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그 정도면 충분한데, 이제 그만 하지! (Enough is enough!)”

배은주 | 편집위원

 

나도 한때는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었다. 미국 바이어와 국내기업을 연결해 주는 바잉오피스에서 머천다이저로 일했었는데, 무역거래를 성사시키는 중간자로서의 업무는 긴장되면서도 즐거웠고 한편 보람 있었다. 하지만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는 출산과 육아로 직장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살림을 살면서 두 아이를 더 출산해 아이는 네 명이 되었고 나는 다시 사회로 나올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렇게 20여 년 동안 나는 줄곧 가정주부로 살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집안에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자주 들었다. 노동자의 고용불안정이 상시적 상황이 된 지금, 남편이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막내는 아직 중3이고, 둘째와 셋째는 내년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살림살이인데 남편이 직장을 잃는다면? … 아이들을 더 건사해야 하는데… 남편이 아직 일을 하고 있을 때 무엇이라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강박증이 일었다.

 

그런 이유로 올 봄엔 일자리를 찾겠다고 다소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내 의지와는 달리 20년 동안 가정주부로 살아온 중년여성을 반겨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마트 캐셔도, 식당일도, 아이돌보미도, 빵집 아르바이트도 모두 보다 더 젊고 경력 있는 사람을 선호했다. 유일하게 반겨주는 곳은 보험회사였다. 지인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일주일간 보험교육을 받고 보험대리점 자격시험도 봤다. 합격은 했지만 그다지 보험영업을 할 의향도 재주도 자신도 없었다. 한동안 보험회사 지점장 전화를 피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는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서울시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sns마케팅매니저 양성과정 강좌를 들었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망설이긴 했지만 들어보기로 했다. 강의 차수가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은, 결국 블로그 만들어 열심히 블로깅 해서 블로그지수를 높여 파워블로거가 되라는 것이었다.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도 공짜로 쓰고, 분위기 있는 맛집에서 맛있는 음식도 공짜로 먹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통장에 돈이 쌓이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거라 했다. 세간에 떠도는 ‘파워 블로거지’라는 말이 떠올랐다. 시쳇말로 돈을 준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국비지원이니 끝까지 강의를 들어달라고, 담당자가 몇차례 연락을 해 왔고, 마지못해 강의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결국 중간에 그만 두었다.

 

또 다른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는 여성가족부에서 국비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인성교육전문가 양성과정이란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다. 요즘 한창 말이 많은 그 인성전문가를 약 200시간 교육해서 양성한다는 프로그램이었다. 글쎄, 인성이라는 것이 이른바 전문가들로부터 단지 몇 시간 의무적으로 교육 받아서 생길 것 같지도 않지만, 그 교육이라 함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거나 그러한 것을 주입시키는 일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닥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 외 50대 여성의 취업과 창업을 위한 직업교육으로는 산후관리사, 요양사, 영양조리사, 실버케어, 이름도 낯설게 무슨무슨 상담사니 컨설턴트를 양성한다는 프로그램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교육의 질은 논외로 치더라도 막상 수료한다고 해서 취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이제한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이와 경력 등 여러 제약이 있었다. 취업의 문턱은 높고, 임금은 일률적으로 최저임금에 맞춰져 있었다. 커피나 쥬스 만드는 거라도 배워볼까 생각했지만, 개업하기가 무섭게 문 닫는 가게들, 점점 남아도는 동네 가게들을 보면 창업은 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부차적이지만 중요한 것, 나이든 사람들보다 젊은이들의 서비스를 좋아하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들 수는 없지만, 있는 것을 잘 가꾸고 키워내고 보다 좋게 만들 수 있다. 아기들이 울면 왜 우는지 상황에 따라 잘 돌볼 줄 알고, 청소년들과도 잘 소통할 수 있으며, 적절하게 살림도 잘 산다. 목재를 이용해 책걸상이나 침대, 서랍장 같은 가재도구도 제법 잘 만들 수 있으며, 식탁 위에 올릴 푸성귀 정도는 키울 수 있으며, 겨울날 언덕 위에 쌓인 폭설을 제 때 치워 사람들이 안전하게 다니게 할 수 있다. 가정주부로 살아오면서 나는 베이비시터였으며, 청소년 상담사였고, 기획자였으며, 소목이었으며, 요리사였고, 청소부였으며 자연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돈을 벌려고 알아보았을 때, 나는 내 무능력만 확인하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노동은 별 가치가 없었다. 다시 말해 50대 중년여성의 노동력은 상품가치도 없었다(그러면서 이 자본주의 사회는 내 노동을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그늘진 곳으로 가서 활용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자선행위와 재능기부, 그리고 노력봉사와 같은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회는 그런 행위가 사람들을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 준다며, 감격스럽게도 노후와 건강까지도 챙겨주는 것이다). 보다 젊고 능력 있는 상품들이 시장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그들을 위한 일자리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며 긴 노동시간을 견뎌야 하나? 왜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조차 팔 기회가 없어 빈곤에 허덕여야 하는 것인가? 단순하게 물어 보자. 사람들이 일을 나눠서 하면 안 될까? 일을 나눠 한다면 노동시간도 줄어들고 일자리가 없어서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최근 칼 맑스의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를 읽었는데 이것과 관련한 문구가 있었다(이 문구는 맑스가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슐쯔의 저서 ≪생산의 운동≫에서 가져와 자신의 저작에 인용한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오늘날의 생산의 견지에서 사회의 모든 물질적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전 노동 가능 인구당 일일 평균 5시간의 노동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 기계공학의 개선을 통한 시간 절감에도 불구하고 공장에서의 노예 노동 시간은 수많은 주민에게 있어서 커지기만 하였다”

 

약 170년 전 저술이다. 그렇다면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은? 전 노동 가능 인구당 일일 평균 한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나 상황은 그때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맑스는 이런 현상에 대해 역시 같은 저작에서 이렇게 통찰하였다.

 

“노동자에게 가장 유리한 사회 상태에 있어서조차, 노동자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초과 노동과 조기 사망, 기계로의 전락, 노동자를 위협할 정도로 축적되는 자본의 노예, 새로운 경쟁,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의 아사 혹은 구걸이다.”

 

아무리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한다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은 초과노동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산업예비군은 남아돌고, 그로 인해 노동자들끼리 경쟁하게 되고, 경쟁에서 진 사람들은 골방에서 쓸쓸히 죽어가거나 혹은 하다못해 ‘블로거지’짓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런 빛나는 통찰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아직도 고리타분하게 맑스 타령이나 하냐며 비아냥거린다.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맑스의 통찰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데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들의 고집을 어떻게 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그러하든 말든, 저울대의 추는 이미 기울기 시작해 자본주의 몰락의 징후를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그리스 사태가 그렇고, 미제국주의에서의 좌클릭도 그렇고, 재벌에 복속하여 광분하고 있는 한국의 박근혜 정권이 그렇다.

 

유력한 미국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이 금융자본의 메카인 월가를 비판하고, 또 ‘우버’ 서비스로 대표되는 공유경제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공유경제 방식을 “임시직 경제”라 일컬으며, 이런 방식이 “노동조건이나 미래의 좋은 일자리 창출을 막는다”고 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대로, 공유경제란, 네트워크를 이용해, 이를테면 ‘우버’라는 기업이름으로 노동자들이 수익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복지는 전무하고, 모든 책임과 의무는 서비스노동자가 짊어져야 한다. 수입은 일정하지 않고, 남는 시간에 일한다기보다 오히려 일주일 내내 일을 해야 하고, 경쟁은 점차 치열해 지고 있다고 한다. 공유경제는 더 이상 남는 시간을 활용해 부수입을 얻는 방식이 아니라 비정규직의 다른 형태라는 걸 보여준다. 결국 ‘우버’라고 하는 기업이 서비스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Enough is enough!” 올해 말 미국 대선후보가 될지 모를 미국 상원의원 샌더스가 지난 5월 26일 대중집회에서 발언한 말 중 하나다. “그 정도면 됐어!”로 해석할 수 있는데(7월 29일자 ≪한겨레신문≫은 ‘더 이상은 안 된다’로 해석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니 이제 그만 하지?’라는 부정의 뜻을 담고 있다. 무엇에 대한 부정일까?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부정이다. 물론 사민주의자로 알려진 샌더스의 한계는 명백하다. 하지만 언론은 샌더스 돌풍이라 하며 그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 유권자들도 그의 등장을 환호하며 반기고 있다고 한다. 불평등한 현실이 센더스를 주목하게 만들었겠지만, 개신교와 중산층에 기반을 둔 미국조차도 이제 자본주의를 수술대에 올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있음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자본가들에게, 있는 자들에게, 기득권자들에게 “이 정도면 됐어!”라는 말이 가당찮기나 할까? 저들은 언제나 노동자-민중의 고혈에 목말라 있다. 8월 3일자 국내 언론은, 한국 노동자 7명 중 1명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20년 전 내가 받은 마지막 임금은 2016년 최저임금인 시급 6,030원으로 하루 8시간씩 30일을 꼬박 근무한 것보다도 많았다. 그런데 올해 내가 일해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은, 어느 직종이든지 간에 대략 120만원 정도였다. 20년 전에 내가 선의의 자본가로부터 남들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았었다 치더라도, 그리고 지금 내 위치가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하더라도, 20년 동안의 물가상승을 고려한다면, 그동안 노동력의 댓가는 지속적으로 하향추세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뿐인가. 지금 노동시장은 정규직-비정규직 구분 없이 해고의 칼자루 위에 놓여 있다. 해고되고, 임금이 깎이고, 일할 물량이 적으면 강제적으로 무급휴가를 써야 하고, 해고 당하거나 무급휴가 받은 사람의 일까지 해야 한다. 비정규직은 양산되었고, 임금은 오히려 떨어졌으며, 노동강도는 더 높아졌다.

 

이것도 모자라 자본과 박근혜 정권은 더 강도 높은 노동개혁이 필요하다며 임금피크제를 꺼내들고 나섰다. 임금피크제는 2016년에 법제화될 60세 정년보장에 대해 자본이 내놓은 꼼수다. 장년들이 60세까지 일하게 되면 청년들이 상대적으로 일할 기회가 적게 된다며, 장년들 임금을 삭감해서 청년들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니까 자본은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 준 이윤에서 자기 몫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며, 전체 노동임금에서 노동자들이 나눠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임금피크제로 숙련된 노동자는 숙련된 노동자대로, 새로 수혈된 젊은 노동자들은 새로 수혈 받은 대로 저임금으로 싸게 쓰겠다는 말이다. 청년-장년, 숙련-미숙련, 정규직-비정규직 등으로 대결구조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분열, 갈등을 조장하면서 자본가들은 일체의 손실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논리다.

 

이 사회는 노동자들을 더 쉽게 해고하고 더 싸게 쓸 수 있는, 자본가들을 위한 보다 더 좋은 노동시장을 향해 날로날로 진화하고 있다. 이것이 저들이 말하는 노동개혁이고, 노동선진화며, 노동시장유연화다. 이쯤 되니, 차라리 모든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라는 역발상이 필요하다고 한, 채만수 선생의 진담 섞인 농담, 아니 농담 섞인 진담이었을까, 아무튼 이 말이 생각난다. 혹시 그렇게 되면 모든 노동자가 하나로 뭉쳐 자본에 맞서 제대로 한 판 싸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무기력한 봄을 보내는 동안 말 수는 줄고 체력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복잡한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해야 했다. 더 이상 일을 찾으려고 하지 말자,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안 좋은 상황이 생기면 그때 상황에 맞춰 일을 풀어나가자, 조급해 하거나 불안해 하지 말자, 어차피 이 나이에 내가 노동시장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정해져 있고, 사전준비작업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으니… 단지 몸뚱아리 하나 잘 건사하면 그만일 것이다.

 

자본이 제 이름을 앞세우지 못하고 공유경제니 사회적 경제니, 협동조합이니, 산골 자본주의니 하며 추악한 제 모습을 감추려 들고 있다. 그러나 낡은 세계 속의 낡은 이데올로기는 그 안에서 수명을 다할 것이다. 그러니 이 현실을 직시하되 이 세계상에 불안해 하지 않기로 한다. 언젠가는 내 노동이 상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있고 빛나는 것이 되는 그런 날이, 이런 노동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곳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노사과연>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3개의 댓글

  • 맑스의 경제학 철학 초고를 읽다 슐쯔라는 인물을 알고자 검색하였는데 마침 이 글을 읽게 됐습니다. 자본주의의 문제의식을 개인의 삶에 빗대어 설명하니 매우 리했습니다. 아마도 비슷한 처지여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상품사회의 토대를 벗어날 수 없으니 저의 경우 상품소비를 최소화 하자며 스스로와 타협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급자족도 병행하지요. 맑스의 이론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효함을 다시또 느낌니다.

  • 최근 댓글을 따라 들어왔는데… 제가 쓴 졸고에 대한 댓글이었다니! 하하… 반갑고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는 제 글을 다시 한 번 읽었답니다.
    댓글의 행간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사시는 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연구소 홈피 자주 찾아주시고, 또 기회가 되시면 연구소 세미나나 토론회도 이용해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 무엇보다 제목이 친구의 그 대사를 연상하는 제목입니다. 다시 ‘고마해라! 마이 뭇(묵엇)다 아이가!’ 입니다.

연구소 일정

3월

4월 2024

5월
31
1
2
3
4
5
6
4월 일정

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6

일정이 없습니다
7
8
9
10
11
12
13
4월 일정

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0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3

일정이 없습니다
14
15
16
17
18
19
20
4월 일정

1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0

일정이 없습니다
21
22
23
24
25
26
27
4월 일정

2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7

일정이 없습니다
28
29
30
1
2
3
4
4월 일정

2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0

일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