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대구 10월 인민항쟁1)

오해영 | 회원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인민항쟁은 12월 중순까지 약 2달 반에 걸쳐 들불처럼 전국을 휘몰아쳤던 그야말로 전국적인 수준의 민중 항쟁이었다. 오랫동안 ‘대구 폭동’, ‘10・1 소요’ 등으로 불려온 10월 인민항쟁이 인터넷 백과사전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지 궁금해서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로 들어가 ‘대구 10월 인민항쟁’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결과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등 대부분은 ‘대구 10・1 사건’으로, 다음백과는 ‘10월 대구 폭동 사건’으로 주 제목이 달려있다. 물론 부제목으로 ‘10월 항쟁’, ‘10월 인민항쟁’ 등이 병기되어 있긴 했지만 이 조차도 10월 인민항쟁에 대한 역사적 관점이 아직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그동안 우리사회가 해방정국 속에서 일어난 좌익 활동과 관련된 민중항쟁에 대한 평가를 의도적으로 저평가해 온 것처럼 ‘10월 인민항쟁’ 역시 좌익이 선동한 폭동 정도로 치부되고 왜곡되어 왔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지며 비로소 10월 인민항쟁으로 재평가되기도 하였지만 2018년 현재의 인터넷 공간에서 여전히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제목이 쓰이는 이유는 역사 앞에 떳떳치 못한 세력들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민중 항쟁의 역사들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도록 우리의 내용을 널리 퍼뜨려 맞서야 할 것이다.

 

항쟁의 배경

10월 인민항쟁의 배경은 두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해방정국의 일반적 상황과 대구・경북지역만의 특수한 상황이다. 첫째, 해방정국의 일반적인 상황부터 살펴보자. 10월 인민항쟁의 가장 일차적인 원인은 해방 이후의 새로운 사회 건설에서 제반 개혁의 요구가 좌절된 데 대한 민중의 분노이다. 당연히 처벌될 줄 알았던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의 재등장, 민중 자치 권력이라 할 수 있는 인민위원회의 좌절, 토지개혁의 지연, 미군정에 의한 공장의 접수, 만연하는 실업난과 모리배들의 발호, 귀환 동포들에 대한 무대책 등은 해방을 맞아 무언가 변화를 갈구하던 민중들에게 극심한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미군정의 임기응변적 식량 정책과 일제의 공출이나 다름없는 하곡・추곡에 대한 강제매입은 일반 민중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1946년 중반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항쟁의 잠재력을 심화시켰다.

 

둘째, 대구・경북지역의 경우 항쟁의 잠재력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촉발될 수 있는 좀 더 특수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귀환 동포와 식량 문제였다. 경남・경북 지역에 상대적으로 집중되었던 귀환 동포의 유입은 이 지역의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켰고, 식량문제를 더욱 심각한 사태에 이르게 했다. 당시 경북지역은 가장 많은 양의 강제적 하곡 수집을 당하였고 이로 인해 민중들의 식량난은 극한 상황에 몰려있었다. 대구는 식량 폭동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고, 농촌지역에서는 식량 반출에 대한 항의가 속출하고 청송군과 같은 산간 지역에서는 아사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대구의 또 다른 특수한 상황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좌익 세력의 조직력이 탄탄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이미 일제 항일운동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이 지역의 좌익들은 ‘건국준비치안유지회’, ‘탁치반대공동투쟁위원회’, ‘대구공동위원회’ 등 3차례의 좌우 연합적 연대를 통해 미군정의 본격적인 탄압을 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내분을 거의 겪지 않았다. 여기에 대구 지역의 강력한 노동운동은 결국 10월 인민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0월 인민항쟁의 시작은 9월 총파업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다른 지역이 빨리 진압되었던 것과 달리 대구의 총파업은 일주일 이상 지속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민중들이 파업단 쪽으로 가세하게 되면서 인민항쟁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항쟁의 촉발

1946년 5월 초 미군정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더불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이용하여 항일운동의 정통성과 민중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던 좌익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미군정은 ‘공산당 활동 불법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는데 박헌영 계열 조선공산당 세력들은 미군정에 대항하는 ‘신전술’ 방식을 채택하여 더욱 급진적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신전술’ 노선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노동운동의 열기와 결합되어 1946년 9월 조선공산당과 전평은 총파업을 주도하게 된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 총파업은 철도파업을 주축으로 전국의 전 산업으로 번져나갔다. 그러나 서울, 부산 등의 지역에서는 초기에 무력 진압당하면서 파업이 흐지부지 전개되었다.

 

그러나, 대구의 총파업은 9월 24일 철도파업으로 시작되어, 조선노동조합 대구평의회(이하 노평)의 지도아래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27일에는 남조선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뒤이어 우편국, 섬유산업, 조선중공업 대구지부, 출판노조 등도 파업에 참여하게 된다. 9월 30일에 이르자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의 총파업에는 30여개업체의 4천 여 명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10월 1일에는 민중들이 대거 파업단에 가세하여 경찰과 충돌함으로써 총파업은 마침내 인민항쟁으로 비화하게 되었다.

 

대구 인민항쟁

10월 1일 오전, 약 1천여 명의 민중들1)은 대구시청에 몰려들어 쌀을 달라고 항의하며 기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날의 시위는 종일 이어지며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민중들은 무장 경찰의 철퇴를 요구하며 해산을 거부하였다. 결국, 군중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2명2)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3)

 

다음 날 아침,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2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이 시내 곳곳4)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대구경찰서 앞에서는 전날 사망한 사람의 시체를 들것에 싣고 항의하였다. 권영석 경찰청장과 미군정의 프레지아 소령이 이들을 통제하려 했으나 군중들의 기세와 경찰의 위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결국 정오경 1만여 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 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경찰관들은 군중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17명의 시위대가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분노한 군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대구경찰서가 군중들에 의해 접수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중들은 시내 도처에서 경찰을 공격했고, 그 결과 많은 경찰관들이 피살되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미군정은 전차 4대를 출동시켜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했고, 오후 7시에는 계엄령을 발동하여 표면적으로는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틀간의 대구 항쟁에서 분기점은 2일 정오경 대구경찰서 접수 이후의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사건이었다. 그 이전에는 좌익과 조직의 활동가들 주도로 파업과 민중들의 항의 시위가 비교적 체계적으로 전개되었지만, 대구경찰서 접수 후 유혈 충돌 이후의 사태는 조직활동가들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일부 젊은 공산당원들은 시위의 선봉에 함께 서기도 하였다. 조직활동가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시위대의 무력 행위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시위대가 경찰관을 집단 폭행하거나 죽인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일제 때부터 조선인들을 괴롭혀 온 친일 경찰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대구지역의 의사모임인 대구부의사회는 경찰에 대한 경고문을 발표해 “첫째, 경관은 시민에게 발포를 중지하라. 둘째, 동포에게 발포한 경관 부상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며 항쟁에 동참했다. 또한 군중들은 부잣집과 과거 친일파들의 가옥을 털어 생필품이나 식량을 가져갔지만, 달아나지는 않고 그것들을 길바닥에 쌓아놓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일반 가게나 은행 같은 곳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대구 항쟁에 대한 당시 대구 시민들의 태도는 전반적으로 이에 적극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금융기관이나 회사의 노동자들은 파업이나 휴업을 선언했고, 심지어 도청 관리들조차 총파업에 들어갔다.

 

경북지역의 인민항쟁

미군의 개입으로 대구에서 시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인근 지역으로 진출하여 지역 주민들과 합세했고 좀 더 먼 지역에서는 소문을 듣고 지역주민들이 일어섰다. 그리하여 2일 밤에서 4일에 이르기까지 항쟁은 경북지역의 몇 개 군을 제외한 거의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와 인접된 달성군 지역이 항쟁의 뇌관 역할을 한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다. 달성경찰서 관내의 9개 지서 가운데 8개 지서가 점거되었으며, 5개 파출소 가운데 3개 파출소가 민중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대구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영천군, 칠곡군, 성주군, 고령군, 경산군, 청도군, 군위군 등은 비조직적이지만 격렬한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몇몇 지역의 예를 들면 영천군에서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 군청, 우편국 등을 습격하고 불태웠으며 군수, 경찰, 관리들을 피살했다. 또한 이에 대한 보복으로 경찰관들과 우익 청년단원들은 봉기 관련자들의 집을 약탈하고 유린했다.5) 칠곡군 왜관지역에서는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시위와 함께 왜관경찰서를 공격해 경찰 4명이 추가로 피살되었다. 항쟁 전의 왜관지역은 미곡수집령에 대한 저항이 매우 심했는데 왜관 주민들의 분노가 어찌나 컸던지 당시 피살된 경찰서장 장석한의 모습이 참혹했다고 전해진다.

 

강력한 좌익세력의 지도아래 조직적인 항쟁을 전개했던 지역으로는 주로 대구 북쪽의 중북부 지역이 해당된다. 선산군(현재의 구미)에서는 좌익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적으로 구미경찰서와 면사무소를 접수하여 이를 인민위원회와 보안서로 바꾸었고 인사배치까지 하였다. 의성군에서는 5,000여명의 민중들이 별다른 유혈사태 없이 경찰서를 비롯한 행정관서들을 장악했다. 좌익세력이 강했던 예천군에서는 사전 연락을 받고 대비했던 경찰과 이들을 포위 공격하려는 민중들 사이에 경찰서를 둘러싸고 교전이 벌어졌다. 영주군, 봉화군에서도 경찰서를 공격하는 민중과 방어하는 경찰이 대치하는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10월 인민항쟁 이전에 이미 경찰의 탄압으로 좌익 세력이 약화되어있고 상대적으로 우익 세력의 통제력이 강한 안동군, 김천군, 영일군, 상주군, 문경군 등에서는 비교적 미약하고 부분적인 항쟁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경북에서는 22개 군 가운데 19개 군인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하였고 약 77만 3,200여 명이 항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항쟁에 참여한 민중들에게 되돌아온 것은 폭력적인 유혈 진압을 통한 잔인한 보복이었다. 수천의 경찰은 물론이고 미군, 심지어 우익청년단(일설에는 3,000여 명 정도)도 진압에 합세하여 항쟁에 참여했던 민중들을 사살・체포했다. 민중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항쟁에 참여했던 사실을 숨기거나 도피6)해야 했다. 야만적인 유혈 진압의 결과 경북지역에서만 수백 명이 사망했고 7,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인민항쟁의 전국적 확산

한편, 항쟁은 경북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경남에서는 10월 7일에서 14일까지 부산, 통영, 창녕, 울산, 마산 등에서 분산적이고 고립적이었지만 대구・경북에 버금가는 격렬한 항쟁이 발생했다. 10월 17일에서 19일 사이에는 충남의 당진, 홍성, 예산 등등에서 항쟁이 발생하였고, 경기 서북부 지역에는 20일에서 22일 사이, 강원도와 전남지역7)에서는 10월 29일에서 11월 초, 마지막으로 전북지역은 12월 8일까지 항쟁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이렇듯 10월 인민항쟁은 1946년 10월 1일부터 12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약 2달 반에 걸쳐 남한의 거의 전역에서 발생하였고,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비극적으로 종결되었다. 정확한 통계가 남아있진 않지만 경찰과 우익 측은 수백 명, 항쟁에 참여한 민중들은 천여 명 이상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월 인민항쟁의 성격 및 의의

항쟁을 통하여 민중들이 가장 많이 요구했던 것은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의 청산이었다. 이 외에 식량과 생활난, 미군정 정책 비판, 좌익인사 구속에 대한 항의와 민주주의 실천 등을 주로 요구하였다. 즉,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위한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지 않고 오히려 미군정의 후원 아래 친일파를 비롯한 기존의 지배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데 대한 민중의 좌절감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식량 문제를 비롯한 생활난은 민중들의 이러한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예나 지금이나 압제자들은 민중들의 정당한 투쟁을 그저 상황에 휩쓸려 겁 없이 날뛰는 무분별한 폭동으로 왜곡하지만, 10월 인민항쟁의 요구를 살펴보면 당시 남한 민중은 자신들의 불만족스러운 처지와 바람직하지 못한 현실을 만들어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일제가 패망하고 난 뒤 극히 짧은 기간이나마 민중 스스로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주적인 독립국가와 민주사회 건설에 매진했던 해방 초기의 경험, 그리고 이후 미군의 진주로 이 모든 희망이 좌절되어 가는 과정은 민중 스스로 나라와 역사의 주인임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좌익세력의 주도가 아닌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경우에도 광범위한 민중의 자각과 구체적인 전망 위에서 출발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민중의 요구는 실현되지 못한 채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지만, 노동자, 민중은 이를 통해 단결의 필요성과 그 위력을 절실히 깨닫고 효과적인 무기들을 창조적으로 개발해냈다. 예컨대 노동자계급은 각개격파를 당하는 쓰라린 경험 속에서 전국적 범위에 걸친 동시적 총파업의 필요성을 체득했고, 그러한 가운데 통신수단이 극도로 미비한 상황을 극복하고 상호 연락체계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봉화와 징소리 등 평소에 익숙한 수단을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나갔다. 그리하여 다음해인 1947년 3월 22일에는 미군정에 항의하는 더욱 통일되고 짜임새 있는 대규모 대중투쟁을 조직하여 더욱 발전된 단결력을 과시하였다.8) 이와 같은 대규모 항쟁을 통해 민중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노/사/과/연>

<참고자료>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한국현대사 이야기주머니, 녹두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돌베게

위키백과

1) 상당수의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2) 황말용, 김종태.

3) 이 사건의 발원지인 대구시청 자리는 오늘날 경상감영공원이다.

4) 대구경찰서, 역 앞, 시청 앞 등.

5) 1,200여 호의 가옥이 전소, 파괴되었고 사망 40명, 중상자 43명, 피해액 10억여 원의 피해를 입었다.

6) 많은 사람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마을로 내려오는 산사람이 되었고, 나중에 이들은 무장 유격대가 되기도 했다.

7) 전남지역은 경남지역과 함께 대구・경북지역 다음으로 격렬한 항쟁이 일어난 지역이다.

8) 1947년 3월 22일 서울, 부산, 광주, 인천, 대구, 이리(현재 익산) 등 주요 산업도시의 노동자 약 20만 명이 ‘테러 배격, 노동조합의 자유보장, 토지개혁, 미소공위재개’ 등을 요구하며 일시에 24시간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에 호응해 농민 16만 명과 시민 8만여 명이 투쟁에 궐기하였다.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0개의 댓글

연구소 일정

2월

3월 2024

4월
25
26
27
28
29
1
2
3월 일정

1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

일정이 없습니다
3
4
5
6
7
8
9
3월 일정

3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4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5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6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7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8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9

일정이 없습니다
10
11
12
13
14
15
16
3월 일정

10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1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2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3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4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5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6

일정이 없습니다
17
18
19
20
21
22
23
3월 일정

17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8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9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0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1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2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3

일정이 없습니다
24
25
26
27
28
29
30
3월 일정

24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5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6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7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8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9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30

일정이 없습니다
31
1
2
3
4
5
6
3월 일정

31

일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