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헤겔과 맑스주의 국가론의 철학적 방법론적 기초에 대하여

신재길 | 교육위원장

 

 

* 이 글은 2017년 대구의 현대사상연구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원래 노사과연의 이론지 ≪노동사회과학≫에도 싣기로 하였으나, 반대의견이 있어 ≪정세와 노동≫에 게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보면 여러 가지 개념의 한계들이 보이긴 하지만,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싣습니다.

 

 

 

[차례]

1. 헤겔과 맑스 국가론의 개요

2. 변증법적 총체성

  1)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적 자유주의

  2) 변증법적 총체주의

3. 자율성과 환원

  1) 토대와 상부구조

  2) 발현이론과 수직적 위계(층위)론

  3) 사회의 2중 구조와 3층 구조

4. 글을 마치며

 

 

1. 헤겔과 맑스 국가론의 개요

 

헤겔의 국가론을 언급하기 위해서 헤겔이 비판 대상으로 삼았던 자유주의 국가론을 먼저 보자. 자유주의 국가론은 홉스로부터 시작되어 로크, 루소로 이어진다. 즉 자유주의 국가론은 한마디로 사회계약론이다. 자유주의 국가론은 봉건종교국가로부터 사적 재산권을 분리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폭력의 정당성을 종교에서 찾지 않고 개인들의 계약에서 찾았다. 이때 개인은 재산을 소유한 자산가를 말한다. 개인들은 이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신의 원리를 이성의 원리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신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사회의 기초가 되기를 희망했다. 따라서 정교분리를 내세웠다. 즉 국가의 종교로부터의 독립성이라는 국가의 자율성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로 표출되었고 사상의 자유로 발전하였다. 정교분리 주장 즉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게 되는 경제적 토대는 경제외적 강제로부터 사적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자유주의 국가론은 개인의 자유로운 계약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개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발견 내지 형성은 국가의 형성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 즉 근대적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개인이 발견되고 형성된 것이지 개인이 국가 이전에 먼저 자연 상태로 있다가 국가를 계약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자연 상태는 인류 역사에 있어 본 적이 없다. 인류는 항상 집단을 이루고 있었고 폭력은 이들 집단의 우열에 따라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다 근대에 이르러 근대국가를 형성하면서 분산된 폭력을 국가가 독점하게 된다. 이런 국민국가의 형성은 국민이 폭력의 대상에서 폭력의 담당자로 바뀌면서 이루어졌다. 즉 국민 징병제와 함께한 것이다. 국민 징병제의 확대는 곧 참정권의 확대로 나타났다. 참정권의 확대는 사회생활에서 개인의 역할이 중요시된 계기이고 개인의 발견이었다. 즉 국민국가의 결과가 개인을 형성한 것이다.

이는 다른 의미로 전체주의적 요소와 개인주의적 요소가 함께 강화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경제적인 배타적 지배권인 국민국가 내지는 민족국가는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이를 강화하는 민족이데올로기나 국가이데올로기를 창출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참정권의 주체로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주의적 요소도 동시에 강화한다. 즉 자본주의에서 자유주의의 발전은 민족국가와 개인의 동시적 강화를 낳았다.

 

초기 자유주의는 개인을 강조한다. 특히 개인의 재산권을 강조한다. 자유주의의 자유는 계약의 자유이고 선택의 자유이다. 헤겔은 당시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처참한 빈곤을 목도하고 그 원인이 시민사회의 욕망의 체계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 헤겔이 볼 때 시민사회에서 인간은 개인으로서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고 또 자신 역시 타인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헤겔도 애덤 스미스 등 당시의 정치경제학을 수용한다. 시민사회는 자유경쟁의 사회이다. 시민사회는 빈곤문제, 과잉생산 등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이 있다. 헤겔은 시민사회가 발생시킨 문제를 시민사회가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헤겔은 시민사회가 초래하는 혼란은 이를 제어하는 국가를 통해서만 조화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민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헤겔에게 있어 바람직한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끈끈한 공동체로서의 인륜성이다. 인륜성의 세 가지 계기가 가족, 시민사회, 국가이다. 가족은 사랑의 원리가 지배하는 개인이 배제된 원초적 공동체이고, 시민사회는 개인의 욕망에 기초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이다. 이를 종합하고 지양한 것이 보편성(가족)과 특수성(시민사회)의 통일로서의 국가이다. 헤겔에게 국가란 인륜성이 자기를 실현한 자기의식적 인륜적 실체이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총체적인 인격을 가진 인간들의 공동체가 국가이다. 즉 헤겔에게 국가란 자기의식의 실체로서 주어진다.

헤겔의 국가는 시민사회의 문제를 시민사회보다 상위의 심급에서 해결하는 주체이다.

이렇게 헤겔은 최초로 시민사회를 개념화하고 국가와 분리시켜, 둘 간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시민사회와 국가가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지 않고 서로 혼합되지도 않으면서 유기적 조화를 이루는 통일체를 이룰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은 사회계약론이나 자유주의가 본래의 국가를 경제의 지배 속에 소멸시킨다고 비판하였다. 즉 경찰국가를 오성국가, 외면적 국가라고 비판한다. 참다운 국가 즉 인륜성의 실체로서의 국가에서만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자유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유주의적 자유인 선택에서의 강제의 배제와는 완전히 다르다. 헤겔에게 자유란 자신의 본질을 자각하여 본래의 자신에 따라 살며, 다른 어떠한 것에도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헤겔은 자유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정과 사랑의 예를 내세운다. 내가 타인을 위해 애쓰면서 그에 의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의 자신을 더욱 충실하게 해 나가는 존재방식이 우정이고 사랑이다. 참된 자유는 연대 안에 있고 공동체 생활 속에서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국가란 자유가 실현된 공동체이다. 선택의 자유는 이미 선택이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전제하기에 자유일 수 없고 또 다른 강제가 된다. 이는 자유의 제약이다. 헤겔은 자유의 실현을 시민사회는 해결할 수 없고 국가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참다운 국가, 헤겔의 용어로는 즉자대자적인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복지를 보장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국가론은 서구의 사회국가론이나 복지국가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헤겔의 문제의식이 국가란 무엇인가, 즉 국가의 목적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맑스는 국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서 출발한다. 문제의식의 출발이 다르다. 따라서 맑스의 국가론은 헤겔의 국가론을 비판함으로써 전개된다. 헤겔이 목적에 따른 국가를 설정했기 때문에 국가의 목적에 맞는 이념이 주체가 되어 목적을 실현하는 체제로 국가론이 전개된다. 이 점을 맑스는 주어와 술어가 전도되었다고 비판한다. 국가란 시민사회의 결과로서 시민사회를 반영하여 나타난 것이지, 시민사회를 포섭하고 지양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맑스는 헤겔이 도처에서 이념을 주어로, 본래의 현실적인 주어들을 술어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을 통해 맑스는 사유재산이 국가와 법의 내용을 형성한다는 것과 사유재산에 기초한 시민사회의 모순이 국가의 모순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결국 맑스에게 있어 국가란 시민사회의 자립화된 추상이다. 따라서 국가는 시민사회의 본질적인 내적 구조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게 된다.

맑스에 의하면 국가는 세 가지 기능을 갖는다. 첫째 국내적으로 계급지배, 즉 약탈기능이다. 자본주의에서 총자본가로서의 부르주아국가의 기능이다. 둘째 국외적으로 군사적 기능을 담당한다. 이는 총자본가로서의 해외 침략이라는 기능과 외적의 침략을 방어한다는 공동체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 기능이다. 셋째 공공성이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주체로 국가 공동체 고유의 기능이다.1)

결국 맑스는 국가가 시민사회의 추상화로서 총자본가의 기능과 공동체의 고유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본다. 이를 한마디로 한다면 자본주의사회의 총괄로서의 국가라고 할 수 있겠다.

 

 

2. 변증법적 총체성

 

1)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적 자유주의

일반적으로 부르주아학계에서는 전체주의와 자유주의를 대립시키고 헤겔과 맑스를 전체주의적 사조에 포함시킨다. 사실 이는 냉전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전체주의=나찌주의=볼쉐비즘=공산주의 구도를 만들어 내고자 한 억지이다. 나찌즘과 볼쉐비즘은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전혀 친화력이 없다. 철학적으로는 오히려 자유주의와 전체주의가 같은 사유 틀을 공유한다.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사상적 공통성은 부분과 전체를 분리하고 어느 하나를 절대화시키는 점이다. 개인과 국가를 대립시켜 개인을 강조하면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되고 국가를 강조하면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적 자유주의로 발전한다. 이들의 경제적 공통성은 사유재산의 옹호이다.

나찌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강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칼 슈미트가 부르주아 의회 제도를 비판한 핵심이 부르주아 의회 제도가 민주주의(인민주권)에 오염되어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데 있었다. 슈미트의 직접적 비판 대상은 바이마르 의회였다. 슈미트의 입장에서는 바이마르 의회의 민주주의는 곧 전체주의로 보였다. 민주주의는 인민주권주의이며 인민주권은 전체 인민의 공공성을 앞세우게 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사유재산권)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슈미트는 인민을 억압할 수 있는 강한 국가만이 개인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슈미트의 의회주의 비판은 제한선거 시기에는 의회주의가 제 기능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이 진출한 의회(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에서는 자유주의에 의회는 더 이상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2)

그렇다면 현재 자유주의국가의 대명사인 미국은 어떤가? 셀던 월린은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후마니타스, 2013)에서 미국을 전도된 전체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찌즘이나 파시즘이 대중운동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면 미국의 전도된 전체주의는 대중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사회체제에서는 시민의 탈정치화와 탈동원화가 중요한 체제 유지 동력이 된다. 시민의 관심을 사로잡는 건 신기술과 신상품, 최신주의, 그리고 최신의 것이 이전의 것을 대치하는 속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미국을 전체주의라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아직 미국이 형식적 민주주의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애국자법을 제정하기도 하였지만 독소조항에 대한 비판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잘못된 전제로 이라크 전을 시작하고 갖가지 비인도적인 행위들을 자행했다. 미국 대통령의 승인 하에 아부 그라이브의 수용소에서는 나찌 정권을 연상하게 하는 끔찍하고 체계적인 고문과 포로학대가 실시되었다. 또 부당한 납치, 감금, 고문, 처형, 강제 심문 등으로부터 인권을 지키기 위한 미국 헌법의 조항들을 무시하기 위해서, 미 정부는 쿠바의 관타나모에 수용소를 세웠다. 미국은 형식적으론 민주주의국가이지만 실상은 전체주의국가인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적 자유주의)는 대립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이 전부이고 전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전체주의는 전체가 전부이고,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전체주의는 하나의 사물을 바라볼 때 부분과 전체를 전혀 다른 것으로 분리하여 사고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어떤 대상을 부분과 전체로 나누어 사고할 때 부분이 없이는 전체는 형성될 수 없다. 이 점에 집중하는 사고방식이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이다. 어떤 사물은 기초적인 구성요소의 결합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기초적인 구성요소가 사회에서는 개인이다. 국가나 사회의 그 이상이란 것들은 허구이거나 개인들이 만들어 낸 개인적 구성물이지 개인과 별도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국가나 사회란 것도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국가나 사회의 고유의 운동법칙이나 성격이 있을 수 없고 모두 어떤 개인의 행동으로 환원되거나 개인의 행동들이 결합된 것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은 역사적 사건에서 개인의 동기나 신념, 책임의식 등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대표적 자유주의자인 유시민이 자신의 책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한국 전쟁 발발의 책임을 김일성과 박헌영의 신념에 돌리고는 이들이 책임의식이 결여되었다고 질타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3)

그러나 전체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전체와 그 구성요소를 구분하는 것에서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들에게 동의하지만 전체는 단순한 구성요소의 합 그 이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전체주의자들에 의하면 그 이상은 개별적 구성요소의 속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인간은 이성적 능력이 있는데 인간의 이성적 능력은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구성하는 세포나 DNA 등에서는 찾을 수 없다. 즉 인간의 이성이나 정신 등은 인간의 구성요소(세포, 유전자, 기관 등)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사회나 국가, 민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속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회나 국가, 민족의 고유의 기능, 속성,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주의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이런 전체의 그 이상은 구성요소의 속성이나 구조에서 찾을 수 없고 구성요소에 앞서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들에겐 개인보다 국가가 앞선다. 따라서 국가나 민족이 부여해 준 계급적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 개인이 해야 할 전부가 된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와 전체주의적 자유주의자가 공유하는 사유방식의 공동성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구성요소와 전체를 분리하여 어느 한 쪽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들은 둘 다 변증법적 사유를 부정하고 형식논리에 머물러 있다는 데 또한 공통점이 있다. 즉, 이들에겐 1+1=2일 뿐이다. 이들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양적사고와 형식논리에 매몰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1=3이거나 4 심지어 100도 될 수 있다. 분업의 예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산한 량과 분업체계 속에서 생산한 량의 차이는 수백 배에 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현상을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나 분업과 달리 그 이상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난 것이 질적 현상일 경우에는 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그 이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전체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그 이상이 구성요소의 결합구조 밖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자유민주주의라고 말들 하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본래 친화적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대립적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주권사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정치형태의 일종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는 공적영역으로 사적영역인 경제와 구분되었다. 정치형태의 일종인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공적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근대 부르주아사회의 산물이다. 상인계급이 성장하면서 나타난 사상이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의 근간은 사적 재산권의 인정이다. 이 사적 재산권을 천부인권으로, 자연권으로 인간사회 이전에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인위적 국가권력이 침해 간섭할 수 없는 신성한 것으로 주장한다. 이런 자연권으로서의 재산권을 국가권력(봉건시대의 종교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투쟁과정에서 종교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전개되었다. 신의 지배를 인간 이성의 지배로 대신하고자 하였다. 이성적 개인은 자본가만을 의미한다. 노동자, 농민, 여성은 비이성적 존재로서 이성적 개인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전 인민의 민주주의, 인민주권과 어울리지 않는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조건은 제한선거제도하에서거나 민주주의가 형식화되어 인민주권이 내용적으로 실현되지 못하는 조건에서뿐이다. 민주주의가 인민주권을 실현하고자 하는 단초만 보이면 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파시즘, 나찌즘으로 돌변하게 된다.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2) 변증법적 총체주의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전체주의)에 대립되는 입장으로 변증법적 총체주의가 있다. 이는 헤겔로부터 발원하여 맑스주의로 지양 발전되어온 사고방식이다. 한마디로 결론부터 말한다면 개인(객체, 부분)=전체라고 보는 사유방식이다. 헤겔이 진리는 전체이다라고 할 때 이 전체는 변증법적 총체성을 말한다. 그리고 맑스가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할 때 이 총체가 바로 변증법적 총체성이다. 헤겔식 용어로 말하면, 구체적 보편성이다. 구체적인 것은 개별, 부분이고 보편성은 전체이다. 헤겔은 국가를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보았고, 맑스는 시민사회(사회구성체)를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보았다.

이런 총체성을 헤겔은 모든 소가 까맣게 보이는 밤으로서의 전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구별을 내포한 전체로 설명했다. 구별을 내포한 전체가 총체성인데 총체적 개체성이라고 하여 개체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개별적인 부분들이 언뜻 보기에 무질서한 집합체로 보이는 현실도 사실은 커다란 질서를 지닌 하나의 것의 우연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 하나의 것(즉 통일성)에 해당되는 것이 총체성이다.

따라서 헤겔에 있어 총체적 개체성은 전체주의자들의 전체가 아니며 개인주의자들의 개인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헤겔에게서 전체주의의 사상적 기원을 찾는 것은 무지이거나 총체성 개념을 공유하는 맑스주의를 공격하기 위한 악선전일 뿐이다.

총체성 개념을 이해하는 핵심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우리는 부분과 전체를 이해하는 잘못된 사고를 위에서 보았다. 부연하면 방법론적으로 부분을 강조하게 되면 환원주의(개인주의)에 빠지고, 전체를 강조하게 되면 신비주의(전체주의)에 빠진다. 헤겔과 맑스의 방법은 부분과 전체의 통일이다. 어떤 한 사물대상은 구성요소들로 분할할 수 있다. 그리고 구성요소들의 결합이 부분을 이루고 부분들의 총결합구조가 전체를 이룬다. 이렇게 구성요소와 결합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사물은 전체, 부분, 개별요소로 분리된다. 반면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사물은 개별요소와 개별요소의 관계, 개별요소와 부분의 관계, 부분과 부분의 관계, 개별요소와 전체의 관계,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총체성 개념은 이런 요소별 구분과 관계적 다양성을 통일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변화를 담지해 내야 한다. 총체성 개념에서 어려운 점은 구조 속에 변화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과 전체가 개별요소와 같아진다는 지점이다.

이를 멱집합을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해 보자.

멱집합이란 어떤 집합의 부분집합을 원소로 하는 집합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집합B={1,2}가 있다고 하자. 집합B의 멱집합은 { { }, {1}, {2}, {1,2} }이다. 공집합 { }의 멱집합은 { { } }이 된다. 여기서 핵심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는 집합이라는 점과 공집합의 멱집합은 원소가 없다가 하나 생성된다는 점이다. 집합B={1,2}는 구성요소가 1과 2 둘뿐이고 전체는 {1,2}이다. 그런데 집합B={1,2}의 멱집합은 구성요소의 변화는 없으면서 관계의 변화만으로 전체{1,2}가 새로운 구성요소가 된다. 여기서 전체가 구성요소가 되고 부분이 되는 사고방식을 잡아낼 수 있다. 이 집합에서 구성요소는 1과 2뿐이며 전체는 {1,2}이며 외부에서 다른 요소가 첨가된 것도 없고 빠진 것도 없다. 그러나 멱집합은 요소의 단순총합 그 이상일 뿐만 아니라 전체가 부분이 된다. {1,2}는 전체이면서 부분인 것이다.

집합B와 멱집합B의 사이에는 구성요소들이 관계하는 결합구조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구성요소의 차이는 없다. 결합구조는 관계이다. 어떤 사물의 본질이나 속성은 그 사물의 구성요소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없고 구성요소의 결합구조 즉 관계를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원자 중심의 실체주의가 아닌 결합구조의 관계 중심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야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멱집합적 사고로 전체를 바라볼 때 어떤 사물대상이 발전하는 결합구조를 변화발전의 상태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어떤 집합에 멱집합을 입히고 다시 그 멱집합에 다시 멱집합을 입히는 구조를 사고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사물 자체의 자기 변화와 확장성을 내재적으로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멱집합의 부분집합의 개수만을 생각해 보자. 공집합은 부분집합이 없다. 공집합에 멱집합을 입히면 부분집합이 하나 생긴다. 다시 거기다 멱집합을 입히면 이제는 부분집합의 개수는 2개가 된다. 다시 여기에 멱집합을 입히면 이제 부분집합의 개수는 3개가 된다. 이렇게 무수히 발전할 수 있다.

이렇게 멱집합의 예를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했듯이 변증법적 총체성은 전체와 부분이 대립되지 않고 통일되어 있으며 부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부분이 된다. 그리고 결합방식의 구조가 고정된 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 변화하는 관계로 실존한다. 그러면서도 모든 관계를 모두 포괄한다. 이것이 전체와 다른 총체성이다. 여기에 총체성을 이루는 관계들이 모순적이고 대립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변증법적 총체성이다.

 

 

3. 자율성과 환원

 

1) 토대와 상부구조

맑스주의 내부의 국가와 관련된 논쟁도 주로 국가의 상대적 독자성(자율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의 내용과 범위,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지배와의 관계, 그리고 국가가 총자본으로 기능하는 메카니즘 등이 논쟁의 주제들이다. 이 문제는 넓게 보면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 문제이며 구조와 주체의 관계 문제와도 연관된다. 국가를 완전히 경제관계에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기계론적 입장과 경제와는 완전히 독립적 별개의 논리로 작용하는 메카니즘을 가진다는 입장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누구나 양극단을 배제하고자 하지만 어느 순간 한 극단에 서 있곤 한다. 이는 토대와 상부구조의 상호관계의 메카니즘에 대한 해명과 규명이 명확하지 않은 데 기인하는 것 같다. 토대와 상부구조의 해명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의존한다.

맑스주의는 사회를 이원구조로 본다. 생산관계인 토대와 이데올로기 관계인 상부구조로 나누어 본다. 이렇게 토대-상부구조의 이원구도로 사회를 분석할 때 장점은 생산관계의 유물론적 기반을 설명하는 데 용이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분야의 독자적 성격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맑스주의가 경제결정론이라는 부당한 비판을 받는 일단의 원인제공도 이러한 이원구조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즉 토대가 상부구조에 대해 갖는 규정성이 강조될 때(이는 맑스주의의 위대한 공헌이다) 경제환원론적 사고가 발생한다. 이런 사고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대방향의 편향이 나타난다. 국가론에서는 국가의 독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런 편향들이 나타나는 지반은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결합구조의 성격이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은 데 있다.

경제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경제(토대)와 국가(상부구조)가 어떤 메카니즘하에서 경제가 토대로 작용하고 국가가 독자성을 갖는가?

어떤 사회적 사건이나 현상은 단순히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 규정되지 않는다. 맑스주의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여러 사회적 요소에 의해 사회적 현상이 규정되는 것을 중층결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심층에 경제가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사고는 사회를 토대-상부구조라는 2중구조에서 다층구조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준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심층은 결국 오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사회를 다층구조로 바라볼 수 있는 맑스주의 발전의 길을 포기하고 만다. 심층의 포기는 결국은 유물론의 포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유물론의 포기는 과학의 포기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회가 구성요소 A, B, C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사회가 심층의 규정성 없이 각각의 요소가 중층적으로 규정한다고 한다면 A는 B, C에 의해 중층결정되고 B는 A, C에 의해 중층결정된다. C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제외한 다른 요소들에 의해 규정된다. A와 B만을 고려한다면 A는 B에 의해 규정되고, B는 A에 의해 규정된다. 이는 상품의 가격은 상품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고 상품의 수요와 공급은 상품의 가격에 의해 결정된다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논리와 같다. 이런 논리는 과학을 다수결이나 취향의 문제 또는 협의의 문제로 만들고 만다. 결국은 힘의 논리가 작용할 것이고 자본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이비 과학으로 귀결될 것이다. 과학적 진리가 붕괴된 곳엔 자본가의 이익만이 남게 된다.

그렇다면 과학이 가능한 조건은 무엇인가? 자연과학의 성공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과학의 결과로 만들어진 생활기반을 부정하면서는 살아갈 수는 없다. 따라서 과학의 성공은 과학의 가능조건을 묻는 전제이다. 즉 과학이 가능한 조건을 질문한다는 것은 과학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를 의문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성공을 전제로 어떤 가능조건하에서 과학이 성공한 것인가를 찾는 질문이다. 바스카4)에 의하면 과학이 가능한 이유는 과학의 대상이 과학을 가능하게 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대상인 자연이 인과적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기에 그 인과관계를 밝히는 과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으로 자연 자체가 위계 구조로 층위 지워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물리-화학-생물학이라는 수직적 학문체계는 자연 자체가 그런 구조로 되어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리학이 화학의 토대가 되고 화학은 생물학의 토대가 되는 구조다.

 

2) 발현이론과 수직적 위계(층위)론

토대로서의 물리와 상부구조로서의 화학은 어떤 메카니즘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이런 상호관계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각 분야의 독자성과 환원문제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물리현상과 화학현상을 구분한다. 화학적 결합이라는 말은 이미 일상용어가 되었다. 토대로 작용하는 물리 법칙으로부터 독자적 법칙을 이루는 것이 화학의 자율성이다. 물리 법칙에 지배를 받는 원자나 입자들이 어떻게 화학적인 다른 법칙을 이루어 내는가? 이 지점에서 창발(emergence) 내지 발현 개념이 대두된다. 이는 복잡계 과학에서 어떤 개체를 그 개체를 구성하는 구성요소로 환원해서 개체의 성격을 규명할 수는 없다는 환원불가능성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H2O(물)를 보자. H와 O의 결합인 H2O는 우리가 잘 아는 물의 화학식이다. H와 O의 결합임에도 불구하고 H2O에는 H와 O의 속성에는 없는 성질이 나타난다. 이렇게 구성요소의 속성에 없는 새로운 성질이 결합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발현이나 창발이라고 한다. 이런 창발성은 개별 물질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과학의 분야에도 나타난다. 물리적 운동에 토대하지만 화학에는 화학의 독자적 운동법칙이 발현된다. 이런 창발성 때문에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생물학도 화학이나 물리학으로 환원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과학철학의 자세한 내용은 바스카의 책을 참고 바란다.

여기서는 바스카의 발현이론과 수직적 위계론을 사회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사회를 크게 세 부분 즉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구분해 보자. 자연과학의 물리, 화학, 생물에 대응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스카의 과학철학에서는 자연과학은 각 분야별로 창발성에 기초하고 보다 더 기초적인 토대학문으로 환원할 수 없다. 그리고 각 분야별 관계는 무작위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위계구조를 갖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런 바스카의 발현이론과 수직적 위계론을 사회에 적용해 보면, 생산이 사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므로 경제가 가장 심층의 토대가 되고 그 위에 제도적 정치가 서고 이런 생산과 제도 위에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진다.

경제-정치-이데올로기 관계는 물리-화학-생물의 관계와 같이 창발적 관계로 환원불가능성이 관철된다.

먼저 경제과 정치 관계를 보자. 정치는 경제의 집약, 집중이라고 할 때 이 집약ㆍ집중의 내용이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의 고유한 영역을 형성한다. 이를테면 경제가 욕망의 체계라면 국가는 공공의 체계이다. 경제가 개별 자본가의 이윤욕구에 기초한다면 국가는 총자본의 입장에 기초하고 나아가 전 사회의 공공성에 기초한 원리가 작동한다. 여기에 국가의 모순적 역할이 부여된다. 국가는 자본주의에서 총자본을 대변하는 계급지배 도구의 역할과 전 사회의 공공성을 보장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것이 국가의 모순이다. 경제가 사적 소유와 사회적 생산의 모순이라면 국가는 국가권력 소유의 계급성과 국가 기능의 공공성(사회성) 간의 모순이다. 경제가 개별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면 국가는 총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총자본은 개별 자본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국방, 외교, 조세, 교육, 치안 등등은 총자본의 요구이면서 동시에 전 사회적 요구를 국가가 담당하는 것이다. 이런 기능은 공공성의 원리가 적용된다. 따라서 국가의 계급성은 폐지되어야 하고 국가의 공공성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된다. 경제에서 사적 소유가 폐지되면 생산의 사회성이 강화되듯이 국가의 계급성이 폐지되면 국가의 공공성이 강화되는 것이다.

국가의 또 다른 속성은 사람을 지배하는 속성이다. 생산관계는 동등한 개인 간의 평등한 계약 관계이다. 그러나 권력관계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지배-피지배의 관계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계급은 다른 계급을 지배한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다. 지배집단(개인, 계급)은 다른 사람들, 계급, 계층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한다. 지배자의 의사에 맞게 사회에서 차지하는 각자의 지위와 역할을 강제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국가권력의 핵심에 무장력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기존의 무장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무장력을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권력을 새로 장악한 계급은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는 무력(폭력)을 이용해 기존의 생산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정치권력이 갖는 경제권력에 가하는 반작용이며 능동적 역할이다. 새나 비행기가 양력을 이용해 중력을 극복하고 날 수 있듯이 인간은 국가권력을 이용해 경제법칙이 관철되는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3) 사회의 2중 구조와 3층 구조

이제 정치와 이데올로기 부분을 보자. 정치는 그 핵심에 국가무력이 있다. 무장력은 물질적 성격을 갖는다. 무장력이 경제적 토대의 파생적 성격인 것은 맞지만 이데올로기적 성격인지는 의심스럽다. 따라서 상부구조를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의 총체라고 규정하고 사회제도와 이념을 포함시킨다면5), 제도(특히 무장력)의 물질적 성격을 간과할 수 있다. 무장력이나 제도 등은 사람의 의식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성격을 띠고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를 이데올로기적 관계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회적 견해의 체계인 이데올로기와 별도로 정치적 제도적 권력관계를 따로 분리해 독자적 운동원리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정치 분야로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토대-상부구조라는 이중구조의 분석틀에 경제-정치-이데올로기라는 3층 구조의 분석틀을 보충할 필요가 있겠다. 경제는 생산관계가, 정치는 권력관계가, 이데올로기는 세계관(계급의식)이 핵심이다.

국가제도나 권력관계가 어떻게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고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지 푸코가 잘 보여준다. 전(前)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폭력이 직접적 의례행위가 되어 화려한 폭력을 보여 주는 방식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반면에 자본주의에서는 징병제 등을 통해 무장력이 형식적으로 민주화되고 화기의 발달로 일부 집단이 무장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즉, 검술 등은 많은 훈련과 전문적 기술이 필요하지만 소총을 다루는 데는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국가권력이 폭력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체제가 확립된다. 이 국가폭력은 외적에 대항하거나 질서유지라는 외피를 쓴다. 즉 폭력의 대상에서 소위 국민이 배제되는 형식을 취한다. 계급지배 방식에서 일상적이고 직접적 폭력은 약화되고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방식이 강화된다. 이런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계급지배 방식을 푸코는 훈육이라고 했다.

푸코는 원형감옥(panopticon)의 예를 들어 권력관계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메카니즘을 설명한다. 원형감옥은 감시자가 은폐된 곳에서 수감자를 감시하는 형태이다. 이 원형감옥의 효과는 감시자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감시자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내면화한다. 규율은 내면화되어 결국 감시자가 없어도 규율적 행동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규율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이 노리는 효과도 이와 같다. 북의 실질적 위협이 줄어들어도 아니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아도 국가보안법이 유지되는 이유이다. 보안법에 고초를 겪어본 사람이나 주변에 그런 사람을 본 사람들은(우리는 주기적으로 공안 사건을 접한다) 내면적으로 자기검열을 수행하게 된다. 자기검열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사고 자체를 제한한다. 진보적 의제를 표현하고자 할 때 종북주의자라고 비난받지 않을까? 국가보안법에 걸리지나 않을까? 하는 심리적 압박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받게 된다. 이런 압박은 한 사람의 사고 형성을 제약한다. 따라서 진보적이고 의식적인 사람일지라도 무의식적으로 반북이데올로기에 친화력을 갖게 된다. 이는 개인의 자기보존 욕구에 기반하고 있기에 매우 막강한 이데올로기 장치의 역할을 한다.

이렇듯 경제와 정치 즉 생산과 폭력이 분리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갖는 사회적 역할이 더욱 강화된다. 현대의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데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과거보다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도 그 자체의 작동원리를 경제, 정치와 분리하여 분석할 필요가 생긴다.

이제 이데올로기의 능동성 다시 말해 경제와 정치에 미치는 반작용 메카니즘에 대해서 살펴보자. 자연에서는 상층위가 하층위에 반작용하는 방식이 하층위의 작용조건을 제한하는 방식이거나 길항작용을 부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어떤 물리적 법칙이 원자들이 작용하는 조건, 예를 들면 일정 온도나 압력 등에서 작동한다고 한다면 이런 온도나 압력 등에 제한을 가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토대층위의 작용조건을 상위층위의 작용을 통해 제약 변화시켜 반작용을 가할 뿐 아니라 구성요소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도 반작용을 미친다.

자연에서는 발현적 현상이 일어나면 새로운 객체가 형성되면서 그 발현된 객체의 구성요소의 특성은 사상된다. 위에서 든 예 H2O를 보면 H와O의 특성은 무시되거나 사상된다. 그러나 사회는 다르다. 사회의 구성요소는 사람이다. 사람은 개인으로 가족, 계급, 사회, 국가 등의 새로운 객체의 구성요소로 기능한다. 하지만 개인의 개별적 고유한 특성이 무시되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즉 개인적 고유한 특성이 남아 있으면서 그리고 그러한 특성이 작용하면서 새로운 객체를 발현시킨다. 이것이 자연의 요소 결합과 사회의 요소 결합의 결정적 차이이다.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사회에서는 층위 간 규정과 반작용에 있어서 자연에서와 같은 조건변화라는 외적 방식 외에 구성요소 자체의 변화라는 다른 차원의 작용방식이 부가된다.

이는 사회 각 층위의 공통적 구성요소인 사람의 유연성과 적응성에 기반한다. 자연의 구성요소인 원자나 소립자 등은 자신의 속성을 변화시키면 그 자체로 존립이 손상된다. 즉 속성은 곧 존재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관이나 가치관, 행동규범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의 각 층위의 작용은 개인적, 집단적 인간의 구체적 세계관 등을 변화시킴으로써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인간의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생각이나 행동은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형성된다. 사람은 세계관이 바뀌면 사회적 행동도 달라진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세계관, 가치관, 행동규범 등을 형성한다.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는 사람은 없다. 현존하는 경제나 정치적 토대를 기반해서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산과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다양한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입된다. 그리고 대개는 그것을 내면화하게 된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현재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각 계급 계층의 염원과 요구를 반영해서 이를 통과해서 형성된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처지에서 자신의 염원과 요구를 반영해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이제 개인도 계급도 그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목적의식적으로 계급투쟁에 나서게 된다. 이렇게 이데올로기는 정치경제에 반작용을 가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행동규범이고, 사람은 행동규범이 어떤 계기를 통해 변할 때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행동규범으로 기능하면서 정치경제에 반작용을 미치는 것이다.

 

경제는 가장 심층으로 사회를 지탱하는 물질적 기초를 이룬다. 정치는 경제에 기반하여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사회적 지배를 행한다. 이데올로기는 지배질서를 사람들의 행동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그러나 경제가 그 자체의 모순을 안고 있듯이 정치도 이데올로기도 모순을 안고 있다. 경제적 모순이 첨예화되어도 정치적 모순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정치적 모순이 먼저 폭발하면서 경제적 모순이 첨예화될 수도 있다. 경제가 가장 심층에서 작용한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정치와 이데올로기 층위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세 영역의 상호관계에 대한 보다 실증적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세 영역은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위계를 갖는다. 이 점을 전제로 할 필요가 있다.

 

 

4.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변증법적 총체성과 발현이론, 사회과학의 수직적 층위론을 살펴보았다. 이는 국가론의 배경이론으로 생각해 본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논쟁점이 없지 않다. 논쟁점은 아무래도 사회를 보는 관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단 토대-상부구조에 대해 경제-정치-이데올로기를 대비시킨 것부터가 전통 맑스주의 입장에서 볼 때 발칙할 수 있겠다. 그리고 국가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국가 소멸론을 부정하는 견해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명시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로 오직 사람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 점도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외에 토대-상부구조를 논의하면서 생산력에 대한 언급이 없던 것도 아쉽다. 차후에 논의할 기회가 있길 바란다.  [노/사/과/연]

 

 


 

1) “아시아에는 일반적으로 태고 이래 세 개의 정부 부문밖에 없었다: 재정 부문, 즉 국내 약탈 부문; 전쟁 부문, 즉 국외 약탈 부문; 마지막으로 공공 사업 부문”(K. 맑스, “영국의 인도 지배”,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제2권, 박종철출판사, p. 413.)

2) 최미향, ≪Renato Cristi의 Carl Schmitt 해석 ― 권위주의적 자유주의≫, 인하대학교 대학원(석사논문), 2003 참조.

3)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개정신판, 돌베개, 2017, p. 280.

4) 로이 바스카는 영국의 비판적 실재론자이다. 저서로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이기홍 역, 후마니타스, 2007)이 있다.

5) ≪철학대사전≫, 동녘, p. 658.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1개의 댓글

  • 글에서 소개한 창발 개념은 변유에도 있음 … 용어만 다를뿐 … 어쨌든 ‘환원불가능성’을 언급한 건 맞는데 되려 왜 환원 불가능한지 서술했으면 더 좋았을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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