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14)

그로버 퍼(Grover Furr)

번역: 노사과연 부산지회 연구팀

결론

(“제 11장, 흐루쇼프 ‘폭로들’의 결과들”의 두 번째 부분이다: 역자) 위조가 만들어낸 복권(復權)에 관한 이 모든 쟁점들을 설명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지론(至論)이 있다: 뽀스띠쉐프에 대한 복권보고서는 사기이다. 뽀스띠쉐프에 대한 중요한 혐의들 중 실제로 조사되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 어떤 혐의에 대해서도 결백이 입증된 것이 아니었다. 보고서는, 뽀스띠쉐프가 정말로 유죄인가 아니면 무죄인가를 입증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 보고서의 목적은, 뽀스띠쉐프를 처형한 것에 대해, 흐루쇼프가  스딸린을 비난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거짓 보고서의 치부를 감추는 가리개(fig-leaf)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복권보고서들 자체에 기반을 둔 뽀스뻴로프 보고서도 역시 사기이다. 뽀스띠쉐프에 대한 그 보고서의 구절들은 너무나도 모호하고, 스딸린을 더 직접적으로 비난한다. 그 보고서는 분석적인 목적보다는 오히려 반론을 펴기 위해 작성된 것이 분명하다.

꼬사레프

우리는 알렉산드르 꼬사레프에 대한 복권보고서를 가지고 있다.1) 그러나 뽀스뻴로프 보고서에는 그를 다룬 부분이 없다; 뽀스뻴로프와 아리스또프(Aristo-v)2)의 연설 초고에나 흐루쇼프가 추가한 초고 그 어디에도 없다.3) 그러므로 그것은 흐루쇼프 자신에 의해 추가되어졌고, 흐루쇼프가 뽀스뻴로프 보고서와 뽀스뻴로프-아리스또프 초고뿐만이 아니라 복권보고서들 자체를 가지고 작업을 했다는 가장 가능성 있는 증거를 구성한다.

우리는 뽀스띠쉐프의 운명보다는 꼬사레프의 운명에 관하여 훨씬 더 적게 알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러시아 당국이 어떠한 자료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4년 8월 4일 날짜로 된 그에 대한 복권보고서는, 1938년 11월 28일 베리아가 꼬사레프를 체포한 것을 개인적인 원한 때문인 것으로 규정한다. 처음에 꼬사레프는 어떠한 반역행위에 대해서도 자백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12월 5일 허위 자백에 서명할 때까지 매를 맞았는데, 그 자백의 내용은 자신이 쏘련 정부를 전복하려는 우파-뜨로츠끼파 음모의 일원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모든 비난이 베리아에게 쏟아졌다. 꼬사레프는, 베리아가 그루지아 볼세비끼당의 역사를 왜곡했고, 그루지아 고참 볼세비끼들을 억압했다고, 그를 경멸했는데, 그래서 베리아는 꼬사레프를 싫어했다고 한다. 베리아는 비밀경찰의 수장으로서 첫 임무를 꼬사레프와 그의 아내를 체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꼬사레프가 “자백”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 베리아는 그가 허위자백을 할 때까지 매질을 하라고 명령했다.

베리아는, 그의 오른팔 중의 한 사람인 보그단 꼬불로프(Bogdan Kobulov)와 주요 조사자인 레프 쉬바르쯔만(Lev Shvartsman)에게, 공산주의청년동맹에서 꼬사레프의 전(前) 동료였던 발렌띠나 삐끼나(Valentina Pikina)를 매질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러나 삐끼나는 근거도 없이 꼬사레프를 고발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주장이 있다. 꼬사레프는 재판에서 자백을 했는데, 그 이유는 베리아와 꼬불로프가 꼬사레프에게 그렇게 해주기만 하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증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들었다. 그때 베리아는 꼬사레프의 탄원서가 법정으로 전해지는 것을 거부했고, 꼬사레프는 처형되었다.

1953년에, 흐루쇼프는 베리아와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 — 꼬불로프를 포함하여 — 7명을 이미 처형하였다. 복권보고서에서 꼬사레프의 아내와 함께 실질적으로 모든 정보를 제공했던, 조사자 쉬바르쯔만은 흐루쇼프 통치 기간인 1955년에 처형되었다. 그래서 보고서는, 흐루쇼프가 퍼뜨리고 있었던 다른 것들과 유사한 베리아 “괴담(horror story)”에 대해 말한다. 베리아는 어떠한 정치적 동기도 없이, 오로지 복수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다른 문서들로부터 꼬사레프에게 정치적인 혐의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내용 자체가 의심스럽다. 우리는 그 내용들을 아래 (#24)에서 간단하게, 그리고 이 연구의 전체에서 어느 정도는 자세하게 검토하고 있다. 복권보고서는 그 내용들에 관해 심지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고, 더군다나 반박조차 하지 않고 있다.

로고빈(Rogovin)은, 1938년 3월 꼬사레프가 세르게이 우뜨낀(Sergei Utkin)이라는 이름의 전(前) 레닌그라드 공산주의청년동맹 지도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우뜨낀은 비밀경찰이 자신에게 거짓 고발을 하도록 강요했던 것을 불평했다는, 내용을 언급한다. 꼬사레프는 그때 예조프에게 우뜨낀을 고발했고, 우뜨낀은 수용소로 보내져서 16년 동안 그곳에 있었다. 꼬사레프와 예조프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예조프의 조카인 아나똘리 바불린(Anatoly Babulin)에 의해 역시 입증되고 있는데, 그의 진술이 최근에 출판되었다.

고르바초프 시대 출판물에 기초해서 내용을 정리했던 로고빈에 의하면, 꼬사레프는 1938년 11월 19일-22일 사이에 개최되었던 공산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총회 이후 즉시 체포되었다. 그 총회에는 스딸린, 몰로또프, 까가노비치, 안드레예프, 쯔다노프, 말렌꼬프, 쉬끼리아또프(Shikiriatov) 등 당 정치국원 대부분이 참석하여 연설을 했다. 꼬사레프와 다른 사람들은, 공산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의 교관이며, 추바쉬아(Chuvashiia)에서 많은 공산주의청년동맹 인사들을 비난했었던 미샤꼬바(Mishakova)를 면직하고 처벌했다.

공산주의청년동맹의 지도자였다가, 나중에는 그루지아 당의 지도자였던 아까끼 므겔라드제(Akakii Mgeladze)의 회고록이 2001년 출판되었다. 회고록은 1960년대에 집필되었고, 스딸린과 자신과의 만남에 대해 언급한다. 므겔라드제는 1950년 언젠가, 그가 스딸린에게 자신이 크게 숭배했던 꼬사레프에 관해 물어보았다고 회상했다. 므겔라드제는 스딸린에게 자신은 꼬사레프의 혐의들을 믿을 수가 없으며, (당국의: 역자) 실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스딸린은 그의 말을 조용히 들었고, 스딸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실수를 할 수 있다고 므겔라드제에게 대답했다. 그러나 스딸린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정치국은 꼬사레프 사건을 두 번 논의하였고, 안드레예프와 쯔다노프에게 그의 혐의들을 입증하고 비밀경찰 보고서들을 검토하는 일을 할당했다고 말했다. 므겔라드제는 그 자신이 안드레예프와 쯔다노프의 연설들과 쉬끼리아또프의 보고서들을 포함하여 공산주의청년동맹 총회의 복사본을 읽었고, 그 속에 있는 꼬사레프에 대한 증거가 전적으로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꼬사레프에게 가해진 심각한 정치적 혐의들은 분명히 있다. 그것들 중에는 아마도 예조프와의 연루가 포함되어 있는데, 예조프는 그 자신이 우파-뜨로츠끼파 음모의 수장이었다고 자백을 했다. 공산주의청년동맹 총회의 복사본, 비밀경찰 조사 보고서들 그리고 아마도 다른 많은 증거들 역시 흐루쇼프의 시대에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 자료들은 조사자들에게 결코 공개되지 않고 있다.

1964년 면직되고 난 후 출판된 그의 회고록에서, 흐루쇼프는 꼬사레프, 미샤꼬바와 꼬사레프에 대한 혐의들에 관해 언급한다. 그는 베리아의 “복수”에 관해서는 회고록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4) 그러나 1954년 8월 루덴꼬의 보고서는 이 문제들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모든 것은 복수를 위한 베리아의 욕망의 탓으로 돌려진다!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이 내용은 진실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흐루쇼프가 자신의 연설을 기초했던 복권 보고서이다.

루드쭈따끄

이안 루드쭈따끄(Ian Rudzutak)은 1937년 5월, 뚜까체프스끼(Tukhachevsk-y)와 다른 군사 지도자들과 동시에 체포되었고,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었다.5) 스딸린은 군사 쏘비에뜨 확대회의에서 우파-뜨로츠끼파-뚜까체프스끼 음모에 관한 연설을 했을 때, 그는 그 날짜에 확인된 열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루드쭈따끄의 이름을 말했다.6)

1955년 12월 24일 날짜로 된 복권보고서는 이 내용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7) 루드쭈따끄가 최초 자백에서 “반(反)쏘비에뜨 활동”을 확인했지만, 이 자백 내용이 “모순적이고, 구체적이지 (즉, 상세하지) 않고 설득력이 없고”, 루드쭈따끄가 재판에서 그 내용들은 “상상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며 철회했다고, 우리는 그 보고서에서 듣는다. 군사음모에의 연루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뽀스뻴로프 보고서에서8) 루드쭈따끄에 관하여 상응하는 짧은 부분은 전적으로 이 복권보고서에 기초하고 있는데, “1955년 수행된 꼼꼼한 입증을 통해, 루드쭈따끄 사건은 날조되었고 그가 중상적인 자료들에 기초하여 비난을 받았다고 결정되었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아래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거짓이다. 루드쭈따끄에 대한 복권보고서는 진실을 감추기 위한 덧칠(whitewa-sh)에 불과하다.

많은 피고인들이 루드쭈따끄의 죄를 비난했다. 복권보고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써서 이 내용을 빼버린다:

• 몇몇 사람들[마갈리프(Magalif), 에이케와 다른 사람들]은 자백에서 루드쭈따끄를 호명했지만, 그러나 나중에 그 자백을 철회했다.

자백이 철회되었다는 사실은, 자백의 철회를 원래의 자백보다 더 “진실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 몇몇 사람[알끄스니스(Alksnis), 게르만(German), 그리고 “라트비아 민족주의의 쏘비에뜨와 당의 몇몇 노동자들”]은 루드쭈따끄를 호명했지만, 그들에 대한 조사는 “법을 가장 심각하게 침해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고, 역시 무시되었다.

• 야꼬프 알끄스니스에 관한 복권보고서는9) 3주 후까지 준비되지 않았다. 그 복권보고서에는, 알끄스니스가 자백을 했고, 재판에서 자백이 진실되다고 입증을 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그가 고문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적혀 있다. 그렇지만 이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사자들과 고문자들의 이름 등과 같은 구체적 사항들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

• 몇몇 사람[츄바르(Chubar), 끄노린(Knorin), 가마르니끄(Gamarni-k)와 바우만(Bauman)]은 이미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루드쭈따끄와 반(反)쏘비에뜨 음모를 위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없다.”

• 츄바르 자신에 대한 복권보고서(251-2)에 의하면, 츄바르는 우파-뜨로츠끼파 음모에 가담했다고 자백을 했고, 리꼬프(Rykov)에 의해 호명되었던 안띠뽀프(Antipov)와 같은 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호명되었다. 츄바르는 자신이 독일 첩자임을 역시 자백했다. 츄바르는 역시 재판에서 완전히 자백을 했고, 이 부분은 우리가 이 책에서 문서화하였다.

• 부하린(Bukharin)과 리꼬프는 자백에서, 루드쭈따끄가 “우파”였고 자신들에게 공감했지만,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만 진술했다.

• 끄레스띤스끼(Krestinsky), 로쩬골츠(Rozengol’ts), 그린꼬(Grin’k-o), 뽀스뜨니꼬프(Postnikov), 안띠뽀프, 쭈꼬프(Zhukov)와 다른 사람들의 자백은 “극히 모순적이고 구체성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루드쭈따끄가 유죄라는 것에 대한 증거로서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여기에서 사용된 몇 가지 수사학적인 기술들이 있고, 우리는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

• 자백이 철회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백의 철회가 “진실”이고 자백이 “거짓”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 만일 둘 중 하나가 진실이라면, 우리는 단지 어느 진술이 진실인지를 알지 못한다.

• 우리는 역시 루드쭈따끄가 그의 자백 모두를 철회했는지 아니면 자백의 단지 한 부분을 철회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처럼, 공군 중장 리차고프(Rychagov)와 비밀경찰의 수장 야고다(Iagoda)의 경우에, 피고인들은 정부 전복과 파괴(Sabotage) 음모를 인정했지만, 독일을 위한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들은 강력하게 부인했다.10) 부하린 역시 구체적으로 심각한 어떤 범죄들은 자백했지만 다른 범죄들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 츄바르와 다른 세 사람은 “복권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그들의 유죄 판결이 절차상의 이유 때문에 무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사실상 그렇게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죄”의 입증과 같은 것은 아니다.

• “모순”이라는 이유는 그러한 자백들을 기각하는 근거가 될 수가 없다. 많은 다른 피고인들로부터 나온 자백들은 그것들 사이에서 “모순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것들이 증거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많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일한 자백이 나온다면, 이것이 오히려 대단히 의심스러울 것이다.

1938년 3월 “부하린” 재판의 사본에서, 루드쭈따끄는 그린꼬와 로쩬골츠에 의해 호명되었고, 끄레스띤스끼에 의해 여러 번 호명되었다. 복권보고서는 이 증언을 간단하게 무시해버린다.

최근에 출판된 자백에서, 로쩬골츠는 예조프 자신과 그의 동료이자 친척인 A. M 따마린(A. M Tamarin) 두 사람에 의해 — 예조프의 우파 음모에 있어서 예조프와 연루된 사람으로서 — 호명되었다. 이 사실로 보아, 로쩬골츠가 루드쭈따끄와 다른 사람들의 죄를 고발한 내용은, 믿을 만하다.

루드쭈따끄는 1938년 2월 8일에 있은 루끼모비치(Rukhimovich)의 자백에서도 호명되었다 (Lubianka 2, No. 290). 최근에 출판된 프리노프스끼의 진술이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예조프와 그의 부하들이 자백을 날조했고, 피고인들을 고문하여 강제적으로 거기에 서명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루끼모비치가 — 예조프의 부하 중의 한 사람에게는 아니지만 — 매질을 당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다(Lubianka 2, 656-7). 예조프 부하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자백을 날조했다는 것 때문에 나중에 처벌받았다.11) 그러나 누군가가 매질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의 진술이나 자백이 진실 혹은 거짓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까바꼬프

에이케와 예브도끼모프(Evdokimov)와 함께 36명의 목록에 단지 포함되었던 이반 까바꼬프(Ivan Kabakov)에 대한 복권보고서는 없고, 그의 혐의들을 반박하려는 시도도 없다. 오늘날 우리가 인용할 수 있는 자료들(No.9)과 1956년에 흐루쇼프가 물론 이용할 수 있었던 훨씬 더 많은 자료들을 살펴보면, 까바꼬프를 고발하는 많은 증언들이 있다.

1938년 3월 “부하린” 재판에서, 리꼬프(Rykov)와 쭈바레프(Zubarev) 양 피고인은 음모가로서 까바꼬프를 호명했다. 이 피고인들이 어떠한 종류의 고문이나 위협에 처해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잘 알려진 증언은 뽀스뻴로프 보고서와 흐루쇼프에 의해 간단하게 무시되었다. 미국인 광산 기술자 존 리틀페이지(John Littlepage)는 까바꼬프가 몇몇 종류의 파괴활동에 연루되었음이 틀림없다면서, 그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미국인 학자 존 해리스(J-ohn harris)는 까바꼬프의 재판발언(delo)이나 조사 자료들을 보았고, 그것들로부터 인용을 한다. 해리스의 인용에는 까바꼬프의 자백이 진짜가 아니라는 표현을 언급하는 부분은 없다.

에이케

로베르뜨 I. 에이케(Robert I. Eikhe)는 흐루쇼프가 스딸린에 의해 불공정하게 탄압당했던 사람으로서 호명했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에이케 사건은 다른 사건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에이케 사건을 맨 마지막으로 돌려놓았다.

나의 책에서 그에 관한 부분(No. 16)은 에이케의 체포와 재판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상세히 적고 있다. 다른 피고인들의 경우처럼, 쏘비에뜨 당국과 러시아 당국 모두 조사 자료와 재판 정보를 조사자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이케 자신이 비밀경찰과 협력하였고,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대규모 탄압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러 범죄들 중에서도 특히 이것에 대해서 벌을 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러한 탄압에서 그가 예조프와 함께 아주 가까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조사하는 사람 누구라도 그 두 사람이 음모에 관련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의심할 것이다 — 더 많은 증거 없이 우리가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비밀연설에서 에이케에 대한 부분의 말미에서 흐루쇼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이케 사건이 날조되었다는 것은 지금 분명하게 확립되었다; 그는 사후에 복권되었다.

이 진술은 거짓이다. 흐루쇼프는 1956년 2월 25일에 연설을 했다. 복권 자료들에 의하면, 에이케는 3월 6일까지 복권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탄압당한 다른 어떤 당 관료보다도 에이케 부분에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설 당시까지는: 역자) 에이케에 관한 복권보고서는 없었다. 그는 1956년 3월 2일 한 무더기(en masse)로 복권되도록 추천을 받은 사람들 즉, 36명의 탄압당한 당 관료들 중의 한 명이었다.12) 이 문서는 단지 하나의 목록일 뿐이다; 특별한 개인에 관한 구체적인 어떤 내용도 없다.

흐루쇼프 연설 중에서, 에이케에게 바쳐진 주요 부분이며, 유일하게 실질적인 부분은 1939년 10월 27일 날짜로 된 스딸린에게 보낸 에이케의 편지로부터의 긴 인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부분은 연설에서 가장 감정적인 부분의 하나이다. 에이케는 격렬하게 그의 무죄를 주장하고, 그가 어떻게 고문을 당해서 결코 저지르지 않았던 범죄에 대한 자백에 서명을 했는지를 자세히 말하고, 개인적으로 쓰딸린과 당에 대한 그의 충성을 반복해서 확인한다.

주어지는 인상은 날조된 범죄들로 인하여 죽음에 처해지고 있는 전적으로 헌신적인 공산주의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것은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사람의 증언이다. 전체 글이 마침내 2002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역시 이 내용을 읽을 수 있다; 흐루쇼프는 편지를 읽으면서, 그 편지의 중요한 부분을 누락시켜서 심하게 날조하였다.

뽀스뻴프 보고서에서 발표된 1939년 10월 27일의 에이케가 “스딸린에게 보낸 편지”의 부분은, 흐루쇼프가 연설에서 인용했던 부분과 항상 똑 같지는 않다. 두 문서는 편지 원본이 분명한 것의 전체 글로부터 중요한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나는 “분명한”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출판된 전체 글이 복사본이라고 그것의 편집자들에 의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문서의 끝에 문서의 확인자가 없고, 단지 원본은 “에이케의 조사 문서 자료”에 있다는 기록만이 있다. 그것 역시 문서의 확인자가 없다. 이것은 러시아 정부가, 연구자들이 에이케에 대한 조사 자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정말로 그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심지어, 이 공식적인 문서들의 편찬자와 편집자조차도 원문이나 에이케 문서의 원문 자료를 보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고 있다!13) 우리는 러시아 정부가 왜 그러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뽀스뻴로프 보고서나, 혹은 흐루쇼프의 연설에 포함되지 않은 에이케 편지의 부분들에 대한 연구는 몇 가지 가능한 해답들을 암시한다.14)

에이케 편지의 전문에 대한 번역은 이 장에 첨가되어 있다. 어떤 부분들이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인용되었는지를, 어떤 부분들이 뽀스뻴로프 보고서에 있는지를, 어떤 부분들은 그것들 둘 다에서 인용되었는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주석이 달려 있다. 가장 중요한 우리의 목적은 비밀연설과 뽀스뻴로프 보고서 둘 다에서 누락되었던 부분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편지 전문을 공개한다는 것은, 흐루쇼프의 목적에는 유용하지 않았을 것임은 당장 분명하다.

• 에이케는 그가 “정치위원 L.P. 베리아”에게 썼던 편지에 관해 언급한다 — 1938년 4월 29일 발생했던 그의 체포 후 오랜 시간이 지나 그가 그 편지를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리아는 예조프를 대체하여 1938년 11월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치위원이 되었다.

• 자백했던 반역 행위의 모든 이야기들을 에이케 자신이 꾸며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에 대해 “정치위원 꼬불로프”가 에이케에게 동의했다고, 에이케는 말한다. 꼬불로프는 베리아와 가까웠다는 것 때문에, 1953년 12월 재판에 의해 처형당했던 7명의 비밀경찰 요원 중의 한 명이었다. 이 구절은 꼬불로프와 결과적으로 베리아를 책임져야 할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그 내용이 공식적인 것으로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 에이케의 편지는, 상당히 많은 당 고위 관료들이 음모에 대해 자신을 비난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는 이 모든 비난들을 “도발”이라고 부르고 이 비난들에 대하여 다양한 설명을 한다. 이것은 당연히 그의 체포가 정당화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 많은 다른 음모가들에 의해 공모자로서 호명된 사람은 유죄일 가능성이 있다. 에이케가 진실을 말하고 있었는지 아니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조사 자료들 전체를 검증해야 한다는 결론을, 누구라도 내릴 것이다. 그러한 검증작업은,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았던 사람은 바로 흐루쇼프라는 것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 에이케는 그를 고문(폭행)했다고, 두 사람의 비밀경찰 조사자들을 비난한다: 우샤꼬프(Ushakov)와 니꼴라예프 쭈리드(Nikolaev Zhuri-d). 우리는 이 두 사람의 활동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들은 예조프의 명령하에 활동했고, 자백을 날조하고, 체포당한 사람을 고문했다는 것 때문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처형되었다. 우샤꼬프와 니꼴라예프 두 사람은 예조프와 너무나도 밀접하게 연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실상 동시에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15)

• 죄수들을 고문하고 자백을 날조했던 비밀경찰 요원들의 체포와 조사는 베리아에 의해 수행되었다. 흐루쇼프는 1953년 베리아에 대한 사법적인 살인에서 주도적인 인물이었고, 그가 베리아를 비난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베리아를 비난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연설에서 흐루쇼프는 에이케의 곤경에 대하여 — 그리고 베리아가 하지 않았던 많은 일들에 대해서도 — 베리아를 비난하고자 했기 때문에, 에이케의 편지 전문을 공개하는 것은 흐루쇼프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 마찬가지로, 에이케의 편지는 적절한 조사 절차 즉, 적절한 사법적인 절차가 그 당시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그는 그 당시 비밀경찰의 수장(내무부 인민정치위원)이었던 베리아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 베리아의 측근 중 한 사람이었던 비밀경찰 조사관 꼬불로프는, 에이케가 자신이 무죄라고 고백하는 것에, 어느 정도는 동의를 했고, 최소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 아닌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에이케는 스딸린에게 이 편지를 쓰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이 편지가 수취인에게 배달되었다는 것을 흐루쇼프는 암시한다.

• 이 모든 것은 스딸린 뿐만 아니라 베리아가 진지한 조사를 수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옳은 일들과 잘못된 일들을 가려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암시한다. 이것은 적어도 흐루쇼프의 청중들이 스딸린에게 기대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흐루쇼프의 연설의 전체적 목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흐루쇼프의 연설의 목적은 스딸린과 베리아가 책임감 있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 에이케는 음모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고, 음모들이나 그 자신에 대한 거짓 고발들에 관련되었던 사람들로서 많은 유명한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거명한다. 흐루쇼프 연설이 전반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은, 모든 음모들에 대해 (실체를 부정하기 위해: 역자) 의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 에이케는 예브도끼모프와 프리노프스끼 두 사람 모두가, 음모 활동에서 예조프와 관련된 사람으로서 자신을 연루시켰다고 진술한다.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을 폭행했다는 것 때문에, 에이케는 예조프와 우샤꼬프를 비난한다. 프리노프스끼는 에이케가 예조프와 음모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말했지만, 에이케는 그것을 부정했다.

• 에이케는, 예조프 자신의 음모라는 쟁점을 부각시키면서, 예조프를 “체포되고 노출된 반혁명주의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예조프와 프리노프스끼 두 사람 각자에 의한 하나씩의 진술 자백이 출판되어진 때(2006년 2월)인 아주 최근에야 비로소 공개된 사실이다.

에이케가 예조프의 사람들에게 구타를 당해 자백을 했다는 것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프리노프스끼와 예조프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했던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 사실이, 에이케의 경우에 있어서 그가 무죄라는 것을 반드시 암시하지는 않는다. 프리노프스끼는, 베리아가 (허위로 고발되어 피해를 본: 역자) 사람들을 심문했을 때 피해자들이 자신(프리노프스끼와 예조프를: 역자)들을 “지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과 예조프가 사람들에 대한 사건을 날조했고, 또 그들을 처형시켰다는 것을 인정한다.

에이케의 편지 전체를 재생하는 것 — 에이케에 대한 조사 자료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 은 사건을 상당히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에이케의 편지는 예조프의 음모라는 쟁점을 부각시켰을 것인데, 이는 모든 문제에 대해 스딸린을 비난하려 했던 흐루쇼프의 목표를 방해했을 것이다. 이는 많은 다른 고위 당원들의 이름들이 거명되게 만들 것이고, 진짜 자백이 거짓 자백과 분리되어질 수 있기 전에, 이 모든 사건들이 조사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드러냈을 것이다.

• 프리노프스끼와 예조프는 자신들의 가까운 공모자로서 예브도끼모프를 거명했는데, 그 편지는 그를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예브도끼모프의 이름은 에이케와 함께 1956년 3월 2일의 같은 “복권” 목록에 올라 있다!

• 에이케는 역시 중앙위원회 회원인 쁘람네끄(Pramnek), 빠꼬모프(Pakhomov), 메즐라우끄(Mezhlauk), 꼬시오르(Kosior)를 거명한다. 그는 쁘람네끄와 빠꼬모프가 거짓으로 자신을 연루시켰다고 말한다.

스딸린에게 보낸 에이케의 편지에서 주장되는 유죄에 대한 부인을, 유죄의 인정보다도 그 자체로 더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고에 의한 것이라며, 죄를 벗겨주는 유일한 정보는, 에이케의 편지로부터의 발췌에서 주의 깊게 선택되어서, 흐루쇼프나 뽀스뻴로프 보고서 각각에 의해 인용되었다.

이 편지 전체가, 대규모 탄압에서의 에이케의 역할에 관한 다른 정보와 함께 나란히 제출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은 피할 수가 없다: 흐루쇼프나 뽀스뻴로프는 에이케의 유죄를 암시하는 경향이 있는 어떠한 증거도 감추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에이케 사건에 대한 어떠한 진지한 조사도 미연에 방지하였고, 또한 그것이 확대되어 예조프의 음모를 조사하게 되는 것도 미연에 방지하였다.

에이케는, 스딸린이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정치국의 특별 자료를 활용하는 것이” 허락된다는 것을 말했다고 역시 주장했다. 최고급비밀을 담은 내무부 특별자료(osobye papki) 에 정확히 무엇이 있었는지는 1956년 중앙위원회 회원들에게는 아마도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그러한 허락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질문했었을 것이다!

그것은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 여러 사람들의 사건들에 관한 조사 자료를 검토할 권리를 흐루쇼프가 거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몰로또프와 까가노비치와 같은 정치국 회원들조차도 이 조사 자료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짐작하건데 이것은 흐르쇼프가 그들이 자료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흐루쇼프와 그의 지지자들이 1957년 “반(反)당 그룹”에 대해 저질렀던 거짓 고발에 대해, 어떻게 처벌을 피할 수 있었던가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약: 전체적으로 에이케의 편지는 흐루쇼프의 사건에 아주 치명적이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스딸린과 베리아 두 사람 모두의 무죄를 밝혀주는 경향이 있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적어도 중앙위원회 위원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심각한 음모가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경향이 있다. 흐루쇼프가, 그의 지지자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 편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사전에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인용할 수 있었다.

* * * * *

이 세 개의 복권보고서에 대한 조사를 통해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이는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 대한 우리의 조사에 있어 중요하다.

• 보고서들은 “복권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에 상반되는 수많은 증거들을 무시한다.

• 보고서들은 어떠한 증거도 치밀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여러 자백들 사이의 어떠한 모순이라도 있으면, 그것이 모든 증거들을 무시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간주된다.

• 조사자들이 모든 조사 자료들을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우리의 현재 목적을 위해서는 이것이 필수적이지는 않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 복권보고서들은 “복권된” 사람들의 무죄를 확립시켜주지 않는다.

• 이 보고서들은 진실을 규명하려고 시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고하다”고 선언하기 위한 문서적인 기초를 제공하려고 한 것이다.

• 우리는 흐루쇼프와 뽀스뻴로프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루덴꼬가 그들에게 보고했던 것도 가지고 있다. 이 자료들의 분석으로부터 나오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결론은, 흐루쇼프가 루덴꼬에게 “과실, 결점 등을 감추기 위해 꾸미는 자료들”(“whitewashes”) — 피고인들을 무죄로 선언하는 문서들과, 그럴듯한 분위기가 나도록 적절히 치장된 문서들 — 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 피고인들에 대한 혐의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정밀하게 대조해보면, 뽀스띠쉐프, 꼬사레프, 루드쭈따끄 복권보고서들은 거짓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론은 — 우리가 현재 증명할 수 있듯이 — 흐루쇼프가 연설의 여러 곳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11장 다음호에 계속) <노사과연>


1) RKEB 1, 166-167

2) “Proekt doklada ‘O kul’te lichnosti I ego postledstviiakh’, predstavlenniy P.N. Pospelovym I A.B. Aristovym. 18 fevralia 1956 g.” Doklad N.S. Khrushcheva O Kul’te Lichnosti Stalina na XX S”ezde KPSS. Dokumenty. Ed K. Aimermakher et al. Moscow: ROSSPEN, 2002, pp. 120-133; also in RKEB 1, 353-364.

3) “Dopolneniia N.S. Khrushcheva k proektu doklada ‘O kul’te lichnosti i ego posledstviiakh”‘. Doklada Khrushcheva, pp. 134-150; also in EKEB 1, 365-379.

4) Khrushchev, N.S. Vremia, Liudy, Vlast’(Time, People, Power). Moscow: M-oskovskie Novosti’, 1999. I, Ch. 11, p. 119. Available at http://kursk1943.mil.ru/kursk/arch/books/memo/hruschev_ns/11.himl

5) 루드쭈따끄와 뚜까체프스끼는 1937년 5월 24일 반쏘비에뜨 우파-뜨로츠끼 음모와 독일을 위한 간첩활동 참여의 죄목으로 그들을 고발했던 같은 정치국 결의에서 거명되었고, 1937년 5월 25-26일 중앙위원회 총회에 의해 제명되었다(Lubianka 2, Nos. 86&87, p. 190).

6) 스딸린의 연설은 Istochnik No.3, 1994; Lubianka 2, No. 92. pp. 202-209에 있고, e.g. http://grachev62.narod.ru/stalin/t14/t14_48.htm에서 널리 복사된다.

7) RKEB 1, 294-5.

8) RKEB 1, 328-329.

9) RKEB 1, 300-1, January 14, 1956.

10) 리차고프를 보려면 RKEB 1, 165를 보라. 야고다를 보려면 1938년 3월에 있은 “부하린”의 모스끄바 재판에서의 그의 최후 진술을 보라; English text at The gr-eat purge trial. Edited, and with notes, by Robert C. Tucker and Stephen F. C-ohen. With an introd. by Robert C. Tucker. New York: Grosset & Dunlap, 1965, p. 675. Russian text at http://magister.msk.ru/library/trotsky/trotlsud.htm

11) 목격자의 설명은, 나중에 베리아의 동료가 되었고 1953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처형당했던 메시끄(Meshik)에게, 루끼모비치가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루드쭈따끄에 대한 복권보고서는 루드쭈따끄 자백 중의 하나를 날조한 사람으로서 야르체프(Iartsev)를 거명하고 야르체프가 그 날조 때문에 나중에 처형되었다고 적는다(p. 295). 야르체프는 1939년 6월 체포되었고 베리아의 지휘하에 예조프와 예조프 휘하의 많은 비밀경찰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것은 메시끄에 대한 고발과 따라서 베리아에 대한 고발이 조작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See Nikita Petrov and K.V. Skorkin, Kto rukovodil NKVD 1934-1941. Spravochnik (Moscow, 1999). At http://www.memo.ru/history/nkvd/kto/biogr/gb572.htm

12) Reabilitatsia. Kak Eto Bylo. Fevral’ 1956 – Nachalo 80-kh godov. Ed. Artisov et al. Moscow Materik, 2003, pp. 16-18. Hereafter RKEB 2. 그들을 복권하는 최고간부회 결의안을 보려면 pp. 18-19를 보라.

13) “Pis’mo R.I. Eikhe I.V. Stalinu” [Letter of R.I. Eikhe to J.V. Stalin], Doklad Khrushcheva 225-229.

14)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이 문서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인 척 하지는 않는다.

15) Petrov and Skorkin, op.cit,

http://www.memo.ru/history/nkvd/kto/biogr/gb355.htm. 니꼴라예프(Nikolaev)와 우샤꼬프 (Ushakov) 두 사람은 1940년 1월 16일 같은 “목록”에 예조프와 함께 올라있다; see “Stalinskie rasstrel’nye spiski” [=”Stalin Shooting Lists”] http://stalin.memo.ru/spiski/pg12117.htm and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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