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
| ≪먼쓸리 리뷰(Monthly Review )≫ 편집장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 John Bellamy Foster, “The New Irrationalism”, Monthly Review, Vol. 74, No. 9(February 2023). <https://monthlyreview.org/2023/02/01/the-new-irrationalism/#en73backlink>
[차례]
1. 서론
2. 역사 속의 비이성
3. 비합리주의의 귀환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3. 비합리주의의 귀환
루카치는 비합리주의의 성장을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와 동일시했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는 애초에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노선을 따라 경제적으로 구상되었다. 이는 식민지와 세력권을 둘러싼 투쟁에서 제국주의 간 적대와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독점자본주의 체제이다. 그런데 루카치에 따르면 레닌은 무엇보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개념을 계급 정치와 국가 간의 동맹에 초점을 맞춘 “제국주의가 만들어 낸 구체적인 세계정세 이론”으로 전환시켰다.[1]Georg Lukács, Lenin,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1971, pp. 41–43. 게다가 레닌은 제국주의 단계에서의 평화 협정이란 독점자본주의에 내재한 보다 큰 지정학적 투쟁 속에서 “전쟁과 전쟁 사이의 ‘휴전’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2]Lenin, 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 p. 119. 이리하여 제국주의의 정치적 양상은 전체 민족 문화에 스며들어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다른 맥락에서 언급한 “감정의 구조”를 만들어 냈다.[3]Raymond Williams, The Long Revolution, Cardigan, UK: Parthian, 2012, p. 69. 이것이 바로 1870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역사에서 제국주의와 비합리주의의 결합이다.
1945년에 시작된 후기 제국주의는 지금까지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1945년부터 1991년 직전까지의 냉전 시기
이때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패권 국가인 미국이 반(反)식민지 반란을 일으킨 글로벌 싸우스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고자 했고, 동시에 쏘련과 중국을 상대로 전 세계적인 투쟁을 벌였던 시기이다.
(2) 1991년부터 2008년까지의 시기
이때는 쏘련이 세계 무대에서 사라지고 중국이 세계 경제에 개방되면서 공백이 생긴 틈을 타 미국이 영구적인 단극 세계를 공고히 하려 했던 시기이다.
(3) 2008년(대금융 위기)부터 현재까지
이 시기는 중국과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재부상하고 미국이 이 두 나라를 주적으로 공식 지정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미국 중심의 단극 세계와 부상하는 다극 세계 질서 사이의 갈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신냉전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기간 동안 서구 좌파는 국내적으로 독점자본주의 내에서 입지가 약화되었고, 국외에서도 계급 투쟁의 침몰과 함께 제국주의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해 왔다. 1968년에도 큰 패배를 당했다. 신냉전의 도래와 함께 주요 신흥국을 포함한 글로벌 싸우스에 대한 제국주의 삼각 연합 세력의 하이브리드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부르주아적 비합리주의가 후기 제국주의의 지배적인 지적 풍토를 규정하였고, 이는 계속되는 이성의 파괴를 반영한 것이었다. 오늘날 베르그송주의의 부흥과 함께 “니체-하이데거-칼 슈미트의 논리적 연계성”과 관련된 독일의 반동적 사상이 데리다에서 들뢰즈, 라뚜르에 이르기까지 포스트맑스주의자, 포스트모더니스트, 포스트휴머니스트들의 저작에 존재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4]Wolin, Labyrinths, p. 1. 께찌 추흐로프(Keti Chukhrov)의 말에 따르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비합리주의 철학의 특징은 “비관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매혹”이다. 이는 들뢰즈와 과따리의 작품이나 현재의 디스토피아 가속주의 및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에서 볼 수 있다.[5]Keti Chukhrov, Practicing the Good, Minneapolis: e-flux/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20, p. 20.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에서 니체 사상의 “단호한 반변증법적” 성격과 “권력에의 의지”, “영원회귀”, 그리고 초인의 꿈 개념이 헤겔 사상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고, 권력 의지의 완성으로서 “권력과 의지의 창조적 고유성”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6]Deleuze, Nietzsche and Philosophy, pp. 8–10, 198. 그러면서 국가 철학에 반대하는 다양한 사상가들을 연결하는 “비밀 연결 고리”가 있다고 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이 비밀 연결 고리에는 스피노자(생기론자로 재해석됨), 니체, 베르그송이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내재성의 철학자로 볼 수 있으며, “유목적(nomadic)” 전통을 대표하여 일반적으로 유럽의 합리주의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헤겔과 맑스의 정반대에 서 있다.[7]Gilles Deleuze, “I Have Nothing to Admit”, Semiotexte, Vol. 2, No. 3(1977), p. 112.; Brian Massumi, “introduction”, Gilles Deleuzeㆍ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Minneapolis: … Continue reading 들뢰즈는 베르그송이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에서 한 주장을 1966년 그의 저서 ≪베르그송주의≫에서 옹호하며, 물리학 및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분리된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시간 개념에 다시 한번 특권을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8]Gilles Deleuze, Bergsonism, New York: Zone Books, 1991, pp. 79–85.
비합리적이고 반동적인 뒤집기가 여전히 좌파로 여겨지는 분석에서 많이 나타난다. 추흐로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에서 들뢰즈와 과따리는 자본을 괴물로 여긴다. 동시에 자본의 전복과 그 해방적 잠재력이 생겨날 수 있는 바람직한 지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 B. 포스터] 악랄한 자본주의적 동시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의 지양이 불가능하다는 조건을 고려할 때 불가피하다. … 이러한 이상한 주장의 매우 중요한 측면은 다음과 같다. 이런 식의 해방적이고 비판적인 이론의 자본주의적 숨은 진의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기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탈출의 불가능성을 과격하게 표현하는 것이다.[9]Chukhrov, Practicing the Good, p. 20.
탈출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야단법석은 들뢰즈와 과따리의 맑스와의 주요 대결에서 볼 수 있다. 들뢰즈와 과따리는 자신들의 유력한 1972년 작품인 ≪안티-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도입부에서 “생산, 유통, 소비라고 불리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을 초래하는 “산업-자연” 관계를 설정한다. 이 분리된 영역들은 맑스에 의해 자본주의적 분업과 그 분업이 만들어 낸 허위의식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주의를 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그들은 초역사적 명제로 도약했다.
우리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 않는다. 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맑스의 표현: J. B. 포스터]은 생산이나 산업의 형태로 자연 내에서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은 인간의 유적 삶에서 하나가 된다. … 이제 산업은 더 이상 효용이라는 외재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생산과 인간에 의한 생산이라는 자연과의 근본적인 동일성의 관점에서 고려된다. … 인간과 자연은 서로 마주보는 두 항과 같은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이 둘은 하나의 동일한 근본 실재, 즉 생산자[이면서: 역자] 생산물이다.[10]Gilles DeleuzeㆍFé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3, pp. 3–5.
이를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이상적인 통일체, 즉 여기서 인용되고 있는 맑스가 “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산업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산업은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현상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통합을 위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수단이 된다. 그러나 맑스는 이를 자본주의하의 소외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맑스가 대체해야 할 비극적 “결함”으로 제시한) 자본주의의 중심적인 물질적 현실로서의 소외 또는 인간의 자기 소외라는 개념 전체는 처음부터 제거된다.[11]Karl Marx, Early Writings, London: Penguin, 1974, pp. 349–50(quoted in accordance with DeleuzeㆍGuattari, op. cit.), 398–99. 들뢰즈와 과따리에게 자연과 인간은 산업에 의해 추상적으로 생성된 “하나의 근본 실재”이다.
소외라는 역사적 현상을 효과적으로 제거한 들뢰즈와 과따리는 곧바로 생산을 욕망하는 기계의 “내재적 원리”로 평가하고 만물의 정신분열증으로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열증”은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욕망-기계의 우주요, ‘인간과 자연의 근본 실재’로 [나타나는: J. B. 포스터] 1차적인 우주적 생산으로 정의된다.”[12]DeleuzeㆍGuattari, Anti-Oedipus, p. 5. 따라서 사회적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나타난 맑스의 소외는 욕망 기계의 우주적 체계 또는 자본주의는 단순한 징후에 불과한 더 큰 정신분열증적 현실을 생산하는 “기계적 무의식”으로 대체된다. 이 정신분열증이 욕망하는 현실은 내재성의 차원에 놓여 있으며 이는 인간 그 자체를 대체한다.[13]Félix Guattari, The Machinic Unconscious, Los Angeles: Semiotext(e), 2011.; Karl MarxㆍFrederick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4, p. 1. 따라서 우리는 리비도적 에너지, 생명력, 욕망하는 기계의 충동으로 이루어진 우주를 마주하게 되며,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14]들뢰즈의 생기론적 철학에서 본질은 유동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내재되어 있으며, 따라서 고정적이고 초월적인 관념이라는 의미에서의 본질주의와 … Continue reading 결국 니체의 반동적 비합리주의가 맑스의 혁명적 실천을 이기게 된다.
비슷한 반전을 데리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데리다의 유명한 저서 ≪맑스의 유령≫에서 맑스와 관련하여 다시 한 번 드러난다. 데리다는 이 작품과 다른 작품에서 하이데거 좌파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을 발전시켰다. 쏘련이 멸망한 직후에 쓰여진 ≪맑스의 유령≫에 대한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은 맑스를 재차 긍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맑스 유령학”을 강조하는 간접 변호론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데리다는 맑스와 엥엘스가 쓴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첫 구절에 주목했다.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15]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London: Routledge, 1994, pp. 219–20. 데리다의 ≪맑스의 유령≫이 맑스주의의 실천을 해체하려 했다면, 다른 작품들은 맑스의 유령 … Continue reading 데리다는 맑스주의가 유령 같은 의미에서라도 여전히 유럽을 괴롭히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단일체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맑스, 혹은 그가 유지하고자 했던 맑스는 리처드 울린(Richard Wolin)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이데거화된 맑스”였으며, 주적은 이제 단순히 기술 과학적 근대성이라는 개념으로 축소되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유산인 철학적 반인간주의라는 존재론적 선입관”은 맑스 이론의 모든 핵심을 제거했다. 혁명적 실천 배후에 있는 사회적 세력들도 제거되었다. 실제로 데리다는 “맑스 유령학”은 맑스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맑스, 프로이트, 하이데거라는 고유명사 뒤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계속 괴롭히지만 단순히 맑스의 유령이 아니라 “시대적 사고가 … 역사성을 제거”한 하이데거의 유령이다.[16]Derrida, Specters of Marx, pp. 93, 219.; Wolin, Labyrinths, pp. 238–39.
따라서 새로운 내재성의 철학은 겉보기에는 급진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반동적인 각종의 이론을 낳았다. 이는 생태 위기에 대한 포스트휴머니즘적 접근, 특히 “신유물론”의 형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중 상당 부분은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생기론 이론가로 보는 문제적 재해석의 영향을 받았다. 주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17][역자 주] 스피노자에 있어 코나투스는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개념을 통해 동기, 마음, 심지어 기쁨까지도 돌과 같은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했다.[18]Baruch Spinoza, Ethics, London: Penguin, 1996, p. 75(III, prop. 6).; “From Baruch Spinoza’s ‘Letter to G. H. Schuller’(1674)”.; Gilles Deleuze,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San Francisco: … Continue reading 이로 인해 베넷(Bennett)과 모턴(Morton)과 같은 인물의 새로운 생기론(소위 “신유물론”) 저작들이 종종 생태학의 이름으로 쏟아져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 결과는 우주적 정령숭배(animism)이다. 이 관점에서는 석탄 덩어리, 미생물, 아도르노의 플라스틱 공룡 세트, 돌멩이 등이 모두 “생명력”을 가진 것으로 취급되어 인류와 평등한 존재론적 평면에 놓이게 된다.[19]Jane Bennet, Vibrant Matter,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0, pp. xiv–xv, 1–4.; Timothy Morton, Humankind, London: Verso, 2019, pp. 33, 55, 61–63, 71, 97, 166–71. (John Bellamy Foster, … Continue reading 쇼펜하우어(스피노자에 대한 답변에서)처럼 베넷은 떨어지는 돌이 의식이 있다면 의지가 있고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20]Bennet, Vibrant Matter, pp. 1–4. 그 결과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의미 있는 구분이 사라지게 된다.
라뚜르, 베넷, 모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전략은 상품 물신성에 대한 맑스의 유명한 비판을 뒤집어 모든 사물/대상을 생명의 주체 또는 행위자로 제시함으로써 이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이는 상품 물신성과 물화(세계의 사물화)의 우주화, 그리고 그로 인한 인간 주체 개념의 약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비판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의 제거를 의미한다.[21]Foster, “Marx’s Critique of Enlightenment Humanism”, pp. 10–12.
라뚜르의 잘 알려진 “근대”에 대한 거부는 자연과 인간 개념에 대한 타당성을 모두 부정하는 하이데거 좌파의 방식이다. 자연과 인간 개념은 근대적 계몽주의에 의해 도입된 잘못된 이원론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연-사회 이원론에 대한 이러한 거부를 자신의 “정치 생태학”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인간 주체를 “행위소들(actants)”의 혼종체로 대체했다.[22]Bruno Latour, The Politics of Nature,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pp. 75–80.; Bruno Latour, Reassembling the Socia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pp. … Continue reading 그러나 라뚜르는 지질학 역사에서 새로운 인류세 시대(Anthropocene Epoch)로 대표되는 현실의 지구 생태학적 위기 상황을 고려할 필요성을 뒤늦게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철학은 생태학조차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생태학적 위기 상황에 대한 어떤 기준점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가이아(Gaia)[23][역자 주] 라뚜르에게 가이아는 지구이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비-인간 행위자와 인간-행위자가 전체적으로 연결되는 환경이자 장이다.나 어스바운드(Earthbound)[24][역자 주] 어스바운드는 가이아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구성 요소 행위자들(actants)이다.(지구라는 개념을 고쳐 의인화한 것)와 같은 신비로운 개념으로 되돌아갔다. 더 중요한 것은 지구 파괴의 성질을 고려할 때 정치 질서의 관점에서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쓴 슈미트의 ≪유럽공법의 국제법에 나타난 지구의 노모스(The Nomos of the Earth in the International Law of the Jus Publicum Europaeum)≫에 주목했다. 슈미트는 생태학이 아닌 영토화라는 의미에서 지구에 법을 뿌리내리고자 했으며, 영토화를 국제법의 근거가 되는 영구적 전쟁 상태의 기초로 생각했다.[25]Bruno Latour, Facing Gaia, Cambridge: Polity, 2017, pp. 220–54, 285–92.; Bruno Latour, Down to Earth, Cambridge: Polity, 2018.
이 시기의 슈미트에 대한 루카치의 평가는 당연히 라뚜르의 평가보다 훨씬 가혹하다. 루카치는 나치의 법률 이론가 슈미트는 제3 제국의 몰락 이후 새로운 제국주의 사조로 빠르게 전환했다고 주장했다. “그(칼 슈미트)에게는 독점자본주의의 절대 독재를 수립하기 위해서 히틀러든, 아이젠하워든, 새로 등장한 독일 제국주의든 중요하지 않았다.”[26]Lukács, The Destruction of Reason, pp. 839–40.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뚜르는 슈미트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어스바운드를 위한 “새로운 전쟁 상태”에 해답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정신을 찬양하는 것으로 2015년 ≪가이아와의 대면(Facing Gaia)≫을 마무리한다.[27]Latour, Facing Gaia, pp. 285–92. “근대(the moderns)”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라뚜르는 적어도 한동안은 브레이크스루 연구소(Breakthrough Institute)의 자본주의적 초생태모더니스트들(ultra-ecomodernists)과 동맹을 맺고 사람들에게 “당신의 [프랑켄슈타인: J. B. 포스터] 괴물을 사랑하라”고 요청했다.[28]Bruno Latour, “Love Your Monsters”, Breakthrough Journal, No. 2(Fall 2011). 라뚜르는 그의 사후 마지막 책에서 좀 더 진보적이고 덜 비합리주의적인 발걸음을 … Continue reading
비합리주의는 이제 다시 대단히 유행하고 있다. 후기 제국주의의 세계가 핵전쟁과 지구 생태계의 위기 상황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절멸주의에 직면함에 따라 “탈출 … 불가능성의 급진화”는 더욱 분명해졌다. 하이데거의 ≪블랙 노트북≫에 나오는 반유대주의와 나치즘을 다룬 회의와 책에서 나치즘이 하이데거의 전체 관점에 필수적이라는 것이 폭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하이데거의 철학을 구제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대표자는 라깡-헤겔주의 철학자인 지제크이다. 이런 지제크에게 하이데거에 대한 최종적 판결이 맡겨졌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제크의 좌파 사상가로서의 명성 때문이다. 지제크는 하이데거의 나치즘에도 불구하고 철학에서 하이데거의 중요성을 옹호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기초 존재론의 중요성 또는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에 근거한다. 하이데거의 다자인(Dasein)에 대한 분석과 의식적 자아의 해체가 거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하이데거의 정치적 경로의 구체적 내용과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비록 하이데거가 자신의 나치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극우적 견해에서 벗어나지 않았더라도 하이데거를 여전히 찬양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기초 존재론과 과학 기술 문명에 대한 비판은 제3 제국과의 공범 관계와는 구별된다는 것이다.[29]Slavoj Žižek, “The Persistence of Ontological Difference”, Heidegger’s Black Notebooks(ed. MitchellㆍTrawny), pp. 186–200.
지제크는 ≪무보다 더 적은: 헤겔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그림자(Less Than Nothing: Hegel and the Shadow of Dialectical Materialism)≫[30][역자 주] 한국어로는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두 권으로 번역되어 있다.에서 하이데거를 더욱 강력하게 찬양했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이상하게도 공산주의에 가까운” 실천 속에서 “정상에 반하는” 활동을 하는 인물로 제시된다. 뿐만 아니라 나치당의 당원이었던 “1930년대 중반의” 하이데거를 “미래의 공산주의자”로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 자신은 그런 결론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지제크는 하이데거의 나치즘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올바른 발걸음’이었다”고 변명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단순히 독일의 푈키쉬(völkisch) 반동[31][역자 주] 푈키쉬 운동(Völkische Bewegung)은 19세기 후반부터 나치 시대까지 독일에서 일어난 반동적 반유대적 민족주의 운동이다.으로 치부될 수 없다”고 한다. 지제크는 나치 시대에 하이데거가 “급진적인 해방의 정치를 지향하는 …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었다고 가정한다. 확실히, 지제크는 이 책을 ≪블랙 노트북≫이 출판되기 전에 썼지만, 하이데거의 나치 관련 저술이 많이 나온 후에 쓴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악랄한 반유대주의가 담긴 ≪블랙 노트북≫은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지제크의 전반적인 변호를 거의 바꾸지 못했다.[32]Slavoj Žižek, Less Than Nothing: Hegel and the Shadow of Dialectical Materialism, London: Verso, 2013, pp. 6, 878–79.
하이데거의 반인간주의 프로젝트에 대한 지제크의 충성심은 그가 (베넷을 칭찬하면서) 자연과 생태는 인간과 함께 더 이상 의미 있는 범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현재의 포스트휴머니즘적 입장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맑스의 신진대사 균열 개념에 대한 논의에 초점을 맞춘 기사에서 지제크는 사회주의자이자 원주민인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가 어머니 지구를 방어할 것을 촉구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농담으로 응답했다. “여기에 자본주의의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어머니 지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지제크의 많은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생태 문제에 대한 경멸을 반영하는 그의 다른 발언과 일치한다. 지제크는 “생태학은 대중을 위한 새로운 아편”이라고 선언하는 등 체제에 대한 간접적 변호론을 폈다.[33]Slavoj Žižek, “Ecology Against Mother Nature”, Verso Blog, May 26, 2015.; Slavoj Žižek, “Censorship Today: Violence, or Ecology as a New Opium for the Masses”, 2007. <lacan.com>; … Continue reading
사실, 자연의 탈자연화와 인간의 탈인간화는 모두 지제크의 일반적인 반인간주의적 관점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는 탈출 불가능성의 급진화 원칙에 부합한다. 따라서 그는 허무주의적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인간 문화의 힘은 우리가 자연으로 경험하는 것을 넘어 자율적인 상징적 우주를 건설하고, 인간의 지식을 구체화하는 새로운 ‘비자연적’ 자연물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우리는 ‘자연을 상징화’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말하자면, 그것을 내부로부터 탈자연화한다. … 생태학적 도전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의 급진적인 탈자연화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다음과 같이 진술하기 때문에 인간의 급진적인 비인간화를 의미한다. “헤아릴 수 없는 비인간적 자연(하이데거의 ‘대지’)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인간은 존재한다.” 그는 인간의 “자연 내재성”에 대한 모든 논의와 신진대사 균열에 대한 분석 문제는 엥엘스와 레닌의 변증법적 자연주의에 의거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일반 존재론”으로 퇴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지제크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독특하고 관념론적이며 비합리주의적인 접근 방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순수한 관념론을 통해 “맑스에서 헤겔로 돌아가 맑스 자신의 ‘유물론적 역전’을 수행”하겠다. 자연주의-유물론과 비판적 인본주의는 무릇 좌파 하이데거주의에 따라 거부되어야 한다.[34]Slavoj Žižek, “Where Is the Rift?: Marx, Lacan, Capitalism, and Ecology”, Los Angeles Review of Books, Vol. 20(January 2020).; Žižek, Less than Nothing, p. 207. 지제크는 오늘날 … Continue reading 이렇게 해서 물질적 현실은 추상적 실재에 자리를 내준다. 이러한 견해는 의미 있는 실천에서 물러나, 깊은 비관주의, 비합리주의의 변증법으로 이어진다. 지제크는 지구 생태계 위기나 지구의 티핑 포인트를 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자본주의에 대한 계급 투쟁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우리는 재앙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경솔하게 선언한다.[35]Žižek, Less Than Nothing, pp. 983–84, 207.; Žižek, Absolute Recoil, pp. 31, 107. 지제크는 재앙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철학적 움직임의 관점에서 “급진적인 … Continue reading
자본주의의 환경 위기와 관련된 이러한 비합리주의는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의 맥락에서 나토와 러시아 간의 핵충돌 위협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지제크의 대응에서도 잘 드러난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민족주의적 열정과 혼합된 혼란스러운 반인간주의의 산물인 이성의 더욱 심한 파괴를 목격하고 있다. 이는 나토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속 지원하고 평화 회담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지제크의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인류를 거의 전멸시킬 수 있는 세계적 핵전쟁의 위험성이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지제크는 노암 촘스키와 같이 점증하는 세계적 절멸주의자들의 위협과 관계되는 문제를 제기한 학자들을 그릇되게 뿌찐의 러시아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매도했다. 대신에 그는 러시아와 중국 모두와 싸울 수 있는 더 강력하고 세계적인 나토를 요구한다. 똑같은 논리를 우리는 듣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지 말고 우크라이나 땅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국가적 실존 위기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역시 러시아와 군사적 동등성을 달성하기 위해 [서방이 공급하는: J. B. 포스터] 무기를 보유해야 하며, 심지어 핵무기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다.[36]Slavoj Žižek, “The Ukraine Safari”, Project Syndicate, October 13, 2022.; Slavoj Žižek, “Pacifism Is the Wrong Response to the War in Ukraine”, Guardian, June 21, 2022.; “Ukraine and … Continue reading
여기서 우리는 하르트만의 “우주적 자살”이 지성과 의지의 최고 표현으로서 우리 시대에 갑자기 다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서구의 세계관을 지배했던 최고의 지적 수준에서 배양된 비합리주의가 다시 한 번 모든 합리적 대안을 질식시키고 있다. 미국/캐나다, 유럽,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삼각 동맹의 목표를 비판 없이 지지하거나 후기 제국주의 정세에서 세계적 나토를 지지하는 것은 세계 경제의 중심에 있는 제국의 비이성적 권력 의지에 동조하는 것이다. 이는 착취와 약탈의 영원한 회귀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하르트만의 우주적 자살로 이어지거나 둘 중 하나이다.
오늘날 이성은 착취와 약탈, 그리고 이와 관련된 우리 시대의 절멸주의적 경향을 모두 극복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바란(Baran)이 1960년대에 지적했듯이 “계급[또는 계급에 기반한 사회적 세력: J. B. 포스터]의 물질적 이해관계와 기존의 비합리성에 대한 … 이성의 비판”을 통일시켜야만 달성될 수 있다. “계급의 물질적 이해관계”와 통일시키는 근원은 현재 주로 글로벌 싸우스, 그리고 인류와 지구를 위해 자본주의-식민지-제국주의 체제 전체를 전복하려는 모든 곳의 혁명적 운동에 있다.
노사과연
References
↑1 | Georg Lukács, Lenin,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1971, pp. 4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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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Lenin, 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 p. 119. |
↑3 | Raymond Williams, The Long Revolution, Cardigan, UK: Parthian, 2012, p. 69. |
↑4 | Wolin, Labyrinths, p. 1. |
↑5 | Keti Chukhrov, Practicing the Good, Minneapolis: e-flux/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20, p. 20. |
↑6 | Deleuze, Nietzsche and Philosophy, pp. 8–10, 198. |
↑7 | Gilles Deleuze, “I Have Nothing to Admit”, Semiotexte, Vol. 2, No. 3(1977), p. 112.; Brian Massumi, “introduction”, Gilles Deleuzeㆍ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3, p. x. |
↑8 | Gilles Deleuze, Bergsonism, New York: Zone Books, 1991, pp. 79–85. |
↑9 | Chukhrov, Practicing the Good, p. 20. |
↑10 | Gilles DeleuzeㆍFé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3, pp. 3–5. |
↑11 | Karl Marx, Early Writings, London: Penguin, 1974, pp. 349–50(quoted in accordance with DeleuzeㆍGuattari, op. cit.), 398–99. |
↑12 | DeleuzeㆍGuattari, Anti-Oedipus, p. 5. |
↑13 | Félix Guattari, The Machinic Unconscious, Los Angeles: Semiotext(e), 2011.; Karl MarxㆍFrederick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4, p. 1. |
↑14 | 들뢰즈의 생기론적 철학에서 본질은 유동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내재되어 있으며, 따라서 고정적이고 초월적인 관념이라는 의미에서의 본질주의와 구별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
↑15 |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London: Routledge, 1994, pp. 219–20. 데리다의 ≪맑스의 유령≫이 맑스주의의 실천을 해체하려 했다면, 다른 작품들은 맑스의 유령 형태를 이용해서 혁명적 실천을 뜯어고쳤다. 특히 China Miéville, A Spectre Haunting: On the Coronavirus Manifesto, Bloomsbury: Head of Zeus, 2022를 참조. |
↑16 | Derrida, Specters of Marx, pp. 93, 219.; Wolin, Labyrinths, pp. 238–39. |
↑17 | [역자 주] 스피노자에 있어 코나투스는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
↑18 | Baruch Spinoza, Ethics, London: Penguin, 1996, p. 75(III, prop. 6).; “From Baruch Spinoza’s ‘Letter to G. H. Schuller’(1674)”.; Gilles Deleuze,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San Francisco: City Lights, 1988, pp. 97–104. |
↑19 | Jane Bennet, Vibrant Matter,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0, pp. xiv–xv, 1–4.; Timothy Morton, Humankind, London: Verso, 2019, pp. 33, 55, 61–63, 71, 97, 166–71. (John Bellamy Foster, “Marx’s Critique of Enlightenment Humanism”, Monthly Review, Vol. 74, No. 8(January 2023), pp. 1–15. 참조.) |
↑20 | Bennet, Vibrant Matter, pp. 1–4. |
↑21 | Foster, “Marx’s Critique of Enlightenment Humanism”, pp. 10–12. |
↑22 | Bruno Latour, The Politics of Nature,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pp. 75–80.; Bruno Latour, Reassembling the Socia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pp. 54–55.; Bruno Latour, We Have Never Been Moder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3. |
↑23 | [역자 주] 라뚜르에게 가이아는 지구이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비-인간 행위자와 인간-행위자가 전체적으로 연결되는 환경이자 장이다. |
↑24 | [역자 주] 어스바운드는 가이아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구성 요소 행위자들(actants)이다. |
↑25 | Bruno Latour, Facing Gaia, Cambridge: Polity, 2017, pp. 220–54, 285–92.; Bruno Latour, Down to Earth, Cambridge: Polity, 2018. |
↑26 | Lukács, The Destruction of Reason, pp. 839–40. |
↑27 | Latour, Facing Gaia, pp. 285–92. |
↑28 | Bruno Latour, “Love Your Monsters”, Breakthrough Journal, No. 2(Fall 2011). 라뚜르는 그의 사후 마지막 책에서 좀 더 진보적이고 덜 비합리주의적인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급진적인 것은 아니다. Bruno LatourㆍNikolaj Schultz, On the Emergence of an Ecological Class, London: Polity, 2022. 참조. |
↑29 | Slavoj Žižek, “The Persistence of Ontological Difference”, Heidegger’s Black Notebooks(ed. MitchellㆍTrawny), pp. 186–200. |
↑30 | [역자 주] 한국어로는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두 권으로 번역되어 있다. |
↑31 | [역자 주] 푈키쉬 운동(Völkische Bewegung)은 19세기 후반부터 나치 시대까지 독일에서 일어난 반동적 반유대적 민족주의 운동이다. |
↑32 | Slavoj Žižek, Less Than Nothing: Hegel and the Shadow of Dialectical Materialism, London: Verso, 2013, pp. 6, 878–79. |
↑33 | Slavoj Žižek, “Ecology Against Mother Nature”, Verso Blog, May 26, 2015.; Slavoj Žižek, “Censorship Today: Violence, or Ecology as a New Opium for the Masses”, 2007. <lacan.com>; Slavoj Žižek, Absolute Recoil: Toward a New Foundation of Dialectical Materialism, London: Verso, 2016, pp. 7–12. 지제크는 신유물론에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맹렬한 반인간주의적, 반실재론적 관점에 동조한다. |
↑34 | Slavoj Žižek, “Where Is the Rift?: Marx, Lacan, Capitalism, and Ecology”, Los Angeles Review of Books, Vol. 20(January 2020).; Žižek, Less than Nothing, p. 207. 지제크는 오늘날 유물론에는 네 가지 관련 형태가 있다고 주장한다. (1) 환원주의적 통속 유물론(인지심리학, 신다윈주의), (2) 무신론(크리스토퍼 히친스), (3) 담론적 유물론(미셸 푸꼬), (4) “신유물론”(들뢰즈). 맑스주의는 의도적으로 목록에서 제외하였다. 지제크는 엥엘스와 레닌에 반대하여 생존 가능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헤겔적 관념론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자끄 라깡과 하이데거를 통해 재해석한 “유물론 없는 유물론”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는 “무보다 적은”의 허무주의 철학으로서 최종 정당성을 헤겔이나 맑스가 아니라 하이데거에서 찾았다. (Slavoj Žižek, Absolute Recoil, pp. 5–7, 413–14.) |
↑35 | Žižek, Less Than Nothing, pp. 983–84, 207.; Žižek, Absolute Recoil, pp. 31, 107. 지제크는 재앙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철학적 움직임의 관점에서 “급진적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급진적”이거나 “해결책”으로 볼 수 없다. 그의 분석에 이 “운명”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려는 시도가 없다는 점에서 우주적 자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변증법에 대한 지제크의 독특하고 관념론적인 접근에 대한 비판은 다음을 참고하라. Adrian Johnston, A New Dialectical Idealism: Hegel, Žižek, and Dialectical Materi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Adrian Johnston, “Materialism without Materialism: Slavoj Žižek and the Disappearance of Matter”, Slavoj Žižek and Dialectical Materialism(ed. Agon HamzaㆍFrank Ruda),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6, pp. 3–22. 존스턴이 말한 것처럼, 지제크의 작업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재창조라기보다는 배신”이다. (Johnston, “Materialism without Materialism”, p. 11.) |
↑36 | Slavoj Žižek, “The Ukraine Safari”, Project Syndicate, October 13, 2022.; Slavoj Žižek, “Pacifism Is the Wrong Response to the War in Ukraine”, Guardian, June 21, 2022.; “Ukraine and the Third World”, Kurtay Academics, March 4, 2022. <kurtayacademics.com>; Jonathan Cook, “A Lemming Leading the Lemmings: Slavoj Žižek and the Terminal Crisis of the Anti-War Left”, MintPress News, June 23, 2022. 신냉전의 핵 위험에 대해서는 John Bellamy FosterㆍJohn RossㆍDeborah Veneziale, Washington’s New Cold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22.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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