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역사] 1848년 2월: 1848년 2월 혁명과 공산당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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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영 | 회원

2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은 자유주의 운동을 촉발시켜 유럽은 물론 세계의 국제정치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즉위한 ‘시민의 왕’ 루이 필립은 초기에는 선거법을 개정하며 유권자를 늘리는 한편 반동적인 귀족세력을 제어하며 ‘나름대로’ 민주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그리고 184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경제는 크게 발전한다. 1847년의 증기기관 생산은 1830년의 8배, 석탄의 소비는 5배에 달하였다. 또한 1842년 철도법의 시행으로 각종 토목공사가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이런 경제성장의 수면 아래에서는 열악한 노동조건이 존재했고 노동자 민중의 삶은 매우 비참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급진주의 이론과 함께 공상적 사회주의가 당시에 만연하였다.

1846~1847년에 유럽은 농산물 흉작으로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을 맞게 되었고,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치열해졌으며 선거권 확대에 대한 요구도 거세졌다. 당시 유럽은 실업과 사회불안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에 프랑스의 기조 내각은 탄압을 위주로 하는 반동적인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그러자 의회에서는 티에르가 중심이 되어 반정부운동이 격화되었고 의회 밖에서는 개혁연회운동(改革宴會運動)이 전개된다.

이러한 운동을 정부가 금지하자 2월 22일 파리에서 노동자와 학생의 대규모 시위와 행진을 하게 된다. 10만 명에 달하는 인파는 성난 파도처럼 의회를 향해 행진했다. 경비를 맡은 국민방위군은 시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이 밀려나자 정규군이 시위 군중을 진압한다. 23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고 루이 필립 왕은 군대를 증강시켜 이들을 막으려 하지만, 민중은 이제 루이 필립 왕마저도 적으로 여기게 된다. 시위의 규모가 커지고 격화되자 24일에 드디어 루이 필립이 퇴위하고 영국으로 망명한다. 이렇게 7월 왕정은 종말을 고한다.

프랑스는 드디어 공화정이 선포되었다. 임시정부는 라마르틴이 이끄는 우파와 루이 블랑이 이끄는 좌파가 어느 정도 협력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루이 블랑의 주장으로 설치된 ‘국립작업장’은 파리 근교에 천막을 치고 만들어졌다. 국립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씩 하수도를 파거나 또는 공원에서 흙을 나르는 일을 하면서 2프랑의 일당을 받았다. 국립작업장의 설치로 10만 명 이상의 실업자가 구제되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그러한 시책에 불만이 많았다.

 

 

2월 혁명과 유럽

 

1848년 당시 유럽의 현실을 본다면 영국, 프랑스, 벨기에 정도가 자유주의 헌법을 갖고 있었고 그 밖의 모든 국가들의 현실은 1815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파리의 자유주의는 혁명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그 밖의 지역에서는 헌법의 요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파리의 혁명으로 이런 요구는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혁명은 파리에서 발생한다는 신화가 현실로 되었다. 독재에 대한 저항세력이 한순간에 밀물이 되어 쏟아져 나온 것이다. 파리가 기침을 하면 유럽은 감기가 든다는 말처럼. 혁명은 곧 빈으로 옮겨 갔다. 부다페스트, 프라하, 빈의 자유주의 요구들이 결집되어 3월 중순, 빈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자 메테르니히가 물러나게 되었다. 황제는 자유주의 헌법을 약속하였고 헝가리에게는 거의 독립국가에 가까운 법적 지위가 약속되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도 혁명이 일어난 것은 물론이었다. 나폴리, 로마, 플로렌스, 튜린에서도 자유주의 헌법이 주어졌고 오스트리아인이 밀라노에서 축출되었다. 베니스는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3월 하순 사르디니아는 오스트리아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독일 각지에서도 3월의 베를린 혁명을 비롯해 소요가 만연되었다. 독일에서의 이런 소요는 먼저 통일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3월 21일 프로이센 국왕이 독일 국민의 대표자라고 선포되었고 보통선거로 구성된 국민의회가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되었으며 이 의회가 독일연방 의회를 대신하게 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여름이 되자 혁명의 주도 계층 사이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혁명이 실패하게 될 징조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848년 4월 프랑스에서 총선거가 치러진다. 남자들은 재산에 관계없이 투표할 수 있는 보통 선거가 실시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선호하였지만, 농민들은 달랐다. 또한 자본가와 성직자들도 사회주의자들을 반대하였다. 결국 4월 총선에서 성직자, 귀족, 그리고 자본가와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공화파가 승리한다. 선거에 승리한 공화파는 국립작업장을 폐쇄한다. 이에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4월 선거로 구성된 국민의회를 반대하여 6월에는 드디어 유혈사태가 발생되었다. 정부군은 무차별 진압을 단행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추방된다. 이제 의회는 제2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한다.

오스트리아에서도 혁명이 서서히 진압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6월에 프라하를 포격하였고 보헤미아 지방은 군사 통치에 들어갔다. 이탈리아에서도 사르디니아 군대가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를 다시 회복하였다. 독일에서는 독일 통일이 어떤 형식을 띠어야 하느냐, 독일 통일의 국경을 어떻게 획정하느냐 하는 이른바 대‧소 독일의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2월 혁명과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 형태로 런던에서 발표된 것이다. 1836년 파리에서 독일 망명자들에 의해 결성된 ‘정의자동맹’은 이후 활동 중심을 런던으로 옮겨 1847년 봄부터 마르크스(1818~1883)와 엥엘스(1820~1895)에게 접근해 애초에 바이틀링 등이 전개한 공산주의와 음모적 형태로부터 탈피하려고 했다. 1847년 여름에 런던에서 열린 대회를 통해 이 동맹은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후 11월의 대회에 출석해 발표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토론을 거쳐 승인됨으로써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강령을 기초하도록 위임했다.

당시의 상황하에서는 당연히 비밀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던 국제적 노동자 결사인 공산주의 동맹은 1847년 11월 런던에서 열린 대회에서 앞으로 공포할 상세한 이론적·실천적 당 강령의 작성을 맑스와 엥엘스에게 위임하였다. 이렇게 작성된 ≪선언≫은 1848년 2월 혁명 몇 주일 전 인쇄를 위해 런던으로 보내졌다. ≪선언≫의 프랑스어판으로는 1848년 6월 봉기 직전에 빠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1)

 

 

구질서의 회귀

 

2월 혁명은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 지역을 한동안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그러나 1848년 말부터 유럽 각지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기 시작해 1851년에 이르러서는 유럽 정치질서는 2월 혁명 이전의 상태로 완전히 돌아갔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 10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4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의회 내의 반대파를 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대통령 임기를 10년 연장하는 것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그리하여 루이 보나파르트는 1852년에 황제로 즉위하며, 나폴레옹3세로 불리게 된다. 이로써 제2공화정은 불과 4년 만에 무너지고 프랑스는 제2제정이 성립된다.

오스트리아의 사정도 비슷하였다. 페르디난드 황제는 18세의 프란시스 요셉에게 양위하면서 2월 혁명 이전의 질서로 회복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혁명 이후의 약속에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강화하는 헌법이 다시 채택되었고 헝가리를 점령하였다. 이에 헝가리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의 반란을 러시아의 지원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1849년 6월 러시아군은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하였다. 헝가리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의 혁명은 오스트리아군의 개입으로 진압되었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1849년 2월 공화국이 선포되고 교황이 축출되는 사태가 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프랑스군이 개입해 1850년 4월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교황은 이제 프랑스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한편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1849년 2월에 헌법을 채택하고 프로이센 국왕을 독일 황제로 지명하였다. 이것은 오스트리아와 무력 충돌을 거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다. 4월에 프로이센 국왕이 그 지명을 거절하게 되자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1850년에 프로이센은 에어푸르트에서 연방 회의를, 오스트리아는 이에 맞서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연방 회의를 개최해 독일연방 의회는 양분되었다. 이에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응징하려는 강경 자세를 취하게 되자 프로이센은 11월 오스트리아에 굴복하였다. 독일연방은 2월 혁명 이전의 질서로 환원되었다.


1) 칼 맑스・엥엘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1≫, 박종철출판사, 2007, p.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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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Feb 21st, 2018 | By | Category: 정세와노동, 회원마당 | 조회수: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