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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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영 | 회원

이 달의 역사에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다루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주제였다. 왜냐하면 이를 제대로 다루려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분석과 해방 직후 이들의 움직임과 갈등, 또한 신탁통치, 미소공위 등을 고려한 국제 정세, 그 속에서의 민중의 저항과 그것을 교묘히 이용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까지 이어서 써야 기승전결이 맞는 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호 이달의 역사에서는 해방 후 건준의 결성과 해산, 건준을 모체로 한 인공의 결성과 실패까지의 시기를 다루는 것으로 하여 마음의 부담을 덜고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지만, 막상 그날은 해방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15일 오전, 서울 시내 곳곳에 “본일 정오 중대 방송, 일억 국민 필청(必聽)”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것을 유심히 지켜 본 사람도 많지 않았고, 12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일본 천황의 방송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또한, 라디오를 가진 한국인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해방을 실감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8월 16일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의 결성을 알리면서 부터였다. 그날, 위원장 여운형은 서울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부위원장 안재홍은 경성방송을 통해 치안권 인수와 건준의 결성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연설에서는 경위대(警衛隊)와 정규군 편성, 식량 확보, 통화 및 물가 안정, 정치범 석방 등이 언급되었다. 사실, 일본은 전황이 점점 불리하게 전개되고 패전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조선에 살고 있는 일본인의 재산과 안전을 크게 염려하였다.1) 이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했던 엔도 류사쿠는 조선에서 신망이 높은 여운형2)을 만나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교섭을 시도해 왔고3),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1.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4)

2. 조선의 수도인 경성에 3개월(8, 9, 10월)분의 식량을 확보하라.

3. 치안의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마라.

4. 조선의 추진력인 학생들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을 하지 말라.

5. 조선 내 각 사업장에 있는 일본 노무자들을 우리 건설 사업에 협력시켜라.

총독부는 이러한 조건들을 주저 없이 수락하였고, 여운형은 일본이 항복하자 바로 8월 15일 저녁에 안재홍을 비롯한 건국동맹 위원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건국동맹은 여운형이 1년 전인 1944년 8월에 일본의 궁극적인 패망을 확신하면서 결성했던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다. 건준의 산하단체로는 치안확보를 위한 건국치안대, 식량 확보와 보급을 위한 식량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 이들의 활기찬 활동으로 민중은 나라를 되찾았다는 해방의 기쁨을 더욱 실감하였다. 

 

건준의 성격 및 활동

 

건준은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 8월 말에는 북으로 함경북도 회령부터 남으로 제주도까지 145개의 지부가 조직되어 전국의 치안・행정권을 장악하였다.

건준의 인적 구성은 친일파・부일협력자 등을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한 민족연합전선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언론인, 지식인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방유지, 지주까지 참여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익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까지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가 물러나는 과정에서의 혼란한 질서를 바로잡고 일제에게 빼앗긴 조선의 재산을 지키는 부분에서 광범위하게 이해가 일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건준 지부는 각 지방에서 자치적으로 치안을 확보함과 동시에 각종 시설과 기계, 자재, 자본 등이 함부로 버려지거나 또는 일본인이 가져가는 것을 막고, 그것을 인수하여 보존・관리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으며, 식량조사위원회를 통해 식량 조사와 대책을 강구하였다. 전남 지방의 예를 들어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남의 토착적인 활동가들은 1945년 8월 17일에 건준 지부를 설치했고, 18일에는 1400여 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그 이후 곧바로 치안대가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0월 중순 광주는, 일본에 대한 ‘불순행위’로 11년간 옥살이를 하고 석방된 김석의 지도 아래 약 300여 명의 치안대와 학생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중략…약 147명의 치안대원이 목포를 지배했는데 그곳에서는 ‘노동자위원회’가 몇몇 공장을 접수하였다. 인민위원회5)(건준이 인공으로 개편된 후의 건준 지부를 지칭함)는 모든 군에 존재했으며, 어느 미군 관찰자에 따르면, 거의 모든 군에서 통치기능도 행사했다고 한다.6)

이렇듯 건준 지부(인민위원회)는 당시 민중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와 신뢰를 받고 있었다. 특히, 건국치안대는 학도대, 청년대, 자위대, 노동대 등을 흡수 통합해 전국적으로 162개의 지부를 둔 단일한 체계의 건국치안부로 공식 출범하였다.7) 이에 따라 해방 직후 혼란했던 질서는 빠르게 잡혀갔고 민중 스스로 사회개혁을 위한 적극적 조치들을 끊임없이 취해나갔다. 대부분의 공장에서 노동조합이 신속히 결성되었고 조합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해 자주적으로 관리해나갔다. 또한 농민들은 모든 곳에서 농민조합을 결성한 뒤 일본인들과 친일지주들로부터 빼앗긴 토지를 되찾거나 소작료 인하를 단행했다. 이렇듯 민중에 의한 진정한 지방 자치가 실현되어 가는 가운데 자주적 독립 국가 건설이 서서히 눈앞에 다가오는 듯 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이름 그대로 국가 탄생을 위한 초기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음 단계는 당연히 통일된 독립 국가의 건설을 위한 수순을 밟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선포와 건준의 해산

 

9월 6일, 건준은 급히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의 건설을 선포하였다. 해방 3주 만이었다. 이처럼 서둘러 정부를 구성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군의 상륙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9월 2일, 곧 미군이 진주하여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돕는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비행기로 서울시 일원에 발포되었고, 9월 6일에는 미군선발대가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여 조선호텔에서 일제와 예비교섭을 시작하였다. 이미, 미국은 해방 직후 일본에게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모든 체제를 변경하지 말고 계속 유지하되, 정식 항복할 때 일본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게 인계하라”고 통고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일본은 8월 18일 여운형이 이끄는 건준에 약속했던 통치권 이양을 번복하고 인계했던 신문사와 학교 등을 다시 접수하였다. 따라서, 여운형은 미군 상륙 시 어떤 형태로든 정부가 있어야 미군의 직접 통치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정세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즉, 우리가 주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연합군을 맞이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둘째, 조병옥과 송진우 등을 중심으로 발족한 임정추대운동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임정추대운동에는 일제 말 침묵을 지켰거나 친일행위를 한 자들이 다수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 불순한 집단이 주도하는 임정을 중심으로 정부가 구성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운형은 그동안 임정이 한 일이 별로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즈음 다수의 우익 인사들이 건준에서 빠져나갔고, 부위원장인 안재홍도 사퇴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운형은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이틀 전인 9월 6일에 인공의 창건을 이끌어냈다. 인공의 출범으로 10월 7일 건준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각 지방의 건준 지부는 일찍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어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 무렵 국내 정치는 식민지 시기 친일활동을 했던 우익보다는 주로 좌익세력이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인공 또한 그러한 분위기 속에 민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인공의 결성과 세력 갈등

 

인공은 중앙의결기관으로, 55명으로 구성된 중앙인민위원과 20여 명의 후보위원, 12명의 고문을 선출하였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서 정부를 조직하고 내각까지 구성하였다. 각료명단에 들어가 있는 인사들을 살펴보면 완전한 균형을 이루지는 못했더라도,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적절해 배분하여 모든 정치 세력을 망라하여 연합하였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8) 이승만과 여운형이 주석과 부주석을 나누어 맡고 허헌이 국무총리로 선임되었으며, 그 밖에 걸출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책임이 있는 부서에 선임되었다.9) 그러나, 충칭 임시정부의 서울 귀환이 어려워지면서 좌익 인사들이 연합정부에 대거 참여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10), 이런 이유로 인공이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주의계열에 의해 지배되어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인공의 정강11), 선언, 시정 방침 등은 건준의 정강, 선언과 유사하고 중요한 대목은 문장까지 같은 곳도 있으며 톤도 비슷하다. 또한 인공의 시정방침 27개항12)도 토지문제를 포함하여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내용13)보다 모두 온건한 것들이었다. 이는 박헌영 등 좌익세력이 인적 구성에서 다수를 차지하긴 했지만 건준을 모체로 한 인공의 기존 성격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며 전적으로 이들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당시 박헌영 등 공산주의계열은 인공 결성을 위해 정치노선에서 상당한 양보를 한 것이다. 따라서, 인공은 박헌영과 여운형과의 타협의 산물이었으며, 내용면에서 급진적 좌파의 것을 따랐다고 보기 어려우며 건준의 중도좌파적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형은 인공과 거리를 두게 되고, 이에 따라 결국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이 인공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여운형은 인공을 창건하긴 하였지만 정부부서 발표는 보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가 주인으로서 연합군을 맞이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건준보다 한 단계 높은 조직을 혁명적 비상수단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석(대통령) 등과 같은 정부부서까지 두는 것은 반대하였다. 여운형의 임정과의 거리 두기에는 이와 같은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두 차례의 테러14)로 중상을 입고 몇 차례 회의에 불참하게 되는 과정에서 인공은 자신의 뜻과 다르게 9월 14일 정부부서를 발표하게 되고, 이에 여운형은 크게 실망하여 이후 인공과 거리를 두게 된다. 또한, 제1차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으로 추대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이승만은 귀국 후 10월 22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인공의 주석으로 추대된 것은 모르는 일이며 취임하겠다고 호의를 표한 적도 없다고 밝혔으며, 11월 7일에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주석직을 거부하였다. 뒤이어 귀국했던 김구와 김규식 또한 11월 28일에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인공과 이야기가 오고간 것이 없었다며 관계된 것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 정치 세력의 갈등을 무색하게 하는 거대한 무장 세력이 국내의 정치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미군정의 정책과 인공의 분쇄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하면서 발표한 포고문의 내용을 보면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태도는 해방자라기보다 정복자에 가까웠다. 포고문에는 한국의 해방을 축하하는 구절은 전혀 없고 오로지 미군의 직접 통치에 대한 복종과 강요, 저항에 대한 경고가 담겨있었다.15) 결국 미군 사령관 하지는 10월 10일 그동안 국내에서 치안,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건준’과 ‘인공’, 심지어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불법으로 간주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미군정은 주둔 후 남한의 혁명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뜻에 맞게 남한의 사회질서를 만들려는 정책을 펴나는 과정에서 일제 식민지배에 협력했던 친일관료, 식민경찰, 일제군인 등 반민족적 인사를 군정청에 고용하였다. 또한, 친미적이거나 영어를 할 줄 아는 지주 출신의 보수적 인사들을 행정고문이나 군정관리로 들어 앉혔다. 이로써 친일행각 때문에 숨죽여 지내던 친일파들이 미군정의 보호아래 힘을 얻게 되었고 또다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16)

미군정의 이러한 태도로 국내 정치 상황은 더욱 복잡한 혼돈 상태에 놓이게 되고, 민중의 지지를 크게 받고 있었던 인공 및 인민위원회 내의 좌익 세력은 그 반대 세력과 미군에 의해 오랫동안 집요하게 제거되어 가며 북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며 실패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인공의 실패와 다양한 시도

 

박헌영은 여운형이 인공과 거리를 둔 이후로도 인공을 통해 노동자・농민이 중심이 된 인민정부를 세우려 이승만, 임정 등과 정치 협상을 벌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승만은 ‘선 통일 후 친일파제거’를 협상의 원칙으로 내세웠고, 임정은 인공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인공이 임정 밑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하였다. 모크스바 삼상회담 뒤 인공은 인공과 임정을 함께 해체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했으나, 임정은 서식상의 이유로 이 제안도 거부하였다. 한편, 여운형은 노동자, 농민, 근로 인텔리, 양심적 자본가 등을 포괄하는 대중적 국민정당인 조선인민당을 결성하여 좌우합작 운동을 계속해서 펼쳐나갔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의 지지를 받았으나 미군정은 중도좌파와 우파만을 좌우합장의 대상으로 삼고 조공과의 분열정책을 펴나갔다.

미군정은 인공을 하나의 정당으로 등록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인공은 이를 거부한 채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격노한 미군정은 앞으로 통치권을 주장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수하를 막론하고 무력을 동원해 분쇄하겠다고 언명했으며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인공은 그렇게 간단히 미군정에 의해 부정되었고 무력에 의해 분쇄되었다. 이후 그 세력은 1946년 2월에 발족한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집결하였다.

 

 건준의 의의와 한계

 

건준은 해방 직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해방 당시 국외 독립운동 세력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연합국의 정책 때문에 빨리 입국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구, 김규식을 수반으로 한 임정은 중국 중경에 있었고, 김두봉을 대표로 한 조선독립동맹은 중국 연안에 있었으며, 만주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은 쏘련의 하바롭스크 부근에 있었다. 건준이 조직되어 국내 곳곳에서 활동을 한 덕분에 한반도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고, 민중 자치 조직이 성장할 수 있었다.

1945년 광복직후부터 미군정의 입성시기까지 인민위원회는 전국적으로 상당한 신망과 지지를 받고 있었다. 여러 정치 세력의 갈등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중앙인민위원회와 달리 지방의 인민위원회 경우는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1945년 말까지 실질적인 국가 기관처럼 활동했다. 예를 들어 중국, 쏘련, 일본 등지에서 귀환해 온 동포들을 맞이해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주고 아직 철수하지 않은 일본군경을 견제하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에드거 스노 기자는 해방 후 조선에 와서 2개월간 머무르면서 정세를 알아보고 귀국한 뒤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고 한다.

“미국은 아무 준비가 없이 조선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다. 곧 정치적 준비가 있었다. 미국인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미국은 처음부터 건준을 살릴 생각이 전혀 없었고 조선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미국의 속셈을 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또한, 미국과 쏘련이라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양 정치세력의 충돌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다.

건준의 활동은 남북 모두에서 진행되었지만17), 당시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 서울에서 활동하였고 여운형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이남과 이북의 서로 다른 조건 속 여운형과 조만식의 건국사업은 통합의 길로 가기 어려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고 쏘련과 미국을 어떻게 대하고 이용해야 우리에게 유리한 지에 대한 계획이 미흡했다. 특히, 북으로 들어오는 쏘련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마지막으로,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건준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데, 여운홍의 이러한 악의적인 논리가 인터넷이나 여러 책자에서 떠돌고 있기에 다시 한 번 이에 대해 언급을 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여운홍은 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 9월, 인공으로 개편되는 과정에 대해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으며, 형님(여운형)에게는 박헌영 등 극렬 공산주의자와 손을 끊지 못하고 건준이 좌경화되어 이용당한 것이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운형이 인공 개편을 결심한 것은 박헌영에게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시 급박한 정세 판단 속에서 결정한 사항이었다. 또한, 여운홍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조목조목 따져볼 가치도 없는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그는 일제 강점기 잠시 독립운동도 하고 해방 후 형과 함께 건준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일제 말에는 변절하여 부일협력을 하고18), 단독정부 수립 후에는 자유당 선전부장을 지내기도 하며 시대 상황에 따라 권력에 협력하는 삶을 살았다. 생애 후반기에는 자민당을 거쳐 민주공화당 고문 등을 역임하고, 윤치영과 함께 박정희 공화당 총재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참고자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웅진지식하우스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서중석, 돌베게

강좌 한국근현대사, 역사학연구소, 풀빛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박세길, 돌베게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서대숙, 이론과 실천

위키백과, 다음백과

<노/사/과/연>

 


1) 실제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은 패망하였으나 같은 시간 쏘비에뜨 연방은 청진시에서 일본 제국과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에 일본은 쏘련이 곧 경성까지 내려와 점령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서둘러 교섭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2) 1945년 11월 선구회라는 단체에서 해방 후 첫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선구회의 여론조사는 아직 해외 지도자들이 국내에 모두 들어오지 않고 좌우 대립이 본격화되지 않은 시점에서 실시되었기 때문에 해방직후 정치가들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를 알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로 1위 여운형, 2위 이승만, 3위 김구, 4위 박헌영, 5위 김일성, 6위 김규식 순인데 이는 다른 항목들에서도 비슷한 순위를 보였다.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로 대통령 이승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여운형, 재무부장 조만식, 군무부장 김일성, 사법부장 허헌, 문교부장 안재홍, 경제부장 백남운, 교통부장 최용달, 노동부장 박헌영이 다득표하였다. 여론조사를 실시한 선구회가 우파성향의 조직임에도 내각 명단에 추천된 인물 중 6명이 좌익, 4명이 우익이었으며 한민당은 단 한 명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이는 당시 한민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를 잘 보여주는 결과이다.

3) 엔도 정무총감은 민족주의 계열인 송진우에게 치안권과 행정권 인수를 먼저 제의(8월 11일)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8월 15일 서울 필동에서 여운형을 만나 조선의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하였다. 여운형이 총독부와 교섭을 한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에 조선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떠난다든가 아니면 반대로 민중 내에서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이름으로 사적인 감정에 기인하여 마구잡이식 보복성 살인이 일어나고, 이러한 사회 혼란을 틈타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피해를 입을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이미 1년 전 조직되어 있던 건국동맹 활동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4)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정치범(독립운동가)들을 바로 석방시키고 건준에 편입시켰다. 또한, 우익의 지도자인 송진우도 들어올 것을 권했지만, 그가 거부했다고 한다.

5) 지방의 건준 지부는 인공 건설 후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조직부, 선전부, 치안대, 식량부, 재정부 등을 두었으며, 지역 특성에 따라 보건 후생, 귀환 동포, 소비문제, 노동관계 등을 다루는 부서가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건준과 마찬가지로 여러 계층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민중권력기구였으며, 그 중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민중이 선출한 대표로 구성되며 위원회가 입법・행정・사법 등 모든 통치권한을 행사한다. 둘째, 각급 행정단위, 예컨대 도・군・면의 통치기관은 중앙에서 하향적으로 선정되지 않고 해당 인민위원회가 독자적으로 구성한다. 즉, 지방자치의 원칙이 관철되는 것이다. 셋째, 계급별 구성이 아닌 지역별 구성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그 구성에 있어서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포괄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지역은 부유한 우익 인사가 인민위원회를 이끄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6)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하, 김주환 옮김, 청사, p. 141.

7) 서울 풍문여고에 사령부를 두었다.

8) 이때 선출된 간부들의 총 명단을 보려면 ≪조선해방연보≫ 1946, pp. 80-106. 참조하면 된다.

9) 민족주의자로 김구, 김규식, 김원봉, 김병로, 조만식, 신익희, 김성수 등이, 공산주의자로는 김철수, 강진, 이승엽, 이정윤, 홍남표, 무정, 조동우 등이 선임되었다.

10) 55명의 중앙인민위원의 인적 구성은 민족주의자 9명, 여운형계의 중도좌파가 10명 내외로 이들을 제외한 약 2/3정도가 공산주의자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박헌영계의 재건파 공산당 계열이었다. 「위키백과

11) 인공의 4개조 정강

    1.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 세력을 일소하고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충실하기를 기함.

    3. 노동자・농민과 기타 대중 생활의 급진적 향상을 기함.

    4. 세계민주주의의 일원으로 상호 제휴하며 세계평화의 확보를 기함.

12) 인공은 일제의 법률제도 즉시 폐지, 일제와 반역자의 토지 몰수와 무상 분배, 독립국가 건설, 사회경제 개혁, 우방과의 협력, 노동자・농민계급 생활의 급진적 향상, 일제・봉건적 잔재 일소 등 27개 조항의 시정 방침을 중요한 정책으로 제시하였다.

13) 조공의 일명 ‘8월테제’로 알려진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에서 밝힌 정치노선과 비교해볼 때 급진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14) 여운형은 총 11차례의 테러를 당하게 되고, 결국 12번째 테러를 피하지 못하고 암살당하게 된다. 암살자의 배후로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게 떠돌았는데 미국, 이승만, 김두한 등 우익청년들이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그 배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5) 포고문 제2호에는 “조선인으로서 포고명령을 위반한 자는 사형 등의 엄벌에 처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9월 8일 미군은 미리 일본 군경을 동원해 한국인들에게 일체의 외출을 금지하게 했는데, 많은 시민들이 ‘해방군’인 미군에 대한 반가운 마음으로 이들을 환영하고자 외출했고, 결국 경비구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의 총격을 받아 상당수가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이 사건을 정당한 공무집행으로 처리하며 일본경찰을 두둔했다.

16) 1946년 기준 군정경찰의 경우, 경위 이상의 간부 82%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17) 북한 지역에서 주도한 지도자는 고당 조만식이었다. 조만식은 평양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도 ‘비폭력적이면서도 비타협적인 노선을 견지한’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18) 일제 말기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다. 그 해 12월 이광수, 김동환 등과 함께 시국강연에 1차례 나섰으며, 이 시국강연에서 연설한 내용이 잡지 삼천리에 1942년 1월호에 게재되었다. 이어 1942년 2월호 조광에 내선일체 지지하는 내용의 논문 등을 기고했다. 그 해 12월 매일신보사에서 주최한 ‘대동아전쟁의 전망’좌담회에 참석했다. 1943년 11월 ‘임시지원병제도익찬위원회’가 경성부 종로지역의 지원병제도 홍보와 권유를 위해 주최한 가정방문 계몽행사 실행위원을 맡아 고원훈, 이광수, 조병상, 한상룡 등과 제2반 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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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Sep 12th, 2018 | By | Category: 2018년 8/9월호 제145호, 정세와노동, 회원마당 | 조회수: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