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4)

문영찬 | 연구위원장

[목차]

머리말

제1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제2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계승, 발전

  5.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토마스 아퀴나스

  6.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이번호에 게재된 부분>                

  9. 스피노자

10. 로크

  11. 라이프니츠

  12. 흄

  13. 디드로, 달랑베르, 엘베시우스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제5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6장 철학과 종교

9.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17세기 중, 후반 활동했던 네덜란드의 철학자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부르주아 혁명을 유럽 최초로 수행했고 공업과 상업이 급속히 발전하고 예술이 개화했다. 렘브란트의 사실적 회화는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이다. 또한 과학이 발전하고 선진적인 지적인 운동이 발전했는데 스피노자의 철학적, 과학적 활동은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태교의 ≪탈무드≫ 등을 공부하고 부모에 의해 유태교 랍비가 될 것을 요구받았으나 그의 관심을 끈 것은 당시 발돋움하던 천문학, 역학 등의 과학과 베이컨, 홉스, 데카르트의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랍비들에 의해 파문을 당하고 자신의 철학의 길을 걸어갔다.

스피노자의 초기의 저작은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이다. 이 저작은 데카르트의 사상을 흡수한 결과인데 신학적 사고와 데카르트적 사고가 혼합되어 있다. 이 저작 전체에는 신학의 중압 속에서도 과학적 사고를 열어 가는 노력이 흐르고 있다. 스피노자는 관념에 대해 비유물론적 사고를 보인다. 관념이란, 모든 생각의 형상이며 우리는 이 형상을 직접 지각함으로써 생각 그 자체를 의식한다. … 정확히 말해 내가 여기서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체적 상상력, 즉 두뇌의 한 부분에서 모사된 것들이 아니라, 두뇌의 그 부분을 주목하고 있는 정신 자체에 자신의 형상을 전해 주는 것들이다.1) 유물론에서는 관념은 현실의 반영이고 모사라고 보는데 비해 스피노자는 모사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생각의 형상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관념이라고 보고 있다. 스피노자는 이와 같이 사고, 관념에 대해 아직 유물론적 인식을 분명히 수립하고 있지는 못했다. 이것은 시대적 한계와 더불어 그의 방법론이 형이상학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형이상학적 방법론은 스피노자의 전체 저작에 흐르고 있는데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실체 개념과 속성 개념이 스피노자에게서는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 즉 우리의 관념들 중 하나에 표상적으로 있는 것이 한 사물 안에서 형상대로 또는 우월하게 실존할 때, 이 사물은 실체이다. … 어떤 실체에 생각이 직접 귀속되어 있다면, 이러한 실체는 정신이다. …어떤 실체가 연장의 직접적 주체이자, 이 연장을 전제하고 있는 속성(모양, 장소, 위치 이동 등)의 직접적 주체라면, 이러한 실체는 물체이다.2) 실체는 스피노자에게서 신 또는 자연이라는 궁극적 존재를 가리키는 개념인데 그가 신과 자연을 동일하게 보는 범신론자라는 점에서 실체는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은 자연을 생성과 소멸, 운동과 변화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어떤 것, 고정된 것으로 보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에 대해 맑스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고 형이상학적으로 개작된 자연3)이라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신 또는 자연을 가리키는 최고의 개념으로서 실체를 설정하고 그 하위 개념으로 속성을 놓는다. 속성은 실체에 존재하는 어떤 주요한 성질을 가리키는 것인데 데카르트가 사유와 연장을 주요한 두 개의 속성으로 분류했던 것을 스피노자 또한 그대로 사용한다. 그리고 사유 속성을 갖는 실체는 정신이며 연장 속성을 갖는 실체는 물체라고 본다. 다만 데카르트는 이 두 실체가 별도의 것이라고 보아 이원론의 입장을 취했다면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스피노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비실명으로 발간했던 그의 저작 ≪신학정치론≫이 파문을 일으키면서부터이다. ≪신학정치론≫은 기존의 신학에 대한 비판과 신학과 철학의 분리를 선언한 책이다. 실제로는 신학에 대한 절교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계시에 의한 인식과 자연적 인식은 별개라고 파악한다. 이제 신앙의 기본원리들이 명확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계시에 의한 인식의 목적이 순종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이 목적과 근거와 방법에 있어서 자연적 인식과 완전히 다르므로, 이 둘은 공통적인 것이 전혀 없고, 그것들 각각은 서로에게 끼어들지 않는 분리된 영역을 갖고 있으며, 둘 중의 어느 것도 상대편에 대해 보조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4) 이렇게 신학과 철학이 별개의 영역이라고 하여 철학과 신학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은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중세의 지배적 틀을 깨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정부가 종교적 법의 해석자라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그 후에 나는 정부가 시민법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법의 수호자이고 해석자라는 것과, 오직 정부만이 공정한 것과 불공정한 것, 경건한 것과 불경한 것을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5)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종교권력을 전면 부정하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이 가능했던 것은 네덜란드가 유럽 최초로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했고 또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부르주아 혁명의 주요 과제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종교적 예언이 자연적 인식보다 하위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종교에 대한 과학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표상은 본질적으로, 모든 의심할 여지없이 명확한 관념들과 같지 않게, 단독으로는 확실성을 지니지 못한다. 우리가 표상한 것의 확실성을 얻기 위해서는, 표상에 더한 어떤 것, 즉 추리[논증]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예언은, 내가 밝혔듯이, 전적으로 표상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스스로 확실성을 지닐 수 없다. … 그렇기 때문에, 이 점에서, 예언은 자연적 인식보다 하위인데, 자연적 인식은 징표를 필요로 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확실성을 지닌다.6) 예언은 단순한 표상일 뿐 논증이 없기 때문에 논증을 요하는 자연적 인식보다 하위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과학의 입장에 선 종교비판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과학적 인식이 종교적 인식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종교비판은 범신론의 입장에 선 비판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는 자연과 신을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놓는다. 우리가 자연 현상에 대한 인식을 더 많이 얻음에 따라 우리는 신에 대해 더 탁월하고 더 완전한 인식을 획득한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원인을 통한 결과의 인식은 그 원인의 특성에 대한 인식에 불과하므로, 자연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뛰어날수록, 모든 사물의 원인인 신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더 완전하다.7) 자연에 대한 이해가 증대될수록 신에 대한 인식이 완전해진다는 것은 사실상 신은 곧 자연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기존의 신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신학은 신 자체의 완전성, 절대성을 준거로 하는 것인데 스피노자는 이와 달리 자연을 준거로 하여 신을 파악하여 기존의 종교적 교리를 전복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완전한 무신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범신론의 외피를 취하는 것은 17세기 당시의 상황, 즉 갈릴레이가 과학적 주장을 이유로 종교법정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는 등의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비록 범신론의 외피를 취했지만 그는 철학과 신앙의 분리를 공식선언한다. 이제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한편에 있는 신앙 및 신학과 다른 편에 있는 철학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유사함이 없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인데, … 철학의 목적은, 아주 간단히, 진리이고, 반면에 신앙의 목적은, 우리가 풍부하게 제시했듯이, 순종과 경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또 철학은 일반적으로 타당한 공리들의 기초 위에 놓여 있고, 오로지 자연만을 연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야 하지만, 그와 달리 신앙은 역사와 언어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 오로지 성서와 계시에만 의거해서 이끌어내져야 한다.8) 신학과 철학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선언은 신학에 대한 절교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브루노가 종교재판에 의해 화형당한 것이 17세기 초반인데 17세기 중반의 스피노자의 이러한 주장은 정치적으로 파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연은 철학의 몫으로, 역사와 언어는 신앙의 몫으로 분리한 것은 문제가 된다. 역사 또한 철학의 대상이 될 때만 하나의 온전한 세계관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당시의 시대적 한계라 할 수 있는데 당시의 과학이 역학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인간 사회에 대한 과학, 역사에 대한 과학이라는 관념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철학과 신앙의 분리를 선언하고 정치사상을 전개하는데 그것은 자연권의 개념, 사회계약의 사상,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론이다. 그는 신학과 철학의 분리를 사상의 자유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자연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전체로서의 자연의 일반적 능력은 모두 합쳐진 모든 개물의 능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므로, 각 개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최고의 권리를 가진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바꿔 말하면 개체의 권리는 그것의 결정된 능력과 동일 범위에 있다.9) 자연에서 각 개체의 능력이 곧 권리의 범위가 되는 것, 즉 자신의 능력 말고는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 없는 것이 자연권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권 개념은 국가 혹은 사회의 구성을 위한 사회계약론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자연권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없이,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모든 능력[권력]을 공동체에 이양하는 조건을 기초로 하여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고 계약은 절대로 성실하게, 전적으로 항상 보존될 수 있다.10) 스피노자의 이러한 사회계약론은 계약의 개념을 사용하고 또 그러한 계약의 절대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계약론자와 동일하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사회계약론이 다른 점은 그의 민주주의 국가론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한 모임의 다수가, 그게 상당한 규모가 된다면,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 똑같이 동의하는 일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가 비이성적으로 행동할 위험성이 훨씬 더 적다.11) 스피노자의 이러한 민주주의 사상은 홉스가 사회계약론에 입각하면서도 절대주의 국가론을 주장한 것과 비교되는데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은 당시 네덜란드가 부르주아 혁명을 하고 난 뒤의 정치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은 인식의 도구인 인간의 이성 혹은 지성을 먼저 고찰하고 다듬어야 한다는 당시의 사고를 반영한다. 그는 ≪지성교정론≫에서 기본적으로 유물론적인 접근을 보인다. 참된 관념(왜냐하면 우리는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으므로)은 그것의 대상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원과 원의 관념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12) 관념론에서는 관념은 곧 대상이라고 보는데 반해 스피노자는 관념과 관념의 대상을 분명히 구별하여 유물론적인 인식을 보인다. 이러한 유물론적 인식은 정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더욱 명료하게 표현된다. 정신이 자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할수록, 정신은 자기를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이 자명하므로, 그것으로부터 정신이 더 많은 사물을 이해함에 따라 방법의 이 부분이 더욱 완전하게 될 것이며, 정신이 가장 완전한 실재의 인식에 주의하거나 이것을 반성할 때 가장 완전하게 될 것임이 명백하다.13) 자연을 더 잘 이해할수록 정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주장은 관념론자들과 정반대의 입장이다. 관념론자는 정신이 자연을 규정한다고 봄에 반해 스피노자는 자연을 통해 정신이 규정된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스피노자는 정신과 자연의 관계, 철학의 근본물음에서 유물론적인 방향을 분명히 세우고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이러한 유물론적 인식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인 반영론과는 일정하게 차이가 있는데 반영론은 인식, 관념을 현실 세계, 대상의 반영, 모사라고 보는데 반해 스피노자는 반영의 개념을 세우지 못하고 있고 형이상학적 사고에 의해 제약되어 있다. 참된 사유의 형상은 다른 사물들과 관계없이 그 사유 자체 내에 있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그것은 그것의 대상을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지성의 능력 및 본성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14) 대상을 인식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지성의 본성에 의해 참된 사유를 한다는 것은 유물론에서 이탈하는 것이고 반영론과는 거리가 있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인식은 형이상학적 방법론 때문인데 유물론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형이상학적 사고에 의해 유물론적 입장이 제한되고 흔들리고 있다. 현대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참된 사유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참된 사유를 대상과 무관하게 지성의 본성에 의거하는 것으로 본다. 지성의 본성이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이 스피노자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주저는 ≪에티카≫이다. 이 책은 그의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후 스피노자의 사상이 집약된 이 책이 널리 읽혀지면서 18세기의 계몽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에티카≫는 데카르트와 같이 기하학적 증명의 방법으로 서술되어 있다. 정리-증명-주석 등의 체계가 바로 기하학적 증명의 체계이다. 어떤 간략한 명제, 혹은 주장을 설정하고 그것을 수학과 같은 논리적 방식으로 증명하고 필요하면 주석을 붙이는 식이다. 이러한 기하학적 체계의 처음에 오는 개념은 실체의 개념이다. 실체란, 그 자체 안에 있으며 그 자체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 즉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15)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최고의 개념으로서 실체는 일종의 궁극적 존재를 의미한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철학의 근본범주인 물질 혹은 의식의 범주와 동일한 차원의 궁극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실체의 개념은 물질 혹은 의식과는 차이가 있는데 신, 정신, 자연을 모두 아우르는 최고의 범주 혹은 실재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리하여 실체는 자연과 같은 의미에서 자기원인으로 파악된다. 자연이 왜 그러한 모습인가에 대해 자연 외의 어떤 원인의 작용이 필요하지 않고 자연 스스로의 원인에 의해 그러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자기원인이라는 개념이 실체에 적용되고 있는 것인데 이렇게 실체가 자기원인을 갖는다는 것은 실체라는 개념의 궁극성, 최고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체 개념에 이어지는 개념이 속성이라는 개념이다. 속성이란, 지성이 실체에 대하여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서 지각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16) 속성의 대표적인 예가 사유와 연장인데 사유는 정신적 실체의 속성이고 연장은 물체적 실체의 속성이다. 따라서 속성은 어떤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속성에 이어지는 개념이 양태이다. 양태란 실체의 변용 또는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을 통하여 파악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17) 양태는 일종의 변화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물체에 있어서 색깔, 모양 등이고 정신에 있어서 능동과 수동 등 다양한 변화양상이라 할 수 있다.

흥미 있는 것은 스피노자가 자유와 필연을 대립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동하도록 결정되는 것을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정하고 결정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다른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을 우리는 필연적이라거나, 오히려 강제된다고 말한다.18) 자기 본성에 의한 것은 자유이고 다른 것에 의한 강제는 필연이라고 보고 있는데 문제는 이렇게 자유와 필연을 구분하면 자유와 필연 사이에는 단절이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유와 필연을 대립시키기는 하지만 그 통일성, 연관성은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변증법에서는 자유가 필연으로 전화되고 필연이 자유로 전화되는 것으로 본다. 주체가 자유를 가질수록 그의 행동이 필연에 가까워지는 것은 자유가 필연으로 전화되는 것이고 필연에 대한 인식이 심화될수록 그의 자유의 폭이 확대되는 것은 필연이 자유로 전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자유와 필연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17세기 당시에 자유와 필연의 범주를 설정한 것 자체는 커다란 진보이다. 특히 홉스가 자유는 곧 필연이라고 보아 자유의 개념을 형해화한 것에 비하면 획기적 진전이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은 형이상학적 개념인데 그것은 실체 개념과 현대 유물론의 물질 개념을 비교하면 분명하다. 스피노자 자신이 실체 개념과 물질 개념을 구분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다. 물(物)은, 물인 한에 있어서, 분할되어 그것의 부분들이 서로 분리되지만, 그것이 물질적 실체인 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파악한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 있어서의 그것은 분리되지도 않고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은, 물인 한에 있어서, 생성되고 소멸하지만, 실체인 한에 있어서는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19) 물질은 현실에서는 분할되지만 그것이 실체로 파악되면 분할불가능하다는 것이 요지이다. 여기에는 형이상학이 무엇인가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형이상학적 방법, 개념의 본질은 불변성, 고정성, 항구성이고 그러한 경향이 강할수록 참다운 개념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최고의 개념인 실체는 고정불변성이 본질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현실에서 분할가능한 물질이 실체의 개념으로 파악되면 분할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신학적 사고의 잔재가 강요하는 형이상학적 사고! 스피노자의 철학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고의 한계와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 결정론을 승인한다. 의지는 유한한 것으로 파악되든 무한한 것으로 파악되든, 그것이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의지는 자유로운 원인이라고는 불릴 수 없고, 단지 필연적 또는 강제된 원인이라고 불릴 수 있다. 자유의지론과 결정론의 대립은 철학사에서 오래된 것인데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단호하게 결정론을 승인하고 있다. 사실 원인과 결과의 관계, 그것의 필연성의 승인은 과학적 사고의 초석을 놓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 혹은 자유의 개념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 인과성에 대립시키는 것은 관념론적으로 흐르고 비과학적 사고의 문을 여는 것이다. 하면 된다는 주관적 관념론의 사고가 전형적으로 자유의지론에 입각한 사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결정론에 대한 승인은 형이상학적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그는 원인의 종류에 대해 필연만 승인하고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한다. 자연에는 우연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 결정되어 있다.20) 여기서 신의 본성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가 범신론자임을 고려하면 자연의 법칙으로 바꾸어 해석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위의 인용문은 자연의 법칙에 의해, 자연의 성질에 의해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연은 단지 파악되지 않은 원인일 뿐인가? 아니면 우연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가? 스피노자가 우연을 부정한 것은 형이상학적인데 형이상학은 필연성에서 이탈하고 변동을 가져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필연성은 무수한 우연성 속에 관철된다. 우연과 필연의 통일이 현실에서의 변화이고 운동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형이상학적 한계에 의해 가로막히면서도 끊임없이 진리 혹은 과학적 인식을 추구한다. 대표적으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하는 목적원인을 부정한다. 사람들은 흔히 모든 자연물이, 자신들처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 이 편견은 미신으로 변질되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것이 그들 각자가 온갖 사물의 목적원인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데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 이유였다. … 자연은 아무런 정해진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모든 목적 원인은 인간의 허구일 뿐이라는 것 등을 지금 밝히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21) 스콜라적인 목적원인을 거부하는 것은 원인 개념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세우는 것이다. 이 시대 17세기의 과학자,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고 스콜라학을 극복하고 과학적 인식을 추구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였다 할 수 있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적 한계에 갇혀 오류를 범한다. 진리의 규범으로서 참된 관념보다 더 명백하고 더 확실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진실로 빛이 빛 자체와 어둠을 명시하는 것과 같이 진리는 진리 자체와 허위의 규범이다. … 만일 참된 관념이 <사유의 양태인 한에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의 대상과 일치한다고 일러지는 한에 있어서만 거짓된 관념과 구별된다면, 참된 관념은 실재성이나 완전성 면에서 거짓된 관념 이상의 것을 조금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지…?22) 참된 관념 자체가 진리의 규범이며 대상과 인식의 일치가 진리의 본질이 아니라는 이 주장은 이는 진리의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사고와 데카르트적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준다. 참된 관념이라는 개념은 데카르트가 말한 명증성, 판명성, 직관 등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러한 참된 관념 혹은 명증성 자체가 진리인 것은 아니다. 진리는 구체적인 것이다. 어떤 때는 올바른 견해가 다른 조건에서는 올바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참된 관념의 획득 혹은 승인으로 진리에 대한 접근이 끝나면 그것은 결함 있는 것이다. 인식과 대상의 일치를 구체적으로 획득하는 것, 때와 장소에 따라 대상의 변화에 상응하는 인식을 지속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참된 관념이라는 진리 개념은 형이상학적이고 데카르트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한계 속에서 스피노자는 사물에는 반대되는 본성이 있을 수 없다고 하여 내적 모순을 부정한다. 사물들은 하나가 다른 것을 파괴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반대되는 본성을 가진다. 즉, 그러한 사물들은 동일한 주체 안에 있을 수가 없다. … 만일 그러한 것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혹은 동일한 주체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면, 동일한 주체 안에 그 주체를 파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23) 반대되는 것이 동일한 주체 안에 있을 수 없다는 이 주장은 모순의 개념에 대한 부정이다. 반대되는 것들의 일치성과 동시성, 통일성이 모순 개념을 구성하는 것인데 형이상학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모순 개념을 승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여기서 스피노자가 모순 개념을 승인했다면 헤겔보다 150년 앞서서, 그것도 유물론적 지반 위에서 변증법이 완성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당시 상승하던 부르주아지의 진취적 사고를 반영하는 것인데 개인의 이익의 추구와 이성을 연관 지어 파악하는 것에서 부르주아적 요소가 나타난다. 각 인간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사람들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기의 이익을 보다 많이 추구하고,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보다 많이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덕을 가지게 되며, 또는 같은 것이지만, 자기 본성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 즉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능력이 그만큼 더 크다.24)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게도 이익이 크다는 것인데 이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전형적인 부르주아적 접근이다. 이러한 파악은 봉건제, 절대주의에 맞서 소유, 정치적 권리 등을 주장하던 당시 부르주아지의 사상적 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활동했던 17세기 중, 후반은 아직 신학의 중압이 크던 때였다. 중세의 잠에서 이제 갓 깨어나기 시작하고 스콜라학을 극복하면서 과학의 기치를 내걸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피노자는 신학과 철학의 분리를 사상적으로 이루어 내고 지배적이던 형이상학의 한계 내에서 진리의 추구, 과학의 추구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범신론으로 포장된 유물론적 인식은 그의 사후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다음 세기인 18세기가 이성의 시대로 불리게 되는 토대를 닦았다고 볼 수 있다.

10. 존 로크

존 로크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철학자이다. 이 당시 영국은 명예혁명을 거치며 정치적 자유의 폭이 확대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로크는 베이컨, 홉스 등의 전통을 이어받아 경험론적 관점에 서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 갔다. 로크는 스피노자와 달리 형이상학의 속박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현대적인 감각을 보이고 있고 또 데카르트파 등과 논전하면서 18세기까지 이어지는 유물론의 흐름을 형성해 갔다.

로크는 생득관념을 부정한다. 타고난 (이론적) 원리는 없다25)고 주장하면서 흔히 타고나면서부터 알고 있다는 공준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배워서 아는 것일 뿐이며 또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것만 갖고 타고난 관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님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수학과 기하학의 공리, 예를 들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라는 것은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알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서, 로크의 주장은 경험론의 전통에 충실한 것이다.

로크는 경험론의 입장에 서서 인식의 원천에 대해 유물론적 입장을 보인다. 우리가 갖는 대부분의 관념의 이들 원천은 전적으로 감각에 의존하고, 감관에 의해 지성으로 옮겨오므로 나는 이 원천을 감각이라고 부른다. … 거듭 말하거니와 이들 둘, 즉 감각 대상으로서의 외부의 물질적 사물과 내성 대상으로서의 내부의 우리 자신 마음의 작용, 이것만이 우리의 모든 관념이 시작되는 기원이다.26) 이러한 인식론은 전적으로 유물론적인데 외부의 사물을 우리 관념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은 감각에 대해 외적 세계가 선차적임을 승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물론적 감각론이라고 불릴 수 있다. 또한 로크는 관념의 기원을 외적 세계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내성 대상으로서 우리 내부의 마음의 작용을 들고 있는데 이는 현대적으로 보면 이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인식의 감각(감성)적 단계와 이성적 단계를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은 현대 유물론과 매우 유사한데 그러나 로크는 이렇게 인식과정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접근하지만 인식의 본질에 대해서는 현대 유물론과 차이를 보인다. 로크는 관념을 한편으로 마음에 있는 관념과 다른 한편으로 물체가 낳는 물질의 변용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구별해서, 관념은 (물질적) 주체에 속하는 (고유한) 어떤 사물의 정확한 심상(心像), 유사물이라고 우리가 (아마도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27)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는 관념을 사물의 심상, 상이라고 보는 현대 유물론의 인식론인 반영론과는 차이가 있다. 반영론에서는 관념은 외적 세계의 반영, 상, 모사라고 파악한다. 이것은 인식의 감성적 단계, 이성적 단계를 막론하고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내부 마음의 작용에 의한 관념, 이성적 단계의 인식은 사물의 심상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성적 단계의 인식도 감각이 제공하는 자료를 가공하고 또 관념들의 조합을 거치지만 그 본질은 외적 세계의 반영이다. 다만 감성적 인식 단계와 이성적 인식 단계가 다른 점은 이성적 인식 단계는 감성적 인식 단계와 달리 내적 성찰과 판단과 추리를 거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크는 인식에 있어서 유물론적 경향을 보이고 인식과정을 감성적 단계와 이성적 단계로 나누지만 인식의 본질에 있어서는 현대 유물론과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로크에 있어서 중요한 진보는 형이상학적인 실체 개념에 대한 비판이다. 스피노자의 경우, 세계의 궁극적 존재로서 실체는 신, 자연, 정신을 포괄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실체관념에서 출발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사고를 형이상학적으로 제약했는데 로크의 경우 실체 관념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비판한다. 로크는 실체관념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실체의 관념은 자기 스스로 존립하는 개개의 사물을 표시하는 것과 같은 단순관념의 집성이고, 이 집성 안에서 실체라는 상정된 관념 또는 혼란한 관념이 상정되어 혼란한 관념이면서 언제나 가장 주된 관념이다.28) 실체 관념은 단순한 관념의 집합이지만 혼란한 관념이고 또 가장 주된 관념이라고 로크는 파악한다. 이렇게 로크는 실체 관념이 혼란한 관념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신, 자연, 정신이라는 서로 다른 성격의 관념을 하나로 묶어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이 음을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신과 유한한 정신과 물체에 적용하는 것은 같은 의미인지의 여부, 즉 이와 같은 3개의 대단히 다른 사물이 제각기 실체로 불릴 때 같은 관념을 나타내는지의 여부를 생각하기 바란다.29) 이렇게 로크는 실체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신, 자연, 정신이라는 세 개의 관념으로 분해한다. 이로써 로크는 형이상학적 사고의 틀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추상적 실체 관념은 없다30)고 선언한다. 실체라는 관념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철학의 근본물음을 형성해 왔던 개념이다. 있음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세계의 근원적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신, 자연, 정신을 아우르는 개념으로서 실체 개념이 사용되어 왔는데 그러나 그러한 실체 개념은 형이상학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불변의 궁극적 존재, 세계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최고의 개념, 신, 정신, 자연을 아우르는 개념으로서의 실체! 이에 대해 로크는 그것은 혼란한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실체 개념을 분해하여 더 이상 추상적인 실체 개념은 없다고 선언하여 형이상학과 결별한 것이다. 그리하여 로크 또한 신의 관념은 승인하고 있지만 그의 철학은 전반적으로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로크의 ≪인간지성론≫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고찰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다. 이 과정에서 로크는 데카르트의 견해와 대립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전개한다. 그는 물체와 연장은 똑같은 사물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는 자가 있다31)고 데카르트를 비판하면서 운동은 공간이 아니고, 공간은 운동이 아니다. 공간은 운동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고 공간과 운동은 전혀 별개의 관념이다. 그래서 공간의 관념과 고성(固性)의 관념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32)고 주장한다. 연장이 물체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보는 데카르트에 반하여 로크는 고성, 즉 고체적 성질을 물체의 속성으로서 강조한다. 그리하여 물체가 없는 공간도 얼마든지 상정가능하다고 보아 순수공간의 관념을 승인한다. 이러한 관점은 뉴튼의 절대공간 관념과 유사한 것인데 공간과 연장을 동일한 성질로 보아 진공은 없다고 보는 데카르트의 견해와 대립하는 것이다. 길이와 거리라는 연장을 갖는 진공이라는 관념은 연장을 갖는 무(無)라는 관념과 마찬가지로 모순이라고 데카르트는 주장했는데 로크는 연장과 공간의 개념을 분리시킨다. 또한 로크는 운동과 공간을 분리시키고 있는데 이는 당시 운동에 대한 관념이 두 물체의 거리변화, 즉, 역학적 운동으로만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크와 데카르트가 대립하는 것은 공간의 본성에 관한 것인데 17세기 말의 공간에 대한 관념으로서 공간과 물체의 연장을 동일한 성질로 보는 데카르트의 견해와 공간과 물체를 분리시키고 순수공간, 절대공간을 주장하는 로크, 뉴튼 등의 견해가 대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로크는 시간에 대해서도 물질의 운동과 분리시킨다. 시간은 운동의 척도가 아니다33)고 파악하면서 시간의 관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의 마음에 이처럼 여러 가지 관념이 잇따라 나타나는 것의 내성이야말로 우리에게 계기의 관념을 제공하는 것이고, 이 계기의 임의의 부분 간의 거리, 다시 말해서 임의의 두 관념이 마음에 나타나는 사이의 거리를 우리는 지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34) 이러한 시간 개념은 시간의 객관성을 부인하고 시간의 본질을 우리 관념들의 연속의 계기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개념은 현대적인 시간개념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은 시간이 운동의 척도라는 것을 완전히 승인하고 있고 나아가 아인슈타인의 경우 시간을 물질의 존재형식으로 보아 시간의 객관성을 승인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당시는 역학이 최고의 과학이었던 상황이었고 따라서 공간과 시간에 관한 엄밀한 과학이 성립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로크는 공간의 무한성을 승인하는데 그러나 그의 공간관념은 물질과 분리된 공간관념이다. 마음이 어느 사유에 의해서 마음 자체를 물체의 사이에 두건, 물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건, 마음은 이 한결같은 공간관념 속에서 한계ㆍ끝을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공간의 본성 자체와 각 부분의 관념에 의해서 공간은 실제로 무한하다고 필연적으로 결론짓지 않으면 안 된다.35) 이러한 관점은 우리 관념이 공간의 한계를 발견하지 못하므로 공간은 무한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객관성을 승인하고 공간과 물질과의 통일성을 승인하는 입장에서는 공간의 무한성에 대한 파악이 다를 수 있다. 로크는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영원성을 승인하는데 시간을 관념의 연속적인 계기로 파악하는 그는 영원한 실재가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지속이 영원이었던 것과 같은 어느 실재의 존재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관념을 갖는 것과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36) 이러한 견해는 시간을 물질(의 운동)과 분리시켜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공간적 무한성과 시간적 영원성을 관념의 문제로 파악하는 로크는 물질과 시간과 공간의 관련을 다음과 같이 부인한다. 물질의 존재는 공간의 존재에 조금도 필요치 않고 그 점은 지속이 운동 내지 태양에 의해서 측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 내지 태양의 존재가 지속에 필요치 않은 것과 같다.37) 사실 이렇게 물질, 나아가 물질의 운동과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키는 관점은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일반적인 과학자들이 사고하는 공간과 시간 개념이었다. 다만 데카르트만이 공간의 속성과 (물체의) 연장의 속성이 본성상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했을 따름이다.

로크는 자유와 필연성의 관계에 대해 논하면서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그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인간은 의지한다는 이 작용에 관해서 필연성하에 있고 따라서 다음과 같지 않는 한, 즉 필연성과 자유가 양립할 수 있고 인간은 동시에 자유로 속박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한 자유로울 리가 없는 것이다.38) 자유의지라는 것은 실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는 이미 필연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주장인데 자유의지론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로크는 또한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필연성이 자유의 근저라고 파악하여 자유와 필연성의 통일을 추구한다. 우리가 행복 전반의, 즉 우리의 최대 선이고 그와 같은 것으로서 우리가 언제나 추구하는 행복 전반의 변경할 수 없는 추구에 강하게 결부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의 의지가 더욱더 어느 특정의 행동으로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 어느 특정의 그때 선택해야만 할 것으로 보이는 선으로 향해진 욕망에 필연적으로 맹종하는 것에서 자유이고, …39) 이러한 로크의 견해는 자유의지론을 부정하면서도 자유는 곧 필연이라고 보는 견해에 반대하여 필연성과 자유를 대립시키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강할수록 필연적 맹종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인데 자유와 필연에 대한 자유주의적 인식에 가깝다. 이러한 로크의 인식은 아직은 자유와 필연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은 아니다. 필연성에 대한 인식의 심화에 기초한 자유의 영역의 확대라는 변증법적 인식은 아닌 것이다.

로크에게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정신과 물질의 연관을 추적하는 부분이다. 마음은 물체(내지 신체)를 움직이는 능동적 능력의 관념을 매일 우리에게 제공한다. … 이런 점에서 창조된 여러 영은 능동적이기도 하고 수동적이기도 하므로 물질과 전면적으로 분리해 있지 않다고 추측을 해도 좋을 것이다.40) 마음, 즉 정신이 신체(물체)를 움직인다는 것에서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과 정신의 연관에 대한 추측은 정신이 물질의 산물이라는 현대유물론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사고가 없는 고성이 있는 사물 즉 물질과 마찬가지로 고성이 없는, 즉 비물질적으로 사고하는 사물이 존재하는 것을 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사고가 물질 없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상념하는 것은 어떻게 물질이 사고하는가에 비해 어렵지 않은데 그것은 (둘 다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41) 여기서 로크는 비물질적으로 사고하는 사물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지배적인 신학적 관점과 유사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물질이 사고하는가라는 당시로서는 혁명적 주장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로크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넘어가고 있지만 로크의 이러한 파악은 과학의 발전이 인간 정신에 대해서도 유물론적 관점을 자극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로크는 실체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분해하고 해체함으로써 형이상학에서는 해방되었으나 아직 변증법적 관점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로크의 비변증법적 관점은 보편과 개별에 대한 문제, 본질에 대한 그의 파악에서 드러난다. 일반적 또는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는 사물에 속하지 않고, 지성이 쓰기 위해서 만든 창조물로서 말이든, 관념이든 기호에만 관계되는 것이다.42) 이러한 파악은 로크가 보편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인데 보편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존재하는 것은 개별뿐이라고 파악한 중세의 유명론적 관점에 로크가 서 있음을 보여 준다. 보편을 단지 기호로만 파악하는 것은 전형적인 유명론적 관점이다. 그러나 보편은 현실에서는 개별 속에, 개별의 한 측면으로서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보편도 실재하는 것이다. 단, 보편이 개별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플라톤적 관점은 허구이지만 이러한 관점을 비판하기 위해 보편의 실재성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또한 로크는 보편에 대한 유명론적 관점을 본질 개념에 대해서도 적용하여 개체에게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43)고 주장한다. 본질이라고 하는 말의 통상적인 사용법에서는 본질은 종에 관계하며, 개개의 (특수한) 존재자의 경우에는 단지 종으로 유별될 때에만 생각할 수 있는데, … 개체를 종별해서 하나의 보통명(내지는 공통명) 아래 유별하는 추상관념, 그러한 추상관념을 제거하기만 하면, 개체의 어느 것인가에 대해서 본질적인 어떤 사물이라고 하는 생각은 이내 소멸하는 것이다.44) 본질은 종(種)의 차원에서 보는 관념이며 따라서 개체의 경우 본질적인 것이 없다는 것으로서 이는 보편을 단지 기호로 파악하고 개별에는 보편이 없다는 유명론적 인식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본질은 단지 종적인 관념이 아니며 개체 혹은 개별에도 본질적인 것은 존재한다. 인간성, 인류라는 보편적 규정은 홍길동이라는 개별에게도 존재하며 인간적 본질은 개인에게도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코스모스라는 하나의 꽃송이에도 꽃의 본질은 존재하는 것이다. 로크의 이러한 파악은 보편, 본질과 같은 개념이 중세에 스콜라적으로 오용되고 신학적 논리의 무기가 되어 온 것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지만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 개별이라고 보면 개별은 본질이 빠진 덧없는 것이 된다. 모든 개별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내부에는 본질이 들어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점은 중세의 유명론 혹은 로크의 유명론적 파악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로크는 영국의 변혁기의 철학자로서 정치에도 관여했는데 18세기의 계몽사상가의 선구로서 자연상태론, 사회계약론 등을 주장한다. 그는 자연상태에서 소유의 발생근거를 노동에서 찾는다. 자연이 준비하고, 그대로 방치한 상태에서 그가 제거하는 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노동을 혼합하고, 또한 무엇인가 자신의 것을 더하면 그것은 그 자신의 소유물이 된다. … 주워 모은다는 노동이 그가 주워 모은 것들과 공유물을 구별해 준다. 노동이 만물의 어머니인 자연 이상의 무엇인가를 그것에 더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것들은 그의 사적인 권리가 된다.45) 그는 이렇게 노동을 소유권의 근거로 파악하면서 동시에 소유권의 한계를 규정한다. 누구나 원한 만큼 많은 양을 독점해도 좋은가 … 신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까지 내려 주신 것일까. (인간이 자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만큼이다. 결국 사물이 부패하기 전에 생활의 편의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한, 누구나 자신의 노동으로 소유권을 확정해도 좋은 것이다. 이것을 초과하는 것은 모두 그의 몫을 넘어서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몫이다.46) 소유권을 사회계약의 핵심적 논거로 삼되 소유권의 한계를 승인하여 공정한 사회계약의 기준을 수립한다는 것이 로크의 논리이다. 그는 토지에 대해서도 토지에 노동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소유권의 대상이 된다는 논리를 편다. 나는 인간의 생활에 유용한 토지의 산물 중 10분의 9는 노동의 성과라고 해도 지나친 평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토지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노동이며, 노동 없이 토지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47) 그런데 로크가 이렇게 노동이 소유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신석기 시대의 원시공동체에서는 인류가 목축과 농업 등의 노동을 하였지만 사유재산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노동과 공동소유를 하였고 사회는 대부분 씨족 단위의 공동체였다. 따라서 노동이 사유재산의 발생근거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역사적 사실은 생산력의 발달이, 철기의 보급 등의 생산력의 발달이 원시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 소유의 우위를 조장하여 사유재산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유재산이 발생하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나뉘어졌고 나아가 노예제도가 발생했다. 이러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로크는 사유재산 제도 자체가 불평등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폐의 도입이 불평등을 낳았다는 주장을 편다. 이와 같이 불균등한 사유재산을 만들어 내는 사물의 분배법은, 사회의 틀 밖에서 계약 없이 단지 금이나 은에 부여한 가치를 인정하고 암묵적으로 화폐의 사용에 동의했기 때문에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48) 그러나 화폐는 단지 상품의 교환의 등가물일 뿐이며 화폐는 사유재산의 운동을 촉진하는 것일 뿐이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의 사회의 분열, 주인과 노예의 발생은 사유재산 제도 자체에 근거한 것이다.

로크는 자연상태의 권리를 포기하고 사회의 법률의 보호를 받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정치적 사회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에게서 특이한 것은 절대군주제를 부정하는 점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통치형태로 간주되는 절대군주제가 실제로는 시민사회와 모순되고 있어 시민적 통치형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49) 이러한 로크의 견해는 절대군주제를 옹호한 홉스와 비교되는데 이는 명예혁명 등의 과정을 로크가 경험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로크는 저항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국민이 힘을 가지고 반항해야 하는 것은 군주의 부정적이고 불법적인 폭력에 대해서만이다. … 이 신성불가침이라는 특권은 국왕의 신병에만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왕으로부터 위임받았다는 것을 구실로 법적 권한이 없는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국민은 국왕의 특권에 방해받음 없이,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하며 저항할 수 있다.50) 저항권의 인정은 영국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전개를 반영하는 것인데 시민적 권리의 하나로서 저항권이 승인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로크의 철학은 17세기 말의 영국과 유럽의 상황을 반영하는데 로크는 베이컨, 홉스 등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형이상학에서 해방되어 한층 발전된 유물론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로크는 당시 과학의 한계를 반영하여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에서, 물질과 운동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었고 보편과 본질의 문제에 있어서는 유명론적 한계 속에서 비변증법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로크의 철학은 자유정신과 과학정신을 보여 주면서 18세기가 이성의 세기가 되고 부르주아 혁명의 시대가 되는 밑바탕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11.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17세기 말, 18세기 초의 독일의 철학자이다. 당시 독일은 수백 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후진 상태에 있었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이제 막 움트고 있었고 지배적인 것은 봉건적 생산관계였다. 그러나 독일은 발돋움하는 영국, 네덜란드 등의 철학과 과학을 흡수하면서 발전을 모색했는데 라이프니츠의 철학에는 이러한 독일의 사회, 경제상태가 반영되어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철학자이면서 자연과학자, 수학자였는데 실천적 활동에도 뛰어들어 정치가, 법률가, 외교관으로서 활동하고 학술단체의 창립자가 되기도 했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에는 당시 독일 부르주아지의 이해가 표현되어 있는데 봉건제도와 타협하고 계몽적 절대주의의 도움을 빌려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려는 요구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과학의 추구를 지향하면서도 과학과 신학을 화해시키려는 경향을 띠고 있었고 형이상학적 사고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변증법적 요소가 존재했다.

라이프니츠는 객관적 실재로서 외적 세계를 부인하고 지각의 대상이 되는 외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형이상학적 진리의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신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외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만이 우리의 끊임없는 의존성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자신의 관념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접촉하고 우리의 지각을 직접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어떠한 다른 외적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도출된다.51) 신을 제외하고는 지각을 불러일으키는 외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물질보다 정신을 일차적으로 놓는 관념론적 인식이다. 유물론은 지각을 불러일으키는 외적 세계가 객관적 실재임을 승인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명확히 자신이 관념론자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 외적 세계를 부인하면 우리의 지각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 대상의 성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신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단지 우리에 대한 신의 끊임없는 작용을 통해서만 모든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우리 안에 갖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결과는 그 원인을 표현하고, 따라서 우리 영혼의 본질은 신적인 본질, 사유 및 의지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관념에 대한 일종의 표현 내지 모방 또는 영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우리 밖에 있는 우리의 유일한 직접적인 대상이며, 우리는 모든 사물을 신을 통하여 본다고 말할 수 있다.52) 우리 영혼은 신적인 본질과 사유의 모방이므로 신을 통하여 사물들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된다는 논리이다. 영혼 즉, 우리의 정신은 일종의 모방인데 단, 외적 세계의 모방이 아니라 신적인 본질의 모방이며 따라서 우리의 인식은 신을 통해서만 외적 세계, 사물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은 신의 존재를 인식의 전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객관적 관념론이다. 신적인 본질이 우리의 주관을 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외적 세계를 향하는 우리 인식의 창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의 인식과 외적 세계의 직접적 연관은 사라지고 신을 통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객관적 관념론은 현실의 인식과정과는 맞지 않는데 신의 존재, 신학과의 타협, 화해를 모토로 하는 라이프니츠는 인식론에서도 관념론적 인식론을 내세우고 있다.

이렇게 지각의 대상으로서 외적 세계를 부인하고 신만이 직접적 대상이라고 보는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실체라는 관념으로 이해한다. 실체라는 관념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에서 신, 자연, 정신을 포괄하는 최고의 존재, 궁극적 존재를 가리키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었는데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은 형이상학적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같지만 내용에서는 일정하게 차이가 난다. 실체가 형이상학적 개념이라는 것은 실체라는 관념으로 궁극의 존재, 불변의 영원한 존재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철학자마다 실체 개념에 대한 이해에 차이가 있는데 데카르트는 실체를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 즉,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로 나누어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했다. 스피노자는 이와 달리 똑같이 실체 개념을 쓰지만 실체를 신, 자연, 정신을 모두 포괄하는 궁극적 존재로 파악했고 나아가 신은 곧 자연이라고 보는 범신론적인 견해였다. 이와 같은 실체 개념은 신학적 사고의 연장인 형이상학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궁극의 불변의 존재는 신학에서 신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사고틀 즉, 영원한 불변의 개념이 최고의 인식틀이라는 사고가 여전히 철학에서 지배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로크의 경우 실체 개념을 신, 자연, 정신으로 분해하여 형이상학적 인식틀을 깨버렸지만 라이프니츠의 경우 부분적으로는 변증법적 인식을 보여 주지만 기본적이고 주요한 인식틀은 형이상학적 사고였고 따라서 실체 개념은 라이프니츠 철학의 초석이 되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물체도 실체의 하나로 파악한 것과 달리 라이프니츠는 물체의 실체성을 부인한다. 더구나 우리는 크기, 형태 그리고 운동의 개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명한 개념이 아니고, 그들이 실제로 우리의 외부에 있는 사물의 본성에 존재하는지 여부가 의심될 수 있는 색채, 열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성질들이 그러하듯이―이들이 정도에 있어 좀 더 강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떤 가상적인 것과 우리의 지각에 관련된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성질들은 어떠한 실체도 구성할 수 없다.53)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크기, 형태, 운동, 색채, 열 등과 같은 물질적 성질은 실체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남는 것은 영혼 혹은 정신인데 이것이 실체를 구성하는 내용이 된다. 그리하여 똑같이 실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스피노자가 범신론적인 유물론적 경향이었다면 라이프니츠는 정반대로 관념론적 경향을 띤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실체는 신, 자연, 정신을 포괄하는 일체의 단일한 것이었다면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다수성을 승인한다. 그리하여 이 세계가 무수한 개별적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모든 실체는 그 자체로 신을 제외한 모든 다른 사물들로부터 독립적인 하나의 세계54)라고 파악하여 개별적 실체의 독립성을 승인하는데 바로 이 점이 라이프니츠 철학의 특성을 형성하는 지점이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츠는 개별적 실체 개념을 구체화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이 개별적 실체의 관념이 발전하여 모나드론(단자론(單子論))을 형성하게 된다.

고대 원자론의 영향 속에서 당시 자연과학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원자 개념에 대당하는 것으로서 정신적 의미의 원자, 관념론적으로 이해되는 원자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모나드(단자)는 라이프니츠 철학의 핵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나드 개념은 일거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서서히 형성,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모나드 개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개별적 실체 관념의 형성을 우선 추적해 보고 모나드론에 접근해 보자. 라이프니츠의 초기 저작인 ≪라이프니츠와 아르노의 서신≫에는 개별적 실체 관념의 형성과정이 들어 있다. 모든 단일 실체는 자신의 방식으로 전 우주를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그 단일 실체의 개념에는 자신의 모든 사건들이 사건의 모든 정황과 함께 포함되어 있고, 외부 사물들의 모든 연쇄가 포함된다는 것.55) 모든 단일 실체라는 개념은 개별적 실체라는 개념과 같은 것인데 이 개념에는 자신의 모든 사건과 정황이 포함되어 있고 모든 연쇄가 포함되어 있다고 라이프니츠는 주장한다. 마치 씨앗이 장래에 자라날 식물의 맹아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과 유사한 관념인데 씨앗과 다른 것은 관련된 정황과 사물들의 연쇄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를 신학적으로 파악하여 신이 아담을 창조했을 때는 아담의 자손인 인류 전체의 모든 역사와 전개가 아담의 창조행위에 들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라이프니츠의 개별적 실체라는 관념은 관념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는 일정한 변증법적 요소가 들어 있는데 개별적 실체 자체가 전 우주를 표현한다는 것, 개별이 사물의 연쇄를 포함한다는 인식은 개별과 보편의 상호연관성이라는 변증법적 인식을 보여 준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게서 변증법적 요소는 전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사고에 의해 한계 지워지면서 부분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개별적 실체와 우주의 연관, 사물의 연쇄는 신학적으로 이해된 신비적인 것이다. 모든 개체적 실체 혹은 모든 완전한 존재는 각각이 하나의 세계와 같다는 것, 그리고 각각의 실체는 한 실체가 다른 실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물의 공존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의해서 자신 안에 다른 모든 실체의 모든 사건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신은 우선 나머지 모든 피조물들과의 완전한 관계에서 한 실체를 창조하고 보존하며 또 연속적으로 생산하기 때문입니다.56) 하나의 실체와 다른 실체와의 관련은 사물의 공존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사물의 공존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신이 나머지 피조물과의 완전한 관계에서 창조한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완전한 관계가 무엇인지는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라이프니츠의 변증법의 요소는 실체들의 상호연관이라는 올바른 접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요소에 의해 제약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에 대해 검토해 보자. 실체는 활동이 가능한 존재이다. 그것은 단순하거나 복합적이다. 단순한 실체는 어떠한 부분도 갖지 않는 것이다. 복합적 실체는 단순한 실체 또는 모나드들의 집적이다.57) 여기서 실체는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물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신에 의해 창조된 정신적 실체를 의미하는데 복합적 실체가 아닌 단순한 실체를 일컬어 모나드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물질적 원자 개념을 비판하면서 형이상학적 점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활동성의 근원이며, 사물의 합성의 제일의 절대적인 원리이고, 말하자면 실체적 사물의 분석에서 최후의 요소인 것은 다만 실체적인 원자, 즉 실제적이고 절대적으로 부분을 갖지 않는 단일성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형이상학적인 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58) 물질적 원자는 크기, 길이 등의 연장이 있으므로 부분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실체적인 원자는 형이상학적인 점이기에 즉, 관념적인 원자이기에 부분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점으로서 모나드가 물질적 원자개념을 대체하고자 한다는 것은 다음에서도 드러난다. 부분이 없는 곳에서는 연장도, 형태도 또한 분할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나드들은 자연의 진정한 원자이고, 간단히 말하면 사물들의 요소이다.59) 모나드가 자연의 진정한 원자라면 물리학에서 원자개념은 거짓이 된다. 그런데 관념론적인 형이상학에서는 물리학적 원자는 물질이기에 연장을 가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분할가능하고 부분을 갖기에 완전한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완전한 원자개념은 형이상학적 점으로서 정신적 요소를 내용으로 하는 모나드(단자)가 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 당시 물리학에서 원자개념은 물질의 분할불가능한 최소단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라이프니츠의 정신적 원자개념, 형이상학적 점으로서 모나드라는 개념은 과학의 불충분한 발전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후 과학의 발전은 원자가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밝혔는데 분할불가능성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원자개념은 무너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개념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화학적인 특성을 규정하는 최소단위라는 의미로 재정립되었다.

그러면 형이상학적 점으로서 모나드에 대해 계속 살펴보자.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는 부분을 갖지 않기에 생성과 소멸을 하지 않는다고 본다. 모나드들은 어떠한 부분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생성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 그들은 자연의 변화과정에서 시작도 끝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은, 변화는 하지만 소멸되지 않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계속 존속한다.60) 부분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모나드가 물질적 점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질이 아니므로 생성도 소멸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생성과 소멸은 부인하지만 창조는 승인한다. 모나드들은 단지 한번에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있다고, 즉 그들은 단지 창조를 통해서만 생성되고 파괴를 통해서만 소멸된다고 말할 수 있다.61) 자연적인 의미의 생성과 소멸은 불가능하지만 신에 의한 창조와 파괴는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모나드론의 관념론적인 성격이 확인된다.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모나드를 정신적인 최소의 점 혹은 원자로 보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을 물질적 실체와 연결 짓는다. 모나드의 지각과 물체의 운동들 사이에는, 태초부터 작용인의 체계와 목적인의 체계 사이에 예정된 완전한 조화가 존재한다. 바로 여기에 한쪽이 다른 쪽의 법칙을 변화시킬 수 없으면서도 영혼과 육체의 일치와 자연스러운 결합이 존재하는 것이다.62) 모나드와 물질적 운동의 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용인과 목적인 사이의 조화에 의존한다. 목적인이 허구적이고 비과학적인 개념이라는 것은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논박되었지만 라이프니츠는 모나드, 단자론의 결함을 목적인이라는 개념으로써 구제하려 한다. 그런데 목적인 개념과 작용인 개념을 이렇게 조화시키려는 것은 사실 라이프니츠 철학의 본질과 관련된다. 라이프니츠는 뉴튼과 독립적으로 미분과 적분을 발견했다. 그리고 수학적 논리학의 선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과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지만 라이프니츠는 결정적으로 과학과 신학의 화해를 도모했고 바로 이 점이 그의 철학 전반을 규정하고 있다. 자연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비물체적 본성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다 같이 만족시키기 위해서 목적인으로 이르는 길과 작용인으로 이르는 두 길의 화해.63) 라이프니츠는 당시의 많은 철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목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반대편 사람들이 자연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즉, 자연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의 한계를 라이프니츠가 인식하고 있었는데 기계론으로써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의 정신의 영역에 대해 그는 목적인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과학이 기계론적 설명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과학의 내용이 형이상학적으로 제약되어 있었다는 한계가 라이프니츠 철학의 시대적 조건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작용인과 목적인의 두 길의 화해는 중대한 오류가 된다. 작용인은 물질 세계의 원인과 결과 관계를 말하는 과학적인 개념인데 반해 목적인은 신학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는 비과학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용인과 목적인의 두 길의 화해는 과학과 신학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이며 신학에 위배되지 않는 한에서, 신학의 제약을 감수하는 한에서만 과학의 발전을 용인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 점이 라이프니츠 철학의 한계라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심지어 플라톤의 상기설을 승인한다. 상기설은 인간의 인식이 일종의 정신적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 상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론인데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라이프니츠는 상기설을 용인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개념도 수용하여 모든 물체는 자신의 형상을 통하여 항상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자신의 질료를 통하여 항상 수동적으로 행위64)한다고 본다. 이렇게 라이프니츠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당시 신학의 지주를 승인하지만 그러나 그는 과학적 인식을 위한 노력도 동시에 하는데 이러한 노력이 그의 철학의 변증법적 요소를 구성한다. 그는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을 인식하고 있다. 운동은 물체적 실체의 상태로 간주되기 때문에, 실재적으로 그리고 형이상학적으로 엄격하게 말해서 그 운동이 속해 있는 물체적 실체 자체로부터만 야기될 수 있다65), 운동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물체가 운동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물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66) 이는 모든 물질은 운동을 내포하고 있고 운동은 물질의 상태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것인데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라이프니츠도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에 대한 인식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 준다. 라이프니츠는 미분과 적분 개념의 토대가 되는 극소와 극대 개념을 사용하여 운동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을 보여 준다. 우리가 운동, 불균등 그리고 탄성에 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이, 이 사물이 무한하게 작거나 무한하게 크다고 가정될 때에도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고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경우 (무한하게 작은) 운동은 정지가 되고, (무한하게 작은) 불균등은 균등이 되며, (무한하게 빠른) 탄성은 최고 경도(硬度)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67) 무한하게 작다는 극소의 개념을 적용할 경우 운동은 정지로, 불균등은 균등이라는 대립물로 전화된다는 것인데 이는 라이프니츠가 형이상학적 사고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적 인식을 개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변증법적 인식은 필연과 우연에 대한 관념에서도 잘 드러난다. 라이프니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준거로 하여 필연과 우연을 구분한다. 필연적 진리는 모순율에 의존하다. 우연적 진리는 모순율로 환원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은 필연적이 될 것이며, 현실적으로 현존에 이른 것 이외에 어떤 것도 가능한 것이 아닐 것이다68), 우리는 필연이 아닌 것, 혹은 (그와 같은 것) 그것의 반대가 가능한 것, 모순을 함축하지 않은 것을 우연이라고 부른다.69) 필연성이 모순율에 의존한다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자. 어떤 것이 필연적이라 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 필연의 반대의 것은 참이 아닌 거짓이 된다. 즉, 모순율로써 참, 거짓을 판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모순율에 따라 필연의 반대는 불가능하고 거짓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어떤 것이 우연인 경우 그것이 아닌 반대되는 것이 발생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어떤 우연적인 것의 반대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그럴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따라서 우연성은 필연성과 달리 모순율로써 판별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라이프니츠는 필연과 우연의 구분을 모순율의 도움을 빌려 이루어 내고 있다. 우연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만 한다고 본다. 어떤 분석을 통해서도 동일한 진리 혹은 모순율로 환원될 수 없는 진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진리는 이유의 무한한 연결을 갖추고 있으며, 이것은 오직 신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그리고 우연적인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 특히 시간과 장소를 포함하는 모든 것은 이를 본성으로 한다.70) 이와 같이 라이프니츠는 우연성을 전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그런데 우연성에 대해 시간과 장소를 포함하는 모든 것의 본성이라고 보는 것은 검토의 필요가 있다. 시간과 장소를 포함하는 것은 물질적 존재, 혹은 현실적 존재를 가리키는데 이들을 우연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 존재는 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 되는데 이는 우연과 필연에 대한 관념론적인 파악이다. 현실성과 우연성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현실성에는 필연적 현실성, 우연적 현실성이 다 같이 포함된다. 다만 그 현실성을 발생하게 한 원인이 필연적인 것인가, 우연적인 것인가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필연성과 우연성에 대해 유물론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지만, 모순율을 기초로 필연과 우연의 범주를 분리시키고 대립시킨 것은 커다란 진전이다.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로 알려져 있는데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개별적 실체가 그와 관련된 정황과 모든 사건의 연쇄를 포함한다고 주장한 것과 맥락이 통한다. 이것은[세계의 운동, 변화는: 필자], 신이 영혼들에게 규정한 것이 물체의 법칙을 교란하게 되는 자연의 전복을 통하여 일어나지 않고, 자연의 왕국과 은총의 왕국 사이, 건축사로서의 신과 군주로서의 신 사이에 영원부터 예정되어 있는 조화를 통하여 자연 사물 자체의 질서에 따라 일어난다.71) 이렇게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신학적 주장인데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예정의 성격에 대해 필연성이 아닌 우연을 포함한 경향성으로 파악한다. 우리의 행동에 우연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의 예정은 필연성이 아니라 단지 경향성이라는 것은 결국 항상 참으로 남습니다. 이것에 우연성의 근원을 구성하는 자연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72) 자신의 예정조화라는 신학적 관념에 대해 우연성의 도움을 빌려 경직된 이해를 완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매우 모순적인 철학자이다. 미분과 적분을 발견했다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당시 과학의 첨단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작용인과 목적인의 두 길의 화해를 주장한 데서 보듯이 과학과 신학의 화해를 지향했다. 라이프니츠는 세계에 대한 기계론적인 접근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으나 그것은 신학과의 화해, 목적인의 도입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적 사고의 경향을 강하게 띠면서도 관념론적이지만, 가능성과 현실성, 필연과 우연, 개별과 보편의 상호연관 등 변증법적 사고를 개척하는 길을 걸었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변증법적 사고는 헤겔에 의한 변증법의 완성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라이프니츠 철학의 모순성은 봉건제와 타협하고 계몽적 절대주의의 도움을 빌려 성장을 도모했던 당시 독일 부르주아지의 한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노사과연


1) 스피노자,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책세상, p. 26.

2) 같은 책, p. 27.

3) 맑스, ≪신성가족≫(세계철학사(2), 중원문화, p. 222에서 재인용.)

4)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신아출판사, p. 21.

5) 같은 책, p. 22.

6) 같은 책, p. 44.

7) 같은 책, p. 81.

8) 같은 책, pp. 243-4.

9) 같은 책, p. 257.

10) 같은 책, p. 262.

11) 같은 책, p. 263.

12) 스피노자, ≪에티카≫, 도서출판 피앤비, p. 20.

13) 같은 책, p. 23.

14) 같은 책, p. 37.

15) 같은 책, pp. 56-7.

16) 같은 책, p. 56.

17) 같은 곳.

18) 같은 곳.

19) 같은 책, p. 73.

20) 같은 책, p. 84.

21) 같은 책, pp. 93-6.

22) 같은 책, pp. 142-3.

23) 같은 책, pp. 167-8.

24) 같은 책, p. 261.

25) 존 로크, ≪인간지성론≫, 동서문화사, p. 36.

26) 같은 책, pp. 112-3.

27) 같은 책, p. 150.

28) 같은 책, p. 190.

29) 같은 책, p. 202.

30) 같은 책, p. 368.

31) 같은 책, p. 198.

32) 같은 책, p. 199.

33) 같은 책, p. 224.

34) 같은 책, p. 213.

35) 같은 책, p. 253.

36) 같은 곳.

37) 같은 책, p. 265.

38) 같은 책, p. 296.

39) 같은 책, pp. 318-9.

40) 같은 책, p. 376.

41) 같은 책, p. 379.

42) 같은 책, p. 515.

43) 같은 책, p. 550.

44) 같은 곳.

45) 존 로크, ≪통치론≫, 동서문화사, p. 308.

46) 같은 책, p. 310.

47) 같은 책, pp. 316-8.

48) 같은 책, p. 322.

49) 같은 책, p. 347.

50) 같은 책, pp. 432-3.

51) 라이프니츠, ≪형이상학 논고≫, 아카넷, p. 107.

52) 같은 곳.

53) 같은 책, pp. 58-9.

54) 같은 책, p. 69.

55)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와 아르노의 서신≫, 아카넷, p. 12.

56) 같은 책, pp. 93-4.

57) 같은 책, pp. 225-6.

58) 같은 책, pp. 157-8.

59) 같은 책, pp. 251-2.

60) 같은 책, p. 227.

61) 같은 책, pp. 252-3.

62) 같은 책, pp. 230-1.

63) 같은 책, p. 90.

64) 같은 책, p. 175.

65) 같은 책, p. 192.

66) 같은 책, p. 245.

67) 같은 책, p. 229.

68) 라이프니츠, ≪우연성에 관하여, 자유와 운명에 관한 대화 외≫, 책세상, p. 91.

69) 같은 책, p. 111.

70) 같은 책, p. 107.

71) 라이프니츠, ≪형이상학 논고≫, p. 244.

72) 라이프니츠, ≪자유와 운명에 관한 대화 외≫, 책세상,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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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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