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합목적성과 합법칙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재길 | 교육위원장

 

 

“합목적성 개념의 논리적 내용에 대하여”(≪정세와 노동≫ 제192호(2023년 6월), 이하 “합목적성 개념”)라는 한동백 동지의 글에 몇 가지 이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목적이란 무엇인가?

 

≪자본론≫에서 관련 부분을 인용해 보자.

 

거미는 직포공의 작업과 흡사한 작업을 하고, 꿀벌은 벌집을 지음으로써 많은 인간 건축가들을 무색케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툰 건축가조차 처음부터 가장 뛰어난 꿀벌보다 돋보이게 하는 것은, 건축가는 밀랍으로 방을 짓기 전에 그것을 자신의 머릿속에 먼저 지었다는 점이다. 노동과정의 끝에서는, 그 과정이 시작될 때에 이미 노동자의 표상 속에, 따라서 이미 관념적으로 존재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적인 것의 형태변화만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동시에 그 자연적인 것 속에 자신의 목적을, 즉 자신이 알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양식을 법칙으로서 규정하는,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그것에 종속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목적을 실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의 종속은 결코 일시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기관들의 긴장 외에, 집중력으로서 발현되는 합목적적 의지가 노동이 지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서 필요하며, 게다가 이 의지는, 그 노동이 그 자체의 내용과 수행방식에 의해서 노동자를 매료시키지 못하면 못할수록, 따라서 노동자가 그 노동을 자기 자신의 육체적ㆍ정신적 힘의 운동으로서 즐기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욱더 필요하다.

노동과정의 단순한 계기들은 합목적적인 활동 즉 노동 그 자체와 그 대상 및 그 수단이다.[1]칼 맑스, ≪자본론≫ 제1권 제2분책,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18, pp. 299-300. (강조는 인용자.)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목적 설정은 인간 사고활동의 결과이다. “목적 설정은 관념적 활동의 결과로서 오로지 인간 행위를 통해서만, 그리고 인간 행위 속에서만 가능하다.”[2]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동녘, p. 392. ‘머릿속에 먼저 지었다’는 것은 ‘표상’이다. 표상이란 “인간을 포함한 고등 동물의 중추 신경계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객관적 실재의 관념적 반영 형태”이다(≪철학대사전≫, p. 1349). 표상으로 인해 과거의 실재를 재구성하고, 미래의 실재를 선취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부 표상들은 신념, 인식, 희망, 두려움 등과 같은 정신 상태(심적 상태(mental states))에 관한 것들이며, 다른 표상들은 문장, 지도, 도표, 그림 등과 같이 공적이며 비정신적인 항목들에 관한 것들이다.”[3]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 편, ≪생물학이 철학을 어떻게 말하는가≫, 뇌신경철학연구회 역, 철학과현실사, 2020, p. 163. 표상에는 비정신적 항목들도 있을 수 있다. 유전자의 염기 서열 등 유전자 정보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따라서 맑스는 합목적적 활동에 단순히 표상뿐만 아니라 합목적적 의지까지 포함시킨다.

 

합목적적 활동은 자유와 관련된다. “합목적성 개념”의 글에서도 인용하고 있듯이 자유는 자기목적으로서 사회화된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이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인간이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법칙성(필연성)에 대해 갖는 관계, 특히 그것을 인식하고 실천적으로 지배하는 정도를 말한다. 자유는, 객관적 필연성을 통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얻어진 능력, 즉 자연과 사회의 합법칙성에 정통하여 이를 의식적으로 적용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늘려 나가는 데서 성립한다.” (≪철학대사전≫, p. 1117.) 자유 개념은 사회적 범주이다. 필연성이 객관적 실재의 모든 영역에서 작용하는 반면, 자유는 사회역사적 범주이기 때문에 사회역사 영역에만 해당된다. 자유는 필연을 전제로 하지만 필연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자유의 실현과정이 합목적적 활동이다. 자유가 사회역사적 개념이듯이 합목적적 활동도 사회역사적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다.

 

합목적적 활동은 목적의식적 활동과 관련된다. “의식은 인간에게 자신의 행위와 실천적 활동을 미리 머릿속에서 그려 보고 목표에 맞춰 실천적 활동을 계획하고 또 그 결과를 예견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철학대사전≫, p. 1017.) 의식도 자유 개념과 마찬가지로 사회역사적 개념이다. 즉 의식의 원천은 뇌가 아니다. 뇌는 의식의 기관일 뿐이다. 의식은 언어의 발생과 같이 발생하였다. 의식과 언어는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생겨났다. 의식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회로부터 고립되면 형성되지 않는다. 늑대 소년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늑대 소년은 사회에서 분리되어 늑대로 자라났다. 생물학적 조건은 인간과 똑같았지만 언어를 습득할 수 없었다.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생활을 통해서만 의식은 발현되고 언어도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초보적 의식기능은 중추 신경계를 가진 고등 동물들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역사적 성격을 갖는 고도의 의식기능은 인간만이 갖고 있다. 이런 인간의 사회역사적 의식기능을 의식성, 또는 목적의식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합목적적 활동은 목적의식성과 관련되는 것이다. 목적의식성은 사회역사적 성질이다. 인간의 행위는 이 행위의 사회역사적 결과를 고려한 가운데, 이 결과를 목적으로 삼아 수행되며, 동시에 적절한 사회적 조직을 통해 이 목적을 달성한다. 이런 인간의 행위를 목적의식성이라는 성질을 갖는다고 한다. 목적의식성을 갖는 행위가 합목적적 활동이다. 인간의 실천적 활동은 그 직접적인 결과와 관계해서 보면 항상 의식과 합목적적 조직을 가지고 수행하는 활동이다. 목적의식성은 무의식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자연발생성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자연발생성은 의식의 결여가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의식과 목적을 가지고 행위하기 때문이다. 자연발생성은 의도한 목적과 다르게 또는 의도하지 않은 사회적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결국 자연발생성은 서투른 행위이고 조직상의 결함이 있고 목표가 없는 행위이다. 물론 자연발생성은 자발성과 전혀 무관한 개념이다. 목적의식성을 통한 자연발생성의 극복은 필연성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인류가 도약하는 것이다. 즉 목적의식성은 자유와 관련된 개념이다.

 

이상이 맑스-레닌주의의 합목적성과 관련된 개념들이다.

 

그럼 “합목적성 개념”이라는 글은 어떻게 합목적성을 규정하고 있는지 비교하여 보자.

 

“진정한 의미에서 합목적적 활동이란 바로 자기목적적 활동이다”라고 올바르게 시작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자기목적적 활동을 하는 물질은 의식을 가진 물질인 인간뿐이다.

 

그런데 “합목적성 개념”에서는 자기목적적 활동을 자기운동과 동일한 것으로 규정한다. 자기목적적 운동은 물론 자기운동이다. 그러나 자기운동이라고 해서 모두 목적적 운동인 것은 아니다. 물질의 자기운동이란 물질을 그 물질이게 하는 본질의 실현운동이다. 본질의 실현운동에는 자기목적적 운동과 다른 본질적 연관이 작용하는 합법칙적 운동이 있다. 법칙성 또는 합법칙성이란 자기 속에 내재하는 법칙들에 따라 일어나는 과정과 상황들의 진행을 나타낸다. 법칙에는 인과법칙과 비인과적 법칙이 있다. 인과법칙이란 원인-결과의 연관을 말한다. 비인과적 법칙에는 구조적 연관을 들 수 있다. 이를 구조법칙이라고 한다. 비인과적 법칙의 예로는 물리학적 보존법칙들을 들고 있다. (≪철학대사전≫, p. 500.) 이러한 구조나 체계는 전체로서의 체계들의 행동으로 나타나며, 또한 이 체계들이 마치 어떤 특정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기술된다. 사회주의에서 사회적 합법칙성들도 비인과적 법칙의 예들이다. 사회주의에서의 사회적 합법칙성은 사회적 활동의 목표와 그 목표실현을 위한 수단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법칙들이다. 구조연관이나 목표-수단의 연관은 인과연관은 아니지만 합법칙적 연관관계를 갖는다. 목표-수단관계가 사회주의에서는 법칙성을 갖는 것이다. 물론 비인과적 법칙도 인과법칙들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이렇듯 인과, 합법칙, 합목적 등의 개념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그런데 “합목적성 개념”이라는 글에서는 “자기목적적 활동, 즉 자기운동”이라고 하면서 모든 개념적 차이를 무시한다. “합목적성 개념”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하지만 자연적 존재로서의 자연, 그리고 체계로서 사회적 존재가 자기목적적 운동을 이룰 수 있다는 사고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있어서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유물론의 핵심은 물질의 영원성을 승인함에 있으며, 물질의 영원성은 오로지 물질의 절대적 자기운동성을 승인함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절대적 자기운동은 다른 말로, 물질의 절대적인 자기목적적 운동이다. 물질의 자기목적적 운동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물질의 내재적 속성이자, 근본적인 존재 양식인 운동을 물질과 무연고한, 물질에 절대적으로 외재하는 존재에서 끌어와야 한다. (강조는 인용자.)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합목적성 개념”에서는 자기목적적 운동과 자기운동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치 자연조차 자기목적적 운동을 하는 것인 양 왜곡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자연법칙과 사회법칙의 차이는 사라진다. 하지만 자연법칙과 사회법칙 사이에는 그 작용 방식상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이에 대한 맑스, 엥엘스의 말을 ≪철학대사전≫에서 인용해 보겠다.

 

자연에는 … 서로 영향을 미치며 그러한 사회 변화 속에서 보편적인 법칙의 적용을 받는 순전히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동인들이 존재한다. 생기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 의도된 의식적인 목적을 띠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 반해 사회 역사의 행위자들은 의식을 지니고 있고 숙고와 정열에 따라 행위하며 일정한 목적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이다. 의식적인 의도나 의도된 목적이 없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 역사의 진행이 내적인 보편적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4]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p. 503.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사회적 법칙은 사회적 개인들의 주체적 활동에 대해서만 성립하고 또한 이러한 활동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될 수 있다. 그런데 “합목적성 개념”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목적적 활동의 주체는 자본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치 맑스의 생각인 양 “맑스는 ≪자본≫과 ≪요강≫ 등에서 여러 번 자본의 자기목적적 활동, 즉 자기운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기술한다”고 언술한다. 나는 ≪자본≫과 ≪요강≫에 문외한이어서 그런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목적적 활동의 주체는 자본이다”라는 “직접적 기술”은 찾지 못했고, 다만 ≪자본론≫ 제1권에서 두 군데 “자기목적”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는데 이를 인용하여 과연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목적적 활동의 주체를 자본으로 보았는지 살펴보자.

 

상품유통 자체의 최초의 발전과 더불어, 제1의 변태의 산물, 즉 상품이 전화된 자태, 즉 상품의 금형(金形)을 확보할 필요성과 확보하려는 열정이 발전한다. 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형태를 화폐형태로 대체하기 위해서이다. 이 형태변환은 물질대사의 단순한 매개로부터 자기목적으로 된다. 상품이 매각된 형태가, 그 절대적으로 양도 가능한 자태로서, 즉 단지 일시적인 화폐형태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된다. 그와 더불어 화폐는 돌처럼 굳어져 축장화폐(Schatz)로 되고, 상품판매자화폐축장자가 된다.[5]칼 맑스, ≪자본론≫ 제1권 제1분책, 채만수 역, 2018, p. 219. (강조는 인용자.)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김수행 번역본도 같이 인용해 보자.

 

상품유통의 최초의 발전과 함께 제1탈바꿈의 산물[즉 상품이 전환된 모습, 다시 말해 금]을 확보하려는 필요성과 열망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상품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형태를 화폐형태로 바꾸기 위해 판매된다. 이런 형태변환은 물질대사를 매개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된다. 이제 상품이 바뀐 형태인 화폐는 절대적으로 양도 가능한 모습 또는 오직 일시적인 화폐형태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화폐는 퇴장화폐로 화석화되며, 상품판매자화폐퇴장자가 된다.[6]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상)(개역판),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5, p. 169. (강조는 인용자.)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소위 “자기목적”은 화폐자본의 자기목적이 아니라, 상품판매자의 화폐축적 목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운동은 자본가의 ‘필요성과 열정’을 매개로 해서만 운동한다. 하지만 자본가의 필요성과 열정으로 나타나는 자기목적은 자본의 합법칙성에 종속되어 있다. 자본의 자기운동은 자기목적적 운동이 아니라 합법칙적 운동이다. 자본가의 목적은 자본의 자기운동에 순응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고, 노동자의 목적은 자본의 합법칙성을 이용하여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자본은 합법칙적 운동을 하는 것이고 자본가와 노동자는 합목적적 활동을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인용문도 보자.

 

판매자는 화폐를 통해서 어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화폐축장자는 상품을 화폐형태로 보존하기 위해서, 빚을 진 구매자는 지불할 수 있기 위해서 상품을 전화시켰다. 만일 그가 지불하지 않으면, 그의 소유물이 강제매각된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자태, 즉 화폐는 이제 유통과정 자체의 관계들로부터 기인하는 사회적 필연성에 의해서 판매의 자기목적으로 된다.[7]칼 맑스, ≪자본론≫ 제1권 제1분책, 채만수 역, pp. 229-230. (강조는 인용자.)

 

김수행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판매자가 상품을 화폐로 전환시킨 것은 화폐로 어떤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였고, 화폐퇴장자가 상품을 화폐로 전환시킨 것은 상품을 화폐형태로 보존하기 위해서였으며, 채무를 진 구매자가 상품을 화폐로 전환시킨 것은 지불할 수 있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가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의 소유물은 강제로 매각된다. 이리하여 상품의 가치형태, 즉 화폐가 이제 [유통과정 그 자체에서 생기는 사회적 필연성으로 말미암아] 판매의 자기목적으로 된다.[8]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상)(개역판), 김수행 역, p. 177. (강조는 인용자.)

 

이 인용문에서도 인간의 자기목적적 활동과 자본의 합법칙적 운동의 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더 이상 “자본이 자기목적적 활동의 주체”라는 주장이 맑스의 의도였는지 찾아 헤매는 수고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이 두 개의 인용문만으로도 자본이 자기목적적 활동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은 필연적 운동, 즉 법칙적 운동을 하고, 인간은 합목적적 활동, 즉 자기목적적 활동을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엥엘스가 유기적 자연에 관해서 합목적성을 이야기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때 “합목적성이 의미하는 바는 유기체(식물과 동물) 및 이 유기체의 구조 내지 행동 방식이 기초적인 생활기능을 상실함이 없이 환경 조건에 비교적 잘 적응한다는 것”(≪철학대사전≫, p. 1407)을 의미한다. “유기체의 합목적성은 외적 모순과 내적 모순, 즉 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 사이의 특정한 변증법적 상호 작용의 결과이다.” (≪철학대사전≫, 같은 곳.) 유기체의 합목적성은 자연 도태라는 생물학적 법칙의 결과이다. 말은 합목적성이라고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합법칙성인 것이다. 이와 관련된 다윈의 말을 들어 보자.

 

이전에는 나에게 그처럼 확실한 것으로 보였던 자연의 목적에 관한 고래의 논거들은, 자연 도태의 법칙이 발견되고 난 지금에는 거짓임이 분명하다. … 유기체의 변이 및 자연 도태의 작용 방식에는 바람이 부는 방향에 있는 합목적성 이상의 합목적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확고한 법칙의 결과이다.[9]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p. 1407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다윈도 생물학에서 쓰이는 합목적성이라는 용어를 법칙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물학에서 쓰는 합목적성이라는 용어는 목적론적 의미가 아니라 물리주의적 기계론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쓰는 용어이다. 즉, 인간 활동을 제외한 유기체의 합목적성은 물리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운동의 방향성, 적응성, 자기조직과 재생, 정보 기억과 처리, 전략 행동 등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합목적적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은 합법칙적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글 “합목적성 개념”에서 생물학의 목적론적 신조류로 소개하고 있는 텔레오노미(Teleonomie, Teleonomy)도 마찬가지로 목적론적 의미가 아니라 합법칙적 용어이다. 이 자리에서 텔레오노미를 다룰 수는 없고 단지 목적론의 입장에서 텔레오노미를 반목적론의 대표적인 철학적 입장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그것들[텔레오노미: 인용자]은, 한편으로는 생물들의 행동이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행동이 제대로 서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목적론의 복권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즉 그것은 목적을 예기하는 의식을 갖지 않더라도 생물들은 특정한 상태를 지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은 이러한 방향성을 목적론적으로가 아니라 인과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시도들은 이러한 과정들이 보이는 방향성이 의도적인 지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것들이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을 뿐’이라고 본다. 그것이 하나의 방향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착각이며 실제로 그것들은 기계적으로 결정된 인과법칙을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비유기체인 돌이 중력의 법칙이라는 자연법칙에 따라서 항상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기체적인 현상들 역시 인과적인 자연법칙에 따라서 최종상태에 자동적으로 도달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텔레오노미(Teleonomie)라고 불린다. 이러한 텔레오노미의 입장에 서 있는 유전학과 체계이론 그리고 사이버네틱스야말로 사실은 목적론을 철저하게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서는 합목적성의 현상은 단적으로 무시되지 않고 인정되면서도 그것은 그것보다 더 상위에 있는 비목적론적인 설명도식 안으로 통합되기 때문이다.[10]박찬국, ≪내재적 목적론≫, 세창출판사, 2012, p. 268. (강조는 인용자.)

 

생물학에서 쓰이는 ‘합목적적’이나 ‘텔레오노미’ 개념들은 목적론과는 무관하고 단지 기계론적 물리주의에 반대하는 용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목적론적 용어가 아니라 법칙적 용어임을 간파해야 한다.

 

목적론적 사고를 사회역사적 영역을 넘어 자연에까지 확장하려는 사고는 최근 철학에서 새롭게 부각하는 현상이나 철학사적으로 고대부터 있어 왔던 진부한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진부한 사고방식이 바로 지금 위험한 이유는 소위 신유물론이라 불리며 새로운 관념론적 비합리주의가 유물론의 이름으로 회자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스펙터클, 시뮬라크르, 담론 등을 거론하던 이들은 모두 퇴위하고, 이제 그 자리를 신유물론자들(new materialists), 즉 생기론적 유물론자, (사변적) 실재론자, 객체지향존재론(Object Oriented Ontology)자, 행위자네트워크이론(ANT: Actor-Network Theory)가들이 점거하는 추세이다. 사람들은 이를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 사변적 전환(speculative turn), 동물적 전환(animal turn), 포스트 휴먼 혹은 비-인간적 전환(post-huaman/non human turn)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신유물론적 경향들을 이 자리에서 다룰 수 없다. 다만 이들의 공통적 경향을 지적하자면, 이들은 인간의 의식과 이성이 파괴적 현실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재앙을 자본주의의 합법칙성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의식과 이성의 잘못으로 돌린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와 물질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한다. 이는 변형된 자본주의의 간접적 변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자본주의적 병폐의 원인이라고 우기다가 이제는 인간의 의식과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종국적으로 현실의 재앙은 인간 이성 때문이고 자본주의는 면죄부를 받는다.

 

그런데 “합목적성 개념”이라는 글에서 “자연의 총체성은 스스로 목적의 조건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목적 정립적 활동을 하며”라는 발언을 보고 신유물론의 한 조류인 가이아 이론을 떠올리는 것은 성급함의 발로일까?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맑스주의적 원리들을 맑스주의 이름으로 왜곡하는 현상을 감안할 때 단순한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칼 맑스, ≪자본론≫ 제1권 제2분책,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18, pp. 299-300.
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동녘, p. 392.
3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 편, ≪생물학이 철학을 어떻게 말하는가≫, 뇌신경철학연구회 역, 철학과현실사, 2020, p. 163.
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p. 503.
5 칼 맑스, ≪자본론≫ 제1권 제1분책, 채만수 역, 2018, p. 219.
6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상)(개역판),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5, p. 169.
7 칼 맑스, ≪자본론≫ 제1권 제1분책, 채만수 역, pp. 229-230.
8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상)(개역판), 김수행 역, p. 177.
9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p. 1407에서 재인용.
10 박찬국, ≪내재적 목적론≫, 세창출판사, 2012, p. 268.

신재길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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