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23)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번역 : 이병진(양심수, 회원)

Ⅳ. 인도 국민회의의 분열

다다브호이 나오로지의 회장 연설과 1906년 국민회의 캘커다 총회에서 채택된 결정서는 수백만 인도 인민을 고무시켰다. 그러나 그 회의는 영국지배자들을 분노케 하였다. 그들은 온건파와 급진파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국민회의 조직이 약화되고 결국 캘커타 총회에서 국민회의가 분열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온건파와 급진파 양쪽 모두 단결하여 국민회의의 목표가 스와라지라고 선언하였다. 캘커타 총회는 벵골 분할을 반대하는 데 그치는 한계가 있었음에도, 거부운동을 포함한 정당하고 합리적인 선동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전개에 대한 지배자들의 환멸과 노여움이 ≪타임≫지(Times)에 표출되었다.

급진파와 온건파는 영국 지배의 적이라고 자인하였고, 이들의 분열은 임박한 듯이 보였으나 현재는 그런 가능성이 제거되었다. 그러나 온건파들이 급진파의 방침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된 전개에 대해서 그들은 매우 크고 거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지배자들은 선동적인 강령에 기초한 이 결합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깨야만 하는 것이었다. ≪타임≫지는 협박과 압력의 수단으로 온건파들을 고립시키는 것이 단결을 깨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희망을 품었다. ≪타임≫지는 다음과 같이 기사를 작성하였다.

벵골 분할을 반대하는 회장의 연설은 그 총회에서 결의안의 형태로 지지를 받았다. 또한 그 회합에서 ‘거부운동’은 적절한 형태의 선동임이 선언되었다. 그렇지만 법정은 이 선언과 다를 것이다.

그것은 1906년 캘커타 총회 결정에 따라서 국민회의가 선동 강령을 진전시킨다면, 그 결과 국민회의 조직이 위험에 직면하게 됨을 분명히 경고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지배자들로부터 그런 경고가 없었다 해도, 온건파 집단은 선진적인 급진파들의 체포가 필연임을 이미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띨라크 같은 지도자들이 뒤에서 후원하여 결집된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인민들의 요청에 응답했던 새세대 활동가들이 국민회의를 청원하고 호소하는 단체에서 투쟁기구로 고양시켰음을 깨달았다. 온건파들은 만약 이 운동이 통제되지 못한다면, 조직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그것을 급진파들의 손에 넘겨주어야 할까 봐 두려워했다.

1906년 캘커타 총회에서조차, 기간 내내 띨라크에게 여론이 우호적이었다. 핵심 온건주의자들조차 희생에 기초한 띨라끄의 삶과, 반영시위 계획이 채택되는 데 기여했던 띨라크의 역할로 형성된 정치적 분위기 아래에서 그 제안을 반대할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나오로지1)가 영국지배자들의 착취와 반인민적 정책들과 조치들을 폭로하였기 때문에 급진주의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띨라크는 의장 경선에서 나오로지와 경쟁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출마를 접었다.

캘커타 총회에서 스와라지가 채택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거부운동을 포함한 선동적인 강령이 채택되자, 그 계획을 집행할 새 지도부가 필요했다. 띨라크를 중심으로 다음 총회(1907년)를 주도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온건파들은 예전처럼 그런 움직임을 반대하였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급진주의자들 또한 지도부 교체를 위한 조직적인 노력들을 시작하였다. 국민회의 총회를 위한 준비들이 시작되었음에도, 대표 선출과 기타 총회 안건을 놓고 갈등들이 예상되었다.

캘커타 총회에서는 다음 해 총회를 나그쁘르(Nagpur)에서 열기로 결정하였다. 이전 관례에 의하면 입회 위원회(Reception Commitee)가 의장을 선출했다. 그러므로 입회 위원회 등록을 놓고 양쪽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급진파들이 나그뿌르에서 상대적으로 강했음에도 그들은 입회 위원회에서 의장 선출에 필요한 4분의 3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렇게 의장 선출을 포함한 입회 위원회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붐베이의 온건파 지도자들이 총회 장소를 나그쁘르에서 그들의 영향력이 강한 수라뜨(Surat)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띨라크는 의장 후보를 사퇴하였는데, 이런 갈등상황에서 그가 후보로 나선다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에 띨라크는 영국정부에 의해 랑군(Rangoon)으로 추방되었다가 조국으로 돌아온 랄라 라즈빠뜨 라이를 추천하였다.

랄라지(Lalaji)2) 역시 띨라크와 같은 급진파였다. 바로 그 점이 랄라가 정부로부터 핍박받는 이유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를 의장으로 선출하자는 제안이 온건파 지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실 고칼레는 정부를 불필요하게 괴롭히는 것은 조직탄압을 불러온다며 그 제안에 반대했다.

결국 온건파들은 의장 후보로 라쉬 베하리 고쉬(Rash Behari Ghosh)를 밀기로 결정하였다. 고쉬가 그의 의장 연설에서 급진파들을 호되게 공격하게 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온건파 진영은 캘커타 총의에서 채택된 여러 결정들을 물타기하려 하였다. 반면에 급진주의자들은 캘커타 총회에서 채택된 결정들을 다시 채택되게끔 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두가 수라트에서 두 진영 사이의 날카로운 갈등을 목격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띨라크는 급진파들을 대표하여 처음부터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분열로부터 얻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들이 국민회의의 분열을 원치 않는다. 그러함에도 국민회의가 캘커타 총회에서 채택한 결정들을 확고하게 전진시켜야 한다; 그것들을 물타기하려는 그 어떤 시도들도 굳세게 반대한다.

온건파 지도부 아래 수라뜨 총회 입회 위원회는 급진파들에 대해 온갖 종류의 훼방을 하였다. 총회 기간 동안에 주요 국민회의 지도자들이 환영회를 조직하는 일은 관례였다. 입회위원회는 띨라끄, 라즈빠뜨 라이 그리고 여러 급진파 지도자들을 위한 환영회를 조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로 그들은 영향받지 않았다. 대중들이 온건파들과 함께하지 않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왜냐하면 급진파들이 조직한 환영회에는 엄청난 대중들이 참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입회위원회의 공식적인 지도부의 옹졸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입회위원회가 급진파 지도자들을 지지하는 수라뜨 인민들의 선언을 막지는 못했지만, 온건파 지도부는 총회에서 급진파들을 패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급진파들은 캘커타 총회에서 채택된 정책들과 계획들이 확고히 유지되는 한 국민회의의 단결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띨라크는 그의 환영연설회에서 그 점을 분명히 했다.

띨라크 자신과 라즈빠뜨 라이가 분명히 했듯이, 그들이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은 누가 회의를 주도하는가보다는 국민회의의 정책과 강령이었다. 그들은 오직 국민회의가 캘커타 총회의 결정을 전진시킬 수 있다면, 의장 경선에 나가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대화와 글로 분명히 표명하였다. 반면에 만약 조금이라도 후퇴한다면 의장 선거를 포함하여, 그들의 반대를 표출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온건파 지도자들은 캘커타 결정으로부터 후퇴하기로 이미 결정을 하였고, 그러므로, 급진파 지도자들과 타협하려는 준비도 하지 않았다. 띨라크와 기타 지도자들이 직접 대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총회의 일반적인 관행에 따라 배포되었던 결정서 초안조차 준비할 수 없었다. 관료들은(office bearers) 결정서 초안을 인쇄할 시설이 없다는 궁색한 변명을 해놓고는 그 책임에 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들은 국민회의 급진파 진영에서 동의할 수 없는 여러 조항들을 포함시킨 규약을 제안하였다.

수라트 총회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라쉬 베하리 고쉬의 의장 후보 발표 이후, 의장 후보 연설이 있자 회의장이 시끄러워졌다. 혼란의 이유는 캘커타 총회에서 통과된 결정을 진전시킨다는 조건으로 급진파들이 의장 선거에 나가지 않기로 했었던 것인데, 이를 온건파들이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만연된 혼돈 때문에 그날의 회의는 연기되었다. 그날 온종일 급진파 지도자들이 합의에 이르는 협상을 하려 노력했지만, 온건파 지도자들은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회의 다음날 긴장된 분위기가 시작되었다. 급진파 지도자들은 개별 쟁점별로 싸워야한다고 인식했다.

띨라크는 의장 후보로 이름을 등록한 후에 의장 선거 쟁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동시에 그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총회 진행을 도울 긍정적 제안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신을 불러달라고 요청하였다.

이것이 차이점들을 완만하게 풀어 부드럽게 행동하여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띨라크가 할 수 있던 최후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온건파 지도자들은 띨라크의 유화정신을 인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야기할 수 있도록 불러 달라는 그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띨라크는 승낙이 있든 없든 간에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연단에 올라가서 연설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간의 충돌의 시작이었다. 고발과 역고발로 서로 싸웠다. 한쪽에서는 띨라크가 강제로 연단에서 쫓겨났다고 고발했고, 반대편에서는 띨라크를 따르는 이들이 막대기를 들고 연단에 들이닥쳤다고 고발하였다. 그 와중에 온건파 지도자인 페로제샤아 메타와 수렌드라나쓰 바네르지에게 신발이 날아갔다. 그 일과 함께 회의는 중단되었다.

그런 사건들이 있은 이후에도 급진파 지도자들은 화합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중재자처럼 행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련의 대화를 하였다. 띨라크는 그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오늘 우리는 그 문제와 관련하여 토론하였습니다. 과거를 잊고 용서하고 미래에 함께 일해야 합니다. 국민회의의 최고 이익들, 나의 당 그리고 나 자신을 고려하여 제28차 인도 국민회의 의장으로 라쉬 베하리 고쉬가 선출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다음의 조건들만 이행하여 주십시오. 첫째로, 스와라지, 스와데시 그리고 거부운동 같은 각각의 쟁점들에 대하여 결의안을 채택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작년에 통과시켰던 결정들 위에 확고히 서 있다고 분명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둘째로, 고쉬 박사3)의 의장연설에서 당 내 적대에 대한 언급이 있다면 이는 취소되어야만 합니다.

온건파들은 화합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우호적인 이들과 따로 모임을 열어 결의안과 국민회의 새 규약을 채택하였다.

그들이 규약에 포함시킨 새 조항은 거부운동을 포함하여 모든 선동강령을 금지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들은 급진파들이 이 새 조항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급진파의 관점에서 일하는 이라면 그가 어떠한 국민회의 성원이건 조직으로부터 축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같은 조직 안에서 서로 다른 두 진영의 역할을 했던 온건파들과 급진파들은 두 개의 정당으로 되었다. 온건파들은 인도국민회의당(Indian National Congress)의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국민회의와 기타 정당들이 한 차례 이상 분열했고, 국민회의 수라트 총회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신발을 내던지는 일을 포함한 여러 차례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또한 그런 일들의 책임을 두고 험악한 논쟁이 일어나거나 분열을 위한 파벌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분열들의 경우에서 그러하듯이 이번 분열에서도, 쟁점은 집단과 개인 행동의 합법성이었다. 그러나 진짜 쟁점은, 이것의 합법성 또는 그런 행동이 아니라, 분열을 야기했던 정책들과 그 접근들이다. 왜 그런 상황이 1907년 국민회의에서 일어났는가?

국민회의 지도부 안에는 대략 20년 동안 무의미한 정책들을 추종했던 국민회의의 변화를 원했던 강력한 집단이 있었다. 그들 뒤에는 모든 집단과 계층이 속해 있던 수백만 인민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런 전개에 놀랐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고 그를 막고자 하였다. 그때 상황은 한 조직 안에서 두 집단이 더 이상 공존하기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른 것이었다. 수라뜨에서 벌어진 일은 단지 그런 상황이 폭발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강조해야만 할 것이 있다. 급진파들은 시종 일관되게 화합의 태도로 일했다. 만약 국민회의가 하나로 단결된 조직으로 남는다면 인민들이 그들의 계획을 지지할 거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반대로 온건파들은 화합의 모든 노력들을 좌절시켰다. 급진파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그들의 미래를 위험하게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정리하면, 캘커타 회의 직후, ≪타임≫지를 통해서 영국지배자들이 조성한 공포가 그것에 영향을 끼쳤다. <노사과연>


1) 편집자주: 1886년, 1893년 1906년 국민회의 의장이었다. 국민회의 내의 분열을 타협으로 유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역주: 사람 이름 뒤에 붙는 접미어 지(ji)는 위인에게 존경하는 의미를 담아서 ‘선생님’이라 부를 때 쓰는 힌디어다. 예를 들면 간다지(Gandhiji)는 간디(Gandhi) 선생님을 의미한다. 랄라지 역시 랄라 선생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자가 랄라를 존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편집자주. 라쉬 베하리 고쉬는 1884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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