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앞이 낭떠러지다! – 전교조와 공무원노조의 현안,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권과 관련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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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자 단결금지법 (1)

“자본가 단결금지법”! ― 이런 걸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본가 국가에 그런 것이 있거나 있었다는 얘기를 말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자본가 국가에 그런 것이 있지도 않으며, 있었던 적도 없고, 있을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노동자 단결금지법”은? ― 연이어 어이없고 생뚱맞은 질문만 해대고 있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역시 들은 바, 아는 바가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들은 바, 아는 바가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노동자들이나 소부르주아들, 시정의 장삼이사(張三李四)라면, 이는 물론 자본가 국가가 인민에게 강요하는 무지몽매 탓이다.

다시 그런데, 배움 꽤나 있다는 부르주아 지식인들이나, 무언가 비열하고 음흉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눈에 불을 켜고 무언가를 찾고 있는 자본의 사냥개들 역시 그렇게 대답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인민에게 강요하고 있는 무지몽매의 첫 번째 희생자들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이없고 생뚱맞게 들릴지라도, ‘노동자 단결금지법’ 그것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것도 전형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는 영국에서! 공식적으로는 1799년부터 1824년까지. 그러나 실제로는 1360년, 그러니까 14세기부터 ‘단결금지법’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1825년 이후에도 여러 형태와 이름의 법률들과 규정들로! 예컨대, 맑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360년의 한 법률은 형벌을 더욱 강화했고, 심지어 육체적 강제를 통해서 법률이 정한 임금률로 노동을 강탈할 권한까지 고용주에게 부여하였다. 벽돌공과 목공이 서로 연합하는 결사, 계약, 서약 등등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노동자들의 단결은, 14세기부터 노동자 단결금지법이 폐지된 1825년에 이르기까지 중범죄로 취급되었다.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767 [칼 맑스, ≪자본론≫, 제1권(2), 백의, 1990, p. 924])

단결을 금지하는 잔혹한 법률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적인 태도 앞에서 1825년에 폐지되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부분적으로만 폐지되었다. 구법률들의 몇몇 아름다운 잔재는 1859년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S. 768; [p. 926])

자본주의의 생성ㆍ발전의 노정에서 여러 형태의, 그러니까 노골적인, 혹은 가장(假裝)되고 은폐된 노동자 단결금지법이 영국에만 있었던 건 물론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 그것의 생리상 오히려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들 전체에 편재(遍在)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이 세상에는 비뚤어진 ‘비판정신’의 소유자들이 적지 않아서 혹 공연(空然)한 트집을 잡고 나설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 같아 두 가지만 덧붙이자면,

첫째로, ‘맑스의 얘기일 뿐이지 않으냐?’고 묻고 나선다면, 맑스의 저작들은, 특히 그의 대표적 저작인 ≪자본론≫은 그것(들)이 이 세상에 등장하면서부터 자본가적ㆍ소자본가적 ‘이론가’ㆍ‘문필가’ㆍ‘교수’ 등등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퍼부어지기 시작한 불[火]의 시험을 조그만 상처 하나 받지 않고 통과한 저작(들)이다. 그만큼 완벽하게 사실에 입각해 있고, 치밀하게 논리적이다.

둘째로는, 혹시 누군가가 ‘자본가 단결금지법’도 존재하는 것 아니냐? 예컨대, “공정거래법상의 ‘담합’ 금지가 그것 아니냐?”고 묻고 나선다면, ‘담합금지’는 어디까지나 담합금지일 뿐이지, 자본가들의 단결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오히려 자본가들이 단결하여 자본가들끼리의 ‘공정한’ 경쟁의 룰(rule)의 위반을 제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 비해서, 노동자 단결금지법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독재, 즉 부르주아 독재이다.

 

2. 노동자 단결금지법 (2)

자, 그러면 이 나라,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그것을 (자유)민주주의라고 주장하면서 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며,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기만ㆍ협박하고, 체포ㆍ구타ㆍ고문하고, 사형이라는 형식을 통해 공식적으로든, 은밀하게든 살해했던 인간(집단)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파쇼체제였다고 인정하는, 아니 그들의 일부조차 이제는 독재체제였다고 인정하는,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 등으로 이어지던 시대는 논외로 하자. 그리고 ‘민주화’되었다는 이 시대를 묻기로 하자.

자, 그러면, 이 시대 이 나라, 한국에 ‘자본가 단결금지법’, ‘노동자 단결금지법’은?

앞에서도 확언했지만, ‘자본가 단결금지법’ 같은 것은 물론 있을 리, 있을 수가 없다. 당연히 설명 불필요!

그러나 ‘노동자 단결금지법’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물론 “(노동자) 단결금지법”이라는 명칭의 ‘노동자 단결금지법’이 있을 리는, 그리고 있을 수는 없다. 이 나라 한국의 노동자계급의 힘이, 그 정치의식이 아무리 미약하고 저급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노골적 법률을 허용할 시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저 치떨리던 박정희의 ‘유신독재’나 전두환의 학살독재조차, 믿거나 말거나 식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민주주의라고 강변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그러면?

여전히, 아니 박근혜 대통령님의 정권하에서 최근 부쩍 더 맹위를 떨치고 있는 파쇼악법, 국가보안법은 차치하기로 하자. 그러고는, 그 “제1조”에서 “이 법은 헌법에 의한 근로자의 단결권ㆍ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보장하여” “…함을 목적으로 한다” 운운하고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을 이 글의 문제의식과 관련된 한에서만 보기로 하자. 이 노동조합법이야말로 전형적인, 그러나 물론 가장된 ‘노동자 단결금지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법은 사실상 ‘파업금지법’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다.)

이 법 제1조에서는 방금 본 바대로, “근로자의 단결권ㆍ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보장하여” “…함을 목적으로 한다” 운운하고 있다. 그리고 제2조에서는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며, 그 1에 이렇게 써놓고 있다. “‘근로자’라 함은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ㆍ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를 말한다”라고.

여기까지는 그럴 듯하다.

그런데 왜 “그럴 듯하다”고 평가하느냐고?

무엇보다도, 명색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라면서, “노동자”라는 용어 대신 “근로자”라는 용어를 일관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도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고도의 심리공작을 위해서 그렇게 쓰고 있음에 틀림없다! (물론 자본의 정신에 따라 노동자를 생산수단 취급하는 “사용자”라는 용어도 흥미롭지만, 이 역시 오늘의 주제가 아니다.)

아무튼 그럴 듯하게 시작되었던 법률이 성급하게도 불과 몇 줄 아래로 가면 일변하여, 그 마각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즉, 제2조의 4를 옮기면 이렇다.

4. “노동조합”이라 함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역시 ‘노동조건’이 아니라 ‘근로조건’이다!: 인용자]의 유지ㆍ개선 기타 근로자[역시 ‘노동자’가 아니라 ‘근로자’이다!: 인용자]의 경제적ㆍ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를 말한다. 다만, 다음 각목의 1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 한다.

가. 사용자 또는 항상 그의 이익을 대표하여 행동하는 자의 참가를 허용하는 경우

나. 경비의 주된 부분을 사용자로부터 원조 받는 경우

다. …

라.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다만, 해고된 자가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의 구제신청을 한 경우에는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판정이 있을 때까지는 근로자가 아닌 자로 해석하여서는 아니 된다.

마. 주로 정치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여기에 이르면, 부르주아 국가의 (노동)법이 무엇인가를 차치하더라도, 저들 자본과 그 권력이 법률을 어떻게 농단하고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가 보인다.

법에 의하면 “‘노동조합’이라 함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ㆍ개선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ㆍ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이다. 먼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라는 너무도 당연한(!) 구절부터 주목하자.

그러면, “사용자 또는 항상 그의 이익을 대표하여 행동하는 자의 참가를 허용하는 경우”, 그리고 “경비의 주된 부분을 사용자로부터 원조 받는 경우”, 그러한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가 노동조합이 아닌 것은 그것들을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 하기 전에 노동조합의 정의 그 자체로 자명하다. 그리하여, 참으로 지당한 입법!

그런데, 수상하다.

이 사회, 이 세상에는 ‘노동조합’이랍시고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사용자 또는 항상 그의 이익을 대표하여 행동하는 자의 참가를 허용하는 경우”, 아니 그런 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이 허다하고, “경비의 주된 부분을 사용자로부터 원조 받는 경우”, 아니 그 주요 간부들의 심지어 온갖 방탕한 생활의 경비까지 “사용자로부터 ‘원조’ 받는 경우”가 허다한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축에도 끼지 못하고, 그저 공공연한 사실일 뿐이다. 갖은 색조로 득시글거리는 어용 노조들!

그런데 누구든 머리털 나고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러한 ‘노동조합’들이 노동조합법 위반으로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 한다”(!)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국가와 자본, 부르주아 언론, 각종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그러한 노동조합 아닌 ‘노동조합들’을 은밀히, 그리고 공공연히,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 폭력적으로 조직하고 육성하고, 장려하고, 상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목격하고 경험하는 대로이지만, 그러한 ‘노동조합들’이 저들에 의해서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 한다”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든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규정들은 그저 사문(死文)일 뿐일까? 혹여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저들은 결코 사문으로 법률을 장식할 만큼 무능한 자들이 아니다. 하물며 노동 관련 법률들은 자본과 노동 간의 이해 대립의 한 접점을 규율한다는 그 성질상 저들이 언제나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주물럭대는 법률이다.

그것은 결코 사문이 아니라 저들의 무기요, 안전판이다. 누구에게 겨눠진 무기이고, 무엇으로부터의 안전판일까?

그것은, ‘노동조합’에서 “사용자 또는 항상 그의 이익을 대표하여 행동하는 자”들, “경비의 주된 부분을 사용자로부터 ‘원조’ 받는” 자들에 대한 무기요, 그들의 수십ㆍ수백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배신’으로부터의 안전판인 것이다. “니들, 배신만 해봐? 니들 존재의 발판을 날려버릴 테니까!” ― 이것이 이들 규정의 메씨지이다. 배신하지 않는 신의. 휘델리티(fidelity)! 그것이 바로 저들의 준법! 준법이다.

Pacta sunt servanda!(계약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그 칼이 어쨌든 자신들의 편인 노예근성의 군상들에게만 겨눠져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들에게 겨눠진 칼이 그저 만만의 하나일지 모를 대상을 향한 품세라면, 진짜 실전의 날카롭고 잔혹한 칼은 당연히 노예적 노동으로 자신들을 먹여 살리고 있지만 그 노예 처지를 박차고 해방을 꾀하는 자신들의 계급적 적들에게 겨눠져 있다. 그리하여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각종의 파쇼악법이 칼춤을 추는 것인데, 오늘의 소재인 노동조합법에서는 당연히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노동조건의 “유지ㆍ개선 기타” 노동자의 “경제적ㆍ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는 노동자들에게 겨눠져 있다. 자, 보자.

라.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

마. 주로 정치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먼저 “마. 주로 정치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 한다”는 규정과 관련해서 보자. 거듭 인용하지만, 법은 “‘노동조합’이라 함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ㆍ개선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ㆍ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로”라는 것이 많은 경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즉 저들 자본과 그 국가가 주관적 척도에 의해서 임의로 재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을 차치하자. 그렇더라도, 도대체 노동자들의 “경제적ㆍ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정치운동 없이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노동자계급의 사회적ㆍ정치적 해방, 전면적 해방은 물론이고, 사실은 그 “경제적ㆍ사회적 지위의 향상”조차 억제하겠다는 자본가계급의 의지의 표현, 노동자 단결금지법이다.

“라.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는 어떤가?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 저들이 말하는 ‘근로자’는 물론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조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노동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이미 노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에 변화가 생기고, 따라서 그러한 ‘노동조합’을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규정이다. 문제는 당연히 그러면 과연 누가 ‘노동자가 아닌 자’인가이다.

저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면, 위 규정은 이렇게 이어진다.

“다만, 해고된 자가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의 구제신청을 한 경우에는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판정이 있을 때까지는 근로자가 아닌 자로 해석하여서는 아니 된다.”

한 마디로 “해고된 자”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아주 협소한 예외규정을 두어서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의 구제신청을 한 경우에는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판정이 있을 때까지는 근로자가 아닌 자로 해석하여서는 아니 된다”란다.

재미(?)있다. 왜냐하면, “… 때까지”라도 ‘근로자’인 것이 아니라 “근로자가 아닌 자로 해석하여서는 아니 된다”란다!

그리고 참으로 치밀하다. 내 기억이 옳다면, 얼마 전까지 이 단서 규정은 아마 ‘해고를 다투고 있는 자는 근로자가 아닌 자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뭐 이런 정도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근로자가 아닌 자’의 범위는 약간은 좁아질 수 있다. 혹은 해석의, 따라서 다툼의 여지가 보다 넓다. 그런데 아주 치밀하게도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판정이 있을 때까지는”으로 개정되어 있다. 참으로 그 성질상 저들이 언제나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주물럭대는 법률이지 아니한가?!

아무튼 다시 여기의 “근로자”의 의미를 음미해 보자. 왜냐하면, 저들은, 앞에서 보았듯이, “근로자”를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ㆍ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또 노동조합을 그러한 ‘근로자’들의 “단체 혹은 그 연합단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해고된 자”를 “근로자가 아닌 자”로 규정하며 그들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그 “단체 혹은 그 연합단체”를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 한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지금 전교조를, 그리고 공무원노조를 위협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규정이다.)

그런데, 어떤 노동자든, 해고되었다고 해서 그가 살아 있는 한, “임금ㆍ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법은 그가 해고되었다고 해서 그가 ‘근로자’, 즉 노동자가 아니라며, 그러한 노동자, 즉 해고 노동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 한다”고 규정ㆍ선언한다.

취업 중인 현역 노동자든, 해고된 노동자든, 장기간이든 단기간이든 실업자 상태로 정체돼 있는 노동자든, 그들은 누구나 “임금ㆍ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그렇게밖에는 생활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리하여 그들은 노동자들이다. 그런데, ‘해고된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그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 한다”? “‘노동조합’이라 함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를 말한다”는 저들 법의 “총론” 규정이 얼마나 기만적ㆍ선전적 개살구인가를 이보다 더 생생히 보여줄 수 있겠는가?

조합원 자격에서 해고자를 배격하라는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한, 거기에 노동자의 주체적ㆍ자주적 단결이 있을 수 없음은 더 없이 명확하다. 바로 예의 노동자 단결금지법!

그러면, 해고 노동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 한다”는 선언의 경제적ㆍ사회적 의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들 해고자들을 이 세상에서 폐기하겠다는 것 이외의 무엇이겠는가?

물론 자본은 그들을 폐기하고자 하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다름 아니라, 그들 해고자들이란 대부분이 고분고분 노예적으로 굴종하는 대신에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인간이고자 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학기술혁명이 고도로 전개되어 생산이 사실상 무인ㆍ자동화되어 가고 있어 넘치고 넘치는 게 실업자들이고, 넘치고 넘치는 게 굴종을 각오하겠다며 몰려드는 실업자들인데 감히 그렇게 노예가 아니라 인간이 되겠다고 방자하게 굴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과 국가의 메씨지는, “지금은 우리의 세상이다! 노예의 굴종을 달게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니들을 이 세상에서 폐기하겠다!”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 국가가 물론 그 기획ㆍ집행자이다.

3. 바로 앞이 낭떠러지다

그러나 비약의 계기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 ‘해고자 조합원 자격’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대립ㆍ투쟁은, 경제적ㆍ사회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생존의 문제, 노예적 굴종의 삶, 그것도 저들의 필요ㆍ편의에 따라 언제 참수(斬首)될지 모를 그러한 삶이라도 살 것인가, 아니면 사즉생(死卽生)의 기개ㆍ각오로 투쟁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주체적ㆍ자주적 단결의 문제이다.

그런데 지금 전교조 내부에서, 그리고 공무원노조 내부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참으로 우려스럽다. “제도권 내로 들어갈 것인가, 혹은 제도권 내에 들어가 투쟁할 것인가, 아니면 제도권 외에 머물며 투쟁할 것인가” 하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ㆍ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문제를 극히 편의주의적ㆍ목전실리주의적으로 제기ㆍ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저들 자본과 그 국가 측에서 유인ㆍ의도하는 구도이다. 목전의 실리가 문제가 되면, 많은 사람들의 회(蛔)가 동하게 되고, 의견이 분분해져 분열ㆍ대립이 발생하고, 결국은 결전을 치르기도 전에 사실상 이미 승패가 결정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보자. 자, 저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제도권’에 들어간다고 하면?

시쳇말로, 잡힌 고기 떡밥 주고, 밑밥 주느냐고 한다. 바로 그 격이다. 이미 주체적ㆍ자주적 단결권을 포기하고 그물에 걸리고, 낚시의 미끼를 문 신세의 노동자들이 발버둥 쳐봐야 뭘 도모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노동자들에게 저들 국가와 자본은 무슨 떡밥, 무슨 밑밥, 한 마디로 무슨 실리를 보장하겠는가? 그리고 설혹 일부 이른바 ‘실리’를 ‘보장’한다고 한들, 그 실리에 기대어 사는 삶이 굴종의 노예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구나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독점)자본이 전유(專有)하고 있는 결과 노동자들이 수도 없이 폐기돼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 삶이 활어횟집 수족관의 물고기들의 삶과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는가?

실리 운운하며 굴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생즉사(生卽死)의 첩경인 것이다!

서양에는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다’는 말이 있고, 우리 사회엔 “시작이 반이다”거나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모두가 다 대개는 무언가 긍정적이고 필요한 일을 처음의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밀고 나가고, 착수하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장려할 때 쓰이는 말들이다. 하지만, 그 말들은 그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무언가 부정적인 일을 착수해서는 안 된다는 경구(警句)로도, 아니 그러한 경구로서 더 절실하게 쓰일 수도 있다. 예컨대, 범죄의 세계를 보라. 첫발을 들여놓기가 어렵고 망설여지지, 일단 한발을 들여놓으면, 대개는 그러한 어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한없이 그 범죄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한번 주체적ㆍ자주적 단결권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지, 일단 한발을 내디디면, 그 다음 물러나고 물러나며, 노예적 무권리 상태의 나락으로, 그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다. 바로 한발 앞, 그 한발 앞이 낭떠러지인 것이다!

두려울 수 있다. 저들의 공세ㆍ위협이 참으로 드세고 매섭기 때문에! 더구나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던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던가 하던 각하께서 10여 년 만에 쌓았던 ‘유신’의 성채(城砦)를 금상 박근혜 대통령님 각하께서는 지금 2ㆍ3년 만에 쌓으시겠다는 기세로, 그런 기세로 매애앵[猛] 돌진하고 계시지 않은가!? 저들이 자신들의 무력만 믿고 그렇게 드세고 매섭게, 기세등등하게 몰아붙이지만, 사실은 다름 아니라, 사회적ㆍ경제적 위기가 격화된 나머지 노동자ㆍ인민을 보다 더 강하고 가혹하게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지금이 싸워야 할 때이다. 그런 성채를 다시 쌓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만이 아니다. 경제적ㆍ사회적 위기가 격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 위기의 격화 때문에 저들이 저런 기세로 맹 돌진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도 아니고 당연히, 우리에게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무력만 믿고 자신만만, 기세등등한 나머지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도처에 수도 없이 자신들의 적을 만들며 싸움을 강요하고 있는 상황!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ㆍ사회적 위기로 터질 듯이 팽팽해진 불만을 더욱 자극하고 있는 상황!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승산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비근하게, 이승만 정권이, 박정희 정권이, 전두환 정권이 왜 깨졌던가? 바로 그러한 위기의 시대에, 그런 위기에 쫓겨, 그러나 자신들의 무력만 믿고 바로 자신만만, 기세등등한 나머지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도처에 수도 없이 자신들의 적을 만들며 싸움을 강요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걸 위기에 몰린 노동자ㆍ인민 대중이 아래로부터 맞받아쳤기 때문이 아니던가?

이런 상황이 조성되기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닐 터.

기회가 위기와 함께 온 격이다.

모름지기 물실호기(勿失好機)만이 시대의 명(命)이다.

불연(不然)이면, 위기가 대신 명할 것이다.

너희는 모름지기 노예의 나락행(行)이라고.

그런데 다행히 이미 터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촛불’이라는 형태로. 다만, ‘촛불’이라는 형태로.

이런 상황에서, 전교조 교원ㆍ교사 노동자들이, 공무원노조의 공무원 노동자들이 저들의 위협ㆍ공세에 굴복하지 않고 투쟁에 나선다면, 그것은 분명 수없이 많긴 하지만, 미약하게 나부끼는 ‘촛불’을 횃불ㆍ꽃불로 만들고, 나아가 요원의 불길로 만드는 계기, 그 힘, 그 기름이 되지 않겠는가? <노사과연>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Oct 10th, 2013 | By | Category: 2013년 10월호 제94호, 정세 | 조회수: 1,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