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기획번역>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18)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Ⅱ. 대립을 향하여

앞서 보았듯이, 국민회의는 흄의 주도로 시작되었고 인도 총독도 인지하고 있었다. 국민회의 초기에는 인도에 머물던 영국 관료들로부터 도움과 협조를 받았다. 인도 총독은 1886년 캘커타에서 개최된 국민회의 2차 대회 대표들을 접대하기 위해 그들을 관사에 초대하였다. 비슷하게 그 다음해에 마드라스에서 국민회의 대회가 열렸을 때 마드라스 주 총독은 그의 관사에서 대표들을 환대하였다.

그러나 국민회의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지도자들이 보다 적극적인 행정개혁을 요구하기로 결정하자 국민회의에 대한 공식입장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아마도 관료계층이 기대하던 노선과 상당히 달랐기에, 특정 결의안이 통과된 이후로는 국민회의는 1년에 한 번 회의를 열고 흩어지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대신 국민회의는 스스로 소책자들을 출판하여 여론을 움직이고 여러 매체들을 통해 정부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였으며 대중 집회를 조직하여 선전운동을 펼쳤다. 그러자 상위계층의 관료들은 공무원에 고용된 영국인들의, 국민회의와 관련된 활동을 금지시키고 그것에 동조하는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며 태도를 확 틀었다. 초기에는 관료들이 국민회의의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금지 되었다.

인도 국민회의를 만드는 데 노력했던 흄을 격려했던 듀퍼린 경은 후에 이렇게 썼다. “리폰경이 꽤 환대했고 인도의 자치운동에 앞장서며 고무했던 사람들 가운데 흄은 말썽꾸러기 참견꾼이다. 그는 잘난 체하고, 속좁고, 자만심 강하고, 꼼꼼하지 못한 사람이고 … 진실에 대해서 매우 부주의한 사람이다.”1)

우리가 보아왔듯이, 국민회의는 행정에서 인도인들의 적극적인 역할을 핵심적으로 요구했다. 그 일환으로써, 공무원 채용에서 영국인의 독점을 끝내려하였다. 인도와 영국의 권력기관은 그런 요구에 전면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그런 요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도인 중 소수이며 대다수는 그런 정치적 시위에 관심이 없다고 하였다. 그들 “소수의 선동가(agitating minority)”는 힌두 벵갈인이므로, 인도 전체의 무슬림과 벵갈 지역 이외의 모든 공동체들은 그들의 요구를 거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영국과 인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서 피를 흘린 사람들은 벵갈 이외에 사는 “전투종족(mar-tial races)”2)이고 이들이 “겁쟁이 벵갈 한두들”의 요구와 싸워야 한다는 선전을 광범위하게 펼쳤다. 그러므로 전투종족과 무슬림들이 국민회의에 맞서 투쟁할 거라 하였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선전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지역에서 국민회의 모임을 금지시키고, 회의에 참가하는 대표들의 여행과 숙소이용을 방해하였으며, 시위와 조직적 활동에 제일 앞장서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국민회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국민회의는 실질적인 활동에서 모든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로 인해 국민회의 지도자들의 영국지배자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거나, 영국 정치에 참가하면서 국민회의를 지지하는 지도자들의 공감대가 약화되지는 않았다. 흄의 주변에는 국민회의 내부에 조직적으로 참가하는 비관료 영국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국민회의의 회장으로 선출되기조차 하였다. 영국 의원인 찰스 브래들로(Charles Bradlaugh)는 인도를 방문해 직접 국민회의의 정치 시위를 도왔다. 나중에 국민회의 요구안을 담은 법안을 하원에 발의하였다. 국민회의는 피로제샤아 메타(Firozeshah Mehta), W. C. 바네르지(W. C. Banerji), 수렌드라나쓰 바네르지(Surendranath Banerji), R. N. 무드홀까(R. N. Mudholkar)와 두 명의 영국인인 흄(Hume)과 엘델리 노튼(Elderly Norton)이 포함된 대표단을 영국에 보냈다.

정부는 국민회의와 그들의 영국 친구들이 결합해 영국에서 벌이는 시위를 쉽게 무시할 수는 없었다. 브래들로가 하원에 자신의 법안을 제출하자, 정부는 상원에 또 다른 법안을 냈다. 상원에 제출된 법안의 목적이 중앙 입법부 (Cent-ral legislature)3)의 대표성을 확대하고 그 권리와 특권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법안의 진짜 의미는 “선택된 상층계급의 인도인이 정부에 진출할 기회를 늘리기를 원하는 기대와 감정에 가까워지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목적에는 부적당하였다. 더구나 정부를 대신해 법안을 상정한 커즌(Curzon) 경은 단도직입적으로 “인도 인민들 중 수백만명의 문맹자와 말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대의 정체가 아닌 것이 고안되어야 한다”고 하였다.4)

국민회의는 입법부 의원을 뽑을 수 있는 인민의 권리를 요구했는데 영국의회 내 일부에서도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1892년 법은 선거개념조차 거부되었다. 그 대신에 영국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조건으로 총독에 의해 입법의원들이 지명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법안은 중앙입법 위원회에 추가적으로 6명의 공식 의원들과 10명의 비공식 의원들을 지명하게 하였다. 새롭게 지명되는 의원들의 비율은 비공식 의원들이 위원회에서 다수가 되지 않게끔하는 방식으로 고정되었다. 10명의 비공식 의원 중에 4명은 지방 입법부의 추천을 받아 지명하도록 했고 한 명은 캘커타 상공회의소(the Chamber of Commerce of Calcutta)의 추천을 받으며 남은 5명은 인도 총독의 재량권으로 정해졌다. 의원들 선정의 마지막 기준은 무슬림과 기타 공동체의 대표성도 고려되었다. 그러므로 최초의 꼬뮤널5) 대표성의 원칙이 채택되었다.

중앙입법위원회(Central Legislative Council)의 구조뿐만이 아니라, (안건에: 역자) 동의하고 거부하는 의원들의 권리와 면책특권도 국민회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의원들은 의회에 상정된 예산을 심의할 수 있는 권리는 있었지만, 그들은 예산에 관한 투표권이 없었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만약 의원들에게 투표권을 허락한다면, 지명된 의원이 다수로 구성된 의회에서 (인도식민지: 역자) 정부의 패배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의원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고, 또 인민들에게 비공식 의원들을 뽑는 권리를 부정한 것에서 정부의 진짜 목적이 드러난다. 정부가 입법부에서 인민의 대표를 위한 자리를 주지 않았고 정부의 신뢰를 즐기고 있는 관료들조차 의회투표권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국민회의가 만들어진 지 7년의 시간 동안에 불만족스러운 법안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그런 일조차 집행하기 위해서 인도 국민회의와 영국의회 의원도 포함된 영국 친구들이 힘들게 일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예외 없이 영국 지배에 대해 수그러들지 않는 충성심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모든 회의 또는 모임, 연설에서 결의안이 통과될 때마다 영국 왕실과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정부는 그런 “철저한 충성자들”이 이끄는 조직의 합법적 수단에 의해서 형성된 온건한 요구조차 거부하였다.

그런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국민회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설득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투쟁 수단을 채택해야 된다는 사상이 자라났다. 그런 생각으로 인해 국민회의 초기의 온건한 지도부에 반대하는 새로운 (급진적인) 지도부가 출현한다. 우리는 뒤에서 그 새로운 지도부의 출현과 발전을 다시 살펴볼 것이다. 지금 우리는 국민회의에서 탄생한 새로운 지주-부르주아 계급과 영국지배자들 사이의 관계 변화의 본질만 살펴볼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최초에 무역 상인으로서 인도에 온 영국 자본가들이 인도에서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고 제한적인 방법으로 산업생산 영역에 진입했는데, 그 이후에 인도의 무역 부르주아 일부는 스스로를 점차 산업자본가로 변모시켰다.

그런 힘들의 충돌이 나로지, 라나데, 듀트가 인도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초였고 이들의 주장은 비판에 기초해 있었다. 인민의 대표를 선출하려는 요구와 그들의 통제 아래 행정을 장악하려 하는 기본 요구는 국민회의에 의해 발전되었고, 이는 점차 성장해가는 인도 부르주아의 소망과 염원을 인식하는 정부에 대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인도 부르주아 간의 모순은 하루 하루 격화되었다. 영국 지배의 뿌리가 확고한 상태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동안에, 그 발전의 주요 이익은 영국이 차지하였고 작은 비율로 인도 자본가들이 전유하였다. 한편, 인도 자본가들 사이에서 심화된 불만과, 다른 한편에서는 조직화된 시위를 통해 지배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의해 그런 정세가 인도되었다. 그러므로 국민회의는 점점 높아지는 불만족과 다른 한편으로 자신감이 증대하는 (부르주아: 역자) 계급의 필요에 의해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국제적으로 독점자본주의가 등장하였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지배적인 독점자본가와 기타의 자본가들 간에 모순이 심화되고 자신들끼리 험악한 경쟁을 하게 된다. 사실 영국부르주아 지배자들과 권력을 열망하는 인도 부르주아 간에 자라나는 모순은 그런 발전의 부분이었다.

19세기 말, 인도 자본가들은 면방직 산업에서 놀랄 만큼 강력한 지위를 차지했다. 그들은 1898년 그 산업에서 영국을 앞지르기까지 하였다. (이 산업에 투자한 자본 중 3분의 2가 인도에 속하였고, 남은 3분의 1이 영국의 것이었다.) 그러나 삼베, 모직물, 종이, 설탕, 차, 커피 그리고 인디고 산업은 투자 자본의 4분의 3이 영국 소유였다. 인도인은 자본소유와 경영에서 뿐만 아니라, 고도로 숙련된 손기술 즉 기술자 같은 사람들의 수에서도 뒤처져 있었다. 인도 자본가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발전을 원했다.

영국과 인도 자본가들 간의 모순은 인도인들 전체가 영국 지배하에 착취당하고 빈곤해지게끔 종속되는 상황을 배경으로 점점 더 격화되었다.

다른 모든 나라들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가 발전함으로써 농업 및 관련 영역의 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산업과 광업 노동자들의 수가 늘어난다. 인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산업 및 관련 노동자들의 비율은 1881년에 16퍼센트에서 1901년 15퍼센트로 줄었다. 반면에, 농업과 그와 관련된 노동자들의 비율은 같은 기간에 74퍼센트에서 75퍼센트로 증가했다. 인도는 자본주의가 발전했는데도 경제적 진보와 근대화도 없고 발전을 능가하여 늘어나는 빈곤의 희생물이 되었다.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딕비(William Digby)는 인도 인민의 민족적 열망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의 국민소득 추산에 있어, 다다브하이 나로지 다음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추산에 따르면 20세기 초 인도의 국가수입은 3억 9240만 파운드 스털링이었다. 그 중에 5000만 파운드 스털링은 왕들과 자민다르 그리고 기타 봉건 영주들이 전유하였다. 단지 75,000명으로 추정되는 은행가, 고리대금업자, 부자 상인들이 7500만 파운드 스털링을 전유했다. 같은 금액을 750,000명의 중소 상인들이 차지했다.

그러므로 가장 큰 2억 파운드 스털링은 소수의 봉건 영주들과 무역업자들의 손에 들어간 반면에,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인민들은 단지 1억9천만 파운드 스털링을 받은 것이었다.

딕비의 추산은 인도와 영국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이 치열해지는 중에 봉건 부르주아 계급과 인민 대중들 간의 모순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 후자의 모순은 어떤 의미에서, 전자의 일부분이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것이 1857-59년 봉기진압을 위해 영국 지배자들이 봉건지주들을 달래기 위한 정책을 의도적으로 추진했던 이유였다. 그 정책의 결과, 왕자들과 대지주뿐만 아니라 고리대금업자와 무역상인들조차 인민들을 착취하는 데 달려들었고 그 결과 19세기 말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던 반복된 기근은 피할 수 없었다.

1860년부터 1908년까지의 49년 동안 20년이 기근이었다. 이처럼 많은 기근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기근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1876-77년에 5백만명, 1896-97년에 450만명, 1899-1900년에 125만명이었다. 그 기근은 잔인한 봉건적 착취의 실상을 말한다.

국민회의는 반영 시위에서 기근과 여러 형태의 인도 인민의 비참한 상태를 주요 쟁점으로 걸었다. 매년 국민회의 대회와 지역 대회에서 이 쟁점은 주목을 받으며 논의되었고 결의안들이 통과되었다. 사회 활동가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지역에서 국제활동을 하였다. 이 쟁점과 연관된 활동의 일부로써 국민회의 역시 정부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선전전을 하였다. 바로 그것이 국민회의가 일반 인민―처음에는 가난한 중간계급 그리고 점차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이었고 이들은 계급 이익을 지키려는 인도 부르주아와 투쟁하였다―들을 결집할 수 있는 조직으로 바뀌게 된 이유이다.

Ⅲ. 힌두 부흥주의: 민족주의의 일그러진 얼굴

앞 장에서 우리는 영국 지배로부터 인도를 해방시키려는 목적과 근대 부르주아 사회로 이끄려는 다양한 운동이 인도에서 발전하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우리는 그런 모든 운동들이 강조하는 공통 요소가 근대 부르주아 정치 발전이었고 인도 국민회의는 이런 발전의 필연적인 확장이었음을 보았다.

부르주아 운동과 외관상 달라 보이지만 부르주아 민족주의 발전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운동 역시 같은 시기에 등장하였다. 그것은 고대 인도 문화와 종교적 믿음들의 부활 운동이었다. 그 운동은 라자 람모한 로이가 이끄는 사회개혁과 문예부흥운동에서 자취가 발견되었다. 힌두 사회, 그것의 풍습과 관습의 근대화를 시도했던 람모한 로이는 기독교의 선전과 성직자들의 복음 전파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근대화와 문예 부흥 과정에서, 벵갈의 브라마 싸마즈와 마하라스트라의 쁘라르타나 사마즈(Prarthana Samaj) 같은 조직들이 근대화를 강조했지만 힌두 부흥주의 운동으로써 등장하였다.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마하라스트라의 죠띠바 풀레가 이끈 운동처럼 몇몇의 운동들은 불가촉천민들을 포함하여 후진 카스트들의 고양이 구호였다.6) 그런 운동들의 목적은 힌두 사회의 카스트 체계 아래서 억압받는 공동체들에게 풍부한 고대 인도 문화를 제공하여 그들을 사회적・문화적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문예부흥과 힌두부흥주의가 통합되었다. [스리 나라야나(Sri Narayana)가 께랄라에서 힌두의 카스트에서 배제된 이들만을 위해 사원과 수도원 설립을 시작한 것이 이러한 운동의 가장 분명한 형태였다.]

동시에, 힌두 사회의 근대화를 위해서 고대 힌두 문화를 재생하려는 독립적인 운동들이 시도되었다. 그런 운동들의 전형적인 예로써 벵갈에서 스리 라마크리쉬나(Sri Ramakrishna)와 비베카난다(Vivekananda)에 의해 시작된 운동, 펀자브에서 다야난드 싸와스와띠(Dayanand Saraswati)의 싸마즈(Samaj)운동, 남인도의 신지(神智)협회(Theosophical society)가 있다. (물론 이 운동은 인도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만들어졌지만 남인도 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운동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에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1857-59년 봉기에 대한 탄압이 있었을 때, 영국의 행정과 사회문화 체제가 인도의 사회체제와 문화보다 우수하다는 일반적인 감정이 인도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라자 람모한 로이부터 인도국민회의의 설립자들까지, 부르주아 사회개혁가들과 정치지도자들의 시도는 그런 환상을 끝장내고 인도 사회를 근대화시키며 영국체제와 동등한 정치・행정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편 라마 크리쉬나-비베카난다 운동, 아리아 싸마즈(Arya Samaj)그리고 신지협회는 그들이 느끼는 모든 열등적 강박감은 근거가 없음을 깨우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종교지도자 비베카난다, 다야난드 싸라스와띠, 블라바뜨스끼 여사7) 그리고 힌두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기타 지도자들의 기본적 접근은 현재 영국 지배자들의 조상들이 야만인처럼 살고 있었을 때 인도에 존재했던 문명은 훨씬 앞섰다는 주장에 기초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어떤 왜곡과 일탈이 때때로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인도의 대중들은 그 왜곡과 일탈의 나쁜 효과를 극복함으로써 고대 힌두 문화를 부활시키고 다시 생기 있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만약 인도 대중들이 그런 부흥 과정을 전진시키는 데 분투한다면, 서구지배에 도전할 수 있고 그것을 끝장낼 수 있다고 확고히 주장했다. 그런 모든 운동들 중 스리 라마크리쉬나가 시작한 운동이 가장 유명하였다. 정통적 분위기에서 자라났던 그는 다크쉬네스와르(Dakshineswar)사원에 도착해 그곳에서 사제로서 초기활동을 시작했다. 곧 그는 희생을 통한 헌신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평화의 사도로서(man of peace) 널리 알려졌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독실한 사람이었고 부르주아 사회개혁, 문예 부흥의 기운조차 훼손하지 않는 이상주의자, 또는 민족독립을 추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상주의와 정신주의에 제약되기는 하지만, 스리 라마크리쉬나의 설교와 행동은 근대 부르주아 민족주의 성장을 위해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였다. 절대적인 전통적 분위기에서 탄생했고 자라났지만, 그의 가르침과 실천은 정통 힌두문화에 혐오감을 주는 요소가 있었다. 그의 정신적 가르침과 실천은 종교와 카스트 차이들을 극복하였다. 그는 대중들이 브라민이건 브라민이 아니건, 무슬림이거나 기독교인이든지 간에 깔리(Kali)8)와 쉬바(Shiva)9)의 열성신자로 개종시키려 노력하였다. 사실 그는 우세한 공동의 관습 및 풍습에 도전하는 깔리 사원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나중에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의 경전과 관습 또한 연구하여 스스로 그들에 적응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근대주의는 전혀 아니지만, 그는 카스트 차별, 종교적 미신 그리고 힌두 사회 구조에서 검은 반점들로 간주되는 편견 위에 세우는 새로운 정신적 운동을 수립하였다.

근대 사회를 목표로 일하는 신세대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라마 크리쉬나와 전혀 다른 근대적 시각을 갖고 있던 이들조차 그에게 매료되었다. 변호사들, 의사들, 교수들, 정부 고위 관료와 고위층들은 스리 라마크리쉬나의 제자가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라마크리쉬나의 매력적인 명상을 통한 정신적 가르침과 실천에서 찾을 수 있는 인도 문화와 문명의 우수성을 수립하기 위해 힌두와 고대 그리스 그리고 근대 유럽 철학의 비교 연구에 몰두하였다. 벵갈 지역에서 사회 개혁과 문예무흥운동으로 유명한 께샤브 찬드라 쎈10)이 그런 학자들 중 하나였다. 나렌드라나쓰 듀트(Narendranath Dutt)는 라마크리쉬나의 제자였으며 탁월한 명성을 얻으며 성장했다. 그는 상급 교육을 마친 후 가족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스리 라마크리쉬나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곧 스리 라마크리쉬나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이 죽은 이후 전세계로 스리 라마크리쉬나의 가르침을 선전할 것을 맹세하는 싸냐씬11)의 창설자 중 가장 최선두주자가 되었다. 그는 싸냐씬의 지도자로서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로 개명했고 이 이름으로 훗날 더 유명해졌다.

스리 라마크리쉬나의 가르침을 선전하기 위해서 인도와 해외를 돌아다니는 비베카난다의 여행은 표면적으로는 힌두 종교 선전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외국 지배자들에게 짓밟힌 인도의 영혼을 부활시키는 운동이었고 그들의 문화에 도전하는 운동이었음이 드러났다.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종교회의에서 그가 한 연설과 그 연설이 서구 지식인들로부터 받은 감탄은 인도인들에게 그들의 열등감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인도 대중들이 그들을 과도하게 지배하는 외국에 도전할 수 있는 문화적 전통의 계승자라는 도덕적 감정 형성을 도왔다.

또한 라마크리쉬나, 비베카난다 담론은 원칙상 정신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베단따(Vedanta)12) 이념을 설명하고 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라마크리쉬나와 달리 비베카난다는 그의 담론과 편지에서, 어느 정도는 공공연하게 근대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발전에 유익한 논거를 만들어냈다. 그는 표면적으로 종교적 기득권층과 사제들을 적대하는 표현을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자면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드러났듯이, 비베카난다는 가난과 고통이 나라에 걷잡을 수 없이 만연해 있을 때에는 종교적 발언들을 할 시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 것들이 사라졌을 때 그는 종교적 담론들을 논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그런 시기에는 가난한 사람들, 극빈자들 그리고 약자들이 진짜 신(神)들이고 사제들을 걷어차 버려야 한다고 표현하였다. 민족 독립을 위한 염원은 그의 담론들을 통해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야난드 싸와스라띠의 지도로 펀자브에서 등장한 아리야 싸마즈는 라마크리쉬나와 비베카난다의 지도로 발전되었던 운동과 여러 차원에서 달랐다. 아리야 싸마즈는 이슬람과 기독교와 직접 충돌함하면서 운동으로 나타났다. 아리야 싸마지의 후원으로 출판된 글과 강연은 공개적으로 이슬람과 기독교를 비판하고 규탄하였다. 아리야 싸마즈는 나중에 힌두-무슬림 폭동을 일으켰던 소 도살 금지를 쟁점으로 떠오르게 하였다. 다야난다 싸와스와띠가 쓴 ≪싸띠아르타 쁘라까쉬(Satyartha Prakash)≫ 같은 책들은 공동체의 충돌을 야기하는 종교적 편견을 조장하였는데, 그 책들은 외국 선교사들이 반-힌두 서적을 출판하는 것과 똑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크리쉬나-비베카난다 운동과 아리야 싸마즈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두 운동은 고대 힌두 문명 유산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두 운동은 인도인들의 단결 대신에 비힌두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접근은 외국 지배에 저항하는 투쟁에서 비힌두인들을 소외시키는 것을 도왔고 바로 그 점은 똑같은 비율 만큼 민족독립이 고대 힌두문화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감정을 이끌어냄으로써 힌두 대중들을 반영투쟁으로 끌어모으는 데 기여하였다.

신지협회 운동은 그런 결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신지협회 운동은 다른 두 운동들이 행했던 것처럼 오랜 기간 전인도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남인도에 국한된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갖고 있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영국 지배에 저항하면서 자치지배운동(Home Rule movement)을 조직했던 탁월한 지도자 박사 애니 베싼트(Annie Besant)13)씨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종교적 조건을 뛰어넘어서 하나의 정치적 구호에 기초하여 모든 계층의 인도 인민들을 조직하려 분투했던 운동이었다.

그러함에도, 인도에서 힌두 부흥을 위한 움직임이 이런 세 운동들에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힌두 부흥운동은 시작 초기에, 인도국민회의 결성 이후 좌파 민족진영의 필수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발 강가다르 띨라크(Bal Gangadhar Tilak)같은 지도자가 이끌던 국민회의 ‘급진주의자들(extremis-t)’은 인도의 여러 지역들에서 비밀 혁명조직을 결성하였는데, 힌두 부흥운동과 연계되어 있었다. 가네샤14) 축제는 띨라크가 조직하였고, 두르가 뿌자15)와 깔리 뿌자16)는 벵갈 지역의 혁명가들이 조직하였으며, 께랄라의 아야빠 쎄바 샹17)과 여러 조직에서 만든 이런 힌두 축제들과 관련된 행사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 하에 힌두부흥주의가 발전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조직들의 배후에 있는 이념은 바라트 마타(Bharat Mata, 어머니 인도)의 개념과 함께 반데 마따람18) 구호를 내세운 반낌 찬드라 챠떼르지(Bankim Chandr-a Chatterjee)같은 힌두 지식인의 지적 창조물들이었다. 이 사상은 “적을 무찌르는” 여신 데비19)의 축복과 함께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다.

힌두 부흥주의의 고무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인도 국민회의를 형성되면서 성숙해졌지만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내재한 취약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 운동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힌도인들의 종교적 감성을 고려하였다. 교육받은 엘리트라는 제한된 계층을 벗어나 대중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길 원한다면, 그런 감성들을 동반한 태도와 말로 행동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상징물과 서사시들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편으로는 외국 지배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게 대중들을 고양하도록 띨라크가 조직한 가네쉬오차브20)와 쉬바지 우뜨사브21) 사례같은 선동적인 계획들을 고안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무슬림과 기타의 사람들과 싸웠다.

이것은 동전의 또 다른 면이었다. 힌두 부흥주의 운동이 민족주의 일부분으로 조직되자 자연스럽게 그 반작용으로 이슬람 부흥주의 운동이 등장하였다. 이 두 부흥주의 운동이 서로 충돌할 때, 힌두 사회 내부의 상층 카스트와 하층 카스트 사이의 모순들이 힌두 울타리에 묶이고 시크와 기독교 같은 소수의 종교는 그들끼리 뭉치면서 그들 자신의 특성에 따른 부흥주의 운동들을 전개하였다. 영국 지배자들은 민족운동의 분열을 야기하기 위해 그러한 다양한 계층의 대중들 간에 있던 모순들을 자연스럽게 심화시키려 노력했고 그것을 이용하였다. 이것이 바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1947년 8월 15일은 이런 결과가 만든 비극의 결말을 반영하였다.22) <노사과연>

1) Tara Chand, Ibid, p. 554에서 인용

2) 편집자주: 영국 제국주의가 세계 곳곳을 식민화하고 현지병들을 편성하며 그 일부를 정예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우생학적이며 인종주의적 개념.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더, 펀자브의 시크교도들 네팔의 구르카족이 그 사례. 이는 전형적인 만들어진 신화이나, 제국주의 지배자들의 논리가 오히려 피지배자들의 자부심 형성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3) 역주: 인도 식민정부에게 책임을 묻는 형식적인 입법기관이다. 영국 제국주의는 1858년 인도정부법(The Government of India Act)을 제정해 영국의회가 인도정부를 직접 통치하도록 하였다. 영국 내각은 인도 장관(A Secretary of State for India)을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인도에서 세금을 걷게하는 등 직접 통치하였다. 그러면서 의회 위원회(The Parliamentary Commissioners)를 인도위원회(Council of India)로 바꾸었다. 이 인도위원회 의원들은 15명 가량되었는데 영국정부가 친정부 인사들로 지명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인도의 중앙입법부는 있으나 마나한 상징적인 조직에 불과하였다. 1858년 인도 정부법은 1919년과 1935년에 일부 개정이 되었지만 식민지 정부의 기본 성격에는 변함이 없었다.

4) Tara Chand, Ibid, p. 564.

5) 역주: Communal. 인도에서 힌두공동체와 무슬림 공동체를 총칭하는 말이다. 의미상 종교공동체를 뜻한다.

6) 역주: 인도 전통사회에서는 힌두교 종교적 관념의 기준에서 오염이 심한 사람들을 아예 카스트 체제에서 배제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힌두 사회에서는 이들과 접촉하면 힌두 카스트들이 오염된다고 보고 이들과의 접촉을 금기시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불가촉천민들(Untouchables)’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간디는 이들을 힌두 사회가 감싸 안아야 한다며 하늘의 자식이라는 뜻의 ‘하리잔(Harijan)’이라 불렀다. 반면에, 인도의 헌법을 만들었지만, 힌두 카스트 사회를 부정하고 불교로 개종한 암베드카르(Ambedkar)는 불가촉 천민들은 ‘억압받는 자’라는 의미의 ‘달리트(Dalit)’로 불렀다. 카스트간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인도 헌법에서는 이들을 ‘지정 카스트(scheduled castes)’라 하였고 이들에게 정치・경제적 배려를 하였다. 그러나 이런 차별적 보상정책들은 카스트 사이의 경쟁과 갈등을 촉발시켜서 불평등한 카스트 체제가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 지배적인 카스트 계급은 지정카스트에게 의무적인 교육할당제, 공무원 임용할당제, 지방의원 할당제, 직업할당제 같은 특혜들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 선거는 이런 특혜와 정부 보조금을 둘러싸고 카스트 간 경쟁이 치열한데, 이런 현상들을 인도의 ‘카스트 정치’라 하며 인도 정치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카스트 사이의 경쟁이 심하다 보니 유권자들에게 향응과 금품 제공은 물론 마을의 지배적인 카스트가 힘이 약한 카스트들에게 압력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선거 때 투표함을 훔치고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7) 편집자: Helena Petrovna Blavatsky[Олена Петрівна Блаватська, 1831-1391]. 구러시아제국(현 우끄라이나) 출신의 영국 오컬트주의자로 신자협회의 공동설립자. 블라바트스키는 인도에 2년간 머물렀는데 익명의 힌두가 자신을 후원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8) 편집자: Kālī. 힌두의 파괴의 신으로 쉬바의 배우자이며 빠르바띠(Pārvatī)의 제2인격. 인도 꼴까따가 바로 깔리 숭배의 본산이다. 라마크리쉬나는 바로 깔리 신전의 사제였다.

9) 편집자: Shiva. 비쉬누, 브라마와 함께 힌두의 3 대신 중 하나로 파괴의 신. 한편으로 현실의 업보와 고난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여러 인민들의 숭배를 받는 신이다.

10) 편집자: Keshab Chandra Sen[1838-1884]. 브라마 사마지의 대표. 영국이 인도 땅에 들어오게 되면서 고대 아리아인의 두 갈래가 비로소 다시 합쳐지게 되었다고 주장.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식민 지배자인 유럽인과 같은 혈통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적극 활용하였다.

11) 편집자: Sanyasins. 산스크리트어 संन्यास. 힌두 경전에서 싸냐씬은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이 없고 현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며 오직 영원한 자아와 일치하는 생활을 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보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12) 역주: 초기 인도 철학은 베다 전통에 갖혀 있었다. 그런데, 사회 물질적 토대가 발전하면서 고대 인도인들의 사유체계에 급진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뿌르바-미맘사(Pūrva-Mīmāṃsā)’ 또는 단순히 ‘미맘사(Mīmāṃsā)’ 체계의 등장은 고대 인도철학에서 인식론(epistemology)적 체계와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인도철학이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학파는 인간 행동의 기계적 작동의 간섭으로 구성된 정신적 작용자(agent)를 신(神)으로 규정하였고 그런 신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세계 창조와 파괴 그리고 그 두 기능이 부여된 쁘라쟈빠띠(Prajāpati) 사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단순히 신을 찬양하는 베다의 비논리적 전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윤회론적 세계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기 고대인도 철학은 삶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물리적 ‘악마’로부터 보호받고 ‘악마’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문제에 몰두하였다. ‘악마’로부터 ‘자유(Moksa; Liberatio-n)’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런데 미맘사 학파는 그런 미신과 같은 ‘악마로부터 자유’라는 문제에는 무관심하였다. 악마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신을 숭배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으로 보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철학적 이상주의를 반대하면서, 인식론적 관점에서 논쟁하고 논박하는 존재론(Ontology)에 몰두했다. 물론 요가(yoga)와 같은 신비주의적인 경험론에 제한되어서 비과학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신이 아닌 관찰자의 주체적 상상력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그 당시 대단히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철학적 사유의 주체를 사제(또는 성직자) 계급으로만 제한함으로써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철학적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한편, 이와 같은 미맘사 학파에 뿌리를 두었지만 후기 베다 즉, 우빠니사드(Upani-sads)의 철학적 질문에만 집중하는 학파가 등장했는데 뿌르바-미맘사와 구별하여 우따라-미맘사(Uttara-Mīmāṃsā)라고 한다. 이런 우따라 미맘사 학파의 또 다른 이름이 베단따(Vedanta)학파이다. 베단따의 사전적 의미는 ‘베다(Veda)의 말기(en-d)’ 또는 우빠니사드(Upanisads)’이다. 우빠니사드는 일반적으로 ‘남이 모르는 지식(Secret knowledge)’이라고 알려졌는데, 사전적 의미로 풀어보면 ‘우빠(upa)-니(ni)-사드(sad)’는 ‘누군가의 옆에 가까이 앉다(to sit down near someone)’이다. 베단따 철학의 근본문제는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 또는 ‘브라만(Brahman)’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다. 학자들에 따라 브라만을 신(神)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또는 ‘자아(아트만, Ātman, self)’를 궁극적 실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철학자들은 궁극적인 실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논증하고 논박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형성된 철학적 내용과 체계들을 통틀어서 베단따 철학이라고 한다. 베단따 철학은 불교에도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베다 문헌을 기초로 하는 인도 고대철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Walter Ruben: Indian Philosophy; A Popular Introduction, People’s Publishing House, Delhi. 1964년 초판 발행, 2007년 8판 참고함.


13) 편집자: (1847-1933) 영국 사회주의자 신지주의자, 여성해방활동가이자 작가.

14) 편집자: 시바의 아들로 시바가 그 목을 자르고 코끼리의 목을 붙여주었다. 역경을 헤쳐나가는 지혜와 지식의 신. 원래는 힌두교 성립 이전부터 인도에 존재했던 토착신앙의 신이라 한다.

15) 편집자: Durga Pooja. 힌두의 여신 푸자를 숭배하는 축제.

16) 편집자: Kali Pooja. 차람파(Charampa) 마을에서 바드라칼리(Bhadrakali) 여신을 모시는 축제.

17) 편집자: Ayyappa Seva Sangh. 아야빠는 힌두의 여신이며 이를 모시는 축제인 듯하다.

18) 편집자: Badne Mataram. 우리나라 만세라는 뜻으로. 벵갈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반낌 찬드라 챠떼르지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조국 인도에 바치는 노래. 현재도 ‘제2의 국가’라 불린다.

19) 편집자: Devi. 여신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힌두교의 샥띠와 동일어. 쉬바와 비쉬누를 숭배하는 교파에서는 각각 주신의 배우자 개념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쉬바의 배우자는 빠르바띠, 비쉬누의 배우자는 라크쉬미다.

20) 편집자: Ganeshotsav. 가네샤 축제.

21) 편집자: Shivaji Utsav. 쉬바신의 축제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22) 역주: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으로 양 진영은 각각 독립국가를 수립한다. 인도는 세속주의 국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힌두인들이 다수인 국가이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교를 정식 국교로 지정한 이슬람 국가이다. (편집자: 파키스탄은 인도의 양쪽에 나뉘어 있었는데, 벵갈어를 쓰는 동파키스탄과 우르드어를 쓰는 서파키스탄은 서로 폭력적으로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동파키스탄은 오늘날의 방글라데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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