농장에 자율성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단농장이 생산수단을 구매하고 그것을 스스로 관리하고 유지하도록 함으로써 도리어 집단농장에 과중한 부담을 지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집단농장 생산물의 생산비용을 높임으로써 생산물의 가격을 치솟게 하였다.

흐루시초프 때의 1956-60년의 6차 5개년 계획은 1년 만에 중지되고 1957년 4월에 다시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당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 1961년의 새로운 계획은 ‘상품-화폐’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지역뿐만 아니라 개별기업의 독립성 강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계획은 기업이 자신의 순수입의 더 많은 부분을 개별기업 노동자의 생산자극을 위해 사용하고 다른 기업과 직접 생산 및 공급계약을 체결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1959-65년의 7개년 계획은 분산화된 경제계획으로 인해 지역주의가 강화됐는데 이러한 가운데 경제적 혼란이 계속되었고 1963-64년에는 쏘련 경제에서 처음으로 8%미만의 성장을 하였고 1963년에는 농업 흉작과 가뭄으로 인해 미국 자본주의로부터 곡물을 수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경제적 혼란의 책임을 지고 흐루시초프는 사임하였다.

흐루시초프 사임 이후 등장한 브레즈네프의 시대를 쏘련 경제의 정체기라고 부른다. 브레즈네프 시기에 8-10차에 이르는 경제계획 기간 동안에 경제 성장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했는데 10차에서는 5%미만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렇게 되자 브레즈네프는 분산화된 계획을 철회하고 다시 중앙집권화된 계획으로 일시적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복귀는 경제적 후퇴로 인해 계획을 강조하는 주장에 밀려서 취한 일시적 조치에 불과한 것으로 쏘련 경제의 분권화는 지속적으로 추구되었다.

한편 1962년 9월 2일 ≪프라우다≫지에 리베르만 교수의 “계획, 이윤, 상여금”이라는 논문이 발표됐는데 이 논문은 사회주의 계획에 있어서 자본주의 이윤요소를 적극 도입하고 상여금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리베르만 방식은 중앙계획을 줄이고 수익률 지표에 의해 15-20% 정도를 기업별로 최대한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생산에 동기부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생산달성 목표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생산물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극복하려는 취지로 제안되었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쏘련 내에서는 그것을 찬성하는 입장과 계획경제를 약화시키는 내용이라는 반대 입장이 첨예한 논란을 벌였다. 당시에는 이 방식이 자본주의로의 후퇴라는 다수의 비판이 강력하게 제기되면서 공식적인 입장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인 1965년 9월에는 당시 수상이었던 코시킨이 중심이 되어 리베르만 방식을 적극 채용하는 ‘코시킨 개혁’이 채택되었다. 이는 개별 기업에 자치를 부여하고 이윤원리를 도입하여 기업에 귀속시키는 방식이다. 이는 개별기업의 수익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의 이윤논리를 적극 채택한 것이었다. 과거에 기업은 노동자에게 임금형태로 생산기여금을 지급하고 나머지를 전체 사회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는데 이제는 개별 기업에 성과를 귀속시키는 비중을 높이는 것이다. 기업에 귀속되는 수익은 날로 증가되었는데 코시킨 개혁 이후인 1969년에는 39%의 수익이 기업에 귀속되었다. 이 개혁은 국가에서 공급하는 생산수단과 원료에 대해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하고 기업이 직접 다른 기업에서 사서 낭비를 극복하고 생산을 개선하자는 취지였는데 이러한 자본주의적 원리 도입을 통해 시장을 강화시켰다.

사회주의에서 기업은 수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적자를 보면서도 전체 사회주의 경제의 균형적 발전에 복무하는 기업도 있는데 기업의 수익성을 중심으로 강조하면 저마다의 기업이 수익률에 매달리면서 사회주의 경제의 균형적 발전은 위태롭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에도 계획을 중심으로 해서 당시에 남아 있는 상품 시장관계를 부분적으로 활용하기는 했으나 이제는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핵심인 계획과 시장요소를 절충적으로 사용하여 사회주의 계획을 혼란과 정체에 빠뜨렸다. 쏘련 내에서 계획경제 내에서도 상품-화폐관계를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계획화 초기부터 논란이 되었는데 이 주장은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 시기를 거치면서는 점점 더 시장적 요소를 강화하는 것으로 변해갔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쏘련의 계획경제를 약화시키고 경제를 침체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짧은 안드로포프 시대를 거쳐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그해 4월 23일 쏘련공산당 4월 총회에서 페레스트로이카(근본적 쇄신)를 선포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4월 총회에서 기업의 독립성과 권리를 확대시키는 독립채산제로의 이행을 강조했다. 고르바초프는 독립채산제의 핵심을 기업의 손실을 기업이 책임지는 것으로 국가는 여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기업의 독립성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시장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1987년 1월 고르바초프는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보고에서 계획경제를 비판하였다.

 

상품-화폐관계의 역할과 가치법칙의 운용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 이것을 사회주의와 직접 대치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이 경제에 대한 주관주의적 접근, 독립채산제의 과소평가, ‘임금균등제’ 등을 유도하고 가격형성에 있어서 주관주의적 원칙, 화폐유통의 파괴, 수요와 공급의 조절문제에 대한 무관심 등을 야기시켰다.23)

 

고르바초프의 주장은 대단히 위선적인데 위의 스탈린의 논문에서 언급된 바처럼, 사회주의에서는 당시의 발전수준에서 상품-화폐 관계가 엄연히 존재하였고 이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가치법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에서는 자본주의의 분배흔적인 임금차등제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것을 적극 활용해서 생산에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자본주의적 요소로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에게 개인에게 임금성으로 지급되는 부분보다 사회 전체에게 지급되는 각종의 무상서비스 비중을 점차적으로 더 높여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르바초프는 마치 시장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이런 것들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왜곡하고 시장주의 정책을 합리화 하고 있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집권 2년 반 만인 1987년 ≪페레스트로이카와 새로운 사고≫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신사고가 레닌의 신경제정책을 본받은 것임을 강조했다.

 

민주주의적 과정은 페레스트로이카를 전반적으로 촉진시켰고 … 이 과정은 경제문제에 대해 보다 폭넓은 시각을 갖도록 했으며 근본적인 경제개혁을 위한 계획을 추진케 했다. …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이 작업을 1987년 중앙위원회 6월 총회에서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 총회는 “경제관리의 근본적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한 기본과제”를 채택했다. 이것은 아마도 1921년 ‘레닌’이 그의 신경제정책을 도입한 이후, 우리나라에서 경제체제 개혁을 위한 가장 광범위하며 근본적인 개조개혁이 될 것이다.24)

 

고르바초프는 레닌의 신경제정책의 이름을 빌려 기업의 독자성 확대와 완전한 독립채산제 도입, 심지어는 기업의 자기금융제로 전환하는 것을 포함하는 노골적인 수정주의 정책을 은폐하려 했다. 고르바초프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을 용기 있는 행위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1930년대-40년대에 걸쳐 확립된 스탈린 시대의 중앙집중적 계획을 지령경제라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기업의 자치를 부여한다는 명분으로 진행된 흐루시초프의 MTS 폐지가 계획을 약화시켰던 것처럼, 고르바초프의 기업 자치는 자본주의적 기업운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에서 상품시장관계를 활용한다고 하던 페레스트로이카는 점점 더 ‘사회주의 시장을 폭넓게 이용하는 관리방식’이라는 주장으로 노골화됐다. 이러한 극단적인 분권화 정책은 연방 내부의 갈등과 모순을 증폭시키면서 쏘련 내에서 민족분규를 고조시켰다.

페레스트로이카가 경제에서의 본질적인 개조, 혁신을 의미하는 수정주의 정책이라면 정치체제에서 글라스노스트(개방)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완전히 폐기하고 다원주의, 다당제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하는 정치부문에서의 수정주의였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3월에는 마침내 당과 국가를 분리한다는 명분으로 부르주아 정치제도인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쏘련 내적으로 이미 자본주의 복귀가 사실상 완료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1990년 7월 쏘련 공산당 제28차 대회에서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옐친은 이른바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쏘련 공산당 내의 ‘보수파’들을 비난하면서 다당제 전환을 옹호하고 당의 이름을 민주사회주의당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르바초프 역시 이 당 대회에서 국유화와 독재는 소유와 권력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면서 “총체적인 국유 폐지와 그 어떤 소유 형식의 강요를 반대한다”고 선언하면서 아직까지 남아 있던 사회주의 소유마저도 공격했다. 같은 해 10월 19일에는 시장사회주의에서 거추장스러운 사회주의를 떼어버리고 마침내 ‘시장경제로의 이행’이라는 자본주의 복귀를 노골적으로 선언하였다.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대신할 길은 없다. 세계의 온갖 경험들이 시장경제의 생명력과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 시장경제에의 이행으로 소련경제는 세계경제와 유기적으로 연계되고 소련국민은 세계문명이 만든 모든 성과물에 접할 수 있다.25)

 

이 자본주의 복귀선언은 경제활동의 최대의 자유와 생산자 간의 경쟁, 자유로운 가격형성, 경제의 개방화를 포함해서 사유화를 최대한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립은행의 주식회사로의 재편도 기본방침으로 포함되었다. 1990년 12월 4일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사회주의 명칭을 떼어 버리고 ‘주권 소비에트공화국 연방’으로 바뀌었다. 이로부터 1년 뒤인 1991년 12월에는 쏘련 연방마저도 붕괴되어 버렸다. 이로써 70여 년 동안 존재하며 인류 역사를 진보시켰던 쏘련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시장관계가 수십 년 동안 강화되다가 마침내 수정주의에 의해 내부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사회주의 계획의 원리와 본질

 

사회주의 경제관계에서 전체 사회의 생산과 분배의 새로운 조직화는 강력한 중앙집중과 계획에서 나온다. 그것이 아니면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을 대신해서 고도로 의식화된, 조직화된 계획을 세울 수 없다. 맑스주의의 창시자들은 자본주의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을 집중화시키는 것을 공산주의의 원칙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단 사적 소유에 대한 최초의 근본적인 공격이 일어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더욱더 앞으로 나아가 모든 자본, 모든 농업, 모든 공업, 모든 운송, 모든 교환들을 더욱더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켜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모든 방책들은 이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이 방책들은 프롤레타리아타의 노동에 의하여 나라의 생산력이 배가되는 것에 정확히 비례하여 실현 가능하게 될 것이며, 또 그 집중화의 결과도 발전시킬 것이다. 끝으로 모든 자본, 모든 생산, 모든 교역이 국민의 손안에 집중된다면 사적 소유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고, 화폐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며, 또한 생산의 훨씬 증대되고 사람들도 많이 달라져서 낡은 사회의 마지막 교류 형태들이 없어질 수 있을 것이다.26)

 

엥겔스가 말하는 원칙들은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고, 이 원칙을 실현하는 방식과 과정은 각 나라마다의 특수성이 있을 것이고 “그 나라의 생산력이 배가되는 것에 정확하게 비례하여 실현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공산주의의 원칙은 국가의 수중으로 생산수단을 중앙집중화 시키는 것이다. 쏘련을 국가 사회주의라 비판하는 세력들은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아니라 사회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정부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사회주의에서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국가소멸로 가기 전에 사회적 소유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레닌 역시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사회적 소유로 대체하고 계획경제를 실시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혁명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의 사적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대체하고, 사회 전 성원의 복지와 전면적 발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사회적 생산과정의 계획적 조직화를 실시함으로써 사회의 계급으로의 분열을 없애고, 그리하여 억압받고 있는 인류 전체를 해방할 것이다.27)

 

레닌은 사회주의 생산과 분배의 조직화에 있어서 중앙집중화를 반대하고 공장위원회별로 자주관리를 주장하는 좌익 반대파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조합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는 행정에의 참가라는 실제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또한 달성된 성공이나 정정된 오류에 엄밀히 입각하여 이 경험을 더욱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경제관리의 기관들은 ‘선출하는 생산자대회들 혹은 생산자대회’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조합에 대한 당의 지도적, 교육자적, 조직자적인 역할, 또한 반(半)쁘띠부르조아적이고 완전히 쁘띠부르조아적인 근로인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똑같은 역할은 완전히 회피되고 배제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에 의해 이에 시작된 새로운 경제형태들의 건설이라는 실제의 업무를 계속하고 시정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업무에 대한 쁘띠부르조아적이고 무정부적인 파괴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파괴행위는 부르조아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될 뿐이다.28)

 

공산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노동을 전국적인 규모에서 가능한 최대로, 극히 엄격하게 집중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본의 위력과 노동의 무력함의 근원의 하나인 노동자의 직업적 분산상태 및 지방적 분산 상태와 세분상태를 극복하는 것이 전제가 된다.29)

 

공산주의는 전국의 대규모 생산의 최대의 집중을 필요로 하며 또한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 부문의 모든 기업을 직접 관할하는 권한을 전 러시아의 중앙기관에 부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방의 중앙기관은 중앙기관의 생산전반에 관한 지시와 결정에 따라서, 지방의 생활조건 등에 따라서 그 직무를 결정한다. 일정부문의 모든 기업을 전국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직접 관할하는 권한을 전러시아적 중앙기관으로부터 빼앗는 것―위원회의 초안에서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만―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지방주의적인 무정부적 생디칼리즘일 것이다.30)

 

이러한 레닌의 입장은 1918년 11월 전시공산주의 이전이나 신경제정책을 결정하던 시기의 글에 다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단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한 조건에서의 일시적인 방책이라고 할 수 없다. 쏘련의 계획을 비판하는 세력들은 중앙집중화를 공격하면서 ‘스탈린주의 관료주의’라고 비판하는데 공장위원별 자치 계획을 주장하는 세력들을 지방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고도의 중앙집중을 옹호한 것은 바로 레닌이었다. 레닌은 이러한 행위를 파괴행위라고 규정하고 이를 방치하면 부르주아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된다고 경고했다. 레닌의 이러한 경고는 나중에 현실화됐다. 이러한 세력들은 현실 사회주의 붕괴의 원인을 중앙집중화된 계획으로 돌리고 그것을 가속화시킨 수정주의를 부지불식간에 옹호하는 것이다. 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을 ‘스탈린주의 비판’으로 가장해 사회주의 경제의 원칙에서 이탈한 것이다.

중앙집중화된 계획을 비판하는 부르주아들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세력들도 부르주아적 쏘련 비판에 동참하고 있다. 노동해방실천연대는 ‘(가칭) 한국사회주의 노동자당 강령 초안 해설’에서 쏘련경제를 명령경제, 지령경제라고 비판하면서 “결합된 노동자 자주관리체들이 생산과 유통에 대한 생산자들의 의식적 통제를 실현하는”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이라는 계획의 상을 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SWP(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알렉스 캘리니코스도 민주적이고 분산화된 계획31)을 옹호한다.

그런데 중앙계획과 참여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중앙계획에 있어서의 관료주의와 비효율성이라는 부분적인 문제를 이유로 계획과 대립되는 분산화를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중앙의 행정적 명령 없이, 계획 과정 전반에 대한 당의 의식적 지도 없이 각자의 조합주의적이고 지방주의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누가 그것을 조정하고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분산된 자주관리체들의 수평적인 연합에 의해 수정주의적 요소가 강화될 때 누가 어떻게 의식적이고 수직적인 통제를 강화할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중앙계획의 오류는 그 반대인 분산화가 아니라 중앙계획 속에서 참여를 강화하는 계획이 되는 것으로 시정해야 한다. 이들은 “목욕물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그런 오류에 빠지게 된 것이다.

만델은 “사회주의 계획의 방어”라는 글에서 알렉 노브 같은 시장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계획을 방어하려 하고 있다. 만델이 제시하는 계획의 상 역시 “민주적으로 결합되고 집중화된 자주관리, 연합된 생산자들의 계획된 자기통제”이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결합되고 연합된 생산자들을 하나로 묶어세울 수 있는 집중적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연합된 생산자들 스스로가 계획된 자기통제를 하는 것으로 중앙집중적인 계획이 이뤄질 수 있는가? 만델의 주장은 시장사회주의를 반대하고 있지만 도대체 집중화된 자주관리가 유고의 자치적 자주관리32)와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만델의 계획에는 참여와 자치는 있으되 중앙집중을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지가 구체적이지 못하다. 더군다나 만델의 계획에는 계획전반을 지도하는 데 있어서 의식적인 당의 역할이 빠져 있다.

유고의 시장사회주의는 사회주의 국가들 내에서 가장 먼저 수정주의 흐름을 개척했다. 티토를 중심으로 하는 수정주의자들은 이를 이유로 코민포름(국제공산주의정보기구)에서 제명됐다. 티토의 시장 사회주의는 노동자자주관리를 핵심으로 하는 중앙계획에 대한 반대이고 자본주의 시장과의 타협이었다. 그러나 시장 사회주의 원리에 의한 노동자자주관리는 노동자의 생산과정에의 직접적 참여라는 지극히 원칙적인 주장과 주관적 소망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자주성을 자본의 발밑으로, 제국주의의 발밑으로 던져버리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왔다.

자주관리는 결국 자본주의 시장관계를 강화하였고 이로 인해 유고 시장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극심한 인플레, 제국주의 경제에 종속된 결과로 외채문제, 생필품 가격의 엄청난 인상, 복지의 후퇴와 대량의 실업사태, 빈부격차 등 자본주의 사회에 나타나는 고유한 문제가 그대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유고는 여러 다양한 민족들이 사회주의 연방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중앙집중 계획을 포기하고 기업과 개별 공화국에 광범위한 자치와 분산적인 계획을 하도록 하는 바람에 민족 간 경제적 이해관계가 부각됨으로써 이기주의, 민족 갈등이 극심해지게 되었다. 이것이 직접적인 유고 연방 붕괴의 계기가 되었고, 유고 연방의 붕괴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변모한 이후에 민족갈등이 극단적으로 부각됨으로써 내전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분산화된 계획, 민주적 계획을 강조하는 세력들은 쏘련의 붕괴 원인을 계획의 중앙집중성에서 찾으면서 분산화된 계획을 옹호하고 있다. 유고를 비롯한 헝가리, 폴란드 등 동구 사회주의와 쏘련의 해체의 원인이 계획경제의 약화와 수정주의인데 수정주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거꾸로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의 지령적, 명령적 경제로 돌리고 쏘련 붕괴의 원인을 제공했던 수정주의 방향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본질적으로 지령적이고 명령경제이다. 계획적 생산조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중앙집권적 지향을 가진 지령적 성격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행정적 관리방식을 전제한다. 레닌이 강조했던 ‘중앙기관의 생산전반에 대한 지시와 결정’이 명령경제, 지령경제가 아니면 무엇인가? 지령경제, 명령경제는 사회 전체의 이해와 동의 속에서 고도로 사회주의 경제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경제조직의 계획적 체제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반인간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사고는, 계획경제 비판 중에서도 두드러진 지위를 점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하이에크는 경제의 국가적 규제를 ‘노예제로의 길’이라고까지 극언하고 있다.33)

 

국민경제계획화는 지령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계획과제가 생산의 모든 수준(국민경제 전체, 콤비나트, 기업연합체, 기업, 공장 내 직장, 작업반, 작업조, 노동자 개인)에서 의무적이라는 것이다. … 이와 같은 과학적 예견, 계획의 엄밀한 과학적 기초, 계획의 당적‧지령적 성격은 연합생산자 사회에서의 계획화의 본성,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34)

 

이들은 이러한 계획의 본성과 본질인 지령과 명령을 마치 언어가 가지고 있는 강압과 전제적 폭력의 이미지에 현혹되어 왜곡하고 있다. 물론 브레즈네프 시절 짜골로프 교과서에서의 계획에 대한 강조가 현실에서는 다르게 나타났지만 지령과 명령이 사회주의 계획경제 조직화라는 경제관계의 본질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 사회적 결의에 의해 자본주의를 대신해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생산과 분배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 중앙집중은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이것이 레닌의 말대로 자치와 지방적 특수성, 창조적 참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적으로 조직화된 중앙집중화만이 중앙집중 계획에서의 관료주의와 비효율성을 떨쳐버리고 계획경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계획은 고도로 조직된 명령경제이고 지령경제인데 그렇다고 그것을 행정적, 경제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레닌은 정치의 우위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는 “경제적 토대 위에 상부구조가 들어선다”는 사적 유물론의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법칙을 인정하면서 법칙의 작용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획경제에 있어서도 여전히 그 계획과정 전반을 지도하는 중심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인 당이었다.

계획기구를 처음에 만들 때 트로츠키는 중앙계획기구에 집행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트로츠키의 주장을 반대하면서 전문가 기구의 역할과 정책입안권과 집행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정치기구-국가최고기관의 역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계획은 중앙집중적이고 통일적이어야 하는데 이 전체적 과정을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분리주의와 관료주의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계획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전체를 통일시키는 것인데 각 지역별, 공장별 단위에서는 보다 많은 생산과 분배를 얻기 위한 이기주의적 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사회주의 경제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기는 하지만 각 공장 노동자들의 물질적 이해를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사회 전체의 이해보다 각 공장의 조합주의적인 이해를 대변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계획은 전체 사회의 발전을 위한 계획이어야 하고 계획에서 나타나는 비효율성 오류를 최소화하고 각 공장, 지역별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이해를 조정하고 통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은 계획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오류나 관료주의의 등장 등에 대해서 지도하는 중심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쏘련에서 계획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기구는 국민경제위원회, 재정인민위원회, 교통인민위원회, 쏘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로 나눠져 있었다. 이 중 계획기구는 고스플란을 중심으로 해서 개별연방 공화국 및 지성(地城)계획위원회, 그리고 부처별 계획기구로 중앙 및 개별공화국의 부처별 계획부서와 각종 생산조합 및 주요 기업체의 계획부서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의 입안은 연방 및 자치 공화국 내의 국가계획위원회, 지방, 지성 및 시 계획위원회 등 모든 계획기관의 동시 참여 하에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쏘련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부는 경제의 기본 목적과 목표들을 설정하여 계획의 초안을 잡는다. 그리고 조직체계는 정부 내의 여러 관련 행정부처로서 소관 사항 내의 계획을 주도했다. 마지막으로 이같이 형성되어 정부에 의해 승인된 계획은 국가계획위원회에 의해 실제 집행된다.35)

쏘련에서 계획은 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최고경제기구에서 한 해의 중심적인 계획의 목표와 방향을 입안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계획기구가 참여하여 계획초안을 마련한 뒤에 이를 지역적 계획기구에 내려 보내고 다시 각 공장별 논의를 거친 뒤에 다시 위로 올라가는 방식을 취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오류와 시행착오가 발생했지만 이를 근거로 계획 자체가 독재적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왜곡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논리와 악선동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의 기본경제 법칙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라는 것이고, 상품의 자유로운 매매를 중심으로 하는 시장기구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부르주아들은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를 자유와 인간성의 본질이라고 맹목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은 공황에서 그 폭력적, 야만적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과 분배의 조절자의 역할을 한다는 시장에서의 조절은 파괴와 약탈, 혼란과 무질서를 통하여 관철되는 지극히 야만적인 조절이다. 이 조절은 합리성과 과학, 공동체적 본성을 추구해야 하는 인간의 본성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의 경제법칙은 생산수단의 전 사회적 소유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생산력을 고도로 발전시키고 전체 사회의 물질적, 문화적 수준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것을 본질로 하고 있다. 그 본질을 만들어내는 핵심기구가 자본주의 시장에 대립되는 고도로 중앙집중된 계획이다. 시장의 맹목성과 파괴적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면서 대중을 죽음과 같은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여전히 부르주아 계급은 ‘대안 없음’을 이유로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행사하고 지배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자칭 사회주의자들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힘에 압도당해서 사회주의의 법칙과 그 법칙을 수행하는 기구인 계획경제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다. 방어는 고사하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계획의 본질과 원리를 공격하고 부르주아적 참여와 자치라는 공허한 수사에 매달려 있다. 그것은 ‘일정 부문의 모든 기업을 전국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직접 관할하는 중앙기관의 권한’을 빼앗는 무정부적, 생디칼리즘적인 일탈에 불과한 것이다.

사회주의 계획은 단순히 경제계획기구의 행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원리를 전 사회에 관철하는 총체적인 과정이자 노동자계급과 전위당의 고도의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 투쟁이다. 사회주의와 계획을 옹호하는 것 역시 경제의 조직화에 대한 문제이자 정치투쟁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역시 맑스-레닌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각종의 기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투쟁이 절실한 것이다.

 


 

1) 바만 아자드 저, 채만수 역,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제3판), 노사과연, 2009, p. 130.

 

2) 중국 ≪인민일보≫의 논설(1956년) 중에서

 

3) 신경제정책이 정점에 달했던 이 시기의 협상가격차 위기에 대해서는 알렉 노브의 ≪소련경제사≫(창작과 비평사, 1998)를 참고하였다.

 

4) 모리스 돕 저, 임희철 역, ≪소련경제사≫, 형성, 1989, pp. 238-239.

 

5) 알렉 노브와 모리스 돕은 각각 ≪소련경제사≫라는 같은 제목의 책을 썼는데 소련사회를 바라보는 당파적 입장은 정반대의 관점에 서 있다. 알렉 노브는 소련사회의 계획경제에 대해 비판적이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주장하는데 비해, 모리스 돕은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계획경제를 철저하게 옹호하고 있다.

 

 “꼴호즈에 합류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피하고자 할 꿀라끄는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아니라 겁에 질린 자포자기한 사람들’에 불과하였다… (뒤늦게 1936년에 우끄라이나를 찾은 한 동료는 어떤 마을에서 아이들 두 명이 명백히 굶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그는 그 사정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꿀라끄 아이들이죠’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묘한 계급투쟁으로 차라리 일방적인 것이었다.” (알렉 노브 저, 김남섭 역, ≪소련경제사≫, 창작과 비평사, 1998, pp. 251-252.)

 

 “탄생을 위한 고통은 실로 가혹했고 그 산고는 더없이 거칠고 잔인했다. 그러나 이 수개월 간의 격동이 20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모리스 돕 저, 임희철 역, ≪소련경제사≫, 형성, 1989, p. 262.)

 

6) E. 프리마코프 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현실에 대한 창조적 인식을 요구한다”, ≪사회주의 대개혁의 논리≫, 풀빛, 1990, p. 301.

 

7) 계급투쟁 보다 ‘전 인류적 가치의 추구’를 우선시하는 쏘련 공산당의 수정주의 노선에 대해 당시 공산주의 진영 내에서 우려를 표시하면서 비판적 입장들이 다수 제출되기도 했다. 1988년 3월 ‘세계 맑시스트 비평’(WMR)의 당경험교환위원회는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발표한 테제를 중심으로 각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모여서 토론을 진행했다. 이 토론에서는 쏘련 공산당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산당도 있었고, 반면에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는 공산당들도 있었다.

 

 “나는 넓은 의미에서 ‘문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놀랐습니다. 예를 들어 인종주의자들이 우리 인민에 대한 식민지적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데올로기와 현실 정책, 조직구조에서 공산주의자와 여타 세력들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에솝 파하드, 남아프리카 공산당)

 “인간의 보편적 가치의 우위성을 다루는 주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은 계급투쟁을 여러 세력들에 의해 지탱되는 합치된 입장의 수렴이 혁명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보다 우위성을 가지는 추상적 휴머니즘의 차원으로 옮겨놓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자이메 바리오스, 엘살바도르 공산당)

 “나는 평화유지가 우리들에게 특히 중요한 문제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나는 유화정책이나 이런저런 나라 혹은 지역에서 계급투쟁을 완화함으로써 평화가 보장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평화수호가 우리가 우리 조국에서 수행하고 있는 전반적인 계급투쟁 내에 통합된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도날드 라모타, 가이아나 인민진보당)

 “소련은 평화를 유지하고 군비감축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소련공산당이 추구하는 이념, 예를 들면 민족해방전선이 보편적 평화와 군축을 위해 자신들의 무기를 버리거나 칠레 공산주의자들이 피노체트 체제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견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헥토르 무지카, 베네수엘라 공산당)

(E. 프리마코프 외, “현대세계와 공산주의 – 세계 공산당 지도자들과의 대화”, 같은 책.)

 

8) K. 맑스‧F.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두레, 1989, pp. 74-75.

 

9) “소련에서의 자본주의의 부활”은 맑스-레닌주의 독일공산당(MLPD)의 ≪혁명의 길≫(≪혁명의 길≫은 출판사 ‘새로운 길’이 시리즈로 1권부터 계속 출판한 책이다)에 발표된 글로 1971년부터 1988년까지의 소련사회에 대해 분석하였다. 쏘련사회의 붕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이 글은 독일어판 번역본으로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번역됐으나 아직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았다. 필자 개인적으로 독일어판 번역본을 입수했지만 공식적인 번역 글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인용할 수 없고, 번역자를 밝힐 수 없는 상황이다.

 

10) K. 맑스 저, 김수행 역, ≪자본론≫ 제3권(제1개역판), 비봉출판사, 2004, p. 1067.

 

11) F.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이하 ≪저작선집≫) 제5권, 박종철출판사, 1994, p. 460.

 

12) K. 맑스, “고타강령초안 비판”, ≪저작선집≫ 제4권, 1995, pp. 375-376.

 

13) K. 맑스, ≪자본론≫ 제3권, p. 1035.

 

14) J. 스탈린, “쏘련에서의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

 

15) J. 스탈린, 같은 글.

 

16) F.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저작선집≫ 제5권, pp. 178-179.

 

17) V. I. 레닌 저, 백승욱 편/해설, “러시아공산당(볼) 제10차 대회”(1921년 3월 8-16일), ≪민중민주주의 경제론: 레닌의 노동자통제 및 국유화론 1≫, 새길, 1990.

 

18) V. I. 레닌 저, 백승욱 편/해설, “현물세― 신정책의 의의와 그 조건들”(1921년 3월 말-4월 21일), ≪신경제정책(NEP)론: 레닌의 노동자통제 및 국유화론 2≫, 새길, 1991, p. 71.

 

19) 같은 책, p. 74.

20) 같은 책, pp. 75-76.

21) 같은 책, p. 188.

 

22) 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Ⅱ― 레닌적 단계≫, 한울림, 1990, p. 261.

 

23) M.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와 당간부 정책에 관하여”(1987년 1월 27일), ≪사회주의 대변혁 핵심문헌 50선≫, 동아일보사, 1991, p. 60.

 

24) M.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와 신사고”(1987년 11월), 같은 책, p. 57.

 

25) M. 고르바초프, “국민경제의 안정화와 시장경제로의 이행의 기본방침”, 같은 책, p. 148.

 

26) F. 엥겔스, “공산주의의 원칙들”, ≪저작선집≫ 제1권, 1992, p. 333.

 

27) V. I. 레닌, “당강령 개정에 부쳐, 강령개정 초안”(1917년 4월-5월), ≪민중민주주의 경제론: 레닌의 노동자통제 및 국유화론 1≫, p. 13.

 

28) V. I. 레닌, “러시아공산당 제10차대회의 결의 우리 당내의 생디칼리즘적, 무정부주의적 편향에 대하여의 최초의 초안”, 같은 책, pp. 215-216.

 

29) V. I. 레닌, “러시아공산당(볼) 강령초안”(1919년 2월 23일), 같은 책, p. 25.

 

30) V. I. 레닌, “국유화 기업 관리규칙 초안에 대한 의견”(1918년 6월 2일 집필), 같은 책, p. 210.

 

31) 캘리니코스는 ≪반자본주의 선언≫(정성진‧정진상 역, 책갈피, 2003)에서 중앙의 강요가 아닌 생산자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분산되고 수평적인 관계에 기초한 팻 데바인의 민주적 계획모델을 옹호한다. 이 계획모델은 광범한 경제적 변수들은 전문가가 마련한 일련의 대안적 계획에 기초해, 선출된 대표 회의체가 국가 수준에서 결정하되, 대부분의 경제적 의사결정들은 분산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고 있다. 이 계획모델은 계획에 있어서 중앙의 행정 명령을 거부하고 충분히 분산된 기초 위에서 경제적 결정들이 의식적으로 조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32) 유고 사회주의는 티토에 의해 지도되면서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 가장 먼저 노동자 자주관리를 주장하면서 ‘시장 사회주의’를 실시하였다. 이들은 쏘련 경제의 명령적, 획일적 경제계획을 비판한다고 하면서 각 연방과 지역, 개별 기업에 광범위한 자치를 부여하는 ‘노동자 자주관리’를 실시했다. 유고의 시장사회주의 모델은 이후 헝가리, 폴란드의 수정주의 흐름의 출발이 됐다. 유고의 시장 사회주의 모델이 동구와 쏘련 사회주의의 붕괴의 출발이 됐고, 한때 국내에서도 쏘련 몰락 이후에 유고 시장 사회주의 모델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있었고, 지금도 시장 사회주의 모델을 주목하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향후 독자적으로 충분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33) N. 짜골로프 외 저, 윤소영 편/해설, ≪정치경제학 교과서≫ Ⅱ-1, 새길, 1990, p. 145.

 

34) N. 짜골로프 외, ≪정치경제학 교과서≫ Ⅱ-2, pp. 190-191.

 

35) 쏘련의 구체적인 계획과정에 대해서는 “소련의 집권적 계획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연구―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시기를 중심으로”라는 이윤희의 1985년 8월 논문에서 인용하였다. 쏘련의 계획경제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려면, Paul R. Gregory‧Robert C. Stuart, Soviet Economic Structure and Performance, Harper & Row Publishers, 1974를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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