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주의(corporatism)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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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 | 회원

 *1)

 

차       례

1. 사회적 합의주의란 ?                                1

2.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                             2

1) 1920년대 국가(파시즘)적 코포라티즘                 2

① 이탈리아, 독일의 사회적 합의주의                   2

2) 1930년대 사회적 코포라티즘                        2

① 스웨덴의 사회적 합의주의                           2

② 노르웨이의 사회적 합의주의                         3

3)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                   3

① 스페인의 사회적 합의주의                           3

② 아일랜드의 사회적 합의주의                         4

③ 네덜란드의 사회적 합의주의                         4

④ 핀란드의 사회적 합의주의                           5

3.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                     

1) 93~94 노・경총 임금 합의                          6

2) 김영삼 정권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1996년)            6

3)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1998년)                 7

4) 노무현 정권의 사회적 협약(2004년~2006년)           7

5) 문재인 정권의 노사정위원회(2018년)                 7

4. 결론                                             10

 

1. 사회적합의주의(corporatism)란?

05

사회적 합의주의1)는 19세기 자본주의 사회가 출범하면서 함께 시작된 노자간의 계급투쟁으로부터 ① 자본주의 체제 수호, ② 부르주아 계급이 전취하는 잉여가치를 극대화함으로 자본주의 확대 강화를 위하여 추진된 부르주아 계급의 체제 유지 강화 제도이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주의는 외형적으로 정부와 노동자 계급 및 부르주아 계급이 참여하는 ① ‘노・사・정 회의’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 이 과정에서 정부(국가)가 부르주아 계급의 총체로서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을 중재하는 ② 제3의 존재인양 외형을 가지려고 하는 점, 사회적 합의주의 일 주체로서 참여하는 ③ 노동조합의 개량화나 노조 임원에 대한 위임 대리 개념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부르주아 제도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주의의 목적에서도 나타났듯이 사회적 합의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확대 강화하려는 목적 그 자체로부터 이를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국가(정부) 또한 부르주아적 계급 속성을 가진다.

 

2.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

 

사회적 합의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출된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이다. 이에 자본주의 체제에서만 나타난 독특한 사회적 협약 방식이다. 이것의 역사는 1) 192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 중심으로 한 ‘국가(파시즘)적 코포라티즘’에 이어 2) 1930년대 스웨덴, 노르웨이 중심의 ‘사회적 코포라티즘’ 3) 1980년대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으로 구성된다.

 

그림1) 사회적 합의주의 변천

06

1) 1920년대 국가(파시즘)적 코포라티즘

국가(파시즘)적 코포라티즘은 파시즘적 국가 통제를 중심으로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을 총 동원하는 형태였다. 그 주된 목표는 파쇼국가가 정한 목표로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점이다.

 

① 이탈리아, 독일의 사회적 합의주의

 

국가적 합의주의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20년대 이탈리아 무솔리니 파시즘 체제였다.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은 1922년 노동 6개 조직과 자본 6개 조직 그리고 지식인 1개 조합을 구성하여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의 코포라티즘부 장관 밑으로 두어 노자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했다.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사회적 합의주의는 파시즘의 통제에 노동과 자본을 국가가 정한 목표로 강제로 끌고 갔다. 이후 독일의 히틀러 나찌즘 정권도 이를 받아들여 독일 노동조합들을 ‘독일노동전선’이라는 관제조직으로 통폐합하고 자본가 단체와 함께 사회적 합의주의를 형성했다.

 

2) 1930년대 사회적 코포라티즘

 

사회적 코포라티즘은 복지동맹 코포라티즘으로도 불리며 1919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인 쏘련의 등장이후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국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 변혁을 거세하고자 하는 목적과 함께 1930년대 대공황이라는 자본주의 위기 극복 방안으로 제출되었다.

 

① 스웨덴의 사회적 합의주의

1938년 스웨덴의 사회민주당과 농민당 연립정권이 주도하에 노사 사이에 샬트쉐바덴 협약을 체결시키면서 사회적 코포라티즘을 성사시켰다.

샬트쉐반덴 협약의 내용은 우선 자본가 측은 기업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신 높은 소득세를 내고 국민경제에 대한 공헌을 약속해야 했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은 노자간의 대립이 치열할 경우 정부 개입을 승인해야 했고, 파업 조건이 까다롭고 정부로부터 노조 감시 권한을 승인해야만 했다.

 

② 노르웨이의 사회적 협약

 

노르웨이의 경우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극심한 경제 불안에 휩싸였고 경제위기의 정점인 1931년과 33년 사이에는 실업률이 10%로 치솟는 등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경제 불안은 결국 정치 불안으로 이어졌는데 1918년부터 1935년 사이 정권의 평균적인 수명이 18개월에 불과할 정도로 수명이 짧았다.

1935년 집권한 농민당과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노동당 연립정부는 노・자를 대상으로 사회적 협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바로 이 협약이 노르웨이의 사회적 코포라티즘의 출발이었다. 노르웨이의 사회적 코포라티즘은 중앙 단위의 ‘경제조정협의회’가 있고 그 하부에 ‘산업별 협의회’ 그리고 그 하부에 ‘사업장 단위의 생산위원회’로 구성이 되어 ‘코포라티즘 피라미드’라 불리기도 하고 있다.

 

3)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은 1980년대 세계 자본주의에 몰아닥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가 하는 목적과 함께 1980년대 후반부터 전개된 사회주의권의 붕괴 과정과 맞물려 기존의 사회적 코포라티즘에서 이후에 전개된 사회적 합의주의이다.

신자유주의 코포라티즘은 정부의 힘이 강화되고 노동조합의 힘이 위축된 조건에서 노・사・정 3자 형태로 구성된다. 특히 노동조합의 경우 비정규 노동자를 상대화하며 정규직 노동조합의 관료를 상대로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① 스페인의 사회적 합의주의

 

스페인에서는 1977년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5번의 사회협약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협약들은 전국수준의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하부수준에서의 단체교섭의 결과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 내용은 정부정책의 영역에 해당하는 쟁점들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1977년의 몽클로아 협약, 1980년의 연맹간 거시협약(AMI), 1981년의 전국고용협약(ANE), 1982년의 연맹간 협약(AI), 1985년의 경제사회협약(AES) 등이 대표적인 전국수준의 사회협약들이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협약들의 주요한 목표는 임금정책을 통한 인플레의 억제와 노사관계의 제도적 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협약주체의 측면에서, 스페인의 사회협약은 정당간의 협약(몽클로아 협약), 국가, 노조, 자본가단체의 3자 협약(ANE, AES), 노조와 자본가단체간의 중앙협약(AMI, AI, AES)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협약은 조합의 임금양보에 대해 비 임금쟁점(조세, 공공지출, 고용입법 등)에서의 보상을 국가가 보장하고 있다.

 

② 아일랜드의 사회적 합의주의

 

아일랜드는 192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일정 기간 영국의 대립적 노사관계가 지배적으로 존재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대립적 노사관계에 대해 노사 모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이 사회적 협약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극심한 경제위기로 인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국가 주도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아일랜드의 사회적 협약은 1987년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1987년 첫 번째 사회적 협약이 체결될 당시 실업률은 16.8%, 공공부채는 GDP의 118.2%에 이르고 노동자들의 경우 고용 불안정으로 이민이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아일랜드 정부는 고실업, 재정적자, 경제부진을 극복하고자 아일랜드의 1차 사회적 협약인 국가재건협약을 1987년에 체결한다. 아일랜드의 국가재건협약은 이후 경제사회발전계획(1990~1993), 작업과 경쟁력 강화에 대한 협약(1994~1996), 파트너쉽(1997~2000), 공평과 번영을 위한 협약(2000~2003), 지속적인 전진(2003~2005)등이 체결되었다. 경제사회발전계획(1990~1993), 작업과 경쟁력 강화에 대한 협약(1994~1996), 파트너쉽(1997~2000)은 중앙단위에서의 임금교섭을 통한 임금 억제와 자본 경쟁력 강화를 주된 내용으로 한 협약이었다.

 

③ 네덜란드의 사회적 합의주의

 

네덜란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안정적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1960년대 유럽에서 손꼽히는 사회복지제도를 구축한다. 하지만 1970년대를 거치면서 과도한 사회복지제도의 운영과 방만한 재정적자의 확대, 높은 조세부담과 노동비용, 그리고 심각한 노사갈등 등을 겪게 된다. 이후 1979년 2차 석유위기와 같은 외적 조건이 더해지면서 네덜란드는 1981년-1982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실업률이 10%에 이르게 된다.

1982년 말 네덜란드의 경제위기 극복 방안으로 노사는 실업 증가의 퇴치, 노동시간 유연성 증대, 기업의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한 ‘바세나르 협약’을 체결한다. ‘바세나르 협약2)’은 네덜란드 사용자 협회와 노동총연맹이 체결한 ‘시간제 근로자 확산’을 위한 협약이다.

1983~93년 동안 네덜란드 노사정은 경제・사회정책의 목표, 방법 및 제약들을 논의하면서 일련의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기업채산성, 투자증대, 고용증가, 일자리 나누기 및 복지개혁을 추구하는 가운데 자발적 임금자제를 최우선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네덜란드의 사회적 협약 체결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의 많은 저항과 투쟁도 있었다. 예를 들면 2004년의 가을협약이다. 2004년 5월 노사정간 조기퇴직(early retirement), 생애 휴무제(life-span leave arrangement)를 둘러싸고 협의를 계속하였으나 실패하자 정부는 독자적으로 조기퇴직과 생애 휴무제와 연계된 조세혜택 폐지 방안을 추진하였다. 이에 노동조합은 전년도인 2003년에 체결한 사회협약에 구속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6월 조합원 투표를 실시하여 정부안 철회에 대한 조합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도출하였다. 노동조합이 2004년 9월 21일 예산일의 총파업에 이어 10월에는 노동자 30만 명 규모의 시위, 그리고 10월 27일 금속산업의 200개 회사에서 22,000명이 파업에 들어가는 등 산업별 순환파업이 이어지자 정부는 다시 사회적 협의를 개시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노사정은 2004년 11월 조기퇴직, 생애휴가계획, 실업 보험금의 절약 등에 관한 사회협약을 체결 하였다.

 

④ 핀란드의 사회적 합의주의

 

핀란드의 사회적 협약은 노총, 사용자 조직, 정부가 함께 소득 정책협약을 체결한다. 이 협약의 주요 의제는 임금, 고용, 노동시장 정책,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 양성평등, 사회복지와 연금, 조세정책 등이 포함된다. 핀란드 사회적 협약의 주체는 노사대표이며 정부의 경우 협약 이후 의회의 승인 여부 등으로 인해 협약의 주체로는 참여를 하지 않는다. 다만 교섭 과정에 참여하고 합의된 내용을 정책수단 행사 등을 통해 보증한다.

핀란드의 사회적 협약은 1968년 이후부터 진행되었는데 1960년~70년대는 임금과 근로조건의 개선 그리고 사회보장제도 중심으로 진행이 되었다. 이후에는 실업 감소, 물가 상승률 억제 등 거시적 차원에서 사회적 협약을 진행하며 임금과 노동조건 등 구체적 내용은 작업장 수준에서의 협약(단체교섭)으로 위임하는 경우가 많다.

1990년 초반 핀란드는 경제위기로 고전을 하게 된다. 경상수지 적자가 늘어나고 물가는 치솟고 실업률은 3.3%(1990년)에서 17.2%(1993년)으로 급증하면서 핀란드 사회협약의 주된 내용은 자본의 생산성과 경쟁력 강화 및 노동자 고용을 증대시키는 방안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후 핀란드의 사회적 협약은 1995년 EU 가입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3.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주의의 시작은 1993년과 94년에 걸쳐 진행된 노・경총 임금 합의부터이다. 노・경총 임금 합의는 형식상 노・사・정이 결합한 형식을 가졌지만 민주노조 진영이 전노협(1990년 창립) 건설 이후 민주노총(1995년 창립)건설 이전 진행된 사회적 합의주의이다. 이 합의는 민주노조 진영이 빠진 상태에서 한국노총과 경총 그리고 정부 주도로 진행된 합의주의 형태이다.

이후 민주노조 진영이 참여해서 진행된 사회적 합의주의의 첫 출발은 1996년 5월 9일 김영삼 정권 시절 출범한 ‘노사관계 개혁위원회(이하 노개위)’였다. 노개위는 출범과 동시에 노동법 개정을 목표로 하면서 법 개정 이외의 합의 내용이 없었기에 사회적 합의주의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김대중 정권 시절 ‘노・사・정 위원회’를 공식으로 출범 시키면서 한국에서의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림2) 한국의 사회적 합의주의 변천사

07

1) 93~94년 노・경총 임금 합의

 

김영삼 정권은 임금에 대한 통제를 ‘합의’라는 형식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한국노총과 경총이 임금인상 5% 가이드라인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한국노총 가맹 조직들의 반발로 사실상 무산되었다. 1994년에도 노・경총 임금합의가 있었는데, 결국 한국노총 탈퇴투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한국노총을 탈퇴한 노조들은 민주노총 건설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후 1990년 건설한 전노협을 중심으로 93~94년 노・경총 임금합의를 반대하며 한국노총을 탈퇴했던 민주노조 진영이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건설하게 된다.

 

2) 김영삼 정권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1996년)

 

1996년 김영삼 정권에 의해 제기된 노개위는 공무원, 교원 노동조합의 합법화, 복수노조 인정, 3자 개입 금지 철폐 및 정리해고제, 파견제, 변형 근로 도입을 주된 내용으로 노동법을 개정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1996년 4월 김영삼 정권에 의해 제기된 노개위는 5월 곧 바로 민주노총이 참여한 상태에서 1차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때 김영삼이 제안한 뒤 한 달 만에 민주노총이 노개위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이 주창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때문이었다. 국민파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은 정책참여 및 사회개혁투쟁을 병행해서 제기했다. 이때의 ‘정책참여’와 김영삼 정권의 노개위 제안이 맞아 떨어지면서 민주노총이 자연스럽게 노개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노개위는 정리해고제, 파견제, 변형근로제 등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노동자 계급과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대립의 과정이 민주노총이 10월 노개위 불참선언, 11월 재참여 결정, 다시 12월 불참 결정 및 총파업 선언으로 이어지는 행보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영삼 정권의 노개위에 대한 민주노총의 참여는 “참여 – 불참 – 재참여 – 재불참과 총파업 선언”으로 이어졌다. 이후 12월 26일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날치기 통과에 맞서 96~97 총파업 투쟁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권영길 중심의 ‘국민파’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이 김영삼 정권의 노개위로 표현되는 사회적 합의주의와 맞닿았고, 96~97 총파업투쟁 과정에서 타협전술이라 할 수 있는 수요파업의 전환이라는 타협적 모습을 보였다.

 

3)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1998년) : 정리해고제 도입 및 근로자 파견제 26개 업종으로 확대

 

1997년 11월 IMF구제금융 신청 이후 정부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 받는 조건으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중심의 자유화 정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김대중 정권은 취임과 동시에 IMF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1기 노사정위원회를 제안하는데 이에 민주노총은 참여를 결정하고 1998년 1월 제1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을 하게 된다. 이때 민주노총 지도부의 상황은 96~97 노동법 총파업 투쟁 이후 다가오는 대선 투쟁을 위해 권영길 위원장이 사임을 한 상태이고 곧 이어 양규헌 수석 부위원장도 일신상의 사유로 사임을 해서 일반직 부위원장이었던 ‘국민파’의 배석범 부위원장이 수석 부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아 민주노총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을 때였다. 배석범 직무대행체제의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권이 제안한 제1기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같은 해 2월 6일 정리해고제 및 근로자파견법 제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사・정 잠정합의를 하고 이 잠정합의안을 2월 9일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 상정하게 된다.

한편 현장 노동자의 흐름은 1996년 12월 출범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1998년 1월 10차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를 통해 ‘총파업 조직을 위한 공동 실천단’을 구성한다. 또한 ‘노사정위원회 탈퇴하고 지체 없는 총파업 투쟁으로 생존권을 사수하라’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민주노총의 노・사・정 참여 및 잠정합의안의 부결을 결의한 상태였다. 2월 9일 민주노총의 대의원 대회에서 노・사・정 잠정합의안을 가결 시키려는 ‘국민파’의 배석범 직무대행 체제와 잠정합의안 부결 및 노・사・정 위원회 탈퇴를 요구하는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를 중심으로 한 ‘현장파’ 조직들의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잠정합의안은 부결이 되고 배석범 직무대행 체제는 사퇴를 하고 단병호를 중심으로 한 ‘중앙파’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총파업을 결의한 비상대책위원회는 결국 총파업을 철회하고 임원 선거로 돌입하는 과정을 가지면서 제1기 노사정위원회에 관련한 논쟁은 마무리가 된다. 한편 김대중 정권은 2월 국회에서 정리해고제 2년 유예 조항 삭제, M&A에 의한 정리해고제, 근로자 파견제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을 개정한다.

 

4) 노무현 정권의 사회적 협약 – 노・사・정 대표자회의(2004년~2006년) : 근로자 파견제 전면 확대, 기간제(1년에서 2년으로 연장)

 

2004년 1월 민주노총 4기 임원선거에 ‘국민파’와 ‘비리파 노연’의 연합후보인 이수호- 이석행 후보조가 당선이 된다. 또한 일반 부위원장에도 강승규를 포함한 김지혜, 이혜선, 오길성, 신승철 등 ‘국민파’와 ‘비리파 노연’ 연합으로 구성된 “전국회의-노연” 연합 지도부가 구성된다. 이로써 민주노총 최초로 4기 임원은 ‘국민파’와 ‘비리파 노연’의 연합 단독 지도부를 구성하게 된다. 이수호 집행부는 당선과 동시에 노・사・정 위원회 복귀를 선언하고 이를 2005년 개최 예정인 33차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 상정하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한편 노무현 정권은 20404년 9월 26개 업종으로 제한되어 있던 파견 노동 허용 범위를 무제한으로 확대하고 사용기간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9월 10일 개최된 32차 민주노총 대대에서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안이 철회되지 않으면 노사정대표자회의와 관련한 일체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약간의 입장변화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노총의 2005년 1월 20일 개최된 33차 대의원 대회에 자동 상정된 사회적 교섭 참여의 건은 노무현 정권의 노동법 개악안이 국회 상정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별 논의 없이 유예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수호 집행부는 2005년 2월 1일 개최된 35차 대의원 대회에서 사회적 교섭 참여의 건을 상정한다. 이에 조합원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신나 및 분말 소화기를 뿌리며 반대를 했고, 논란이 지속되다가 결국 정족수 미달로 대의원 대회가 유예되었다.

한편 현장조직은 1998년 8월 17차 대표자회의를 끝으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해산을 한 뒤, 2004년 “사회적 합의주의 노・사・정 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 노동자 투쟁 위원회(이하 전노투)를 구성하여 노・사・정 담합 반대를 외치면 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이다. 전노투는 2004년 11월 14일 동국대학교에서 개최된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 1천 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는 독자집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2월 1일 민주노총 34차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사회적 협약 참여 건이 유예된다. 이후 ‘중앙파’ 현장조직인 전진은 2월 22일 대의원 대회를 앞두고 “민주노총 2.22대의원 대회에 대한 <전진>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민주노총의 사회적 협약 참여에 대해 반대 입장을 제출했다. ‘중앙파’ 전진 이외에도 민주노총 중앙위원 연서로 민주노총의 ‘사회적 협약’에 대한 반대 입장을 제출한다. 전노투 또한 반대 입장과 더불어 2월 22일 대의원 대회 직전인 20일 긴급 논의 제안을 한 상태였다. 애초에 2월 22일 소집되었던 대의원 대회가 연기되어 3월 15일 개최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사회적 협약’ 관련한 안건이 처리가 무산되었다. 이날 대의원 대회는 사회적 교섭안 승인건과 함께 위원장 신임의 건도 함께 논의가 되었고 사회적 교섭안 승인이 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은 사퇴를 하지 않고 대의원 대회를 마무리 하였다.

3월 15일 대의원 대회 무산 이후 민주노총은 3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위원장 책임 하에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참여하고 노・사・정 교섭 방침 관련해서는 추후 대의원 대회에서 승인여부를 결정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대의원 대회 논의 안건인 사회적 교섭 관련 안건을 위원장 직권으로 결정함으로써 노동자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게 된다. 이수호 집행부가 노・사・정 대표자회의 참여 관련해서 대대 결정 사항을 부인하고 위원장 직권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① 이수호 집행부가 민주노총 최초로 ‘국민파’와 ‘비리파’인 노연의 연합 단독 집행부라는 점과 함께 ② 사회적 교섭에 반대했던 ‘중앙파’ 전진의 임 성규 의장이 3월 9일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가능했다. 결국 이러한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을 근거로 이수호 집행부는 4월 5일 개최된 3차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를 하게 된다.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3회나 무산 또는 부결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장 사퇴를 부인하고 위원장 직권으로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참여했던 이수호 집행부는 결국 2005년 11월 강승규 수석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리파 노연’의 비리 사건이 공개되면서 총사퇴를 하면서 마무리가 된다.

 

5) 문재인 정권의 노사정위원회(2018년) : 근로기준법 개악 및 최저임금 산입 범위 확대

 

2018년 1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한 민주노총 김명환 집행부를 상대로 1월 11일 문성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은 대국민 기자회견 방식으로 오는 1월 24일 “새로운 사회적 대화를 위한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제안하게 된다. 이에 대해 김명환 집행부는 1월 19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노사정대표자회의는 참여는 하되 관련 중집(1월25일)회의를 거쳐야 하고 2월 근기법 개악이 강행 통과 시 모든 논의를 원점에서 재고하겠다.’는 조건부 참여 의사를 밝혔다. 결국 민주노총은 1월 25일 2차 중앙집행위원회의 논의 이후 1월31일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전격 참여를 하게 된다. 지난 2009년 11월 탈퇴 이후 8여년 만에 참여를 하게 된다. 또한 김명환 집행부는 1월31일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 이후 사회적 합의주의 관련해서 총괄교섭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2월6일 개최된 대의원 대회에서 승인을 받게 된다. 민주노총의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 이후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문재인 정권은 노동시간 단축을 빙자한 임금삭감과 장시간 노동 제도화 관련한 근로기준법을 2월 28일 아무런 저항 없이 국회에서 통과시킴으로써 근로기준법 개정 작업을 일단락 하게 된다. 선거 투쟁의 전 과정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회적 합의주의와 근로기준법 개악이 선거가 끝나자마자 일사천리로 진행이 된 것이다.

‘김명환 집행부 임기 시작(1.1) ⇨ 문재인 정권의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 제안(1.11) ⇨ 청와대 간담회에서 민주노총의 참여 의사 밝힘(1.19) ⇨ 민주노총 중집에서 참여 결정(1.25) ⇨ 민주노총 8년여 만에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1.31) ⇨ 민주노총 대대 승인(2.6) ⇨ 국회에서 근로기준법 개악(2.28)’ 그리고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이 과정에서 근로기준법 개악을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사라졌다(아래 그림 참조).

그림3) 일자별 민주노총의 노사정 대표자회의 참여와

근로기준법 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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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단축을 빙자한 근로기준법 개악 이후 문재인 정권은 최저임금인상 효과를 무력화하기 위한 노골적 작태가 지속되고 있다.

 

4. 결론

 

사회적 합의주의는 1920년대 국가적 합의주의에 이어 1930년 사회적 합의주의 그리고 1980년대 신자유주의 합의주의로 발전하면서 지속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1993년과 1994년에 걸쳐 추진된 김영삼 정권의 노・경총 임금합의에 이어 전면적 노동법 개악을 꾀했던 1996년 김영삼 정권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 공세. 이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가 확대되었던 1998년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폭력 사태까지 발생하다가 위원장 직권으로 참여를 결정하고 결국 근로자 파견제 전면 확대 및 기간제 연장의 결과를 낳았던 2004년과 2006년 노무현 정권의 노사정대표자회의. 그리고 촛불항쟁의 적자라 자임하는 문재인 정권의 의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문재인 정권의 노사정위원회(대표자회의)로 사회적 합의주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노・사・정 3자의 합의구조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 사회적 합의주의는 자유주의적 정권인 문재인 정권의 계급적 성격과 함께 ‘사회적 합의주의’를 찬동하는 현 민주노총 김명환 집행부의 노선이 결합하면서 현실 투쟁의 걸림돌로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노동자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중재자인 양 자본주의 국가 성격을 숨기고 있는 문재인 정권의 국가 성격을 어떻게 규정 할 것인가? 그리고 사회적 합의주의에 찬동하는 노선을 가지고 있는 민주노총 김명환 집행부 임기에서 ‘사회적 합의주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결국 이 몫은 현장에서의 치열한 토론과 함께 아래로부터의 투쟁만이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계급적 본질을 명확히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합의주의를 통해 노동유연화를 중심으로 한 노동통제 정책을 취하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입장이 될 것이다.


* 본 글은 지난 3월 경기지역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던 토론회 발표문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1) 사회적 합의주의(corporatism)의 어원은 중세 장원제도에서 안정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정책 결정 참여를 했던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전제로 자율적 직능 집단들(corporation)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가 있다.

2)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으로 인해 당시 50%였던 고용률이 75%로 향상 되었다. 한국의 경우 박 근혜 정권이 대선공약으로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을 도입하여 고용률 70%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Apr 4th, 2018 | By | Category: 이론, 정세와노동 | 조회수: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