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배후(12)

로저 키란(Roger Keeran)ㆍ토마스 케니(Thomas Kenny)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차례]

서문

1. 서론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3. 제2경제

4. 약속과 불길한 예감, 1985-86

5. 전환점, 1987-88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6. 위기와 붕괴

7. 결론과 암시

8.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

 

 

5. 전환점, 1987-88(4)

 

1987년 초에 고르바쵸프는 급진적인 경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급진적인 조치들을 제안하고 이전의 점진적인 노력과 실험들은 포기했다.1) 지도부의 계획과 프로그램만이 급진적인 경제 변화에 박차를 가한 것은 아니었다. 세 개의 다른 힘들이 친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글라쓰노쓰찌 언론, 경제 관리로부터 퇴출되기까지 한 쏘련 공산당의 약화, 그리고 제2 경제의 걷잡을 수 없는 성장 등이다.

 

1987-88년 사이에, 뻬레쓰트로이까는 새로운 경제적 세력들과 변화에 길을 열어 주었다. 표면상으로는, 1987년 7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통과된 국영기업법(Law on the State Enterprise)은 중앙 계획을 부인하지 않았고, 순수한 시장 경제로의 전환도 승인하지 않았다. 국영기업법 지지자들은 이 법으로 경제 계획의 경직성을 덜고, 기업의 자율성과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에는 공장 관리자에 대한 선거를 규정하고 있는데, 선거에 눈이 먼 관리자가 과도한 임금 인상을 신속히 처리하게 하였다. 이것이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는 것을 이해한 후에야 폐지되었다. 엘맨(Ellman)과 꼰또로비치(Kontorovich)에 의하면, 국영기업법은 기존의 계획 경제 법규와 거의 관련이 없었다. 어떤 나라의 법령에서도 누구든지 어떤 일을 할 의무는 없다와 유사한 법규를 찾을 수는 없다.2) 넓은 의미에서 국영기업법은 변화의 방향을 알리는 정치적 구호였다.

 

글라쓰노쓰찌 언론은 신경제정책을 시행하도록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쏘련 지도부를 밀어붙였다. 언론은 공개 정책 토론과 경제 변화에 관한 대중의 정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88년까지 야꼬블레프와 고르바쵸프에게 굽실거리던 글라쓰노쓰찌 언론들은 경제적 실수와 실패가 명백히 고르바쵸프의 정책에 기인한 경우에도 중앙 계획이 아니라 기업의 자율성과 시장화를 강화하기 위한 계기로 만들었다. 공개 토론은 오로지 반사회주의로 흘렀다. 비로소 계획 제도의 완전한 청산을 요구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능해졌다.3)

 

1987년 12월, 언론의 압력은 리가쵸프가 치명적 오류4)라고 부르는 사태를 가져왔다. 산업 생산에서 국가 구매가 급격히 감소하고, 계획 경제에서 계획되지 않은 경제로 미친 듯이 도약한 것이다. 르이쥐꼬프 총리와 리가쵸프의 합리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꼬블레프와 고르바쵸프는 산업 전반에서 고정된 가격으로 쏘비에트 산업 생산물의 국가 구매를 100%에서 50%로 줄이도록 하였다. 국가 구매를 그렇게 줄여 버리면 쏘련 산업의 절반이 단번에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으로 기업 간의 거래인 새로운 도매 시장에서 생산물을 구입하여 판매할 수 있는 자율성을 얻게 된다. 리가쵸프와 르이쥐꼬프는 국가가 산업 생산의 90%를 구매하고 단지 10%만 수요와 공급의 불확실성에 맡기는 신중한 실험 계획을 주장했다. 리가쵸프-르이쥐꼬프 계획은 기업들에게 자율성과 시장 가격의 실험을 완만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고르바쵸프의 계획은 완전히 무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경제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1988년에, 소비 부족이 확산됐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인플레이션이 등장했다.

 

경제 관리에서 당이 배제되자 경제의 뿌리가 흔들렸다.5) 모쓰끄바의 각 부문 정부 기관은 중앙 계획의 강력한 도구였다. 기관들은 모쓰끄바의 대규모 중앙 관청을 통해 기업들을 최고 계획기관들과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연결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업의 실적을 감독하고, 계획 규율을 강화하고, 지역 및 부문 산업별 연계와 균형을 유지했다. 뻬레쓰트로이까는 정부 기관의 권한을 계속해서 축소시켰다. 1986년, 1987년, 그리고 1988년의 이러한 축소가 계획 경제의 주요한 조정 메커니즘을 파괴했다. 해체는 각 기관 직원들을 감축하는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뻬레쓰트로이까는 기업과 기관들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였다. 새로운 지침은 각 기관이 명령을 내리는 것을 금지하고 기업의 자율성6)을 개발시키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정부 기관을 무력화시킨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고, 고르바쵸프와 그의 조언자들이 대중의 신뢰를 잃게 되는 지름길이기도 하였다. 엘맨과 꼰또로비치에 따르면, 고르바쵸프 진영은 반복적으로 잘못되고 성의 없는 결정을 내렸고, 빠르게 그것들을 뒤집어 공공연히 비난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스스로와 그 정책에 대한 신뢰를 잃게 했다.7)

 

계획 경제에 대한 중대한 타격은 19차 당 대표자회(Conference)에서 발생했다. 점진주의를 포기하고 당과 쏘비에트 기구, 그리고 경제 관리의 분리를 강제하는 지시를 발표했다. 이러한 지시는 조직적 차원과 사상적 차원 모두에서 경제로부터 당을 철수하게 한 중요한 지시였다. 19차 당 대표자회 직후 계획 체계에 새로운 타격이 불어닥쳤다. 1988년 가을에 고르바쵸프는 연방 공화국들의 중앙 위원회들(the Central Committees of Union Republics)과 지역(regional) 및 지구(district)의 당 위원회들에서 1,064개의 부서(department)와 465개의 부문(sector)을 폐지했다. 부서를 44% 줄인 것이다. 이론적으로, 경제 관리에서의 당 철수는 모쓰끄바의 단일 중심의 지시를 따르는 국가 경제 지도체계를 훼손시킨 것이다. 경제에서 원심력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고르바쵸프는 또한 제2 경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학자 프레더릭 스타(S. Frederick Starr)는 이러한 결정은 기본적인 변화의 과정을 나타낸다고 주목했다. 사실상 고르바쵸프는 쏘비에트 시민 사회(civil society)에 초기 자본주의 세력을 위한 환영 매트(welcome mat)를 깔았다. 고르바쵸프는 중대한 선택에 직면했다고 스타는 주장했다. 통제를 강화하고 계획을 개선하여 경제를 나아지게 할 수도 있었고,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억압되어 온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지적 접촉과 자율적 행동을 통해 스스로 살아가는 새로운 경제 사회적 세력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그는 첫 번째 길을 거부하고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그는 제2 경제를 끌어들이려고 (그리고 그 수익에서 세금을 매기려) 시도했다. 그의 새로운 법이 사적인 ―명목상 협동조합― 기업들을 허락한 것이다. 그는 쏘련 사회에서 (비공식적) 자발적인 연합체들이 합법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고 추켜세웠다. 스타(Starr)는 고르바쵸프의 천재성은 뻬레쓰트로이까의 요소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로부터 그것들을 끌어낸 것이다고 언명했다.8) 영국의 분석가 앤 화이트(Ann White)는 스타(Starr)의 견해를 확인해 주었다. 비공식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활동들을 의미했다. 다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생겨난 비정치적 문화 단체들이고, 흐루쇼프 해빙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주 언급되는 1988년 2월의 3만 개의 비공식 단체 수는, 압력 단체와 비압력 단체를 모두 포함한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뻬레쓰트로이까 시기에는 압력 단체가 더 중요해졌다.9)

 

이렇게 하여, 1988년에 통과된 협동조합법과 임대법은 쏘련에서 자본주의의 급속한 팽창을 가져왔다. 이러한 법들은 사회주의 부의 형태10)로서의 사회주의 협동조합을 수용한 레닌의 말을 ―전후 관계없이― 교활하게 인용하면서 무늬만 협동조합인 사실상의 사유 재산을 허용한 것이다. 곧 남아 있는 국영 기업들은 민간 소유의 협동조합으로 경제적 관계를 발전시켰는데, 국영보다 규제가 약하고 세금도 적었다. 협동조합의 공공시설 임대는 공공 소유라는 허구가 재산을 사유화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복구와 분리주의의 승리는 별개의 과정이었다. 쏘련은 사회주의인 채로 분열될 수 있었다. 또는 붕괴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복구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는 분리주의와 자본주의 부활은 함께 발생했고 비슷한 계통을 공유했다. 시장주의 및 사유화 경향의 사람들은 러시아인이든 아니든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분명치 않았다. 이러한 경향과 레닌과의 차이는 근본적이며 계통적이고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11) 레닌과 그의 뒤를 이은 사람들은 진보적이면서 반동적인, 민족주의의 양 측면을 보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1917년부터 1991년까지 그들은 민족주의와 투쟁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가능하면 민족주의를 국제주의로 대체하고자, 아니면 적어도 민족주의의 민주주의적이고 진보적인 현상을 강화하고 반동적인 측면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맹목적 시장, 민간 기업, 자유주의 경향으로 많이 기울어진 대부분의 당내 인사들은, 또한 일관되게 민족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민족주의는 농민과 농촌 세대의 쏘비에트 노동자계급 속에 광범위하게 펴져 있었다. 심지어 집단화 이후에도, 토지, 재산 소유, 그리고 고향에 대한 시골 사람들의 태도가 민족주의적 수사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대체로, 오래전에 시골을 떠난 도시 노동자들은 좀 더 계급의식적이었다. 민족주의는 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반면 민족주의는 쏘비에트 농민과 1917년 이전 러시아 역사를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문학적 지식인들에게 기반하고 있었다.

 

고르바쵸프가 속한 당내 경향은 민족주의에 기울어진 커다란 사회계급과 계급 부분에 대부분 기반하고 있었다. 농민 및 농촌과의 사회적 유대감이 있는 노동계급이다. 따라서 고르바쵸프의 공산당은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민족주의와 투쟁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러시아인이든 아니든, 민족주의를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모른 체하고, 과소평가하였다. 반면 쏘련의 민족 불평등에 대한 투쟁의 진전은 과대평가하였다. 이런 성공의 성급한 주장은 모두는 아니지만 쏘련 생활의 관찰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12)

 

고르바쵸프 진영이 민족주의와 민족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사례는 풍부하다. 1987년 혁명 기념일 연설에서 고르바쵸프는 쏘련이 민족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언했다. 뻬레쓰트로이까 시기에 들어서면서 고르바쵸프의 최고 조언자인 야꼬블레프는 1972년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자신의 공격을 스스로 옹호했다. 반역사주의에 대항하여라는 글에서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브레쥐네프와 쑤쓸로프의 포용 정책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 정책은 흐루쇼프의 탈쓰딸린 선동(야꼬블레프가 젊었을 때 지지했고, 나이 들어 고르바쵸프 하에서 부활시킨 선동)이 쏘련의 정통성에 끼친 피해를 제한하는 정책이었다.13) 1972년 야꼬블레프는 러시아 민족주의(예를 들어, 맑스-레닌 사상과 어느 정도 공통성을 지닌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경멸)와 쏘련 공산당 내의 반흐루쇼프 진영과의 연합을 우려하였다. 반흐루쇼프 진영은 서구를 모방하려는 흐루쇼프의 핵심 정책을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1985-91년의 기간에 야꼬블레프는 그러한 동맹 관계에 대해 계속 걱정했다. 그러므로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흐루쇼프와 고르바쵸프의 정책들에 대한 방어와 일치했다.

 

고르바쵸프는 민족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아주 서툴렀다. 발트해 연안 공화국들에서 민족주의가 끓어오르자, 처음엔 무시하였다. 그러다가 리투아니아에 경제적 압박을 가하였고, 나중에는 더욱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와 분리주의자들의 요구에 점차적으로 굴복하여 약하고 가망 없는 연방조약의 재협상 방향으로 나아갔다.

 

국가 분열의 가능성이 커감에 따라 ―1988년 7월 발트해 국가들에서 쏘련과의 합병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14)― 정치국에서의 고르바쵸프 연합 진영은 문제를 회피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지방의 공화국에서 형성된 비공식적인 뻬레쓰트로이까 그룹들을 점차 지배했다. 민족주의자들이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점점 더 이야기하였고 심지어 공화국의 공산당 내에서조차 제기되었다. 1988년 9월 야꼬블레프가 발트해 연방 공화국들을 순방하고 돌아와서 정치국에 아무 문제도 없다. 뻬레쓰트로이까는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리가쵸프는 격노했는데, 통제 불능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꼬블레프는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권했고, 그가 승리했다. 몇 달 못 가서 리투아니아의 공산당은 분열되었고, 당 조직은 기능을 상실했으며, 대담해진 분리주의자들에게로 권력이 넘어가기 시작했다.15)

 

반면에, 정통 맑스-레닌주의자들은 민족 언어와 문화의 발전, 정치 지도부에서의 소수 민족의 대표자들에 대한 보장, 그리고 비러시아 지역의 경우에 차별철폐 행동양식의 사회경제적 발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결코 행사될 필요가 없을 것이라 희망했던 권리인 분리권을 포함하는 국가들의 자기 결정권을 선호했다. 심지어 일부 부르주아 쏘련 연구학자들조차 쏘련의 민족 정책이 미국의 소수 민족 우대 정책보다 낫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쏘련이 이전에 억압받던 민족을 향상시킨 것을 인정한 최근 미국의 연구는 쏘련을 세계 최초로 소수 민족 차별을 철폐한 제국이라고 하면서, 쏘련의 정책들이 크고 더 진보된 국가들이 더 작고 덜 발전된 국가들을 포괄한다는 역사적 전례들의 틀을 얼마나 많이 깨뜨렸는지를 강조했다. 이 연구의 저자, 테리 마틴은 쏘련은 소수 민족의 민족의식을 체계적으로 증진시키고 그들을 위해 민족 국가 특유의 제도적 형태를 많이 만듦으로써16) 발흥하는 민족주의에 대응했던 첫 국가였다고 말했다.

 

고르바쵸프는 민족의 불평등을 무시하거나, 그것에 반대하는 진전을 너무나 과장했다. 그의 6년을 관찰해 보면, 그는 거의 모든 곳에서 특정 민족들의 민족 감정의 깊이를 과소평가하거나 오해했고, 그의 다른 개혁 정책들은 민족 감정을 부추기는 방식을 포함하고 있었다. 1986년 12월의 알마아타(Alma Ata) 폭동 11개월 후, 고르바쵸프는 쏘련이 민족 문제를 해결했다고 호언장담했다.

 

문제를 무시하지 않았다고, 또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분쟁의 경우, 고프바쵸프는 정치국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민족 투쟁을 제멋대로 조작했다. 이는 단기 이익을 위해 원칙을 희생한 뻔뻔스러운 예이다. 1987년 4월, 고르바쵸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kh)의 아제리 지방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의 반란을 부추기는데, 이는 아제리의 정치국의 멤버인 헤이다르 알리예프(Gaidar Aliev)와 고르바쵸프 반대파의 행동을 방해하기 위해서다. 알리예프는 리가쵸프를 포함하여 여러 곳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그의 정치 생명은 1987년 중반에 실추되어 갔다. 가을에는 정치국을 떠났다.

 

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의 요구를 조장하는 것은 고르바쵸프 행동 방식의 일부이다. 이 행동 방식은 주로 고르바쵸프 노선에 장애물이 되는 지역 관리들, 주로 당의 제1 서기들에 맞서, 뻬레쓰트로이까를 위한 민족 전선을 응원하는 것이다. 1988년 4월, 발트해 공화국의 활동가들은 뻬레쓰트로이까를 지지하고 그들의 민족주의적 목표를 주장하기 위해 민족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들 전선은 빠르게 분리주의적이고 친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민족 분쟁이 고르바쵸프에게 어떤 이점이 있었다. 민족 분쟁에서 고르바쵸프가 무언가를 했다면, 그것은 지역 당 지도자가 자신의 반대파인 경우 그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고르바쵸프 정치국이 민족 전선의 편을 들거나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투쟁을 더욱 고무시켰다. 앤토니 다고스띠노(Anthony DAgostino)17)의 말을 빌리자면, 고르바쵸프는 그들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민족주의적 분노를 조장하는 마법사의 도제 같은 역할을 했다.

 

뻬레쓰트로이까가 한 분야에서 실패하면 그 피해는 모든 방향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1988년이 시작되면서, 경제적 고난과 분리주의는 서로를 강화시켰다. 1988년 소비재 부족 사태가 악화되자, 여러 공화국들이 생산량을 비축하고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커진 것이다. 쏘련의 계획 경제는 정확한 노동 분업과 공화국 간의 전문화를 포함한 하나의 단위로 발전하였다. 예를 들어, 발트 지역의 한 산업단지는 쏘련 전체에 종이컵을 공급했다. 모쓰끄바 중앙의 경제적 권위가 약화됨에 따라, 공화국 간 물물교환이 계획 경제를 대체하고, 경제적 분열이 커졌다. 경제적 혼란과 불확실성은 각 연방 공화국(union republic)이 가능한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임에 따라 분리주의자들의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고르바쵸프의 여러 움직임들은 중앙에 대항하는 지방 지역들을 강화시켰다. 1987년에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모쓰끄바의 중앙위원회 서기국이 작성한 명단에서 국가 및 공화국 관리를 선출하는 관행인 노멘끌라뚜라(nomenklatura) 씨스템에 대한 공개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1987년부터, 고르바쵸프와 당 지도자들은 이 임명 제도를 비난하고 지역과 지구에서의 공격으로부터 현지 관리들을 보호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지역 관리들은 모쓰끄바 지도자들의 견해보다는 지역적 견해를 수용하는 것에 더 정신이 팔렸다. 지역 이익과 전체 이익이 상충될 때, 생존을 위해서 지역 지도자들은 지역 이익을 지지해야 했다. 고르바쵸프의 외교 정책은 또한 특히 발트해 국가들에서 지역 이익을 추구하도록 고양시켰다. 엘맨과 꼰또로비치는 냉전 종식과 서방과의 긴밀한 협력을 추구하는 고르바쵸프의 정책이 발트해 국가들, 특히 리투아니아의 자결권을 인정하라는 서방으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18)

 

1987-1988년의 기간이 끝날 즈음, 고르바쵸프와 그의 진영은 리가쵸프 및 반대파들을 모두 제거했다. 이 일이 뻬레쓰트로이까의 본질을 바꿔 놓았다. 당의 증가하는 혼란과 그것의 경제로부터의 배제가 경제적 어려움을 야기했다는 것이 1988년에 분명해졌다. 이것은 인플레이션, 물품 부족, 예산 적자 그리고 계획 경제의 핵심 경제 기관들의 붕괴의 형태로 나타났다. 1988년에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경제 전반에 걸쳐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1년 후에 인플레이션은 연간 20%의 속도로 치솟았다. 소비재가 진열대에서 사라짐에 따라 사재기가 확산되었다.

 

고르바쵸프의 통치는 모쓰끄바의 강력한 산업 기반들을 망가뜨렸다.19) 1988년에 쏘련 경제학자 T. 꼬리야가나(T. Koriagana)는 위법적으로 얻은 개인 재산을 2천억에서 2천4백억 루블로 계산했다. 이는 대략 쏘련 전체 개인 재산의 20에서 25%를 차지한다.20) 경제 위기는 결국 반동적 민족주의자들의 분리주의를 강화시켰다. 연방 공화국들의 당내 반대자들에게 압력을 가하려는 열망이 자극한 고르바쵸프의 대중 전선민족 전선에 대한 고무로, 권력은 분리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1년이 지난 1989년, 장기적인 성장의 둔화가 아니라 뻬레쓰트로이까의 실패에 의한 경제 침체로 고르바쵸프와 쏘련 공산당에 대한 대중적 적개심과 보리쓰 옐찐의 반공산주의 포퓰리즘에 대한 지지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1987년과 1988년에, 고르바쵸프는 방향을 전환했다. 해체(The unraveling)가 시작되었다. (다음 호에는 6. 위기와 붕괴가 이어집니다.)  노사과연

 

 


1) 엘맨(Ellman)ㆍ꼰또로비치(Kontorovich), p. 134.


2) 엘맨(Ellman)ㆍ꼰또로비치(Kontorovich), p. 145.


3) 엘맨(Ellman)ㆍ꼰또로비치(Kontorovich), p. 188.


4) 리가쵸프(Ligachev), p. 339.


5) 엘맨(Ellman)ㆍ꼰또로비치(Kontorovich), p. 2.


6) 엘맨(Ellman)ㆍ꼰또로비치(Kontorovich), p. 150.


7) 엘맨(Ellman)ㆍ꼰또로비치(Kontorovich), p. 189.


8) S. 프레더릭 스타(S. Frederick Starr), “유용한 과거”, 알렉산더 달린(Alexander Dallin)ㆍ게일 라피두스(Gail Lapidu) 편집, ≪위기에서 붕괴로 가는 쏘비에트 체제(The Soviet System from Crisis to Collapse)≫, Boulder: Westview Press, 1995, pp. 14-15.


9) 앤 화이트(Anne White), ≪고르바쵸프 시대 1985-91년 러시아의 민주화: 자발적인 섹트의 탄생(Democratization in Russia under Gorbachev 1985-91: The Birth of a Voluntary Sector)≫,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9, pp. 6-12.


10) 엘맨(Ellman)ㆍ꼰또로비치(Kontorovich), p. 150.


11) 스티븐 코헨(Stephen F. Cohen), ≪부하린과 볼쉐비끼 혁명(Bukharin and the Bolshevik Revolution)≫, New York: Vintage, 1975, p. 36.


12) 유리 안드로뽀프(Yuri Andropov), “쏘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창립 60주년 기념식에서”, ≪사회과학 독자(A Reader on Social Sciences)≫, Moscow: Progress, 1985, p. 381.; 존(John)ㆍ마그릿 피트먼(Margrit Pittman), ≪평화 공존: 쏘련에서의 이론과 실천(Peaceful Coexistence: Its Theory and Practice in the Soviet Union)≫,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4, p. 85.


13) 이츠하크 M. 브루드니(Yitzhak M. Brudny), ≪러시아의 재탄생: 러시아 민족주의와 쏘비에트 국가(Reinventing Russia: Russian Nationalism and the Soviet Stat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1998, p. 17.


14) 오돔(Odom), p. 407.


15) 리가쵸프(Ligachev), p. 143.


16) 테리 마틴(Terry Martin), ≪차별 철폐를 실행한 제국: 쏘련에서의 민족과 민족주의, 1923-39(The Affirmative Action Empire: Nations and Nationalism in the Soviet Union, 1923-39)≫,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 p. 1.


17) 다고스띠노(D’Agostino), p. 178.


18) 엘맨(Ellman)ㆍ꼰또로비치(Kontorovich), “쏘련의 붕괴와 회고록 문헌”, pp. 268-269.


19) 마샬 골드만(Marshall I. Goldman), ≪뻬레쓰트로이까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What Went Wrong with Perestroik)≫.


20) 그레고리 그로스만(Gregory Grossman), “쏘련의 은밀한 사유화와 시장화”, ≪미국 정치사회과학원 연보(Annals of the American Academ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 제507호(January, 1990), p.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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