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길 동지의 사적 유물론 ‘수정’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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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 연구위원장

  

머릿말

쏘련이 무너지고 난 후 맑스주의의 주요한 원칙은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집요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혁명의 대수학이라 일컬어지는 변증법은 매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쏘련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즉, 계급사회였다는 왜곡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기도 했다.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와 그 이론과 원칙에 대한 이러한 왜곡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하나는 청산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수정주의이다. 청산주의는 ‘맑스주의는 틀렸다. 쏘련은 스탈린 관료주의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치부하고는 부르주아 계급의 품에 안기는 흐름이었다. 다른 하나는 수정주의적 조류이다. 이 조류는 맑스주의의 주요원칙을 난도질하고 ‘수정’하여 계급투쟁의 무기로서의 맑스주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쏘련이 붕괴한 것도 크게 보면 흐루쇼프 이후의 수정주의 때문이다. 쏘련의 역사는 수정주의가 사회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운동을 내부로부터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수정주의는 현재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그 공공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수정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치적으로 극복할 때만 노동자계급의 변혁적 운동의 재정립이 가능할 것이다.

 

한국에서 맑스-레닌주의는 그동안 이러한 청산주의와 수정주의를 비판하며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을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밟아왔다. 뜨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 공황에 대한 과학적 해석,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공헌에 대한 승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재정립 노력 등을 통해 한국에서 맑스-레닌주의는 쏘련 붕괴의 충격을 극복하고 서서히 하나의 뚜렷한 운동조류로 자신을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의 맑스주의 원칙에 대한 공공연한 ‘수정’은 그동안의 이러한 노력과 투쟁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신재길 동지의 사적 유물론의 근본원칙에 대한 ‘수정’ 그리고 그에 앞서서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수정’은 한국의 맑스-레닌주의가 놓여 있는 상태가 아직은 취약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국 사회 전체, 그리고 운동진영 전체에서 지배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그리고 청산주의와 수정주의가 맑스-레닌주의 진영 내부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맑스-레닌주의 진영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러한 ‘수정’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것의 비과학성을 비판함으로써 우리가 견지해야할 원칙이 과연 무엇이며, 그 원칙들을 왜 견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먼저 신재길 동지가 최근에 시도한 사적 유물론의 근본원칙 즉,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에 대한 공격을 비판하고 더불어 전쟁 등의 개념들에 대한 왜곡을 비판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정’을 신재길 동지가 감행하고 있는 토대로서 그 뿌리에 해당하는 철학적 문제를 다룰 것이다. 이는 신재길 동지가 제출한 적이 있었던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수정’의 문제이다. 다만 철학적 쟁점에 대한 논의는 사적 유물론의 ‘수정’에 대한 비판을 위한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1. 사적 유물론에 대한 ‘수정’에 대한 비판

신재길 동지는 맑스의 사적 유물론의 근간이 되는 개념인 토대와 상부구조의 개념을 하나의 비유로 치부한다. 맑스가 사회를 유물론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사회를 하나의 건축물에 비유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이렇게 간단히 사적 유물론의 근본 범주를 비유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고 즉, 과학적 개념이 아닌 것으로 기각하고 그것을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환원 혹은 대체한다.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맑스의 사적 유물론은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세 부분으로 분해되게 되었다.

 

여기서 신재길 동지의 문제의식을 분석해 보면 그는 알튀세르의 “중층결정화된 모순” 개념을 사용하여 사회에 대한 통일적인 유물론적 인식인 사적 유물론을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세 부분으로 분해한 것이다. 그는 하나의 사물, 하나의 과정에는 여러 가지 결정 요인이 있다는 “중층결정화된 모순” 개념의 의미를 사회에 적용하여 경제적 토대에 대한 정치의 상대적 독립성이라는 견지 하에 경제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원리에 의해 구성되는 정치의 영역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도 또한 독자적 원리를 갖는 영역이 있다. 이렇게 사회를 경제적인 생산관계, 정치적인 권력관계,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영역으로 보는 것이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비유를 넘어서서 사회를 보다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재길 동지는 이러한 관점을 보충하기 위해 자연에는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되는 영역, 화학적 법칙이 적용되는 영역, 생물학적 법칙이 적용되는 영역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다만 물리학적 법칙이 가장 근본적인 법칙이지만 그럼에도 각각의 영역은 독자적 원리에 의해 구성된다는 논지를 편다. 그러면 이 견해를 비판하기 위해 첫째,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이 하나의 비유에 불과한 것인지 여부 그리고 둘째,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이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환원 내지 대체가능한 것인지를 살펴보고 셋째, 신재길 동지의 이러한 접근의 뿌리에 해당하는 알튀세르의 “중층결정화된 모순”이라는 개념을 비판해 보자.

 

엥겔스는 일찍이 맑스주의에서 역사적 유물론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은 맑스의 공로이다: 유물론적 역사 파악, 그리고 잉여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의 폭로. 이 발견들에 의해 사회주의는 과학이 되었으며,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과학을 모든 개별성과 연관성의 지점에서 더욱 완성시키는 것이다.”1) 이러한 엥겔스의 언급의 의미는 사회주의가 과학이 되는데 있어서 역사적 유물론이 잉여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비밀 폭로와 더불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 사회의 역사는(원시공동체를 제외하고)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공산당 선언≫의 명제도 역사적 유물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이 없다면 계급투쟁의 의의, 사회에 대한 계급적 접근의 의의도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왜 그런가?

 

사회에 대해 유물론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히 경제의 역할, 생산의 역할을 정치보다 더 일차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심지어 부르주아들조차 인정하는 것이다. 부르주아들도 속류 유물론적으로나마 경제의 일차성을 승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사회에 대한 계급적 접근, 나아가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승인을 거부한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부르주아들은 사회구성에 있어서 경제의 일차성을 승인하지만 그러한 승인을 경제의 정치에 대한 규정성으로까지 승인하지는 못한다. 다만 경제, 정치, 문화, 사회 등등의 영역에서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 심지어는 토대라는 인식까지만 승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경제적 토대가 정치와 이데올로기 등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에서 형성되는 인간관계, 즉 생산관계가 국가 등의 정치 영역, 그리고 예술, 철학, 문화 등의 이데올로기 영역을 근원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조금 더 심화시키면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계급적 관계, 계급적 대립이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근원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유명한 명제가 도출되는 것이다. 토대에 의한 규정력 때문에,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계급 대립의 문제가 상부구조를 규정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국가에 대한 규정은 과학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조차도 어떤 정치세력, 계급세력의 주관적 의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한 필연성, 자연사적 필연성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제반의 사회적 현상에 대한 통찰과 분석에 있어서도 계급적 접근이 가장 근본적인 통찰이며 과학적인 통찰이 되는 이유도 토대, 생산관계, 계급대립에 의한 근원적 규정력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의 유물론적 의의이다. 맑스는 바로 이러한 과학적 발견을 이룩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공상에서 과학으로 전화시켰다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은 비유에 그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개념으로서 명확한 자기 내용, 대상을 갖는 개념이며 또 토대개념과 상부구조 개념의 상호 연관성을 통해 사회 전체를 하나의 구성체로 파악하게 하는 과학적 개념으로 역할을 한다.

 

부르주아들의 경제의 일차성에 대한 속류 유물론적인 승인과 맑스의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의 차이는 바로 상호연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은 경제와 정치의 상호연관에 있어서 경제의 일차성을 승인하더라도 단지 형식논리적인 승인으로 그쳐서 경제와 정치의 연관에 대한 과학적 입장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맑스의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은 경제와 정치, 나아가 이데올로기 등의 상호연관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토대, 생산관계의 일차성의 승인, 토대의 상부구조에 대한 근원적 규정력, 그리고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 상부구조의 토대에 대한 반작용 등이 그러한 구체적 상호연관의 내용이다.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은 이러한 변증법적 내용을 담고 있기에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전화시킬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계급투쟁이 인류역사의 본질이라는 인식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이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환원 또는 대체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 신재길 동지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상호 규정하면서도, 심지어는 경제가 가장 근본적인 규정력을 발휘하면서도 각각 독자적인 원리에 의해 규정되는 영역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의 근거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이 하나의 비유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보충하기 위해 앞서 말했던 물리학적 법칙, 화학적 법칙, 생물학적 법칙이 각각의 독자적 원리에 의해 구성되면서도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 일차적 규정력을 받는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이 알튀세르의 “중층결정화된 모순”이라는 개념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별도로 하더라도 신재길 동지의 이러한 접근은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내적 연관을 올바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재길 동지에게 있어서 경제적 심급, 생산관계가 정치를 근원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형식논리적으로만 승인되고 있다. 그리하여 정치는 경제와는 별도의 독자적인 원리에 의해 규정받는다고 한다. 이를 경제는 생산관계, 정치는 권력관계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되면 사회를 하나의 구성체로 보는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인 접근은 사라지고 경제의 영역, 정치의 영역,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분해’되게 된다. 각 영역이 독자의 원리를 갖는다고 보면 각 영역의 상호연관이라는 변증법적 성격은 왜곡되게 된다. 그리하여 토대, 생산관계의 일차성과 규정력이라는 유물론적인 접근이 왜곡되기 때문에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통일성은 파괴되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재길 동지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통일성의 문제를 관념적이나마 보충하려 하는데 그것이 소위 인간(사회)법칙이라는 지배성과 집단성이라는 개념이다. “지배성 원리나 집단성 원리는 경제와 정치 나아가 이데올로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개념이다. … 지배성과 집단성이 인간집단의 생존원리와 형성원리로서의 인간(사회)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2) 지배성과 집단성 원리가 경제와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영역을 통일시키는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다. 기존의 맑스주의에서 경제와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통일되어 있었다. 왜? 무엇에 의해? 바로 경제적 토대가 국가와 이데올로기라는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접근에 의해 사회는 하나의 구성체로서 통일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토대와 상부구조를 비유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고 그것을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분해한 다음 다시 그것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관념적인 지배성과 집단성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이론에 있어서, 역사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 부르주아 이론으로 건너뛰는 것이다. 지배성과 집단성이라는 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이론을 운동 내부에 도입하는 구멍으로 작용한다. 먼저 신재길 동지의 규정을 살펴보자. “인간이 동물무리와 구별되는 사회적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생존원리로서의 지배성과 이 지배성의 발현 주체인 사회(인간집단)를 형성하는 원리로서의 집단성이다.”3)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다른 인간집단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형성되고 발전해왔다는 의미에서 집단성이 신재길 동지가 제기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속류 부르주아 이론에 불과하다. 부르주아 입장에서 인간사회의 주요한 현상으로서 지배성이라는 개념을 부정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부르주아 국가가 이미 지배성을 실현하는 구현체가 아닌가? 그러면 집단성은 어떠한가? 부르주아들은 인간의 집단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은밀한 지배써클부터 공공연한 지배계급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단결을 통해 피지배계급을 지배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지배성과 집단성이라는 개념은 부르주아들 전체가 동의할 수 있는 것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개념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피상적이고 속류적인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을 신재길 동지가 인간(사회)법칙으로까지 상승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에 맑스주의에서 인간사회법칙으로서 역할한 것은 사적 유물론이었다. 물질적 생산이 진정한 역사의 무대이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계급관계, 계급투쟁이 역사의 본질이라는 것이 사적 유물론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이러한 맑스주의적 접근을 토대와 상부구조는 비유에 불과할 뿐이라고 간단히 치부하고서는 대신 인간사회법칙으로서 제기하는 것이 속류 부르주아적인 지배성과 집단성의 논리이다. 내적 논리를 떠나 결과적으로 보면 지배성과 집단성이라는 접근은 첫째, 계급적 접근을 결여하고 있어서(혹은 내적으로는 계급적 접근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둘째, 토대, 생산관계의 근원적 규정력이라는 유물론적 접근 대신에 지배성과 집단성이라는 관념(론)적 접근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와 같이 신재길 동지는 사회를 하나의 구성체로서 통일적으로 보게 하는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을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영역으로 분해하고 혹은 환원하고 그러한 접근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관념적인 지배성과 집단성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것은 속류 부르주아 이론으로서 유물론이 아닌 관념적 접근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사적 유물론의 토대와 상부구조의 개념은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환원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고유의 내용을 갖고 있다.

 

신재길 동지가 이러한 ‘수정’을 감행하는 토대로서 알튀세르의 “중층결정화된 모순” 개념을 비판해 보자. 신재길 동지는 물리학적 법칙, 화학적 법칙, 생물학적 법칙이라는 “중층결정화된” 개념을 도입한다. 그리고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사회에 대한 통일적 인식을 해체하여 그것을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중층결정화된” 개념으로 전화시킨다. 따라서 문제는 “중층결정화된 모순”이라는 알튀세르의 개념의 힘을 빌어 신재길 동지가 맑스주의의 근본적 개념들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변증법을 사실상 부정한 사람이다. 알튀세르는 “모순에 대한 헤겔적 모태를 영원히 거부”4)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헤겔적 모순 개념, 즉, 변증법적 모순 개념을 구조라는 개념으로 전화시켰다. 알튀세르는 헤겔적인 변증법적 모순 개념을 대립물의 통일로서 단순한 것이라고 치부하면서 구조 개념을 내세웠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지양, 부정의 부정 등의 개념을 부정하여 사실상 변증법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구조 개념은 결코 변증법적인 모순 개념을 대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상을 과정으로서, 운동으로서 고찰하려면 대상의 내적 모순을 파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조 개념은 사실 변증법의 상호연관이라는 개념에 종속되는 개념인데 왜냐하면 구조라는 개념은 대상의 많은 상호연관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만이 아니라 현대의 프랑스 철학자들, 나아가 서유럽의 많은 철학자들은 대부분 변증법을 부정하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그러면서 알튀세르가 내세운 것이 이른바 “중층결정화된 모순”이었다. 알튀세르는 여기서 형식적으로 모순이라는 개념을 갖다 붙이고 있지만 그것은 변증법적 내용이 거세된 형식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중층결정화된 모순”이라는 것은 변증법적 내용이 없는 것으로서 어떤 대상, 과정에 여러 가지 결정요소가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단순한” 변증법적 모순 개념을 부정하고 심오한 “중층결정화된 모순”이라는 형식논리를 도입한 것이다. 대상을 대립물의 통일로 바라보는 것은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모순은 대상이 왜 그러한지, 대상이 왜 그런 운동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대상의 본질과 대상의 나아갈 바를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반면에 “중충결정화된 모순”은 이러한 변증법적 성격이 상실된 형식논리이며, 대상에는 여러 가지 결정요인이 있다는 진부한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엉터리 논리, 진부한 논리는 그것이 변증법적 모순 개념을 부정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신재길 동지는 바로 이러한 논리적, 역사적 연장선상에서 “중층결정화된 모순” 개념의 힘을 빌어 맑스주의의 주요 원칙들을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2. 전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이와 같이 신재길 동지는 사적 유물론의 원칙을 수정하고 그것을 속류 부르주아 이론으로 전화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을 제외하더라도 신재길 동지는 사적 유물론의 여러 쟁점들에 대해 비과학적인 입장을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인간의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지배성은 집단성에서 나온다. 한 집단은 다른 집단을 지배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전쟁의 원인이다. … 따라서 전쟁은 계급발생에 기인한다기보다, 어쩌면 전쟁이 계급사회를 만들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집단 간에 지배성 원리가 관철되면서 계급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5)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지배성이라는 개념에 갇혀서 계급발생의 문제에 대해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계급사회가 발생하기 전의 원시 공동체에서도 전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원시공동체에서 부족과 부족의 전쟁은 부족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기도 했다는 것은 지금은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쟁의 존재가 계급사회를 발생시켰다는 것은 비약이다.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밝혔듯이 계급의 발생은 전쟁이 아니라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한 잉여생산물의 발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폭력의 작용은 계급의 발생에 있어서 촉매제의 역할은 할 수 있었을 지라도 계급사회 발생의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제도가 없다면, 노예와 노예주라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단지 일정한 공동체, 부족의 부를 늘리거나 줄일 수는 있었을 지라도 사유재산제도 자체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 석기의 발전, 철기의 도입 등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해 잉여생산물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곡식 등 동산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토지 등 부동산 등의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발생했을 때 사회는 비로소 가진 자와 못가진자, 노예와 노예소유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전쟁이라는 폭력은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원인’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만약 전쟁을 계급사회의 발생 원인으로 보게 된다면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이 역사발전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사적 유물론의 명제와 충돌하게 되는데 사적 유물론을 분해시킨 신재길 동지의 입장에서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인 계급투쟁과 전쟁을 동렬에 놓는다. “전쟁을 경제의 집약집중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모든 전쟁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며, 계급투쟁이 폭력을 동반할 때 전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6) 여기에는 올바른 명제와 잘못된 명제가 뒤섞여 있다. 정치는 경제의 집약집중이고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므로 전쟁은 경제의 집약집중이라는 명제는 일정한 합리성이 있다. 전쟁은 경제의 집약집중이라는 것을 평이하게 풀어서 말하면 모든 전쟁에는 경제적 원인이 배후에 깔려 있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접근은 일정한 합리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여기서 비약을 하여 ‘모든 전쟁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계급투쟁이 아닌 전쟁 또한 무수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투쟁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격을 띠지 않는 전쟁 또한 많았다. 역사상 비일비재했던 민족 간의 전쟁은 경제적 원인이 있을지라도 상당수는 계급투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재길 동지가 ‘모든 전쟁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는 경제의 집중’이라는 레닌의 언급을 기계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경제의 집중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계급의 문제를 가리키지만 계급의 문제가 아닌 경제 현상 또한 많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금 한창인 중국과 미국의 무역분쟁은 계급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의 경우 그것은 제국주의 간의 전쟁으로서 계급투쟁과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물론 제국주의전쟁의 결과 러시아 혁명이 발생한 것은 맞지만 제국주의 전쟁 자체가 계급투쟁은 아니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전쟁=계급투쟁으로 보면 심각한 오류에 빠지는데 왜냐하면 계급투쟁은 역사발전의 가장 근원적인 원동력임에 반하여 전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인간사회법칙을 지배성과 집단성으로 보는 신재길 동지에게는 전쟁이 가장 근본적인 역사발전 동력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계급투쟁을 동렬에 놓고 있는 신재길 동지는 전쟁을 내세우다가 ‘혁명’이라는 목표를 잊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류는 생산력 발전의 한계에 봉착될 때, 전쟁이란 수단으로 그 한계를 돌파해왔다고 할 수 있다.”7) 과연 그러한가? 신재길 동지가 분해시킨 사적 유물론에서는 그리고 맑스는 “생산력 발전의 한계에 봉착될 때” 전쟁을 말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말했었다. 맑스의 유명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정식화된 입장을 따를 때 그러하다. 어떠한 사회구성체도 생산력 발전의 여지가 다하기 전까지는 소멸하지 않으며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될 때, 사회혁명의 시기가 시작된다고 맑스는 말하고 있다. 즉, 맑스는 “생산력 발전의 한계에 봉착할 때” 사회혁명의 시기가 시작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과 계급투쟁을 동렬에 놓고 보는 신재길 동지는 이러한 맑스의 주장을 까맣게 잊고 있다. “생산력 발전의 한계에 봉착할 때” 혁명의 시기가 시작된다면 노동자와 민중들이 해야 할 것은 혁명의 준비가 되겠지만 만약 신재길 동지처럼 전쟁이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면 혁명의 준비가 아니라 전쟁에 대한 대비가 일차적인 것으로 된다. 혁명의 준비와 전쟁에 대한 대비가 질적으로, 정치적으로 같을 수가 있겠는가? 혁명과 전쟁은 현상적으로는 일치하는 순간이 있을지 몰라도 그 성격과 질은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신재길 동지와 같은 입장을 택한다면 현실의 실천에서 무수한 잘못된 편향을 범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된다.

 

3.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신재길 동지의 ‘수정’

위와 같은 신재길 동지의 혼란과 오류는 철학의 문제에 있어서 오류에 기초한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일찍이 ≪정세와 노동≫ 119호(2016년 1월호)에서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수정을 제기한 바 있었다. 당시 신재길 동지의 제기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신재길 동지는 그 오류를 시정하지 않고 오히려 오류를 확대재생산하여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신재길 동지는 당시 철학의 근본문제를 한 가지에서 세 가지로 나눌 것을 주장했다. 맑스주의 철학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로 파악했던 ‘물질과 의식’의 대립은 단지 인식론상의 영역의 문제일 뿐이므로, 존재론의 영역에서 ‘사람과 세계’의 문제를 또 하나의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고, 또 방법론의 영역에서(운동과 변증법의 영역에서) ‘존재와 무’의 문제를 또 다른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자고 제기했다. 이리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는 세 가지 영역으로 찢겨지게 되었다.

 

신재길 동지가 이와 같이 제기한 근거는 맑스에 의해 실천 개념이 철학에 수용되었는데 실천 개념은 ‘물질과 의식’ 개념으로는 포괄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맑스는 실천 개념을 철학에 포섭함을 통해 데카르트 이래로 인식주관과 객관세계로의 분열이라는 철학의 딜레마를 해결하게 되었는데 실천 개념을 철학에 포섭한 결과로 인해 실천이 철학체계상에서 논리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확장하여 실천 개념이 포괄되는 ‘사람과 세계’와의 문제를 제기함에 해소될 수 있다고 신재길 동지는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재길 동지의 문제의식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맑스에 의해 근대철학의 딜레마가 해소되었다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식과 객관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었다. 사유실체와 물질적 실체라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인식주체와 객관세계를 이원론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인식주관이 인식한 것이 객관 대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검증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철학자들 일부에서 이를 딜레마로 파악했는데 이 문제는 맑스에 의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 피히테 같은 철학자들이 일원론을 시도하면서 극복된 것이다. 특히 스피노자는 사유와 연장(물질성)모두를 동일한 실체의 속성으로 보는 일원론을 주장하여 데카르트와 같은 딜레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였다. 실제로 그러한데 자연에는 의식이라는 현상과 존재가 분명히 있지만 그것 또한 자연의 일부이며 물질의 속성일 뿐이다. 따라서 데카르트 같은 이원론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딜레마는 사라지는 것이다.

 

실천 개념을 철학에 도입한 최초의 사람은 맑스가 아니라 헤겔이었다. 실천 개념이 철학에 도입됨에 따라 실천 개념은 인식과정의 하나로서 파악되게 되었고 맑스, 그리고 이후의 레닌은 그러한 실천 개념을 유물론적으로 개작하여 유물론적 인식론을 세웠던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물질과 의식’의 대립은 인식론상에서만 절대적이고 그 영역을 벗어나서는 상대적이라는 레닌의 언급을 빌어, ‘물질과 의식’의 대립은 인식론상의 철학의 근본문제일 뿐이며 따라서 존재론적인 철학의 근본문제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질이라는 개념은 단지 인간의 인식과정의 문제만은 아니다. 레닌은 물질이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라는 규정을 통하여 물질이 인식의 영역을 넘어, 인식과 독립하여 시・공간적 존재하는 것임을 보이고자 했다. 즉, 물질 개념은 신재길 동지의 표현을 빌면 일종의 존재론적인 개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엥겔스가 정립한 자연의 변증법은 물질 개념의 존재론적 의미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레닌이 ‘물질과 의식’의 대립이 인식론상에서는 절대적이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 상대적이라고 했던 것의 의미를 신재길 동지는 혼동했다. 레닌의 의미는 ‘물질과 의식’의 대립을 인식론의 영역을 넘어 절대화시키면 그것은 데카르트와 같은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물질과 의식’은 그러한 절대적 대립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은 물질의 속성일 뿐이며 그러한 물질의 일차성으로 인해 의식을 포함하는 이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이 담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신재길 동지의 주장처럼 물질 개념이 인식론상의 개념에 머문다면 그것은 유물론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실천 개념은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최고 개념으로는 포괄되지 않는다는 신재길 동지의 주장을 검토해 보자. 실천 개념이 ‘물질과 의식’의 범주 내에 포괄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억지에 가까운 것이다. 왜냐하면 실천의 주체인 인간은 한편으로 의식을 담지하는 주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물질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의 동구실천논쟁에서 수정주의자들은 실천을 ‘물질과 의식’과 같은 위상의 철학의 중요범주로 놓고자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실천을 ‘물질과 의식’이라는 최고 개념과 동렬에 놓는다면 그것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흐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신재길 동지 또한 방식은 다르지만 실천을 ‘물질과 의식’에 포괄되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이들과 동일하다. 다만 이들과 다른 것은 ‘물질과 의식’을 인식론적 최고개념으로 한정하여 존재론적 최고개념을 별도로 요구한다는 점이다. 실천을 ‘물질과 의식’ 개념과 관련해서 보면 실천은 의식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실천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재길 동지의 주장은 의식과 물질 개념의 존재와 그 개념들의 상호작용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개념을 설정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개념을 설정한다는 것은 그 개념이 다른 개념(대상)과 연관을 갖고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설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물질과 의식’을 단지 인식론상의 개념으로 보면서 별도로 존재론적인 철학의 근본물음이 필요하다는 신재길 동지의 주장은 근거를 잃는다.

 

신재길 동지는 이와 같이 1950년대 동구의 실천논쟁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실천 개념에 대한 혼동으로 인해 철학의 근본문제를 오해하여 그것을 왜곡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신재길 동지가 세 번째의 철학의 근본문제로 설정하는 ‘존재와 무’의 문제는 변증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변증법의 영역을 인식론, 존재론과 분리하여 방법론이라는 영역 하에 포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운동과 변화의 논리인데 이를 별도로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자는 것은 물질의 근본적 속성인 운동을 물질로부터 분리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신재길 동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비변증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물질과 운동의 분리는 곧 물질과 운동의 상호연관과 통일성에 대한 부정으로서 비변증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동, 철학의 근본문제를 공격하여 그것을 세 개로 나누어 분해시키는 방식은 앞서 신재길 동지가 사적 유물론에서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을 분해하여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영역으로 분해한 것과 방법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의 기초는 알튀세르의 “중층결정화된 모순” 개념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재길 동지의 접근방식을 정리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도록 하자.

 

4. 형식에 대한 공격을 통한 내용의 ‘수정’

신재길 동지의 주장은 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유용한 진보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마치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외양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외양을 걷어내고 그 실질적 의미를 검토해 보자.

사적 유물론을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분해하는 것, 그리고 철학의 근본문제를 세 가지로 나누는 것은 얼핏 보면 단지 형식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비친다. 특히 토대와 상부구조를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나누는 것은 마치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을 보충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재길 동지가 이러한 형식에 대한 공격을 통해 사적 유물론의 유물론적 내용을 거세하면서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인 통일된 인식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철학의 근본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의식’의 대립 이외에 별도로 존재론적인 ‘사람과 세계’의 문제, 그리고 ‘존재와 무’라는 방법론적인 최고의 문제가 설정되면 이것은 실제적으로는 ‘물질과 의식’의 개념이 철학의 최고물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천적으로는 그에 따라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신재길 동지의 사적 유물론과 철학의 근본문제라는 맑스주의의 원칙에 대한 ‘수정’은 단지 형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공격을 통해 맑스주의 원칙의 유물론적 내용을 거세하는 것이다. 유물론적 내용이 거세된다는 것은 맑스주의 원칙들의 현실성과 과학성이 거세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의 맑스-레닌주의 진영은 그동안 청산주의에 반대하고 수정주의를 폭로하면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원칙을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길을 걸어왔다. 그동안 많은 성과도 있었지만 한계 또한 여실히 존재한다. 신재길 동지가 걷고 있는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의 길은 바로 지금의 한국의 맑스-레닌주의의 한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신재길 동지의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수정’은 한국의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세계관의 문제에서 어떤 점을 극복하고 발전시켜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사적 유물론에 대한 신재길 동지의 ‘수정’은 한국사회에서 변혁의 전망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지금 변혁의 전망이 올곧게 정립되어 있다면 신재길 동지와 같은 ‘수정’은 애초에 불가능하였을 테니까 말이다.

 

맑스-레닌주의는 어떤 교조적 도식 때문에 생명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시련을 이겨내면서 현실의 난제 하나하나를 풀어가는 것을 통해 노동대중과 깊숙이 결합할 때 맑스-레닌주의는 다시금 노동대중의 기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사/과/연>


1)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2005, p. 29.

2) 신재길, “헤게모니 이행기에 전쟁은 필연적인가”, ≪정세와 노동≫ 145호(2018년 8/9월호), p. 80.

3) 앞의 책, p. 75.

4)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 노사과연, 2018, p. 575에서 재인용

5) 신재길, 앞의 책, p. 80.

6) 앞의 책, p. 83.

7) 앞의 책, p. 83.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Nov 13th, 2018 | By | Category: 2018년 10・11월 제146호, 이론, 정세와노동 | 조회수: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