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시] 삼팔선의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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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눈보라가 친다 삼팔선의 밤에

정작 어디메서 불어오는 줄도 모르는 바람은

내 외투 깃을 여미게 하고 자꾸만 눈은 내려

군화를 덮고 무릎까지 허리까지 덮고 나는

눈에 파묻혀 철모를 쓰고 총을 멘 허수아비가 되어

보초를 서고 있다 삼팔선의 밤에

 

누구의 밤을 지키고 있는가 이 밤에 나는

내가 지키고 있다는 세상의 재산이란 무엇이며 누구의 것인가

내가 지키고 있다는 생명이란 게 또한 누구의 생명인가

나는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그 무섭던 밤을

토지의 무상분배 쪽에 왼손을 들었다고 해서

지주가 불러들인 경찰의 습격을 받았던 아버지의 밤을

 

그날밤 어머니는 흰옷의 아버지를 어둠속으로 넣었고

아버지는 어둠속에서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누이의 등에 업힌 나를 황소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였다

 

내가 훨씬 커서 부잣집 담살이로 들어갔을 무렵

나는 귓가로 들었다 마을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그 사람 아직도 오포산에 숨어 있을 거여

아녀 반란군은 국방군한테 죄다 소탕됐단 거여

누가 알아 태백산 줄기 타고 이북으로 내뺐는지

 

뭐라 하실까 만약 어딘가에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미제 군화를 신고 눈 속에 묻혀 미제 철모를 쓰고

북산(北山) 가슴에 미제 총을 겨누고 있는 나를 두고

뭐라 하실까 나라 국경 지키는 용사라 하실까

 

눈보라가 친다 삼팔선의 밤에

정작 어디메서 불어오는 줄도 모르는 바람은

내 외투 깃을 여미게 하고 자꾸만 눈은 내려

군화를 덮고 무릎까지 허리까지 덮고 나는

눈에 파묻혀 철모를 쓰고 총을 멘 허수아비가 되어

보초를 서고 있다 삼팔선의 밤에

 

 

* 김남주, ≪김남주 시 전집≫, 염무웅ㆍ임홍배 편, 창비, 2014, pp. 357-358.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6월 8th, 2019 | By | Category: 제152호(2019년 6월), 권두시 | 조회수: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