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 달의 역사] 맑스의 생애

오해영 | 회원

2018년. 칼 맑스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이달의 역사에서는 맑스의 생애를 다루고자 한다. 또한 여기서는 그의 철학이나 사상보다는 최대한 인간 맑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글을 쓰고자 한다.

 

어느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칼 맑스’를 검색해 보았다. 맨 첫줄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19세기 이후 철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며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 사회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등 수많은 학문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 논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이기도 하다. 2005년 BBC가 시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칼 맑스를 꼽았다.”

위 검색 내용에 모두 동의하지만 그 모든 표현을 아우르는 한 단어가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천적 혁명가. 맑스를 단순히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표현이다. 이는 그가 남긴 다음의 유명한 말이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1) 그는 진리를 철저하게 실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실천적 혁명가였던 것이다.

 

맑스의 출생과 자유롭던 어린 시절

맑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당시엔 프로이센) 트리어에서 출생했다. 트리어는 독일의 서부 지방으로, 전통적 색채가 강했던 동부 지방과 달리 산업화, 근대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진행되어 있으며 한때 프랑스 혁명군이 점령하여 진보적인 이념이 퍼져있는 곳이기도 했다.

맑스는 유대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네덜란드에 정착한 유대인 집안) 어머니 사이 둘째2)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유서 깊은 유대인 랍비 가문의 후예로 본래 가문의 성은 모르데카이(Mordechai)였으나, 자유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유대인 차별 법령을 피하기 위해 1817년 개신교(루터교)로 개종하면서 성을 맑스(Marx)로 바꾸었다.

맑스는 어린 시절 안락하고 유복한 가정환경과 변호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유대인 집안이었으나 맑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집안이 개종했던 종교인 기독교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어릴 때부터 상당히 총명했던 맑스는 수학과 신학 과목을 꽤 잘한 편이었지만, 그의 관심분야는 문학과 예술이었다. 이러한 성향은 바로 그의 아버지―17~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루소, 볼테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와 이웃에 살던 프라이헤르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Freiherr Ludwig von Westphalen)3)의 영향 때문이었다. 베스트팔렌은 프로이센의 상류층 정부 관리로 그 역시 자유주의적인 부류에 속했다. 그는 어린 맑스의 뛰어난 능력과 빠른 이해력에 마음이 끌려 그에게 자주 책을 빌려주며 독서를 권하고, 근처 숲으로 함께 산책을 나가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등에 관해 말해주기도 했다.4) 이런 이유로 맑스는 어린 나이에 매우 성숙해졌고, 당시 새로운 사조였던 낭만주의 문학의 애독자가 되었다. 맑스는 공감과 격려가 필요한 어린 시기에 자기보다 훨씬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동등한 대접과 호의를 받았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경험은 맑스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 갖고 있던 믿음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주고 강화시켜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점은 맑스가 평생 동안 지녀온 가장 뛰어난 특성 중 하나이다. 물론 세간의 평판대로 그는 대단히 민감하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오만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오랜 질병과 빈곤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적극적인 태도, 자신감을 잃지 않은 보기 드문 인물이기도 했다.

 

대학 시절의 성장과 변화

좋은 직업을 갖길 바란 아버지의 뜻대로 맑스는 17세가 되던 1835년에 트리어에서 멀지 않은 본 대학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는 여느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고 대학 써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바이런 풍의 시도 쓰고, 빚을 지기고 했으며, 한 번은 소란 행위로 당국에 체포된 적도 있었다. 1836년 여름휴가 동안 그는 가족들 몰래 평생의 반려자 예니5)와 약혼하였고, 그해 가을 본 대학을 떠나 베를린 대학으로 갔다. 여기서 맑스는 주로 철학과 역사, 특히 헤겔의 철학에 관심을 쏟았다.6) 그리고, 청년헤겔학파로 알려진 브루노 바우어, 칼 프리드리히 쾨펜, 아돌프 루텐베르크 등이 운영하고 있던 <박사 클럽>이라는 모임에 참여하였고, 얼마 안가 모임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다. 1841년에 맑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의 차이”라는 연구 논문을 철학부에 제출했고, 1841년 4월 14일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긴 하였으나, 청년헤겔학파의 지도적 인물인 그는 프로이센 정부의 방해로 대학에 취직할 길이 막혔고, 1842년 초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라는 정부를 비난하는 글을 쓰게 된다. 이 글을 계기로 맑스는 ≪라인 신문≫7) 편집자가 되었고 곧이어 편집장의 자리에 오른다. 이 무렵부터 맑스는 삼림 도벌법, 출판의 자유, 포도 재배 농민들의 열악한 상태 등과 관련된 기사를 쓰면서 점차 관심이 경제 문제로 이동되었다.8) 결국, 통렬한 필치로 인해 1843년 3월 18일 맑스는 편집장직에서 쫓겨나야 했으며,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에 의해 ≪라인신문≫이 폐간된다.9)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서의 활동 개시. 그리고 엥엘스와의 만남

독일에서 좌파 운동에 대한 탄압은 더 심해지고 결국 1843년 10월, 맑스는 파리로 이주한다.

1844년 2월 말 루게와 ≪독일-프랑스 연보≫를 발간하고, 두 편의 글 “유태인문제에 대하여”와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을 발표하였다. 이 글들은 맑스의 사상이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과학적 공산주의로 궁극적으로 이행했음을 보여주는 글로 평가된다.

한편, 맑스는 파리에서 프랑스 노동자 조직 및 독일 망명자 노동자 조직과 직접 접촉하였다. 그리하여 그 조직의 지도자들과 알게 되었고, 노동자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이곳에서 맑스는 당시 노동자 계급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던 프루동, 루이블랑, 까베 등의 사상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1844년 8월. 엥엘스10)가 파리에 방문함으로써 맑스주의의 두 창시자의 역사적 만남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842년 11월말이었으나, 그 때는 서로 냉담했다. 그러나 ≪독일-프랑스 연보≫를 통해 둘은 자신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1844년에 공동으로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반대하여라는 책을 썼는데, 두 사람은 이 책에서 청년헤겔학파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훨씬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로써 맑스주의의 두 창시자의 공동 활동이 시작되었다.

 

브뤼셀로의 추방, 계속되는 조직 사업

프로이센의 정부는 프랑스에 압력을 넣어 맑스를 빠리에서 추방하게 했고, 1845년 2월에 맑스는 벨기에 브뤼셀로 근거지를 옮겼다. 예니는 당국으로부터 허가받은 짧은 유예 기간 동안 여비를 마련하느라고 가구들을 터무니없이 싼 값에 팔아야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는 맑스를 그곳에서조차 추방하려 했다. 맑스는 프로이센 당국이 자신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1845년 12월에 프로이센 국적을 공식적으로 포기했고, 3년 이상을 브뤼셀에서 보내며 다시 경제학 연구에 몰두했다.

1845년 4월, 맑스는 청년헤겔학파 중 가장 훌륭하게 평가했던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하며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11)을 썼고, 맑스와 엥엘스의 공산주의자 조직 사업은 멈추지 않았다. 그해 여름, 맑스와 엥엘스는 영국으로 연구를 위한 여행을 떠났고,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노동 운동의 지도자 바이틀링을 만났다. 바이틀링과 프루동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독일 이주 수공업자들이 조직한 ‘의인동맹’이라는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였는데, 이 동맹은 프랑스, 독일, 스위스, 영국 등에 지부를 가지고 있었다. 노동 운동을 직접 체험하고 그 대표자들과 접촉을 갖게 된 것은 맑스와 엥엘스에게는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여러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며 공산주의 조직을 결성키로 한 맑스와 엥엘스에게는 이들 청년 헤겔학파를 분쇄하는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독일 이데올로기, 즉 포이에르 바하, 바우어, 슈티르너로 대표되는 최근 독일 철학에 대한 비판과 여러 예언자들의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저술을 쓰기 시작하였다. 1845년 11월이었다.12)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기초가 놓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사적 역할이 발견됨으로써, 맑스와 엥엘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과학적 공산주의와 노동 운동을 결합시키는 것이 모든 활동에서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혁명적 당 건설의 투쟁은 실제로 1846년 초 브뤼셀에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가 건설되면서 시작되었다. 맑스와 엥엘스는 다른 곳에도 이와 비슷한 위원회를 창립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런던에도 통신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맑스와 엥엘스는 이를 이용, ‘의인 동맹’을 새롭게 해 나가기 시작했다. 1847년 6월 2일에서 9일까지 의인 동맹 대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이 동맹은 명칭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변경하고 “모든 인간은 형제다!”라는 구호를 맑스와 엥엘스의 주장에 의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로 바꾸었다. 한편, 맑스와 엥엘스는 1847년 8월에 망명 독일인 노동자들의 조직인 ‘독일 노동자 협회’를 결성하였다. 이 협회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것을 기초로 하여 후에 ≪신라인 신문≫에 연재로 기고한 것이 ≪임금노동과 자본≫이다.

 

≪공산당 선언≫

1847년 11월 29일부터 12월 8일까지 런던에서 공산주의자 동맹 제2차 대회가 열렸다. 엥엘스는 서기로서 활동했고, 맑스는 확고한 논리와 설득력으로 참석자들을 매혹시켰다. 뛰어난 분별력과 방대한 지식, 굽힐 줄 모르는 의지, 끝없이 샘솟는 활력을 지녔으면서도, 부르주아지 정치가나 이전의 어설픈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보였던 불손함이나 거만함이 없는 그에게서 사람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동맹의 목적은 부르주아지의 타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 계급 대립에 기반한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폐지, 그리고 계급들도, 사적 소유도 없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다.”를 제1조로 하는 “공산주의자 동맹 규약”이 맑스와 엥엘스에 의해 제출되었고, 통과되었다.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일어나리라 예상되던 때인 1848년 초에 맑스와 엥엘스는 이제까지 획득한 인식들을공산당 선언에 집약시켜 집필에 매달렸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구호로 끝나는 이 글은 ≪맑스 엥엘스 전집과 맞먹는다”(레닌)고 평가될 만큼 총괄적이고 중요한 문서이다.

 

혁명의 물결과 ≪신라인 신문≫

1848년 유럽은 혁명의 물결로 휩싸였다.13) 당시 브뤼셀에 있던 맑스는 벨기에 정부로부터 24시간 안에 떠나라는 추방 조치를 받고 파리로 갔다가 독일 혁명가들의 부름으로 고국으로 돌아가 활동하였다.14) 맑스는 혁명이 발발하자 인민의 투쟁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모든 지식과 힘을 투쟁에 바쳤다. 독일에 도착한 맑스와 엥엘스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대중조직을 형성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1848년 4월말에 창설된 ‘쾰른 민주주의회’에 가입하였고, 맑스는 혁명의 성공을 위해 쁘띠 부르주아들과 협력하는 형태의 기관지인 ≪신라인 신문≫을 발행하여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맑스의 조국 독일에서 혁명이 불붙은 듯했고, 쾰른에서 발행되는 ≪신 라인 신문≫을 통해 맑스는 혁명의 경험을 총괄하여 대중에게 전달하였다. “프랑크푸르트 급진민주당의 강령과 좌파의 강령”, “독일의 대외 정책”, “봉건적 부담들의 폐지에 관한 법률 초안”,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등의 기사들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위기에 몰린 정부는 맑스가 외국인 법(맑스는 프로이센 국적을 스스로 포기한 바 있다)을 위반했다며, 24시간 이내 추방을 명령했다.15) 1849년 5월 19일 ≪신 라인 신문≫ 마지막 호는 “우리의 마지막 말은 언제 어디서나 ‘노동 계급의 해방!’일 것입니다”라는 맑스의 고별사를 싣고 온통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나왔다.

 

혁명의 패배, 그리고 공산주의자 동맹 해체

맑스와 엥엘스는 혁명의 실패로 파괴된 공산주의자 동맹의 여러 지부들을 재조직하면서 동맹을 재건하였지만, 1851년 5월과 6월 독일에는 체포의 물결이 밀려왔다. 반동 세력은 혁명 운동을 뿌리 뽑고자 하였고, 결국 공산주의자 동맹이 그 대상이었다. 체포의 계기는 ‘분리파’(빌리히-샤퍼 일파)의 모험주의적인 행동이 경찰에 적발된 것으로, 체포를 면한 맑스와 엥엘스는 동지들의 재판을 위해 무죄를 입증하는 자료들 모아 변호에 최선을 다하였지만, 공산주의자 동맹 회원들의 체포와 재판에서의 유죄 판결은 사실상 동맹 조직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852년 11월 17일, 동맹 런던지구의 한 집회에서 맑스는 동맹을 해체할 것을 제안하였다. 동맹의 조직원들은 언제 어디서나 불멸의 강령 ≪공산당 선언≫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동맹을 해산했다.

 

반동의 시대, 경제학 연구

1850년대는 지독한 반동의 시대였다. 맑스도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혁명적 신문이나 출판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예전처럼 새로운 잡지를 만들 돈은커녕 생계마저 막막했다. 맑스는 1851년 여름에야 아메리카의 신문인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고정 기고자로 지낼 수 있었지만 형편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쓸만한 것들은 모두 전당포로 갔고 보다 싼 곳으로 계속 이사를 다녀야 했다. 맑스와 예니 사이에 태어난 일곱 남매 가운데 셋만이 병과 굶주림으로부터 살아남았다. 그리고, 1862년 3월 맑스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과 관계를 청산한다. 1861년에 벌어진 아메리카의 남북 전쟁에 대해 맑스는 노예제 폐지가 인류의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 했으나, 편집진은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군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반동의 시대였던 1850년대와 60년대에 맑스가 행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정치경제학 연구에 몰두한 것이다. 이로부터 수 십 년 동안 정치경제학은 맑스의 주요 연구 분야가 된다. 혁명 운동이 퇴조하고 자본주의가 비교적 평화롭게 전개되기 시작하자 맑스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사회 구성체의 객관적 법칙성을 연구하는 데 몰두한다. 이 시기의 맑스의 작업은 다음과 같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기본 개요≫(1857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제1분책≫(1859년), ≪잉여 가치 학설에 관한 이론들≫(1862-3년), ≪자본론의 첫번째 초고≫(1863년), ≪자본론 제3권≫(1865년).

 

국제 노동자 협회에서의 활동과 ≪자본론≫ 출간

1863년말 맑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맑스는 약간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또 맨체스터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빌헬름 볼프로부터 맑스는 800파운드를 유산으로 받았다. 이 시기 맑스의 재정 사정은 처음으로 호전되었다.

맑스는 영국에서 열릴 노동자 국제 대회에 독일 노동자 대표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받았고, 맑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1864년 9월 28일에 영국의 세인트 마틴 홀에서 국제 노동자 협회(제 1 인터내셔널)가 창립되었다. 맑스는 국제 노동자 협회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활동했다. 맑스는 “국제 노동자 협회 임시 규약”과 “발기문”에서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 노동자 계급 자신의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한편, 맑스는 그동안의 여러 연구를 결산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해부하는 저서를 집필하는 일에 몰두하였고, 마침내 1867년 9월 14일 ≪자본론≫ 제1권의 초판 1,000부가 발행되었다. 맑스는 ≪자본론≫ 출간으로 생기는 수입으로 물질적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 대가는 그가 언젠가 농담 삼아 이야기한 것처럼 글을 쓸 때 피울 담배 값도 안 될 정도였다.16) 이전에도 그랬지만 맑스는 엥엘스의 도움으로 금전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갔다. 엥엘스 본인은 물론이려니와 맑스 또한 엥엘스가 순전히 금전적인 이유로 회사 일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엥엘스가 1869년 6월 회사 일을 그만두기로 하면서 맑스에게 “만세! 오늘로서 따분한 상업을 끝냈다네. 그리고 나는 자유인이라네”라는 편지를 보낸 것이나, 맑스가 “이집트 감옥과 같은 곳에서 자네가 탈출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라고 그 편지에 답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던 와중 두 가지 사태가 인터내셔널의 상황을 결정적으로 바꿔 놓았다. 하나는 1870년 7월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터진 전쟁이었다. 프러시아의 신속하고 압도적인 승리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고 제3공화국이 선포됐다. 티에르를 수반으로 하는 프랑스 임시정부가 반동적 성격을 드러내자 파리 노동자들은 1871년 3월 무기를 들고 자신의 정부, 코뮌을 선포했다. 티에르는 일시적으로 베르사유로 물러났지만 군대를 동원하였다. 파리 시민의 영웅적 방어에도 불구하고 코뮌은 패배하였고 봉기는 진압되었다. 코뮌이 함락되자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국제적 비난이 쏟아졌다. 인터내셔널은 자연히 이러한 비난의 주요 표적이 됐다. 여기에 미하일 바쿠닌과의 대립으로 결국 인터내셔널은 1876년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인터내셔널에서 물러나 자유롭게 된 맑스는 ≪자본론≫ 1권의 프랑스어 번역을 하고 1973년 2판의 출간을 위해 독일어 초판을 개정했으며, 3권의 지대 분석을 위해 러시아 농업 문제에 관해 세밀하게 연구했다. 하지만 2권과 3권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만성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정기 치료를 계속 받을 만큼 신체적으로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맑스가 가장 중요하게 개입한 일은 1875년 두 개의 독일 노동자당이 독일 사회민주당(SPD)로 통합했을 때였다. 라쌀레의 주장이 강하게 들어간 ‘고타 강령’은 소부르주아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고, 맑스는 이에 대해 ≪고타 강령 비판을 썼다. 또한, 맑스와 엥엘스는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종종 충돌했다. 엥엘스는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얼마간 영향력을 행사한 학술적 사회주의자 오이겐 뒤링17)에 맞서 자신들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1877년 ≪반뒤링론을 써야 했다.

1875년 말 ‘포르투갈 사회주의당’의 건설 시도, 1877년 말 스위스 ‘사회민주주의당’의 건설, 1879년 10월 마르세이유 노동자 대회에서의 ‘프랑스 노동당’ 성립, 1879년 ‘벨기에 사회주의당’의 출현 등은 인터내셔널의 활동의 결과였고, 맑스와 엥엘스는 이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한편, 이즈음에 맑스와 엥엘스는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러시아의 혁명가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 결과는, ≪공산당 선언≫의 “러시아어 제 2판 서문”(1872년)에 있는 “러시아의 혁명이 서구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어,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면, 현재 러시아의 토지 공동 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맑스의 죽음과 그 후의 엥엘스의 활동

1881년 여름, 맑스는 간암 진단을 받은 아내 예니를 데리고 맏딸 예니 부부가 있는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맑스는 딸 엘레노어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딸의 건강이 호전되어 아내에게 달려 온 맑스도 이제 앓아눕는 신세가 되었다. 부부가 모두 침대에서 앓다가 맑스가 이제 기력을 되찾아 아내를 돌볼 수 있게 된 1881년 12월 2일, 예니는 세상을 떠났다.

예니의 죽음은 맑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의사는 예니의 장례식이 있던 12월 5일 맑스에게 집에 있으라고 권유할 정도로 맑스의 건강은 좋지 못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엥엘스가 맑스 대신 모든 장례 문제를 처리해 주었다. 아내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맑스는 ≪자본론 2권과 3권의 완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83년 1월 큰 딸 예니마저 병으로 죽고 말았다. 맑스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기관지염은 더욱 악화되어 급기야 후두염으로까지 발전하였고, 2월에는 폐렴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3월 14일 오후, 맑스는 서재의 안락 의자에 앉아 잠든 채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65세였다. 1883년 3월 17일 맑스는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 묘지에 아내 곁에 묻혔다. 가족과 몇 명의 친구, 몇몇 나라에서 온 노동자 대표들이 전부였다.18) 맑스의 묘지 앞에서 평생 동지 엥엘스는 다음과 같은 추모 연설을 했다.

 

“한평생 그의 사명은 어떤 식으로건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 ……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에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지위와 필요에 관해, 그리고 자유를 얻기 위한 조건에 관해 의식하게 만든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투쟁은 그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 그는 누구도 필적할 수 없을 만큼의 정열과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투쟁했으며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시대의 미움과 비방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 그리고 그는 죽어서 시베리아의 광산 노동자들로부터 유럽 전체와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수백만 혁명 동지들의 존경과 사랑과 애도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적대자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인 적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세기에 걸쳐 이어질 것이며 그의 저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엥엘스는 프리드리히 조르게에게 이렇게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인류는 두뇌 하나를 잃었다. 그것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두뇌를.”

 

맑스 이전에도 계급 투쟁을 말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맑스는 한 계급이 오로지 계급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치 조직을 만들 계획을 구상하고 성공적으로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정당과 정치적 투쟁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그의 사상은 인간의 행위 방식과 사유 방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적 힘들 중에서 여전히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맑스를 향해 의문을 던져야 하고, 맑스를 생각해야 하고, 맑스와 함께해야 한다.

 

참고문헌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미다스북스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알렉스 캘리니코스, 책갈피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마이크 곤살레스 외4명, 책갈피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


1) 이 유명한 말은 지금은 훔볼트 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베를린 대학의 현관 벽에 붙어있다. 이 대학은 바로 맑스가 헤겔의 철학 강의를 들은 대학이다. 맑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동의하면서도 그의 유물론이 지나치게 관조적이며 실천의 문제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의 철학에 대한 비판을 담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그 밖의 몇 가지 테제들은 맑스가 주장하는 유물론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맑스는 이런 말도 했다. “인간의 사유가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사유의 진리, 다시 말하면 사유의 현실성과 힘은 실천의 문제다”.

2) 맑스는 8남매이다.

3) 후에 맑스의 장인이 된다.

4) 훗날, 맑스는 베스트팔렌과 보낸 저녁 시간들을 즐겁게 회상하곤 했으며, 박사 학위 논문에는 베스트팔렌에게 감사와 존경의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맑스는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할 때 대체로 냉정하고 객관적이었지만, 베스트팔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곧잘 감상에 젖곤 했다고 한다.

5) 베스트팔렌의 딸로 이름은 예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이며 맑스보다 4살 연상이다. 그녀는 맑스의 누나인 소피의 친구였으며, 맑스의 동창인 에드가의 누나이기도 하였다.

6) 1838년 마르크스가 20살이 된 해 학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관심없던 법학에 완전히 손을 뗀다.

7) 대부분 신흥부르주아지의 후원을 받았다.

8) 훗날의 맑스 자신의 표현대로 하자면 ‘상부구조’에서 ‘토대’의 문제로 관심이 이동하였던 것이다.

9) 맑스는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괴롭힘당하는 그림을 실어 저항하기도 했다.

10) 엥엘스는 맑스보다 두 해 뒤인 1820년에 독일의 바르멘에서 대단히 보수적인 방직공장 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던 엥엘스의 아버지는 엄격한 부르주아적 행동규범과 전통적 신앙에 입각하여 자녀들을 키우려고 하였으나, 청년 엥엘스는 복종하지 않았다. 김나지움도 그만두고 회계실에서 일해야 했던 엥엘스는 여가를 이용하여 역사, 철학, 문학 등의 교양을 쌓았다. 맑스와 마찬가지로 청년헤겔학파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가졌으며,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노동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을 접하였다.

11) 11번 테제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2) 이 책은 미완성으로 전해져 오다가, 1932년에야 발견된 원고들을 후세의 사람들이 편집하여 출판할 수 있었다.

13) 프랑스 2월 혁명과 독일 3월 혁명 등

14) 맑스는 이미 1845년에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기에, 쾰른 시의 참사회에 거주권을 신청해야만 했다.

15) 여기서 잠깐 맑스의 추방 편력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파리에서 ≪독불 연보≫에 참여한 맑스는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으로 추방된다. 브뤼셀로 이주한 맑스는, 혁명 정부의 도움으로 1848년 3월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다. 1848년에 고국에서의 활동을 위해 독일로 돌아갔지만, ≪신 라인 신문≫의 폐간과 함께 추방 명령을 받는다. 다시 파리로 돌아간 맑스는 1849년 8월 24일 런던에 도착하였다. 다행히도 더 이상의 추방은 없었고, 맑스는 1883년 숨을 거둘 때까지 런던에서 지냈다.

16) 막상 독일에서는 ≪자본론≫ 제 1권 초판 1,000부가 다 팔리는 데도 4년이 걸렸지만, 책이 나오자 여러 나라에서 번역하여 출판하겠다고 하였고 그 반응은 독일보다 나았다. 1872년에 3,000부를 인쇄한 러시아 어판은 3월 27일 인쇄가 끝났는데, 5월 15일에 이미 900부가 팔렸고 연말에는 다 팔렸다. 또 1872년에서 1875년에 걸쳐 맑스는 프랑스 어판을 위해 수정 작업에 힘썼다. 맑스는 ≪자본론≫의 제2권과 제3권은 완성시키지 못했다. 엥엘스가 그 원고를 검토하고 편집하여 각각 1893년과 1894년에 출판하였다.

17) 그들의 사회주의 해석은 자유민주주의주의자의 해석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18) 맑스의 죽음은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지나갔다. [더 타임즈]는 짧막한 단신으로 사망기사를 실었고 그나마도 부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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