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백남기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 살해된 요르단 언론인 나헤드 하타르 선생의 유족들은 요르단 정부의 사과를 요구한다

 

 

 

 

백남기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 나헤드 하타르 선생도 돌아가셨습니다. 두 유족들이 지금 요구하고 있는 것은 정부의 사과입니다. 한국의 모든 언론에서 나헤드 하타르가 반이슬람 발언으로 암살당했다는 곡해만 있었습니다. 훗 출판사가 언론인 나헤드 하타르 선생 살해 사건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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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헤드 하타르>

2015년 1월 요르단 국왕과 왕비 라비아는 2015년 1월 프랑스에서 ≪샤를리 에브도≫를 위한 표현의 자유를 위한 행진을 전 세계 지도자와 함께 했다. 2년이 채 되지 않아 나헤드 하타르, 56세의 크리스찬 가문 출신의 요르단 작가가 한 카툰을 페이스 북에서 올렸는데 요르단 정부는 종교 모독죄로 그를 체포했다.

하타르가 올린 카툰은 ISIS의 지도자로 작년 겨울 죽은 아부 살레가 신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카툰의 등장인물은 숱한 살육과 강간, 인신매매를 하는 IS의 지도자인 아부 살레라는 것은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아부 살레가 벌거벗은 두 명의 여자와 누워서 담배를 피우며 신에게 포도주와 캐슈너트를 가져다 줄 것을 요청하는 카툰이었다.

하타르는 이 카툰을 올리면서 분명하게 다에쉬의 신이라고 올려서 논란의 여지가 될 것이 없다. 중동에서는 IS를 다에쉬라 부른다. 짓밟고 으스러뜨리다란 의미로 그들이 테러 집단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테러 집단이 IS(ISLAIC STATE)라는 명칭으로 이슬람을 내거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숱한 살육과 강간, 인신매매를 하는 악마들이 말하는 이란 게 종교에서 말하는 신과 어떻게 다른가 분명하게 드러내는 카툰이었다. 게다가 그 카툰은 본인이 만든 카툰도 아니고 링크를 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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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르는 카툰을 지우고 나서 ISIS의 추종자들과 무슬림 형제단이 신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조롱하기 위해서라고 해명했다. 아부 살레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IS를 안다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해명이었다. 사실은 해명 자체가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나 명백한 메시지가 있는 카툰이었다.

나헤드 하타르의 죽음에는 요르단 정치가 압축적으로 들어 있었다. 요르단 정부와 요르단 정부의 라이벌인 요르단 무슬림 형제단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우선 요르단 정부와 이슬람의 관계를 짚어본 후, 요르단 정부와 라이벌인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래야 나헤드 하타르의 유족들이 정부에 대해서 사과를 요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 요르단 정부와 이슬람

요르단 정부는 그를 체포한 뒤 25일간 감금한 후 9월 초에 보석으로 석방했다. 체포한 이유는 그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그를 찾아갔으나 그가 없었기에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하타르는 이 사건의 판결을 위해서 암만 법정으로 가는 길에 총에 맞아 암살을 당했다. 살인 용의자는 49세로 모스크에서 설교하던 자로 이미 15세 소년을 신을 모독한 행위로 구타하여 체포된 전력이 있었다.

요르단 국왕이 추모행사에 참가했던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둘러보자.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을 계속 모독해 왔는데, 언론에서 예를 가장 많이 든 것이 나체로 누운 예언자 무하마드가 내 엉덩이가 마음에 드냐라고 말한 카툰이었다. 이 카툰에서는 예언자 무하마드 뒤에 카메라가 있었다. 예언자 무하마드를 포르노를 찍는 배우로 묘사한 것이다.

요르단 정부는 예언자 무하마드를 직접 비난한 카툰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자고 주장하지만, IS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카툰에 대해서는 얼토당토않게 이슬람 모독이란 죄를 붙여서 하타르를 체포했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요르단 정부는 의식적으로 그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가 일도록 기여했다. 이 죽음은 예견된 것이었다. 요르단 정부가 그를 유죄로 선고했기에 대중적인 분노에 정당성을 주었다.

요르단 국왕과 왕비가 무슬림을 명백하게 모독했던 ≪샤를리 에브도≫를 위한 추모행진을 한 것과 왕정 국가 요르단의 정부가 ISIS의 지도자의 얼굴이 분명히 드러난 카툰을 SNS에 게재했고 ISIS와 무슬림형제단을 조롱했다는 해명을 했음에도 신성모독을 했다는 구실로 하타르를 체포한 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

요르단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극단적 종교를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검열을 계속해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기쁘게 해주고 있다. 요르단 정부와 무슬림 형제단은 라이벌이지만 이슬람이 통치이념인 국가를 내세우는 것에서는 공생관계이다.

요르단의 하심 군주정은 예언자 무하마드의 직계로 스스로를 언제나 온건 이슬람의 대표자로 내세웠다. 요르단 인구는 요르단인과 팔레스타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들도 증기하고 있다. 이 종족적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것은 이슬람이다. 요르단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97%의 수니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갈등은 예언자 무하마드의 직계인 하심 가문의 명예로 봉인해 오고 있다.

요르단 왕정의 정치적 반대파는 무슬림 형제단이다. 하심 가문보다는 자신들이 더 이슬람을 잘 구현하는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해 오고 있다.

요르단 정부는 6월 하타르의 체포 전에 유명한 이슬람 학자인 설교자인 암자드 꾸르샤흐를 구금했다. 그가 IS와 요르단 정부가 협업하여 시리아 반군인 알 누스라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했기 때문이다. (ISIS는 알 누스라가 자기들 하부조직이라고 했지만 알 누스라는 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실과 무관하다고 밝힌 바 있다.) 국가 안보 위원회는 그의 보석을 거부하여 그는 3개월간 구금되었고 보수적인 요르단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하타르의 체포는 꾸르샤흐가 감옥에 있는 동안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하타르의 체포를 요르단 정부의 꼼수라고 보고 있다. 요르단 정부가 저명한 설교자를 감금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이슬람을 모독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할 정도로 신심 깊은 정부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쇼라는 것이다.

요르단 형법에는 신성, 종교적 상징을 모독하거나 분파적인 충돌을 자극하는 것을 범죄로 보고 있으며 이 적용은 자의적이고 선택적으로 진행된다.

요르단 정부가 하타르의 살해 이후 하타르에 대한 증오를 퍼뜨리는 것은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온라인에서는 그는 죽어야 했다는 주장들이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 애초에 하타르에 대한 증오 발언이 일어나도록 자극한 것은 요르단 정부였다. 정부가 하타르를 이슬람 모독이라고 체포했기 때문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대해서 정당성을 이미 준 것이다.

2. 서구의 푸들인 요르단 정부와 요르단 국왕의 라이벌인 무슬림 형제단의 복잡한 협력관계

요르단 정부의 이런 자의적인 정치 때문에 요르단에서 이슬람주의는 없어질 수가 없다. ≪샤를리 에브도≫ 추모 행사에 참가하면서도 다에쉬(IS) 살인마 아부 살레의 얼굴이 뻔히 나오는 카툰을 이슬람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체포하는 요르단 군주정이 존재하는 한, 또 다른 하타르의 살해는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요르단에 살고 있는 진보인사들은 중동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위협을 느끼기에, 이들은 하타르가 암살당한 것이 IS나 무슬림 형제단을 조롱하기 위해서라는 하타르의 해명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빼고 발언을 하고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르단 정부에만 묻고 있다.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은 중동의 국가는 요르단과 이집트 두 국가지만 이집트인들에게는 1983년 전쟁에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자랑스러운 기억이 있다. 이 전쟁은 미국의 5,000번이 넘는 물자수송을 통한 이스라엘 지원으로 결국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미국과 협력하면서 독재를 해온 무바라크 독재 치하에서 살았지만 그 증오는 꺼지지 않았다. 이집트에서 설문조사를 하면 전 국민의 80%가 반미, 반이스라엘 정서를 확실히 드러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요르단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푸들로만 살아왔다. 요르단은 서구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서 하심 가문을 간택해서 세워진 국가이고 요르단 건국 이래 계속 서구의 원조로 살아온 국가다. 이 완충지대에서 온갖 종족적 분열이 있는데 이슬람으로 겨우 봉인하면서 유지해 오고 있는 것도 무함마드의 후손 하심 가문의 역할이었다.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이 집권을 하고, 이집트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았을 때 요르단 정부는 쌍수를 들고 환영을 했다.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집권이 요르단에서 현 정권의 유일한 라이벌인 무슬림 형제단의 성장에 영향을 주지 않기를 원해서이기 때문이었다.

요르단의 무슬림 형제단은 70년간 이어져오면서 요르단에서 유일한 국왕의 라이벌이다. 요르단 정부는 올해 사소한 트집을 잡아서 무슬림 형제단을 불법 단체로 규정했고 새로운 무슬림 형제단을 인정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불만이 폭발했고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존재 근거 자체가 이슬람에 둔 만큼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자신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 무슬림 형제단과 요르단 국왕 모두가 원하던 희생양이 나타났다. 나헤드 하타르였다. 요르단 정부는 그를 이슬람 모독 혐의로 체포했고, 무슬림 형제단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는 IS와 무슬림 형제단를 조롱하기 위해서 카툰을 올렸다는 나헤드 하타르를 공격했다. (양 진영 모두 나헤드 하타르의 그간의 언론 활동이 못마땅했던 것도 동일하다.)

살해는 무슬림 형제단이 했는지, 그 심정적 동조자가 했는지 알 수 없다. 하타르의 암살자가 무슬림 형제단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마치 간디의 암살자가 힌두 극우였지만 힌두 극우 조직과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직접 밝혀내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별 다른 증거를 찾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은지 모른다.

하타르가 살해된 것은 이슬람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요르단 정부와 무슬림 형제단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이슬람주의자가 알게 모르게 협력한 결과이다.

3. 문제는 종교가 아니다

하타르는 종교 문제로 살해된 것이 아니다. 실패한 국가에서 정치범으로 살해된 것이다.

하타르의 살해는 실패한 국가인 요르단의 현실적인 문제이다. 중동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경전을 들이대면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을 한가롭게 이야기하거나 어떤 종교인지 논하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현실에서 인간이 해방되지 않고서는, 구체적으로는 민주적 국가, 현실적 국가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맑스는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란 글에서 종교로 현실을 다 설명하려는 바우어를 비판하면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논한 바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실패한 국가가 종교를 끌어들여서 자신의 존립 근거를 확보한다는 행간을 읽을 수가 있다.

아래 인용구절에서 맑스는 실패한 국가인 프로이센이 기독교를 끌어들이는 것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유대인성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을 함께 비판한다. 아래 구절에서 기독교를 현재의 이스라엘에서의 유대교로, 요르단에서의 이슬람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인용문에서 기독교 다음에 (이슬람)을 넣어보았다.

 

소위 기독교(이슬람) 국가는 국가에 대한 기독교(이슬람)적 부인일 뿐, 결코 기독교(이슬람)의 국가적 실현이 아니다. 아직도 기독교(이슬람)를 종교형식으로 공인하는 국가는, 아직도 기독교(이슬람)를 국가형식으로 공인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여전히 종교와 종교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국가는 종교의 인간적 근거에 대한 현실적 완수가 아니다. 그러한 국가는 이 인간적 핵심의 비현실성을, 공상적 형태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기독교(이슬람) 국가는 불완전한 국가이며, 기독교(이슬람)는 이 불완전성에 대한 보충이자 신성화(Heiligung)로 간주된다. 그 때문에 종교는 국가에게 필연적으로 수단이 된다. 그런 국가는 위선의 국가다. 완성된 국가가 국가의 일반적 본질 안에 놓여 있는 결함 때문에 종교를 국가의 전제 가운데 하나로 고려하는지,아니면 불완전한 국가가 특수한 실존 안에 놓여 있는 결함 때문에, 즉 결함 있는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종교를 국가 자신의 토대로 공언하는지,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종교가 불완전한 정치가 된다.

전자의 경우 완성된 정치의 불완전성 자체가 종교 안에서 드러난다. 소위 기독교(이슬람) 국가는 국가로서 완성되기 위해 기독교(이슬람)를 필요로 한다. 민주적 국가, 현실적 국가는 자신의 정치적 완성을 위해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적 국가는 국가 내에서 세속적으로 종교의 인간적 토대를 실현하기 때문에 종교를 제거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소위 기독교(이슬람) 국가는 종교에 대해 정치적인 태도를 취하며 정치에 대해 종교적인 태도를 취한다.1)

 

맑스가 바우어를 비판한 맥락을 적용해서 현재의 시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중동에 대해서 종교로만 설명 반복하는 학계/미디어의 담론 상품들이다. 종교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서구의 푸들이지만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임을 내세우면서 이슬람의 뒤에 숨은 요르단 정부는 이런 담론 상품으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요르단을 하심 가문이 통치하는 것보다 나은 이슬람 국가를 만들겠다는 믿음에 사로잡힌 무슬림 형제단들에게도 이 담론 상품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위선의 국가에게는 이 담론 상품들은 오히려 유익하다. 이 종교국가들은 국가로서 완성되기 위해서는 종교를 필요로 한다.

문제의 근원을 민족의 특정한 기질이나 종교에서 찾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기에 문제의 해결만 지연시키는 것이다.

1840년대 유대인 차별 문제의 핵심을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립으로 판단했던 바우어에 대해 맑스는 종교를 논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맑스는 피억압자로 살아왔던 유대인이 갑자기 사회의 주인이 된 것을 화폐의 권력으로 판단했고 화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유대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유대교를 고찰하는 것이지, 바우어처럼 안식일의 유대인(Sabbatsjuden)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일상의 유대인(Alltagsjuden)을 고찰한다. 우리는 유대인의 비밀을 그들의 종교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종교의 비밀을 현실의 유대인에서 찾는다.

무엇이 유대교의 세속적인 근거인가? 실천적 욕구, 사욕이다.

무엇이 유대인의 세속적인 제의인가? 악덕 상행위(Schacher)가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유대인의 세속적 신인가? 화폐야말로 유대인의 세속적 신이다.

이제 좋다! 악덕 상행위와 화폐로부터의 해방, 따라서 실천적인, 실질적인 유대교로부터의 해방이 우리 시대의 자기해방일 것이다. 악덕 상행위의 전제가, 악덕 상행위의 가능성이 완전히 뿌리 뽑히도록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유대인을 존립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2)

 

얼마 전 번역되어 나온 ≪주디스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에서 유대계 지식인인 주디스 버틀러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 해결을 위해 (역사적 근거도 확실하지 않은) 비유대인 모세를 이야기하면서, 유대인의 특성이라는 유대인성을 끌어들여서 공존의 가능성을 아무리 정교하게 이야기해 본들, 그것 역시도 결국은 이 수준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유대인성, 안식일의 유대교를 논하는 것은 지식상품시장에서나 유용한 일이다. 유대교를 내세우는 최악의 인종주의 국가인 이스라엘도 주디스 버틀러가 비유대인 모세를 논하는 담론 상품을 서구 지식 시장에 출시하는 것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의 모세? 이슬람 ≪꾸란≫에 모세는 200번 가량 언급된다. ≪꾸란≫의 모세를 인용하면서 주디스 버틀러의 모세와 비교해 볼까? 부질없다. 지식상품 시장에서나 유용한 논의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과 지독한 인종주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에서 전범국가로 아직도 단죄 받지 않고 있는 것은 자본의 국제적인 힘이다. 요르단 정부가 일관성이라고는 정권 유지 목적외에는 없는 자의적인 독재를 해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자본의 국제적인 힘이다.

문제는 유대인성이나 아랍 민족의 특질이나 종교가 아니다. 문제는 100년이 넘어가는 중동에서의 서구, 구체적으로는 자본의 지배이다. 그리고 부차적인 문제로는 이 자본에 얽혀서 제대로 국가를 못 만들고 있는 것을 종교를 내걸고 방어를 하면서 독재를 하는 실패한 국가의 정권들이다.

요르단은 아랍의 봄 때 시위대에 밀려서 마지못해 약속한 정치개혁들도 지금 철회하고 있다. 요르단에서 하타르의 살해 책임을 정부에 묻는 항의 시위는 계속 되고 있다.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요르단에서 제2, 제3의 하타르가 또 살해될 것이다. 그리고 제 2, 제3의 하타르는 살해당한 후에도, 크리스찬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무신론자로 자처하면서 요르단을 민주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한 진보적인 언론인인 그를, 반이슬람 발언으로 죽은 기독교인이라는 보도 따위로 한국 언론에서 곡해되는 대우나 받을 것이다.


1) 칼 맑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김현 번역, 2015, pp. 38-39. (이슬람)은 필자가 넣은 것임.

2) 같은 글, pp. 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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