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배후(10)

로저 키란(Roger Keeran)ㆍ토마스 케니(Thomas Kenny)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차례]

서문

1. 서론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3. 제2경제

4. 약속과 불길한 예감, 1985-86

5. 전환점, 1987-88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6. 위기와 붕괴

7. 결론과 암시

8.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

 

 

 

5. 전환점, 1987-88(2)

 

1987년의 중요한 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CC Plenum)에서, 민주화라는 슬로건 하에 쏘련 공산당은 정치와 경제 권력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지도부는 전원회의를 3번 연기했는데 이는 아마도 지도부에서의 이견이 커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1987년 1월 전원회의에서 고르바쵸프는 지난 2년간의 가면을 벗고 엄청난 아집과 자신감을 표출했다.1) 전원회의에서 고르바쵸프는 지역 단위에서 연방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당서기직에 대한 복수 후보자 선거2)와 비당원의 정부고위직 임명 등이 포함된 정치 개혁을 제안했다. 고르바쵸프는 자신의 개혁을 방해하는 것은 사회주의에서 민주적 기능의 심각한 결함이라고 비난했다.3) 고르바쵸프는 또한 기업과 의회 선거의 비밀투표를 제안했다. 리가쵸프는 이것을 변화의 구심점으로 바라봤다. 이후에 민주화 과정은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사회는 안정성을 잃었으며, 모든 것이 용인된다는 생각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4)라고 리가쵸프는 말했다. 그럼에도 고르바쵸프는 1987년 1월 전원회의에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지 못했고, 차기 당대회도 1990년까지는 예정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특별 당회의를 제안했다. 당초 중앙위원회는 이를 거부했지만 1987년 6월 전원회의에서 1988년 6월에 특별 당회의를 소집하기로 동의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존 던롭(John Dunlop)은 민주화 프로그램을 끄렘린 정치세력의 전통적 고려사항의 결과로 보았다. 즉 고르바쵸프는 정치국 경쟁자들을 고립시키고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몇 주가 지나지 않아, 고르바쵸프는 당직의 경쟁 선거와 관련하여 중요한 연설을 했다. 브루킹스(Brookings) 연구소의 제리 휴(Jerry Hough)는 그 전원회의가 당 지배에서 국가 지배로의 전환점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고르바쵸프)는 이미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당 조직에서 대통령의 지위로 바꾸기로 결정했다.5)

 

사실, 1987년 1월의 정치적 변화는 개인적인 권력에 대한 치졸한 투쟁이나 단순히 새로운 통치형태를 예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고르바쵸프가 이 국면을 정의한 것과 같이 민주화는 당 체계에 있어 맑스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의 개념 전환과 같다. 고르바쵸프는 당의 지도적인 역할에 대한 레닌의 교리와 당 조직의 원리로서의 민주집중제를 거부했다. 고르바쵸프의 동조자인 코츠(Kotz)와 위어(Wei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사회민주주의자들처럼 고르바쵸프와 그의 써클은 민주주의를 목적 그 자체로 보았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그 중요성에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전통적인 목표와 거의 동등한 목표로 보는 것이 분명했다.6)

 

공산당을 파괴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움직임을 좀처럼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에 쏘련 공산당에 대한 파괴는 미묘하고 은밀한 공격의 형태를 띠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쏘련 인민들은 새로운 정책이 표면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오래 지속되고 널리 인식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여겼다. 1985-1987년 쏘련 공산당 지도부의 건설적인 개혁안은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고, 군비 경쟁을 완화하며, 당 규율을 강화하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1987년의 민주화 추진이 분명히 이러한 목표와 충돌하지 않았다. 지지자들은 민주화가 당 개혁을 촉진하고 보장하며, 뻬레쓰트로이까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들고, 당과 국가의 기능을 분리시킬 것이라 주장했다. 더욱이, 고르바쵸프는 이제 쏘련 공산당의 역할에 재갈을 물리고,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제 기능을 제거하여 무력화시키고, 점검과 통제는 포기하고, 결정된 사항을 실행하는 총서기의 책무는 없애자. 중앙당의 지역당에 대한 지도도 폐지하자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적은 결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일어난 일들이다. 좀 더 급진적인 개혁과 참으로 혁명적인 뻬레쓰트로이까와 같은 좌익적 언사들은 친자본주의적 실제 목표를 가렸다. 게다가 쏘련 공산당 총서기가 자기 당의 폐지를 주창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즉 쏘비에트 언론은 당혹스럽고 뒤바뀐 용어를 사용했다. 당과 사회주의를 보존하려는 진짜 공산주의자들을 보수주의자들이라고 불렀고, 자본주의의 부활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을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는 서구 자본주의 언론이 고의로 퍼트린 용어들이다.

 

전쟁에서 군대가 하나의 근거지를 버리고 후퇴하면, 다른 근거지는 방어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한 전장에서의 후퇴는 종종 다른 전장의 후퇴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고르바쵸프가 언론을 이용해 정치국의 정적을 약화시키자 집단 지도체제는 손상을 입었고 쏘련 공산당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분열로 경제와 국가 문제에 대한 단호하고 통일된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이와 비슷하게 거친 반쓰딸린 캠페인과 부하린 및 그의 경제 사상에 대한 복권은 당 역사의 진실을 찾는 데 있어서 불균형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이 캠페인으로 반수정주의자들을 성공적으로 수세적 위치에 몰아넣고, 경제에 대한 쏘련 공산당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정책상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1988년 3월과 4월에 당 지도부 내부의 심각한 대립이 발생했다. 참가자와 시사평론가 모두 발생한 일과 그 의미에 대해 매우 다른 설명을 했다. 이런 설명의 차이로 인해 사건을 정확하고 일관되게 서술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윤곽과 의미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시사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모두 동의한다. 첫째, 고르바쵸프가 아주 광범위한 정치적 개혁에 대한 승인을 위해 추진한 6월의 특별 당회의 방식은 최고 지도부 내부에 의심할 바 없는 긴장과 위기를 촉발시켰다. 둘째, 이 사건은 1988년 3월 13일에 시작되었는데, 레닌그라드 쏘비에트 기술 연구소의 화학 교사인 니나 안드레예바(Nina Andreyeva)가 ≪쏘볘트쓰까야 라씨야(Sovietskaya Rossiya)≫에 쓴 나는 나의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7)라는 제목의 편지가 실리면서이다. 이 편지는 글라쓰노쓰찌의 일부 사상적 귀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셋째, 안드레예바 위기가 한 달 후에 끝났을 때, 고르바쵸프는 이미 정치국에서 좌익 진영 반대파들을 궤멸시키고 그들의 신임을 떨어뜨렸다. 이런 이유로, 니나 안드레예바 위기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뻬레쓰트로이까는 안드로포프의 영향을 받은 전통적인 쏘비에트 사회주의 환경에서의 개혁 추구로부터 사회주의의 주요 핵심―공산당, 사회화된 재산, 중앙 계획―에 대한 공개적 공격으로 변질되었다.

 

고르바쵸프와 그의 옹호자 그리고 많은 서구 평론가들은 1988년 3월과 4월의 사건에 대해 편향된 해석을 보였다. 그들은 안드레예바의 편지를 신쓰딸린주의, 반유대주의, 러시아 민족주의, 반뻬레쓰트로이까 선언문이라고 묘사했고, 이 편지의 출판으로 뻬레쓰트로이까를 망치고자 리가쵸프가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하거나 암시했다.8)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일련의 사건이 쿠데타의 축소판이라고 말했다.9)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소문, 떠도는 이야기이고 사건을 왜곡하는 것일 뿐이다. 고르바쵸프와 야꼬블레프는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그럴싸하게 꾸며 이 편지와 편지에 대한 리가쵸프의 지지를 호기로 이용했다. 다가오는 당 회의 이전에 이 사건을 리가쵸프를 공격하는 구실로 삼아 자신의 반대파들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다.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다.

 

신쓰딸린주의적 국가주의 관점에서 볼 때, 안드레예바의 편지는 뻬레쓰트로이까에 대한 광신적 반유대주의, 정면 공격과는 거리가 멀었다.10) 미국 저널리스트들이 도발적인11)이라고 한 편지의 표제는 실제로는 고르바쵸프의 연설에서 따온 것이다. 사실, 그 편지는 고르바쵸프의 맑스-레닌주의 원칙의 중요성에 대한 인용문으로 끝났고, 고르바쵸프의 경제ㆍ정치ㆍ외교 정책에 대한 논의를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비판을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한정했다. 편지는 그녀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일부 글라쓰노쓰찌 작가가 보인 이념적 혼란편향성에 대해 경고했다. 안드레예바는 극작가 샤트로프(M. Shatrov)와 소설가 르이바꼬프(A. Rybakov)의 역사 평가, 특히 쓰딸린에 대한 역사왜곡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녀는 또한 두 개의 반사회주의 경향, 즉 신자유주의 또는 좌익 자유주의신슬라브주의 또는 러시아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그중에서도 전자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계급 당파성이 결여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집단주의보다 개인주의를 선호하며, 문화분야에 있어 모더니즘적 탐색, 신의 추구, 기술 관료에 대한 우상화, 현대 자본주의의 민주적 매력에 대한 설교와 그 결과물에 대한 비굴한 아첨 등의 이유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했다. 신슬라브주의에 대해서는 농민에 대한 끔찍한 억압과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역할을 무시하고, 혁명 이전 러시아와 농민층을 낭만화한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12)

 

주변의 소용돌이치는 논쟁과는 달리, 편지에는 절제와 균형, 합리성이 스며 있었다. 안드레예바가 단순히 신쓰딸린주의를 퍼뜨렸다거나 언론인 로버트 카이저(Robert Kaiser)의 말대로 맹렬히 쓰딸린을 옹호하였다13)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안드레예바는 그녀가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억압에 대한 모든 쏘비에트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를 공유한다고 말했다. 그녀 자신의 가족 또한 고통받았다고 덧붙였다. 더욱이, 그녀는 개인숭배에 대한 당의 1956년 결정과 고르바쵸프의 10월 혁명 70주년 연설이 오늘날까지 과학적 지침으로 남아 있다14)고 말했다. 반유대주의 혐의는 국적 없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세계인(cosmopolitan)이란 단어에서 숨은 의도를 상상해 낸 미국의 저널리스트로부터 나왔다.15)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국가와 사회주의에 등을 돌리고 서방으로 간 거부자들(refuseniks)을 포함하여, 서방을 우상화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것이다.16) 정치국의 공식 반박마저 안드레예바에게 반유대주의 혐의를 씌우는 데 실패했다. 이 편지가 러시아 민족주의를 대표한다는 것은 부패, 생태적 병폐, 알코올 중독과 같은 문제에 민족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져 왔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민족주의자들이 러시아 역사를 낭만적이고 왜곡된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는 혹평했다.

 

그 편지가 리가쵸프 진영에서 만든 반뻬레쓰트로이까 선언이라는 생각은 어떠한 근거도 없다. 안드레예바와 리가쵸프는 이에 대해 부인했다. 역사학자 조셉 깁스(Joseph Gibbs)는 ≪쏘볘트쓰까야 라씨야≫와의 인터뷰에서 리가쵸프가 편지 출판에 참여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17) 역사학자 스티븐 코헨(Stephen F. Cohen)은 리가쵸프는 천성적으로 음모가는 못 되고 안드레예바의 편지에 리가쵸프가 개입했다는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18) 고르바쵸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편지가 음로로 의심되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비교적 작은 조직에서만 알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었다19)는 근거 없고 액면 그대로 의심쩍은 주장을 했다. 게다가, 그 편지의 온건함, 엉뚱함, 부정확함 등을 봤을 때, 편지가 최고 수준에서 만들어진 선언문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예를 들어, 편지는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의 발언을 윈스턴 처칠의 것으로 잘못 인용했다.20) 게다가, 소위 반뻬레쓰트로이까 선언문으로 알려진 이 편지는, 기묘하게도 글라쓰노쓰찌도 뻬레쓰트로이까도 철회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드레예바는 진행 중인 논쟁에 대해서 중요하고 핵심적인 문제노동자와 당의 지도적 역할21)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데도 고르바쵸프와 야꼬블레프는 개혁 전체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편지를 변질시키는 캠페인에 착수했다. 편지가 출판된 다음 날, 리가쵸프는 대중언론의 몇몇 수장들과 회의를 가졌다. 음모론의 한 주창자는 이것이 리가쵸프가 편지의 재발행을 명령한 일정에 없던 모임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리가쵸프는 그 회의는 편지의 발행 일주일 전에 계획되었고, 회의에서 많은 문제를 다루었으며, 언론이 역사를 다루는 문제를 토론하는 중에 이 편지에 대해 우호적으로 언급했지만 재발행을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22) 고르바쵸프도 사흘간의 공식방문을 위해 유고슬라비아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편지를 보고 처음에는 수석참모에게 좋은데라고 말했다.23)

 

모쓰끄바로 돌아온 후에, 야꼬블레프를 만나고 리가쵸프와 다른 정치국의 성원들이 그 편지를 지지하고 편지가 지방 언론에 다시 게재되고 레닌그라드에서는 회람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고르바쵸프의 태도는 바뀌었다. 그는 이 편지의 출처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고, 이 편지를 문제 삼아 정치국 내부의 반대파에 대한 선제공격의 구실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고르바쵸프는 최고 수준에서 반격해야 한다는 야꼬블레프의 생각에 동의했다.24) 곧 고르바쵸프는 대중언론의 대표들을 만났고 ≪쏘볘트쓰까야 라씨야≫를 맹렬히 비난했다.25) 그런 다음 리가쵸프에 따르면, 안드레예바 선언문뻬레쓰트로이까의 적들에 의해 날조된 음모이고 고르바쵸프가 국외에 나가 있을 동안에 발행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26)

 

3월과 4월에, 정치국은 적어도 세 번 안드레예바 편지를 다뤘다. 그중 한 번은 특별한 회의였다. 이틀 동안, 하루에 6, 7시간 정치국은 니나 안드레예바 편지 문제만을 다뤘다. 정치국이 이틀은 고사하고 신문기사에 이렇게 전념했던 적은 없었다. 리가쵸프는 회의 분위기가 민주적이고 자유롭고 가벼웠던 일반적인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야꼬블레프가 매우 긴장되고, 초조하고, 심지어 억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는 안드레예바의 편지를 반뻬레쓰트로이까 세력의 선언문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리가쵸프에 따르면, 야꼬블레프는 그 상황에서 주인처럼 행동했고, 메드베제프는 야꼬블레프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들은 전체 정치국원에게 안드레예바의 편지가 평범한 글이 아니며, 쓰딸린주의로의 회귀이자, 뻬레쓰트로이까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는 자신들의 의견을 강요하려 했다.

 

비록 야꼬블레프가 리가쵸프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야꼬블레프는 누군가 편지 뒤에 있고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누군가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라고 리가쵸프는 말했다. 리가쵸프에 따르면, 그 회의는 최악의 쓰딸린 시대를 연상시키는 마녀사냥으로 변했다. 고르바쵸프는 명백하게 야꼬블레프의 편이었다. 리가쵸프에 따르면, 그 편지를 지지했던 정치국 구성원들은 그들의 견해를 바꾸도록 강요받았다. 더욱이, 고르바쵸프는 자신의 관점에서, 니나 안드레예바를 충분히 비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문자 그대로 쳐부수었다.27)

 

마녀사냥은 몇 주 동안 계속되었다. 한번은 중앙위원회가 음모의 증거를 찾기 위해 ≪쏘볘트쓰까야 라씨야≫ 사무실을 급습했다.28) 3월 30일쯤 리가쵸프가 3일간 지방을 순방하는 동안 고르바쵸프는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충성도 실험으로 편지를 비난하게 하고,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당신들 모두가 소신을 밝히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다. 고르바쵸프는 분명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참석자 모두가 그 기사와 ≪쏘볘트쓰까야 라씨야≫를 비난했다. 정치국은 ≪쏘볘트쓰까야 라씨야≫ 편집장인 발렌찐 치낀(Valentin Chikin)을 비난하고 리가쵸프에 대해서는 경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마침내, 정치국은 야꼬블레프가 안드레예바의 편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박하는 초안을 작성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29) 이렇게 해서 고르바쵸프는 반대파를 수세에 몰아넣었고 무엇보다도 리가쵸프를 고립시키고 신뢰를 잃게 했다.

 

4월 5일에 ≪쁘라브다(Pravda)≫는 정치국의 반박 글을 실었다. 여러 가지 중에서도, 그 반박문은 처음으로, 독자들은 매우 응축된 표현 형식으로 쓰여진 … 갱신에 대한 기본적인 편협한 생각,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독단적인 완고한 입장의 야만적 해석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박문은 편지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이 쓰딸린을 방어함으로써 권력을 독단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옹호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다음 날, ≪쏘볘트쓰까야 라씨야≫는 반론 글을 싣도록 강요받았고, 4월 15일에는 편지에 대한 옹호를 취소하는 자기비판의 글을 실었다. 신문은 안드레예바의 편지를 공격하는 독자투고를 싣기 시작했다.30) 4월 8일, 따쉬껜트(Tashkent)에서 고르바쵸프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사회주의의 운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선언했고, 리가쵸프가 아닌 누군가가 이데올로기 통제를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31) 15, 16일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쵸프는 안드레예바 편지에 대한 조사로 (문제는) 여기 내부에서부터 발생했다32)는 것이 증명됐다고 말했다. 야꼬블레프는 그 편지를 공격하는 긴 연설을 했고 그것은 반뻬레쓰트로이까 선언문이다라고 끝맺었다.33) 같은 회의에서, 르이쥐꼬프(Ryzhkov)는 자기 권한 밖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고 리가쵸프를 공격했다.34) 로버트 카이저에 따르면, 회의의 말미에 리가쵸프는 고립되었다.35) 회의에서 리가쵸프는 직무 중 몇몇을 박탈당했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책무를 야꼬블레프에게 넘겨야 했다.

 

결국 고르바쵸프와 야꼬블레프는 뻬레쓰트로이까에 비판적인 듯 보이는 글 중 하나인 안드레예바의 편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강력한 정치국 반대파 리더인 예고르 리가쵸프를 공격하고 반수정주의 반대파들을 위협하였다. 잇따른 공격으로, 리가쵸프는 측근들과 권위를 잃었고, 이념과 언론 통제를 지도부에서 가장 극단적인 수정주의자인 야꼬블레프에게 넘겨야 했다. ≪쏘볘트쓰까야 라씨야≫와 다른 대중언론들에 대한 거친 통제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다. 역사학자 깁스에 따르면 글라쓰노쓰찌의 유일한 자유는 고르바쵸프가 지시한 대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36) 야꼬블레프는 우리는 루비콘강을 건넜다37)고 그때를 회상하며 친구에게 말했다. 그리고 고르바쵸프도 안드레예바의 편지가 유익한 것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리가쵸프를 처리하고 언론매체를 정화하고서, 반쓰딸린주의의 광풍이 뒤이어 일어났다. 체르냐예프(Chernyaev)는 당시에 니나 안드레예바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녀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38)라고 회상했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1) 존 B. 던롭(John B. Dunlop), ≪러시아의 부상과 쏘비에트 제국의 몰락(The Rise of Russia and the Fall of the Soviet Empir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3, p. 5.

2) 브라운(Brown), p. 166.

3) 앤더스 애슬운드(Anders Aslund), ≪경제 개혁을 위한 고르바쵸프의 투쟁(Gorbachev’s Struggle for Economic Reform)≫,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89, p. 32.

4) 리가쵸프(Ligachev), p. 318.

5) 휴(Hough), p. 154.

6) 데이비드 M. 코츠(David M. Kotz)ㆍ프레드 위어(Fred Weir),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Above)≫, New York: Routledge, 1997, p. 97.

7) 니나 안드레예바(Nina Andreyeva), “나는 나의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 알렉산더 달린(Alexander Dallin)ㆍ가일 라피두스(Gail W. Lapidus) 편집, ≪쏘비에트 체제: 위기에서 붕괴까지(The Soviet System: From Crisis to Collapse)≫, Boulder, San Francisco, Oxford: Westview Press, 1995, pp. 288-296.

8) 이러한 견해의 주도적 주창자들은 다음과 같다.

   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 ≪회고록(Memoirs)≫, pp. 252-254.

   아나똘리 체르냐예프(Anatoly Chernyaev), ≪고르바쵸프와 함께한 6년(My Six Years with Gorbachev)≫,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2000, pp. 153-160.

   로이 메드베제프(Roy Medvedev)ㆍ줄리에또 키에자(Giulietto Chiesa), ≪변화의 시간(Time of Change)≫, New York: Pantheon, 1989, pp. 189-206.

   로버트 카이저(Robert Kaiser), ≪왜 고르바쵸프가 일어났는가(Why Gorbachev Happened)≫, New York et al.: Simon and Schuster, 1991, pp. 204-213.

   이츠하크 브루드니(Yitzhak M. Brudny), 뻬레쓰트로이까에 대한 반대 징조들, 에드 A. 헤웨트(Ed A. Hewett)ㆍ빅토르 H. 윈스톤(Victor H. Winston) 편집, ≪뻬레쓰트로이까와 글라쓰노쓰찌의 이정표(Milestones in Glasnost and Perestroika)≫, Washington, D.C.: Brookings Institute, 1991, pp. 153-189.

   안토니 다고스티노(Anthony DAgostino), ≪고르바쵸프의 혁명(Gorbachevs Revolution)≫,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8, pp. 191-197.

   데이비드 M. 코츠(David M. Kotz)ㆍ프레드 위어(Fred Weir),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Above)≫, London, New York: Routledge, 1997, pp. 67-68.

   조셉 깁스(Joseph Gibbs), ≪고르바쵸프의 글라쓰노쓰찌(Gorbachev’s Glasnost)≫, College Station: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9, pp. 66-73.

9) 메드베제프(Medvedev)ㆍ키에자(Chiesa), p. 190.

10) 브루드니(Brudny), p. 167.

11) 카이저(Kaiser), p. 204.

12) 안드레예바(Andreyeva), 여러 곳에.

13) 카이저(Kaiser), p. 204.

14) 안드레예바(Andreyeva), pp. 290-293.

15) 카이저(Kaiser), p. 204.

16) 안드레예바(Andreyeva), pp. 294-295.

17) 깁스(Gibbs), p. 67.

18) 스티븐 F. 코헨(Stephen F. Cohen), 리가쵸프의 책 “서문”에서, pp. x, xxxii.

19) 고르바쵸프(Gorbachev), p. 252.

 

20) 메드베제프(Medvedev)ㆍ키에자(Chiesa), p. 192.

21) 안드레예바(Andreyeva), p. 296.

22) 리가쵸프(Ligachev), p. 301.

23) 발레리 볼진(Valery  Boldin), ≪세계를 흔든 10년: 수석참모가 본 고르바쵸프 시대(Ten Years That Shook the World: The Gorbachev Era as Witnessed By His Chief of Staff )≫, New York: Basic Books, 1994, p. 168.

24) 깁스(Gibbs), p. 68.

25) 메드베제프(Medvedev)ㆍ키에자(Chiesa), p. 193.

26) 리가쵸프(Ligachev), p. 302.

27) 리가쵸프(Ligachev), pp. 304-308.

28) 리가쵸프(Ligachev), p. 308.

29) 메드베제프(Medvedev)ㆍ키에자(Chiesa), p. 193.

30) 메드베제프(Medvedev)ㆍ키에자(Chiesa), pp. 194-196.

31) 카이저(Kaiser), p. 213.

32) 메드베제프(Medvedev)ㆍ키에자(Chiesa), p. 196.

33) 체르냐예프(Chernyaev), p. 154.

34) 메드베제프(Medvedev)ㆍ키에자(Chiesa), p. 196.

35) 카이저(Kaiser), p. 213.

36) 깁스(Gibbs), p. 71.

37) 메드베제프(Medvedev)ㆍ키에자(Chiesa), p. 196.

38) 체르냐예프(Chernyaev), p.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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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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