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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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1. 자율주의

 

쏘련 붕괴 후에 한국 사회운동에는 청산주의가 거세게 몰아쳤고 또 운동의 깃발을 고수하는 진영에서도 뜨로쯔끼주의, 신좌파 흐름 등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율주의라는 무정부주의가 나타났는데 쏘련을 필두로 한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 계급투쟁 노선의 청산, 이행기에서 국가의 필요성의 부정 등을 내용으로 하였다. 자율주의는 유럽에서 68혁명 후에 나타났는데 68혁명이 맑스-레닌주의적인 공산당 중심의 계급투쟁 노선을 부정하는 신좌파적인 흐름을 창출하는 가운데 그것의 하나의 지류로서 이딸리아에서 무정부주의적인 자율주의가 나타났던 것이다. 자율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무계급 사회로의 이행기에 국가의 필요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이지만 맑스 당시의 무정부주의와 다른 점은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적 개념을 차용하면서 계급투쟁 개념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자율주의의 무정부주의적 성격을 중심으로 고찰하면서 이들이 제출하고 있는 제국 개념, 다중(多衆) 개념 등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자율주의의 대표자인 네그리의 ≪디오니소스의 노동≫의 역자 서문에서 이원영은 쏘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그러나 영구혁명의 이념이 일국 사회주의라는 국가주의 속에 봉쇄된 이후 현실 사회주의는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체제가 아니라 국가에 의한 자본의 관리체제, 자본주의적 노동강제의 계획화 체제로 전화했다.1) 여기에서 쏘련은 뜨로쯔끼의 영구혁명 노선이 패배한 후에 국가에 의한 자본주의로 전화되었다고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파악은 한국에서 자율주의적 흐름이 처음에는 쏘련 붕괴 후에 뜨로쯔끼주의적 사고에서 출발하여 자율주의로까지 나아갔다는 것을 시사한다. 뜨로쯔끼 노선의 패배가 곧 자본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이었다는 사고는 전형적인 뜨로쯔끼주의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그리 자신 또한 무정부주의자라는 점에서 국가가 존재하는 쏘련을 꼬뮤니즘으로 전환이 좌절된 일종의 억압 체제, 자본주의 체제라고 보는 것은 이원영 씨와 동일하다. 네그리는 마르크스주의를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로 환원하는 것은 도무지 터무니없는 것이다2)라고 규정한다. 이는 네그리 자신이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쏘련은 맑스주의의 실현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네그리는 맑스가 자본주의에서 무계급 사회로의 이행기에 국가의 필요성,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은 무시하고 있다. 네그리는 맑스주의의 실제 내용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코뮤니즘은 사물의 현존 상태를 파괴하는 현실적 운동이다라고 쓴 바 있다3)고 네그리는 파악하고 있다. 인용의 출처가 없는 이 문장은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의 한 구절로 보인다. 원래의 구절을 인용해 보면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4)이다. 원래의 문장과 네그리의 인용의 차이는 바로 파괴인가 지양인가라는 점에 있다. 네그리는 현존 상태의 파괴라고 하고 있지만 맑스는 지양이라고 하고 있다. 무정부주의의 입장에서는 현존 상태의 파괴가 타당한 것이지만 변증법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맑스에게 있어서는 현존상태의 지양(극복과 동시에 보존하는 것)이 곧 운동이다. 이렇게 네그리는 맑스를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는데 무정부주의 입장에서 맑스의 변증법적 과학은 제대로 파악이 안 되는 것이다.

네그리는 가치법칙이 곧 착취관계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네그리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맑스가 가치법칙을 착취법칙으로 제시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네그리는 화폐가 가치법칙이 작동하도록 하는 유일한 형태5)라고 주장한다. 또한 가치 유통 및 지배의 수단으로서의 화폐 등의 파괴 없이 혁명은 없다6)고 네그리는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혼란된 것이다. 네그리가 맑스의 주장을 이렇게 왜곡되게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무정부주의적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가치법칙이 곧 착취법칙이라는 것은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을 혼동하는 것이다. 가치법칙 자체는 상품생산과 교환의 법칙으로서 상품에 들어 있는 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응고된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이 상품으로 되기 전 단계의 상품생산과 교환(소상품생산)에서는 착취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가치법칙이 곧 착취법칙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노동력이 상품이 되었을 때 가치법칙은 잉여가치법칙으로 발전되어 착취관계를 표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화폐가 발생하기 전에도 상품생산과 교환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가치법칙은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폐가 가치법칙이 작동하는 유일한 형태라는 네그리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화폐의 발생은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의 작동이 장구한 시일을 경과한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 화폐의 문제를 혼란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네그리는 화폐의 폐지 없이 혁명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네그리가 이해하는 혁명이 국가의 즉각적인 폐지와 상품생산의 즉각적인 폐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혁명은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에만 존재하며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고 현실에서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국가의 존재, 그리고 상품생산이라는 자본주의 유물과의 오랜 기간의 싸움을 거치는 과정이다.

가치법칙이 곧 착취법칙(잉여가치법칙)이라고 파악하는 네그리는 거기서 더 나아가 가치법칙의 위기를 말하면서 지금은 가치법칙이 폭파되었다7)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네그리는 가치법칙을 통한 자본의 착취관계가 가치법칙의 소멸을 통해 국가의 명령에 의한 생산으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탈근대성의 헌법의 물질적 기초들은, 그것이 정치적ㆍ통치적 현실인 한에서, 자본이 더 이상 사회적 생산과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사회적 생산과 관련된 탈근대적 국가의 개념은 명령을 통한 상품생산으로 정의될 수 있다.8) 가치법칙이 탈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소멸했고 그리하여 자본의 착취관계를 통한 상품생산은 국가의 명령에 의한 상품생산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악은 매우 많은 개념의 혼동을 보여주는데 첫째, 가치법칙이 곧 착취법칙인 것은 아니라는 점, 둘째, 명령에 의한 상품생산이라는 것은 실은 국가가 경제에 전면 개입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현상을 왜곡되게 이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 그리고 2차 대전 이후에 국가는 경제 전반에 개입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네그리에 의해 가치법칙의 소멸과 국가의 명령에 의한 상품생산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전면 개입의 상황에서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가치법칙은 소멸하지 않는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더라도 자본의 지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상품생산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상품생산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국가가 개입하더라도 가치법칙은 작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품생산 하에서는 가치법칙 혹은 가치개념을 배제하고는 생산물의 교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그리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 인식을 전략적 차원으로 상승시키는데 그것이 곧 시민사회의 소멸이라는 주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사회는 국가와 분리된 영역으로 파악된다. 시민사회는 경제적 생산관계의 영역, 사적인 영역, 시민으로 활동하고 생활하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부르주아 혁명들은 바로 국가로부터 시민사회의 분리를 이루어 내어 소유권의 보장, 사상의 자유, 집회ㆍ결사의 자유 등의 정치적 자유의 보장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이것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의 현실적 의미이다. 그런데 네그리는 탈근대사회가 되면서 시민사회가 국가에 흡수, 종속되었다고 파악하면서 시민사회의 내용을 가리키던 노동조합, 단체교섭 등이 무력화되는 현실을 보면서 이것을 시민사회의 소멸로 파악한 것이다. 근년에 들어, 국가와 제도적 노동의 변증법, 그리고 또 단체교섭의 메커니즘들이 점차 무대로부터 사라졌다. 실질적 포섭의 사회에서 이 변증법은 더 이상 핵심적 역할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본은 더 이상 생산의 핵심에 노동을 고용하거나 노동을 재현할 필요가 없다. … 국가는 더 이상 합법화와 훈육의 매개적 메커니즘에 대한 필요를 갖고 있지 않다: 적대들은 부재하며 (혹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합법화는 동어반복으로 되었다. 실질적 포섭의 국가는 이제 더 이상 매개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분리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리하여 사회적 변증법의 장소로서의 시민사회의 제도들은 점차 자신들의 중요성을 상실했다. 국가가 아니라 시민사회가 사멸했다.9) 이러한 네그리의 인식은 눈에 보이는 현상은 대략 설명하고 있으나 수많은 개념을 혼동하면서 과학적 인식에는 실패하고 있다. 네그리가 고찰하는 20세기 중, 후반의 서유럽의 상황은 노동운동이 개량화되면서 서서히 무력화되던 상황이었다. 또한 시민사회는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역동성을 상실하고 국가가 노동자계급을 통제하는 장소, 위상으로 변모되고 적대가 부재하는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곧 시민사회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자본의 노동에 대한 실질적 포섭이라는 개념 자체가 시민사회의 소멸을 강제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의 노동에 대한 실질적 포섭이 강화되더라도 그것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가일층의 억압을 의미하며 따라서 노동자의 단결의 경향을 제거할 수 없고 노동자의 단결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시민사회 또한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의 시민사회의 국가에의 종속 혹은 시민사회의 소멸이라는 인식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 비롯된 뒤틀린 인식, 무정부주의적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에 대한 자본의 관계, 착취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또한 국가와 자본의 관계는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더욱더 결합, 융합되는데 그것의 본질은 사적 독점자본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인 종속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네그리가 시민사회의 소멸을 주장하는 것은 무정부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초점을 국가의 폐지에 맞추기 위한 자의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가치법칙의 폭파→시민사회의 소멸→국가 혹은 주권에 대한 부정이 네그리의 무정부주의적 논리의 맥락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네그리는 매우 비과학적으로 논리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을 혼돈하는 점,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점, 국가와 (독점)자본의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점 등이 그러하다.

네그리는 다음과 같이 자본주의에서 무계급 사회로의 이행에서 국가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코뮤니즘은 협력적이고 비물질적인 산 노동의 생산성 외부의 행위자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행은 국가에 대한 필요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10) 비물질적인 산 노동은 그 자체의 힘으로 협력하면서 꼬뮤니즘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가 폐지된 후에는 국가의 필요성,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적 논리인데 다만 과거 무정부주의와 다른 점은 비물질적인 산 노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과거 새로운 사회의 주체였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탈근대사회가 되면서 헤게모니를 상실하고 정보, 지식 등의 산업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다중(多衆)이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서 즉각적으로 꼬뮤니즘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정부주의라는 점을 떠나서 보더라도 매우 비과학적이고 공상적인 것이다. 산 노동이 해방되었을 때 그것이 새로운 사회의 건설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맞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산 노동이 계급으로 조직되지 않고서 무정형적인 다중으로 머물러 있다면 자본주의 잔재의 척결, 제국주의의 위협에 대한 대처,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층들의 차이의 점차적인 제거 등을 어떻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자본주의 이후의 문제에서 그렇다면, 자본주의 하에서 해방을 위해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다중으로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다중 또한 자본가가 아닌 이상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 텐데 그들이 통일적인 조직이라는 무기 없이 느슨한 네트워크만으로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이러한 나약한 공상은 자율주의가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을 통해 신좌파적으로 변형된 무정부주의이기 때문이다. 계급 없는 투쟁, 계급투쟁을 떠난 저항이라는 신좌파의 논리가 무정부주의적으로 변형된 것이 바로 자율주의인 것이다.

신좌파적인 무정부주의! 이들은 무정부주의라는 점에서 겉으로는 매우 급진적인 외양을 띠지만 그것의 내용은 신좌파적인 나약한 것밖에는 없다. 이들이 제출하는 제국이라는 개념, 그리고 다중이라는 개념 또한 그 내용을 보면 매우 나약하고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계급투쟁의 이론과 전선을 해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보면 매우 해로운 것이다. 그러면 네그리가 제출한 제국 개념과 다중 개념을 차례차례 검토해 보자.

네그리는 ≪제국≫에서 전 지구화된 현대 세계에서의 일반적인 권력론11)을 제시하려 한다고 한다. 세계화 혹은 지구화라는 조건에서 그러한 지형 전체를 관통하는 권력론을 세운다는 것 자체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곧바로 기존의 레닌주의적인 제국주의 개념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애초의 가설은 제국주의는 더 이상 전 지구적 권력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적합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12) 네그리가 이렇게 제국주의를 부정하는 근거를 보면, 제국주의는 근대적 주권국가의 팽창인데 세계화, 지구화된 지금에서 근대국가의 주권이 전 지구적 권력인 제국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개념은 더 이상의 적합성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의 제국 개념에 대한 고찰에서 관건적인 것은 근대국가의 주권이 과연 전 지구적 권력체계에 이양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네그리는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이행에서 미국의 예외적 역할을 강조한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예외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자신의 국민적 이익이 아니라 전 인류의 이익의 이름으로, 군사력을 행사하고 세계질서를 좌우하며 이러한 미국의 예외적 지위와 더불어  초국적 기업과 WTO, IMF, UN 등의 세계적 기구를 통해 근대국가의 주권이 전 지구적 권력인 제국으로의 이양되었기 때문에 근대국가의 확장인 제국주의 개념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력 행사, 예를 들면 1991년의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략이 인류의 이익 때문인지, 아니면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 때문인지는 잠시 논외로 접어 두자. 보다 중요한 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이 제국이라는 전 지구적 권력체계로 이양되었는가 여부이다. 네그리는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그리고 걸프전 이후 제국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제국은 특정 국가의 주도성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네트워크로 운영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제로는 사회주의 진영 붕괴 후로 회자되었던 팍스 아메리카나, 혹은 미국 주도의 세계화를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과연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이 그러한 세계적 권력, 제국으로 이양되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다. 팍스 아메리카나 혹은 세계화, 지구화 시대에도 근대적 국민국가는 여전히 국가권력 혹은 주권이라는 점에서 보면 세계질서의 관건적인 요소이다. 미국의 위세 그리고 세계적인 네트워크화, 세계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국민국가는 약화되기는커녕 각 국가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점차적으로 강화되어 가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인 한, 그리고 세계에서 자본주의 질서가 지배적인 한, 국민국가는 주권의 핵심적인 담당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근대 유럽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상부구조에서 국민(민족)국가의 형성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향은 2차 대전 후에 식민지 체제가 붕괴하면서 독립한 많은 나라들이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국민(민족)국가를 형성하고 발전해 왔다는 것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즉, 자본주의의 상부구조는 국민(민족)국가라는 것이 지난 200여 년에 걸친 역사적 진실이다. 그것은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가 그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에 가장 적합한 정치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레닌의 경우 바로 이러한 점을 간파하고 20세기 초에 독립적 민족국가 형성의 자유를 의미하는 민족자결권을 옹호하는 것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해방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동맹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러면 네그리가 제국적 주권이라는 부르는 요소들을 살펴보자. UN은 세계적 기구이지만 실은 주권국가들의 연합에 지나지 않는다. WTO는 세계무역을 관장하지만 주권국가들의 무역질서들을 조정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IMF는 어떠한가? IMF가 전 지구적 이익, 인류적 이익이 아니라 소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 지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그러면 예외적 위치라고 네그리가 주장하는 미국은 전 인류의 이익으로 행동하는가? 걸프전이 전 인류의 이익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것은 20세기 내내 존재했던 제국주의 세력의 약소국에 대한 침략이 인류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것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인권이라는 전 인류적 가치는 현실에서는 약소국가를 강대국이 압박하는 장치로 쓰이고 있지 않은가? 네그리는 근대 국민국가의 쇠퇴를 하나의 굳어진 경향으로 파악하는데 그렇지 않다. 2008년 이후 세계 대공황이 발발한 후에 어느덧 세계화, 지구화라는 구호는 잦아들고 각 국민국가의 이익이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다. EU의 각국의 재정위기는 국민국가적 틀을 넘어선 EU에서조차 채무국과 채권국 간의 이익의 충돌을 나날이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미국은 최근에는 세계화, 지구화라는 구호와 정반대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자국에서의 생산의 증대를 위해 보호주의적, 고립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 G2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은 미국을 대신해서 세계화를 이끌겠다고 하면서도 실은 중화민족의 꿈의 실현을 모토로 하고 있다. 이렇듯이 사적 소유를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주권의 형태의 본질적인 요소는 국민국가, 민족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유대인 자본가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국가를 유지, 강화하는 것 또한 자본의 세계에서는 국민국가가 필수적임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구화 시대에는 주권이 국민국가에서 제국으로 이전되었다고 하는 네그리의 주장은 팍스 아메리카나, 그리고 세계화, 지구화 시대라는 구호에 취해서 자본주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네그리의 제국이라는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레닌은 일찍이 네그리가 주장한 제국 개념과 같은 내용을 초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검토한 바가 있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카우츠키가 초제국주의를 주장한 것을 비판한 바 있다. 제국주의의 발전은 결국은 세계적인 트러스트(연합)로 귀결될 것이라는 카우츠키의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레닌은 그러한 초제국주의는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며 현실에서는 그러한 초제국주의, 세계적인 트러스트 연합에 도달하기 전에 제국주의 모순이 폭발하여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것임을 주장했었다. 실제로 네그리는 레닌의 주장에 대해 세계 공산주의 혁명이냐 아니면 제국이냐가 레닌의 저작에 함축되어 있는 선택지13)라고 파악하는데 이는 네그리의 제국이라는 개념이 실은 레닌이 분석하고 비판했던 초제국주의와 같은 것임을 말해 준다. 다만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와 네그리의 제국이 다른 것은 시대적 조건인데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는 제국주의 시대 초기에 추상적 경향성을 말한 것이었다면 네그리의 제국은 쏘련의 붕괴로 인해 찾아온 미국의 시대, 미국 헤게모니 하의 세계화, 지구화 시대에 대한 개념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레닌이 초제국주의에 도달하기 이전에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과 현실성을 도출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세계화 시대라 할지라도 주권의 소재는 제국이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일 수밖에 없다. 세계화 시대에서 자본 간의 경쟁은 과거와 비할 수 없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고 그 자본들이 최후에 의존하는 권력은 국민국가, 민족국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국주의라는 개념은 세계화 시대에 더욱더 이론적으로 유효한데 왜냐하면 네그리가 제국이라 부르는 세계화, 지구화 시대는 다름 아니라 레닌이 제국주의의 본질이라고 규정한 금융자본의 지배의 전 세계적 확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개념은 세계화 시대에 더욱더 정치적으로 유효한데 왜냐하면 금융자본의 세계적 확장으로 인해 세계질서에 있어서 야수적인 힘의 논리가 강화되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반제국주의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쏘련 등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에 제국주의 세력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제국주의 개념의 부정은 곧 반제투쟁의 약화, 제국주의 강대국에 대한 약속국의 종속의 강화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그리와 같이 제국주의의 부정=제국 논리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쏘련 붕괴 후의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새로운 반제투쟁의 논리를 형성해 가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네그리의 제국 개념의 현실적인 의미는 그가 무정부주의의 입장에서 제국이라는 소위 지구적 권력 개념을 매개로 근대국가에 대한 부정을 수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 개념은 실체가 없는 것이고 실제적인 것은 현실적인 국가, 즉,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부정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국이라는 개념은 신좌파적 무정부주의의 결말이다.

그러면 네그리가 저항의 주체, 나아가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는 다중(多衆)이라는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네그리는 자신의 무정부주의적 관점에 따라 기존의 민중, 대중 개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민중은 저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환원하며 인구를 하나의 동일성으로 만든다. 민중은 하나이다. … 분명히 대중은 온갖 유형들과 종류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중의 본질은 무차별성이다. … 이 대중은 일치해서 움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별적인 동형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14) 이와 같이 네그리는 민중을 하나의 통일성을 갖는 개념이라고 보고 있고 대중은 무차별적이지만 하나의 동형의 집합체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제기하는 다중 개념은 수많은 내적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민중과 다르고 동형의 집합체인 대중과도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다중은 사회적 다양체가 내부적으로 다르게 남아 있으면서도 공동으로 소통하고 공동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15)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민중, 대중과 달리 다중은 내부적 차이와 다양성을 내포하면서도 공통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개념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네그리의 주장은 매우 피상적이다. 민중 개념이 내적 차이를 전제하지 않는 개념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네그리는 민중 개념에 획일성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지만 민중 개념은 수많은 다양성을 내포하면서도 지배질서에 의해 억압받는 점, 그리고 그 지배질서를 변혁해 가려 한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갖는 것이다. 또한 네그리는 다중을 노동계급과 구별한다. 그는 노동계급을 일컫는 산업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탈근대사회에서 정보, 지식노동 등을 하는 비물질노동이 지배적이 되면서 사라졌다고 본다. 또한 생산적 노동만이 아니라 기존에 비생산적 노동이라 일컫는 부분까지 포함하여 그것을 사회적 생산이라는 개념으로 보고 그러한 사회적 생산을 하는 주체를 다중이라 규정한다. 이것은 기존의 맑스주의에서 노동계급을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자로 파악하는 것과는 다른데 이는 네그리가 가치법칙이 탈근대사회에서 폭파되었다고 보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네그리는 계급을 생산수단과의 관계에서 파악하지 않고 나아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문제는 탈근대사회에서 의미를 잃었다고 본다. 즉, 네그리는 계급이라는 개념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정확히 말하면 비맑스주의적인 무정부주의적 관점에서 상정되는 것이 바로 다중 개념이다. 무차별적인 대중을 일컫는 것에 지나지 않은 다중 개념에 대해 네그리는 다중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성을 추구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가난하다는 점을 들어 저항의 주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은 한편으로 소박하고 한편으로 낡고 판에 박힌 인식에 지나지 않는데 여기에 대해 네그리는 새로운 옷을 입힌다. 즉, 정보, 지식 등의 비물질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다고 보면서 이들이 바로 새로운 저항과 새로운 사회의 주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네트워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새로운 저항주체들은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나의 중심을 형성하지 않으면서도 전 지구적 투쟁에 나서게 된다고 한다. 이에 따라 네그리는 기존의 중앙집중적인 조직형태의 저항이 아닌 네크워크를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구조가 저항의 중심이 된다고 한다. 즉, 전통적인 계급투쟁 모델은 의미를 상실하고 무력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중 개념에 대해 네그리는 특이성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을 기초로 해서 행동하는 다중은 능동적인 사회적 주체이며 다중은 다양함을 유지하고 내적으로 차이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다16)고 한다. 언뜻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매우 매력적이다. 특이성을 공유하고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공통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매우 그럴 듯하고 이런 점 때문에 자율주의가 일정한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실에서는 무정부주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 이 주장은 기존의 맑스주의 운동은 특이성을 존중하지 않고 개성이 말살된 운동이라는 주장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마타도어이고 운동의 외부자들에게 맑스주의 운동을 전체주의로 배타시하게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 맑스주의 운동은 변혁운동이며 그것은 객관 세계만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또한 변혁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각 주체는 서서히 자신의 주체적 능력을 고양하고 개성을 발전시키게 된다. 둘째 이 주장은 현실적으로 사회를 변혁해 가는 투쟁의 관점이 될 수 없다. 현실의 계급투쟁의 수행은 특이성을 전제로 하는 공통성이라는 차원에 머물 수 없다. 객관세계에 대한 치열한 탐구,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 대한 탐구, 정세의 변화에 대한 기민한 반응, 나아가 지배세력의 탄압에 대한 대응 등 계급투쟁의 측면들은 다양하다. 이 과정에서 주체는 객관세계에 대한 이해의 공통성을 세우고 공통의 과제를 도출하고 실행한다. 이러한 전 과정에서 강고하게 조직된 힘이 없다면 아무리 특이성과 다양성을 외친다 해도 투쟁은 승리할 수 없다. 즉, 중앙집중적인 통일이 빠진 상태에서 다양성 속의 공통성이라는 것은 투쟁과 조직에서 무정부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의 운동이 발전하고 하나하나의 투쟁이 승리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중앙집중적인 통일 속에서의 다양성, 특이성이 되어야 한다. 네그리는 다양성을 유지한 공통성이라고 하지만 단지 공통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통일성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바로 여기에 무정부주의와 맑스주의의 차이가 있다. 계급을 부정하는 네그리는 동의할 수 없겠지만 무산자로서 노동자의 투쟁, 민중의 투쟁은 강력한 조직 없이는 불가능하다. 가진 것이 없기에 오직 조직을 통해 뭉칠 때만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조직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네트워크만으로는 부족하고 통일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맑스주의의 민주주의적 중앙집중주의(민주집중제)라는 원칙은 다양성과 통일성의 결합을 의미하며 현실로 조직과 투쟁을 만들어 내면서도 민주성(다양성)의 원리를 실현하여 조직을 살아서 생동 치게 하는 것이다. 네그리가 통일성을 부정하고 회피하면서 내세우는 공통성은 현실에서는 통일성을 위한 치열한 노력을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통일성을 위한 치열한 노력이 없다면 운동의 발전은 고사하고 운동의 성립도 불가능할 것이다.

네그리는 꼬뮤니즘을 민주주의로 표현한다. 다중의 민주주의가 곧 꼬뮤니즘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네그리의 무정부주의적 측면이 드러난다. 민주주의가 국가를 통하지 않고서, 국가를 통해 실현되는 과정 없이 꼬뮤니즘으로 표상된다는 것은 실제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상적 이해를 보여 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것이 국가라는 강제력에 의해 뒷받침될 때만 현실을 변혁하는 힘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러한 과정이 없는 민주주의는 수다쟁이들이 토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네그리가 꼬뮤니즘이라 부르는 무계급 사회가 되면 민주주의 또한 사멸한다. 그때는 민주주의는 하나의 습관이 되어 더 이상 정치적 성격을 가지지 않음에 따라 소멸하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의 다중의 민주주의로서 꼬뮤니즘이라는 주장은 지금의 현실에 있어서도 쓸모없고 미래의 무계급 사회에 대해서도 잘못된 것이다.

자율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쏘련 붕괴 뒤의 청산주의의 한 흐름이 발전한 결과이다.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부정이 처음에는 쏘련의 부정으로 그 다음에는 푸코, 들뢰즈 등의 신좌파적인 개념의 수용으로 나아갔고 거기서 무정부주의적 관념으로 발전했다. 가치법칙의 폭파,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등의 개념은 현란하지만 매우 비과학적인 것이다. 이들은 현실적으로는 계급투쟁 노선의 청산을 가장 철저히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제국 개념은 실제로는 근대국가에 대한 부정이라는 무정부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다중 개념은 계급투쟁에 필요한 통일성에 대한 부정에 지나지 않는다. 다중의 민주주의로서 꼬뮤니즘이라는 이들의 결론은 신좌파적 무정부주의의 표어라 할 수 있다.  [노/사/과/연]

 

 

 


1) 안토니오 네그리ㆍ마이클 하트, ≪디오니소스의 노동 I≫, 갈무리, pp. 8-9.

2) 같은 책, p. 29.

3) 같은 책, p. 31.

4) 맑스ㆍ엥겔스,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p. 215.

5) 네그리, ≪맑스를 넘어선 맑스≫, 중원문화, p. 91.

6) 같은 책, p. 95.

7) 네그리ㆍ하트, ≪디오니소스의 노동 I≫, p. 41.

8) 네그리ㆍ하트, ≪디오니소스의 노동 II≫, p. 190.

9) 같은 책, pp. 137-138.

10) 같은 책, p. 179.

11) 네그리ㆍ하트, ≪제국≫, 이학사, p. 11.

12) 같은 책, p. 12.

13) 같은 책, p. 315.

14) 네그리ㆍ하트, ≪다중≫, 세종서적, pp. 18-19.

15) 같은 책, p. 19.

16) 같은 책, p.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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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Mar 27th, 2017 | By | Category: 2017년 03월호 제131호, 이론 | 조회수: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