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민주노총 부산본부의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투쟁’

천연옥 | 부산지회장,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1.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투쟁의 경과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운동은 2014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우키시마호 침몰 희생자 합동추모제’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전범재판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을 부산항으로 송환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한국인 피징용자를 태운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는 8월 22일 오전 10시 조선인 7,000여명을 태우고 일본 오미나토 항을 출항해 부산항으로 오던 도중에 8월 24일 갑자기 방향을 틀어 교토부 아이즈루항으로 기항하는 중에 폭발과 함께 침몰하였다. 일본정부의 공식발표는 사망자가 500여 명이라고 밝혔을 뿐 정확한 탑승자 명단과 사고경위는 공개되지 않았고, 사고 후 수년 동안 선체 인양과 유해 수색을 미루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정부에 의한 고의 침몰 즉 폭침이라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는데, 당일 일본 해군들이 조선 사람들을 선실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고는 자기들끼리 보트를 타고 배에서 내렸다고 한다. 이후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배가 두 동강으로 갈라지며 침몰했다고 한다. 당시 배에 타고 있던 조선인의 숫자는 증언자에 따라 다르지만 7,500명에서 12,000명까지 다양하다. 결국 수천 명의 피징용인이 바다에 수장되어서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은 분명하다. 1954년 선체는 인양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고철로 판매해 버렸고, 이 사건은 아직까지 진상조사나 일본 정부의 사과나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지방분권적인 막부체제를 청산하고 도쿄를 중심으로 국왕중심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근대화와 개혁을 추진하여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게 된다. 1889년 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하는데, “제1조 대일본 제국은 천황이 다스린다. 제3조 천황은 신성불가침하다. 제4조 천황은 국가원수로서 통치권을 총괄하며 헌법 조항에 따라 이를 행한다.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제13조 천황은 전쟁을 선언하고 강화하며 제반 조약을 체결 한다.”고 하면서 천황중심의 군국주의 노선을 확실히 하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농민폭동과 무사들의 봉기와 같은 국내의 불만을 해외로 돌리고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쟁탈전에 가장 나중에 참여하는 국가가 된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고 1905년 7월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와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을 미국이, 조선을 일본이 식민지로 하는 것을 합의하면서 미제국주의의 비호 아래 조선을 손쉽게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후 조선 수탈로 만족하지 못한 일본은 1931년 만주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태평양 일대에 유럽의 식민지를 빼앗기 위한 전쟁을 개시했다. 전쟁에 병력으로 동원된 일본 노동자들 대신에 일본 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소동이 바로 강제징용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상징적인 조형물이 바로 강제징용노동자상이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일본으로 강제로 끌고 가 광산・철도건설 등 토목공사, 조선・철강 분야 기업에서 노예적 노동에 종사하게 했다. 일본 내 조선인 숫자는 1910년 무렵에는 1,000명 가량이었으나, 1940년에는 110만명을 돌파해 119만명으로 늘어났으며, 이후에도 매년 증가해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는 1945년에는 무려 236만 5,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 같은 급격한 증가는 당연히 강제연행의 결과였다. 1939년부터 일본 정부는 일본에서 광산과 토목사업을 경영하는 업자들이 조선인을 집단적으로 연행하는 것을 인가했으며, 이에 따라 ‘모집’형식으로 조선인들을 동원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모집이란 말뿐이었고 실제로는 기업의 신청에 기초해 총독부가 조선의 각 도와 군에 동원할 조선인 수를 할당한 후 말단의 면사무소에서는 유지와 경찰 등이 하나가 되어 조선인을 ‘사냥’한 것이었다. 1942년이 되면 이러한 ‘모집’형식조차 조선총독부 각 지방청의 ‘관 알선에 의한 공출’이라는 형식으로 바뀌었으며, 이윽고 1944년부터는 강압적인 ‘징용령’이 시행되었다. 강제연행! 그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동양판 ‘노예사냥’에 다름아니었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 19쪽)

 

“강제징용된 조선인은 공사장에서 군대식으로 편성되어 군대와 같은 규율로 통제되었고 도망을 막기 위해 공사장 주변을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둘러 강제 수용했다. 군사기밀에 관한 공사인 경우 기밀을 지킨다는 이유로 공사가 끝난 후 집단 학살한 예도 있었다. 평양의 미림비행장에서는 징용된 노동자 800여 명을 4년간 혹사시키다가 공사가 끝날 무렵에 집단 학살하였고, ‘천도열도’에서도 5,000여 명의 징용된 노동자를 역시 기밀누설방지를 핑계로 학살했다고 한다. 패망의 길에 들어선 일본 군부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만행은 그야말로 광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유구섬에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 1,700명은 배에 태워진 채 미군의 폭격 앞에 내던져져 전원 사망했고, 이 섬에 미군이 상륙할 무렵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도망 혹은 투항할 것이라 하여 모두 동굴 속에 가두어 학살했다” (강만길,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1984, 37쪽)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전쟁을 벌이기 위해 조선뿐만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진행한 인적, 물적 동원 전체를 강제동원이라고 하는데, 노무자, 군인, 군속, 성노예 등이 다 포함된다. 조선민중의 절반인 780만 명 이상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다고 한다.

 

민주노총 부산본부는 촛불항쟁의 시기에 부산 초량에 있는 일본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우는 데 성공한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우키시마호 침몰 희생자 추모제’를 계기로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운동이 일본과 남과 북에서 동시에 진행되자 적폐청산・사회대개혁 부산운동본부(박근혜정권퇴진 부산운동본부가 박근혜 퇴진 후에 바꾼 명칭)산하에 강제징용노동자상건립특별위원회(위원장은 민주노총 부산본부 사무처장, 집행위원장은 민주노총 부산본부 조직국장, 이하 건립특위)를 설치했다. 2017년 9월 18일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투쟁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2018년 5월 1일 128주년 세계노동자의 날에 소녀상 옆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1인 시위와 모금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포했다. 이후 민주노총 부산본부 소속 노동조합만이 아니라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에서도 활발하게 1인 시위와 모금운동에 동참하였다. 2017년 9월 18일부터 2018년 4월 30일까지 1인 시위는 225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고, 동상제작을 위한 모금은 애초에 8천만 원이 목표였으나, 220개 단체와 개인 8천 여 명이 참여하여 1억을 넘겨 107,360,611원을 모금하였다. 건립특위는 2018년 1월 24일 한일 ‘위안부’합의 무효, 친일분단 적폐청산,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선포대회, 2018년 3월 1일 반일평화대회, 4월 17일은 건립모금완료기자회견, 4월 24일 외교부 앞 규탄 기자회견, 4월 25일 5개 진보정당 공동기자회견, 4월 26일 내정간섭 아베규탄 기자회견, 4월 30일 건립봉쇄 경찰, 동구청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지하철 역사 포스터부착, 출근선전전 등을 진행하였다. “법보다 민심이 우선”이라며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을 막을 수 없다던 부산동구청장은 부적절하다는 외교부 공문시행 이후 태도를 바꾸었다. 4월 말부터 일본영사관 앞에는 대형 화분이 설치되었다가 건립특위의 거센 항의에 철수하기도 하였고, 경찰병력은 꾸준히 증원되었다.

 

건립특위는 당일 설치에 난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전날인 4월 30일 오후 10시 30분경 100여 명의 건립특위 회원들이 기습설치를 시도했다. 수많은 경찰병력을 뚫고 지게차를 동원해 무게 1.2톤의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소녀상과 40m 떨어진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 옆 인도까지 옮기는 데 성공했다. 밤샘농성을 하면서 노동자상을 지켰고, 5월 1일 예정된 128주년 세계노동자의 날 기념 부산노동자대회를 마친 5천여 대오가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대회를 열고 40m를 전진하여 소녀상 옆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건립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4월 24일 아베총리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부산 일본영사관 앞 노동자상 설치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요청했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5월 1일 보도했는데, 그래서 인지 4월 30일부터 5월 1일까지 경찰은 39개 중대 3,000여명이 동원되어 건립특위 회원들을 무차별 진압하여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기도 하였다. 촛불투쟁의 시기 평화의 소녀상 건립 당시, 반대의견을 담은 외교부 공문에 대해 “어느 나라 외교부 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강하게 규탄했던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은 이번 노동자상 건립과정에서는 침묵하고 있었다.

 

건립특위는 5월 3일 폭력진압규탄 기자회견, 5월 4일 동구청 항의방문, 5월 24일 주권침해 일본규탄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촉구 부산시민대회, 6월 4일 강제징용노동자상 불법탈취, 절도행위에 대한 대응계획 발표 기자회견, 7월 4일 강제징용노동자상 반환 기자회견, 8월 15일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 촉구 민주노총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8.15를 기점으로 대규모 집회는 더 이상 계획되지 못하고 강제징용노동자상은 4월 30일과 5월 1일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입은 손상으로 수리하여 현재 모처에 보관중이고 건립 및 철거과정의 경찰의 불법행위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운영위원회 자료에는 강제징용노동 사죄배상투쟁이란 제목아래 제주관함식 욱일기 군함관련 대응투쟁과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항의엽서 보내기, 정의기억연대의 ‘진실과 정의 그리고 기억’ 전국순회전시회 참가가 적시되어 있다.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투쟁은 여러 가지 현안투쟁에 밀려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의 서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주노총 부산본부가 작년 하반기부터 올 상반기 내내 모든 사업을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투쟁으로 집중하면서 이 투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산별연맹과 단위사업장 대표자들, 그리고 노동조합 내 활동가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투쟁을 옹호하는 쪽과 비판하는 쪽 모두의 주장에 동의하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양편향이 존재하는 바, 하나는 민족주의적이고 몰계급적인 경향이고 하나는 계급문제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조합주의, 경제주의의 경향이다. 사실 이 양편향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런 저런 사정상 이제야 부족하지만 시도해 본다.

 

먼저 비판하는 쪽의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의 계급모순에 충실한 투쟁을 민주노총이 전개해야 한다. 민주노총 부산본부가 강제징용노동자상을 건립한다고 역량을 집중할 때 근로기준법이 개악되고 최저임금법이 개악되었다. 평창올림픽 이후 한반도에 부는 평화의 바람은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을 거쳐 판문점선언, 평양선언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패싱당한 일본을 노동자상 건립투쟁이 오히려 살려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노동절은 만국의 노동자의 단결의 장인데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은 너무 민족주의적인 태도 아닌가. 또한 건립 장소를 영사관 앞으로 고집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가 아닌가?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은 민주노총이 할 일이 아니다, 민족주의적인 정당이 할 일이다. 과거의 일을 현안으로 만들 때는 현재의 의미를 살려야 하는데, 전세계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노동을 당하고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있는 현재의 ‘이주노동자’와 연대하는 의미를 살렸어야 했다. 전술적으로 4월 30일 기습적으로 소수인원으로 건립을 시도한 것은 절차적으로 민주노총 부산본부 산별대표자나 운영위원들과 소통 없이 진행되었고, 그런 이유로 대규모 산별 사전집회는 시청, 부산역, 진역 등에서 별개로 진행되었다. 5천명이나 모인 노동자대회 참가 대오는 제대로 경찰과 한번 대치하지도 못하고 맥없이 해산했다.

 

한편 건립특위에서 진행한 수많은 기자회견, 집회 등에서 나온 발언을 보면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우는 것은 전쟁범죄와 주권침해, 내정간섭을 일삼는 일본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운동이고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고 민족의 문제이자 계급의 문제이고 친일적폐를 청산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막아서는 외교부는 친일외교부이고 이것을 폭력적으로 막는 경찰은 친일경찰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8.15집회에서는 한・미・일동맹을 언급했다.

 

2. 제국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레닌은 1917년 4월에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라는 저술을 통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토대로 경쟁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였음을 밝혀냈다. 자본주의 산업이 발달하면 생산의 집적과 독점이 발생하고 은행이 새로운 역할을 하면서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융합으로 금융자본이 형성되고 금융과두제가 발전한다. 경쟁자본주의 단계에서 상품수출이 주를 이루었다면 독점자본주의단계에서는 자본수출이 주를 이루는데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서 존재하는 한 과잉자본은 그 나라 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자본가들의 이윤은 하락할 것이므로-후진국에 자본을 수출함으로서 이윤을 높이는데 이용된다.”(레닌, ≪제국주의론≫, 백산서당, 94쪽)

 

“독점자본가의 단체인 카르텔・신디케이트・트러스트는 먼저 국내시장을 자기들끼리 분할함으로써 자기 나라의 산업을 거의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 국내시장은 필연적으로 외국시장과 연결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세계시장을 형성했다. 자본수출이 늘어나고 대독점 연합체들의 대외적, 식민지적 관계망과 세력권이 확장됨에 따라 사태는 자연스레 이들 독점단체들 간의 연합적 협정으로, 즉 국제카르텔의 협정으로 나아갔다.”(앞의 책, 99쪽)

 

“금융자본의 시대에는 사적 독점과 국가독점이 서로 얽혀 있고, 그것들은 모두 세계분할을 위한 대독점체들 간의 제국주의적 투쟁에서 각기 하나의 고리를 이룰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앞의 책, 104쪽)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독점단계”라고 가능한 한 간결하게 정의하면서 5대 기본적 특질을 포함하는 제국주의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고도의 단계에 달해,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독점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2)은행자본이 산업자본과 융합하여 ‘금융자본’을 이루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금융과두제가 형성된다. (3)상품수출과는 구별되는 자본수출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4)국제적 독점자본가 단체가 형성되어 세계를 분할한다. (5)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지구상의 모든 영토분할이 완료된 발전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이다.” (앞의 책, 122쪽)

 

“식민지는 독점 자본에게 있어서 보물단지와 같았습니다. 식민지는 독점자본이 과잉상품(이것도 역시 제국주의 국가의 민중이 충분히 먹고 입고 쓴 다음 남은 상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수입이 적어 필요하면서도 못 사게 됨으로써 남게 된 상품을 말합니다)을 팔아먹을 수 있는 시장이 되었고, 동시에 원료-고무, 석유, 사탕, 면화, 농산물, 금속 등-를 싸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과잉자본을 투자할 곳이 식민지에는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 국가들은 앞을 다투어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고, 20세기 초에는 아직까지 점령되지 않았던 아프리카가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하여 완전히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조성오 편저, ≪인간의 역사≫, 동녘, 189쪽)

 

제국주의는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 한 국가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확대된 것이다. 일본제국주의는 가장 마지막에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제국주의 열강에 편입되었고, 제국주의 열강간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더욱 더 가혹하게 조선 민중을 수탈해야만 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민족자본가와 노동자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데, 자본가들은 모두 제국주의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상황, 일본인 지주와 친일지주들의 고율소작료라는 상황에서 노동자. 농민 즉 민중이 반제국주의 투쟁, 항일 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이 이미 완료된 식민지를 재분할, 재강탈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소수의 독점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전세계의 인류, 수많은 민중이 죽고, 다치고, 가족을 잃었다.

 

그런데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고, 3.8선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의한 대한민국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가 되어서 오히려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아류제국주의가 된 듯도 하다.

 

껍데기의 화려함과는 달리 실상은 최악의 실업, 민중의 빈곤, 소수 독점재벌에 의한 부의 집중,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인한 군사적 종속, 민중복지를 위한 예산을 깎아서 주한미군방위비분담금을 인상시키고,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무기를 수입해야하는 국가이다.

 

3. 한・미・일동맹은 현재 한국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모습이다.

“미・일은 현대사에서 조선을 침탈한 공동정범이었다. 미국은 이미 1866년 셔먼호 사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이듬해 조미통상조약을 이끌어냈다. 미국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조선은 쇄국정책이 강해서 도저히 침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먼저 침투시켜 길을 들인 다음에 자기들이 본격적으로 침투하는 계획을 짰다. 미국은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해 일본을 앞세운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일본이 항복했을 때, 미국 태평양 사령부의 핵심전력은 한반도에서 수천키로미터 떨어진 필리핀에 머물러 있었다. 소련과의 협의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도 남한에 도착할 시간이 지연되자, 미국은 일본군대와 경찰에게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할 때까지 치안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권오창/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 “한미일 삼각동맹을 위한 역사쿠데타”, 2015.12.10.)

 

미국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미군정 3년은 일제치하에서 조선독립을 준비해온 세력을 소탕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조선민중을 학살하면서 이승만 친미정권을 수립하고 물러났다. 300만 명이 희생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군산복합체 산업은 더욱 비대해 졌으며, 전후 복구건설 시기 큰 혜택을 보았다. 1953년 한국을 제외하고 북, 중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한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주한미군 주둔과 그에 따른 주한미군지위협정을 부속합의하여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정착시켰다. 미국은 CIA를 통해 전세계 약소국의 민중봉기를 탄압하고 친미정권을 수립한 것처럼 이승만독재에 항거한 4・19를 짓밟는 박정희 군사쿠데타를 지원했다.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쟁에 개입하면서 한국과 일본에 압력을 가하여 한일국교정상화를 획책하였고, 그 결과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기본조약이 도쿄에서 타결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곧바로 연인원 30만 명을 베트남에 파병하였고,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은 5,000여 명이 전사하고, 4만 명 이상의 베트남 민중을 학살하고, 미군의 고엽제 살포로 인해 참전자 다수가 고엽제 피해자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10・16 부마민중항쟁으로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를 암살하는 데 개입했고,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군의 협조 하에 전두환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80년 민주화의 봄을, 광주민중을 학살하면서 정권을 유지했다. 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가 무너지자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역대 정권의 교체 속에서도 한・미・일 군사동맹은 북을 공동의 적으로 두고 착착 진행되어 왔다. 국가보안법이라는 파쇼악법과 국정원(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로,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명칭만 변경)이라는 파쇼기구가 그것을 지탱시켜주는 커다란 무기였다.

 

“쏘련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북에 대한 미국의 압박도 커져 체제붕괴를 시도했으나, 북은 고립 속에서도 붕괴되지 않고 핵과 미사일 능력을 강화시켜왔다. 미국은 한・미・일 삼각동맹에 기반, 한국군이 지상전을 담당하고 일본군과 미군은 후방지원을 담당하는 취지로 입안된 2015년 8월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을 하였다. 미국은 한국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배치하고, 일본 자위대가 신속하게 한반도 작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일본 평화헌법을 개정하는데 반대하지 않으며, 일본의 군국주의 흐름을 부추기고 있다. … 1965년 박정희가 미국의 지원 하에 한일회담을 성사시켜 베트남 전쟁을 치르던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제 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겠다’고 말했다.” (권오창/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 “한미일 삼각동맹을 위한 역사쿠데타”, 2015.12.10.)

 

이런 김종필이 얼마전 사망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박근혜정부 시절에 이루어진 한일위안부 합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배치 등이 문재인정부—한일위안부합의에 의한 화해・치유재단에 대한 해산 발표가 11월 초에 공식적으로 된다는 점만 제외하고—에서도 그대로 철회되거나 폐기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언론에 “한・미동맹은 굳건히 지켜야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동맹이 아니며 한・미・일 군사동맹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했지만, 현실은 미국을 매개로 한 한・미・일 혹은 한・일 양국 간의 군사협력은 오히려 확대, 심화되고 있다. 꽤 오래전부터 한・미・일은 미국을 매개로 공동군사작전을 위한 훈련을 해왔고, 다국적 공동훈련에서 한・미・일 3국의 군사훈련을 별도로 실시하고 있는 것도 수차례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한반도 긴장국면에서 미국의 전략폭격기, 항공모함 등 전략자산이 한반도에 전진 전개될 때 이미 한・미・일 3국의 해・공군이 공동군사훈련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준규, “동맹으로 진화중인 한・미・일 관계-공허한 논란으로 실상은 은폐”, ≪통일뉴스≫, 2017.11.21.)

 

미국은 북・중・러와 대치하는 동북아에서 한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일본을 활용한다. 실제로 일본이라는 활에 한국이라는 화살을 꽂아서 북을 향해 쏜다는 작전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을 움직여 한일협정을 체결하게 하고, 박근혜 정권을 움직여 한일위안부합의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게 하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어느 정권이라도 미국의 군사적 의도를 거스를 수가 없다.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부는 현재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굳건한 한・미동맹에 의거 미군철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치, 군사적 흐름의 물적 토대는 미・일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이해를 같이하는 한국의 독점자본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한국 독점자본의 우파정권이라면, 노무현, 문재인 정권은 한국 독점자본의 좌파정권이다. 경찰이 친일경찰이고, 외교부가 친일외교부여서 일본영사관 앞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막은 것이 아니다. 한・미・일 동맹에 기반해서 한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문재인 정권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고 선택이다.

 

4.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투쟁의 올바른 평가를 위하여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투쟁은 민족주의적이고 몰계급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현재의 한반도 분단 지배질서의 본질인 한・미・일 동맹, 이것의 본질을 폭로하고, 문재인 정권은 한・미・일 동맹의 한국의 파트너인 한국독점자본의 좌파라는 성격을 폭로하고, 문재인정권은 미제국주의와 일본제국주의가 그어놓은 질서를 벗어나서 행동할 수 없음을 폭로하자. 왜 사드를 철수할 수 없는지, 왜 반노동자적인 법개악을 진행하고 있는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불법파견을 버젓이 진행하고 있는 현대, 삼성의 독점자본가들과 노조파괴에 앞장서는 자본가들을 왜 처벌하지 않는지를, 왜 전교조 불법노조 취소 거부에서처럼 노조할 권리를 부정하고 있는지를 함께 묶어서 투쟁했어야 했다. 선량한 시민으로,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과거의 식민지 역사를 제대로 바로세우기 운동을 하는 것마저 폭력적으로 진압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민주노총 부산본부 전 조합원에게 제대로 교육했어야 했다.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투쟁은 계급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은 한국사회의 신식민지적 성격을 부정하고 한국을 실제로 지배하는 세력이 한국의 자본가라는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라면 계급문제를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으로만 협소하게 이해하는 경제주의, 조합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투쟁은 현재의 한국사회를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본질인 한・미・일 동맹을 폭로하고 문재인 정권의 성격을 폭로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고 본다. 그러나 이 투쟁이 민족주의적이고 몰계급적으로 흐르면서 그 투쟁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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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옥 부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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