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9)

 

편집자

 

* 편집자: 연구소에서 철학세미나를 지도하고 있는 문영찬 연구위원장이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하여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2015년 1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다.

 

문영찬 | 연구위원장

[목차]

머리말

제 1 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철학의 근본문제

  3. 세계의 통일성

제 2 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계승, 발전

  5.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토마스 아퀴나스

  6.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9. 스피노자

  10. 로크

  11. 라이프니츠

  12. 흄

  13.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 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1. 맑스,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의 창시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1) 물질과 운동

    2) 공간과 시간

    3) 물질과 의식

    4) 원인과 결과

    5) 개별-특수-보편

    6) 필연성과 우연성

    7) 본질과 현상

    8) 가능성과 현실성 

    9)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10) 모순 혹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내용과 형식)

    11) 부정의 부정

    12) 인식론
3. 자유와 필연성

  4. 목적의식성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6.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제 4 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 콩트, 밀

  2. 쇼펜하우어, 니체

  3. 후설

  4. 하이데거

  5. 프로이트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7. 샤르트르

  8. 하버마스

  9. 알튀세르, 발리바르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11. 지젝

  12. 자율주의

  13. 이진경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크 샌덜의《정의란 무엇인가》

제 5 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 6 장 철학과 종교

제 3 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5) 개별-특수-보편

세계는 무수한 상호연관의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변증법은 세계를 개별로, 분리시켜, 고정시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연관 속에서, 상호작용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제 물질의, 제 대상의 상호연관이라는 개념은 변증법의 기둥이 되는 개념이다. 이러한 상호연관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원인과 결과 관계, 인과성이며 그것은 과학적 접근의 초석이 된다. 그러나 인과성을 넘어서서 본격적으로 변증법적인 상호연관 질서 중 주요한 것으로 개별-특수-보편과 본질과 현상, 필연과 우연, 가능성과 현실성 등이 있다. 이러한 개념들 자체를 각각 분리시켜 파악하면 일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개념들을 상호연관의 관점에서 파악하면 그 개념들은 변증법적 개념이 된다. 예를 들어 개별과 분리된 보편, 우연과 분리된 필연 자체는 변증법적이지 않다. 그러나 개별과 연관하에서 파악된 보편, 우연과 연관하에서 파악된 필연은 변증법적 개념이 된다.

개별과 보편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인식에서 개념적 사고의 발전을 표현한다. 어떤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을 분리된 하나의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대상과 공통된 성질이 있고 그러한 공통된 성질을 가진 대상들을 전체로 놓고 개별을 그 전체에 귀속시키며 그렇게 개별들에 공통된 성질을 보편이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대상의 인식에 있어서 개별성의 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의 인식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은 고도의 추상능력의 발전을 의미하며 개념적 사고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토끼는 동물이다라는 판단은 토끼라는 개별을 동물이라는 보다 넓고 보편적인 개념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에게 동물이라는 개념이 발생하기까지, 즉, 보편성이 하나의 개념이 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의 인식이 필요하고 그러한 인식이 비약을 이루는 과정에서 보편성을 가리키는 개념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개별과 보편에 대한 인식의 발전이 순조롭고 언제나 과학적인 것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펼쳤는데 이는 보편을 개별로부터 분리시켜 자립화시킨 것이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은 개별적 집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자체를 가리키는 집의 이데아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했다. 이는 인간의 인식 중에서 보편에 대한 인식을 신비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편은 개별과 분리되어 개별 위에 우뚝 서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개별과 보편의 연관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으로 인도하는 연관 속에서만 존재한다.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 속에서만, 개별적인 것을 통해서만 존재한다.”1) 개별적인 것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과의 연관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개별과 보편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의 기초이다. 개별을 고립시켜서, 분리하여 파악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개별을 연관 속에서, 보편과의 연관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개별을 보다 깊이 있게 파악하는 것이고 변증법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레닌은 보편에 대해서도 올바른 정의를 하는데 보편은 개별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개별 속에서만, 개별을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본다. 보편이 개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반박하는 것이다. 보편은 개별과 분리된 자립적인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편의 현실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중세 유럽의 유명론(唯名論)을 반박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세 유럽의 유명론은 보편에 대해 보편은 단지 이름뿐이고 실재하는 것은 개별뿐이라고 했고 반대편에 있는 실재론은 보편은 개별과 독립되어 그 자체로 실재한다고 했다. 실재론은 카톨릭의 주류의 논리가 되었고 유명론은 그에 반대하는 논리였는데 유명론이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지만 보편의 실재성 자체를 부정한 것은 오류였다. 그러나 과학적 인식이 발전하면서 그리고 변증법이 정립되면서 이러한 역사적 오류를 극복하고 보편은 ‘개별을 통하여, 개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올바른 인식이 성립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개별과 보편을 연결하는 고리인 특수에 대해 살펴보자. 일상적 생활에서 특수적이다라고 하면 어떤 예외적인 상황을 가리킨다. 어떤 것이 특수하다고 하면 그것이 보편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에서 특수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변증법에서 개별과 보편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특수는 보편에서 벗어난 예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인식에서 보편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검둥이는 강아지다, 강아지는 동물이다라고 하면 검둥이는 개별이고 강아지는 특수이고 동물은 보편에 해당한다. 즉, 강아지는 동물의 예외가 아니라 동물이라는 개념으로 나아가는 중간 계단이다. 이전에 단지 개별과 보편이라는 범주가 있을 때와 비교했을 때, 개별과 보편 사이에 특수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과학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종(種)과 유(類)라는 개념이 정립되었을 때 개별과 유 사이에 존재하는 종을 철학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리하여 개별에서 보편으로의 인식의 상승의 과정에서 중간단계가 필요함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별-특수-보편은 인식의 상승과정이면서 대상에 대한 인식을 구체화, 풍부화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개별-특수-보편은 한편으로 인식의 과정을 가리키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세계에 현존하는 많은 대상들의 연관을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홍길동-한국사람-인간이라는 개념은 그대로 개별-특수-보편에 해당하는데 단지 인식의 과정만이 아니라 존재의 측면도 가리킨다. 사실 모든 사물, 대상은 개별성과 특수성, 보편성의 통일이다. 과거 1980년대 운동에서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성격 논쟁 혹은 사회구성체 논쟁이 있었다. 한국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먼저 변혁의 대상인 한국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필요했고 여기서 철학적으로 주요하게 기능한 개념이 바로 개별-특수-보편이었다. 한국사회가 자본주의로서 보편성을 띠는가 아니면 반(半)봉건 사회인가, 그리고 한국사회의 특수성으로서 신식민지 사회인가 아니면 식민지 사회인가가 첨예하게 논쟁이 되었고 자본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의 보편성과 신식민지라는 특수성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가는 곧 변혁 전략의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개별-특수-보편은 한국사회를 유물론적으로 구체적으로 인식해 들어가는 방법론이었다. 그리하여 한 사회를 구성체로서, 유물론적인 사회구성체로서 인식할 필요성이 확산되었는데 이는 곧 운동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철학이 실천의 무기, 변혁의 무기로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이는 비단 사회구성체 논쟁에서만이 아니다. 예를 들면 엥겔스는 헤겔을 분석하면서 판단을 개별성의 판단, 특수성의 판단, 보편성의 판단으로 나누고 있다. 개별성의 판단으로 마찰이 열을 만든다는 것, 특수성의 판단으로 하나의 특수한 운동형태인 역학적 운동(마찰)이 다른 특수한 운동형태인 열운동으로 전화한다는 것, 보편성의 판단으로 모든 형태의 운동은 다른 운동 형태로 전화될 수 있고 전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이 엥겔스가 개별-특수-보편을 과학적 실천에 적용한 사례이다2).

이와 같이 개별-특수-보편은 어떤 대상, 현상에 대해 인식을 구체적으로 심화하는 과정을 가리키며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개별-특수-보편의 규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검둥이-강아지-동물은 각각 개별-특수-보편을 가리키지만 강아지-동물-생명체 또한 각각 개별-특수-보편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개별인가, 특수인가, 보편인가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변화하며 대상을 역동적으로 파악해 들어가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6) 현상과 본질

현상과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형이상학적 사고와의 투쟁의 결과 정립되었다. 형이상학에서는 현상과 본질을 대립시키고 본질을 절대화한다. 신학적 사고에서 흔히 보이는 이러한 관점은 과학적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다. 중세 유럽의 스콜라학에서 본질이니, 존재니 하는 개념이 횡행하였고 근대 과학이 정립되면서부터는 본질, 존재니 하는 개념은 스콜라적인 개념이라 하여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본질 개념을 형이상학으로부터 해방한 것은 변증법적 인식이 정립되면서부터이다.

헤겔은 ‘현상은 본질적이고 본질은 현상한다’고 했다. 현상이 본질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이미 본질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현상과 본질을 형이상학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또한 현상은 본질적이고 현상과 본질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현상은 본질로 다가서는 매개가 된다. 즉, 현상은 본질로 통하는 통로로서 역할한다. 형이상학에서는 현상과 본질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본질을 현상 밖에서 찾고자 하나 이러한 과정의 결과 성립하는 형이상학적 본질은 과학적인 개념이 될 수 없다. 반대로 현상을 매개로 하여, 현상 속에 내재하는 모순과 대립을 추적하여 본질로 접근하는 것이 변증법적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은 과학적 사고를 자극하고 뒷받침하는 것인데 현상들 간에 존재하는 개별-특수-보편의 인식, 내적 모순과 경향들의 대립 등을 추적하여 본질의 심급, 법칙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며 실제로 이러한 경로 이외에는 본질 혹은 법칙에 도달하는 다른 길이 없다.

헤겔은 한편으로 본질은 현상한다고 했다. 즉, 본질은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본질은 현상과 분리되어 숨어 있는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사고를 반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은 현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과학이 가능한 것이다. 본질과 현상이 일치하면 과학이 필요 없을 것이고 본질과 현상이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면 과학은 불가능할 것이다. 본질과 현상이 일치할 경우 현상 자체가 본질, 법칙이기 때문에 현상 속에 내재하는 법칙, 본질을 발견한다는 작업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또한 본질과 현상이 분리되어 있으면 법칙의 발견, 본질의 발견은 과학적 탐구가 아니라 종교적 기도나 문득 깨달음과 같은 신비적인 방법 이외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과학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헤겔이 본질과 현상의 연관성을 해명한 것은 한편으로 당시 급속하게 전개되는 과학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의 발전을 철학적으로 일반화하여 역으로 과학의 발전을 자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7) 필연과 우연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론을 전개하면서 세계의 모든 것을 원자의 운동으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세계는 원자의 운동으로 인한 필연성이 지배한다고 보았는데 이를 밀고 나가기 위해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원자의 운동으로 인해 생겨나는 인과성, 원인과 결과 관계가 필연적으로 관철되며 인과성이 없는 현상은 없고 따라서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데모크리토스의 견해는 일면적인데 인과성의 원리를 승인한다고 해서 바로 우연성을 부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연적인 것 또한 원인이 있다고 보면 인과성과 우연성의 존재가 양립가능하다. 데모크리토스의 견해는 모든 것을 필연적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일종의 숙명론이다. 우연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주체적 활동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 또한 존재하며 그것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연은 그것과 다른 것의 발생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필연과 구분된다. 그러나 필연은 그와 반대되는 것의 발생 혹은 성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현실 세계는 이러한 우연과 필연의 상호 작용 속에서 전개된다.

데모크리토스가 필연만 승인하고 우연을 부정했다면 에피쿠로스는 똑같이 원자론을 견지하면서도 우연을 승인했다. 에피쿠로스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면 모든 것이 우연적이라는 반대되는 견해의 성립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승인할 수밖에 없다고 통박을 하면서 데모크리토스를 비판했다.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운동에 있어서도 우연적인 빗겨나가는 운동을 상정하여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일정한 차이를 보였는데 이 점이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했다.

한편 근대에 이르러 필연과 우연의 관계를 해명하려 시도한 사람 중에 라이프니츠가 있다. 라이프니츠는 모순율을 근거로 필연과 우연을 구분하였다. 필연적인 것은 그와 반대되는 것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인데 필연의 반대는 모순율에 따라 거짓이라고 판명할 수 있는 반면 우연적인 것은 그와 다른 것이 성립된다 하더라도 모순율에 따라 거짓이라고 판명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필연과 우연을 구분하였다.

헤겔의 경우도 우연을 필연과 명확히 구분하였는데 헤겔은 우연을 ‘가능성과 현실성의 통일’로 보았다. 즉, 우연적인 것은 현실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와 다른 것의 가능성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연을 가능성과 현실성의 통일로 본 것이다.

17-18세기의 유물론자들 상당수는 필연성만 승인하고 우연성을 부정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 인과성의 엄격한 관철만이 과학이며 우연성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거나 아니면 아예 우연 자체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과학이 뉴튼의 역학을 기초로 전개되었고 유물론은 형이상학적, 기계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우연을 승인한 라이프니츠와 헤겔은 모두 관념론자였다. 변증법은 이 당시 유물론적 지반이 아니라 관념론적 지반 위에서 개척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연성만을 승인하고 우연성을 부정하는 것은 사실상 필연성을 우연성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의 경우에서 전쟁의 발생의 원인을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세계분할 경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에서 우연히 암살당했다는 것에 돌리는 것이 그러하다. 이것은 우연적인 어떤 원인에 필연성을 돌리는 것인데 필연적이라는 것이 실은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우연성을 부정하면 필연성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진다. 현실 세계는 우연과 필연의 무수한 교차와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한 현상들 속에서 우연적인 것을 걸러내고 필연적인 것을 추출하는 것이 인식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연과 필연은 절대적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우연은 필연으로 전화되기도 한다. 엥겔스는 진화론에 입각하여 종의 변화를 고찰하는데 어떤 환경에서 특정한 종에서 우연적인 변화가 생겨난다. 이 변화는 유전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환경의 변화가 고착화되면 그에 따라 우연적이었던 종의 변화가 일반화되어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는데 이때 그러한 변화는 더 이상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된다. 이를 가리켜 엥겔스는 우연성이 기존의 형이상학적인 필연개념을 무너뜨린 것으로 파악한다3).

이렇게 우연과 필연은 상호침투하며 심지어 상호전화한다. 우연이 필연으로 전화되기도 하며 필연성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이 변화하면 필연은 우연으로 전화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계급사회에 있어서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계급투쟁이다. 노예제로부터 시작하여 계급이 발생한 뒤부터 계급투쟁은 역사발전을 좌우하는 필연성으로 관철된다. 그러나 생산수단이 사회화되는 사회에 있어서 계급투쟁은 역사발전의 필연성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계급이 폐지된 사회에서는 필연성으로서 계급투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동체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분쟁은 필연성으로서 계급투쟁이 아니라 많은 우연적 요소들에 의한 것이 될 것이다.

필연과 우연은 그것이 서로 분리되어 파악되고 단절되면 형이상학적 사고로 귀결되지만 필연과 우연을 상호 연관 속에서 파악하면 변증법적 개념이 된다. 인과성을 기초로 하는 필연에 대한 승인, 그리고 우연에 대한 승인을 기초로 하여 우연과 필연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변증법적 인식이다. 우연과 필연은 운동적 실천에서도 중요한 개념인데 필연성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실천을 조직하면서도 다양한 우연의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은 전술의 문제에 있어서 긴요하다. 전술의 전제가 되는 정세는 무수한 우연 속에 관철되는 필연 자체이며 또 주체 또한 많은 우연적 요인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8) 가능성과 현실성

가능성과 현실성은 현실세계의 상호연관의 질서의 하나이다. 어떤 것이 가능성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현실성의 단계인지는 주체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가능성은 현실성으로 전화할 수 있는 것인데 헤겔은 가능성을 모순으로 파악하였다. 즉, 가능성은 어떤 A의 가능성도 있지만 다른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가능성이며 이는 곧 모순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가능성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은 현실성과의 관련에서인데 가능성의 현실성으로의 전화는 가능성 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의 발전에 다름 아니다.

가능성은 형식적, 추상적 가능성과 현실적 가능성으로 나뉠 수 있다. 예를 들면 봉건제 사회에도 상품생산이 있다는 의미에서 공황의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추상적 가능성이다. 추상적 가능성이 현실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추상적 가능성이 현실적 가능성이 되어야 한다. 상품생산은 판매를 위한 생산이라는 점에서, 즉 구매와 판매의 분리를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공황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공황이 현실성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한데 상품생산의 일반화, 상품생산이 지배적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봉건제 사회에서 경제공황은 단순한 추상적 가능성, 형식적 가능성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성이 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현실적 가능성은 현재의 조건에서도 현실성으로 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자본주의 사회, 상품생산이 지배적이 된 사회에서 공황은 현실적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주기적 순환에 도달했을 때 공황은 폭발한다.

또한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어떤 것은 가능성이 있는데 현실성으로 전화하지 않고 다른 어떤 것은 가능성이 있는데 현실성으로 전화했다면 그 차이는 바로 조건에 있다.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전화하기 위한 조건! 현실성의 개념은 실천과 맞닿아 있는데 그런 점에서 ‘조건’이라는 개념은 의미가 크다. 흔히 조건이라는 개념은 부수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실천의 성공, 가능성의 현실성으로의 전화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조건이라는 개념이다. 어떤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전화되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조건의 결여 때문인가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운동적 실천에서 본다면 과학적 노선의 결여 때문이지, 정세 때문인지, 사람의 결여 때문인지, 재정의 결여 때문인지 등을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이렇게 조건의 결여를 극복하면 가능성의 현실성으로의 전화가 이루어진다.

원인과 결과(인과성), 개별-특수-보편, 현상과 본질, 우연과 필연, 가능성과 현실성은 대상, 현상, 현실을 파악해가는 인식의 범주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현실적인 상호연관들을 표현하는 범주들이다. 변증법을 개척해 가던 관념론자들은 이 범주들을 단지 사고의 범주 혹은 개념의 운동으로서만 파악했는데 실은 이 사고의 범주는 객관 세계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맑스, 엥겔스는 이러한 사고의 범주들이 현실세계의 반영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혔고 그에 따라 변증법은 사고의 법칙을 넘어서 존재의 법칙으로 되었다.

변증법 자체는 변화, 발전의 사상이고 법칙이지만 개념들이 변증법적 개념이 되기 위한 전제는 개념들을 세계의 현실적인 상호연관의 반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개념과 범주들이 상호연관 속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그것은 변증법의 전제에 머물거나 아니면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전락한다. 그것은 세계 자체가 변화이고 운동이며 상호연관이기 때문에 개념 또한 상호 연관 속에서, 운동 속에서 파악될 때만 정확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9)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원인과 결과, 개별-특수-보편, 본질과 현상, 우연과 필연, 가능성과 현실성 등은 제 사물의 상호연관의 질서를 가리키는 범주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연관을 가리키는 범주들을 넘어서서 제 사물의 운동과 변화, 발전이라는 변증법의 본령에 해당하는 범주로는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모순)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 등이 있다. 이에 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변증법의 제 법칙은 자연 및 인간사회의 역사로부터 추출된다. 변증법의 제 법칙은 바로 이 역사발전의 두 단계 및 사유 자체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들이다. 나아가 이 법칙들은 전체적으로 세 가지 법칙들로 환원된다. 양의 질로의 전화 및 그 역의 법칙, 대립물의 상호침투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4)

엥겔스가 변증법의 법칙들로 정식화한 위 법칙들은 각각 고유의 성격을 지닌다.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및 그 역의 법칙은 변화, 발전의 양태를 가리킨다. 즉, 제 사물의 변화, 발전이 일어나는 방식, 양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대립물의 상호침투의 법칙 혹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은 운동, 발전의 원천을 가리킨다. 그리고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운동, 변화, 발전의 방향성, 발전의 역전불가능성과 전진성 등을 가리킨다. 그러면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부터 차례차례 고찰해 보자.

레닌은 발전에 대한 이해에서 근본적으로 부딪히는 두 개의 관점을 대비시킨다.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이다. 두 개의 근본적인(혹은 두 개의 가능한? 혹은 역사에서 관찰된 두 개의?) 발전(진화)관은 감소 및 증가로서의, 즉 반복으로서의 발전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립물의 통일(통일물의 상호 배제하는 대립물로의 분열과 그것들 간의 상호관계)로서의 발전이다.”5) 여기에는 상이한 두 개의 발전관이 제시되어 있다. 완만한 양적인 증감으로서 발전인가, 아니면 대립물의 통일로서 발전인가가 대비되어 있다. 완만한 양적인 증감으로서 발전은 흔히 진화적 발전이라 불린다. 세계의 변화, 발전은 단지 양적인 증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대립물의 통일로서 발전은 발전을 단지 양적인 것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대립물의 통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발전은 질적인 비약을 내포한다. 대립하는 것 중 진보적인 것이 반대편을 극복하게 될 때 새로운 질이 생겨나고 그 과정에서 발전은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즉, 점차성의 중단과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질적 비약을 표현하는 개념이 바로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이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 대상, 물질은 양적 규정성과 질적 규정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어떤 사물이 바로 그것인 이유는 질에 의해서 규정된다. 물(水)이 물인 것은 물로서의 질을 지녔기 때문이고 철이 철인 이유는 철로서의 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면 질이 무엇인가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헤겔은 질을 규정된 성질 혹은 어떤 성질에 의한 규정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성질은 그 내부의 두 계기의 통일이며 통일 속의 두 계기의 관계이기 때문에 변화이고 결국은 지양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사회의 질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두 계기의 통일이며 대립이기 때문에 변화하며 결국은 지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헤겔의 질 개념에서 도출된다. 화학을 예로 들면 물 분자는 H2O로 표현되는데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하나가 결합되어 물의 질을 구성한다. 이것은 어떤 물질의 화학적 질을 가리키는 것인데 과거 추상적으로만 이해되어 왔던 질 개념이 과학의 발전에 의해 명료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상품의 성격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치)의 통일로 보았는데 이것은 바로 상품의 질을 두 계기의 통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은 많은 상이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다양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어떤 대상에 존재하는 많은 성질 혹은 질 중에서 으뜸가는 성질, 그 대상의 관건적 성질을 표현하는 것을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즉, 어떤 대상에 존재하는 많은 성질 중에 어떤 것은 부차적 성질이고 어떤 것은 주요한, 관건적 성질일 때 그 관건적 성질을 그 대상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양의 개념으로 넘어가 보자. 흔히 양이 아닌 질을! 이라는 관점이 높이 평가된다. 여기서 양은 부차적인 것을 가리키며 질은 관건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양보다 질을! 이라는 것이 질의 중요성을 가리키지만 양의 의미를 간과한다는 점에서는 한계가 있는 접근이다. 헤겔은 양적 변화는 질을 가리키는 교지(狡智)라고 했는데 이는 뛰어난 변증법적 통찰이다. 질의 변화는 결국 양적 변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헤겔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그러면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를 분석하기 전에 먼저 양의 개념을 고찰해 보자.

헤겔은 양을 연속성과 분리성의 통일로 파악했고 그에 따라 연속량, 분리량의 개념 또한 성립했다. 어떤 물체의 길이가 2미터이면 그것은 한편으로 물체의 길이라는 면에서 연속적 양을 가리키지만 2미터는 3미터, 5미터와 구분되는(분리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질의 개념에서는 내적인 성질이 주된 것이었지만 양의 개념에서는 대상의 외부, 타자와의 관련이 중요한데 그 점을 분리성이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양과 질은 이렇게 개념적으로 상이하지만 대상의, 물질의 양과 질이라는 점에서 상호간에 서로 연관되어 있는데 양과 질의 이러한 연관성, 통일성을 표현하는 개념이 도량(度量)이다. 헤겔은 도량을 “양적인 질” 혹은 “질적인 양”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질과 양의 통일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액체 상태의 물은 도량을 갖고 있는데 100℃가 되면 끓어서 수증기가 된다. 그런 점에서 액체 상태의 물은 0℃부터 100℃에 이르는 자기의 한계, 즉, 도량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좀 더 고찰하면 50℃의 물은 액체상태라는 질을 갖는 물의 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실에서는 모든 대상은 이렇게 질과 양의 통일로서 이러한 도량의 규정성을 갖는다. 그런데 100℃에 이르러 물이 끓어서 수증기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 액체상태의 물이 기체상태로 질적인 변화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질적인 양, 양적인 질로서 물의 도량이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도량의 개념은 질이 양에 의해 규정되고 양이 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을 가리킨다. 기체상태로의 물의 질적 변화는 100℃로의 온도변화 즉, 양의 변화에 의해 규정되며 또한 1000℃로의 물의 변화라는 양적인 변화는 기체상태라는 질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액체상태라는 질에서는 1000℃라는 양적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양은 또한 질에 의해 규정된다. 이와 같이 양과 질은 통일되어 있고 상호규정하며 이를 도량이라는 개념이 표현한다. 이러한 도량이라는 변화는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데 지금의 현실이 양적 변화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질적 도약이 필요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준거가 바로 도량이기 때문이다.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라는 변증법의 법칙은 이렇게 전적으로 도량이라는 개념에 의거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이 낮은 수준에 있었을 때 양이 질을 규정한다는 말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 자체가 양과 질의 상호규정성을 나날이 입증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화학의 발전이었다. 화학이라는 학문은 학문 자체가 조성(組成)의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무수한 화학적 변화는 분자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양적 변화가 이루어지면 새로운 질을 구성하는 분자로 변화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물 분자는 H2O이지만 여기서 산소원자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더 이상 물 분자가 아니게 된다. 화학의 발전 전체가 이렇게 양과 질의 상호전화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과학의 발전에서 중요한 계기였던 멘델레예프의 주기율도 원소를 규정하는 요소의 양의 변화에 따라 원소의 질이 변화한다는 것을 근본원칙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그리하여 당시까지 발견된 원소들을 분석하면서 그 주기율표에서 비어 있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존재를 예측하기까지 하였고 실제로 이후 주기율표에 맞는 새로운 원소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과학은 양과 질의 상호규정 및 전화라는 법칙에 기초하여 발전하였고 역으로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및 그 역의 전화를 확증하여 왔다.

세계의 양적 변화만을 승인하면 그것은 진화적 발전관이 되며 실천적으로는 개량주의에 봉사하게 된다. 개량주의는 사회발전의 질적인 비약을 부인하거나 먼 미래의 일로 돌리고 현실에서는 점진적인 양적인 개량만을 추구한다. 그러나 현실은 모순이고 모순의 발전이며 그것은 점차성의 중단과 비약을 수반하며 바로 이 점을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가 가리킨다. 진화적 발전관과 대비되는 변증법적 발전관 혹은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변화, 점차성의 중단과 비약적 발전이라는 관점은 헤겔이 제기했는데 양과 질의 상호관계에 대한 분석에서 도출된 결론이었다. 그런데 헤겔이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양과 질에 대한 논리적 분석 때문만은 아니었다. 헤겔이 변증법적 논리학이라 할 수 있는 ≪대논리학≫을 쓸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파고가 독일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생생하게 목격되는 혁명적 발전, 비약을 목도하면서 헤겔은 점차성의 중단과 비약적 발전의 개념을 승인하고 제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실에서 발전은 진화적 발전과 비약으로서 발전의 통일이다. 양적인 점차적인 발전 또한 발전의 하나이며 매우 중요한 발전이다. 특히 헤겔이 양이 질의 교지이다라고 한 것에 비추어 보면 양적인 것 하나하나의 발전은 질적인 비약을 예비하는 과정이다. 또한 양적인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할 때 다가오는 새로운 질, 요구되는 새로운 질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질적인 비약의 관점을 빼버린 양적인 발전의 추구는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은 것이다. 현재의 질에서는 얼마만한 양적인 변화가 가능한가는 도량의 개념을 빌어 파악할 수 있다. 더 이상의 양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질이 요구되는가 또한 도량의 개념을 빌어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현실의 발전을 양과 질의 통일로서, 점진적 발전과 비약적 발전의 통일로서 파악할 때만 올바르게 운동을 개척해 갈 수 있다.

점진성의 중단과 비약적 발전은 인간의 인식에서도 볼 수 있다. 개념이라는 것의 의미 자체도 일종의 비약을 가리킨다. 즉, 인간이 외적 세계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종합하는 오랜 과정을 거쳐서 인식에서 비약이 일어날 때 하나의 개념이 탄생하게 된다. 그때 개념은 인식에서 일어나는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비단 하나의 개념에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의 탄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맑스의 사적 유물론의 탄생 또한 인간의 인식에서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한 예이다. 장구한 기간의 계급사회의 역사 속에서 나타났고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생하여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첨예화된 계급적 모순, 그리고 이에 대해 정치경제학자들은 이윤, 임금, 지대라는 소득의 범주들을 통해 계급의 존재를 승인했었다. 그런데 맑스는 이러한 점진적인 인식의 발전에 기초하면서 더 나아가 비약을 했는데 물질적 생산이 사회발전의 근본적 규정력이며 계급은 물질적 생산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관계, 물질적 생산에 의해 규정되는 관계,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됨을 과학적으로 논증했고 이를 통해 사적 유물론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및 그 역의 전화는 발전의 양태를 가리키는 범주이다. 발전이 일어나는 방식과 모습, 형태를 양과 질의 관계가 규정하는 것이다. 양적이고 점진적이고 때로는 느리기만 한 발전도 그 과정이 필연적이라면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양이 질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과 질은 통일되어 있으며 따라서 양적 발전 속에서 의식적으로 질적 변화를 예비하는 것이 사회적 실천에서는 중요하다. 질적 변화를 예비하고 의식하지 못한다면 어느덧 닥친 질적인 비약 앞에서 주체는 실천의 방향을 상실하게 된다.

세계는 양적인 진화적 발전과 질적인 비약적 발전의 통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약적 발전의 필연성은 현실에 내재해 있는 모순, 대립물의 통일에 의해 주어진다. 대립물의 통일과 상호 투쟁 속에서 대립물의 운동이 일어나고 변화, 발전, 비약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발전의 양태에 대한 고찰을 마무리하고 발전의 원천, 운동의 원천으로서 모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에 대한 고찰로 넘어가 보자.

10) 모순 혹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내용과 형식)

모순 혹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은 변증법의 핵이라 할 수 있다. 모순 개념이 변증법의 핵심인 것은 그것이 바로 발전의 원천, 운동의 원천을 해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의 모순 개념만큼 지배계급과 그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공격받은 것이 없을 정도로 모순 개념은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변증법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긍정 속에 부정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고 부정 속에 긍정의 계기를 내포한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상반되는 계기의 통일이 변증법적 인식인데 이것 또한 일종의 모순이다.

모순의 개념은 두 갈래로 발전되어 왔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식논리학상의 모순 개념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증법적 모순 개념이 그것이다. 변증법적 모순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서 직관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는데 운동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추구 속에서 모순개념을 파악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 모순개념은 직관에 불과하였고 그리하여 일종의 궤변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 개념은 형식논리학 상의 모순율에 기초한다. ‘어떤 것이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닐 수는 없다’는 모순율은 논리적 형식상의 모순을 금지하는 것을 기초로 과학적 인식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모순율에 기초하여 고대과학이 성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겔에 의한 변증법의 정립 이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은 지고의 진리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변증법적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변증법의 모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서 형식논리를 벗어나는 운동의 원리, 발전의 원리로서 모순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이 초등수학이라면 변증법의 모순 개념은 고등수학에 해당한다.

모순 개념을 궤변이라는 혐의로부터 해방시킨 사람은 헤겔이다. 헤겔은 관념론자인데 변증법 그리고 모순의 개념을 ‘개념의 자기운동’으로서 전개하여 정립한다. 헤겔이 모순의 개념을 정립하는 과정은 흥미로운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분석하여 거기로부터 변증법적 모순 개념을 추출한다. ‘어떤 것이 A이면서 동시에 비(非)A일 수는 없다’는 모순율에 대해 헤겔은 동일성과 상이성(A와 비A), 분석과 종합, 그리고 부정의 부정이라는 방법론을 써서 분석한다. 비(非)A는 A에 대한 부정이며 또한 ‘없다’는 것 역시 부정이다. 즉,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두 번의 부정이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그리고 A이면서 비A라는 것을 동일성 속의 상이성, 대립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모순율의 구조를 분석한 헤겔은 여기로부터 동일성은 차이를 전제로 한다는 것 그리고 차이는 대립으로 발전하고 그리하여 동일성 속에 존재하는 대립물의 상호관계라는 범주를 도출하는데 이것이 바로 변증법에 있어서 모순 개념의 원형이다. 이것이 개념의 자기운동으로서 모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순 개념은 헤겔에게 있어서는 개념의 자기운동이었지만 현실의 모순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맑스, 엥겔스에 의해 유물론적인 모순 개념으로 전화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율을 통해 논리형식상의 모순의 금지를 확립했는데 이것 자체, 즉 논리적 모순을 범하면 과학에 어긋난다는 것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모순은 현실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존재하였던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직관적 변증법을 의식적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순개념은 궤변으로 치부되었는데 헤겔에 의해 개념의 자기운동으로서 변증법적 모순 개념이 성립하고 이것이 맑스, 엥겔스에 의해 유물론적으로 전화되면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모순 개념이 성립하게 되었다.

헤겔은 모순 개념을 정립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운동의 원천으로 규정하였다. 대립물의 투쟁이 모든 운동을 근거짓는다고 하는 인식은 이렇게 헤겔에 의해 성립되었다. 이 점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도 모순 개념은 운동의 원천으로서 규정된다. 그러면 왜 모순 개념,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 운동의 원천인가를 살펴보자.

모순 개념은 고대 중국에서 창과 방패의 모순으로 설명되기도 했다.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를 선전하던 상인은 그 창으로 그 방패를 뚫으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말이 막혔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변증법적 모순 개념이 아니라 논리형식상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변증법적 모순은 논리형식상의 모순 개념을 넘어서서 모순을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으로 파악한다. 헤겔은 이를 동일성 속의 대립물이라고 보았는데 여기에 모순 개념의 본질이 담겨 있다. 대립하는 것들은 동일성 속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통일성 속에서의 대립이다. 통일성(동일성) 속의 대립이기 때문에 대립하는 각각의 것은 상호 간을 규정하고 제약하게 되고 대립하기 때문에 투쟁하게 된다. 이것을 대립물의 상호의존과 상호부정이라 표현한다. 즉, 대립물들은 한편으로 통일성 속에 있기 때문에 상호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대립이기 때문에 상호부정하며 투쟁하게 된다. 이로부터 바로 운동이 생성되는 것이고 발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라는 두 대립물의 통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운동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통일과 투쟁에 다름 아니다. 먼저 상호의존부터 살펴보면 자본가계급은 잉여가치의 산출을 위해, 자본의 축적을 위해 노동자계급에 의존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도 생계를 위해, 생존을 위해 자본가계급에 고용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 계급의 통일성의 모습이고 상호의존관계이다. 그러나 양 계급은 적대적으로 대립하는데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의 자본의 축적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로부터 즉, 적대적 대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의해 무산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자본의 축적과 노동자계급의 빈곤화는 비례하기 때문이다. 상호의존을 전제로 하는 상호투쟁! 이것이 바로 모순이고 모순관계의 발전이다. 여기서 통일의 측면, 상호의존의 측면과 대립의 측면, 상호부정의 측면 중에서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통일의 측면이 일차적이라고 보면 대립은 이차적이며 따라서 모순의 극복, 지양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운동의 원천으로서 모순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통일과 투쟁 중에서 투쟁이 일차적이며 통일은 이차적이다. 투쟁이 절대적이라고 하면 통일은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통일의 상대성 속에 대립의 절대성이 관철되기에 모순은 운동의 원천으로 되며 모순의 극복, 지양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대립물의 각각의 측면을 분석해 보자. 모순은 대립물의 통일인데 각각의 대립물 중에서 대립의 통일을 지향하고 유지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 반대 측은 대립의 극복, 변화를 지향하게 된다. 이를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하면 자본가계급은 대립의 유지, 통일의 유지를 지향하는 계급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통일의 극복, 즉, 자본주의 사회의 극복을 지향하는 계급이다.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모순의 개념에서 대립물 중 주요한 측면과 부차적인 측면이라는 개념이 도출된다. 어떤 대립물의 통일에서 각각의 대립물 중 어떤 것은 주요한 측면인 반면에 어떤 것은 부차적인 측면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질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주요한 측면과 부차적 측면은 변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적 시기에 주요한 측면은 자본가계급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의 흐름이 강해지는 시기에는 주요한 측면이 노동자계급으로 전화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연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태양계의 운동을 보면 태양의 구심력과 행성들의 원심력의 통일이 태양계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태양계의 역사 속에서 보면 구심력이 우세했던 시기가 있지만 태양계의 역사에서 원심력이 강해지는 시기가 올 것임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즉, 구심력과 원심력의 통일에 있어서 주요한 측면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순은 변증법에 있어서 운동의 원천으로 자리매김된다. 여기서 레닌의 모순 개념을 살펴보자. “그러나 바로 모순이란 더 나아가 여기저기서 불쑥 일어나는 일종의 변칙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자신의 본질적인 규정에 있어서의 부정적인 것, 모든 자기운동의 원리인 것이며, 이 자기운동은 모순의 한 표현 이외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그 때문에 운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오히려 운동은 현존하는 모순 자체이다라는 것이다.”6) 운동은 모순 자체이다라는 것은 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돌을 던져서 날아가는 위치이동을 보면 돌이 어떤 시점에 그 지점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지점에 있지 않을 때 운동이 된다. 특정 시점에 특정 위치에 있는 정지한 점들을 연결한다고 해도 정지의 합이 운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운동은 불연속적인 정지한 점들의 합이 아니라 한편으로 연속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불연속적인 것의 통일이다. 그런 점에서 그 지점에 있으면서(비연속) 동시에 그 지점에 있지 않을 때(연속성) 운동이 되며 운동 자체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통일, 즉, 모순이다. 생명운동을 보면 끊임없는 생리대사로 인해 생물체는 바로 그것이면서 그것이 아니며 이것이 생명운동의 본질이 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운동의 본질을 추구했지만 그것이 궤변으로 취급되었던 것은 변증법의 인식이 직관에 머물고 과학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동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은 현대의 변증법에 의해 훌륭히 설명되며 모순 개념은 더 이상 궤변이 아니라 과학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원자의 세계를 보더라도 원자 내부의 운동은 모순 자체이다. 원자핵의 핵력과 전자의 운동의 통일이 바로 원자의 운동이다. 이와 같이 대립물의 통일로서 운동이라는 것은 과학의 발전에 의해 나날이 확증되고 있다.

그러면 운동의 원천으로서 모순은 어디로 귀결되는가? 운동 자체가 모순이라면 모순의 발전은 운동의 질적인 비약으로, 새로운 질의 창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모순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리형식상의 모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현실에도 존재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과 물질은 모순을 갖고 있는데 이렇게 그 대상을 규정하는 모순을 대상의 내적인 모순이라 한다. 바로 이 내적인 모순의 운동에 의해 그 대상, 물질의 존재가 규정된다.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보면 내적 모순에 의한 운동 자체가 물질의 존재를 규정한다.

내적 모순은 이렇게 객관적 실재이기 때문에 제거할 수가 없다. 즉, 어떤 대상이 있을 때 그 대상의 내적 모순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모순의 제거가 불가능하다면 모순의 극복은 모순의 발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도출된다. 즉, 통일을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측면보다 통일을 극복하려는 대립물의 측면이 우세해지고 그리하여 새로운 질의 창출, 새로운 통일성의 창출로 나아가는 운동, 변화 즉, 지양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순의 발전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의미이다. 이를 자본주의 사회에 비추어 보면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모순은 화해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인 한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모순은 제거될 수도 없고 화해될 수도 없다. 여기서도 모순은 발전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데 통일을 부정하려는 세력, 노동자계급의 발전에 의해 새로운 질, 새로운 통일성의 창출, 자본주의 사회의 지양과 계급 없는 사회의 창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모순은 제거될 수도 없고 화해될 수도 없고 오직 모순 자체의 발전에 의해서만 극복 혹은 지양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내적인 모순은 대상의 존재와 그 운동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무수히 다양한 대상과 운동이 있듯이 모순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모순에는 내적인 모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외부에서 작용하는 외적인 모순 또한 존재한다. 내적인 모순은 대상의 운동의 원천, 자기운동의 원리이지만 외적 모순은 자기운동의 원리라기보다는 운동의 조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를 들면 식물은 내적 모순에 따르는 자기운동의 원리를 갖지만 식물은 또한 자기의 생명활동, 운동의 중요한 조건으로서 태양을 필요로 한다. 즉, 식물과 태양과의 관계는 외적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외적 모순 관계는 한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사회 자체는 자신의 내적인 모순에 의한 운동의 원리, 발전법칙을 갖지만 외적인 환경이 변한다면, 사회의 발전은 영향을 받는다. 내적 모순의 대립물의 통일성과 상호제약성은 그 자체로 대상의 존재와 질을 규정한다. 그러나 외적 모순은 그 자체로 대상의 존재와 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조건으로서 대상을 규정한다. 식물과 태양을 예로 들면 식물은 태양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태양은 식물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적 모순을 이루는 대립물은 대립물 중의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고 결국 대상 자체의 존재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외적 모순과 내적 모순은 긴밀한 연관을 띠기도 하는데 때때로 외적 모순은 내적 모순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국사회를 예로 들면 한국사회의 내적 모순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 한국민중과 독점자본 간의 모순이고 한국민중과 미제국주의와의 모순은 외적 모순이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 모순, 민족 모순, 혹은 신식민지적 모순은 내적인 계급대립이 외적으로 반영되어 관계 맺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의 예속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계급적으로 억압하기 위해서 미제국주의의 신식민지적 지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바로 한국사회에서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의 관계이다. 여기서 NL파가 미제국주의와 한국민중 간의 모순을 한국사회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모순이라고 보는 것은 오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사회의 가장 근본이 되는 모순은 내적 모순이며 외적 모순은 내적 모순을 통해 관철된다. 즉, 미제의 신식민지 지배는 예속 자본가계급을 통해 관철되는 간접지배이다. 모순론의 의미에서 파악되는 한국사회의 모순구조는 이러하다. 그러나 정세의 변동에 따라, 예를 들면 미제가 한반도에서 전쟁위기를 조성하는 경우에 외적 모순이 일차적 중요성을 획득하는 것도 가능하다.

모순은 이렇게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으로 일차적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모순의 종류는 이외에도 다양한데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의 대두는 변혁운동의 발전과 긴밀히 연관되는데 주요모순 개념은 중국의 해방운동에서 크게 논의가 되었다. 예를 들면 1930년대 중국의 변혁은 반제반봉건 혁명으로 규정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했을 때 반봉건의 과제는 뒤로 밀리고 항일이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즉 반제가 주요 모순이 되었고 반봉건은 부차적 모순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주요 모순, 부차적 모순은 변혁운동의 과제를 정확히 설정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이러한 측면은 앞으로의 변혁운동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면시기, 각각의 전술적 시기 혹은 전략적 시기에 전면에 대두되는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접근은 긴요하다. 한편 주요모순과 구분되어야 할 것이 모순의 주요한 측면이다. 주요 모순은 여러 모순들 간의 상호관계에서 주요한 모순과 부차적 모순을 가르는 것이라면 모순의 주요한 측면이라는 개념은 모순 내부에 존재하는 대립물 중에서 주요한 측면이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모순의 분류에서 중요한 것은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의 구분이다. 마오쩌뚱의 ≪모순론≫에서 처음으로 정식화된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의 구분은 예를 들면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적대적 모순과 달리 노동자계급과 농민은 비적대적 모순관계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 구분은 실천적 전략에서 중요한데 비적대적 모순을 적대적 모순으로 혼동하면 그것은 곧바로 좌편향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마오쩌뚱은 이렇게 변혁운동의 과정에서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을 나누었는데 이러한 관점을 발전시켜 해방 후에 사회주의 건설기의 전략 문제에 있어서 ‘인민내부의 모순’이라는 개념을 제출했다. 인민내부에도 모순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비적대적이며 그 모순의 해결방법은 설득과 교육을 통해서임을 주장했다. ‘인민내부의 모순’ 개념은 사회주의 건설기에 있어서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사회주의 건설 과정 자체가 계급대립의 폐지에 기초하여 계급사회의 잔재를 극복하고 인민들 간에 존재하는 모순과 대립을 극복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외에 모순 개념과 맞닿아 있는 것이 내용과 형식의 범주이다. 내용과 형식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은 피히테와 셸링이 시도했었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전면적인 변증법적 인식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용과 형식이라는 개념 중에 일차적인 것은 내용이다. 그러나 형식은 무의미한 것이 결코 아니다. 때로는 형식에 의해 내용이 규정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문제이다. “생산양식의 내용은 생산력이고, 이것이 그 사회적 형식으로서 생산관계를 규정하고 있다.”7) 여기서 내용이 일차적이기 때문에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발전의 관건이 된다. 그러나 형식은 내용에 반작용하기 때문에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자극하거나 혹은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이와 같이 내용과 형식은 밀접하게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은 일차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측면이라면 형식은 이차적이며 상대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성질이 있다. 그리하여 생산관계라는 형식이 더 이상 생산력 발전이라는 내용과 조응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낡은 형식, 생산관계는 파괴되고 내용에 조응하는 새로운 형식, 생산관계가 수립되고 바로 이것이 사회변혁의 본질을 이룬다.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은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 적용될 수 있다. 어떤 대상도 내용과 형식을 가지며 내용과 형식은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11) 부정의 부정의 법칙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가 발전의 양태의 문제이고 모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 운동과 발전의 원천, 원동력의 문제였다면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발전의 방향성의 문제이다. 원시공동체에서 공동소유가 부정되고 사적 소유가 성립되어 계급사회가 발생했지만, 자본주의적 소유의 부정으로 인해 성립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다시 공동체적 소유가 되는데, 새롭게 성립하는 공동소유는 형태는 다시 반복되지만 원시공동체의 공동소유와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기초로 실현된다. 또 밀알이 썩어지는 부정을 통해 싹이 나고 싹이 성장하여 열매를 통해 다시 부정될 때 한 알의 밀알은 어느덧 풍성한 곡식이 된다. 이렇게 부정의 부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는 최초의 결과를 반복하면서도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발전을 결과한다는 경향성을 가리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라고 하였고 이를 나선형적 발전이라 일컬었었다. 그런데 이때 사용되는 부정이라는 개념은 흔히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부정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여기서 변증법적 부정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부정의 의미를 살펴보자. 어떤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부인하고 없애버리거나 폐지하는 것이다. 또 수학에서 +1의 부정은 -1로서 반대되는 것, 대립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것이 일반적 의미에서 부정의 의미이다. 변증법적 부정도 어떤 것을 부인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변증법적 부정은 부정 속에 긍정의 계기를 내포하는 부정이다. 즉, 변증법적 부정은 부정하면서도 대상 속에 있는 긍정적인 것을 가져가는 부정이며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를 지양이라고 했다. 부정조차도 이렇게 파악하는 것은 변증법 자체가 발전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변증법적 부정은 혁명적 성격을 갖는 부정이다. 현존하는 것의 긍정적 이해 속에 부정의 계기를 내포하고 반대로 현존하는 것을 부정하면서도 그것의 긍정적인 면을 가져가는 것! 이와 같이 변증법적 부정은 단순한 불모의 부정이 아니라 지양을 의미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 운동의 본질을 이상의 상태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이라고 했는데 이는 곧 변증법적 부정의 개념을 운동에 적용한 것이었다. 레닌은 변증법적 부정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변증법은 의심할 나위 없이 부정의 요소를, 더욱이 그것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자기 내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변증법에서 특징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단순한 부정, 무익한 부정, 회의적인 부정, 동요, 의심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연관의 계기로서의 부정, 발전의 계기로서의 부정, 긍정적인 것을 보존하는 부정, 즉 어떠한 동요도 어떠한 절충도 하지 않는 부정인 것이다.”8)

엥겔스는 변증법적 부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깊이 있게 통찰한다. “변증법에서 부정한다는 것은 그저 아니라고 말한다거나 어떤 사물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거나 그 사물을 임의의 방식으로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제한이나 규정은 동시에 부정이다. 더욱이 여기서 부정의 방법은 첫째는 과정의 일반적 성질에 의해, 둘째는 그 특수한 성질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나는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 부정을 다시 지양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두 번째의 부정이 여전히 가능하도록 혹은 가능해지도록 첫 번째의 부정을 처리해야 한다. … 그러므로 사물의 종류마다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부정되는 독특한 방법이 있는 것이며 또 표상들과 개념들의 종류마다 그러하다.”9) 어떤 대상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 부정을 다시 지양할 수 있는 방식으로 부정하는 것! 즉 부정의 부정이 가능할 수 있는 부정이 곧 변증법적 부정이라고 엥겔스는 통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증법적 부정은 요술방망이가 아니라 발전의 계기로서 부정이기 때문에 사물, 대상마다 부정의 방식이 달라야 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엥겔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부정, 지양이라는 개념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유물론적으로 개작하여 한층 더 풍부하고 심원한 의미를 찾아내고 있다.

이와 같이 변증법적 부정은 긍정의 계기를 내포한 부정이며 발전의 계기로서 부정이다. 그리하여 변증법적 부정의 연속으로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성립한다. 헤겔에게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개념의 자기운동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논리학 전체에 흐르는 일종의 맥락이다. 논리학의 사변적 구성에서 논리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부정의 부정이 구사되고 있다. 그러나 엥겔스에 의해 재정리되고 개작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논리적 맥락을 구성하는 방법이라는 의미를 넘어 사물과 대상의 현실적 발전의 방향성이라는 의미로 재탄생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엥겔스는 부정의 방법이 사물과 대상의 종류에 따라 달라야 함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엥겔스에 의해 재정립되고 재탄생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변증법적 부정이 발전의 계기로서 부정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증법적 부정의 연속은 발전의 방향성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러한 발전의 방향성 중에 두드러지는 것은 발전의 전진적 성격이다. 즉, 발전의 역전 불가능성이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의해 도출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건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사회 초기에 반동이 대두되어 봉건제가 복고되었으나 생산력의 발전의 흐름에 따라 봉건제는 사라지고 따라서 지주계급도 사라지고 전일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된 것이 역사적 흐름이다. 지금 20세기 사회주의진영이 붕괴되고 소수의 국가를 제외하고 자본주의의 복고가 이루어졌으나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의 심화에 의해 세계는 대공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모순의 발전은 그 결과 모순의 필연적인 지양을 제기하는 것이며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전유, 취득의 사적 성격 간의 모순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의 지양은 계급대립의 폐지이고 사회주의 사회의 창출이 될 수밖에 없다. 생산력의 측면을 보면 다시금 인류가 석기시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 또한 발전의 역전 불가능성, 발전의 전진적 성격을 나타낸다. 또한 지구의 역사를 보면 지구의 탄생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체가 단백질의 형성 결과 탄생되어 생물의 역사가 지구에서 이루어지고 나아가 진화의 결과 인류가 탄생한 것도 발전의 전진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의 전진적 성격은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의해 파악될 수 있지만 그것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물질과 운동의 불멸성과 상호전화 그리고 물질의 운동을 규정하는 내적 모순의 개념과 모순의 제거 불가능성이다.

엥겔스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나선형적 발전으로 파악했다. 나선형적 운동 속에서 다시 이전의 것을 반복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발전된 상태에서의 반복이라는 의미이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의 사례로 맑스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인용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전유 방식, 따라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개인적인 사적 소유, 즉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의 첫 번째의 부정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부정은 자연적 과정의 필연성을 갖고서 그 자신에 의해 생산된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다.”10) 자본주의적 소유는 노동을 하지 않는 자본가의 소유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적 소유의 탄생은 노동하는 개인, 소농민 등에 대한 수탈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노동에 기초한 개인적 소유의 부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맑스는 자본주의적 소유에 대한 부정은 노동에 기초한 진정한 개인적 소유(공동 소유에 기초한 개인적 소유)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부정의 부정이라 본 것이다. 엥겔스는 또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의 사례로 철학의 역사를 들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 고대 유물론은 플라톤 등 관념론에 의해 부정되었지만 이들 관념론은 현대 유물론에 의해 다시금 부정되고 있는데 현대 유물론은 2천 년에 걸친 철학과 과학 발전의 성과를 담고 있다는 것을 제기하고 있다11). 이렇게 엥겔스가 들고 있는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부정의 부정 법칙은 발전의 커다란 방향성을 가리킨다는 점이고 또한 그러한 발전은 역전 불가능한 전진적 성격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러한 발전과정에서의 역전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고 모순의 발전, 그리하여 모순의 지양은 새로운 질의 창출로 나아가며 그러한 발전은 전진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말한다.

12) 인식론

변증법적 유물론의 구성에서 마지막을 차지하는 것은 인식론의 영역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간의 인식의 본질을 외적 세계, 자연의 인간 두뇌로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인간의 인식과 외적 세계 간에서 일차적인 것은 외적 세계라는 유물론적 관점이 반영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레닌은 인간의 인식의 반영적 성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식이란 사유가 객관에로 끊임없이 무한히 접근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 속에서 자연을 반영하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운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끊임없는 과정, 모순의 발생과 그 해결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12) 인간의 인식은 외적 세계, 자연의 반영의 과정인데 그것은 죽어 있는 반영이 아니라 운동 속에서, 모순의 발생과 해결의 과정으로서 반영임을 레닌은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반영론에 기초하여 인식과정의 변증법적 성격이 설명된다. 인간의 인식과정은 모순의 발생과 해결, 낮은 단계의 인식에서 점차적으로 높은 단계의 인식으로의 이행, 인식과정에서 비약의 발생 등 변증법적으로 진행되는데 이를 설명하는 것이 개념의 변증법, 사고의 변증법이다. 여기서 개념의 변증법, 사고의 변증법과 현실세계의 변증법, 자연의 변증법과의 관련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레닌은 사물의 변증법이 사고의 변증법, 이념의 변증법보다 일차적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상과 현실성의 모든 측면에서의 전체와 그들의 (상호) 관계, 바로 이것으로부터 진리가 성립하게 된다. 개념들의 여러 가지 관계(=여러가지 이행=여러가지 모순)=논리학의 주요 내용인데, 이 때 이들 개념(및 그것들의 여러 가지 관계, 여러 가지 이행, 여러 가지 모순)은 객관적 세계의 반영으로 밝혀진다. 사물의 변증법이 이념의 변증법을 산출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13) 개념들은 객관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객관적 세계의 사물의 변증법이 개념의 변증법, 이념의 변증법보다 일차적임을 레닌은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도 사물의 세계가 이념의 세계, 개념의 세계, 사고보다 일차적이라는 유물론적 관점이 근본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 이리하여 엥겔스가 강조하였던 다음과 같은 견해, 즉 변증법은 사고의 법칙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법칙이며 그 중에서 일차적인 것은 존재의 법칙이라 점이 레닌에 의해 재정립되고 있다.

그런데 레닌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인식론과 논리학의 통일성을 말한다. 즉, 변증법적 논리학과 인식론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되어 있다는 주장을 한다. 레닌에 의해 정립된 변증법=논리학=인식론의 통일은 이후 변증법적 유물론이 발전하는 데 주요한 공헌을 했다. 그러면 레닌의 언급을 다소 길지만 직접 인용해 보자. “‘자연, 즉 이 직접적 총체성은 논리적 이념으로 그리고 정신으로 스스로를 전개시킨다.’ 논리학은 인식에 관한 학설이다. 즉, 인식론이다. 인식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반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직접적인, 총체적인 반영이 아니라 일련의 추상화, 정식화, 여러 개념들이나 법칙들 등등의 형성 과정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개념들이나 법칙들 등등(사유, 과학=‘논리적 이념’)이야말로 끊임없이 운동하며 발전해 가는 자연의 보편적 합법칙성을 조건적ㆍ근사적으로 포괄하는 것이다. 여기서 실제로 세 개의 항이 있다. 1)자연, 2) 인간의 인식=인간의 두뇌(바로 상술한 자연의 최고의 산물로서의 두뇌, 그리고 3) 인간의 인식 안에서 자연을 반영하는 형식, 그리고 이러한 형식이야말로 다름 아닌 개념, 법칙, 범주 등등이다. 인간은 자연을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그 ‘직접적 총체성’을 파악=반영=모사할 수 없다. 인간은 단지 추상화나 개념이나 법칙이나 과학적 세계상 기타 등등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자연으로 끊임없이 가까이 접근해갈 뿐이다.”14) 여기서 레닌은 논리학이 곧 인식론임을 천명하고 있다. 자연의 반영으로서 인간의 인식은 자연을 직접적 총체성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 정식화라는 과정을 거치며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개념, 법칙, 범주 등의 논리학은 곧 인식과정의 요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논리학=인식론이라는 정식화를 이루고 있다. 레닌 이전에는 논리학과 인식론을 별개로 파악하는 견해가 대부분이었다. 논리학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을 의미했고 또 인간의 인식과정에 대한 과학적인 해명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서 논리학과 인식론의 통일이라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레닌은 자연의 반영으로서 인식이라는 관점을 기초로 인식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개념, 법칙, 범주 등의 논리적 요소의 형성이 곧 인식의 과정과 같은 것임을 통찰하고 논리학=인식론이라는 주장을 세울 수 있었다. 레닌은 ≪자본론≫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론≫에는 논리학, 변증법, 유물론의 인식론 이 세 개의 낱말은 필요 없다. 그것은 하나이면서 동일한 것이다.”15) 레닌은 ≪자본론≫에 흐르는 변증법적 논리학은 곧 인식의 과정임을 통찰하고 이를 기초로 논리학=인식론=변증법이라는 일반화, 정식화를 이룬 것이다. 레닌의 이러한 관점은 논리학의 발전, 인식론의 발전에 과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이를 기초로 변증법적 논리학의 비약적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자연의 변증법에 기초하여 그것을 개념의 변증법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변증법의 여러 법칙들이 그 자체로 훌륭한 변증법적 논리학의 내용을 구성한다.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학은 기존에 논리학의 본령으로 간주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과 구분되는데 형식논리학이 초등수학이라면 변증법적 논리학은 고등수학이라 할 수 있다. 형식논리학은 동일율, 모순율, 배중율, 충족이유율 등으로 구성되는데 논리형식상의 오류의 방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형식논리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다. 변증법적 모순 개념은 모순율이 말하는 논리형식상의 모순의 금지를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서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모순이야말로 운동의 원천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이렇게 인식의 원리로서 반영론, 존재의 변증법을 반영하는 사고의 변증법, 개념의 변증법, 인식론과 논리학과 변증법의 통일 등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의 토대가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은 여기서 더 심화되는데 본질과 현상, 추상과 구체, 역사와 논리, 실천의 문제, 사고의 형식, 진리의 문제 등이 인식론의 주요 범주로 설정된다.

현상과 본질은 한편으로 객관세계의 상호연관의 범주이면서 동시에 인식론의 범주이기도 하다. 현상은 객관적인 것이고 본질도 객관적인 것이다. 즉, 본질은 단지 관념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의 여러 성질 중에서 가장 깊은 심급, 보편적인 심급, 대상 자체를 규정하는 성질, 측면을 추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질과 현상은 객관세계의 연관이다. 그러나 이 연관, 본질과 현상의 범주는 인식론의 범주이기도 한데 인식 또한 현상적 수준의 인식이 있고 본질에 접근하는 인식이 있고 올바른 인식은 현상 속에서 본질을 추적하는 인식이다. 어떻게 본질에 접근하는 인식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헤겔은 ‘현상은 본질적이고 본질은 현상한다’고 하여 그에 대해 답을 했었다. 현상에 대한 과학적 정리와 인식, 분석과 종합을 통하여 본질의 심급에 점차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러한 방법 이외에, 즉 현상을 통하는 방법 이외에는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이 없다. 그런 점에서 현상과 본질의 범주는 인식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범주가 된다.

추상과 구체의 범주는 과학적 인식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범주라 할 수 있다. 레닌이 인식은 자연을 직접적 총체성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 법칙, 범주 등의 형성의 과정을 거치는 반영이라고 했을 때 바로 추상과 구체의 방법론을 사용했다.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은 구체적인 대상이다. 코스모스는 붉은 색의 꽃, 녹색의 줄기, 하늘거리는 인상, 일년생 초목 등 매우 다양한 성질을 가진 식물이고 우리의 감각에 일차적으로 들어올 때는 구체적인 대상으로서 들어온다. 그러나 거기서 일년생 초목이라는 하나의 성질을 추출한다면 그것은 코스모스라는 대상에 대해 추상화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추상한다고도 하고 사상(捨象)한다고도 하는 이 과정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의 다양한 여러 측면 중에서 나머지 측면을 버리고 혹은 떼어내고 특정의 한 측면을 남겨두는 방식으로 추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의 과정을 거쳐서 분석의 목표가 달성된다. 이러한 추상의 또 다른 예로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상품의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맑스는 상품의 성질을 분석하면서 상품의 생산에는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이 들어간다고 했다. 구체적 유용노동은 구두를 예로 들면 구두의 유용성을 구성하는 온갖 기술의 노동을 말하는 것이고 추상적 인간노동은 구두에 들어간 노동이 인간노동일반으로서의 성질을 갖는 것을 말한다. 구두의 생산에 들어간 노동을 인간노동일반으로서 추상화하는 것은 구두에 들어간 노동의 여타의 다양한 성질을 떼어내고(사상하고) 그 노동 중에서 인간노동일반이라는 특정한 성질을 추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방법이다. 이러한 추상화의 의의는 거대한데 이 방법을 통해 추상적 인간노동의 응결물로서 ‘가치’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인간노동의 응결물로서 가치개념은 노동가치설로 불리며 과학적 정치경제학의 초석이 되는 개념이고 맑스 또한 가치 개념에 기초하여 자본의 운동을 분석한다. 그런데 이렇게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방법만으로 그쳐서는 불완전한데 이제는 다시금 ‘추상에서 구체로’의 역의 방향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또한 ≪자본론≫에서 생생한 예를 보여주는데 맑스는 인간의 노동을 추상하여 얻은 가치개념을 기초로 잉여가치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현실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자본의 구체적인 운동과 나아가 자본주의의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해명한다. 여기서 맑스가 적용한 방법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방법이다. 이러한 예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의 방법이 단순한 분석방법이 아니라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는 과학적이고 풍부한 내용을 정립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흔히 추상적이라고 하면 먼저 어렵다는 인식부터 하곤 한다. 왜냐하면 구체는 현실의 풍부한 면을, 그것도 일차적으로는 감성적으로 보여주는 반면에 추상은 현실의 여러 측면 중 특정한 측면을 추출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어려운 것이다라는 인식은 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추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설정하거나 찾아내는 것이 아니며 대상의 외부에서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의 특정 측면을 추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도 관념론적 인식을 극복하고 추상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을 수립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렇게 유물론적으로 추상을 이해하면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방법을 통해 주요 개념을 추출하고 여기서 다시 추상에서 구체로의 방법을 통해 과학적 개념을 적용하여 현실을 한층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은 맑스주의를 접하는 사람들은 많이 부딪히고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역사와 논리의 변증법은 주목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거나 아니면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논리와 역사의 변증법을 논리역사주의라고 하여 탄핵하는 것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유물론적 인식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논리와 역사의 변증법에 대한 반대, 논리역사주의라는 탄핵은 논리와 역사를 별개로 파악하고 논리와 역사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논리와 역사를 통일시켜 보는 유물론적 관점을 견지했으며 논리를 역사의 반영이라 보았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요컨대 단순한 범주들은, 한층 구체적인 범주 속에서 정신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한층 다면적인 연관이나 관계를 아직 설정하지 않은 채 덜 발전한 구체적인 것이 실현될 수 있는 그러한 관계들의 표현이다; 반면 한층 발전한 구체적인 것은 이 범주를 종속적 관계로 보전한다. 화폐는 자본이 존재하기 전에, 은행이 존재하기 전에, 임금 노동 등등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할 수 있으며 또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다. 따라서 이 측면을 보자면, 한층 단순한 범주는 덜 발전한 전체의 지배적 관계들 또는 더 발전한 전체의 종속적 관계들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더 발전한 전체의 종속적 관계들은 전체가 한층 구체적인 범주 속에서 표현될 수 있는 측면으로 발전하기 전에 이미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관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잡한 것으로 상승하는 추상적 사유의 행정은 현실적인 역사적 과정에 조응한다 할 것이다.”16) 여기서 맑스는 논리가, 범주가 역사적 발전의 반영임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화폐는 자본이, 은행이 존재하기 이전의 발전의 낮은 단계의 표현인데 자본과 은행이 존재하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는 종속적 관계로 포함되고 있다고 한다. 낮은 발전단계의 표현인 화폐라는 단순한 범주는 높은 발전 단계의 표현인 자본이라는 복잡한 범주의 종속적 관계라는 것인데 이는 범주의 발전, 논리의 발전이 역사적 발전의 반영이라는 것이고 맑스는 이를 “단순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잡한 것으로 상승하는 추상적 사유의 행정은 현실적인 역사적 과정에 조응한다”고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논리와 역사의 변증법이고 여기서 일차적인 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다. 또한 ≪자본론≫에서 화폐의 발생사에 대한 맑스의 분석은 논리와 역사의 통일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된다. 맑스는 ≪자본론≫1권 1편 1장 상품에 대한 분석의 “제3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에서 화폐의 발생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단순한(우연적인) 가치형태→전개된 가치형태→일반적 가치형태→화폐형태라는 논리적 순서로 화폐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가치형태가 현실적으로 발전해 온 역사적인 각각의 단계, 과정을 논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맑스는 논리는 역사적 발전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적인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으며 이렇게 논리와 역사의 변증법을 구사했기에 깊이 있는 내용을 끌어내고 과학적인 성취를 할 수 있었다. 레닌 또한 역사와 논리의 변증법을 긍정하고 있는데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역사와 논리의 변증법에 대한 헤겔의 언급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나는 ‘역사에 있어서 여러 철학 체계들의 연쇄는, 이념이 갖고 있는 여러 개념 규정들의 논리적 영역에서의 연쇄와 똑같다’고 단언한다.”17) “그 반대로 논리적 진행만을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논리적 진행의 주요계기들에 따라 그 속에서 역사적 현상들의 진행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물론 이러한 순수개념들을 역사적 형태가 내포하고 있는 것 속에서 인식할 줄 알아야만 한다.”18) 여기서 레닌은 철학체계들의 연쇄, 즉, 철학의 역사는 논리적 영역의 연쇄와 같다고 파악하고 있으며 논리적 진행의 계기는 역사적 현상들의 진행과 맞물려 있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레닌 또한 논리와 역사의 변증법을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와 역사의 변증법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에 명확히 서기 위해서는 역사가 논리보다 일차적임을 승인할 필요가 있다. 논리는 역사의 반영이라는 것! 이것은 유물론이면서 동시에 변증법적 인식이다. 이렇게 보면 인식에 있어서 논리적 접근과 역사적 접근의 통일성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데 학문에 있어서 논리적 접근과 역사적 접근의 통일은 대상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접하는 수학은 수에 있어서 논리라 할 수 있다. 즉, 수의 논리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수학의 역사를 수의 논리와 통일시켜 접근한다면 수학에 대한 이해는 매우 깊어질 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에서 특징적인 것은 실천을 철학의 영역으로, 인식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데 있다. 바로 이 점으로 인하여 맑스주의 철학은 이전의 모든 철학과 구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고 하여 실천의 의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맑스의 묘비명이기도 한 이 테제는 사변적 철학에서 혁명적 철학으로의 이행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 점이 바로 인식론에서 실천의 의미를 기초지운다.

인식론에서, 철학에서 실천의 의미는 헤겔에 의해 예비되었고 맑스에 의해 전면화되었다.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헤겔에게서 존재하는 실천 개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개념이 이제 대자적으로 즉자대자적으로 규정된 개념인 이상, 이념은 실천적 이념, 즉 행동이다.”19) 헤겔은 개념의 자기운동에 따라 즉자대자적으로 규정되면 이념은 실천적으로 되고 따라서 실천과 행동의 개념으로 전화한다고 보고 있다. 레닌은 여기서 헤겔이 개념적으로 파악한 실천을 고찰하면서 헤겔에게서 이미 실천이 인식론적 사슬로서 위치지워지고 있다고 본다. “헤겔의 경우 실천은 사슬의 고리로서, 더욱이 객관적(헤겔식으로는 “절대적”) 진리로의 이행으로서 인식과정의 분석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실천이라는 기준을 인식론에 도입할 때, 직접 헤겔을 화제의 실마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를 보라.”20) 이와 같이 레닌은 맑스가 헤겔을 실마리로 하여 실천의 인식론적 위상을 정립했다고 본다. 그러나 레닌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직접 헤겔을 분석하면서 인식론상에서 실천의 의의를 분석하고 정교화하는데 먼저 레닌이 인용하는 헤겔의 견해를 길지만 살펴보자.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고, 개념과 동등하고, 그리고 개개의 외적 현실성의 요구를 자기 내에 내포하고 있는 이 규정성은 바로 선이다. 선이 절대적이라는 가치를 가지고서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념의 자기 내적 총체성이고 동시에 자유로운 통일과 주관성의 형식을 갖춘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념은 앞에서 고찰한 인식활동의 이념보다 더 고차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가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또 단적으로 현실적이라는 가치도 가지기 때문이다.”21) 여기서 헤겔은 외적 현실성의 요구를 내포하는 것이 선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때 선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실천이라는 개념과 동일하다. 그리고 헤겔은 선(실천)의 이념은 인식활동보다 고차적이라고 보고 있는데 왜냐하면 보편성의 가치와 현실성의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레닌이 인식론상 실천의 의미를 정립하는 기초가 되는데 헤겔의 이 부분에 대한 분석에 기초하여 레닌은 다음과 같이 실천의 의의를 정식화하고 있다. “실천은 (이론적) 인식보다 더 고차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가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직접적 현실성이라는 가치도 가지기 때문이다.”22) 여기서 레닌은 외적 현실성의 요구라는 헤겔의 선의 개념을 실천으로 파악하여 실천은 이론적 인식보다 고차적이며 그 이유는 보편성의 가치와 현실성의 가치를 가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철학에, 인식론에 실천을 포함하는 것은 헤겔에 의해 단초가 제기되고 맑스에 의해 정립되었으며 레닌에 의해 발전되었다.

사실 실천을 인식론에 포함하는 것의 의의는 지대하다. 인간의 인식 발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실천이라는 인식! 이것은 인식론을 관념론에서 해방하여 유물론의 지반 위에 재정립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실천이 인식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결정적이다. 엥겔스는 ‘원숭이의 인간화에서 노동이 한 역할’이라는 논문에서 인류가 유인원에서 갈라져 나오는 결정적인 계기, 인류로의 정립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노동임을 논증하고 있다. 노동을 통해서 언어가 발생하고 언어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자극하고 이러한 지적 능력의 발전은 다시금 노동, 실천에 반작용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가 형성되고 문화가 발달하여 인류가 발생했다는 것을 논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러하며 또한 논리적으로도 실천은 인식의 발전에 결정적이다. 책을 통해 배우는 지식이 살아 있는 지식이 되려면, 즉, 인식의 발전을 현실적으로 결과하려면 실천과 결합되어야 한다. 실천과 결합되지 않는 지식은 죽어 있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실천을 통해서 논리가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파악할 수 있고 잘못된 지식을 교정할 수 있다. 이렇게 인식과 실천의 상호작용 속에서 인식의 풍부화가 가능하며 그러한 인식의 발전은 올바른 실천을 결과한다.

또한 실천은 진리의 검증기준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올바른가를 실천을 떠나 논하는 것은 스콜라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 진리의 올바름은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의 문제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논리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면 진리가 아닌가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매우 협소하고 비유물론적이다. 논리의, 개념의 올바름은 어떻게 검증되는가? 그것은 개념과 현실 대상과의 일치여부의 문제로 될 수밖에 없고 결국은 실천의 문제로 된다.

진리를 개념 혹은 인식과 대상의 일치로 보는 것은 오랜 기간의 철학과 과학발전의 성과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연구와 논의 그리고 근대과학의 발전으로 진리를 인식과 대상의 일치, 개념과 대상의 일치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진리개념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진리의 상대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흔히 진리라고 일컫는 것은 일정한 조건 속에서만 타당한 상대적 진리가 대부분이다. 절대적 진리를 내세웠던 형이상학이 과학의 발전에 의해 붕괴됨에 따라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고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엥겔스는 진리의 상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와 오류는, 양극적 대립 속에서 운동하는 모든 사유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극히 제한된 영역에서만 절대적 통용력을 지닌다. … 우리가 진리와 오류의 대립을 저 상술한 협소한 영역 외부에 적용한다면, 그 즉시 이 대립은 상대적인 것으로 되며, 따라서 정확한 과학적 표현 방법으로는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런데 만약 이 대립을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것으로서 저 영역 외부에 적용하려 든다면, 우리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 것이다; 대립의 양극은 그 반대물로 전도되고, 진리는 오류로 되며 오류는 진리로 된다”23) 여기서 엥겔스가 강조하는 것은 진리와 오류는 일정한 영역, 일정한 조건 속에서만 타당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영역을 넘어 진리성을 주장한다면 즉각 오류로 전화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엥겔스는 여기서 종국적 진리, 영원한 진리라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반박하면서 진리라는 것이 상대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엥겔스가 영원한 진리 혹은 절대적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이 시도 때도 없이 절대적 진리를 말하는 것은 비판하여야 하지만 이 세계에 절대적 진리가 있음은 엥겔스도 인정하고 있다. 만약진리의 상대성만을 내세우고 진리의 절대성 자체를 부정하면 회의주의와 상대주의가 불가피하게 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절대적 진리의 존재 또한 승인되는데 이로부터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관계가 제기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관계를 “상대적 진리의 총화로 구성된 절대적 진리”24)로 파악한다. 즉, 상대적 진리와 분리된, 별도의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상대적 진리들의 연관 속에서, 그것들의 총합으로서 절대적 진리를 구성한다. 예를 들면 에너지 보존 및 전화의 법칙은 일체의 물리적 현상에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법칙으로 승인되고 있다. 그러나 그 법칙을 구성하는 것은 상대적이다. 즉, 개개의 물질과 운동의 전화는 일정한 상대적인 조건을 필요로 한다. 즉, 에너지 보존 및 전화의 법칙은 일정한 상대적 조건 속에서만 타당한 여러 상대적 진리들의 총합으로서 구성된다.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관계는 대체로 이러하다. 여기서 핵심은 상대적 진리와 분리된, 별도의 어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상대적 진리의 연쇄 속에 관철되는 보편성으로서 절대적 진리라고 하는 점이다. 이러한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는 모두 객관적 진리이다. 즉, 주관의 인식을 떠난 객관적 현실의 반영으로서 진리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렇게 진리의 객관성,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승인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강조는 다음과 같은 명제 즉, ‘진리는 구체적인 것이다’로 정식화된다. ‘진리는 구체적이다’는 인식은 한편으로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승인하면서도 조건에 따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올바름 여부가 좌우된다는 인식이다. 특정 상황에서는 올바른 명제가 다른 상황에서는 올바르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진리는 구체적이기 때문에 항상 변화하는 시ㆍ공간의 조건, 여타의 조건들 속에서 진리여부를 판별해야 한다. 진리는 인식, 개념과 대상의 일치여부인데 대상을 의미하는 만물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 있고 유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는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은 인식의 본질은 외적 세계, 자연의 반영이라는 것을 기초로 사고의 변증법, 개념의 변증법은 존재의 변증법, 자연의 변증법의 반영이라는 것을 근본 토대로 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곧 인식론이며 따라서 논리학=인식론=변증법이라는 정식이 성립한다. 그리고 형식논리학이 초등수학이라면 변증법적 논리학은 고등수학이며 본질과 현상, 추상과 구체, 역사와 논리의 변증법이 전개된다.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에 실천이 포함되면서 인식론에 변혁이 일어났으며 인식과정에 대한 과학적 설명, 보다 풍부한 설명이 가능해졌다. 끝으로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상대적 진리의 총화로서 절대적 진리라는 인식이 정립되었고 진리는 개념과 대상의 일치라는 인식에서 더 나아가 ‘진리는 구체적이다’라는 변증법적 인식이 성립되었다. <노사과연>


1) 레닌, ≪철학노트≫, 논장, p. 301.

2) 엥겔스, ≪자연변증법≫, 중원문화, p. 229.

3) 엥겔스, ≪자연변증법≫, 중원문화, pp. 223-224.

4) 엥겔스, ≪자연변증법≫, 중원문화, p. 58.

5) 레닌, ≪철학노트≫, 논장, p. 300.

6) 레닌, ≪철학노트≫, 논장, pp. 88-89.

7) ≪세계철학사 II: 변증법적 유물론≫, 녹두출판사, p. 202.

8) 레닌, ≪철학노트≫, 논장, p. 182.

9) 엥겔스, “오이겐 뒤링씨의 과학변혁(반-뒤링)”,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제5권, 박종철출판사, p. 158.

10) 맑스, “반뒤링론”,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제5권, 박종철 출판사, p. 150에서 재인용.

11) 엥겔스, 앞의 책, pp. 154-155.

12) 레닌, ≪철학노트≫, 논장, p. 149.

13) 레닌, 앞의 책, 논장, p. 150.

14) 레닌, 앞의 책, 논장, pp. 134-135.

15) 레닌, 앞의 책, 논장, p. 296.

16) 맑스,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한 기본 개요≫의 서설”,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제2권, 박종철 출판사, p. 463.

17) 레닌, ≪철학노트≫, 논장, p. 199.

18) 레닌, 앞의 책, p. 200.

19) 헤겔, 레닌의 ≪철학노트≫에서 재인용, 논장, p. 166.

20) 레닌, 앞의 책, p. 167.

21) 헤겔, 레닌의 ≪철학노트≫에서 재인용, 논장, pp. 168-169.

22) 레닌, 앞의 책, p. 169.

23) 엥겔스, “반뒤링론”,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제5권, 박종철 출판사, p. 102.

24) ≪세계철학사 II:변증법적 유물론≫, 녹두, p.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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