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 달의 역사] 국가보안법의 역사

오해영 | 회원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4개월도 안 된 1948년 12월 1일 공포・시행되었다. 1948년 11월 발생한 여순 항쟁을 계기로 남한의 좌익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서둘러 제헌의회에서 제정한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모체로 구성되었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반공산주의, 반민중적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이후 정권의 독재정치로 국가보안법은 확대, 강화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국가보안법의 모체, 일제 강점기 치안유지법

치안유지법은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의 혼란을 막기 위해 공포된 긴급칙령이 전신이다. 일본제국은 치안유지법을 1925년 4월 12일 공포하고, 5월 12일 시행한다. 일본제국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활발해진 일본 내 공산주의운동을 억압하려고 했던 목적으로 치안유지법을 만든다. 이 법은 공산주의 금지의 목적 외에도 사회주의나 노동운동 역시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고 당과 노동조합의 많은 활동가들을 탄압한다.

 

일제가 독립운동을 처벌하는 데 이용하였던 법으로는 보안법, 집회취재령, 제령 제7호, 치안유지법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단순히 집회 등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단체 조직 등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이러한 법률을 제정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움직임이 있던 당시에, 일본에서 1925년 사회주의 운동을 억압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상통제법으로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법을 이용해서 해방 전까지 거의 대부분의 독립운동 관련자들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처벌했다.

 

국가보안법 제정에서 제4차 개정(1948년 12월부터1961년 5월까지) 시기

1) 제정부터 한국전쟁 전까지의 기간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어 1949년 12월 19일에는 제1차 개정이, 1950년 4월 21일에는 제2차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국가보안법의 제정과 개정은 ‘남조선노동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의 제거를 그 목적으로 하였다. 미군정에 이어 1948년 8월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제주도 4・3항쟁이 일어났으며, 다시 이 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순천지구 주둔 제14연대와 그 인근 주민들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남로당과 그 외곽조직은 이를 주도하거나 적극 가담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생정부는 내란행위자와 남로당원을 단속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형법이 제정되기 5년 전이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 사건과 적용자수가 폭주함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법의 개정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제정 국가보안법은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 중 수괴와 간부에 대하여 무기,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의 벌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개정 국가보안법은 수괴, 간부는 물론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까지 사형이 가능하도록 ‘법정최고형을 상향조정’하고 그 적용범위를 확대(제1조)하였다. 또 제정 국가보안법은 특별히 심급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반 형사소송법에 따른 3심제가 보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개정 국가보안법은 이 법에 규정한 죄에 관한 사건의 심판은 단심으로 하고 지방법원 또는 지원의 합의부에서 행한다(제11조)고 하여 ‘3심제에서 단심제로’ 축소하였다. 그리고 개정법에 사상전향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에 대하여 선고유예와 동시에 ‘보도구금’(사상전향공작을 하는 보도소에 구금하는 것)에 처할 수 있도록 한 규정(제12조 내지 제18조)을 신설하였다. 이 개정법은 실제로 시행되기도 전에 국내외의 여론 때문에 재개정되었으나 심급제 부분을 제외하고는 개악내용이 모두 이후 개정법이나 유관 특별법에 살아남았다. 특히 보도구금제는 이후에 법원의 재판을 배제한 사회안전법으로 독립・발전한다. 이러한 개정 중에서 특히 보도구금제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통계가 있다. 사상전향되었다고 판단하여 석방한 사람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던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수는 1950년 초반에 30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후퇴하는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한국전쟁에서 4.19 이전까지의 기간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전선의 확대와 반복된 이동은 이른바 ‘부역자’를 양산했다. 부역자는 일반법인 형법과 국가보안법에 의해서도 처벌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시하에서 더욱 엄중한 형을 보다 간단한 절차를 거쳐 선고할 수 있는 특별법으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 1950년 6월 25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 이어 같은 해 10월 4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발족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자수한 자와 검거된 자를 포함하여 당국이 인지한 총부역자수는 550,915명으로 집계했다. 이 가운데 자수자는 397,090명, 검거자는 153,825명이었다. 또한 위 인원 속에 북한군 1,448명, 중공군 28명, 유격대 9,979명, 노동당원 7,661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바 서울수복 직후인 1950년 11월 25일 현재 867명의 사형선고자가 집계될 정도였다.

 

국가보안법은 일반 민중을 향해 ‘부역자’라는 딱지를 붙여 처벌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적’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탄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국제공산당사건’과 ‘전국혁신지도위원회사건’ 등이 그 대표 사례이다. 피난 수도 부산에서 외부의 전쟁을 치르는 일보다 정권유지를 위한 내부의 전쟁에 더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휴전 후, 이승만은 1954년 4사5입 개헌으로 연임의 길을 열었으나 1956년 대선에서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선전하여 보수정권을 위협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8년 진보당사건이 발생하였다. 진보당의 조봉암,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등 10여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검거되고, 조봉암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59년 7월 31일 사형집행을 당했다.

 

그러나 그 후 정치적으로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언론의 부정선거 폭로 등에 힘입어 야당이 선전하고, 경제적으로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삭감되어 실업이 증가하는 등 계속 정권의 안보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의 개악으로 이 위기를 넘기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술경관을 동원하여 야당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파동(2.4파동)을 통하여 처리한 국가보안법 제3차 개정(1958년 12월 24일)이다. 이 제3차 개정법, 특히 제17조 제5항의 인심혹란죄는 주로 언론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귀를 틀어막는 데 사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59년 경향신문의 폐간이었다. 경향신문은 이미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라는 사설과 “여적”이라는 칼럼 등으로 정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은 1945년 4월 5일자의 “간첩 하모 체포”라는 기사를 문제삼고 나왔다. 이 기사가 미리 발표되는 바람에 체포된 간첩과 접선하려던 또 다른 간첩을 놓쳤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향신문은 폐간조치되고 이 기사를 취재한 어임영, 정달선 기자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으며 오소백 사회부장, 이관구 주필은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외에도 ‘막걸리 보안법’ 사건은 부지기수로 발견된다. 대법원은 술을 마시면서 대통령에게 욕설을 하다가 국가보안법상의 헌법기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선우만혁 피고에게 원심을 파기하고 형법만을 적용하여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례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제3차 개정을 통과시키면서 이승만 정권은 야당과 국민의 반대를 꺾는 데 지나친 강압과 물리력을 행사함으로써 오히려 민심의 이반을 가속화시키고 ‘자신의 무덤’을 파는 꼴이 되고 말았다. 또한 부담 때문에 국가보안법이라는 무기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종말을 맞았던 것이다.

 

3) 제2공화국의 국가보안법 적용사

4・19혁명의 결과로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차지하게 된 민주당 정권은 형식적이나마 자유당 독재정권을 청산하는 작업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1960년 6월 10일 ‘독이빨’이 많이 빠진 국가보안법이 탄생(제4차 개정)하였다. 그러나 이조차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 이전에도 없던 ‘불고지죄’를 신설함으로써 ‘한술 더 뜬’ 측면도 있다. 새로운 국가보안법의 탄생과 시대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제2공화국 하에서는 국가보안법의 적용이 자제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새로 삽입된 불고지죄와 관련하여 파문을 던지는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옥신 부장검사 사건’1)과 ‘오화섭 교수 사건’2)은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사례이다.

 

나아가 민주당 정권은 국가보안법 외에 반공법을 새로이 제정하려고 시도하였다. “구법 제17조 이적선전조항, 제19조 은거조항, 제21조 편의제공조항 등의 폐지로 면소, 무죄, 공소기각판결과 불기소사건이 빈발”하자, 1961년에 민주당정권은 ‘반공임시특례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통과시키려 시도하나 무산된다.

 

반공법 제정 및 제5차 개정(1961년 5월부터 1980년 12월까지) 시기

1) 5・16군정의 국가보안법 적용상황

5・16 군사쿠데타 직후에 쿠데타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5・16군사혁명 이전 또는 이후에 반국가적 반민족적 부정행위 또는 반혁명행위를 처벌한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1961년 6월 22일 제정되었다. 이 법률 조항 가운데 제6조 ‘특수반국가행위’ 조항은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이 조항을 통해 ‘특수반국가행위’죄가 국가보안법의 특별법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제3공화국과 유신치하의 적용상황

5・16 군사쿠데타에 의한 군정을 거치면서 1961년 7월 3일 반공법이, 같은 해 6월 10일에 중앙정보부법이 제정되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은 3공의 모든 기간을 통해 꾸준하게 적용되었으며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억압하는 데 반공과 안보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적용 통계를 통해 우리는 정권의 정치적 위기가 가중될수록 적용횟수가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6차 개정(반공법 흡수・통합, 1981년부터 1991년 5월까지)

1) 제5공화국의 국가보안법 적용사

1980년대에는 민중의 의식화・조직화・이론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이전의 시기에는 국가보안법이 집중적으로 적용될 조직적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분산적 우발적으로 적용됐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반민주적 반민중적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조직적 실체는 확고한 의식과 이론적 뒷받침 위에 부각되고 있었다. 정권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언제든지 국가보안법의 ‘먹이’는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객관적 상황과 더불어 국가보안법 사건의 폭주를 가져온 또 하나의 요인은 바로 제5공화국의 전두환 정권 그 자신의 성격이었다. 유신체제의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의 민주화 갈망을 꺾고 ‘광주항쟁’의 유혈사태까지 일으킨 제5공화국정권에게는 어떠한 법적 도덕적 정통성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와 같은 정통성 없는 정권에 대하여 광범하게 저항운동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고 뻔한 사실이었고 이에 대한 방책이란 권위주의적 제도를 통한 탄압일 뿐이었다. 그 가운데 국가보안법은 저항세력에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고단위의 처방인 셈이었다. 이처럼 주관적, 객관적 상황이 제5공화국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의 양산을 가져오게 하였고 제5공화국으로 하여금 ‘국가보안법의 시대’라는 별명을 얻게 하였던 것이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의 5공화국 동안에 국가보안법으로 입건된 사건의 죄목별 통계를 보면, 찬양・고무죄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반국가단체 구성・가입죄는 정권성립기인 1981년과 정권의 최대 위기국면인 1986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가 극히 억압받는 상황과 동시에 정권의 성립과 유지에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희생양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재판에 기소된 사람은 1981년부터 1987년 사이에 총 1,512명으로 집계되었고 그 가운데 13명이 사형, 28명이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운용이 잔혹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5공화국 동안에 국가보안법은 초기에 애용되다가 잠시 수그러진 다음, 다시 1985년부터 다시 대폭적으로 증가하여 계속 늘어났다 1984년과 1987년을 비교하면 국가보안법의 적용숫자는 거의 5배에 이르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국가보안법의 적용상황이 정치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1980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여왔던 반체제세력은 민주적 정부를 수립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5.17 군사쿠데타 이후 가혹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 운동의 조직적 기반은 무너졌고 다수의 인원이 감옥으로 가야했다. 1981년도의 국가보안법 구속자 숫자는 바로 1980년 민주화운동세력의 민주정부수립활동에 대한 보복적 적용을 의미하고 있다. 이후 1982년과 1983년의 소강상태는 바로 이와 같은 활동붕괴에 따른 침체국면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1984년의 학원자율화조치 이후 학원의 동요와 김영삼의 단식을 계기로 한 재야정치활동,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의 결성 등 시국의 긴장상태가 계속 조성되면서 국가보안법의 적용빈도가 높아져 갔다. 1985년에는 ≪민중교육≫지 사건, 민추위 사건 등 조직사건도 잇달아 본격적인 국가보안법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서노련 사건, 삼민투위사건 등을 비롯하여 정권과 민족민주운동세력 사이의 대공방전이 1987년 6월항쟁까지 이어지면서 국가보안법의 남용이 극에 달하였다.

 

국가보안법의 기세가 되살아난 1984년 7월부터 1987년 6월까지의 3년 사이에 1,025명이 국가보안법으로 입건되었는데 이 가운데 70.8%에 해당하는 726명이 구속 기소되었으며 50명이 불구속기소, 30명이 약식 기소되어 78.6%의 기소율을 보였다. 한편 12.6%에 해당하는 129명이 기소유예처리 되었다. 이것은 3년 동안 매일 0.7건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이 발생하여 0.9명씩 입건된 셈으로 그동안 격렬했던 탄압과 저항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2) 제5공화국 시기에서 국가보안법 적용의 특징

이 시기에 국가보안법 적용양상이 지닌 특징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저항운동의 이론화는 운동론을 둘러싼 사상과 노선상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와 같은 운동론이 국가보안법의 가장 좋은 표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학생운동에 있어서 ‘무림・학림 논쟁’, ‘CMP논쟁’, ‘자민투와 민민투’, ‘NL과 CA’ 등 무수한 논쟁과 노선의 갈등이 있었으며 그때마다 그것은 조직사건으로 엮어졌다. 노동운동에서도 1980년대 초의 ‘준비론과 투쟁론’에서부터 ‘경제주의・조합주의 논쟁’, ‘NL과 CA 논쟁’이 이어졌다. 이 기간부터 수없이 벌어졌던 ‘운동론’과 논쟁들은 바로 현재 사회를 바라보는 입장과 개혁의 전망을 조망하는 관점의 차이에서 나왔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사회변혁의 이념과 과학적 전망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둘째, 저항운동의 조직화는 그만큼 ‘조직사건’을 많이 만들어냈다.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 구성죄’가 적용되는 이와 같은 종류의 사건은 제5공화국에 들어서 그 이전의 어떠한 시기보다 대폭 늘어났다. 이것은 실제 소모임이나 서클 수준의 모임을 과장하여 적용하거나 왜곡・조작하는 수사기관의 관행 때문에 더욱 그 수가 늘어났던 것이다.

 

셋째, 국가보안법이 정치적으로 악용됐다. 그로 인해 진정한 국가안보보다는 정치적 보복 또는 탄압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향이 높아졌다.

 

넷째, 위와 같은 국가보안법의 정치적 남용은 국가보안법을 가장 중요한 ‘정권안보법’의 자리로 올려놓았고, 그 구속자 역시 다른 어떤 규제법에 의한 것보다 많은 양상을 보였다.

 

다섯째, 위와 같은 국가보안법의 정치적 남용의 결과 시국관련 학생과 일반시민에게 무차별적으로 국가보안법이 적용됐다. 그만큼 국가보안법의 위화력이 감소하였다. 이것은 형량의 상대적 경감현상으로 나타났다. 즉 전반적으로 형사 사건 전체의 집행유예비율보다는 월등히 낮은 수준이나 1심의 국가보안법 집행유예비율이 점점 더 증가해온 것이다.

 

3) 제6공화국의 국가보안법 적용사

제6공화국은 제5공화국의 시신을 딛고선 정권이다. 비록 ‘6・29선언’이라는 곡예를 통해 헌정의 단절을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국민적 저항권에 의해 분명 제5공화국의 악정을 단절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른바 ‘5공 청산’의 시대적 요구가 제6공화국의 어깨 위에 지워진 가장 무겁고 절박한 짐이었다. 그 가운데 5공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인권문제에 대한 확고한 개선이야말로 ‘5공 청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인권의 개선을 이루는 데에는 5공의 악정을 가능하게 했던 악법의 철폐, 그 악법 하에 생겨난 희생자들의 석방과 보상, 인권억압기구의 철폐, 그리고 인권의 유린에 가담하였던 수많은 수사기관, 재판기구의 담당자들에 대한 처벌 등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구속된 양심수의 선별적 석방, 국회 내 ‘민주발전 법률개폐특별위원회’ 구성 등 인권개선의 시늉만 보였을 뿐 시간이 갈수록 인권문제는 제6공화국의 관심사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나아가 ‘5공 청산’ 기피에 대한 국민적 저항,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악법과 인권억압기구, 그리고 이를 운영하는 수사관과 재판 담당자들이 전면적으로 부활하였다. 국가보안법은 이와 같은 제6공화국 인권문제의 핵심이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제6공화국 초기에는 개폐의 논란 때문에 적용이 자제되었지만,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이후 이른바 공안정국 속에서 완전히 복권되었다. 국가보안법의 적용숫자는 5공보다 훨씬 증가하였고 양심수의 구속 근거법률 가운데에서도 그 비중이 높아졌다. ‘국가보안법의 시대’라는 제5공화국의 닉네임은 제6공화국으로 당연히 넘겨주어야 마땅하게 되었다.

 

4) 제6공화국 시기에서 국가보안법 적용의 특징

첫째, 제6공화국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자수는 양심수에게 적용된 다른 죄명에 비추어 볼 때 그 비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둘째, 국가보안법이 무차별 적용된다. 수많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구속되었으며, 특히 노동자, 출판인, 화가, 교사 등이 상대적으로 더 심한 탄압을 받았다. 셋째, 국가보안법의 적용조문별 숫자를 볼 때 이적표현물 제작・반포 등과 찬양・고무・동조가 전체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쓸데없이 구속을 위한 구속을 벌이고 있거나 조직사건을 만드는 데 수사기관이 혈안이 되어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한 수사기관과 재판부의 처리태도와 관행은 거의 달라진 바 없다. 수사기관에서의 가혹행위는 여러 가지 형태로 잔존하였으며, 안기부의 수사주도권도 계속 유지되었다. 사법부의 국가보안법에 관한 구속영장 기각률과 무죄비율은 지극히 저조하였다.

 

7차 개정 이후(1991년 5월부터)

1) 김영삼 정권 초기

소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상반기에는 이전에 비하여 국가보안법의 적용으로 인신을 구속하는 사례가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하반기부터 공안당국에 의한 인신구속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점차 과거 군사정권의 행태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남한사회주의과학원 사건, 새벽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사건 등)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서 문민정부 발족 이후 상대적으로 입지가 축소된 공안당국의 자리보전을 위한 남용의 경향마저 띠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2) 공안 정국의 조성

한편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한 후 사회 일각에서는 김주석에 대한 조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부영 의원은 7월 11일 개최된 임시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김정일 후계체제의 안정이 앞으로 한반도의 대화와 협상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러한 바탕에서 정상회담이 개최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경우”와 “북한 권력층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주민들의 심리적 상태를 고려해서 우리 국민들 일각의 양해가 성립된다면”이라는 두 가지 전제 아래 “우리 쪽에서 조문단을 파견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할 뜻이 없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대부분의 언론들은 마치 조문론=추모론 이라는 등식과 함께 조문론자들을 김주석 흠모론자들처럼 간주하며 여권 및 보수파들과 함께 소모적인 사상논쟁을 부채질했다. 이후 정부는 조문행위에 대한 강력한 형사처벌 방침을 발표하였다.

 

이런 가운데 서강대학교 박홍 총장은 7월 18일 난데없이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과 사로청이 있고,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며 학생들을 매도하자, 각 언론들은 마치 숨겨진 진실이라도 폭로된 양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주사파야말로 반국가세력이라는 인식이 강화되어 온 시점에서 김일성 사망이후 애도문제를 둘러싸고 박총장 발언이 나온 것은 시대적 요구의 한 표현 ”(동아일보 1994년 7월 22일 사설)이라고 하는 등 이를 치켜세우기에 나섰다. 이러한 보도들은 이를 빌미로 정부가 학생 및 재야단체들을 탄압할 수 있도록 여론을 몰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매카시즘 선풍, 마녀사냥 등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신공안정국(김일성 주석 사망 조문 관련 구속 사건, 범민련 사건, 각종 조직 사건 등)이 형성되었다.

 

3) 김영삼 정권 말기

1996년 4・11 총선을 앞두고 새해 초부터 각종 국가보안법 관련 조직사건으로 구속되는 사례(애국동맹사건, 노나매기 사건 등)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한편 4・11 총선 이후 당국은 국무총리, 경찰청장 등이 잇달아 치안관계 대책회의를 열어 “불법시위 엄단”, “좌익세력 척결” 등을 내세우며 공안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후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무차별적 인신구속이 더욱 심하게 행해졌다. 그리하여 4・11 총선 이후 7월 11일까지 무려 12건의 조직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구속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과거 활동을 문제삼은 사건들이었다. 예컨대 애국동맹사건(1992), 해방노동자 통일전선사건(1991), 사노맹사건(1992), 학생활동가 조직사건(1992) 등이 그 사례이다. 이들 대부분은 3∼4년 전 조직원들이 대거 구속되어 조직이 완전 와해된 상태였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구속된 사람의 숫자는 무려 46명에 달하고, 그 대부분은 직장인, 군인, 가정주부 등이었다.

 

김영삼 정권 말기, 국가보안법으로 탄압한 대표적 사례가 한총련 사건이다. 1996년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연세대에서 범민련의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의 통일대축전행사가 개최되는 과정에서 경찰의 무리한 진압과 행사 후 연세대에 대한 봉쇄로 인하여 학생과 경찰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5,899명이 연행되고 그 중 465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범민족대회, 범청학련 통일대축전행사는 그 동안 6차에 걸쳐서 진행했지만, 1996년에는 공안당국이 4・11 총선이후 계속되는 공안탄압 분위기에 편승하여 초강경진압하면서 사상최대의 구속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되었다. 한편 구속된 학생들 중 대부분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화염병 사용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상당수 학생회 간부들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 가입, 찬양고무, 이적표현물 소지 등의 혐의가 추가되었다. 다만 국가보안법이 적용된 학생회 간부들 중 대부분은 그 혐의내용이 학생회 간부로서 한총련, 서총련 등의 공식적인 회의에 참석하였거나, 이때 받은 유인물 등을 단순히 학생회 사무실 등에 보관하였다는 것이었다.

 

1997년은 역사상 가장 가혹하게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이 가해졌고 특히 한총련 불탈퇴 대의원에 대한 대규모의 검거 작전이 시작된다. 각 학교 총학생회장, 단대 학생회장의 검거와 수배뿐 아니라 각종 조직 사건으로 학생들을 구속했다. 그 사례는 너무 많아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4) 김영삼 정권에서의 적용의 특징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보안법의 남용으로 의한 대량구속은 소위 문민정부에서도 항상 존재했던 일로서, 그 남용의 폐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보안법의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며, 그 남용이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인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 등을 본질적으로 침해하고 있다.

 

둘째, 반정부적인 인사, 진보적인 학자 또는 예술가, 민간 통일운동을 전개하는 인사, 학생활동가 등에 대하여 공안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인신구속을 행할 수 있으며, 특히 그 폐해는 사건을 조작하는 경우에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한편 이에 대하여 견제를 하여야 하는 법원 또한 몇몇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면 효과적인 제동을 걸지 못하고 있다.

 

셋째, 국가보안법에 의한 대량구속 시점이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선거를 앞둔 시점에 있어서 각종 조직사건이 터지고 이에 따른 대량구속사태가 일어난다는 점(예컨대 1995. 6. 27.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둔 시점과 1996. 4. 11.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수많은 조직사건이 발생)과 정부가 수세국면에 몰렸을 때에 이에 대응하여 각종 공안사건이 터진다는 점(예컨대 노태우 비자금사건이 터졌을 때 부여간첩사건이 발생하고, 범민련 관련자에 대한 대량구속등이 행해짐)이다. 특히 이는 이미 활동을 하지 않고 학업이나, 군복무, 생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과거행적을 문제삼아 인신구속을 자행한다는 점에서도 큰 문제를 띠고 있다.

 

넷째, 국가보안법 피의자에 대한 고문 등 가혹행위가 엄존하며, 변호인의 접견권을 침해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다섯째, 피의자에 대한 불필요한 장기간 구속이 행해지고 있다. 일반 피의자의 경우 구속기간이 최장 경찰 10일 검찰 20일인데 반해 국가보안법 피의자의 경우 경찰 20일, 검찰 30일로 되어있으며, 대개의 경우 구속만기를 채우고 기소하는 경향을 띠고 있어 피의자에 대한 부당한 장기간의 구속이 행해지고 있다.

 

여섯째, 이적표현물 조항의 남용이다. 사실 집에 사회과학서적 몇 권 정도를 소지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터인데, 일단 공안당국이 이적표현물소지가 아닌 혐의로 인신구속을 행하고 수사를 하였으나 수사결과 그 혐의사실이 입증되지 않는 경우에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적표현물 조항을 걸어 피의자를 기소한다는 점이다.<노/사/과/연>

 

1) 부산지검 정보부(현재의 공안부) 한옥신 부장검사가 “북한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대한민국의 정계인들을 포섭하고 재정적 토대를 쌓으라는 밀령을 받고 남하한 간첩 김종섭과 만났다”는 혐의로 대검 정보담당 검사에게 소환을 받아 조사를 받았다. 이종사촌간인 김종섭은 한부장검사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음에도 한부장검사는 스스로 조사에 착수하거나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혐의였다.

2) 연세대 오화섭 교수는 매부인 대남간첩 정연철이 1960년 10월 24일 내방하여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임을 받고 왔다면서 포섭하려 하자 “내집을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말하여 쫓아냈을 뿐 이를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서울지검에 구속되었다. 이후 이 사건은 1심에서 선고유예를 받고 항소, 고등법원에서 무죄, 다시 대법원에서 선고유예를 통하여 불고지죄의 문제점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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