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골리앗 공화국? 다윗 노예국?

 

이영훈 | 회원

 

전부터 글을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그놈의 귀찮음과 힘든 노동 때문인지 안 쓰다가 주변 동지분의 직접 권유로 그동안 겪었었던 나름 내 인생에서의 노동의 역사를 끄적여 볼 기회가 생겨서 이렇게 노동의 과정을 적어 보게 된다.

뭐 거창하게 골리앗 공화국이라고 제목을 붙여놓은 이유는 작년 용산 헌책방을 뒤적이다 ≪골리앗 공화국≫이라는 “보리”라는 출판사에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만평과 글을 모아서 펴낸 20년쯤 되었던 짧지만 나름 재미났던 책을 읽고 앞에 그렇게 지었고, 다윗 노예국은 골리앗만 설치는 세상이니 힘이 없어서 맨날 밟히는 수많은 다윗들이 가득한 것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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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요즘 필자가 일하고 있는 건설현장

 

일단 이번 글은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는 중이지만 서비스직에 3년 이상 일했으니 서비스직 이야기부터 하려한다. 아, 그전에 첫 공장 노동에 대한 기억을 먼저 말해보자.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니면서 막연히 ‘빨리 일해서 돈이라도 벌어야지’ 하고 기다려 온 노동 현장인데 취업하고 얼마 안 있어 그런 생각은 그냥 사라지고 언제부터인가 ‘세상 살기 참 힘들구나’,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인가?’라고 느끼며, ‘먹고 살기위해서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건가?’ 하며 한숨을 내쉬던 게 첫 공장노동에 대한 기억이다. 학교에서 보내준 곳은 본사는 아침 8시 40분 출근 저녁 9시에 퇴근, 지방은 저녁 8시 30분까지, 토요일은 격주로 3시까지, 수요일은 저녁 6시에 퇴근하는 회사였다. 뭐 첫날부터 졸아서 크게 혼났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지금처럼 학업이나 학문에 대한 갈망이나 사회의 대한 일말의 의문정도를 빼면 정말 일해서 돈이나 벌어야지 하던 그런 어린 시절이었다. 3달 수습기간은 급여의 70%만 줘도 그러려니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 달 내내 그렇게 일에 잡혀 살고 2010년도 기준으로 석 달은 85만원 받고 (마지막 넉 달 째부터 수습기간이 끝났다고 준 게 126만 원 세금을 안 때면 140이라고 그랬다), 그나마도 한 달은 깔고 퇴직할 때 준다는 거를 사회경험이니 뭐니 하고 당연히 여겼다는 게 환장할 노릇이지만.

 

그렇게 어영부영 있다가 서비스직에 1년 3개월 종사하다 21개월 군대 갔다 오고 전역한 지 5일 만에 다시 같은 곳에 2년 동안 종사했는데 돌아보면 일하면서도 다른 생각이나 배울거리가 생기자(집회에 나가는 것도 있지만 연구소에 오게 된 것이 가장 컸다),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하고 싶으면 돈을 줄이거나 포기하든가 아니면 엄청난 노동강도, 시간 그리고 점점 많아지는 나이에 쫓겨 다른 것을 할 생각을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실업급여를 받고 쉬면서 서울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강의를 듣고 휴식과 학문에 대한 낙을 느끼다 건설 기능학교에서 조금 익히고 건설 일을 시작하면서 같이 일하는 분들은 두어 달 지나자 다시 일보다 무엇인가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보다 “일 먼저 생각해라”, “일 배워서 돈은 많이 벌 수 있다”, “기왕 공부할 거면 돈 되는 공부해라”(돈 되는 공부라는 게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책도 몇 권 읽었었고 경제기사도 나름 전부터 많이 봐왔지만 본인은 무슨 직업이 혹은 뭘 해야 여유도 생기면서 돈이 많이 벌리는지 모르겠다)라는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자본의 대한 갈망인지 자기들 나름 살아온 인생에 대한 괜찮은 것인지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그놈의 박봉이던 서비스직도 그놈의 “일이 먼저”, “회사가 먼저”라는 말이, 글을 쓰면서 그 지긋지긋했던 기억이 생각난다. 나의 20대에서 아직까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군대와 서비스직에 종사하던 때를 생각해 보면 일하면서 돈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고 군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봉사?(라고 쓰고 철저한 계급 제 억압 노동 착취사회라고 읽는다)에 보람 따위는 없었다. 공통점은 정말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기에 강제 혹은 반 강제로 해냈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하다.

 

어느 직업을 하나 공통으로 느낀 것은 사람들은 박봉이건 과한 노동 강도에건 일단 입사하여 일을 시작하면 일에 매달리기를 원했다. 개인의 일상? 그거 뭐지? 전역하고 다시 돌아온 사회는 스마트폰으로 가득했다. 휴대전화기의 메신저는 일이 끝나고 나서도 숙지 사항이네 중요한 일이 있네 하면서 가뜩이나 사람 응대하느라 걸레짝이 되어가는 몸을, 돈 버는 것 때문인 이유 빼고는 점점 일에 대한 의욕을 없애갔다. 매장 관리자 분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건지 두통약을 꽤나 자주 먹었다. 그놈의 회장이나 차장 기타 등등 높으신 분들은 허구한 날 이 매장 저 매장 들쑤시고 다니면서 메신저에 아주 불이 나게 만들고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한껏 가중시켜 주셨다. 높으신 분이 온다니 창고가 작아 박스 안에 넣어 내다놓은 상품들을 건물 외부 구석에 숨기기 바빴다. 높으신 골리앗들이 여기 매장 인테리어가 어쩌고 상품 매대 꾸며놓은 것이 뭐가 저쩌고 하면 약간 높은 중간 관리자 분들은 열심히 공유해서 “매장 사정에 맞게 이렇게 해 보고 저렇게 해 보세요.” 그래. 매장 관리하는 서비스직이 뭐 이쁘게 매대 꾸며놓으라는데 뭐 해야지. 그러나 더 짜증나는 것은 달마다 4일 쉬던 거를 대기업이 됐다고 8일 쉰다고 전보다 훨씬 좋아졌네 그러더니 그 이후 여지없이 어떤 자본이 그렇듯 중소, 중견 기업으로 받는 지원금이 없어져서 그런지 그만큼 직원을 줄이고 노동시간이 3시간 정도 짧고 매달 여전히 4번만 쉬고 5천 원 6천 원씩 식대가 안 나오는 파트타임 많이 뽑으라고 해 주셨다. 2년 이상 일하면 할 수 있는 연봉자도 줄이라고 그들은 닦달했다. 이러니 막상 일은 더 힘들어졌다. 사람은 적고 그나마도 새로 입사 시키려면 잘 안 뽑히는데 나중에는 결국 몇몇 달은 8번 다 못 쉬고 6-7번만 쉬는 경우도 있었다. 매달 한 번 있는 연차를 쉬는 데 쓰는 경우는 매장마다 다른데 여긴 뭐 매출이 더 나와서 직원이 바글바글해야 쓰든가 말든가 하지. 쉬는 걸로 쓰는 건 생각도 못 해 보고 일이나 해야 했다. 더 일한 건 퇴사할 때 받긴 했지만 군에 찌들다 집안에 손 벌리기 싫어 당장에 돈보다 여유 있게 그나마 좀 일을 하고 싶어 시작해서 휴식이 필요했던 나에게는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다. 재입사 후 또 다른 재앙은 “분임 조”라는 훌륭한 토론회의? 제도를 만들어서 오후에 근무하는 사람이나 휴무로 당일 날 쉬어야 되는 사람도 일단 휴무고 오후고 나발이고 한 두어 달에 한 번은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매장에 다 같이 모여 회의나 건의사항을 내게 만드는 아주 훌륭한? 제도를 만들었다.

이후 입사하고 몇 달 되지 않아 의욕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는 ‘어휴 회의 해 봤자 우리가 말한 거 어느 정도라도 해 줄 것도 아니고 전파사항이나 듣고 피곤만 남는 이딴 회의를 도대체 왜 해야 하나?’, ‘누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야?’라는 스트레스만 남았다. 남은 1년 하고 수개월 정도의 시간을 어떻게 더 일했는지…. 정말 모 웹툰에 나오는 말처럼 ‘고만해 미친놈들아!’라는 말을 세상의 중심에서 외치고 싶었다.

그 이후 나는 노동에 의욕이 생기지 않고 그냥 나름 열심히 일만 했다. 이건 진짜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의욕은 없는데 돈 벌어야 되니 몸은 움직이더라. 모두가 그렇듯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속으로 삭이면서. 가장 묘한 짜증이 생기는 경우는 새로운 매장의 준비나 폐업으로 업무상의 이유, 다른 이의 퇴사나 기타 등등의 온갖 이유로 정말 쉬고 싶을 때 잡은 휴무가 뒤집히는 경우였다. 휴무지원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쉬는 날을 하루 희생해서 폐점 빼고 새로운 매장 오픈 지원 때 가면 6만원을 주는 제도였다. 돈 6만원 받는다고 그거라도 받겠다고 열심히 지원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휴무 희생하고 8시간 일하고 꼴랑 6만원!이라는 내 눈에는 약 오르는 애매한 금액을 주는데(퇴사 직전 만원 정도 올랐나 좀 오르긴 했다), 지원으로 휴무가 갈려나가거나 일정이 하는 수 없이 바뀌면 정말 그때그때 다르지만 쉬어야 될 때 못 쉬게 되면 정말 힘들었다. 매출이 애매해 사람도 적은데 직원은 잘도 쪽쪽 뽑아갔다. 매장 만드는 데 관여한 중간직이나 높으신 분들은 매장 새로 오픈하면 그에 대한 추가 수당이 생기고 등등 좋겠지만 인원 관리하는 매장 점장들은 머리가 터져나갔을 것이다. 그래도 저건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정말 위험하고 스트레스가 불어나는 경우는 회사 홈페이지에 고객이란 자들이 민원을 올려서 어디 매장이 난리가 나서 팀장이고 계장이고 뭐고 높으신 분 지령이 내려와서 뭐 이런 직원이 다 있냐고 노발대발해서 쑥대밭이 됐다네 그러니 뭐 관리자나 높으신 분들이 점검을 나오네 마네 하며 항상 긴장하는 분위기가 되고 갑자기 비상사태라며 난리가 나고… 심심하면 이랬다. 나름의 조용한 일상?은 얼마 못 갔다.

이런저런 게 많지만 정말 이렇게 일 하다가 몸이 못 버티고 준비나 응대가 잘 안 된다 싶을 때 같이 일하는 동료 분들에게 잔소리를 듣게 되면 몇 달간은 마음을 다잡아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몇 년이고 누적되자 그때부터는 잘해야겠다가 아니라 몇 달 안 남기고는 아 안 돼, 도저히 그렇게 가식적으로 마음 못 잡겠다. 에라이, 선만 넘지 말자가 되어버렸다.

높으신 분들이 뭐라 그랬다는 지시사항이나 지적사항이 날아오면?

야이…씨…… 나랑 직원들이 그거를 몰라서 그러냐? 아오…진짜… 이런 개……

속으로 조용히 미쳐갔던 것 같다. 회사 골리앗들이 툭툭 던져대는 하나하나도 정말 짜증났는데 같은 사회적 약자인 다윗 주제에 골리앗 노릇 하겠다고 삐딱대는 인간을 보면 어느 순간 고객 응대하는 게 괜히 두려울 정도였다. 마지막으로는 일 때문에 만나야 하거나 응대하는 사람이 싫어졌던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사람이 싫을 때도 있었다. 군대에서 사람과 마주하는 게 힘들어 잠시라도 혼자 있고 싶고 훌쩍 사라지고 싶어도 그렇게 잠깐이라도 안 보이면 “어디서 있어서 걱정되게 만들었어요?”라면, 사회에서는 높으신 분들과 고객님들이 끊임없이 괴롭히고 일 끝나고는 공지사항이라도 있으면 메신저가 날아와 확인하고 답변하라고 열 받게 만들었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해지다 2년씩이나 하고 그래도 나름 열심히 일했는지 다른 매장에서 “연봉 해 볼래?”라고 제의가 들어왔지만 잠깐 고민하고 바로 때려치웠다. 그만둘 때 머릿속에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이대로 더 일하다가는 정말 미쳐버릴 거다. 때려치우자 때려치우자 때려치우자……’그렇게 3년 3개월의 빨간 간판 천원짜리 균일가 가계의 서비스직 노동이 끝났다. (다른 매장은 다른 매장만의 편한 점이나 불편한 점이 있겠지만 내가 일하던 곳에서 느낀 건 이랬다.) 지금 생각 안 나는 것도 있지만 생각나는 것은 일단 이 정도다.

 

돌맹이 하나 없는 다윗들은 그냥 골리앗이라는 자본이 시키는 대로 일하고 눈 밖에 나면 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뭐 별것도 아닌 월급 외에 간식거리에 가식적인 감사의 표시나 하고 자빠져 있었고 이렇게 무기력이 몸에 밴 다윗들은 돌맹이가 있었어도 아마 그러려니 하면서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들 너무 일만 생각하는 모습밖에 안 보였다.

 

다시 과거 기억으로 돌아가 학교에서 배운 공부라는 것이 해서 나쁠 것은 없었지만 지금 공부하면 부인 얼굴이 바뀌네 미래의 뭐가 되네 뭐로 돌아오네 등등 온갖 냉소적인 글 모음을 학급 게시판에 아무렇지 않게 붙여놓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던(그 가끔 혹은 자주 보이던 냉소, 잔인한? 글 모음은 초, 중, 고를 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이 과연 진정 학생이나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그런 말을 보고 들어도 괜히 짜증만 나고 공부하기 싫었기에 잘 모르겠다. 대부분의 강사나 선생님들은 잘 된 사람 이야기 몇 가지와 여러 가지 명언들 가지고 “우리들에게 골리앗은 못 되더라도 골리앗처럼 생각하고 살아라”라고 했던 것 같다. “나 혼자만이 아닌 수만 명의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되자!”라고 하던 분도 있었지만, 이건 의미나 가는 길과 방향에 따라 다르므로 그렇다 치더라도.

졸업하고 몇 년 더 지나자 밑바닥에서 가까스로 치고 올라와 거인이 된 사람들의 사연보다 7전 8기 끝에 9번째에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은 내가 크게 긍정적이지 못하고 특출난 꿈과 희망 대신 단지 삐딱한 사람이기 때문인가? 모르겠다 에이. 고등학교 3학년 때 물리를 담당하시던 남자 선생님이 우리에게 몇 번 해 주셨던 말이 있는데 유난히 그 선생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내용으로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여러분들이 꼭 무엇인가 대단하고 유명하고 높은 지위의 사람이 되고 그래야만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꼭 뭐 막 큰 돈 벌지 않고 적당히 벌어도 그 사회에 일원으로서 건강하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했다고 본다.”

그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자본주의에 현재를 찬란하게 살아가는 거인들에 대한 환상과 희망을 갖게 하고 미련을 남기는 말 대신 작지만 평범하고 건강한 육신과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도 단결해서 저항하고 싸우지 않으면 그런 적당한 벌이조차 힘겨운 일이기에 더욱 와 닿는 것일지도.

과거를 돌아본 김에 이 사회에서 그렇게 욕하는 박정희도 전두환도 노태우도 김영삼도 박근혜도 그리고 영원한 우리의?(정작 그렇게 떠받드는 그 다윗들은 그 “우리”에 없는 것 같지만 그렇게 세뇌된 다윗들이 그렇다니) 대통령이라고 그렇게 칭송이 자자한 김대중, 노무현도 공통점이 있다면 말투나 꼬시려 드는 방법이나 가르치려 드는 방식만 다를 뿐 항상 “골리앗이 우선”이라고 엄청 챙겨줬다. 다윗들의 밥그릇을 다 뺏고 빼앗은 걸로도 모자라면 박살내서라도.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깨져나갔다. 그렇게 훌륭하다는 김대중, 노무현 때는 자기네들이 권력의 칼자루 쥐고 뭐하다가 우리는 아직도 사람들이 8시간 이하 근무나 주 6일제는커녕 1주일 내내 터무니없는 최저임금 기본에 일에만 매달리는 게 미덕이고 온갖 산업의 역군이라는 직업들에서 산업재해, 초과근무, 과로사로 모자라 같은 계급에게 멸시받는 일까지 이처럼 비일비재한지.

아하! 노동자들의 여건 개선은 안 하고 눈감아 주고 노동자들의 저항 수단을 빼앗는 것을 법률로 열심히 지정하고 공단이나 기업단지에서 시위나 농성이 있을 때마다 우아하고 끝내주게 쳐냈기에 그래서 훌륭하다 하나보다! 그래 놓고 이놈 추종자들은 권력을 잃고 나서 권력 한 번 더 잡게 해달라고 징징대고 자빠져 있다.

진보라며? 훌륭하다매? 그동안에 칼자루 쥐고 있을 때는 정작 다윗들의 등골을 우려서 골리앗이 떠먹여 주는 게 그렇게 좋았나 보오? 앞으로 권력 잡으면 다 처낼 수 있다고? 그동안 칼 잡았을 때 저놈들에게 안 휘두르고 뭐하다가?

진보라는 놈들이 저러고 자빠져 있었으니 굳이 그들이 만든 법률과 정책, FTA 등 온갖 외교, 무역 협정을 손질만 좀 하고 이명박, 박근혜가 충실히 계승, 발전시켜 나가니 과거의 노동여건과 내가 막 사회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하건 별 차이 없이 개판이었던 거는 당연한 거였다. 진보들도 개선 안 한 노동 환경을 후임 두 명과 보수라는 자들은 대놓고 골리앗 세상인데 전혀 개선할 생각이 있을 리 없었지…. 맞아… 난 역시 바보였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누가 권력을 잡던 결국 자본을 많이 가진 골리앗의 입맛에 맞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과거에 민중의 편이었다고 알려진 사람조차도 그랬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눈치챈 것 같다.

90년대 골리앗 공화국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나 오늘날의 현대중공업과 모든 산업의 노동자들이 똑같이 죽어나가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난 사람이 죽는 게 “자본의 입장에서 더 값싸게” 먹히니 그렇다고 본다. 안전설비나 좋은 장비 갖추는 것보다 일하다 죽어도 공정은 계속 납기일에 맞춰 진행되고 그를 대체할 사람들은 남아나고… 자본의 입장에서는 그게 당연한 거다. 사람 죽는 게 더 싼 데 뭣하러 좋은 환경 갖춰주나?

서비스직으로 3년 이상 일하니 하루 이틀 일주일도 안 돼서 일하다 안 나온다는 연락도 없이 도망치듯 관두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장시간 길고 불규칙하고 고된 노동은 싫고 당장 돈은 좀 덜 벌더라도 여유시간은 좀 필요했던 나는 그냥 일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수십 수백 개씩 박스를 건물 위아래로 서너 시간씩 나르고 피곤한 몸으로 고객들과 수 시간씩 응대하고 하려니 그들 입장에서는 질려 버릴 만할 것이다. 이젠 이해한다. 참 웃긴다. 과거엔 이해 못 하던 것을 이젠 그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자신을 보니.

사람들은 4ㆍ19니 6월 민주항쟁이니 혁명에 성공한 역사가 있다고 자랑스레 떠들어대지만 아직 못다 한 혁명과 반란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서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가 바란 바뀌었다는 세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 흘리고 열악하고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이런 게 아니야!”라고 외치는 것은 정작 자본을 가진 골리앗들은 그동안 승승장구했기에 그들이 용인해 준 안에서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진짜 다윗들끼리 뭉쳐 노동자를 위한 혁명을 하자고 하면 저들은 분명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이 뭐가 되었든지 간에 노동자들을 우아하고 부드럽게 진보, 민주주의와 법질서 확립이라는 이름이나, 대놓고 지배계급의 고충과 의무와 미덕으로 어거지를 쓰면서 힘으로 짓밟거나.

덕분에 기존의 정치인이나 자본가,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에게는 미련 따위 없으니 한결 편하긴 하다. 오늘도 골리앗들은 끝도 없이 행복하기 위해 가진 게 많은데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다윗들은 언제나 찍소리 내다가 밟힌다. 이제 더 이상 그럴싸한 가식적인 희망이나 위안으로 달래고 싶지 않다. 이제 외치고 싶다. 골리앗 말고 인민 근로대중을 위한 국가를 갖고 싶다고.

글을 쓰는 중 7월 8일 전남 영광군 염산면 칠산대교에서 만들던 다리가 대놓고 미끄럼틀마냥 기울어지는 사고가 났다. 죽은 사람은 없지만 당연한 듯 반복되는 사고가 과연 안전 불감증인가? 오히려 도대체 또 얼마나 빼먹은 거냐? 죽은 자는 없지만 크게 다친 사람은 있다니 얼마나 목숨이 값싸길래 저지경이 되도록 노동자를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는지. 2019년까지라는 납기일이 그렇게도 촉박했나! 다음 날인 9일은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라는 자가 “민중은 개, 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 주면 된다”, “출발선상이 다른 것이 현실”이라며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라고 주둥아리를 놀렸다. 자본을 가진 자들과 그 밑에서 교육을 시킨다는 자들이 이제는 대놓고 저런 발언들을 하는데 나향욱이라는 자의 말에 의하면 일만 하면서 덤빌 생각도 말고 그나마 하고 있는 공부도 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린다. 기왕 민초들 개, 돼지로 만들 거면 투견이랑 멧돼지로 만들어 주셨으면 한다. 짐승처럼 달려들어 들이받아 버리고, 야수처럼 물어뜯어 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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