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과연신재길 | 교육위원장
1. 한반도의 전통적 지정학적 지위
한반도는 16세기 이전에는 대륙의 변방이었다. 그래서 대륙의 세력교체기마다 전쟁에 말려들었다. 대륙세력들이 대결하는 배후가 되었기에 본격적인 세력대결 이전에 한반도가 먼저 전황에 휩싸이곤 했다.
16세기에는 서구의 해양세력의 영향을 받은 일본이 성장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지위가 변화된 것을 말해준다. 즉 대륙의 변방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교두보 내지 완충지대로서 대립전선이 형성되는 지역으로 변한 것이다. 두 세력이 대립될 때 한반도는 언제나 전장이 되었다. 임란이 그랬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이 그러했다. 해양세력이든 대륙세력이든 어느 쪽이 승리한 경우에는 승리한 쪽에 편입되어 민족과 국가의 자주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 세력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균형을 이룰 때 한반도는 분단된다.
이렇듯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사회변화가 내적 동력에 의해서 추동되기 보다는 외세에 의해 강요되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큰 사회적 변화는 특히 외부의 영향이 켰다. 분단체제의 성립도 외세에 의한 규정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냉전체제가 확립된 것이 그렇다.
2. 소련 붕괴이후 세계적 지정학의 주요변화
소련의 붕괴는 지정학적인 근본 변화를 야기했다. 미소대립의 냉전기에는 지정학적 요소보다는 냉전의 진영논리가 국제관계의 규정적 힘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로 국제관계의 균형추가 무너지고, 미국 중심의 위계적 국제질서는 강화되었다. 이것은 미국에 유리한 국면만을 제공한 것은 아니다. 냉전기에 소련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명분은 서방국가들에게 자국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추구할 수 없게 작용했고, 미국은 자기 이익에 맞게 국제관계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명백히 쇠퇴의 징조를 보이고 세계경영에 무능함을 들어낸 2008년 공황 이후 독일은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러시아에 급격히 접근한 것이다. 독일은 러시아의 에너지와 지하자원 및 노동력이 필요했고, 러시아는 독일의 자본과 기술, 자원 수출시장이 필요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하위 파트너로 하는 유라시아의 맹주를 또 다시 꿈꾸는 듯하다.
일본은 사정이 독일과 다르다. 일본은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주변에 이를 보충할 마땅한 지역이나 나라도 없다. 한 예로 일본은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90%를 넘어서고 있고 대부분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일본은 석유수송로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의 패권에 재도전하기 보다는 미국의 패권 질서에서 자신의 몫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대 중국 균형추로서의 일본의 역할이다. 이는 정상국가화로서의 군사력 강화로 나타난다. 그 구체적 형태가 한미일 군사동맹이다. 독일에서 미군철수가 논의 되는 것과 대조적인 현상이다. 한미일 군사동맹은 중국을 억제하는 중심축이 되고, 호주는 후방 병참기지, 인도는 측면지원 세력으로 중국 봉쇄의 구도가 갖추어 갔다. 그리고 동남아시아는 일본이 경제적 위계체제를 구축하고, 미국이 군사적으로 연계하여 대 중국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북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3. 북의 핵 무력 완성의 의미
일단 지정학적 의미에서만 본다면 북은 세력균형의 균형자로서의 지위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다. 핵 무력 완성은 어느 강대국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의미이며 정치적으로 독자적 전략을 구사하고 관철시킬 힘이 있다는 의미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대륙 공격의 전진기지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북이 단지 미국과 일본의 공격을 막아주는 완충지대가 아니라 새로운 전략지대로 된 것이다. 전략지대란 무엇인가? 이전의 한반도는 국지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즉 소련과 미국, 중국과 미국의 대립에서 어느 한 세력권에 들어가던가, 아니면 세력균형지대로 완충지 역할을 하던가 하였다. 이런 지위와 역할의 규정력은 주로 대립하는 강대국들의 힘의 역관계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제 강대국들의 힘의 역관계가 어떠하든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대립하는 두 강대국이 상대방의 힘을 고려하여 자신의 입지를 정하고 한반도 전략을 구사하였고, 한반도는 이런 강대국의 전략에 종속되었다. 이제 북은 핵 무력 완성으로 강대국 세계전략의 독립변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전략지대란 세계전략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북의 행보가 어떠한가에 따라 미중의 대립구도와 세계판도는 달라지게 된다. 미국이 북을 베트남에 비교하는 것은 경제적 의미보다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 아시아에서 베트남과 한반도는 중국 대륙의 양 날개와 같다. 반대로 중국의 복부와 목을 겨누는 비수가 될 수도 있다. 미국은 북이 베트남처럼 중국을 향한 비수가 되기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보지 못한 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정치적 힘이다. 한반도는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 일본과도 국경을 맞대고 있다. 경제 규모로 보더라도 남은 러시아와 맞먹는다. 이런 상항에서 북이 핵 무력을 완성했다는 것은 동북아에서 미중 대립구도가 깨질 수도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베트남은 독립적 전략지대를 만들 수 없지만 한반도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즉 삼각구도가 성립할 수도 있다.
4. 북의 핵 무력 완성으로 나타난 한반도의 구체적 지위 변화
먼저, 미국이 북을 전략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북은 2006년 첫 핵 시험 이후 단계적으로 미국에 대한 핵 위협 수위를 높여오다, 2016년 제7차 당 대회에서 군사강국을 선언한 이후 미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극한까지 몰고 갔다. 그 절정은 2017년 말의 화성 15호 발사였다. 그리고 곧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다. 핵 무력 완성이란 핵 선제공격을 받았을 경우 보복 공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에 미국은 어쩔 수 없이 북과 정상회담을 하게 된다. 정상회담 과정에서 미국은 북을 자신과 동등한 지위에서 대우했다.
둘째, 북미 평화협정의 의미 변화이다.
북이 핵 무력 완성으로 전략 국가의 반열에 오르기 이전에는 북미 평화협정만이 북의 사회주의체제를 지켜줄 유일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의미는 평화협정에서 부차적 의미만을 갖게 되었다. 핵 무력 자체가 그 어떤 수단보다 체제를 지키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미 평화협정으로 북 체제를 보장하고 핵을 폐기시킨다는 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북에게 평화협정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평화통일의 활로를 여는 것이고, 다음으로 사회주의 경제 강국 건설의 대외적 조건을 마련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북은 제7차 당 대회에서 정치사상 강국과 군사 강국을 선언했으나 경제는 아직 뒤쳐져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완전승리를 새로 제기하며 사회주의경제강국 건설을 과제로 내세웠다. 결국 평화협정이란 북에게 체제 보장보다는 평화통일과 경제건설의 의미를 갖는다.
셋째,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의 파탄이다.
한미일 군사동맹은 사실상 대 중국 포위망의 동북방면의 핵심이다.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의 파탄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의미하며, 중국에게는 동북항로가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미일의 제약 없이 북극항로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넷째, 군사동맹의 저지로 동북아시아 평화체제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는 다가올 공황에서 공황을 타개하는 전쟁이 한반도에서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담보가 된다. 중동은 이미 전쟁이 진행 중이고 앞으로 확대될 것이다. 반면에 한반도는 평화무드가 조성될 것이다. 만약 전쟁이 한반도에서 발발한다면 이는 곧 핵전쟁이 될 것이고 핵전쟁은 북과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 참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동북아 평화체제는 동북아에 새로운 경제단위를 만들어 낼 것이다.
동북아 평화체제의 확립은 그 동안 고립된 섬처럼 존재했던 한반도가 위로는 대륙으로 진출하는 아래로는 태평양과 북극항로로 진출하는 관문이 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의 동북 3성과 러시아의 연해주 그리고 일본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경제협력공동체가 태동할 가능성이 조성된다.
여섯째, 일본의 동북아에서의 위상변화이다.
북이 핵 무력을 완성한 이상 미국은 대 중국 봉쇄전략에서 북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대 중국 봉쇄전략에서 일본의 위상은 낮아지고 북의 역할이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북을 자기편으로 만들든지 최소한 중립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그만큼 일본의 역할은 축소될 것이다.
일곱째, 한반도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접근 가능성이 높아졌다.
동북아에서 미국이 약해지면 일본이 부상하게 된다. 그동안 일본은 자신의 경제력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일본은 미국이 강할 때에는 미국에 의존하여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고자 하지만, 미국이 약해지면 그 공백을 다른 나라에서 찾게 된다. 하지만 이전처럼 무력 침략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보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주변국이 모두 핵보유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북과 러시아에 외교적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일본은 러시아의 에너지와 자원이 필요하고 러시아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필요하기에 동북아에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면 러시아와 일본은 급속히 가까워 질 수 있다. 러시아가 중동의 석유를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유럽에서 독일과 러시아와의 관계와 같다. 러시아와 독일의 중간에 폴란드가 있다면, 러시아와 일본의 중간에 한반도가 있다. 폴란드와 한반도는 지리적 위상은 비슷하지만 지정학적 지위는 전혀 다르다. 한반도에는 전략국가가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라는 강대국의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느 한쪽에 편입되던가, 완충지대로 양쪽 눈치를 다 봐야한다. 아니면 미국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는 핵 무장국이 있기에 러시아나 일본과 대등하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두 나라의 관계를 한반도에 의존하게 할 수도 있다.
결국 한반도는 미국에게는 중국 견제뿐 아니라 일본, 러시아까지 견제할 수 있는 중심이 되는 지정학적 지위가 되었다. 이 지정학적 중심이 되는 힘은 지정학적 위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핵 무력의 완성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겠다.
* 신재길 교육위원장이 ≪미디어 협동조합 시그널≫에 기고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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