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배후(11)

 

로저 키란(Roger Keeran)ㆍ토마스 케니(Thomas Kenny)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차례]

서문

1. 서론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3. 제2경제

4. 약속과 불길한 예감, 1985-86

5. 전환점, 1987-88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6. 위기와 붕괴

7. 결론과 암시

8.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

 

 

5. 전환점, 1987-88(3)

 

니나 안드레예바 사건에서 고르바쵸프의 승리는 고르바쵸프식 수정주의의 승리였다. 고르바쵸프는 리가쵸프와의 대립에서 승리하여 1988년 6월의 19차 당 회의를 장악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한편 리가쵸프가 담당했던 이데올로기 관련 임무는 야꼬블레프와 메드베제프에게 이관되었고, 리가쵸프는 1988년 9월에 농업 담당으로 강등되었다. 결국 고르바쵸프는 학창 시절부터 친구였던 아나똘리 루캬노프(Anatoly Lukyanov)를 제외하고 안드레예바의 편지를 지지한 모든 정치국 지도자들을 제거했다.

 

1987년 1월의 중앙 위원회 전원회의가 약간의 떨림이었다면, 1988년 6월의 19차 당 회의는 대변동이었다. 당 회의를 한 달 앞두고 배포된 10개의 테제는 기존 쏘련 지도부의 합의와 유사했다. 회의가 열리자, 고르바쵸프는 테제들을 넘어 나아갔다. 그는 국가 권력의 새로운 최고 기관으로 인민대표의회의 창설을 제안했다. 인민들은 5년 임기의 대표 1,500명을 선출하고 750명은 당과 관련 기관에 배정하고, 대표의회는 의회에 책임지는 소수의 양원으로 된 상설기구인 최고 쏘비에트를 선출하는 것이다. 고르바쵸프는 스스로를 위해 집행위원장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의장으로서 고르바쵸프가 막판에 갑작스럽게 제안한 이 결의안은 결국 중앙 위원회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한 논평가에 따르면, 인터내셔널가를 부를 때, 많은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의아해하기 시작했다.1)

 

당이 쏘련 사회와 정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는데, 19차 당 회의는 당이 아닌 국가가 주도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단번에 그 역할을 뒤집었다. 19차 당 회의는 극적으로 쏘련 공산당의 역할을 축소시켰고, 의회 정당 중의 하나로 변질시켰다. 공산당이 아닌 당을 합법화한 것이다. 쏘련 공산당의 지위가 꺾이게 되자, 새롭게 만들어진 집행위원장 자리는 고르바쵸프의 통치 발판이 되었다. 곧 다른 조치들이 뒤따랐다. 1988년 9월에 고르바쵸프는 중앙 위원회 사무국을 위원회로 바꾸고 운영위원직에서 당 간부들을 배제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이러한 조치는 중앙 위원회에 있는 반대파를 약화시켰고 무엇보다도, 중앙 위원회 사무국을 정치적 기반으로 했던 리가쵸프의 협력자들을 약화시켰다. 쏘련 공산당의 약화와 축소는 광범위한 결과를 낳았고, 점차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1989년 4월에,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던 리가쵸프는 이상하게도 나약한2) 집권당을 분명히 깨달았다.

 

어느 시점에선가 실질적으로 중앙정부의 해체3)를 의미하는, 당을 청산하려는 고르바쵸프의 죄행은 완전히 의식적인 것이었다. 고르바쵸프가 수정주의로 전환한 시기에 관한 흥미로운 단서가 있다. 쏘련 공산당을 사회당과 인민민주당의 둘로 나눌 것을 요구한 야꼬블레프의 1985년 메모에 대한 고르바쵸프의 반응이다.4) 이는 흐루쇼프가 쏘련 공산당을 도시계열과 농촌계열로 나누려던 계획의 반복이었다. 야꼬블레프에 따르면, 고르바쵸프는 단지 너무 빠르다!라고만 답했다. 이 사건 이후 야꼬블레프의 지위가 높아졌다. 만약 야꼬블레프의 설명이 맞다면, 고르바쵸프는 임기 초반부터 광범위한 정치적 변화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5)

 

고르바쵸프의 정치적 변절의 성질과 시기에 대한 여러 다른 증거들도 있다. 고르바쵸프 자신의 회고록에서는 전기와 후기의 태도들이 자가당착의 덩어리로 뒤죽박죽이다. 쏘련 공산당에 대한 애정, 동정, 경멸이 동시에 페이지들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다면, 처음부터 고르바쵸프는 쏘련 공산당을 주된 장애물로, 당 조직을 주된 적으로 여겼지 개혁을 위한 투쟁의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는 당 내부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술책을 써서 당 자체를 공격했다. 그는 항상 당의 지도부보다는 대중과 지식인에게 호소했다. 그의 회고록 곳곳에 당이 제동을 걸고 있다6)는 정서가 깔려 있다.

 

이런 고르바쵸프의 생각은 결국 분명히 드러났다. 아나똘리 체르냐예프에 따르면, 고르바쵸프는 쏘련 공산당을 경멸할 뿐이었다. 그의 가장 충성스러운 측근 중 하나인 체르냐예프가 고르바쵸프에게 당을 떠나자고 간청하자, 고르바쵸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있잖아, 똘리야(Tolya) 자네는 내가 자네의 메모를 안 본다고 생각하나? 나는 자네의 메모를 보고 읽고 있네. [게오르기] 아르바또프([Georgy] Arbatov), [니꼴라이] 쉬멜료프([Nikolai] Shmelev)도 같은 말을 하네. 내게 서기장 자리를 포기하라고 설득하려 해.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피부병에 걸린 개는 목줄을 풀어 줘서는 안 된다는 거야. 만약 내가 그렇게 했다면, 당 전체가 나에게 맞섰을 것이네.7) 고르바쵸프는 자신을 키워 준 조직을 피부병에 걸린 개 취급했다.

 

1987-88년의 변화를 외부인들은 흐릿하게만 보았지만 내부에서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쩌면 고르바쵸프마저 자신이 한 일의 의미를 분명히 알지 못한 것 같다. 당시 그는 자본주의의 부활 없이 서유럽식 사민주의와 같은 것을 원했다. 자신에게 당을 사민주의화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사회개량주의와 맑스-레닌주의 사이의 구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8)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좌파 연합은 일상적이고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는 타락을 의미한다. 어쨌든 그는 신기루를 쫓고 있었다. 결국 사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는 자본주의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9)

 

고르바쵸프 정권은 맑스-레닌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거부하는 사상의 전송 벨트10)가 되었다. 고르바쵸프의 연설은 새로운 생각, 보편적인 인간 가치, 민주주의의 부르주아적 개념, 시장사회주의와 같은 사상을 당과 언론에 전파했다. 글라쓰노쓰찌 언론들은 새로운 개념을 확장시켰고, 고르바쵸프가 반사회주의 방향의 더 많은 변화를 연설에 포함하도록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본질적으로, 고르바쵸프의 새로운 생각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항복하는 결과를 낳았다. 투쟁에서 항복으로의 전환은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심리적 측면도 있었다. 싸움을 멈추는 것은 안도감을 주었다. 뻬레쓰트로이까 시기에 반복하여 나타난 어떤 구절들은 고르바쵸프 집단의 기회주의 심리와 보상과 압력에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고르바쵸프는 양보를 하면 서구의 찬사를 받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고르바쵸프는 우리는 이러한 식으로 살 수 없다!라고 외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견딜 수 없는 위기는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뻬레쓰트로이까는 정상 국가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사회주의를 질식시키려 하고 생존을 위해 이에 저항해야 하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정상이란 단지 자본주의를 수용한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고르바쵸프 진영의 쏘련 공산당 지도자들은 노동자가 자각하여 만드는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포기하였는데, 이러한 이탈은 결국 독선적 자기만족과 관련된다. 고르바쵸프가 미국을 기쁘게 하기 위해 취한 행동은 미국 외교관들을 놀라게 했다. 어떤 정치인도 동등하거나 더 좋은 것을 보상받지 않고는 오랫동안 유지해 온 협상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르바쵸프는 1987년 2월에 더 이상 미사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미국의 결정에 대한 대가로 쏘련의 기존 미사일을 제거하는 완전히 불균형한 제로옵션을 수용했다. 이러한 조치는 고르바쵸프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싸움의 포기를 목표로 해야만 납득이 된다.

 

고르바쵸프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질은 파괴자의 배역을 맡도록 했다. 이전의 쏘련 지도자들 중 레닌을 제외한 다른 어떤 지도자보다도 고르바쵸프는 많은 여행을 했다. 유로코뮤니즘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1972년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1966, 1975, 1976, 1978년에 프랑스를, 1975년에 독일을 방문했다.11)

 

그가 1983년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에스뺘냐 수상인 사회민주당의 펠리뻬 곤살레스(Felipe Gonzalez)는 고르바쵸프를 구슬렸다. 고르바쵸프는 서독의 사회적 시장 경제를 동경했고, 쏘련 경제의 성과를 과거 제정러시아나 동시대의 제3세계와 비교하지 않고, 독일, 프랑스, 영국과 비교했다. 고르바쵸프는 학창 시절부터 1990년대까지 체쓰꼬의 프라하의 봄 반체제 인사인 즈데네크 믈리나르(Zdenek Mlynar)와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스스로를 60년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우유부단한 성격도 정치 지도자로서의 약점에 한몫했다. 우호적인 분석가들조차 그의 천박한 심지를 알아보았다. 미국의 평자(評者)인 윌리엄 오돔(William Odom)은 고르바쵸프는 확고한 신념이 없다고 말했다.12)

 

고르바쵸프의 수정주의 정책은 조직이 곪은 상태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정책은 쏘련 지도부의 지도력을 점증적으로 좀먹어 들어갔다. 리가쵸프가 고백한 바와 같이 당 지도자들의 이론적 발전과 정치적 숙련이 부족한 집권당만이 그런 낭패를 겪는다.13) 집단지도체제의 전통이 약한 당만이 당의 기본 이론과 정책을 부인하는 지도자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1964년 브레즈네프와 쑤쓸로프(Suslov)는 고르바쵸프보다 과오가 더 적은 흐루쇼프를 축출했었다.

 

더욱이, 당의 이론은 고르바쵸프 이전부터 어려움을 겪으며 고르바쵸프를 위한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이론적인 허약함은 민족 문제에 대한 장밋빛 견해, 사회주의의 강함과 제국주의의 약함이라는 과도하게 희망적인 평가,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 단계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공산당 강령을 말한다. 유리 안드로뽀프는 이러한 구조적이고 이론적인 결점들을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그의 삶은 그 일을 마치기 전에 끝났다.

 

쏘련의 완만한 경제 성장과 레이건의 드라마틱한 군비 경쟁의 단계적 확대로 인한 새로운 부담 그리고 국내 문제의 증가로, 쏘련은 개혁, 재도약 그리고 재건의 기간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종의 후퇴가 필요했다. 레닌은 1918년의 브레쓰트-리또프쓰크 조약(Brest-Litovsk Treaty)과 1921년의 신경제정책(NEP)에서와 같이, 힘든 상황에서 필요하다면 후퇴할 줄 알았다. 이후의 쏘련 지도자들도 그렇게 했다. 쓰딸린은 1939년에 독-쏘 불가침조약(Nazi-USSR pact)에서 흐루쇼프는 1962년에 꾸바 미사일 위기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레닌주의자들에게 후퇴는 힘의 형편이 좋지 않아 일보후퇴가 필요한 투쟁의 특정한 단계였다. 이것이 후퇴였지 투쟁의 포기가 결코 아니었다. 고르바쵸프의 외교 정책의 후퇴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띠었다. 그의 외교 정책은 쏘련 문제는 자본주의 세계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기초했다.14) 고르바쵸프는 자신의 후퇴를 인류를 위한 위대한 발전으로 묘사했다.

 

레이캬비크 정상회담(Reykjavik Summit)에서 고르바쵸프의 후퇴는 1987-88년 180도 전환을 위한 사전 준비였다. 쏘련 평화 외교의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쏘련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시작된 양보는 결국 아무 대가 없는 양보가 되었다. 쏘련은 결과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양보하기 시작했다. 레이캬비크의 직접적인 영향 속에서도 중거리 핵전력(INF) 문제에 대한 쏘련의 입장은 1983년 안드로뽀프 수준을 유지했다. 즉, 영국과 프랑스의 무기고에 이미 있는 재고보다 더 많은 미사일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7년 초에 고르바쵸프는 입장을 바꿨다. 다고스띠노(DAgostino)는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 프로그램과 유럽의 미사일 협상과의 연계를 미국이 받아들이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고, 고르바쵸프는 과거와 갑자기 단절했고 유럽에서 모든 중거리 핵전력(INF) 미사일을 제거하려는 레이건의 상투적인 말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15)

 

1987-1988년에 이딸리아 공산당(CPI)은 외교 정책을 다루는 쏘련의 사상가들과 저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16) 수년 동안 서유럽 공산주의 정치에서 이딸리아 당은 자본주의와 타협하려는 사상의 선봉대였다. 예를 들어, 체쓰꼬 지도자 알렉산데르 둡첵(Alexander Dubcek)을 옹호했고, 1968년에는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스꼬쓸로벤쓰꼬 개입을 비난했다. 이딸리아 공산당은 나토에 대해 방어적이고 지리적으로 제한된 동맹으로 간주하여 온건한 태도를 갖도록 쏘련을 설득했다.17) 이딸리아 공산당(CPI)은 또한 고르바쵸프의 보편적 인간 가치 슬로건을 자신들의 지도자 엔리꼬 베를링구에르(Enrico Berlinguer)와 아낄레 옥께또(Achille Occhetto)의 사상에 대한 지지라고 환호했다. 중거리 무기에 대해, 이딸리아 공산당은 독일 사민당으로부터 제로옵션을 옹호하는 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쏘련에게 압박했다.

 

1988년 중반 쏘련 공산당을 약화시킨 후, 고르바쵸프가 외교 정책을 수정하는 데 있어 핵무기는 그 중심이 되었다.18) 일방적인 쏘련 핵무기의 감축을 위해서 고르바쵸프는 쏘련이 미국과 동등한 핵무기를 가졌을 때 긴장완화(détente)의 기반을 형성할 수 있다는 브레즈네프 시대의 군사 정책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군사 정책에 대한 수정주의 입장으로의 도약은 1988년 19차 당 회의에서 이루어졌다. 고르바쵸프는 쏘련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수단과 군사적 수단을 구별했다. 이는 사실상 쏘련 지도자들의 핵무기 경쟁과 전략적 균형 유지를 비난한 것이다. 고르바쵸프는 [균형을 맞추려는 생각의] 결과로 우리는 국가의 사회경제적 발전과 국제적 지위에 악영향을 미치는 군비경쟁에 스스로를 몰아넣었다라고 말했다. 1988년 11월에, 정치국은 극단적인 군비축소를 승인했다. 12월에 고르바쵸프는 뉴욕의 유엔에서 군비축소를 발표했다.19) 점점 더 쏘련의 외교 정책은 군사, 정치, 경제적 영향에 대한 고려 없이 일방적인 군비축소로 되었다.

 

1987년 11월, 고르바쵸프는 볼쉐비끼 혁명 70주년 기조연설 10월과 뻬레쓰트로이까: 혁명은 계속된다를 통해, 마치 비디오의 멈춤 장면과 같이 쏘련 외교 정책에 대한 공산당 내의 치열한 경쟁을 담아냈다. 대부분의 서구 논평가들은 당 역사에서 전쟁에 관한 여러 관점들을 포함하려는 시도를 강조했지만, 연설에 나타난 새로운 외교 정책에 대한 공식화가 훨씬 더 중요했다. 연설은 모쓰끄바의 공산주의자와 사민주의자 사이의 커다란 골을 메우려고 시도했다. 고르바쵸프는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좌파의 화해를 도모한 것이다. 외교만으로는 중장거리 핵무기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목격한 후에 고르바쵸프는 영구적 평화를 향한 진보에 대한 이론적 가능성을 검토했다. 고르바쵸프는 제국주의는 호전적이고 군국주의와 신식민주의를 기본적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확실하게 선언했다. 그렇다면 쏘련의 평화 공세가 성공할 수 있다는 낙관론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새로운 표현으로 대답했다. 고르바쵸프는 모순은 완화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상호 연결되어 통합된 세계에 기초해 있으며 역사적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선언했다.20) 그는 계급투쟁과 사회 모순의 표출이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접근은 계급투쟁 그 자체가 평화를 추구하는 객관적 과정이고, 평화는 호전적이고 침략적인 제국주의에 평화적인 관계를 강제하는 투쟁의 결과라는 전통적인 쏘련의 견해를 수정한 것이다. 이에 대신해 고르바쵸프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새로운 경제 질서에 대한 공동모색을 제안했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당시 연설은 정통적으로 정식화된 맑스-레닌주의에 반대하여 용을 쓰는 고르바쵸프의 기회주의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는 정통적인 함축적 의미는 버리면서 용어만은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연설은 쏘련의 평화를 위한 투쟁의 요구라기보다는 제국주의와의 화해와 통합을 촉구한 것이었다.

 

쏘련의 일방적인 외교정책에서의 양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1979년 이래로 아프간 혁명 정부와 쏘련 동맹군은, 미국, 파키스탄, 중국과 대립해 왔다. 처음에 고르바쵸프는 전쟁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21) 이 전쟁은 1936-39년 에스빠냐 민주공화국을 위한 투쟁과 전혀 다르지 않은 야만과 반동에 대항한 고귀한 투쟁이었다. 1986년 5월 아프간 새 공산당 지도자 나지불라(Najibullah)는 고르바쵸프 지도부의 축복과 묵인하에 카말(Karmal)에게서 권력을 넘겨받았고,22) 1987년 초에 협상, 연정 그리고 최종적으로 쏘련의 철군을 의미하는 민족적 화해를 요구했다. 비타협적인 카말은 항상 무자히딘 반혁명 세력을 강도 떼라고 불렀다. 1986년 초 고르바쵸프의 대중 연설은 전쟁에 관한 더욱 비판적인 어조를 띠었다. 1987년 고르바쵸프, 야꼬블레프, 쉐바르드나제는 쏘련군 철수의 국내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글라쓰노쓰찌 언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1987년에 수정주의자 언론의 근거지 ≪아고뇩(Ogonyok )≫의 특파원, 아르뚐 보로빅(Artyom Borovik)은 쏘련의 전쟁 수행에 대한 비판적인 아프가니스탄 리포트들을 보도했다. 그의 전쟁터 보도는 사상자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1987년 12월 워싱턴 정상 회담에서 고르바쵸프는 쏘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88년 2월에는 1989년 초까지의 쏘련군 철수 계획을 제시했다. 1988년에, 전쟁을 비판하는 편지들이 군인들의 어머니들로부터 자발적으로 글라쓰노쓰찌 언론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1988년 중반, 아고뇩은 쏘련의 최고 군사 전문가가 전쟁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나지불라, 쏘련 공산당 지도부와 군부 내 반수정주의자, 꾸바와 앙골라 같은 쏘련 동맹국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쏘련의 무조건 철수를 끝까지 반대했다. 쏘련의 비엣남 수렁이라는 서구의 주장과 ―주로 상부로부터 조직된― 전쟁에 대한 국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쏘련의 사상자는 개입 초기보다 적었다. 아프간 분쟁에 대한 미국 학자의 말에 따르면, 이 전쟁의 결과는 결국 모쓰끄바에서 결정되었다고 한다.23) 철수는 미국의 무자히딘 지원 종식이라는 쏘련의 요구에 대한 합의 없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미국은 아프간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나 비동맹 아프가니스탄인들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1989년 2월 15일에 수년간의 희생에 대해 아무런 보답 없이 마지막 쏘련군이 떠났다.24) 아프간은 처음에는 살인적인 군벌들의 손에 넘어갔고, 다음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탈레반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이전 혁명 정권의 모든 정치, 경제, 교육적 진보는 파괴되었다.

 

고르바쵸프의 여타 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배신행위는 뻬레쓰트로이까의 마지막 3년 동안 계속되었다. 1988년 12월까지 쏘련은 여전히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여타 아프리카 해방 운동을 광범위하게 지지했다. 그러나 정책 변화의 첫 조짐이 1988년 말에 나왔다. 꾸바와 쏘련의 지원을 받은 남서아프리카에서 성장하는 해방 운동은 나미비아에서 선거를 강제했고, 선거의 공정성은 유엔군이 보장했다. 그런데 남서아프리카인민기구(SWAPO)의 독립운동 또는 동맹국인 꾸바와 관계없이, 쉐바르드나제는 갑자기 나미비아에 있는 유엔군 주둔을 감축하자는 미국의 제안에 동의했다.25)

 

1987-88년에는 다른 외교 정책들도 양보가 잇달았다. 1988년 5월에 레이건이 모쓰끄바를 방문했다. 1988년 6월, 19차 당 회의에서는 핵균형전략을 폐기했다. 1988년 9월부터 10월까지, 중앙 위원회 전원회의는 계급투쟁보다 보편적인 인간 가치를 우선순위로 확인했다. 그리하여 쏘련의 외교정책은 탈이데올로기화되었다. 또한 전원회의는 그로므이꼬(Gromyko)를 퇴직시키고 리가쵸프를 강등시켰다. 1988년 12월에 뉴욕의 유엔에서 고르바쵸프는 동유럽에서 6개의 탱크 사단을 철수하는 것을 포함하여 50만 명의 쏘련군 감축을 발표했다. 1989년에 반혁명 운동이 동유럽을 휩쓸었다.

 

고르바쵸프는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포기했다. 이 독트린은 쏘련과 다른 동유럽 국가들이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에서 사회주의를 방어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독트린은 계급투쟁이 국가주권보다 우선한다는 레닌의 고전적 노작과 일치한 것이었다.26) 또한 한 사회주의 국가와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결속, 국가 간 확대된 계급연대의 형태를 표현한 것이다. 데이비드 레인(David Lane)에 따르면 1989년 쏘련은 같은 동맹국이라 하더라도 다른 국가들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27) 공산주의 정부가 쏘련에서보다 훨씬 뿌리 깊지 못한 동유럽에서, 고르바쵸프의 군대감축과 비개입 정책은 재난을 초래했다. 모든 동유럽 사회에서, 공산주의 정부는 빠르게 자존감을 잃어 갔고, 반대 세력들은 용기를 얻었다. 고르바쵸프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일방적으로 포기했다. 독일민주공화국(GDR)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굴복해야 하는 파국을 맞이했다. 상호 이익과 평등한 권리에 기반하여 서로 다른 사회 체제를 가진 두 독일 국가는 협상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결국 굴욕적인 강제 합병과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가져왔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1) 로널드 그리고르 써니(Ronald Grigor Suny), ≪쏘비에트의 실험(The Soviet Experime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 461.

2) 리가쵸프(Ligachev), p. 152.

 

3) 휴(Hough), p. 106.

4) 윌리엄 타우브만(William Taubman), ≪흐루쇼프: 그 사람과 그의 시대(Khru-shchev: the Man and His Era)≫, New York: W. W. Norton & Co., 2003, pp. 587, 782. 당분간 영어권에서 표준적 학술서로 인정받을 이 전기에 따르면, 알렉싼드르 야꼬블레프는 당을 분할하려는 계획에 있어 흐루쇼프와 고르바쵸프의 연결고리였다. 타우브만은 고르바쵸프에게 당 분할을 제안한 야꼬블레프를 인터뷰했는데, 1962년 흐루쇼프 밑에서 일한 적이 있는 야꼬블레프는 흐루쇼프가 당을 공업 부분과 농업 부분으로 분할할 것을 제안하자 중앙 위원회 서기국이 반대했다고 말했다. 타우브만은 흐루쇼프의 강제 퇴진을 지지한 1964년 10월 전원회의에서 당의 분열을 일부 지도자들은 “쏘비에트 국가가 건립된 이래 가장 최악의 혼란”으로 규정했다고 말했다.

5) 브라운(Brown), p. 106.

6) 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 ≪회고록(Memoirs)≫, New York: Doubleday, 1995, p. 282.

7) 윌리암 E. 오돔(William E. Odom), ≪쏘비에트 군대의 붕괴(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8, p. 209.

8) 브라운(Brown), p. 101.; 고르바쵸프(Gorbachev), ≪회고록(Memoirs)≫, p. 605.

9) P. 페도쎄예프(P. Fedoseyev) 편집,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emocratic Socialism? )≫,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0, p. 18.

10) 노만 마코위츠(Norman Markowitz), “홀츠의 레닌주의 방어에 대하여(On Holz’s Defense of Leninism)”, ≪자연, 사회 및 사상(Nature, Society and Thought )≫ 제6권 제3호, p. 354.

11) 브라운(Brown), pp. 42, 328.

12) 오돔(Odom), p. 115.

13) 리가쵸프(Ligachev), p. 15.

14)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일촉즉발의 상황: 제3차 세계대전(Flashpoint: World War III )≫, London: Pluto Press, 1996, p. 42.

15) 다고스띠노(D’Agostino), pp. 117-118.

16) 같은 책, p. 119.

17) 같은 곳.

18) 오돔(Odom), p. 151.

19) 같은 책, p. 137.

20) 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 ≪10월과 뻬레쓰트로이까: 혁명은 계속된다(October and Perestroika: the Revolution Continues)≫, Moscow: Novosti  Press Agency, 1987, pp. 66-67.

21) 오돔(Odom), p. 102.

22) 사라 E. 멘델슨(Sarah E. Mendelson), ≪변화과정: 이념, 정책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의 쏘련의 철군(Changing Course: Ideas, Politics, and the Soviet With-drawal from Afghanista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p. 111. 나지불라(Najibullah)에 대한 강한 호평은 필립 보노스키(Phillip Bonosky)의 ≪아프가니스탄: 워싱턴의 비밀 전쟁(Afghanistan: Washington’s Secret War )≫, New York : International Publishers, 2001에서 볼 수 있다.

23) 멘델슨(Mendelson), p. 122.

24) 같은 책, p. 117.

25) 블라지미르 슈빈(Vladimir Shubin), ≪ANC: 모쓰끄바의 시각(ANC: A View from Moscow )≫, Bellville, South Africa: Mayibuye Books, University of Western Cape, 1999, pp. 340-341.

26) V. I. 레닌(V. I. Lenin), ≪민족정책의 문제들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Ques-tions of National Policy and Proletarian Internationalism)≫,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0, p. 60.

27) 데이비드 레인(David Lane), ≪국가사회주의의 번영과 몰락(The Rise and the Fall of State Socialism)≫, Cambridge: Polity Press, 1996,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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