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 (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27)

남부디리파드(E. M. S. Namboodiripad)

번역: 이병진(양심수, 회원)

Ⅷ. 남아프리카에서의 투쟁

벵골이 재통합됨에 따라서, 인도 정치계에 철저한 변화가 생겼다. 그런 전개를 설명하기 전에,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의 문제점들과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농촌 인구의 빈곤화로 인해 농촌에서 살기 힘들어진 수많은 인민들은 영국 지배체제가 들어서자 인도를 떠났다. 생계수단을 찾으러 떠난 여러 나라들 중, 많은 이들이 남아프리카로 갔고 그곳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정착하였다. 남아프리카로 이주한 이들 가운데에는 상인, 변호사, 교사와 기타 위치를 차지한 이들도 있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에서는 인도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들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남아프리카에서 직면했던 문제가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지배자들은 백인 우월주의, 인종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있던 백인들이었다. 그 백인 인종주의 정권은 상대적으로 더 좋은 지위에 있던 인도인들조차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하였다. 그런 차별적인 취급에 적대하는 감정들로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전체 인도 공동체가 들끓었다.

그것은 남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흑인들과 유색인종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일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예삿일이었다. 실제로 모든 고위직에서 인도인을 배제하고 행정 조직으로부터 인도인을 축출하려는 영국 지배자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항의운동은 “스와라지”라는 슬로건과 그 슬로건에 기초한 선동 강령에 근거한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인도인들의 문제는 다른 지역들에 정착한 인도인들의 문제와는 확연히 달랐다.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대중운동은 백인 지배자들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면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운동은 국민회의를 포함한 사회, 정치조직들의 지지를 받았다. “남아프리카 인도인들”의 문제와 관련된 결의들이 여러 번 국민회의의 회합에서 채택되었고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수차례의 대중집회도 열렸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도정치의 일부가 되었다.

이 투쟁의 최고 지도자는 모한다스 까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였다. 그는 이후에 거의 30년 가까이를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지도자로서 인도정치를 지배하였고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1)로서 추앙받았다. 그때만 해도 간디는 인도내부의 정치발전과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남아프리카의 인도인들을 위한 싸움을 하면서 국민회의, 무슬림 연맹 그리고 기타 비정당 지도자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다. 타타 대기업의 창시자인 라탄 타타(Ratan Tata), 하이데르바드의 니잠(the Nizam of Hyderabad), 아가 칸(the Aga Khan) 그리고 기타 많은 이들이 남아프리카 인도인들을 조력하고 기금을 조성하였다. 사실 남아프리카 인도인들이 받은 공격은 ‘스와데시’, ‘스와라지’ 투쟁을 조직한 급진주의자들로부터 공동체의 특수 이익들을 지키고 옹호하는 사람들까지 인도 정치지도자들의 광범위한 관심을 일으켰다.

백인 인종지배에 저항하기 위해서 간디가 고안한 것이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였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그것은 인도 정치에도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나중에 사티아그라하가 취한 여러 형태와 그 외 관련 문제들, 인도에서 그 투쟁의 여러 단계를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인도인의 투쟁과 관련한 어떤 특징을 꼭 언급해야 하는데, 그것은 후일 인도에서 투쟁하는 간디의 방법과는 다른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하나는, 부자인지 또는 가난한지 생활에서의 지위와 상관없이 남아프리카 인도인 공동체 전체가 결집하여 투쟁이 시작되었고 발전하였다는 점이다. 그 투쟁의 핵심 동력은 문맹자들과 당시에는 무력했던 일반 인민들이었다. ‘간디식 투쟁’은 그 초기에, 그들에게 자신감과 자립의식을 심어주었다. 간디의 전기 작가인 텐둘까르(D. G. Tendulkar)는 아래와 같이 사건을 기술했다.

낡을 대로 낡은 옷을 입고, 한 손에는 터번을 들고, 앞니 두 개는 부러졌고, 입술에서는 피가 나오는 타밀 남자가 젊은 국선변호사(간디) 앞에 섰다. 간디는 그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간디는 터번을 쓰라고 그를 설득하며 평등하게 대했다. 이것은 그 가난한 노예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발라순다람(Balasundaram)으로 불리는 그 가난한 방문객은 두르반(Durban)에 거주하는 유명한 유럽인 밑에서 고용계약을 맺고 일하는 중이었다. 그의 주인은 무력한 그 노동자를 피 흘릴 때까지 때렸다. 간디는 진단서를 받으러 의사에게 갔다. 그리고 그 다친 사람을 데리고 치안판사에게 갔다. 간디는 그 고용주를 처벌하려는 게 아니라 발라순다람을 고용주로부터 풀어주고 싶었다. 노예처럼, 고용된 노동자는 주인의 재산이었다. 간디는 그를 다른 이에게 인도하는 데 성공했다. 발라순다람의 사례는 마드라스 곳곳에 있는 모든 고용노동자들에게까지 퍼져나갔고 그들은 간디를 친구로 대했다.2)

이어지는 사태에서 남아프리카의 인도 노동자들은 새로운 자신감을 얻었다. 그들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깜짝 놀랄 용기로 조직적으로 강고하게 맞섰다. 거의 6천 명의 석탄광부들이 파업을 하였다. 특히, 그 파업에 참가했던 여성노동자들이 전례가 없던 영웅성과 조직의식을 보여주었다. 역사적인 대중시위 파업에 대해서 텐둘까르가 서술했다.

그 파업은 지축을 뒤흔든 노동자들의 물결이었다. 그것은 철도와 거리에서 계속 이어졌다. 용기 있는 대담한 두 여성이 자신들의 어린 아이가 도중에 죽었는데도 찰스타운(Charlstown)에 도착했다. 한 아이는 행진하면서 비바람에 죽었고, 다른 아이는 시냇물을 건너는 중에 엄마의 품 안에서 떨어져 물에 빠졌다. 그러나 그 용감한 어머니들은 낙담하지 않았다. 한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그리워해도 돌아오지 않을 이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산 자를 위해서만 일해야 합니다”.3)

간디는 삶 속에서 자신을 감동시킨 그와 같은 수많은 경험들을 하였다. 몇 년 후 마드리스에서 그와 그의 부인에게 상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간디는 말했다.

“남아프리카에서 희생당하고, 일을 멈추어야 했고, 고통받는 당신의 조국 사람을 위하여 당신은 이 자리에서 사용하는 열개의 언어 중에 무슨 언어를 사용하라고 제안하시겠습니까? 니가빤(Nigappan), 나라야나스와미(Narayanaswamy), 열일곱 또는 열여덟의 젊은이, 순수한 신념으로 모든 재판과 고통과 조국을 위한 모든 것을 무릅쓴 이들을 위하여 무슨 언어를 사용하라고 제안하시겠습니까? 발리아마(Balliamma), 열여섯의 사랑스러운 딸, 열병 속에서도 한 달이 지나서야 굴복하여 가죽과 뼈만 남아 마리츠버그(Maritzburg) 감옥에서 석방된 그 소녀를 위해서 당신은 무슨 언어를 사용하라고 제안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말했습니다. 내가 그런 위대한 소년과 소녀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입니다. 순수하고 진심으로 일하면서 결코 작은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그들이 나를 참되게 감동시켰습니다. 그들의 위대한 희생, 그들의 믿음, 그들의 위대한 신에 대한 신뢰가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 그들이야 말로 당신들이 우리에게 씌우려던 왕관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 이 젊은이들은 당신들이 애정어리지만 맹목적으로 우리에게 주려던 모든 형용문구들을 다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4)

당시 인도에서의 독립운동에는 이러한 종류의 운동이 없었다. 남아프리카 인도인들의 투쟁처럼, 일반노동자들의 조직적인 투쟁에서 영감을 얻은 경향은, 띨라크가 이끈 급진주의 운동에서도, 띨라크의 영향을 받아 국민회의 온건파들과 무슬림 동맹이 지도하는 운동에 변화를 주려했던 혁명적 운동에서도 부재했다.

띨라크는 기근과 전염병이 돌아 끔찍하게 죽어가는 농촌대중들을 위해서 투쟁하였고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과 기타 요구상황들을 위한 산업 노동자들의 싸움에서도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 띨라크조차 남아프리카에서 간디가 했던 것처럼, 문맹자들과 무력한 인민대중의 정신적 영감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띨라크는 거대하고 다재다능한 그의 지도력을 이용하여 인민들을 고무하였고 자기 희생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 역자) 간디가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민들에게 그것을 조직된 형태로 되돌려주지 못했다. 띨라크가 스와데시와 영국상품 거부운동을 저항운동으로 바꾸려고 생각하기 전에, 간디는 이미 그런 형태의 투쟁을 실천하고 있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벵골과 나라의 여러 지역들에서 혁명운동들이 일어났다. 사실,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의 불구덩이에 그들 자신을 내던지고 그들이 투쟁 속에 있을 때 그들의 삶과 모든 것을 희생하려고 준비한 혁명가들이 당연하게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얻었다. 우리나라의 대지가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혁명가들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 영웅주의와 투쟁성에 의존하였다. 그들은 간디가 행했던 것처럼, 발라라순다람, 발리아마, 나가빤, 나라야나스와미와 같은 영웅들을 만들지 못했다. 그들은 혁명이 성공하기 위한 주요 조건이 조직적인 투쟁을 통해서 수천 명의 그런 영웅들을 낳는 것임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

이 장을 마무리하기 전에 남아프리카에서 계속 성숙되진 않았지만 초보적인 형태로 나타난 간디식 투쟁방법의 특징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비록 간디가 인민대중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그 영감에서 얻은 투쟁방법을 발전시켰지만, 그의 일반적인 정치인식은 그때까지 인도정치에서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과 달랐다. 인도에서 모든 사회와 정치운동들은, 라자 람모한 로이가 이끈 사회개혁운동에서부터 급진주의와 혁명운동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노선에 따라 인도 근대화를 위한 노력들의 일부분으로 일어났다. 근대화를 지향하던 그러한 경향은 보수적이었던 라마크리쉬나-비베까난다, 아리야 사마즈, 그리고 무슬림연맹이 이끈 운동들에서 조차 어렴풋이 포착되었다. 반면에, 간디는 근대화 대신에 인도를 수천 년 뒤로 퇴행시켰다. 그런 간디식 인식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1908년 그가 쓴 ≪힌두 스와라지(Hindu Swaraj)≫에서 볼 수 있다. 그 글에서 간디는 영국지배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도에 도입한 근대문명들의 상징이었던 철도, 우편, 전신, 전화, 그리고 근대 의료과학조차 날카롭게 비난했다. 그는 봄베이 그리고 캘커타 같은 인도의 대도시들이 사회적으로 타락했고 그들이 인민들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선언했다. “지난 오십 년 동안 깨달은 사실을 완벽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인도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는 철도, 병원, 변호사, 의사 등등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퇴행주의 세계관은 남아프리카 투쟁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이슈의 해법을 찾던 그 투쟁에서 근본적인 성격의 사회-정치적 인식은 큰 적실성이 없었다. 그렇지만 훗날 인도 국내 정치에 똑같은 투쟁 방법이 사용되자, 간디식 세계관의 장단점들이 드러났다. 남아프리카와 인도의 인민은 남아프리카 투쟁의 반제국주의 성격만을 인지할 수 있었다. <노사과연>


1) 역주: 마하트마는 성인이라는 뜻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어 ‘성인 간디’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마하트마 간디’로 표기했다.

2) D. G. Tendulkar, Mahatma: Life of Mohandas Karamchand Gandhi, Bombay, Vithalbhai K Jhaveri and D. G. Tendulkar, 1951, Vol. Ⅰ, p. 52.

3) Ibid, p. 170.

4) Ibid, pp. 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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