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배후(9)

 

로저 키란(Roger Keeran)과 토마스 케니(Thomas Kenny)

번역: 편집부

[차례]

서문

1. 서론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3. 제2 경제

4. 약속과 예언, 1985-86

5. 전환점, 1987-88

6. 위기와 붕괴

7. 결론과 암시

8.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

후주

  

5. 전환점, 1987 ‒ 88(1)

중앙 정부의 약화 내지 붕괴는 이견의 여지없이 위기의 주된 원인이었다.  엘먼과 콘토로비치(Ellman and Kontorovich)1)

 

1987년 어느 시점에, 나는 폭력과 공포에 기반한 사회는 개혁할 수 없다는 것과 이념적 경제적 정치적 뿌리와 함께 사회 경제 시스템 전체를 해체하는 중대한 역사적 과제에 직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렉산더 야코블레프(Alexander Yakovlev)2)

 

동지 여러분,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민족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3)

 

그(부하린)과 같은 인물의 영향력을 사실로서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흐루시초프 시대보다 더 강한 오늘날의 정치적 제약 때문이든 혹은 그러한 연관성에 대한 제대로 알지 못하는 논쟁자들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훈련 부족 때문이든, 1928-9년에 있었던 부하린의 반쓰딸린주의적 프로그램 중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가 현재 개혁가들에 의해 채택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과거 관행을 비판하는 표현에서조차 얼마나 많이 부하린의 비평과 훈계를 따랐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 현재 상황에서 분명한 문제는 더 이상 농촌국가를 공업화 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공업화된 거인을 운영하는 방법이다. 1960년대와 70년대 환경은 1920년대와 아주 다르다. 당연히 현재의 논쟁은 전통적으로 신경제정책(NEP)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제기한 것 이상의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두 시기에 사용된 실제 주장은 놀랍도록 일치한다.  모세 르윈(Moshe Lewin)4)

 

페레스트로이카의 전환점이 되는 1987년과 1988년에, 쏘련공산당(CPSU)의 고르바초프 지도부는 1985-86년의 개혁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가속화하고 “보수적 저항”을 극복한다는 미명하에, 고르바초프와 그의 고문들은 1987년 1월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Central Committee Plenum)와 1988년 6월의 제9차 당대회(Nineteenth Party Conference)에서 새로운 노선을 채택했다. 이러한 새로운 정책들은 어김없이 공산당의 지도력, 국가 자산, 계획 경제과 같은 쏘련 사회주의의 근간을 뿌리 채 흔들었고, 다민족 연방 국가로서의 통일성을 산산조각 냈다. 그 전환점은 분리된 불연속적 순간이 아니었다. 1987년 1월에서 1988년 6월 사이의 18개월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의 “급진적 정치 개혁”과 “급진적 경제 개혁” 정책은 페레스트로이카를 가능성 있는 건설적 프로그램에서 그 반대인 사회주의 쏘련을 무너뜨리는 파괴 공작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정책들은 시장에 유리하게 중앙집권적인 계획을 약화시키고 해체하였으며, 재산의 사적 소유를 장려하고, 국제적 연대를 포기하였다. 모든 것의 중심에는 당의 약화가 있었다. 미국 역사학자, 로버트 V. 다니엘스(Robert V. Daniels)의 말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정치 중앙에서 공산당의 “권위와 정통성의 핵심을 거세하는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야기했다. “민주화”와 “분권화”라는 슬로건 아래 공산당과 당지도자들의 이름으로 1988-89년에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과정은 곧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5)

 

어떻게 이런 변질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공산당 서기장이 그러한 과정에 착수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그는 1988년에 경제적 쇠퇴와 분리주의자들의 분노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는가? 영국의 유력한 분석가 아치 브라운(Archie Brow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면, 정치국의 조언에 따라 쏘련공산당 중앙 위원회는 즉각 그를 제거할 수도 있었다.”6) 브라운이 맞았다.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회주의를 개선한다는 가면을 쓰고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세계는 1985-91년까지의 쏘련의 드라마를 떠올릴 때, 1989-91년 붕괴의 최종단계에 나타난 외적 징후를 기억한다. 민족 분쟁, 대규모 항의 집회, 식량 배급 대열, 광부들의 파업 등이다. 이에 비해 2년 전인 1987년과 1988년의 과정과 사건은 보지 못한다. 이 중간기에, 페레스트로이카의 계급성과 정치적 내용이 변질되었다. 본질적으로, 쏘비에뜨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투쟁하던 70년의 정책을 버리고 항복했다. 혁명 운동은 오래 전부터 국내외에서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경향이 있었다. 1950년대 이후로, 이러한 경향은 사회주의 내에서 발전해 온 제2경제, 혹은 사적경제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기반을 얻었다. 레이건에 의해 강요된 서방과의 군비 경쟁 비용은 자본주의와 타협하려는 사람들의 요구를 증가시켰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에의 경제 성장 둔화, 소비재 품질 저하, 정치적 정체, 냉전의 긴장 등 만성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요구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고르바초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흐루시초프 이후 지지를 잃었지만, 유사한 정책들이 소비에트 사회에 그리고 쏘련공산당에 수십 년 간 존재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로버트 카이저(Robert Kaiser)는 역사에 주목했다. “고르바초프 유형의 개혁주의는 서방 세계에서 많은 것을 갑자기 가져왔지만, 사실 고르바초프는 당 만큼이나 오래된 전통적 개혁경향의 일부였다.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한명이었던,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 경향의 대부이다.”7) 고르바초프는 비록 한때 두 가지 외투를 다 입고 있었지만, 1987-88년에 사실상 하나의 이데올로기 외투는 벗어버리고 다른 하나의 외투만 입게 되었다. 1964년 흐루시초프가 실각된 이래로 소련 반체제 인사들과 일부 지식인들은 이러한 정치 경향의 주요 강령, 즉 문화적 자유주의, 쏘련 공산당의 좀 더 적고 느슨한 이데올로기적 역할, 민주주의에 대한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개념, 서방에 대한 모방과 유화 정책, 그리고 계급투쟁에 대한 반감 등을 지켜왔다. 이러한 경향은 민족주의(러시아인과 비러시아인)에 대한 분석은 아예 없거나 잘못된 것이었고, 경제적 이데올로기는 크렘린에서 눈살을 찌푸릴 때조차도, 서방 부르주아 교리에 은밀하게 관심을 유지해온 일부 소비에트 학계에서 번성했다. 경제 이데올로기로서 이 경향은 계획이 아닌 시장을, 중앙집권이 아닌 분권화를, 강제적인 방법이 아닌 진화적 방법을 강조하여, “체제의 자연발생적 이점”을 높이 평가했는데 이 문구는 고르바초프 시대 초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는 생산관계를 완성하기 위한 투쟁 즉 계급 종식의 필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사회주의 생산력”8)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따라, 쏘련공산당의 이 분파는 생산과 성장을 강조하고, 시장관계와 사유재산 모두 엄격한 테두리 내에 유지할 필요성을 과소평가했다.

 

1987-88년의 새로운 노선은 세 가지 형태를 띠었다. 첫째, 당 개혁은 당 청산이 되었고, 당은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둘째, 글라스노스트의 기치아래 쏘련 언론은 점차 반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셋째, 고르바초프는 사기업 활동을 받아들였다.

 

1985년과 1986년에 쏘비에뜨 공산주의 언론은 당의 지나친 관여를 중단해 달라고 요구했다. 언론은 부패, 정실인사, 비호, 친족등용, 관료적 분파주의, 고위직에 의한 충성스런 아첨꾼의 보호, 불충분한 간부교육, 형식주의, 무사안일, 이념적 허약성을 비난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응답으로, 27차 당 대회는 당 개혁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 개혁은 비판과 자기비판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당 규칙과 개인책임을 강조하는 집단지도체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포함하고 있었다.9)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개혁을 전혀 실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르바초프는 1987-88년에 쏘련공산당을 페레스트로이카의 장애물로 보고 당을 약화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시행하였다. 당에 대한 공격의 일환으로 고르바초프는 “반쓰딸린화” 캠페인을 시작했다. 1987년과 1988년 초기에 두 번에 걸쳐, 고르바초프와 야코블레프는 언론이 당 역사를 수정하도록 대규모의 조직적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은 흐루시초프가 1956년과 1961년에 당내 반대파에 맞서 처음 시작했었다.10) 고르바초프는 경제실패를 축소·은폐하기 위해 쏘비에뜨의 통계가 체계적으로 위조되었고, “쓰딸린주의”의 침체가 위기의 근본이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쁘다고 주장하는 경제 폭로가사를 승인했다. 고르바초프는 리가체프와 그의 동지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쓰딸린을 맹렬히 비난했다. 1987년 2월에 고르바초프는 언론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고 공중파에서 쓰딸린을 비판하는 방송을 하도록 결정했다. 이것은 “과거 파헤치기”에 대한 6개월 전의 경고와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11) 쓰딸린에 대한 공격으로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의 진정한 세력에 반대하는 연합을 만들 수 있었다. 역사학자 스티븐 코트킨(Stephen Kotkin)이 말했듯이 그 연합은 “사회주의를 개선하기 위해 쓰딸린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사회주의를 부인하기 위해 쓰딸린을 비난하는 사람들“12)이 함께 한 것이다. 스티븐 F 코헨(Stephen F. Cohen)은 반쓰딸린주의는 “흐루시초프 하에서처럼 위로부터의 공산주의 개혁의 이데올로기”13)가 되었다고 말했다.

 

1987년의 대중 매체에 대한 반공산주의자들의 통제는 또 다른 결과를 낳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고르바초프 팀의 제안, 즉 국가 주문을 50%로 삭감하고 기업들이 생산품의 나머지를 시장에 팔도록 강요하는 제안의 심각한 위험성에 대해 정치국에서 논쟁할 때, 야코블레프가 임명한 언론인들은 “보수주의, 감속, 침체로의 회기”14)라는 험악한 훈계를 퍼부으며 제안의 반대자에 대한 격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압박 때문에, 정치국은 고르바초프의 신중하지 못한 무모한 짓을 선택했고, 경제는 폭락하여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1987년 이후 고르바초프 주변인물중에서 알렉산더 야코블레프(Alexander Yakovlev)보다 쏘련 정책에 더 큰 영향 을 미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야코블레프는 쏘련공산당을 약화시켰고 반당적이고 친자본주의적인 지식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야코블레프는 스스로 인정한 사회민주주의자였다. 고르바초프의 다른 핵심적인 조언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게오르기 샤흐나자로프(Georgi Shakhnazarov)는 1960년대 이후에 스스로를 사민주의자라 칭했다. 영국 분석가 아치 브라운(Archie Brown)은 아나톨리 체르니야에프(Anatoly Chernyaev)를 “오랜 자유주의 정치 사상가”라고 묘사했다. 고르바초프는 사민주의자인 스페인 총리 펠리페 곤잘레스(Felipe Gonzalez)에게 체르니야에프(Chernyaev)를 나의 “또다른 자아”로 소개했다.15) 다고스티노(D’Agostino)에 따르면, 체르니야에프와 샤흐나자로프 그리고 야코블레프가 고르바초프의 글을 집필했다.16)

 

야코블레프의 후원 하에, 페레스트로이카의 정치적 개념이 “사회주의적 다원주의”에서 “여론의 다원주의”가 되었고 마침내 “정치적 다원주의”가 되어 갈수록 새로운 의미를 띠었다.17) 고르바초프의 말 “사회주의 자산 실현의 다양한 형태”는 곧 “실현”이 사라지고, “사회주의”가 사라져 단순히 “자산의 다양한 형태”가 되었다. “사회주의법이 지배하는 국가”는 “법의 지배에 근거한 국가”가 되었다. “사회주의적 시장”에 대한 지지는 “시장경제에 대한 통제”가 아닌 “시장 사회주의”가 되었다. 러시아 이외의 공화국들이 민족적 분리주의에 굴복하자, 야코블레프 언론 일당은 “민족주의”, “분리주의”라는 말을 회피했다. 고르바초프의 동조자였던 아치 브라운은 이러한 패턴을 간파했다.

“일반적으로 말해 고르바초프는 이미 쏘비에뜨 정치 논의에서 단죄된 개념을 도입하거나 지지했다, 다만 서기장 취임 몇 년간은 그것에 사회주의라는 형용사를 추가했을 뿐이다. 개혁성향의 지식인들은 그 개념들을 포착하고 정교화 했다. 1988년에 그들 중 좀 더 급진적인 이들은 “사회주의”라는 한정사를 뗐다… 고르바초프에 관한 인상적인 것은 맑스-레닌주의와는 이질적인 많은 발상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2년 후에 그것을 “사회주의”나 다른 자격조건을 떼어내고도 의구심 없이 수정된 형태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18)

1987년에, 야코블레프는 사회주의에 반대할 목표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일했다. 원래 군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통해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인 평화 공존 정책이 “보편적 인류의 가치”로 둔갑하고 제국주의와의 동맹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19) 사회주의 민주화는 당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진 “민주화”가 되었다. 사회주의는 (사회)발전 단계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향한 단순한 염원인 “사회주의적 대안”이 되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유럽 사이에 안정과 협력은 “공동의 유럽”이 되었다. 그것은 평화를 넘어선 이익과 호혜적인 무역 그리고 다른 형태의 협력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동질성을 뜻한다.20) 말은 천천히 바뀌었고 슬로건과 교리들은 완전히 뒤바뀌었다.21) 엘만(Ellman)과 콘토로비치(Kontorovich)는 “대부분의 급진적인 정책이 결정되기 전에 … 공식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실제 전쟁이 촉발되었다”22)고 말했다. 1987년 초까지는 개혁주의자가 정치국내 반대파인 반수정주의자보다 수적으로 열세였다. 고르바초프 일당은 페레스트로이카의 개념을 새로운 “반쓰딸린주의”의 내용으로 채우기 위해 글라스노스트 언론을 과감하게 사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현상을 목격한 미국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이저(Robert Kaiser)는 “고르바초프와 야코블레프 세바르드나제(Shevardnadze)와 그 협력자들은 보수적인 반대자들보다 더 자원이 풍부하고 창의적이었다. 1986년 말과 1987년 초에 당과 지식인들 사이에 있는 고르바초프 일당은 도자기로 가득 찬 벽장 속에서 고삐 풀린 장난꾸러기 소년들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산산조각 깨지는 소리를 즐기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23)

 

뉴욕타임즈 모스크바 특파원 데이비드 렘니크(David Remnick)가 레닌의 무덤(렘니크의 저서-역자)에서 야코블레프를 언급했던 빈도만 보더라도 그와의 지속적인 접촉을 확인할 수 있다. 북미에서 10년을 보냈던 야코블레프는 타임즈가 미국인들의 인식에 미치는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리가체프는 반복적으로 서구와 쏘비에뜨 언론의 협력을 언급했다.

 

경제 상황은 대중들의 태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인이었다. 1987년에 급성장한 제2경제는 모든 쏘비에뜨의 정책을 새로운 반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기 시작했다. 안토니 존스(Anthony Jones)와 윌리엄 모스코프(William Moskoff)는 ”기업가 정신의 부활“이라는 저서에서 무역과 소비자 협동조합은 소련의 전 시대에 걸쳐 합법적이고 정당한 경제 분야였고 연간 쏘비에뜨 무역의 1/4을 차지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1987년에 급격하게 그 성격이 바뀌었다.

 “1987년 사적 노동활동에 관한 법에 따라 만들어진 협동조합들은 이전의 협동조합과는 달랐다… 쏘련에서 이러한 새로운 조직들을 협동조합이라고 부른다고 속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사적 기업이 사회주의 기업으로 위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국영이 아닌 경제활동이 합법화되자 대안경제로 알려진 경제활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24)

경제학자 빅토르 펠로(Victor Perlo)에 따르면 1988년 말에 불법이 만연한25) 가짜 협동조합에 백만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었다. 1년 후 그들은 오백만 명이 되었다.26) 이렇게 확인되지 않고 가속화된 제2경제의 성장은 시장화를 촉진했고, 반공산주의자들을 대담하게 만들고, 쏘련공산당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그레고리 그로스먼(Gregory Grossman)의 말에 따르면, 여러 결과 중에, 제2경제는 “공식적인 중앙계획 명령 시스템에 대한 대안의 살아있는 예이다.“27)

요약하자면, 제2경제는 정치적 붕괴의 물질적 밑받침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1) 미카엘 엘먼(Michael Ellman)과 블라디미르 콘토로비치(Vladimir Kontorovich), ≪쏘비에뜨 경제 시스템의 붕괴(The Destruction of the Soviet Economic System)≫, (Armonk, New York, and London: M.E. Sharpe, 1998), 309.

2) 알렉산더 야코블로프(Alexander Yakovlev), ≪러시아에서 맑스주의의 운명(The Fate of Marxism in Russia)≫,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3), 227.

3)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0월과 페레스트로이카: 혁명은 계속된다(October and Perestroika: the Revolution Continues)≫, (Moscow: Novosti Press Agency, 1987), 47.

4) 모세 르윈(Moshe Lewin), ≪쏘비에뜨 경제 논쟁에서의 정치적 흐름: 부하린에서 현대 개혁가까지(Political Undercurrents in Soviet Economic Debates: from Bukharin to the Modern Reformer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5), xiii, xvii.

5) 로버트 V. 다니엘스(Robert V. Daniels), “쏘비에뜨 사회와 미국의 쏘비에뜨 연구: 성과에 대한 탐구?”, ≪쏘비에뜨 붕괴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The Soviet Collapse)≫, 마이클 콕스(Michael Cox), (London and New York: Cassell, 1999), 121.

6) 아치 브라운(Archie Brown), ≪고르바초프 요인(The Gorbachev Factor)≫,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15.

7) 로버트 카이저(Robert Kaiser), ≪왜 고르바초프가 나타났는가?(Why Gorbachev Happened)≫, (New York: Simon & Schuster, 1991), 15.

8) 델리아 루이사 로페즈 가르시아(Delia Luisa Lopez Garcia), “쿠바의 경제 위기, 조절 및 민주주의(Economic Crisis, Adjustment, and Democracy in Cuba)”, ≪1990년대 쿠바(Cuba in the 1990s)≫, 조세 벨 라라(Jose Bell Lara)판, (Havana: Editorial Jose Marti, 1999), 25.

9) 그레미 길(Graeme Gill), ≪당 단일 체제의 붕괴(The Collapse of a Single-party Syste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9-29.

10) 스테펜 F. 코헨(Stephen F . Cohen)과 카트리나 반덴휴벨(Katrina van den Heuvel), ≪그라스노스트의 목소리(Voices of Glasnost)≫, (New York: Norton, 1989), 17.

11) 마샬 I. 골드만(Marshall I. Goldman), ≪페레스트로이카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What Went Wrong With Perestroika?)≫, (New York: Norton, 1991), 102.

12) 스티븐 코킨(Stephen Kotkin), ≪비켜간 아마게돈: 쏘비에뜨 붕괴, 1970-2000(Armageddon Averted: the Soviet Collapse, 1970-2000)≫,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71-72.

13) 스티븐 F 코헨(Stephen F. Cohen), ≪쏘비에뜨 경험의 재해석(Reinterpreting the Soviet Experienc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126.

14) 예고르 리가체프(Yegor Ligachev), ≪고르바초프 크렘린의 내부(Inside Gorbachev’s Kremlin)≫, (Boulder: Westview Press, 1993), 343.

15) 브라운(Brown), 98.

16) 안토니 다고스티노(Anthony D’Agostino), ≪고르바초프의 혁명(Gorbachev’s Revolution)≫,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8), 112.

17) 브라운(Brown), 127.

18) 리가체프(Ligachev), 125; 브라운(Brown), 127.

19) 하워드 셀삼(Howard Selsam), ≪사회주의와 윤리(Socialism and Ethics)≫,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3), 92-99.

 레닌은 사회주의 사회가 보편화됨에 따라 연대, 단결, 협력, 동지애 등 노동자 계급의 가치가 보편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동 계급에게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의 윤리이며 계급의 윤리인 동시에 실제로 또는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인간 윤리이다”

20) 제리 허프(Jerry Hough), ≪쏘련에서의 민주화와 혁명, 1925-1991(Democratization and Revolution in the USSR, 1985-1991)≫, (Washington DC: Brookings Institution, 1997), 192-196.

21) 리가체프(Ligachev), 132, 189.

22) 엘만(Ellman)과 콘토로비치(Kontorovich), “쏘련의 붕괴와 회고록 문학(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and the Memoir Literature)”, ≪유럽-아시아 연구(Europe-Asia Studies)≫, 49, 2호(1997년 3월): 265.

23) 로버트 카이저(Robert Kaiser), ≪고르바초프가가 일어난 이유: 그의 승리와 실패(Why Gorbachev Happened: His Triumphs and His Failure)≫, (New York: Simon & Schuster, 1991), 156.

24) 안토니 존스(Anthony Jones)와 윌리엄 모스코프(William Moskoff), ≪Ko-Ops: 쏘련에서 기업가 정신의 부활(Ko-Ops: The Rebirth of Entrepreneurship in the Soviet Union)≫,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1), xv.

25) 존스(Jones)와 모스코프(Moskoff), 78.

26) 빅토르 펠로(Victor Perlo), “쏘련에서의 경제와 정치의 위기”, ≪정무(政務)(Political Affairs)≫, 70, (August 1991): 15.

27) 그레고리 그로스먼(Gregory Grossman), “제2경제: 제1경제를 개혁하는데 요긴한 것인가 골칫거리인가?”, ≪사회주의 세계의 경제개혁(Economic Reforms in the Socialist World)≫, (London: Macmillan, 1989),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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