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26)

 

그로버 퍼(Grover Furr)

번역: 편집부

부록

─ 1차 자료들과 다른 자료들로부터의 인용들

15. “많은 사람들이 대규모 숙청(mass repression)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빠벨 뽀스띠쉐프(Pavel Postyshev)

흐루쇼프:

1937년 2월-3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표리부동한 세력(two-facedness)”과 싸운다는 구실로 가해지는 대규모 숙청과 관련하여 설립된 (교육: 역자) 과정의 정당성에 실제로 의문을 제기했다.

뽀스띠쉐프 동지는 이러한 의문들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혹독한 투쟁의 수년은 지나갔다고 규정했다. 기개를 잃어버린 많은 당원들이 이탈하거나 적진에 합류했다: 건강한 분자들은 당을 위해 싸웠다. 이때는 공업화와 집산화의 시기였다. 이러한 혹독한 세월이 이미 지난 후에, 까르뽀프(Karpov)와 그와 같은 사람들이 적진에 합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절대 생각할 수 없었다. (까르뽀프는 뽀스띠쉬프가 잘 알고 지냈던 우끄라이나 중앙 위원회의 노동자였다.) 그리고 현재, 증언에 의하면, 까르뽀프는 1934년에 뜨로츠키파에 포섭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1934년에, 당과 사회주의를 위해서 적들과 무자비한 투쟁의 긴 여정을 걸었던 한 정직한 당원이 지금 적들의 진영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어려운 시기를 당과 함께 했던 사람이, 1934년에 뜨로츠키파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해괴망측한 일이다…”

흐루쇼프는, 뽀스띠쉐프가 2-3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실제로 언급했던 것을, 심각하게 그리고 고의적으로 왜곡했다. 뽀스띠쉐프가 언급했던 것의 원문이 <Voprosy Istorii nos. 5-6, 1995, pp. 3-8>에 발표되었다. 이 부분은 (그 책의: 역자) 4페이지에 있다.

나는 지금 끼에프주 당위원회에서의 나의 오류들에 대해 조금 언급할 것이다. 나는 왜, 내가 아주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정체를; 역자)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꽤 오랜 동안 그들과 사업하면서, 나는 왜 그들을 파악할 수가 없었는가?

… 까르뽀프가 여기 있다. 나는 그를 매우 신뢰했다. 까르뽀프는 10년 동안 계속해서 당 사업을 했다. 나는 그를 우끄라이나로 데려갔는데, 왜냐하면 그는 우끄라이나에서 태어나 오래 살았고, 우끄라이나말을 했고, 우끄라이나를 알았고, 우끄라이나 고참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동지들이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오류를 범하게 되었는가? 1923-24년에, 까르뽀프는 내 눈 앞에서 뜨로츠끼파와 싸웠다. 그는 끼에프에서도 역시 그들과 싸웠다…. 나는 이렇게 규정했다: 혹독한 투쟁의 수년은 지나갔다. 그 시기 동안 사람들은 쓰러지거나 혹은 확고하게 서 있거나 혹은 적진으로 넘어갔다공업화와 집산화의 시기에, 당과 적들과의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나는 결코, 이러한 험난한 시대가 지난 후에 어떤 사람이 적진으로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1934년부터 적들의 손아귀에 떨어져서 적이 되었다는 것이 지금 드러났다. 물론 사람들은 이것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당과 사회주의를 위해서 적들과 무자비한 투쟁의 긴 여정을 걸었던 한 사람이, 이러한 시기 후에, 지금 적들의 진영에 있다는 것은 끔찍할 정도로 있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정말로 믿기 힘든 것이다.

(몰로또프. 그가 바로 1934년에 적이 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더 일찍부터 그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더 일찍부터였을 것이다. 어려운 시기를 당과 함께 했던 사람이, 1934년에 뜨로츠키파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해괴망측한 일이다. 그의 (마음: 역자) 속에는 늘 어떤 종류의 벌레가 있었다. 1926년 혹은 1924년 혹은 1930년 이 벌레가 나타났을 때,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어떤 종류의 벌레가 있었고, 그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는 마침내 적의 무리에 떨어졌다.

흐르쇼프가 자신의 “비밀연설”에서 인용했던 단어들은 여기서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Voprosy Istorii NO. 5, 1995>에 있는 뽀스띠쉐프 연설 전문이 다음에 있다;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postyshevspmar0437.pdf

흐루쇼 자신의 거친 연설은 <VI no.8, 1995, pp.19-25>에 있다. 그것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khrushchevspmar0537.pdf

뽀스띠쉐프는 가장 가혹하게 대규모로 축출했고, 이것 때문에 1938년 1월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 게티와 나우모프는 이것에 대해 498-512페이지에 걸쳐 상세하게 논의한다. 게티는, 이 총회에서 뽀스띠쉐프가 과도하게 탄압했던 것에 대해 얼마나 심하게 비난을 받았는지를  상세하게 인용한다.

쭈꼬프는 분석한다:

1938년 1월 총회에서는 말렌꼬프가 주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제1서기들은 “트로이카”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목록뿐만 아니라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수를 표시하는 두 줄(문장, line)1)을 가지고 위협했다고, 말했다. 그는 꾸이비쉐프 주 당(Obkom)의 제1서기 뽀스띠쉐프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당신은 주(oblast)의 당과 쏘비에트 기구 전체를 감옥에 보냈다! 그 말에 뽀스띠쉐프는 같은 맥락으로 대답했다─“나는 체포했고, 체포하고 있고, 그리고 모든 적들과 스파이들을 절멸시킬 때까지 체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위험한 고립 상태에 있었다: 이 논쟁이 있고 두 시간 후에, 그는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전격적으로 면직되었고, 총회 참석자 중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Komsomolskaia Pravda Nov. 19, 2002.

뽀스띠쉐프의 축출과 체포를 확인해주는 그 문서는 게티와 나우모프의 514-6페이지에 전재(全載)된다. 흐루쇼프는, 뽀스띠쉐프에 강력하게 적대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게티와 나우모프, 512). 뽀스띠쉐프를 대체하여 흐루쇼프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 Stalinskoe Politbiuro, p. 167.

1938년 1월 중앙위원회 총회 내용에서, 뽀스띠쉐프에 관한 부분을, 로고빈이 발췌:

그 사본의 다음 부분을 보면, 뽀스띠쉐프─ 결국 자신에 대한 조사 자료로 전환되었던 ─연설의 성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뽀스띠쉐프: 그곳(꾸이비쉐프 주)의 지도부는, 당과 쏘비에트의 지도부 모두 적들이었다. 주에서부터 말단의 라이온(raion2))까지 그러하다.

미꼬얀: 모두가?

뽀스띠쉐프: 당신은 어떻게 놀랄 수 있는가? … 나는 꼼꼼히 그것을 검토했고, 적들이 12년 동안 거기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쏘비에트를 보아도 동일하게 적 지도부가 거기에 앉아 있다. 거기에 그들은 자리를 차지했고 자신들의 간부들을 뽑았다. 예를 들어, 우리 주의 집행위원회에서 우리는 가장 완고한 적을 기술직 노동자 바로 하부에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파괴활동을 자백했고 거만하게 행동했었다. 주 집행위원회의 의장에서부터 보좌관, 고문, 비서들─모두가 적들이었다.

주 집행위원회의 모든 부분이 절대적으로 적들로 오염되었다. … 지금 라이온(raion) 집행위원회들의 의장들을 (조사해서: 역자) 알아보라─모두가 적들이었다. 6명의 위원회(raiispolkoma) 의장들 모두가 적들이었다. 제2비서의 압도적 다수가─ 나는 제1비서에 대해서는 심지어 말하고 있지도 않다 ─적들이었고, 적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많은 스파이들도 있었다: 폴란드인, 라트비아인 등등, 그들은 모든 종류의 철두철미하게 야비한 인간들을 뽑았다…

불가닌: 정직한 사람이 최소한 몇몇은 있었는가… 정직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으로 (뽀스띠쉐프의 조사에서는: 역자) 밝혀졌다.

뽀스띠쉐프: 나는 지도부, 수장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도부에서부터, 라이온(raion)의 비서들 중에도, 위원회들(raiispolkomas)의 의장들 중에도, 정직한 사람은 거의 한 명도 없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놀랄 수 있는가?

몰로또프: 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뽀스띠쉐프 동지.

뽀스띠쉐프: 아니다. 과장하고 있지 않다. 여기, 주 집행위원회를 보라. 그 사람들은 감옥에 있다. 우리는 조사 자료를 가지고 있고, 그들은 자백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적대행위와 스파이 행위를 자백했다.

몰로또프: 우리는 그 자료를 검증해야 한다.

미꼬얀: 모든 라이온(raion) 위원회 속에, 그 하부에 적들이 있다고 (뽀스띠쉐프의 조사에서는: 역자) 밝혀졌다.

베리야: 라이온(raion) 위원회들의 구성원 전원이 모두 적들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까가노비치: 그들 모두가 사기꾼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스딸린은 뽀스띠쉐프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것은 조직에 대한 학살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에겐 매우 관대하다, 그러나 그들은 라이온(raion)조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총살하고 있다… 이것은, 중앙위원회에 대한 당 대중의 적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해될 수 없다.”

― 로고빈, Partiia rasstreliannykh. 2장 3부: “1월 총회: 뽀스띠쉐프 사례.” http://trst.narod.ru/rogovin/t5/iii.htm.

더 완전한 문서는 <Stalinskoe Politbiuro v 30-e gody, pp. 161-4.>에 있다. 이 책에서 뽀스띠쉐프를 다룬 부분은 다음에 있다: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postyshev0138.pdf

러시아 역사가, 작가, 군인인 블라디미르 까르뽀프(Vladimir Karpov)에 따르면, 뽀스디쉐프는 자신의 자백을 몰로또프에게 확인했다:

몰로또프의 별장에서 그와 나(까르뽀프: 역자)와의 대화 중에, 탄압에 대해 말했다. 언젠가 내가 질문했다:

― 당신이 어떠한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가능한가? 무엇보다도, 그들이 체포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심지어 혁명 전에, 그리고 내전 동안에 역시 사업을 했고, 당신은 그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 의심이 실제로 생겼다. 한번은 스딸린에게 그것에 대해 말했고, 그는 대답했다: “루비안까(lubianka3))로 가서, 당신이 직접 이것을 조사하시오. 여기 볼로쉬로프와 함께 가시오. 그때 볼로쉬로프는 그 사무실에 있었다. 우리 둘은 즉시 출발했다. 그때는 바로 우리가, 뽀스띠쉐프가 체포된 것에 대해 새롭게 의심하던 시기였다. 우리는 차로 예조프에게 갔다. 그는 뽀스띠쉐프에 대한 서류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조사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뽀스띠쉐프는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나는 예조프에게 말했다: “나는 뽀스띠쉐프와 직접 대화하고 싶다.” 그가 불려왔다. 그는 창백했고, 몸무게가 줄었고, 전반적으로 우울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조사 자료에 적혀 있는 것이 정확하게 그(뽀스띠쉐프: 역자)가 자백한 것인가? 그는 대답했다: 정확하게 적혀 있다. 나는 다시 물었다―“그것은, 당신이 유죄라는 것을 당신이 시인한 것을 의미한다.” 그는 조용했고, 얼마간 마지못해 대답했다: “내가 거기에 서명했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그것을 시인한 것을 의미한다. 말할 게 뭐가 있겠나…” 그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까르뽀프, 블라디미르 바실레비치. Marshal Zhukov, ego soratnikkii i protivniki v goty voiny I mira. Book 1. 6장, “뚜까체프스끼 사건”. http://militera.lib.ru/bio/karpo/06.html

무법적이고 독단적인 뽀스띠쉐프의 탄압에 대해, 1938년 1월 31일에 안드레예프(Andreev)가 스딸린에게 보낸 편지:

2) 8월 이래로 약 3,000명이 당에서 추방되었다. 그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인민의 적”이나 그들의 공범자라는 어떠한 근거도 없이 추방되었다. 뽀스띠쉐프가 독단적으로 되어, 정직한 당원들을 추방하고 체포할 것을 요구했을 때, 주 위원회 총회에서 라이온(raion)의 비서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제시했다. 뽀스띠쉐프는, 주 위원회 지도부(즉, 뽀스띠쉐프 자신을)를 당 회의에서 아주 사소하게 비판했다고, 혹은 심지어 어떠한 근거도 전혀 없이, 정직한 사람들을 추방하고 체포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향 전체는 주 위원회로부터 유래했다.

3) 이러한 모든 일이 도발로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혐의가 짙고 과도한 이탈자들 몇 명을 체포해야만 했다. 이들은 주와 시의 위원회 소속으로, 전 제2비서 필리모노프(Filimonov), 주 공산당(obcom) 활동가 시로띤스끼(Sirotinskii), 알낀(Alkin), 포멘꼬(Fomenko)외 몇 명이다. 바로 첫 번째 조사에서 그들 모두는, 현재까지 우파-뜨로츠끼파 조직의 구성원이었음을 자백했다. 뽀스띠쉐프의 측근으로, 그의 완전한 신임을 누리면서, 그들은 당 조직을 해산하고 당원을 대규모로 추방하는 파괴적이고 도발적인 사업을 진행했다. 우리는, 뽀스띠쉐프의 보좌관인 빠쉬꼬프스끼(P-ashkovskii)를 또한 체포해야 했다. 그는, 이전에 사회혁명당원이었고, 1933년에는 끼에프에서 우파-뜨로츠끼파 조직에 가입했으며, 분명한 폴란드 스파이였음을, 숨겼다고 자백했다. 그는 꾸이비쉐프 주에서, 독단과 파괴라는 문제에 있어서 뽀스띠쉐프 집단에서 가장 활동적인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이러한 강도 집단의 정체를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문제의 실타래를 더욱 풀어헤치고 있다.

4) 6월 선거 이래, 주 위원회 총회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고 있다. 주 위원회는, 라이온 위원회가 총회를 개최하는 것을 직접 금지했고, (라이온 위원회에는: 역자) 활동가들도 없다.

Sovetskoe rukovodstvo. Perepiska. 1928-1941. ed. A.V. Koshonkin et al., Moscow: ROSSPEN, 1999, p.387. 전체 문서는 다음에 있다: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andreevrepostyshev0138.pdf

16. 에이께(Eikhe)

흐루쇼프 :

중앙위원회는, 17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당중앙위원회 위원들에 대한 많은 날조된 “재판들”을 당 대회에 알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혐오감을 일으키는 도발, 지독한 날조, 혁명적 합법성에 대한 범죄적인 침해의 한 가지 예는 1905년 이후로 당원이었으며 쏘비에뜨 정부와 당의 가장 뛰어난 일꾼으로 중앙위원회 정치국 전(前)후보위원이었던 에이께 동지의 재판이다.

― 1939년 10월 27일에 스딸린에게 보낸 에이께의 편지: 뽀스뻴로프 보고서에서 발췌. http://www.alexanderyakovlev.org/almanah/inside/almanah-doc/55752. 전문은 다음 책에서 발표되었다: Ayermakher, K., ed. Doklad N.S. Khrus-hcheva o Kul’te Lichnosti Stalina na XXs”ezde KPSS. Dokumenty. Moscow: ROSSPEN 2002, pp. 225-229.

우리는 지금 예조프의 오른팔인 프리노프스끼가 1939년에 진술한 것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 그는 예조프와 예브도끼모프(Evdokimov)가 우익 음모에 가담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에이께가 여기에 관련되었다고 언급한다.

1935년에 예브도끼모프는, 프리노프스끼에게 에이께에 관해 언급했다:

1935년 자신의 아파트에서의 모임에서, 예브도끼모프는 자신이 뺘띠고르스크(Piatigorsk)에서의 사업에 초빙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나(프리노프스끼: 역자)에게 말했다. 그는 삐보바로프(Pivovarov), 비밀경찰(Chekist)4) 내부의 커다란 모임에 속해 있는 보야르(Boiar), 댜트낀(Diatkin), 샤드스끼(Shatsky)의 이름을 거론했다. 이 부분에서 그는 자신이 까떼비치(Khataevich)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했고, 까떼비치가 그 지방을 잘 안다고 칭찬했다: 에이께와의 관련, 그리고 레닌그라드 모임의 일부분에 대하여…

Lubianka 3, p. 40.

[1937년 10월 중앙위원회] 총회 회의 중 하나가 끝난 후에, 저녁에, 예브도끼모프와 나와 예조프는 예조프의 별장에 있었다. 우리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에이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에이께는 우리와 어떠한 대화도 하지 않았다. 예조프의 별장에서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에이께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예조프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에 에이께는 가버렸고, 우리는 남아서 거의 아침까지 이야기했다.

Lubianka 3, p. 44.

유리 주꼬프(Iurii Zhukov):

[1937년: 그로버 퍼] 6월 29일, 총회가 이미 끝났을 때, 에이께의 짧은 편지가 정치국에 도착했다. 노보시비르스크 주 위원회 제1서기장 에이께는 그 편지에서, 자신의 구역에서 자신에게 일시적으로 특별한 권력을 줄 것을 정치국에 요청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보시비르스크 주에서 거대한 숫자를 가진 강력한 반쏘비에트 반혁명 조직이 적발되었다. 비밀경찰(NKVD)은 그것을 완전히 소탕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삼인방(troika)”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 당의 제1서기 [즉 에이께 자신: 그로버 퍼], 주 소송 대리인[검사: 그로버 퍼], 그리고 주 비밀경찰의 수장. 그리고 이들에게, 반쏘비에트 분자의 추방과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더욱 위험한 사람들에게는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군사 작전상의 결정권(operational decision)을 가지는 권력을 부여한다. 그것은, 피고를 위한 변호절차도 없이, 증거도 없이, 즉결 처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실상 약식 군법회의이다. 에이께의 요청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그러한 강력한 반혁명 조직의 위협에 직면하여서는, 최고 쏘비에트에서 선거를 통해 결정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 유리 주꼬프. “Stalin. Inoi Vzgliad. Beseda s avtorom knigi ‘Inoi Stalin’”. Nash sovremennik. 2004, No.12. 사본은 다음에 있다: http://nash-sovremennik.ru/p.php?y=2004&n=12&id=4

주꼬프는, 2002년 11월 콤소몰스카야 쁘라브다(Komsomolskaia Pravda)에 발표한, 최근 유명해진 자신의 시리즈 “Zhupel Stalina(“스딸린의 허수아비”)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사고를 전개했다.

이 시리즈는 지금 인터넷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 예, http://www.x-libri.ru/elib/smi_958/00000001.htm (강조는 그로버 퍼)

주꼬프 다시 언급한다:

그건 그렇고, 예조프는 첫번째 [스딸린과의 만남]을 기쁘게 맞이했다: 1938년 4월, 수상 교통 인민위원으로 “겸임하여” 임명되었던 때였다. 두번째 통지는 8월에 있었다: 4시간 동안, 스딸린과 몰로또프는 예조프를 설득하여, 예조프의 제1보좌관으로 베리아가 입후보하는 데에 동의하도록 노력했다 [이 명령에 대해서는 Lubianka 2, 545를 보라: 그로버 퍼]. 그리고 이러한 오랜 과정의 마지막인 세번째 활동은 11월 23일 있었다. 예조프는 다시 스딸린에게 소환되었고, 그 자리에는 이미 몰로또프와 보로쉴로프가 출석해 있었다. 나는, 예조프가 분명히 그들의 지시를 받아 적어서 만들었던 문서를, 내 손에 들고 있다. 문서는 세 페이지인데, 각각의 크기가 다르다. 그것은, 예조프가 필기를 멈추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손에 잡히는 종이들을 아무것이나 잡아채서, 그에게 들이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면직에 따르는 정당성은 달성되었다: 분명히 그는 저항했고 항의했다. 그러나 그를 어느 정도 비틀어서 결정서에 “그 자신의 요망에 따라서”라는 문구를 남기는 것은 필요했다. 명령서의 문안은 보증서처럼 보인다: “예조프 동지가 쏘련공산당(볼) 중앙위원회 비서, 당 통제위원회 의장, 그리고 수상 교통 인민위원의 직책을 유지하는 것.” 그 발표문의 말미에는 서명되어 있다: “N. 예조프.” 이것으로서 “예조프시대(Ezhovshchina)”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정치국은 문서 내용을 전보로 쳤다: 탄압을 멈춰라, “삼인방”을 해산하라.

주도권을 장악하고, 스딸린 그룹은 이미 1938년 말에 비밀경찰에 대한 첫번째 사법적 절차에 착수했다. 그 비밀경찰은 사건을 위조하고 조작했고, 그것을 가지고 거의 매년마다 수천 명의 사람을 재판에 회부하고 추방하고 사형시켰다. 이것이 그들(스딸린 그룹: 역자)이 (소위 말하는: 역자) 거대한 테러(the Great Terror)를 가까스로 멈추게 한 방법이다.

KP NOV. 20, 2002.

얀센(Jansen)과 뻬트로프(Petrov), p. 91:

1937년 7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서시베리아 비밀경찰 수장 미로노프(Mironov)가 당 제1서기 로베르트 에이께에게 반대하여, 예조프에게 이의 제기를 한 것을 살펴보자. 미로노프는 예조프에게─ 체포 후의 그의 증언에 따르면 ─“에이께는 비밀경찰 업무에 간섭을 한다”라고 보고했다. 5)는, 비밀경찰 꾸즈바스(Kuzbass) 시 지부장에게, 대부분의 경우에 증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미로노프는 처지가 난감했다: 그가 죄수들을 석방하고 에이께와 충돌해야만 하는지, 아니면 비밀경찰이 어쩔 수 없이 “거짓 사건을 창조”해야만 하는지. 미로노프가, 비밀경찰은 그6)가 승인한 명령을 단지 수행하는 것과 관련된 조직이라고 구두로 지시했음을 넌지시 말했을 때, 예조프는 대답했다: “에이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는 당 조직의 책임자다; 그와 싸우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당신은 나에게, 발생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내가 처리하겠다…. 에이께의 지시에 따르고, 당신과 그와의 관계를 긴장시키지 말라.” 미로노프는 다음을 추가했다: 에이께는 습관적으로 “갑자기 비밀경찰 기구를 방문하고, 심문에 출석하고, 조사를 간섭하고, 이런 저런 방향으로 압력을 행사했다/92/그래서 조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조프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주석 38, p. 237. 기록보관소의 문서로 더 이상 활용할 수 없다: 38. Ibid., (이전의 주석─“TsA FSB, f.3-os, op.4, d. 6,1.61.”) 프리노프스끼 사건에 대한 기록보관소에 있는 조사자료, N-15301, t. 7, ll. 36-37.]

p. 107:

지역 당 지도자들은 계급의 적들이 선거가 제공하는 자유를 활용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다. 1937년 6월 총회에서, 까자흐(Kazakh) 정부 지도자 이사예프(U. D. Isaev)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리는 여기서 노골적인 계급투쟁의 정세와 충돌할 것이다. 심지어 지금도 이슬람교 율법학자들(mullahs), 뜨로츠끼파, 그리고 다른 모든 종류의 반혁명분자들이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주석 108) 1937년 10월 총회에서 모스크바 당지도자 우가로프(A.I. Ugarova)는 극단적 적대행위가 다시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반면에, 이제 그의 서시베리아 동료인 에이께는, 조직된 반혁명 근거지를 분쇄하는 것을 통해서 정세가 한층 개선되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스딸린은 동의했다: “파괴분자들부터 자신 스스로를 해방시킨 것에 대해 인민들은 기뻐한다.”(주석 109) 안전을 위하여, 같은 달 동안 경쟁선거를 금지하고 무경쟁 단일후보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주석 108, 109는 기록보관소의 문서로 더 이상 활용할 수 없다: “108. RTsKhIDNI, f.17, op. 2, d. 617, 1.167.  109. Ibid., d. 626, ll. 40-41, 62.”] <노사과연>


1) 역자: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 그 자체로 위협이 되었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2) 역자: 쏘비에트의 하부행정기관.

3) 역자: 비밀경찰의 본부와 감옥이 있는 곳을 의미하며, 모스크바에 소재한다.

4) 역주 : Chekist 혹은 Cheka. 반혁명 운동·사보타주 및 투기를 단속하는 비상 위원회(1917-22), 후에 GPU, OGPU, NKVD로 개칭.

5) 역자: 에이께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6) 역자: 역시 에이께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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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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