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노동자는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성진 | 회원

 

 

문제제기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받는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라는 말은 1875년 맑스의 고타강령 비판에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맑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표현했다면 무엇이라 했을까? 아마 필자의 생각으로는 각자는 능력을 초월해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다라고 표현할 것 같다.

에구, 역시 필자는 맑스와 엥겔스는 아닌 듯싶다. 무언가 멋있는 말이 될 줄 알았는데 써 놓고 보니 역시나 그냥 그런 말이 된 듯싶다. 여하튼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말은 노동자에게 있어 자본주의 사회는 철저하게 슈퍼맨을 요구하고 있으면서 최소한의 생계비조차 안 되는 임금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조차도 노동현장에 채용이 된 노동자의 경우 해당되는 말이며, 해고와 실업 상태에 있는 노동자의 경우에는 그마저 없는 현실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조금만 나눠 주면 그래도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뭔 놈의 세상이 이렇게 빡빡할까 하는 생각 말이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도 그러할 듯싶다. 조금만 나줘 주면 함께 잘 먹고 잘살 수 있는데 왜 이리 빡빡하게 구는지 말이다. 꼭 환수를 위한 투쟁까지 해야만 하는 것인지 말이다. <사회변혁노동자당 정책위원회>의 분석 결과를 보면 사내 유보금의 규모는 2015년 말 현재 10대 재벌 사내 유보금 549조 6,326억 원(14년에 비해 9.1%증가)이고 30대 재벌의 경우에는 753조 8,004억 원으로 2014년에 비해 6.1%가 증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재벌들의 사내 유보금의 규모는 같은 해인 2015년 가계 부채가 1,205조 원임을 감안한다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상상이 안 되는 규모인 셈이다. 사내 유보금은 2002년 사내 유보금을 대상으로 세금을 매기는 사내 유보금 과세 제도가 폐지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것이 정설인 듯싶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사내 유보금을 환수하여 최저임금, 비정규직, 청년실업, 공공의료체계 구축 등 시급한 4대 민생 공공 과제 해결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2015년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가 7월 18일 진행된 4차 총회에서 운동으로 결정을 하고, 곧이어 같은 해 8월 12일 민주노총, 참여연대, 민변 등이 참여하여, 토론회를 진행한 바가 있다. 이후 같은 해 8월 18일 여의도 전경련 앞에서 환수운동 선포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선전전을 진행하면서 11월 노동자연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 협의회, 문화연대, 한국진보연대 등 시민사회 단체들로 구성된 재벌사내유보금환수운동본부가 출범을 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출범을 통해 재벌들이 온갖 불법행위로 쌓은 철옹성 같은 세습 지배력과 법 위에 군림하는 재벌 권력으로 부를 독점해 기업 사내 유보금 1,000조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재벌 곳간에 쌓인 사내 유보금을 환수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그러나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운동본부의 출범 전부터 많은 논란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을 둘러싼 논란과 논쟁, 다양한 질문과 의혹 그리고 반대적 견해를 포함한 주장 등에 대해 대표적인 내용 몇 가지를 뽑아 보았다.

 

재벌들의 사내 유보금이 환수만 되면 좋겠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냐?

집적과정이라 할 수 있는 생산과정을 그대로 두고 분배과정에서의 사내유보금 환수 투쟁이 무슨 의미인가?

환수의 주체는 누구인가? 지금의 자본가 국가 권력이라면 환수하더라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에 제대로 사용되겠냐?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노동자계급 투쟁의 혼선만 가져올 뿐이다.

재벌들의 곳간을 열 정도의 압력이 가능한 힘이면 그냥 세상을 바꾸지 왜 겨우 환수 투쟁이냐?

재벌환수 투쟁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투쟁의 직접적 과정인 이행기 강령의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 현실에서는 문제가 있는 투쟁이다.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대략 뽑아본 것들이다. 물론 여러 가지 의견이나 의혹 또는 반대적 견해의 질문들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 이외에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수많은 논란과 의혹 속에서도 2016년 민주노총까지 결합해서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며, 조선 산업의 구조조정의 한복판에 서 있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등 주요 노동조합의 현장 투쟁의 과정에서 사측에게 사내 유보금을 통해 현안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등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이제 단순하게 시민사회단체의 경제 정의적 측면의 투쟁에서, 노동현장의 직접적 투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에 대해 명확하게, 노동자에게 환수 투쟁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명확하게 짚어야 한다. 그것은 임금인상이나 고용안정 그리고 노동조건의 강화나 비정규 철폐와 정규직화 투쟁과 같은 수준에서 노동운동이 제기해야 되는 내용인가? 아니면 최소한 주면 좋고 안 주면 뭐 어쩔 수 없고 수준의 투쟁일 것인가? 시민사회단체에서의 단순한 피켓 시위를 넘어 노사 교섭의 석상에서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을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되는 것인가?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질문과 의혹 그리고 반대적 입장에서의 주장 등에 대해서 노동자는 어떻게 설명을 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노동자의 경영참여 논쟁, 재벌해체 투쟁 관련한 논쟁, 노사정위원회 등 사회적 합의주의 참여 관련한 논쟁, 기본소득제 논쟁, 우리가 받는 임금에 있어 임금과 물가와의 관계와 관련한 논쟁 , 반자본주의 투쟁과 반자본 투쟁 관련한 논쟁, 국유화와 사회화와의 논쟁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어쨌든 우리는 먹고살기 위한 투쟁에서 수많은 지점에 많은 논쟁과 논란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그것을 주장하는 이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것들이 노동운동에 어떠한 해악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학습을 한 바가 있다.

 

이에 필자는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에 대해 노동자는 어떠한 지점에서 생각을 시작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 동지들과 함께 논의를 하기 위한 마음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쨌든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을 주장하는 동지나 아니면 위에서 열거했듯이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모든 동지들이 원하는 것은, 노동자의 해방, 임금 노예의 쇠사슬을 끊고 노동해방된 세상을 원하는 것 아닐까? 물론, 이 지긋지긋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픈 이들의 주장이라면 별로 신경 쓰고 싶지는 않다. 누구 말대로 니 갈 길 가라! 난 내 갈 길 갈 테니까!라고 말하면 되니까.

 

그러나 문제는 꼭 그냥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문제는 잘못된 논리를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면야 누가 뭐라 하겠느냐만은, 문제는 꼭 노동자에게 주문을 하고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자본과 정권의 국가 이데올로기, 경제위기 이데올로기, 나라 살리기나 회사 살리기 논리에 헷갈리고 있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말이다.

결국 나의 의지나 또는 주장하는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노동자의 해방, 임금노예의 쇠사슬을 끊고 노동해방으로 진군하기 위한 장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진군을 훼방 놓는다면, 이는 당연하게 지적 및 문제제기를 하고, 파업 투쟁 현장에서 이를 파괴하고자 쇠 파이프를 휘두르는 노동자들의 적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규정하고 분쇄해야만 할 것이다.

 

정부로부터 양보를 위해 노동자 운동의 열망을 제한하려는 의도는 바로 기회주의일 뿐이다.

 

 

몸말 1: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을 논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어떠한 전망과 희망을 가지고 어떠한 투쟁과 실천을 할 것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며, 이는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있어 이 글의 주제인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분석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다.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건, 화폐(돈)라는 자본을 가지고 있건, 지구 표면의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본(생산수단, (화폐)자본, 토지)을 통해 잉여가치(이윤, 이자, 지대)를 취하는 자들을 우리는 자본가, 자본가계급이라 칭한다. 자본가계급은 잉여가치 즉 이윤이나 이자 또는 지대를 취하지 않고서는 자본가계급이라는 사회적 존재성에 대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즉 자본가계급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잉여가치를 취해야 하며 그리고 자본가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더욱더 거대해진 잉여가치를 전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잉여가치를 산업자본가는 이윤이라는 이름으로, 은행 자본가는 이자라는 이름으로, 토지 자본가는 지대라는 이름으로 나눠 가지고 나머지는 재생산과정에 재투자를 한다.

전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에서 돈을 아무리 마구 찍어내도 그리고 이자를 낮춰서 시중에 돈을 늘이더라도 잉여가치는 늘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산업자본이 가지고 가는 이윤이, 은행 자본가가 가지고 가는 이자가 그리고 토지 자본가가 취하는 지대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자본가들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이 나누어 가지는 이윤, 이자, 지대 즉 잉여가치는 그 어느 곳에선가 그 누군가의 에너지에 의해 형태를 바꾸고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바로 그 어느 곳에선가 그 누군가의 에너지에 의해 형태를 바꾸고 전달되어진 잉여가치를 이윤이나 이자로 그리고 지대라는 이름으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자본가계급이 자본가계급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개별 자본가 간의 경쟁에서 다른 자본가를 누르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끝이 없을 정도로 더 많이, 더 많이를 외치면서 잉여가치를 전취해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이러한 상황을 보지 않는가? 개별 기업 간의 경쟁에서 밀리는 기업은 도산이나 파산을 하고 이 속에서 살아남은 기업은 도산이나 파산을 하는 기업을 인수하여 더욱더 거대해지는 것을 말이다.

자본이 자본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이윤이나 이자 또는 지대라 불리는 잉여가치를 취하는 방법을 전제로 먹으면 먹을수록 거대해지는 불가사리처럼 도산이나 파산을 하는 기업을 인수하여 거대화하는 길이다. 우리는 전자를 자본의 집적이라 하고 후자를 자본의 집중이라고도 부른다. 어쨌든 사회 전체적으로 한정된 잉여가치를 나누어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그 누군가의 에너지가 형태를 달리해서 변화된 잉여가치를 취함으로써 자본가라는 사회적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 그 누군가의 에너지가 형태를 바꾸고 전달되어진 잉여가치에 대한 비밀만 파헤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존재하는 원초적 비밀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된다. 이 말은 바로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사회적 계급 관계가 소멸된 노동 해방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원초적 비밀을 해소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우선 그 어느 곳에서 그 누군가를 확인하기 전에 산업자본과 은행자본 그리고 토지자본의 생산・유통 순환 과정과 잉여가치의 전취과정을 한 눈에 확인해 보자([그림 1]을 참조).

 

[그림 1] 산업자본의 생산・유통 순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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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에서 확인되듯이 산업자본이 소유하고 있는 화폐는 은행자본으로부터 대출을 통해 구해진다. 이렇게 획득된 화폐로 상품을 구입하는데, 이 상품은 바로 토지나 도구 또는 기계와 같은 생산수단과 함께 노동자의 노동력 구매를 의미한다. 산업자본이 구매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통한 생산과정은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는데 이때의 상품΄은 산업자본이 처음에 구매했던 생산수단과 노동력이라는 상품과는 달리 α가 생성된 상품΄이다. 여기서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원초적 비밀이 나타난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적용된다. 상품΄은 정확하게 상품보다는 α가 많은 상품이다(상품΄=상품+α).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않은 이상 α는 생산과정에서의 그 어느 곳에서 그 어떠한 에너지가 형태를 달리 변화해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α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누구의 에너지일 것인가? α는 [그림 1]에서 보이고 있듯이 생산과정에 투여된 생산수단이나 또는 노동력 둘 중 하나이거나 또는 둘이 혼합된 상태에서 형성된 에너지가 그 형태를 바꾸어 이전된 것이다.

 

그럼 차근차근 확인을 해 보자.

 

토지나 도구 또는 기계로 구성된 생산수단은 그 자체로서 시간이 가면 자신의 가치를 또 다른 형태로 그대로 이전할 뿐 별도의 에너지를 생성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상품을 흔히 불변 자본이라 칭한다. 즉 가치가 변화지 않는 자본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노동력이라는 노동자의 노동할 수 있는 힘은 어떻게 운용이 되는가에 따라 가치가 변화한다. 쉽게 생각해 보자. 권위주의적 폭압 통제로부터 노동력의 대가(임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하거나 또는 달콤한 작업자의 지시에 의해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을 함으로써 임금보다 일을 더 많이 하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노동자의 노동력은 토지나 도구 또는 기계와 같은 생산수단과는 달리 작업자의 태도에 따라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인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잉여 가치)를 생산하게 되는데 이를 우리는 가치가 변화는 자본 즉 가변 자본이라 칭할 수 있다. 결국 산업자본이 은행자본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조성한 자본으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하여 생산과정을 거쳐 새로운 α를 생성하는데 바로 이때 생성되는 α는 노동자의 노동력이라는 가변자본에 의해 생성이 되며 이는 상품은 화폐로 α는 잉여가치로 실현되는 유통 과정을 거치면서 생산과 유통의 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장황한 과정을 거쳐 드디어 원초적 비밀이라 할 수 있는 자본가가 사회적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비밀이 밝혀졌다. 생산과정에서 투여된 노동력에 의해 α가 생성이 되며 유통 과정을 거쳐 잉여가치로 실현되는 바로 자본주의 자체의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자, 이제 노동자의 노동해방, 임노동 철폐,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해졌다. 자본가라는 사회적 신분이 유지 존속되는 잉여가치의 비밀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해방을 위해서는 생산과정에서 생성되는 α 즉, 잉여가치를 산업자본가가 자신의 것인 양 가져가는 구조를 깨기만 하면, 바로 노동해방이라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진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쉽지만은 않다. 생산과정에서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전취하는 구조를 어떻게 파괴한단 말인가? 여기서 이러한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자본가계급이 전취하는 구조를 파괴할 무기 즉 노동자 국가가 필요하게 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국가는 이러한 자본가계급에 의한 잉여가치 전취 구조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강화하는 데 복무하게 된다. 이에 반해 노동자 국가는 생산과정에서 자본가계급이 잉여가치를 전취하는 구조를 파괴함으로써 계급이 없는 사회로의 일보 전진을 꾀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노동자에게 있어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적정한 노동 강도 유지 투쟁은 위 [그림 1]에서 확인이 되듯이 생산과정에서 생산되는 α 즉, 잉여가치를 자본가계급이 일방적으로 취하는 구조를 깨지 못하는 투쟁으로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투쟁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노동자들에게 있어 임금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적정한 노동 강도 유지 투쟁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노동 해방된 새로운 세상이 되기 전까지라도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먹고 살기 위한 투쟁,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적정한 노동 강도의 유지라는 가장 경제적 투쟁은 노동자 대중에게 있어 당면한 투쟁이다. 그리고 또한 일방적으로 잉여가치를 전취하는 구조를 파괴하지는 못하지만 더 많이, 더 많이라는 잉여가치의 일방적 전취량을 축소하는 투쟁으로서 또한 의미가 있는 투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노동자들이 노동 해방된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의 사회적 신분을 유지・존속 그리고 확대 강화시키는 생산과정에서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일방적으로 취하는 구조를 파괴하는 길뿐이다. 이러한 길에 있어 노동자계급에게 가장 유일한 무기는 바로 노동자 국가권력일 뿐이다. 그리고 또한 노동가 국가권력에 의해 생산과정에 대한 투쟁이 전개되지 못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의 먹고 사는 문제 즉 생존권이 걸린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적정한 노동 강도 유지 투쟁은 그 자체로서 생존권에 대한 투쟁이자 자본가계급을 존속시키는 잉여가치의 전취량을 축소하는 투쟁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몸말 2: 사내 유보금이란

 

서두가 무척 길어 우선 죄송하다는 말부터 하고 시작을 하겠다.

그럼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이 노동자계급에게는 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약이 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 글에 주제이다.

이제 하도 들어서 사내 유보금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 글을 읽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대충 알 것이라는 생각된다. 사내 유보금은 [그림 1]에서 보면 맨 오른쪽에 있는 잉여가치이윤이자 그리고 지대로 나눠지고 나머지 재투자되는 부분을 말한다. 재투자는 결국 다시 순환되는 생산 및 유통 순환 과정에서 새롭게 생산수단 및 노동력을 구매하는 자본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학교에서 배우는 대차대조표상으로 보면 사내 유보금은 존재하지 않는 계정이다.

우선 대차대조표에 대해 샛길 한마디만 하고 넘어가자. 물론 이 글을 읽는 많은 동지들의 눈에는 대차대조표가 보다 쉽게 눈에 들어올 수가 있다. 그러나 항상 자본가계급이 이야기하고 있는 재무상태표인 대차대조표는 위에서 이야기한 자본가계급이 일방적으로 전취하는 잉여가치의 비밀을 숨기고자 고안된 방법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원초적 비밀이라 할 수 있는 잉여가치의 생산이 생산과정에서 그것도 노동자의 노동력이라는 에너지가 형태를 변경하여 생산된 것이라는 판도라의 상자의 열쇠를 무던히 숨기고자 고안된 말도 안 되고 알기도 어렵게 만든 표라는 점을 이번 기회에 밝히고 넘어가자.

어째든 아래 [그림 2]는 우리가 흔히 보는 대차대조표다. 여기서 사내 유보금은 오른쪽 자본에 있는 자본 잉여금이익 잉여금을 합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자, 그럼 대차대조표가 어떻게 우리 노동자들을 헷갈리게 하는지 알아보자.

우선 [그림 2]에서 현금이라 할 수 있는 왼쪽에 있는 유동 자산이 100억 원이고 실물자산이라 할 수 있는 비유동 자산이 200억 원 그리고 오른쪽 그림에서 총부채가 50억 원에 자본금이 100억 원이고 사내 유보금이라 할 수 있는 자본 잉여금과 이익 잉여금이 150억 원이라 해 보자.

우선 [그림 2]의 재무 상태를 보이고 있는 A기업이 전기 순이익을 50억 발생했다고 치자. 이때 A기업은 순이익 50억을 그래도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다면 [그림 2]에서 왼쪽 자산에서 유동자산이 150억 되며 비유동자산은 그대로 200억이 된다. 그리고 오른쪽 자본 중 사내 유보금이라 할 수 있는 자본잉여금과 이익 잉여금의 합이 150억 원에서 200억 원이 된다.

이에 반해 동일하게 순이익 50억 원이 발생한 B기업의 경우 A기업과는 달리 순이익 50억 원을 유동자산인 현금으로 보유하지 않고 비유동자산인 설비에 투자했다고 하면 B기업의 경우 유동자산은 100억 그대로이지만 비유동 자산이 200억 원에서 250억 원으로 증대된다. 동시에 오른쪽 사내 유보금이라 할 수 있는 자본잉여금과 이익잉여금의 합이 150억 원에서 200억 원으로 증가하게 된다.

즉 대차대조표상 전기 순이익 50억 원을 현금으로 보유하던 설비에 투자를 하던 자산에 있어서만 변동이 있을 뿐 사내 유보금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른쪽 자본 계정에서 사내 유보금이라 할 수 있는 자본잉여금과 이익잉여금에서는 동일하게 150억 원에서 200억 원으로 증대하는 착시 효과를 내게 된다.

결국, 재무상태표라 할 수 있는 대차대조표상 사내유보금의 증대는 기업이 현금(유동 자산)으로 보유를 하든 아니면 설비라는 비유동 자산에 투자를 하던 동일하게 사내 유보금이 증대되어 가뜩이나 골치 아픈 노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착시 효과를 내게 된다.

 

[그림 2] 대차대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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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말 3: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 노동자에게 독인가? 약 인가?

 

나는 맑스와 엥겔스가 좋다.

내가 맑스와 엥겔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고전 경제학의 대빵인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한계를 뛰어넘어 노동자의 새로운 세상 즉 노동해방으로 가기 위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 만들어 내며, 그 가치의 크기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넘어 자본가계급의 전취하는 이윤의 원천이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임을 확인시키며, 나아가 생산과정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자본가계급이 전취하는 구조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 즉 노동 해방된 세상으로 가기 위한 경로를 알려주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갇혀 있던 판도라의 상자의 뚜껑을 열었기 때문이다.

 

에구, 또 글이 다른 길로 빠졌다. 어쨌든 내가 맑스와 엥겔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렇다 치고, 이 글의 주제인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이 노동자에게 독이 될 건지 아니면 약이 될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을 통해 그 돈을 누가 먹자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 투쟁 등 노동자 투쟁에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어찌 보면 내가 안 해도 누가 해 주면 좋을 듯한 투쟁인 것 같다. 속된 표현으로 무임승차 하듯이 내가 하긴 뭐 하지만 누구라도 해 주면 좋을 투쟁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 정도로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노동자에게 약이 되면 되었지 독이 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조금 자세히 살펴볼 것이 있다.

 

우선 [그림 1]을 다시 자세히 보자.

그림 오른쪽 중간쯤에 사내 유보금이라고 있고 이 사내 유보금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 중 일부 즉 이윤이자 그리고 지대를 빼고 남은 나머지 재투자를 표시하고 있다. 물론 같은 말이지만 [그림 2] 대차대조표상으로도 사내 유보금을 확인할 수가 있다. 사내 유보금은 바로 [그림 1]에 나와 있듯이 생산 과정과 유통 과정을 거쳐 실현된 잉여가치의 분배 과정에서 나타난 재투자를 의미한다.

 

[그림 1]에서 확인되었듯이 분배 과정에 있는 재투자비용을 환수하자는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우선 첫 번째로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맑스와 엥겔스가 열었던 판도라의 상자의 뚜껑을 애써 닫는 것을 요구하는 투쟁이다.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원초적 비밀인 생산과정에서 생산되고 있는 잉여가치와 그러한 잉여가치를 자본가계급이 전취하는 구조를 대신하여 분배과정에서의 재투자사내유보금의 환수 투쟁을 주장하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에 대한 투쟁 그리고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전취하는 구조를 깨는 투쟁은 맑스와 엥겔스가 열어재꼈던 판도라의 상자 안에 들어있던 노동자계급의 희망이다. 노동자계급의 잉여가치를 상대로 한 즉, 자본의 축적 과정의 고도화를 상대로 한 투쟁은 임금인상과 노동시간의 단축 그리고 적정한 노동 강도 유지 투쟁이다. 그리고 노동자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를 일방적으로 전취하는 자본가계급의 사회를 상대로 한 노동해방 투쟁은 노동자의 다양한 투쟁 영역에서 전개되어야 할 노동해방 투쟁인 셈이다.

 

이러한 생산과정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집적 과정에 대한 공격이 아닌 분배 과정에서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노동자계급에게 맑스와 엥겔스가 애써 열어재낀 판도라의 상자의 뚜껑을 다시금 닫을 것을 요구하는 꼴이 된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하게 뚜껑만 닫는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자계급에게 노동해방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제한하려는 기회주의적 작태 그 자체일 뿐이다.

 

두 번째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말도 안 되는 행위이다.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환수된 사내 유보금으로 비정규직 투쟁 등에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생산현장에서 안정적인 잉여가치 생산을 전제로 분배 과정에서 나타난 재투자, 사내유보금을 환수하여 비정규 투쟁 등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은 비정규 제도 자체를 해소하고 현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정규 제도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흔히들 알고 있듯이 비정규 제도는 생산 과정에서 자본가가 취하는 잉여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 즉 노동시장의 유연화 공세의 일환으로 제기된 제도이다. 이러한 비정규 제도는 성과급이나 능력급제 중심의 ① 임금의 유연화와 변형 근로시간제 등 ② 노동시간의 유연화 그리고 파견 노동자를 비롯해서 직・간접으로 고용하는 비정규직 등 ③ 고용형태의 유연화와 더불어 진행되는 노동시장유연화의 대표적 제도이다.

환수된 사내 유보금으로 비정규직 투쟁을 위해 사용한다는 주장은 결국 [그림 1]에서 확인되듯이 생산현장에서의 자본축적의 고도화를 위해 노동시장의 유연화의 일환으로 제기된 비정규 제도를 그냥 그대로 둔 채 비정규직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로 분배되는 재투자비용사내유보금을 환수하여 다시금 비정규직 철폐 투쟁에 사용하겠다는 주장인 셈이다.

 

결국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꼴인 셈이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이 글을 쓰는 필자조차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그림을 이렇게 장황하게 그리고 있는 이유는 바로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이 도저히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국가에 대해 무지하거나 또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자기 고집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오류의 극치라는 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맑스와 엥겔스가 연 판도라의 상자에는 노동자의 세상, 노동 해방된 세상을 가기 위해서는 투쟁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 투쟁의 무기는 바로 노동자계급의 정당 그리고 노동자의 국가권력임을 피력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의 국가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국가이자,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과정에 대해 국가가 각종 지배 도구(예를 들면 하다못해 동네 반상회조차도)를 통해 보장하고 보장을 넘어 확대 재생산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 국가가 가지고 있는 계급성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더구나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의 지지자인 한신대 김성구 교수조차 2015년 11월 변혁당 기관지 ≪변혁정치≫ 제13호에 사회화와 사내유보금 환수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재벌기업의 사회화는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바꾸는 가장 높은 수준의 사회화라 한다면, 사내유보금 환수는 재벌의 소유지배 구조 하에서 재벌기업이 획득한 이윤의 일부에 대한 사회화를 요구하는 분배와 통제 차원의 문제다. 재벌기업의 사회화가 이루어진다면, 자본과 이윤 전체에 대한 처분권을 국가와 사회가 행사할 것이므로 사내유보금 환수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재벌기업의 사회화가 아니라 사내유보금 환수가 제기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조직적, 이데올로기적 상태와 노・자 간 계급관계에 비추어 볼 때 현 정세 하 재벌기업의 사회화 요구가 관철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강조는 인용자)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조직적, 이데올로기적 상태와 노・자 간의 계급 관계에 비추어 볼 때 현 정세 하 재벌 기업의 사회와 요구가 관철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김성구 교수의 말은 한편으로는 사내유보금 환수 투쟁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했던 말이지만 그 말 속에는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자 간의 계급적 투쟁의 장에서 한국 자본주의 국가가 어느 포지션인가를 은연중에 밝히고 있다.

 

결국 자본가계급의 국가이자, 폭력적 지배 도구를 이용해서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생산현장에서 벌어지는 자본 축적의 고도화를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시는 한국의 국가 권력에게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환수의 주체가 되어 줄 것과 함께 환수된 사내 유보금을 비정규직을 위한 투쟁 자금으로 사용하게끔 할 것을 친절하게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정도면 한국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무지를 넘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마구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을 바라보듯이 자기 최면에 걸려 한국 자본주의 국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는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이 내가 좋아하는 맑스와 엥겔스가 열었던 판도라의 상자 안에 들어있는 노동해방을 가기 위한 경로 즉, 생산과정에서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자본가계급이 전취하는 구조를 노동자 국가권력을 통해 파괴하는 투쟁 즉 노동자의 열망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 앞에서 뜬금없이 썼던 글을 다시 뜬금없이 또 써 보자.

 

정부로부터 양보를 위해 노동자 운동의 열망을 제한하려는 의도는 바로 기회주의일 뿐이다.

 

이 말은 내가 갑자기 생각해서 쓴 말이 아니라. 1800년대 후반 독일의 페르디난트 라살이라는 독일 국가 사회주의자를 상대로 내가 좋아하는 맑스와 엥겔스가 사용한 말이다. 기회주의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노동자 운동의 열망노동해방을 위한 열망을 정부로부터의 양보를 위해 제한하는 각종 행위를 칭하는 말이다. 지금의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이 바로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다시 한신대의 김성구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운동 정세에 합당한 요구라는 건 전투적이든(좌파), 개량주의적이든(우파)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해고와 임금 피크제 도입을 위한 노동개악과 노동탄압 저지, 공적 연금 개악 저지와 사회보장 확대, 비정규직 개선과 실업 대책 등 당면한 생존권 투쟁이 그것이다.

 

세계적인 장기불황과 고용의 위기 속에서 막대한 사내유보금을 축적해온 독점재벌이 노동개악과 연금개악을 통한 일층의 이윤증대로써 이 불황을 극복하겠다고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상황이다. 이럴진대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어떻게 사내유보금 문제를 피해갈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사내유보금 문제를 제기함으로써만 비로소 노동자들이 생존권 투쟁 속에서 독점재벌의 이윤과 독점재벌 자체의 사회화라는 보다 높은 요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김성구 교수는 노동자의 먹고 사는 투쟁 즉 생존권 투쟁이 합당한 요구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글에서 김성구 교수는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을 계기로 노동자 생존권 투쟁독점재벌의 이윤과 독점재벌 자체의 사회화라는 보다 높은 요구 투쟁으로 나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김성구 교수는 위의 글에서 운동 정세에 합당한 요구투쟁은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이라 규정을 하고, 같은 글 밑에서는 이를 독점재벌의 이윤이나 독점재벌 그 자체를 사회화하는 투쟁보다 낮은 투쟁이라 규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점자본의 이윤이란 독점이윤을 칭하는 것이며 이러한 독점이윤이나 또는 독점자본의 사회화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하튼 자본주의 체제 내 전개되는 개량적 투쟁이 아닌가? 이와는 달리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은 노・자 간의 계급적 대립이 가장 첨예하며 자본의 집적이라는 축적 과정이 형성되는 생산 과정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본원적 비밀의 공간이 아니던가?

따라서 김성구 교수나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은 독점이윤이나 독점자본의 사회화 투쟁이, 자본의 집적과정을 공격하는 노동자 생존권 투쟁보다 왜 더 높은 수위의 요구적 투쟁인지를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판단으로는 재벌의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의 주장은, 노동해방이라는 열망을 저버리고 정부의 양보를 요구하는 아주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주의적 모습은 나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생산현장, 노동현장에서 박 터지게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노/사/과/연>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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