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문영찬 연구위원장의 ‘비판’*1)에 대한 반론

 

신재길 | 교육위원장

1.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비유’ 개념에 대하여

사실 내 글 어디에도 토대와 상부구조가 비유개념이라고 쓴 부분은 없다. 토대와 상부구조가 과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반대로 토대-상부구조 개념이 비유개념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문영찬 연구위원장(이하 문위원장)은 뒤풀이 자리에서 내가 한 말을 가지고 비판에 나섰다. 토대-상부구조가 비유적 개념이라는 것이 내 주장의 주된 근거는 아니지만 문위원장이 이를 비판 대상으로 삼았으니 이를 중심으로 반론을 하기로 하자.

 

맑스는 경제적 생산관계와 정치제도 및 이데올로기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건축학의 토대-상부구조 개념에 빗대어 생산관계의 근원적 규정성을 설명한다. 생산관계와 정치제도 및 이데올로기의 관계가 본개념이고 토대와 상부구조가 비유개념이다. 본개념과 비유개념 자체는 과학적 개념이지만 본개념과 비유개념간의 관계는 개연적이다. 즉 본개념과 비유개념 사이에는 어떤 과학적 연관관계도 없다. 논리학에서는 비유개념을 유비개념이라 하고 유비를 사용한 논증을 유비추리라 한다. 유비추리는 철학적 추리에 많이 사용하지만 필연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대체로 유비추리는 논증으로는 설명력이 약하나 본개념을 분명하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철학적 비유로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과 베이컨의 우상의 비유가 있다. 비유를 든다고 해서 그 자체가 오류는 아니다. 다만 유비추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확대 해석하지 않기만 하면 매우 훌륭한 설명력을 갖는다. 맑스의 생산관계와 정치제도 및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를 건물의 토대와 상부구조와의 관계에 비유한 것은 매우 훌륭한 비유이다. 생산관계의 근원적 규정성을 건물에 빗대어 그 성격을 분명하고 간명하게 나타냈기 때문이다. 맑스의 글을 보자.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거대한 빗자루는 이 모든 지나간 시대의 파편들을 쓸어 버렸으며, 동시에 현대 국가 건물의 상부 구조의 길에 서 있는 최후의 장애물의 사회적 토양을 청소하였다. 이 현대 국가 건물은 제1제정 치하에서 세워졌는데, 제1제정 자체는 현대 프랑스에 맞선 낡은 반半 봉건적 유럽의 연합전쟁에 의하여 산출되었다.”2)(강조는 인용자)

이 문장에서 맑스는 프랑스 혁명을 거대한 빗자루에, 현대 국가를 건물의 상부 구조에 비유하고 있다. 문위원장도 거대한 빗자루를 사회과학의 과학적 용어라고 우기지는 않을 것이다. 문위원장이 건축학의 토대-상부구조 개념이 사회과학적 개념임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경제의 생산관계와 건축물의 토대 그리고 정치의 국가와 건물의 상부구조간의 과학적 관계를 밝히면 된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혁명과 거대한 빗자루의 과학적 연관관계를 밝히는 것보다 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토대-상부구조는 건축학에서는 과학적 개념이다.

 

이런 유비는 유사성에 기초한 사고방식으로 과학적 사고가 발전하기 이전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사고방식이다. 두 사물의 속성이나 구조, 모양의 유사성에 기초해서 유사하지 않은 다른 속성까지 같거나 유사할 것이라고 사고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호두가 인간 뇌와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으니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유사성에 기초한 사고방식은 직접적인 유사성을 벗어나 다른 속성으로 추리를 확장하면 오류를 낳는다. 이런 오류는 한 때 유행하던 신과학류의 사이비 과학에서 주로 사용하던 사고방식이다. 문위원장은 건물의 토대와 상부구조개념을 사회과학에 제한 없이 적용하려는 사고를 하고 있다. 이는 맑스주의를 신과학류의 사이비과학으로 만드는 것이다.

 

2.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하여

문위원장은 두 번째로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이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환원 내지 대체가능한 것인지를 살펴보”3)자고 했다. 이는 사이비 문제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은 건축학의 개념이고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는 사회과학적 개념이다. 이들 간에는 상호 환원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단지 비유적으로만 유사성을 대비할 수 있을 뿐이다.

 

문위원장은 이후 글에서 개념간의 ‘환원 내지 대체’ 문제가 아니라 정치, 이데올로기가 “경제와는 별도의 독자적인 원리에 의해 규정받는” 문제로 넘어간다. 문위원장은 이렇게 되면 “경제의 영역, 정치의 영역,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분해’되”고 “토대, 생산관계의 일차성과 규정력이라는 유물론적인 접근이 왜곡되기 때문에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통일성은 파괴되게 된다.”고 본다. 즉 토대-상부구조 개념을 단지 비유적 개념으로 치부하면 정치, 이데올로기를 토대가 규정하는 유물론적 관점에서의 이탈이라는 것이다. 문위원장은 건축학의 토대-상부구조 개념에서 생산관계의 근원적 규정성을 찾고 있다. 그러나 맑스의 글을 조금만 읽어봐도 이런 사고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알 것이다.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동시에 정부의 정치적 성격도 변화되었다. 현대 산업의 진보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 대립을 발전시키고 확대하고 심화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와 똑같은 정도로 국가 권력은 더욱더 노동자 계급의 억압을 위한 공적 권력이라는 성격과 계급 지배 기구라는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계급 투쟁의 진보를 표시하는 모든 혁명 후에는, 국가 권력의 순수하게 억압적 성격이 더욱더 공공연하게 드러났다.”4)

사회과학에서 경제의 정치에 대한 규정력을 증명하는 데 건축학의 토대-상부구조 개념은 전혀 불필요하다. 사회과학에서는 실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실험적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 혁명적 시기에 그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혁명적 격변기를 연구하고 분석하여 각 요소들의 상호관계를 밝힐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은 그 훌륭한 예라 할 것이다. 이글에서 맑스는 경제와 정치를 ‘분해’해서 경제의 정치에 대한 규정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개념은 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분해’할 성질의 개념이 아니다. 이는 인간 사회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분화되어 독자적 영역을 이룬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독립하여 사회를 처음 이루기 시작할 시기에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가 ‘분해’되지 않고 생존활동 자체가 경제고 정치며 이데올로기 활동이었다. 그러다가 계급이 생겨나고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지배계급이 나타나면서 정치 영역과 이데올로기 영역이 경제영역에서 분리되기 시작하고, 근대에 이르러서 정교분리 원칙에 의해 이데올로기 영역마저 정치 영역과 분리되게 되었다. 각 영역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에는 각 영역의 관계문제는 제기조차 되지 않았지만 분리되게 되자, 각 영역간의 관계가 문제시 되었고, 맑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경제 영역이 정치, 이데올로기 영역을 규정한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이를 알기쉽게 설명하기 위해 건물의 토대 상부구조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문위원장은 본말을 전도시키고 있다. 문위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은 이러한 변증법적 내용을 담고 있기에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전화시킬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계급투쟁이 인류역사의 본질이라는 인식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토대와 상부구조의 개념은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환원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고유의 내용을 갖고 있다.” 이렇게 선언은 했지만 인용문 앞에서 말한 것은 토대 상부구조 개념의 “고유한 내용”이 아니라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상호관계를 설명한데 불과하다. 문위원장의 사고에 의하면 토대 상부구조 개념이 과학의 근거이며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관계를 “하나의 구성체”로 설명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토대-상부구조 개념은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위계적 관계를 설명하는 비유적 설명이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관계를 떠나 “고유의 내용”이 될 수 없다. 토대-상부구조 개념이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개념을 떠나 고유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건축학적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토대-상부구조 개념이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관계를 설명하는 비유적 형식은 될 수 있어도 과학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과학적 개념은 생산관계와 정치제도,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토대-상부구조 개념이 과학적 근거라고 주장하게 되면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설명 형식이 본질 내용을 규정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는 본질과 내용을 현상과 형식에 환원시키는 현상주의, 형식주의라 할 수 있다. 현상주의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비판한 속류경제학자들의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문위원장도 이런 현상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3.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를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 대비하는 새로운 비유에 대하여

나는 토대-상부구조의 비유를 인정한 위에서 새롭게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비유를 제출하였다. 문위원장은 내가 제기한 새로운 비유가 토대-상부구조론을 부정한다고 이해한 것 같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원래 비유의 논리학적 용어인 유비는 귀납추론의 일종으로 비유가 혼동을 야기하지 않는 한 많으면 그만큼 설명력을 높일 수 있다. 토대-상부구조 개념은 경제가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성질을 표현하기에 적당하지만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 개념을 설명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건물 모델에서는 상부구조를 먼저 세우고 나서 후에 토대를 건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을 보면 노동자 정권이 먼저 서고 그 힘으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건설해 갔다. 문위원장도 “토대,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 상부구조의 토대에 대한 반작용 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 논리를 설명하고 있지는 못한다.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상부구조의 독자적 원리는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부구조의 독자적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상부구조의 토대에 대한 반작용은 어떤 논리에서 가능한지 의아하다. 상부구조가 토대의 직접적 결과물이 아니라면, 그리고 상부구조를 직접적으로 토대에 환원할 수 없다면 상부구조의 독자적 운동원리가 있어야하고 이것이 토대의 운동원리와 매개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문위원장은 “경제적 토대가 정치와 이데올로기 등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자문하지만 “근원적으로 규정한다”는 말만 반복할 뿐 ‘상대적 자율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는 “규정”의 구체적 논리가 무엇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경제조직의 조직원리와 정치조직의 조직원리가 다르듯이 경제와 정치는 독자적 운동원리를 갖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각자 독자적 운동원리가 있으면서도 경제가 정치를 규정하고, 반대로 정치나 이데올로기가 경제에 반작용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그래서 경제가 정치를 규정한다는 측면을 토대-상부구조의 비유로 설명했듯이,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을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비유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 나의 의도이다. 물리법칙에 토대해서 화학이 성립되고 물리와 화학법칙에 토대해서 생물법칙이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이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내용이 된다. 그러나 물리법칙에 토대하지만 화학의 독자적 법칙이 존재하고 생물학도 독자적 법칙이 존재하며 이를 물리법칙이나 화학법칙으로 환원할 수 없다. 이 점이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에 비견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를 건물의 토대 상부구조에 대한 비유와 더불어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 대한 비유를 보충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고 포괄적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4.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에 대하여

내가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으로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관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위원장이 우려하는 것처럼 이를 “계급관계, 계급투쟁이 역사의 본질이라는 사적 유물론”을 대체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다.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을 제시하며 염두에 둔 것은 계급사회 이전과 이후의 사회원리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위원장이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이 계급적 접근을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은 전혀 과녁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배성과 집단성의 원리는 무계급 사회까지를 포괄하고 있는데 무계급 사회에서 계급투쟁의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면 계급사회에서는 지배성과 집단성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것인가? 지배성과 집단성 원리를 인간 사회의 생성원리이면서 사회유지원리로 이해한다면 계급사회에도 물론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문위원장이 우려하는 계급투쟁의 원리를 부정하고 계급투쟁과 대립하고 계급투쟁을 배재하는 원리가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리고 계급투쟁 자체가 이런 지배성과 집단성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지배성 개념 자체가 모순과 투쟁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지배성은 인간이 자연과의 투쟁에서 자연을 정복하면서 여타 다른 동물과 다른 ‘사회’를 형성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성이 계급사회 이전에는 주로 인간 집단과 자연환경과의 모순 투쟁으로 나타나고 계급사회가 되면 점차 자연과의 투쟁은 부차적으로 되고 계급투쟁이 중심으로 된다. 따라서 지배성은 계급투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 생성과 형성은 지배성이라는 모순과 투쟁만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회를 생성하고 발전시키는 힘에는 투쟁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의 단결과 통일도 필요하다. 그것을 집단성으로 개념화하였다. 지배성이 모순 투쟁이라면 집단성은 통일 단결이다. 이는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이 자연을 처음 정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간 집단의 강고한 단결이었다. 인간 집단의 초기 원시 무리는 무리 성원 중 어느 하나가 이탈하거나 하면 그 집단 전체의 생존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다반사였을 것이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집단성이 인간집단의 속성으로 되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높은 이타주의로 설명된다. 그러나 투쟁의 지배성과 단결의 집단성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지배성이 주어라면 집단성은 술어이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투쟁에 필요하였기에 집단적 단결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반대는 아니다. 지배성과 집단성의 관계를 헤겔의 용어로 설명하면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양자 관계는 변화될 수 있다. 인류사회 초기의 무계급사회와 계급사회에서는 지배성이 중심이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집단성이 중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문위원장은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을 관념적이라고 비판하며 마치 내가 아무런 근거없이 순수하게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듯이 묘사하고는 관념성의 근거로 부르주아들도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든다.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이 관념적이라는 근거로 제시한 것이 고작 부르주아들의 인정여부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부르주아들이 모두 인정하고 높이 떠받들고 있다. 그렇다면 상대성 이론도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은 진화인류학에 기반하여 제출된 개념이다. 관념성이라고 비판하려면 진화인류학의 성과를 관념적이라고 비판하든지, 진화인류학의 성과와 지배성, 집단성 개념간의 상호 불일치를 지적해야 한다. 부르주아들의 인정여부가 과학성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5. 경제-정치-이데올로기 위계론이 알튀세르의 중층결정이론에 토대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하여

문위원장이 나의 글이 알튀세르의 중층결정이론에 토대하고 있다고 하며 장황하게 알튀세르를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허탈해 진다. 아직 지면상에 발표되진 않았지만 이미 2017년에 대구 현대사상연구소와 노사과연 연구토론회에서 발표한 “헤겔과 맑스주의 국가론의 철학적 방법론적 기초”라는 글에서 알튀세르를 비판하였으며, 또한 명시적으로 내 의견의 모티브는 영국의 비판적 실재론자인 바스카에 근거한다고 밝힌 바 있고, 각주에서 참고도서까지 소개하였다. 그런데 문위원장은 바스카가 아니라 알튀세르를 내 견해의 이론적 근거라고 비판한다. 문위원장이 이 글을 못 읽었을 수는 없다. 연구토론회 주제자로 이 논문을 발표할 때 있었으며, 더욱이 이 논문을 노사과연 이론지에 게재하고자 하였을 때 문위원장이 검토하고 반대 의견을 제출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돈키호테가 풍차를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공격하는 것과 같다. 논리학에서는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라 한다.

 

여기에 좀 길더라도 논문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놓겠다. 이런 견해가 과연 알튀세르의 중층결정이론에 기초한 것인지 독자들이 판단하기 바란다.

“경제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경제(토대)와 국가(상부구조)가 어떤 메카니즘 하에서 경제가 토대로 작용하고 국가가 독자성을 갖는가?

어떤 사회적 사건이나 현상은 단순히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 규정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여러 사회적 요소에 의해 사회적 현상이 규정되는 것을 ‘중층결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심층에 경제가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사고는 사회를 토대 상부구조라는 2중구조에서 다층구조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준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심층은 결국 오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서 사회를 다층구조로 바라볼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발전의 길을 포기하고 만다. 심층의 포기는 결국은 유물론의 포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유물론의 포기는 과학의 포기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회가 구성요소 A, B, C로 이루어 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사회가 심층의 규정성 없이 각각의 요소가 중층적으로 규정한다고 한다면 A는 B, C에 의해 중층 결정되고 B는 A, C에 의해 중층 결정된다. C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제외한 다른 요소들에 의해 규정된다. A와 B만을 고려한다면 A는 B에 의해 규정되고, B는 A에 의해 규정된다. 이는 상품의 가격은 상품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고 상품의 수요와 공급은 상품의 가격에 의해 결정된다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논리와 같다. 이런 논리는 과학을 다수결이나 취향의 문제 또는 협의의 문제로 만들고 만다. 결국은 힘의 논리가 작용할 것이고 자본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이비 과학으로 귀결될 것이다. 과학적 진리가 붕괴된 곳엔 자본가의 이익만이 남게 된다.”

이상이 알튀세르를 비판한 부분이고 다음은 바스카의 이론을 응용한 부분이다.

“토대로서의 물리와 상부구조로서의 화학은 어떤 메카니즘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이런 상호 관계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각 분야의 독자성과 환원문제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물리현상과 화학현상을 구분한다. 화학적 결합이라는 말은 이미 일상용어가 되었다. 토대로 작용하는 물리 법칙으로부터 독자적 법칙을 이루는 것이 화학의 자율성이다. 물리 법칙에 지배를 받는 원자나 입자들이 어떻게 화학적인 다른 법칙을 이루어 내는가? 이 지점에서 ‘창발’(emergence)내지 ‘발현’ 개념이 대두된다. 이는 복잡계 과학에서 어떤 개체를 그 개체를 구성하는 구성요소로 환원해서 개체의 성격을 규명할 수는 없다는 환원불가능성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H₂O(물)을 보자. H와 O의 결합인 H₂O는 우리가 잘 아는 물의 화학식이다. H와 O의 결합임에도 불구하고 H₂O에는 H와 O의 속성에는 없는 성질이 나타난다. 이렇게 구성요소의 속성에 없는 새로운 성질이 결합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발현’이나 ‘창발’이라고 한다.

이런 창발성은 개별 물질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과학의 분야에도 나타난다. 물리적 운동에 토대하지만 화학에는 화학의 독자적 운동법칙이 발현된다. 이런 창발성 때문에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생물학도 화학이나 물리학으로 환원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과학철학의 자세한 내용은 바스카의 책을 참고 바란다.

 

여기서는 바스카의 발현이론과 수직적 위계론을 사회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사회를 크게 세부분 즉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구분해 보자. 자연과학의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 대응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스카의 과학철학에서는 자연과학은 각 분야별로 창발성에 기초하고 보다 더 기초적인 토대학문으로 환원할 수 없다. 그리고 각 분야별 관계는 무작위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위계구조를 갖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런 바스카의 발현이론과 수직적 위계론을 사회에 적용해 보면, 생산이 사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므로, 경제가 가장 심층의 토대가 되고 그 위에 제도적 정치가 서고 이런 생산과 제도 위에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진다.

 

경제-정치-이데올로기 관계는 물리학-화학-생물학의 관계와 같이 창발적 관계로 환원 불가능성이 관철된다.”

논문에서는 이후에 경제와 정치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밝혔다. 이 논문은 정세와 노동에 게재하기로 하였으니 그 때 자세한 내용을 검토하기 바란다.

 

6. 전쟁 개념에 대하여

먼저 “어쩌면 전쟁이 계급사회를 만들어 내었다고 할 수 있다.”는 나의 견해에 대한 비판을 보자. “계급의 발생은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한 잉여생산물의 발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라는 엥겔스의 견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견해를 부정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에서 전쟁의 원인은 계급투쟁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전쟁이 계급 형성 이전 원시사회에도 있었다는 점에 논리적 비일관성을 문제시 한 것이다. 계급사회에서는 전쟁은 계급투쟁의 산물인데, 무계급사회에서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계급투쟁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전쟁의 원인을 사회 자체의 생성 원리인 자연과의 대립・모순을 추상화한 지배성이라는 사회적 속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나 원시시대의 전쟁과 같은 대립양상을 과연 전쟁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는 더 많은 실증적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그리고 문제시 되는 것은 계급의 발생을 생산력의 발전에서 찾지 않고 전쟁에 돌리는 나의 견해이다.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생산과 전쟁을 구분하는 현대의 관점에서는 당연하다. 그러나 원시시대에는 생산과 전쟁이 구분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의 생산이란 주로 사냥이었고 사냥의 도구, 즉 생산도구들은 전쟁도구와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 동물을 직접 사냥하는 것과 다른 인간집단이 사냥한 것을 약탈하는 것이 과연 다른 것이었는지를 의문시 한다면, 전쟁은 곧 생산 활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생산력의 발전이란 생산도구의 발전에 기인한다고 하면 전쟁을 통해서 전쟁도구는 발달하게 되고 이는 곧 생산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전쟁행위 자체가 생산력 발전의 직접적 행위가 되며 계급을 발생시킨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위원장의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라는 견해에 대한 문위원장의 거부는 맑스주의적 문제제기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 문위원장은 “제1차 제국주의 전쟁 자체가 계급투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보면 전쟁=계급투쟁으로 보면 심각한 오류에 빠지는데 왜냐하면 계급투쟁은 역사발전의 가장 근원적인 원동력임에 반하여 전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과 전쟁은 현상적으로 일치하는 순간이 있을지 몰라도 그 성격과 질은 전혀 다른 것이다.”고 말하였다. 문위원장은 전쟁과 혁명을 나아가 계급투쟁을 그 “성격과 질”이 전혀 다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일시적 현상적으로만 일치하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경제의 집약집중이 정치이고 정치의 연장이 전쟁임을 인정한다면, 당연한 논리로서 전쟁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의 격렬한 양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적 비약도 없다. 그러나 문위원장은 경제에 규정받는 정치의 연장인 전쟁이 계급투쟁과 그 “성격과 질”이 전혀 다르다고 한다. 여기서 토대 대신 경제라는 용어를 쓰고 상부구조 대신 정치 전쟁이라는 용어를 써서 토대의 상부구조에 대한 규정력이 사라져 버린 것으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계급사회에서 모든 전쟁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관계의 규정을 받고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정치가 나아가 전쟁이 독자적 운동원리를 갖고 있기에 경제관계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현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우연적 매개적 요소들을 들어낸다면 모든 전쟁은 결국 경제관계에 의해 규정받게 된다. 그래서 “모든 전쟁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도 문위원장의 특유의 현상주의적 사고방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현상적으로 볼 때 전쟁은 몇몇 혁명전쟁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다른 원인에 의해 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국가지도자의 개인적 야망이나, 전통적으로 갈등을 빚어온 민족 및 집단 간의 충돌, 혹은 지도자들의 사랑싸움이 원인으로 나타난다. 또는 현대 부르주아 정치학에서처럼 국제질서의 무질서가 전쟁의 원인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의 근본적 토대에는 경제관계가 놓여있다. 문위원장은 전쟁의 현상만 보고 전쟁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문위원장이 예로 든 제국주의 전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문위원장은 제국주의 전쟁은 그 자체로 계급투쟁이 아니라고 한다. 제국주의 전쟁을 민족 간의 또는 지배계급끼리의 전쟁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은 단지 지배계급끼리의 충돌이 아니다. 제국주의 전쟁은 식민지 재분할 전쟁이다. 식민지 재분할이란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침략을 의미한다. 제국주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침략전쟁을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전쟁은 그 이면에 식민지 민족해방 전쟁을 포함한다. 식민지 민족해방 전쟁이 계급투쟁의 전형 중 하나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다음으로 제국주의국가 내적으로도 노동자에 대한 탄압 등을 강화하지 않는 제국주의 전쟁이란 없다. 결국 제국주의전쟁이란 식민지 민중과 제국주의국가 노동자에 대한 전쟁인 것이다.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의 “성격과 질”이다. 그러기에 제국주의 전쟁은 결국에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의 길로 귀결되는 것이다. 제국주의 전쟁과 계급투쟁을 분리하는 사고 이것이 바로 제2 인터내셔널의 사고방식이다.

 

7.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몇 가지 비판에 대하여

먼저 근대철학의 딜레마에 대해서 보자. 근대철학의 딜레마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다. 데카르트는 사유와 물질을 각각 실체로 증명한다. 그런데 사고 작용으로서의 사유와 연장으로서의 물질은 어떤 공통성도 없다. 즉 사유로부터 물질을 연역하지 못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영희의 키와 철수의 몸무게를 비교하는 것과 같이 무의미하다. 그렇게 되면 진리, 즉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사물이 존재하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어떤 사물을 컵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런 앎이 진리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컵이라는 생각과 그 어떤 사물을 비교해야 한다. 그런데 그 어떤 사물과 컵이라는 생각을 비교하기 위해서 그 어떤 사물을 다시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컵이라는 생각과 어떤 사물의 비교는 첫 번째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인 컵이라는 생각과 두 번째 어떤 사물에 대한 생각을 비교하게 되고 만다. 결국 관념과 관념의 비교가 되는 결과가 된다. 이것이 근대철학의 인식론적 딜레마다. 데카르트는 인식 주관을 증명했지만 영원히 사유 밖으로 나올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이 딜레마가 맑스에 이르러 비로소 해결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문위원장은 “이 문제는 맑스에 의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 피히테 같은 철학자들이 일원론을 시도하면서 극복된 것이다”고 반론을 제시한다. 즉 “데카르트 같은 이원론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딜레마는 사라지는 것이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문위원장의 특유의 현상주의적 사고방식이 나타난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스피노자 이후 독일관념론이 취하는 관념일원론을 표방하기만 하면, 그런 형식을 취하기만 하면 해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내용적으로 진정 해결되었는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딜레마는 스피노자나 독일 관념론의 일원론으로 해결되고 유물론은 유물론의 방식으로 해결되었다면 진리를 접근하는 두 가지 가능한 방법이 존재하며 어떤 방법을 취하는가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관념론은 인식론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가 없다. 물론 기계론적 유물론도 해결할 수 없다. 즉 결론부터 말한다면 관념론은 제아무리 일원론적 형식을 취한다고 해도 결국 이원론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문제를 숙고하고는 사유와 물질은 한 실체의 두 가지 속성이라고 하여 이원론을 극복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일자 즉 하나의 실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자신의 미분법을 사용하여 증명한다. 그리고 단자론을 제기하며 다원론을 제시한다. 스피노자의 일자(무한실체)는 무한한 속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무한한 속성을 갖는 일자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어느 순간에 무한한 연쇄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단절체들을 모나드로 제시한다.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의 일원론은 붕괴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사상은 피히테 셸링을 지나 헤겔로 이어져 독일관념론의 뿌리가 된다. 그러면 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적 일원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자.

“이것은 이원론인데, 헤겔은 보편자를 현실적 유한자, 즉 실존하고 있는 것, 규정된 것의 현실적 본질로서 고찰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하면 현실적 존재를 무한자의 참된 주체로서 고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5)

“헤겔이 보편성과 개별성, 즉 추론의 추상적 계기들을 현실적인 대립물로 다룬다면, 이것은 바로 논리학의 근본적 이원론이다.”6)

헤겔에게 있어 보편자(일반자)는 절대정신의 현상으로 모든 개별자(현실적 존재)에 선행하며 개별자의 근거이자 실체가 된다. 즉 현실 세계를 그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지닌 것으로 보지 않고 절대정신의 결과로 본다. 그러나 이념 즉 절대정신의 자기운동은 물질을 창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유인 이념(절대정신)은 물질적 속성을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은 전혀 없다. 물질적인 것이 전혀 없는 이념에서 물질이 외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비판이라는 무기는 무기에 대한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인 힘은 물질적임 힘이 전복시켜야 한다.”7) 헤겔은 사물의 추상적 속성인 일반자를 사물로부터 떼어내어 실체화시켜 절대정신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 현실 존재인 물질과 물질의 추상적 속성인 이념이 실체화 되어 이원론이 된다. 따라서 모든 관념론은 필연적으로 이원론으로 귀결된다. 맑스가 이념 등 모든 관념은 인간의 사회적 활동에서 나온 결과이며 사회적 속성이라고 밝힘으로서 이원론이 극복되고 온전한 일원론이 완성된 것이다.

 

스피노자의 혼합주의나 헤겔의 관념론으로는 인식론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맑스가 인식론에 실천개념을 도입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다음으로 실천개념에 대해 보자. 문위원장은 “실천 개념을 철학에 도입한 최초의 사람은 맑스가 아니라 헤겔이다.”고 한다. 사실 철학에 실천 개념이 논의 된 것은 매우 오래되었다. 가깝게는 헤겔 이전에 칸트도 실천이성비판을 썼다. 이 문제에서도 문위원장의 현상주의적 사고방식이 나타난다. 문위원장은 실천 개념의 내용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용어에 집착하여 헤겔의 실천 개념과 맑스의 실천 개념을 동일시하고 있다. 칸트의 실천 개념이 도덕행위를 의미한다면 헤겔의 실천 개념은 자유의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맑스의 실천 개념은 “대상적・감성적” 활동을 의미한다. 용어는 모두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당연히 철학적 의미와 역할도 다르다. 그런데 문위원장은 이런 내용적 차이에 대한 검토 없이 실천 개념을 철학에 도입한 최초의 사람이 헤겔이라고 한다. 맑스가 철학에 도입한 것은 실천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대상적・감성적” 인간 활동이다.

 

이제 물질 개념으로 넘어가자. 물질 개념이 존재론적 개념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사실 이 문제는 어느 정도 공인된 문제이다. 장황하게 설명할 것 없이 철학사전 몇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기계론적 유물론은 연장, 밀도, 불가 침투성, 질량 등의 물리적 속성들을 물질의 속성으로 여겼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물질 개념은 기계적 유물론의 물질 개념과는 달리 인식론적 개념이다. ‘물질’은 인식론적 범주로서, ‘의식’ 범주와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 따라서 물질 범주는 <인식론적>-철학적 추상이며, 자연 과학적-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다.”8)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이런 물질개념의 인식론적 성격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물질 개념과 실천 개념의 관계에 대해서 보자.

 

문위원장은 “실천 개념이 물질과 의식의 범주 내에 포괄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억지에 가까운 것이다. 왜냐하면 실천의 주체인 인간은 한편으로 의식을 담지하는 주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물질적 실체이기 때문이다.”라고 반론을 펴고 있다. 물질과 의식은 위에서 본대로 인식론적 개념이다. 인식론적 개념이란 실체적 개념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상하나 좌우와 같은 상대개념이다. 인식론적 개념에서 물질이나 의식의 실체란 없다. 상하 좌우의 실체가 없듯이 말이다. 즉 가장 추상적 개념이다. 그러면 문위원장이 예시한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존재론적 개념이다. 현실에 실존하는 구체적 존재이다. 물질이 모든 사물의 객관적 속성을 추상한 개념이라면 인간은 살아있는 구체적 개별자를 통칭하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서 인식론적 속성 개념과 존재론적 실체 개념의 직접적 상호 포함관계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양이 웃음과 고양이의 관계처럼 구체적 실체의 구체적 속성은 그 포함관계를 따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속성 개념이 실체 개념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추상적 개념인 물질과 의식 개념은 인간이 물질적 속성과 의식적 속성을 모두 갖고 있지만 인간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 당연히 인간개념도 물질과 의식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 물질은 의식 외부의 독립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의식적 존재인 인간을 포함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의식에 인간을 포함시킬 수도 없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물질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개념도 물질이나 의식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론적 딜레마를 해결한 실천 개념이 인식론적 틀에서는 해명되지 못하고 남아있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철학의 근본문제를 확대하고자 한 것이 나의 견해이다.

 

이상으로 반론을 마친다.

 

사상은 ‘표현방식’이 아니라 ‘사고방식’으로, ‘형식’이 아니라 ‘내용’으로 평가해야한다.

앞으로도 더 많은 비판을 기대한다.<노/사/과/연>

 


1)* 문영찬, “신재길 동지의 사적 유물론 ‘수정’에 대한 비판”, ≪정세와 노동≫ 제146호(2018년 10월-11월 합본호), 노사과연, pp. 45-63.

2) K. Marx, “프랑스에서의 내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4≫, 박종철 출판사, pp. 61-62.

3) 문영찬, “신재길 동지의 사적 유물론 ‘수정’에 대한 비판”, ≪정세와 노동≫, 제146호(2018년 10월-11월 합본호), 노사과연, pp. 45-63. 이하 문위원장의 논문 인용은 인용부호만 표시하고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는 않겠다.

4) K. Marx, “프랑스에서의 내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4≫, 박종철 출판사, p. 62.

5) 강유원 옮김, ≪헤겔 법철학 비판≫, 이론과 실천, p. 68.

6) 강유원 옮김, ≪헤겔 법철학 비판≫, 이론과 실천, p. 92.

7) 강유원 옮김, ≪헤겔 법철학 비판≫, 이론과 실천, p. 19.

8) ≪철학대사전≫, 동녘, p. 420.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1개의 댓글

  • 물질 개념이 추상 개념인데 인간 개념은 추상 개념이 아니라는 논리가 동의 안됩니다. 인간 개념도 다양한 인간의 속성을 추상한 추상 개념 아닌가요?

    물질 개념이 인식론에만 있는데 그럼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은 물질이 아니고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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